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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답

평온한 생활. 하나씩 하나씩 일반인과 같은 삶을 회복해 간다. 외곽 위주였지만 우리는 가끔씩 밤에 외출을 했다. 섬의 주민들도 우리를 보고 놀라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들도 학습을 하는 것이다. 두 액신과 같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에.

다정하게도 기하는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함께해 주었다.

운영 시간이 끝난 텅 빈 마트 안을 거닐며 다 먹지도 못할 식료품을 잔뜩 사들이고, 폐점 시간 뒤에 들어간 백화점에서 양손으로도 다 못 들 옷들을 선물했다.

상영 시간을 늘린 영화관에서 심야에 영화를 보았을 때는 붙잡은 손이 너무 뜨거워서 영화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가슴은 영화를 보는 내내 고동치고 있었고 기분은 하늘을 나는 듯 부풀었다. 스태프 롤이 올라가며 우리는 여타 다른 커플들처럼 입을 맞췄다.

하얗고 푸른 불빛이 가득한 정원의 야경은 낮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꿈을 꾸는 것 같아, 그렇게 말을 꺼내면 정말 이것들이 전부 꿈이 되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걸로 대신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이런 것을 갈구하고 그리워했는지 행복해할수록 더 사무쳤다.

기다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던 기하의 말을 빌어 속으로 용서를 청하며 나는 하루하루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형제로서의 삶을 연장하고 있었다.

연구소의 점심시간에 오랜만에 김태영과 거리에 나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멀티플렉스 건물 안에 들어섰을 때 한 무리의 학생들이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 발걸음을 멈췄다.

“음? 왜 그래?”

그들이 입은 것은 내가 중학교 때 입었던 사립 학교의 교복이었다. 내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자 곁에 다가온 김태영이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마 전에 개설했어. 이제 갈수록 인구가 늘어날 테니까. 새로 태어나는 애들도 있고 점차 몇 개 더 세워질 거야.”

“이 안에서만 있으면 안 돼. 쟤들은 여기서만 살게 되면…….”

“알아. 그래서 일정 기간 동안은 본국으로 돌아가던지 유학하게 될 거야.”

저 애들은 나처럼 날개가 뜯긴 채로 살아선 안 돼. 피를 이었다는 죄를 짊어져선 안 돼.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여자아이는 내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전이었다면 내 쪽에서 먼저 피해 버렸을 텐데 오늘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마주 보는 아이의 동공이 커졌다. 얼굴에 홍조가 오르고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을 했다.

“죄송합니다!”

한 학생이 얼른 사이에 끼어들어 그 아이의 시선을 막았다. 죄송해요! 꾸벅꾸벅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인사하더니 그의 팔을 끌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어리다 어려~ 좋을 때네.”

태영이 흐뭇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쳐 환기시켰다. 나는 그 뒤에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저렇게 찬란할 때를 빼앗겨 버린 내 동생의 어린 모습이 조금 전 아이가 떠난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형님, 왜 그러세요?’

앞으로 다가온 아이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얽혔다. 기하는 다 나보다 작고 여렸지만 유독 손가락만은 나보다 길고 보기 좋게 뼈대가 튀어 나와 남자다웠다. 앞으로 나와 비교도 안 되게 크게 자랄 거라는 걸 암시했다. 그래도 그때엔 하얗고 가느다란 동생을 무조건 내가 지켜 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아이가 내 뒤에 서길 바랐다. 정작 그 아이는 매번 내 앞에 서서 내 손을 잡고 이끌었는데.

‘욕심부리는 거지. 그렇지?’

지금도 너와 헤어지기 싫어하며 욕심부리고 집착하면서 끝내 놓질 못하고 있다. 이제 그만 과거의 망령과는 헤어져 지금을 붙잡아야 하는데.

‘누구나 다 그렇지 않나요?’

내 말을 듣던 기하는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했다.

더 높은 것을 바라고, 더 나은 걸 갈구하고, 헤어질 것에 미련을 가지고. 놓아 버릴 것을 그리워하고. 안 그런 사람 따위는 없다고.

내 손을 붙잡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며 아이는 관대하게 웃었다.

‘제가 뭘 욕심내는지 말해 버리면 형님은 아마 깜짝 놀라실걸요.’

‘너야말로.’

‘제가 이길걸요? 내기해도 좋아요.’

승리자의 여유로운 목소리로 기하는 의기양양해했다. 한낮의 태양의 빛에 감싸인 아이가 눈부셔서 나는 그러마 하고 수긍했다.

내기의 승자는 끝내 나오지 않았었다. 그때의 우리는 욕심내는 것을 서로에게만은 결코 얘기할 수 없었으니까.

“너랑 오니까 진짜 좋네. 바로 좋은 자리로 내주고 서비스도 주고, 야 여긴 너랑만 와야겠다.”

태영은 줄줄이 나오는 서비스에 입을 못 다물었다. 아직 업무 시간인데도 술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고 술까지 주문해 버린다. 나는 묵묵하게 물로만 입 안을 축였다.

“아직도 아까 걔들 생각해?”

평소보다 말이 없는 것에 태영이 물어 왔다.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애매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왜 새로 시작을 했는데도 실패했을까?”

“응?”

전생의 나는 이 핏줄 전체에 저주를 걸고 권능을 넘기면서까지 그 아이에게 삶을 되찾아주려 했다. 그런 죄를 지어 놓고도 결과적으로 내가 또 어린 기하의 인생을 빼앗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기막힌 굴레가 또 있을까. 태영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뒤적거리며 무심하게 툭 던졌다.

“글쎄, 이건 너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 기분 나빠도 좀 참고.”

“응……?”

“내가 볼 땐 말이야. 너는 실패했지만 가주님에겐 완전한 성공이잖아?”

“뭐?”

“네 실패 덕분에 가주님은 성공한 거라고. 그러니 가주님을 위해 네 계획이 희생한 거라고 생각하면 좀 납득되지 않을까 해서. 세상에 상충하는 두 계획이 전부 성공할 순 없는 거잖아. 너는 이곳을 도망가고 싶어 했고, 가주님은 너를 붙잡아 두는 게 목표였으니 둘 중 하나는 실패한 게 당연하지.”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면서 너무나도 위로하고 싶은 얼굴이라 그만 웃음이 나왔다.

“그래. 네 말이 맞네.”

“고마우면 오늘 네가 사.”

“알았어.”

“진짜? 아싸! 그럼 술 더 시켜야지.”

이 기회에 먹어 보고 싶은 거 다 시켜 버릴 거라고 으름장을 놓더니 손을 들어 서버를 부른다. 나는 계속해서 김태영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너의 성공을 위한 나의 실패. 진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던진 말이 의외로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저렇게 단순하기 그지없는 해석이 그 어떤 말보다도 위로가 되어 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식기를 움직였다.

* * *

날씨는 점점 더 추워졌다.

오늘에야말로 기필코 술을 먹여 봐야지. 기하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마트에 가서 종류별로 술을 쓸어 담고 집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봉지에 가득 담긴 술을 보고 내 뺨에 키스하던 기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다 뭐예요?”

“뭐긴. 술이지. 너랑 마시려고 사왔어.”

한 병 꺼내서 흔들었다. 본격적으로 아이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군요.”

정말 내키지 않아 하는 얼굴이다. 예전에 한 잔 정도 마시는 건 본 것 같은데 나와 마시는 건 싫다는 건가? 실망한 티를 감추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전에는 술친구가 되어 준다더니.”

자기가 그런 말을 했었나 되짚어 보더니 떠올리고 한숨을 내쉰다.

“그건 형님께서 혼자서 그렇게 마시고 계시니까 한 말이었죠.”

“거짓말이었어?”

그가 평소 같지 않게 뒤로 빼고 있듯이 나도 평소와 달리 질척거리는 중이었다. 결국 기하가 손을 들었다.

“……조금이라면요. 안주를 준비할게요.”

“혹시 나랑 술 마시기 싫어?”

“예. 싫습니다.”

내가 뭘 같이 하자고 했을 때 이렇게 즉답으로 거절한 적이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했다. 고작 술 같이 마시자고 하는 게 그만큼 싫을 일인가?

“미안, 싫을 줄은 몰랐어. 그럼 강요 안 할게. 그냥 취한 모습 같은 건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해서 그랬어.”

아쉬워하는 게 티가 났는지 붉은 눈이 물끄러미 내 기색을 살폈다. 꺼냈던 술병들을 다시 봉지에 담고 치우는 걸 보며 망설이다가 입을 연다.

“그럼…… 제 요구 두 가지 중 한 가지만 해 주시면 마시겠습니다.”

“뭔데?”

“화내거나 실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요.”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토하거나 했을 때 실망하지 않기? 취해서 추태 부려도 용서하기? 장식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기하의 뒤에서 그렇게 물었다가 그가 꺼내 든 것에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써야 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사용감 없이 반짝거리는 족쇄였다. 나는 무심결에 뒤로 물러났다. 그것을 지켜보는 기하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뻣뻣하게 굳은 등줄기가 욱신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저와 형님 발목에 채우고 마시는 게 첫 번째 요구고.”

“…….”

“그리고 두 번째 요구는 형님이 제 품에 안긴 채로 마시는 겁니다. 취해서도 형님께서 제 곁에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도록요.”

왜 기하가 술을 경계한 건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저 아이는 아직 나를 믿지 못한다. 아무리 사이가 회복된 것처럼 보였어도 믿음만큼은 회복되지 못했다. 그렇게 쉽게 아물 수 있는 게 아니었음을 간과했다. 모래 위에 세운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멍청하게. 내가 도망간 줄 알고 그 짧은 시간 만에 패닉에 빠진 걸 보고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내 상처보다 네 마음의 상처부터 치유했었어야 하는 것을.

“……이러실까 봐 마시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말을 잃은 것을 보며 기하가 씁쓸하게 웃었다. 답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답을 들은 듯이 다시 장식장에 족쇄를 집어넣으려 했다. 나는 차가운 병의 표면을 느끼며 불쑥 내뱉었다.

“둘 다 하자.”

“…….”

“둘 다 해. 족쇄도 채우고 네 품에서 마실게. 재밌겠네. 너는 모르겠지만 술자리에서 술 게임이라는 걸 하거든. 보통 사람들은.”

“형님.”

“내기 같은 걸 해서 진 사람이 옷을 벗기도 하고 왕 게임이라는 것도 있어. 왕이 된 사람이 별 해괴한 거 다 시켜도 어쩔 수 없는 그런 뭐……. 아무튼 이거보다 심하고 이상한 거 다 한다고. 이런 거쯤은 별거 아냐. 누군가는 벌써 하고 있을걸.”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믿음이 없다면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지. 차라리 잘됐다고 뇌까렸다. 한 번쯤은 터트려야 할 고름이었어.

굳어 있는 기하의 곁에 다가가 족쇄를 집어 들었다. 현명하게도 이번 것은 생체 인식이 아닌 구식의 번호 잠금장치다. 어지간히도 튼튼한 걸 샀다고 농을 걸자 그제야 기하의 미간이 스르륵 풀렸다. 그래도 경계심은 가라앉지 않는지 뚫어져라 내 표정을 뜯어보고 있었다. 가슴 부근이 따끔거렸다. 내가 친밀하게 굴 때마다 너는 계속 저울질을 하고 있었겠구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한 눈속임인지 혹은 정말 안주하고 있는 건지. 퍽 쓰라렸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안일하게 군 것의 업보가 이렇게 돌아왔다.

슬픔에 잠겨 그를 꼭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다시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예전에도 몇 번이고 흘렸던, 그리고 어김없이 거짓말이 되고 말았던 맹세를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 했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의심을 부채질할 것이기에 안주를 준비하는 그의 손만 바라보았다.

* * *

“한 잔씩.”

챙, 유리잔이 부딪쳐 맑은 소리가 났다. 건배를 하고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한 번에 마셔 버리는 나와 반대로 기하는 술도 차를 즐기듯 천천히 음미했다. 꽤 괜찮은 술이었다. 만족스러워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감탄했다. 잘 고른 거 같네.

“너는 평소에 몇 잔까지 마셔 봤어?”

“음…… 한두 잔 정도 마시고 말죠.”

“그럼 지금부터 벌써 기록 갱신이네.”

의외로 기하의 품에 안겨 술을 마시는 것도 꽤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좋았다. 등은 따뜻하고 포근한데다 술은 달고 안주는 맛있다.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기하의 가슴에 기댔다. 완전히 그의 품 안에 들어간 모양새로 들고 있던 잔을 연거푸 그의 잔에 부딪쳤다. 족쇄가 채워질 때의 서늘함은 어느새 날아가고 없었다.

“난 한 병 이상은 마시는 거 같아. 취해 본 적은 없는데 두 병쯤은 거뜬하지 않을까.”

“취하신 적이 없다고요? 거짓말 진짜 잘하시네요. 벌써 취하신 건 아니죠?”

기하가 내 귓가에 대고 한 말에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츠렸다. 솜털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술 냄새가 숨결에 배어 나와 달콤했다.

“난 술 마시고 필름 끊겨 본 적 없는데?”

“취했다는 것의 정의를 다시 세우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기준이에요.”

나보다 또박또박한 발음. 나는 얼른 그의 빈 잔을 채웠다. 그러고는 빨리 마시라고 종용했다. 카나페를 들이밀자 망설이다 얌전하게 받아먹는다. 술기운 덕인지 기하도 처음에 싫어했던 것에 비하면 꽤 누그러져 보였다. 술잔을 들지 않은 남은 손은 고집스럽게 내 허리를 감고 있었다.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취할 것도 못 취하겠다. 타박하며 슬쩍 그의 잔에 술을 더 추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앞에 빈병이 한 개 생겼다.

느긋하게 풀어져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대부분은 내가 떠들고 그는 듣는 역이었다. 연구소에 관한 일이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 최근에는 CCTV로 보고 있을 걸 알면서도 내가 먼저 일과를 주절주절 푸는 편이었다. 들었던 얘기를 또 듣는 건데도 그는 성실히 내가 떠드는 것을 경청했다.

그러다 가끔씩 술에 젖은 입술이 목덜미에 내려왔다. 살짝 이빨을 세우기도 했다. 문신을 새긴 근처가 차례대로 물렸다. 이제는 빈병이 두 개째.

온몸을 거의 맡기다시피 기하에게 기대고 숨을 훅 내뱉었다. 공기가 뜨거웠다. 푹 풀어져 여유롭게 찰랑거리는 잔을 흔들었다.

“우리 진실 게임할까?”

“진실 게임요?”

“응. 아까 말했던 술 게임 중 하난데 무조건 진실만 말하는 거야. 묻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은 술 한 잔에 질문 하나씩 할 수 있는 거지. 묻고 싶으면 마시기. 쉽지?”

진실 게임을 하자면서 룰부터 거짓말을 했다. 돌아가며 하는 거라든가 진실을 말하기 싫으면 술을 마시는 규칙이 더 있다는 걸 언급하지 않고. 술이야 내가 훨씬 셀 거라는 자만심에 기안한 속임수였다. 기하는 망설이며 눈동자만 굴렸다. 아무래도 나도 진실만 말해야 하는 상황인 게 달콤하게 들렸으리라. 어차피 기하가 했던 거짓말의 대부분은 낱낱이 까발려졌으니까. 결국 그는 형님도 진실만 말하는 거예요, 하면서 동의해 왔다. 나는 실수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신나서 들고 있던 잔을 먼저 들이켰다.

“나부터 할게. 음…… 너도 솔직히 집안 것들을 완전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하…… 맞아요. 진짜 재수 없어요.”

그가 웃어서 안겨 있던 내 몸도 따라 흔들렸다. 처음은 이렇게 쉽게 가는 거지. 머리를 굴리며 잔을 채웠다. 한 번 더 해 볼까? 싶던 때에 기하가 잔을 가져가 들이켰다. 무얼 물어 오려나 조금 긴장됐다.

“형님께선 여기서 사는 게 행복하신가요?”

“응…… 행복해.”

즉답이 나올 질문이라서 다행이었다. 나는 행복해졌다. 이 애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기하는 ‘다행이에요…….’ 속삭이며 내 귓가에 입술을 눌렀다. 아까의 불안과 서운함이 녹는 것이 느껴졌다. 탐색하는 질문을 몇 개 더 주고받았다. 그리고 내 차례였다.

“그럼 흠…… CCTV를 내가 모르는 곳에 더 설치한 적 있어?”

아, 너무 빨리 요점을 말했나. 슬쩍 기하의 눈치를 봤지만 다행히 웃는 낯은 그대로였다.

“아니요. 형님께서 허락하신 게 다예요. 더 설치하고 싶어 죽겠지만요.”

“그럼 도청기나 다른 건?”

성급하게 덧붙인 말에 기하는 채워진 잔을 입술 앞으로 가져왔다.

“한 잔에 질문 하나, 아니었나요?”

융통성 없는 녀석. 나는 투덜거리며 술을 털어 넣었다. 주량을 넘어선 상태라 눈앞이 좀 어질어질했다. 그만큼 기하의 품속에 늘어지고 있었다. 대충 한 두세 잔 더 마시고 자리를 파해야지…… 다짐하는 눈앞으로 기하가 술을 마시는 게 보였다.

“그거 외에 다른 건 설치 안 했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 형님께선 도망칠 궁리를 하고 계신가요?”

“아니, 이제 도망은 안 쳐. 안 칠 거야. 진짜야.”

물어 온 게 고마운 질문이다. 이렇게라도 그에게 믿음을 심어 줬으면 좋겠다. 기하의 손에 들린 빈 잔을 가져오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는 내 손을 멀리 떨어뜨리고 잔을 채워 자신이 마셨다.

“갑자기 저와 술을 마시자고 한 이유는요?”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지만 추궁의 영역으로 넘어섰다. 웃음이 나왔다. 진실 게임을 하자고 판 깔아 둔 건 나였지만 네가 더 잘 써먹잖아.

“정말 그냥 네가 취한 거 보고 싶어서……. 흐트러진 꼴을 본 적이 없어서 그랬다 왜……. 그런데 너 왜애 이렇게 안 취하는 거야? 너 주량이 두 잔 맞아?”

“자꾸 룰 어기시면 곤란한데.”

뭐가 이렇게 칼같아. 불평하며 그가 건네준 술을 털어 넣었다. 알코올 냄새에 어질어질했다. 나 좀 취했나……? 알딸딸해하는 내 몸을 고쳐 안으며 기하가 더 이상 마시지 말라고 속삭였다. 취해 버리면 제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서 자기는 연거푸 두 잔이나 들이켰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씩 머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완전 밑 빠진 독이었다.

“아직도 저를 원망하고 계세요? 만약 누군가가 형님에게 기회를 준다면 저를 떠나고 싶습니까?”

“그럴 리가……. 그랬으면 지금 이렇게 같이 안 살았지. 그러는 너야말로 날 원망한 적 있어? 늘 원망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던 거 아냐?”

기하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혀지는 걸 보고 알았다며 술잔 내놓으라고 툴툴거렸다. 그는 잔을 쥐여 주는 대신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았다.

“원망한 적 없어요. 한 번도. 그런데 너무 예뻐서……. 너무 예뻐서 진심으로 죽이려고 한 적은 있었습니다.”

“거짓말하면 안 된다니까.”

거짓말 아닌데. 진실만을 얘기하기로 했잖아요. 그가 평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반쯤 맛이 간 머리로 ‘아닌데…… 아닌데…….’ 소리만 연발하고 있었다.

“질문 하나 남았어요. 누군가가 종용한다면 저를 떠나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이제 안 그래. 어차피 네가 떠나지도 못하게 다 막아 놨으면서. 선택지를 다 없애 놓고 묻는 게 어디 있어.”

섬이니 육로 따위야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고, 해로도 항로도 다 통제해 놓고 뭘 묻는 거야. 심지어 내 날개도 꺾어 버렸잖아. 주절주절 불만을 늘어놓았다. 믿으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물론 내가 몇 번이나 배신하긴 했지만 아까부터 자꾸 저런 질문만 하는 게 빈정 상해서. 흥이 깨져 이제 그만 마시자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허리를 감은 팔을 풀지 않아 그대로 그의 품에 고꾸라졌다.

“어지러워. 그만 마셔야겠어. 놔 봐…….”

흐릿한 눈앞에 빈병 세 개가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미쳤네. 언제 이렇게 많이 마셨지. 놓으라는 말에 오히려 허리를 안은 힘이 강해졌다. 손마디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불거진다. 좀 세게 깨물렸다. 나는 항의하며 그의 팔을 풀어내려고 했다. 기하가 내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쪽, 쪽, 드러난 어깨에 젖은 입술을 누른다. 알코올의 감촉이 서늘하게 와 닿았다.

내 몸을 돌려 안은 그와 입술이 겹쳤다. 술 냄새가 나는 혀가 내 혀를 빨아올렸다. 입 안도 평소보다 뜨끈뜨끈하게 열이 올라 있었다. 뭔 놈의 주정마저 이렇게 질척질척해. 기하가 잠시 술을 따르는 틈을 타 재빨리 몸을 비틀어 벗어났다.

“얼음, 얼음을 좀 가져올게. 술이 좀 깨야…….”

다급히 몸을 일으키는 순간 휙 앞으로 넘어갔다. 어……? 발밑으로 뚝 떨어지는 시야가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한 바퀴 돌았다. 넘어졌는데도 아프지 않았다. 나를 그대로 품에 받아 낸 기하가 족쇄를 더 무자비하게 끌어당겼다.

“뭐 하는…….”

다칠 뻔했다는, 의미 없는 항의는 입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목이 젖히고 깊게 입술이 맞물렸다. 괴로워 고개를 흔들어 벗어나려고 기를 썼다. 그럴수록 목덜미를 움켜쥔 아귀의 힘이 강해졌다. 몇 번 그렇게 뻐기다 결국 벋장대던 힘을 풀었다. 반항이 멈추자 입술의 움직임이 부드러워졌다. 흐윽……. 혀를 맞댄 사이에서 신음이 흘렀다. 느른하게 서로의 입술을 빨았다. 술 냄새 때문에 지독히도 어지러웠다.

기하의 긴 손가락은 내 셔츠의 앞 단추를 차근차근 풀어내고 있었다.

“너…… 제정신이지?”

손을 붙잡고 헐떡거리며 물었다. 기하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전혀 취기가 느껴지지 않는 정결한 얼굴에서 눈동자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못해도 내 배는 마셨을 텐데 그럴 리가. 술도 마시지 않은 나에게 답을 들을 자격은 없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저었다. 몸도 못 가누는 내 꼴을 조용히 보던 기하가 다시 술을 따랐다. 그리고 보란 듯이 눈앞에서 들이켰다.

“질문입니다.”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

“저를 사랑하세요?”

술기운이 확 날아갔다. 아니 술기운은 아까 그의 품에 넘어졌을 때 이미 날아갔었다. 몸만이 물먹어 가라앉고 있을 뿐이었다. 속임수를 깔아 뒀던 것을 잊고 반사적으로 눈앞의 잔을 집으려고 했지만 한발 늦었다. 닿지 않을 곳으로 술잔을 들어 올린 기하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자 어서요. 대답하셔야죠.”

“술잔…… 줘. 마실래……. 마시면 무효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처음에 그런 말씀하신 적 없으면서.”

웃는 낯에 비난은 섞여 있지 않았으나 엄한 목소리였다.

“게임에서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 사람에겐, 어떤 벌을 내리죠? 승자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되나?”

그리고 보상을 받듯이 내 앞섶을 벌리고 드러난 피부에 입술을 내렸다. 억지 부리지 말라고 작은 목소리로 항변했지만 사실 억지 부리고 있는 건 내 쪽인 걸 알고 있었다. 손목 때리기……. 나는 그 와중에 웅얼거렸다. 뭐라고요? 기하가 목소리를 들으려 쇄골을 빨던 것을 멈추고 내 입술에 귀를 가져다 댔다.

“벌은 손목을 때리는 거라고. 나쁜 놈아…….”

아까 술이 깬 게 아니었나 보다. 뱉은 본인이 황당해져 눈을 끔벅거렸다. 대체 이게 어느 뇌세포에서 튀어 나온 말이야. 나는 울상을 지었고 기하는 몸을 숙이며 큭큭거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포박된 상태로 그가 웃음을 그칠 때까지 멍하니 같이 흔들렸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기하가 다시 내 얼굴을 움켜쥐고 입술을 놀렸다.

“기현아.”

“…….”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그것보다 그의 하대에 동공이 커졌다. 그는 목소리보다도 더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현아.”

쪽, 눈 위에 가볍게 키스한 그는 다시 내 이름을 반복해 불렀다. 이기현, 부르고 키스하고, 기현아, 부르고 다시 키스하고. 헝클어진 이마 위의 머리카락을 찬찬히 넘겨 주고 마주 보았다. 아, 진짜 보석 같은 눈이다. 세심하게 세공해 굴절률 높은 보석이 찬연하게 빛을 뿜어내는 듯이……. 이번에는 좀 더 깊게. 파고드는 혀에 눈을 감았다.

“사랑해…….”

내 이름과 사랑한다는 소리를 섞어서 불리던 것이 언제였는지,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저렇게 불렸을 때에 일어나곤 했던 일들을 되새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쪽, 쪽, 가볍게 입술이 얼굴 곳곳을 누르며 사랑한다는 말을 묻혔다. 고집스럽게 뜨지 않는 내 눈꺼풀 위에 입술이 오래 머무르다 떨어졌다.

“너는?”

채근하는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래도 언어에 힘이 실려 있었다. 진음이 아니었는데도 말을 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뜨고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화끈해졌다.

“나도…….”

뒷말을 흐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남자의 귀가 이번에도 내 입술로 내려왔다. 나는 그가 차근차근 가이드해 준 대로 그가 원하는 말을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너를…….”

* * *

사랑하는 사람이 해 주는 사랑한다는 말만큼 세상에 달콤한 게 있을까.

그것도 그 많은 시간 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서 들었던 것이라면.

얼굴을 가리는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며 손가락 사이사이에, 마디에,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입술을 겹치지 않는 동안에 계속해서 그 말을 하도록 졸랐다. 듣지 못했던 세월을 보상이라도 받으려 쇄골에 입 맞추며 애걸했다. 쾌감에 흐느끼느라 그가 말을 잇지 못하면 다시금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멈췄다.

“사랑해…….”

그가 울듯이 토해 내는 사랑한다는 말에 더 할 수 없을 만큼 발정했다. 형의 셔츠를 끌어 올리고 성급하게 그의 바지춤을 끌렀다. 그 먼저 완전히 벗겨 놓고 위에 올라탔다. 착하게도 이기현은 먼저 내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가져왔다. 허락했다는 것을, 허락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끝 간 데 없이 흥분이 치솟았다.

“흐윽……. 잠깐만…… 잠깐…….”

술기운이 제대로 잠식한 건지, 이기현은 머리조차 못 가눴다. 온몸에 키스하며 내려가는 내 얼굴을 붙잡으려다 미끄러진다. 유두를 강하게 머금었다. 돌출된 살덩이는 오랜 시간 방치된 탓에 연한 제 색을 되찾아 있었다. 남은 쪽 유두를 손으로 잡아당기며 유륜을 넓게 빨았다. 그가 허리를 튕겼다. 작은 자극에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건 내 쪽도 마찬가지였다. 나야 이미 아까부터 미칠 것 같은 상태였고. 너무 발기해서 아랫도리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 그의 몸에 내 족적을 새기며 내려갔다. 전과 달리 여유 부리지 못해 상처에 가까운 순흔들이 주렁주렁 달려 갔다. 오랜만에 혀에 와 닿는 감촉은 황홀감을 선사했다. 표면이 달았다. 형은 이가 스칠 때마다 흠칫흠칫 움츠러들면서도 더 물어 달라는 듯 얼굴을 당겼다.

내 발목에서 족쇄를 풀어내고 천장에 달린 걸이에 채웠다. 족쇄를 찬 그의 다리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취한 와중에도 눈에 공포가 서린다. 아마 본가에서 있었던 일을 반추하고 있을 그의 얼굴을 쥐고 다시 부드럽게 입술을 섞었다. 괜찮아……. 괜찮아, 기현아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만 걸어 두는 거야, 잠깐만. 훈육의 효과가 남아 있는 몸은 내가 하대하면 온순해졌다. 어르고 달래며 그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밀어 넣었다.

“아…… 아……!”

치골에 가지런히 나 있는 옅은 체모부터 혀를 넓게 내밀어 길게 핥아 내렸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려는 그의 자유로운 다리 쪽을 내리눌렀다. 천장에 들린 반대편 다리에서 흔들리는 사슬 소리가 요란했다.

“하지 마…….”

울음 섞인 애원을 무시하고 반쯤 선 그의 것을 부드럽게 삼켰다. 아……. 그가 자극에 허리를 꺾어 넘어갔다. 움켜쥔 다리가 파르르 떨린다. 실로 오랜만에 물어보는 그의 것에 나도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조급하고 거칠게 빨아들이며 내 바지춤에 갇혀 있던 것을 빼냈다. 퉁 하고 튀어 나온 것이 쿠퍼액을 주룩 늘어뜨렸다. 기둥을 대충 손으로 훑으며 그의 것을 난잡하게 빨았다. 구음에 면역이 없는 이기현의 입에서 거의 자지러지는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질척거리며 성기를 빠는 소리와 섞여 환장하게 야했다. 아직 손대지 않은 하얀 허벅지가 경련했다. 흡입할 때마다 프리컴을 뻐금뻐금 뱉던 것은 빠르게 정액을 터트렸다.

“흐윽…….”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가 몸을 웅크렸다. 억지로 당겨진 사정에 가엾게도 온몸을 파들파들 떤다. 자위조차 안 했을 그의 정액은 점도가 높았다. 선단을 움찔거리며 입 안에 진하게 뱉어 낸다. 거의 그의 다리 사이에 머리가 낀 모습으로 액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빨아들였다. 사정감에 저항하지 못하는 틈을 타 비부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벌써 흠뻑 젖어 있는 내부에 탄식했다. 삽입하기에 최상의 상태였다. 예전 같았으면 몇 번이고 공들여서 넓혔어야 했을 텐데 손가락 세 개쯤은 거뜬히 들어갈 듯했다. 점막이 크게 휘젓는 손가락에 착실하게 달라붙는다. 나를 원하는 게 확실한 그 반응에 아래가 아프도록 뻐근해졌다. 그의 몸을 타고 오르며 다리를 붙잡아 벌렸다. 그러자 이기현이 눈물에 젖은 뺨을 내 팔뚝에 비비며 애원해 왔다.

“기하야, 기하야…… 잠깐…….”

“……큭.”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나를 멈추게 한 건 애원이 아니라 호칭이었다. 잠자리에서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다. 나는 얼어붙어 이기현을 내려 보았다. 이름을 불린 것뿐인데 속수무책으로 쌀 뻔했다. 술에 만취한 상태로도 내가 누군지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오히려 제정신이었으면 힘겨웠을 호칭을 그는 울면서 입술에 올리고 있었다.

“잠깐만, 흐…… 기다려 줘. 먼저 줄 게…… 있어서 그래.”

거부하기 위해서 아무 말이나 뱉어 냈다기엔 요구하는 바가 명확했다. 나는 신음하며 흥분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뭔데요?”

“저기……, 흐윽…….”

“저기?”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술 봉지가 나뒹구는 아일랜드 식탁 위였다. 가방, 상자, 신음 사이로 뜨문뜨문 뱉는 것들을 알아듣고 몸을 일으켰다.

가방째로 들고 와 안에 손을 집어넣고 휘저었다. 작은 상자 하나가 손끝에 걸려 꺼냈다.

“이걸?”

납작하고 알록달록한 상자를 들고 살폈다. 이기현은 가시지 않은 흥분으로 겨우 숨을 고르다 내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창백해졌다. 나는 상자를 돌려 써진 글씨를 읽었다. 초박형…… 콘돔?

내 표정이 어땠는지 이기현의 얼굴에 흐리멍덩한 기운이 싹 가셨다.

“그거 아니……, 아니야…….”

“이런 걸 준비하셨을 줄은 몰랐어요.”

숨이 막히는 듯 그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말을 반복하는 그의 앞에서 상자를 뜯어 내용물을 꺼냈다.

“원래 이런 거 죽어도 쓸 마음은 없었지만……. 모처럼이니 한 번만 써 볼까요.”

오늘 술을 준비한 것도 그렇고 콘돔까지. 그동안 나만 전전긍긍하며 어떻게든 건드리고 싶어 안달 났던 게 아니라는 사실에 죽도록 행복해졌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동그란 고무를 손에 쥔 채 아니라고,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그의 얼굴을 움켜쥐어 키스했다. 입 안에서 술맛이 아니라 내가 너무 사랑하는 이기현의 맛이 났다.

* * *

약.

한쪽 머리로 생각했다.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시체처럼 널브러진 이기현의 다리를 잡아 어깨 위에 올리며 늦은 후회를 했다.

지금이라도 먹으면 약효가 돌려나.

얼마나 혹사당했는지 족쇄를 찬 그의 발목 부분은 쓸리고 쓸려 벌써 새빨갛게 멍이 올라왔다. 틈이 보이는 족쇄의 밑 부분에 혀를 집어넣어 피부를 살살 핥았다. 연결된 이기현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묶인 덕분에 도망가거나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내게 깔려 있는 게 흡족했다. 원하는 만큼 박을 수 있고 빨 수 있다. 얌전하고 다정한 동생 연기야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잠자리에서만큼은 연기가 불가능했다. 본성을 이끌어 내는 게 이 몸뚱이였다.

처음 이기현을 강간했던 날 이기현의 꼴을 보고 이경헌이 그랬었다. 이건 섹스보다는 고문에 가깝다고. 너덜너덜해진 조카의 몸을 보고 내 앞임을 잊고 그는 질린 얼굴을 했었다. 자신들이 따먹으라 밀어 넣어 놓고는 외부인인 양 가증을 떨었다. 그 이후로 정사 전에는 반드시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순도 높게 정제한 억제제 두세 알쯤.

어디서부터 잘못된지 모르겠지만 내 성벽은 꽤나 비틀려 있었다. 천만다행히도 이기현의 취향도 온건한 쪽보다는 거친 쪽이었다. 그런 것만 봐도 우리는 완벽한 짝이었다.

이렇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형님. 믿지는 못하겠지만.

손대고 싶은 것을 참고 참으며 다시 이어지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온 정성을 다해서 구석구석을 핥고 빨기만 하며 사랑해 주려고 했다. 내 욕구는 억누르고 여타 연인들처럼 온건하고 부드러운 정사를 하겠노라고 다짐했었는데. 삽입을 시작하자마자 이성이 날아갔다. 애초에 족쇄를 채워 허공에 매달아 놓고 시작한 주제에 이런 후회는 가증스러울 뿐이지만.

약을 꺼내 이빨로 까득까득 씹으며 뿌리까지 박아 넣은 것을 느릿하게 빼냈다가 다시 퍽, 처박았다. 이기현의 가느다란 몸이 또 한 번 앞뒤로 흔들렸다. 완전히 열린 구멍이 검집처럼 완벽하게 내 것에 맞춰 뚫렸다. 허리를 크게 돌리며 마음껏 즐긴 뒤 뒤로 물렸다. 기둥이 기다랗게 빠져나오며 유백색의 점액질이 줄줄 쏟아졌다. 용케 그렇게 꿰뚫리고도 찢어지진 않은 모양이다. 이기현의 몸이 지극히 훌륭하게 호응을 해 줬단 소리였다. 그에 반해 이 고무 쪼가리는…….

넝마가 되어 성기에 간신히 걸려 있는 콘돔을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고무 안에 갇혀 있던 정액이 툭툭 다리 사이로 쏟아진다. 몇 번째 찢어진 건지 다섯 개째부터 세진 않았다. 우리의 섹스 방식에는 콘돔이 쓸모없을 거라고, 처음 것이 찢어졌을 때 이기현의 눈앞에 찢어진 콘돔을 흔들며 말했었다. 내 삽입은 거칠고 이기현의 안은 터무니없이 좁았다. 몇 번 추삽질을 하지도 않았는데 얇은 고무는 힘없이 찢어져 버렸다. 이빨로 다음 것의 포장지를 뜯으며 그의 구멍 안을 헤집었다. 이번에야 유흥으로 넘겼지만 다음번엔 쓰지 않을 생각으로 일부러 더, 거칠게 굴며 이딴 것이 필요 없다는 걸 각인시키려 했다. 그는 그래도 계속 콘돔을 쓰길 요구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수정될 수도 있다는 걸 두려워해서였을 것이다.

임신시킬 수도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는 충분했다. 나에게는 자극제였고 그에게는 억제제 같은.

그래서 이기현은 내 목을 끌어안으면서도 밀어내고 싶어 했고 내가 안에 사정할 때마다 흐느꼈다. 나는 반대로 그런 모습에 더 흥분해 미쳐 날뛰었다.

“사랑해요. 형.”

동생인 이기하에게 약한 것은 잠자리에서도 통용되어서 이기현은 어리광을 부리며 파고들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다리를 벌렸다. 하고 싶다고, 넣고 싶다고 조르면 반항하던 힘을 풀었다.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내벽을 잔악하게 들쑤시며 속삭였다. 쾌감과 고통에 자지러지면서도 그는 간혹 꺼질 듯한 신음 소리 사이로 나도 사랑한다고 화답했다. 그것에 내가 더 돌아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 결과를 초래한 건 네 탓도 있다고, 양심 없는 생각을 하며 그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형님. 형님 일어나세요.”

피멍이 내려앉은 목덜미를 지그시 깨물었다. 몇 번이나 혼절하고 깨우는 걸 반복했다. 풀이 죽은 기현의 성기를 살며시 쥐고 끝을 힘을 주어 문질렀다.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모를 정액과 프리컴으로 다리 사이가 질척질척했다. 기현이 반응하여 힘겹게 눈을 떴다. 얼마나 울어 댔는지 눈가가 퉁퉁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꿈인지 생신지 분간 못 하는 눈이 정처 없이 떠돌다 현실임을 파악하고 또 울먹거렸다.

“흐윽…….”

“일어나셔야죠.”

“그만……해…… 제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요. 응……? 한 번만…….”

너무 오랜만이라 그래. 너무 좋아서 그래. 그가 좋아하고 약한 표정을 지으며 뺨을 비볐다. 자신이 생각해도 가증스러운 태도였지만 이기현은 죽을 것 같단 얼굴로도 힘을 풀었다. 이 얼굴을 물려준 아버지께 감사해야겠어. 이런 식이니 내가 자꾸 버릇이 나빠질 수밖에 없는 거잖아.

봉긋하게 돌출된 유두를 혀로 튕기며 만신창이가 된 그의 다리를 벌렸다. 욱신거리는 선단 끝을 그의 구멍에 대고 원을 그렸다. 회음부를 누르기만 해도 구멍에서는 왈칵왈칵 흰 덩어리를 토해 냈다. 내 것으로 그것들을 느긋하게 닦아 입구 안에 그러넣었다.

“으…… 흐윽…….”

귀두를 구멍에 걸쳐 놓고 그의 입술을 빨았다. 달래는 것엔 능숙했다. 그렇게 당해 놓고도 백치처럼 이기현은 입을 벌리고 받아들이기 위해 다리를 내 등에 감았다. 혀를 입 안에 넣었다 뺐다 하는 것에 맞춰 허리를 추어올렸다. 기다란 기둥은 별 저항 없이 구멍 안으로 쑥쑥 진입했다. 배 속이 채워지며 내벽이 자연스럽게 수축한다. 혀를 섞으며 허리를 부드럽게 놀렸다. 파도처럼 그의 몸 위에서 유영했다. 쾌감이 치솟고 정신이 아득하게 분산된다. 따뜻한 물속을 헤엄치는 듯했다. 의식이 날아갈 듯 붙잡힐 듯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아아……. 좋은지 그가 나와 같은 쾌감 어린 신음을 흘렸다. 귀를 지근지근 씹으며 물었다.

“하……, 좋아요?”

“흐윽…….”

“진실만 얘기한다면서.”

몸 안 깊숙한 곳의― 동그랗게 솟아 푹신한, 그가 좋아하는 부근만 꾹꾹 누르며 속삭였다. 기현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좋아……, 아…….”

오늘의 이기현은 나를 미치게 만들려고 작정했나 보다. 내가 그동안 바라고 꿈꿨던 모든 것을 해 주고 있었다. 이렇게 솔직하고 사랑스럽게 구는 게 술의 힘이라면, 이제부터 주기적으로 술을 먹여야겠다는 음흉한 계획을 세우며 허리를 놀렸다. 구멍 안에 가득 찬 정액과 말캉한 내벽의 감각이 황홀했다. 말 그대로 아래가 녹아내리는 것 같다. 그것도 입 안에 넣고 점막으로 조금씩 조금씩 녹여 먹는 듯이……. 경탄하고 경탄하며 나는 이기현의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괴로운 표정을 하고 이를 악무는 기현의 입술을 억지로 벌려 숨을 불어넣었다. 뺨을 그러쥐고 이제 얼얼하기까지 한 입술을 겹쳤다.

“씻고 싶어…….”

웅얼거리는 통통해진 입술에 쪽, 쪽 입을 맞췄다. 어깨를 밀어 내며 미약한 반항을 하던 팔은 어느새 내 목을 감고 있었다.

“아래가 이상해……. 아래가 이상해서…….”

“이상하다고?”

나는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으며 허리를 몇 번 더 추어올렸다. 아……. 아래에서 교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지금이 제일 좋은데.”

엉망진창으로 씹힌 목덜미에 또 이를 세웠다. 파정의 신호로 착각한 점막이 탐욕스럽게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완전히 열려 놓고도 개폐를 반복하며 내 것을 잘근잘근 쥐어짰다. 지독할 정도의 쾌감이 뒷머리를 강타했다. 씨발 이건 거의 정액 달라고 조르는 거다. 뭐 이런 몸뚱이가 다 있……. 다음 순간 나는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살갗이 부딪쳤다 떨어지는 속도와 힘을 따라가지 못하고 소파가 끼익끼익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큭―.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이며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목과 팔뚝에 푸르죽죽한 핏줄이 돋아난다. 아랫배에 맹렬하게 피가 몰리며 성기가 더 단단하게 부풀었다. 사방에서 조이는 내벽의 압력에 끊어질 것 같기도, 환장하게 좋기도 했다. 몰아치는 쾌감에 심취하여 짐승에 가까운 신음을 내질렀다. 기하야, 기하야, 그가 숨이 넘어가듯 울먹이며 내 이름을 불렀다. 섹스하며 이름이 불리는 게 소름 끼치도록 흥분을 안기는 것임을 처음 알았다. 그는 어떻게든 멈추려고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에게는 기수가 타고 있는 말에게 더 속도를 올리도록 격려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제 다 끝났어, 잠깐이면 돼, 잠깐이면……. 그가 부추기는 만큼 애걸을 반복했다.

허우적거리는 그의 팔이 내 목에 간신히 매달렸다. 그렇게 해도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엇박으로 흔들리는 바람에 음낭이 짓눌려 아랫배에 연신 부딪쳐 댔다. 손에 잡히는 그의 몸을 어디든 움켜쥐고 입술에 닿는 그의 몸을 어디든 깨물었다. 매달린 다리에서 요란한 사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히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번까지만 싸고 나면 다음번은 정성 들여서, 온몸을 빨고 핥으면서, 다정하고 상냥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반쯤 날아간 이성으로 망가뜨리면 안 돼. 망가뜨리면 안 되는데. ……그런데 자제할 수가 없는 걸 어떡하란 말이냐고 헐떡였다.

쩍쩍 달라붙는 아랫도리에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다리 사이로 떨어지는 점액질로 소파 위에 하얀 웅덩이가 둥그렇게 생겼다. 쑤시는 것과 동시에 싸고 있어서 나오는 것이 한도 없었다. 안이 워낙 가득 차 이기현은 이제 내가 파정을 하는 줄도 몰랐다. 이기현의 것도 유백색의 체액을 자기 배 위에 끄덕끄덕 토해 내는 중이었다. 실컷 싸지르고 안을 난잡하게 휘저으며 그의 사정을 도왔다. 질척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이기현의 몸이 고장 난 것처럼 경련했다. 절제가 풀려 버린 얼굴은 외설물 그 자체였다. 텅 비어 버린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 역시 그러했고.

사랑한다고, 너무 좋다고, 내 체취로 완전히 절어 버린 그의 피부에 콧등을 비비며 신음했다.

“사랑해. 너무 사랑해…….”

“흐윽…….”

“너는?”

“사랑…….”

자신이 무슨 소릴 하는 줄도 모르고 이기현은 더듬거렸다. 뚝뚝 끊기는 음절 사이에서 원하는 말을 건져 냈지만 못 들은 척 졸라 댔다.

“다시 한번 말해 줘.”

“읏, 흐으…….”

“다시 한번만 말해 줘. 아까 그 말.”

“아…….”

“어서. 응?”

“사……랑해, 읏…… 사랑해…….”

그 말을 하면 이 밤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모르는 이기현은 학습한 대로 울음소리 섞인 고백을 더듬더듬 읊조렸다. 이미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다. 몸도 걸레짝이 되어 버렸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선녀는 완전히 나무꾼에게 사로잡혔다.

나의 형. 나의 신. 나의 여우. 드디어 너는 완전히 내 것이 되었어.

숨길 수 없는 충족감에 웃는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닐 추악할 얼굴을 그의 목덜미에 묻어 숨겼다.

부디 이게 꿈이 아니기를. 만약 꿈이라면 이 밤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 * *

밀려드는 통증에 눈을 떴다.

이런 종류의 아픔을 익히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누운 채로 눈만 껌벅거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얗게 밝은 햇살이 거실 위 채광창에서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끝이 있긴 있었구나, 아침이 오긴 오는구나.

거의 미친 밤이었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완전 정신 나간 밤이었다고.

제일 정신 나간 건 뭐가 좋다고 술 먹자는 제안을 해 버린 나겠지만.

도저히 움직일 생각…… 아니, 엄두가 안 나서 눈만 데룩데룩 굴려 댔다.

얼마나 마셔 댔던 건지 온 사방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겨우 아픔이 좀 익숙해질쯤 되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잠들어 있는 기하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무리 소파가 슈퍼 사이즈여도 덩치 큰 두 남자가 함께 누워 있기에는 좁은 곳이라 그는 큰 체구를 한껏 구겨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하얀 피부 곳곳에 치댄 자국이 선명했다. 실수로 저항하다 손이 잘못 나가는 바람에 뺨엔 맞은 흔적이 선연하고 입술은 도톰하게 부어 있었다. 술 탓인지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요사스러워 보였다. 저 얼굴에 홀려서 어제 진짜 돌았었지……. 침대 위에서 저 얼굴을 보면 토했던 게 어디의 누구더라. 트라우마는 치유되다 못해 아예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했다.

으……. 고개를 돌린 것뿐인데도 아파서 신음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아 냈다. 지독하게 아프고 지독하게 목마르다. 그리고 너무…… 너무너무 씻고 싶었다.

이렇게 정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달고 그냥 잔 적은 처음이었다. 술 때문에 둘 다 씻고 잘 만한 정신머리가 되지 못했으리라. 과장 좀 보태서 온몸이 체액 범벅이었다. 누가 혹시라도 봤으면 바로 혀를 깨물고 싶어졌을 거다. 아랫배에 몇 차례나 싸지른 내 정액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고 다리 사이는……. 몸을 조금이라도 뒤치면 바로 동생이 싸 놓은 정액덩어리가 끝도 없이 밀려 나왔다. 거부감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적응하란 말이야.

아직도 허공에 매달려 있는 다리가 처량했다. 설마하니 집 안 곳곳에 족쇄 걸이를 박아 뒀을 줄은 몰랐다. 이것도 예의 그 만일을 대비한 거겠지. 밤새 벌어져 있던 다리는 골반이 아예 틀어진 듯 그 부분만 마비되어 통증조차 없었다. 소리 나지 않게끔 힘없이 족쇄를 당겼다가 포기했다. 몸을 못 움직이는 상태도 상태지만 어차피 기하가 풀어 주지 않는 한은 아무데도 못 갔겠구나. 그리고 그런 사실에 체념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했다. 정말로 도망가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는 것이 자각되어서.

간신히 손이 닿는 거리에 던져둔 가방이 보였다. 기하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가방을 끌어당겼다. 어제 재수 없게 현진 누님이 준 선물을 꺼내는 바람에……. 여러모로 진짜 뭐가 씐 날인 게 틀림없어.

내가 이것저것 건드리며 꾸물꾸물 움직이는 통에 결국 그를 깨웠는지 옆에서 기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일어나자마자 허리를 감은 팔에 힘부터 주다니. 어이없어 힘없이 웃었다. 기하는 눈을 몇 번 깜박이는 것만으로 바로 제정신을 차린 듯했다. 만신창이가 된 서로의 꼴을 보고 입을 벌린다. 몇 번 입술이 달싹거리더니 간신히 말을 이었다.

“어제 우리…….”

“그래.”

산뜻하게 긍정했다. 커다란 눈으로 나를 응시하더니 몸을 기울인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우리…… 꿈은 아니었겠지요?”

“이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그래. 내가 상상했던 허락의 날은 이렇게 엉망진창 술 냄새 진동하는 그런 날이 아니라 조금 더 로맨틱하고 사랑스러움이 넘치는 그런 분위기긴 했다. 그랬지만……. 얼떨떨해하는 그가 어이없어서 코끝을 살짝 잡고 흔들었다. 그러고는 술이 깬 상태에서 제대로 하기로 결심했던 고백을 남아 있는 술의 힘을 빌려 담담하게 내뱉었다.

“사랑해.”

“…….”

그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아 역시 보석 같다. 저렇게 수많은 감정이 한 번에 일렁거릴 수 있는 거구나. 나는 감탄하며 그의 뺨을 그러쥐었다. 얼굴을 끌어당겨 그가 조금 전에 했던 것과 똑같이 가볍게 입술을 찍었다.

“사랑하고 있어.”

큰 마음먹고 한 고백을 듣고도 그는 얼빠져 있었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얼굴. 돌아올 대답은 당연히 긍정적인 것일 텐데도 상대의 반응에 조바심이 났다. 혹시 아직 술이 덜 깬 걸지도 몰라. 제대로 못 들었던 걸지도. 나는 다시 한번 코끝을 잡고 흔들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기하가 중간에 내 손을 잡아챘다.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세요.”

“…….”

“다시 한번만…….”

하고 울 듯이 말하던 그의 시선이 내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에 흠칫 가닿았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혼이 나가 버린 얼굴을 했다. 그런 그의 손을 천천히 잡아 내렸다. 문신이 새겨진 기하의 왼손을 내 양손으로 꼬옥 붙잡았다.

“어제 이걸 주려고 했던 거였다고. 그…… 음…… 그거 말고.”

“…….”

“왜 넌 꺼내도 그걸 꺼냈느냔 말이야. 내 계획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그와 나의 약지에는 가느다란 반지가 끼여 있었다. 내가 주문 제작해서 만든, 레드 다이아몬드와 퍼플 사파이어가 교차되어 세공된 한 쌍의 반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반지 위에 키스를 했다. 바짝바짝 마른 입 안을 혀로 축이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준비했던 고백의 언어를 읊조렸다.

“……사랑해. 이기하. 진심이야. 사랑하고 있어 넘치도록.”

“…….”

“여기까지 와 놓고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이걸 준비하느라 좀 늦었어.”

“…….”

“어제 이걸 끼워 주고 허락하려고 했는데. 사실 좀 근사한 데서 좋은 걸 보여 주고 고백하려고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고……. 근데 이렇게 술 냄새 나는 고백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

“네가 말했던 대로, 이제 우리……. 크흠, 부부……처럼 살아가자고 했던 것에 대한 대답이야.”

“…….”

“기하야……?”

이제 슬슬 멋쩍어지고 있었다. 기하는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반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감정을 감추는 데 능했던 그답지 않게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초조해졌다. 이렇게나, 허락을 이미 알고 있는 고백조차도 이렇게나 떨리는데. 너는 어떻게, 거절을 이미 알고 있는 고백을 그 수많은 날 동안 할 수 있었던 걸까.

기다리다 지쳐 슬그머니 손을 잡아 빼려 하자 그제야 강한 힘으로 붙든다. 우리는 조용히 마주 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입술이 조심스럽게 겹쳤다. 그의 눈에서 보석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오늘만은 나도 관대하게, 너그럽게 굴어 줄 수 있으니까.

“저도 사랑……해요. 형…….”

붉은 입술이 드디어 열리고 불면 꺼질듯이 더듬더듬 응답해 온다.

그에게는 수도 없이 해 봤을 고백이겠지만 그 수없이 쏟아 내던 고백 중 처음으로 화답의 의미를 담은 고백이었다. 허락받은 지금 이 순간에 와서야 비로소, 기하는 겁에 질려 있었다. 눈앞의 모든 것이 혹여라도 거짓일까 봐, 한낱 꿈에 불과할까 봐. 의심하면서도 믿고 싶어서 마음껏 기뻐하지도 못하고 몸을 떨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귓가에 그가 원하는 만큼 사랑을 속삭였다. 입술을 누르고 기하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그가 해 줬던 것을 똑같이 되돌려줬다. 우는 모습마저도 이렇게나 예쁜 내 짝에게.

“사랑해요…….”

“응.”

“사랑해…….”

“……응.”

“사랑하고 있어…….”

몇 번이고 물먹은 먹먹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그가 나를 안으며 다시 소파 위로 몸을 쓰러뜨렸다. 윽…….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입술이 막혀 버린다. 기하는 울면서 계속 계속 사랑한다고 말하며 내 입술을 찾았다. 호흡하기 위해 산소를 들이켜듯 필사적으로 매달려 왔다. 뭐가 그리 서러운 건지, 나는 차근차근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받아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을 소파에서 벗어나지 않고 입을 맞췄다.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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