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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 (31/47)

결핍

낙원에는 비가 내렸다. 이주해 온 뒤 가랑비가 내리는 것은 봤어도 이렇게 억수같이 쏟아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창문에 붙어 회색 바다에 파도가 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위협적으로 높아지는 풍랑에 저 멀리 해안가에 늘어선 불빛들이 위태롭게 점멸했다.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 천장 위를 두드리는 우레와 같은 빗소리. 어항속의 물고기가 된 기분으로 사방에서 밀려드는 물의 연주를 들었다. 비를 관장했었음에도 비 오는 것은 여전히 좋아지지가 않았다. 기분이 축 가라앉는다. 싱그러운 색채는 바래고 지면은 무채색으로 물들어 가는 듯했다. 꽃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 비의 주인이 나였다면 지금 당장 멈추라고 명령했겠지. 나는 분명 섬기는 이들에게 게으른 신이었을 것이다.

밤이 꽤 늦었는데도 기하는 집무실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위층에서 부드러운 빛이 새어 나왔다. 일이 엄청나게 밀려 있다고 했다. 나와 달리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는데도 낙원으로 이주한 뒤에 일이 더 가중된 듯했다.

인사하고 먼저 잠을 잘까 하다가 목욕을 더 하고 싶어서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상쾌한 향이 나는 입욕제를 풀고 휘저었다. 소금과 로즈마리 오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입욕제가 녹아들며 물이 점차 붉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기왕 즐기는 거 분위기나 더 잡아 볼까 해서 불도 끄고 조그만 촛불 몇 개만을 켜 두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자 완벽한 온도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기하를 방해하지 않으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틀었다. 즐겨 듣던 록 음악에 맞춰 거품을 첨벙거렸다. 전면 창으로 보이는 비 내리는 바깥 풍경에다 몰아치는 사운드까지, 꽤 괜찮은 분위기였다. 나른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참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쾅!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는 커다란 굉음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반동에 욕조물이 욕조 밖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무슨…… 일이지? 이게 무슨 소리야? 당황해서 이어폰을 빼고 소리 내어 기하를 불렀다.

“……기하야?”

불안해져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때 밖에서 또 거친 소음이 나더니 욕실로 가까워졌다.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리는 것과 문이 열리는 것은 동시였다. 성급하게 들어서던 기하와 눈이 마주쳤다.

“기하야 무…….”

뭐냐고 묻기도 전에 기하가 뛰어들 듯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욕조 물이 더 범람해서 기하의 셔츠와 바지를 온통 적셨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는 덜덜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절박하다. 억센 팔이 단단하게 내 겨드랑이에 들어가더니 더 바짝 끌어안았다. 영문을 모르고 나는 가만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형님…… 형님…….”

몇 차례나 신음하더니 내 얼굴을 강하게 쥐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 곧바로 입술이 맞물렸다. 너무 오랜만의 입맞춤이라 깜짝 놀라 멀어지는 내 머리를 거세게 끌어당기며 틈 없이 입술을 겹쳤다.

숨을 쉴 수가 없이 짓눌렸다. 혀가 깊은 곳까지 밀려들어 왔다. 거부감이 일 정도로 깊어 고개가 꺾였다. 여유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갈급한 키스였다. 다칠 것 같아서 호응을 해 줄 수도 없을 만큼, 기하의 혀는 거칠게 안을 휘젓고 내 것을 빨아들였다.

“잠, 읏…… 잠깐……. 잠깐만.”

평소와 달리 숨을 쉴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나는 결국 현기증이 나 온 힘을 다해 그의 가슴을 밀었다. 지체 없이 빨린 입술이 아릿아릿했다. 왜 이러는 건……. 헐떡이며 항의하는 입술이 다시 덮였다. 이번엔 아예 반쯤 욕조 안으로 상체를 집어넣고 내 위를 짓누르면서 키스한다.

“응……, 읏…… 흐…….”

욕조 표면에 어깨가 세게 부딪쳤다. 간신히 물에 잠기지 않게 엉거주춤 몸을 웅크리고 그의 입술을 받아 냈다. 기하의 손이 옆구리를 움켜쥐더니 강하게 끌어 올렸다. 그대로 키스가 더 깊어졌다. 흐으……. 신음이 입 속에서 뭉그러졌다. 어디 뭐가 분명 또 터졌거나 찢어졌는지 진하게 얽히는 혀에 피 맛이 섞였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기하가 이끄는 대로 정처 없이 고개가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을 더 입술을 겹치고서야 겨우 놔주었다. 반쯤 허공에 들린 채로 나는 숨을 할딱할딱 내뱉었다.

“왜…… 왜……?”

코끝이 겹치는 거리에서 기하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기하는 자신도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망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시 또 입술을 내릴까 봐 나는 고개를 기울이고 왜 이러느냐고 재차 물었다. 세 번째 물어서야 겨우 더듬더듬 답을 내어놓는다.

“도망……치신 줄 알았어요.”

“뭐……?”

“불러 봤는데 대답도 없고, 집안의 불은 전부 꺼져 있고. 어디에도 형님 흔적이 없어서.”

맞닿은 가슴으로 요란하게 쿵쾅거리던 심장이 겨우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목욕하느라 불도 다 꺼 두고 음악 때문에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해 대답을 안 하니 도망간 줄 알았다는 거였다.

“너무 놀라서…….”

그가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힘없이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아직도 그는 진정을 못 하고 있었다. 나도 아직 얼떨떨한 상태로 그의 목을 감고 등을 어색하게 토닥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 날씨에? 싶었지만 그런 게 그의 눈에 들어오진 않았겠지. 그런 판단이 가능했더라면 애초에 욕실부터 와 봤을 테고. 기하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허락을 구하기 전까지는, 이라고 유예를 둬 놓고 그동안은 서로 가벼운 스킨십 외에는 의식적으로 하지 않고 있었던 게 이렇게 깨질 줄은 몰랐다.

“핸드폰도……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않고. 위치 추적을 해 보니 집 안에 있다는데, 집 안이라는데.”

아……. 아무렇게나 던져둔 휴대 전화가 옷가지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번에도 또 버림받았다고 생각해서.”

버림받았다는 말을 하는 음성이 참담하게 들려 가슴이 죄어들었다.

“정말 미쳐 버리는 줄 알았어…….”

“미안해. 방해 안 하려고 한 게 독이 됐네.”

정말 미안한 마음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기하는 다시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이제 공포는 사라졌지만 서러운 눈이었다. 버림받을까 봐 겁에 질린 강아지 같은. 그리고 나는 동생의 저런 표정에 당연히, 기가 막히게 약했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입술이 다가왔다. 고개를 기울이자 입술이 맞물린다. 천천히 문지르며 그새 부은 표면을 핥아 올렸다.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입술을 열었다. 뜨거운 혀가 입 안을 훑는다. 아까와 달리 치솟는 쾌감에 옆구리가 움찔 떨렸다.

“형님…….”

“응…….”

고개를 움직이며 그의 운율에 맞춰 나도 혀를 내밀었다. 입술을 덧그리며 핥았다. 입 안으로 터지는 숨결은 뜨거웠다. 쪽, 쪽, 몇 차례 소리를 내며 빨다가 놓아준다. 조금 멍했다. 얼얼해진 표면을 혀로 훑으며 확인하는 것을 본 기하가 좀 더 세게 끌어당겼다. 그러곤 또 키스를 퍼붓는다. 밀어내지 않는데도 그는 사이사이로 ‘조금만요…… 조금만…….’ 하며 애절하게 동의를 구했다. 입술을 겹친 채로 몸을 일으키더니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완전히 내 위에 올라타며 그의 옷도 흠뻑 젖어 버렸다. 가라앉지 않도록 내 허리를 거의 들어 올리다시피 끌어안고는 혀를 빨아 당겼다. 호흡을 섞으며 서로의 입술에 달라붙었다. 오랜만이라 그럴 것이다. 이렇게 좋은 기분인 건. 이렇게나 쉽사리 흥분하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은 아닌지 기하의 흥분도 빨랐다. 키스만이었는데, 그가 내 몸 위에서 섹스를 하듯 몸을 밀착시켜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아래가 눌려 흔들리자 미치도록 성감이 치솟았다. 진작 두툼하게 크기를 키운 살덩어리가 맞닿은 허벅지를 짓눌러 댔다. 어느새 부푼 내 것도 기하의 배를 찔렀다. 그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다리를 벌렸다. 기하가 그 사이로 들어와 더 가깝게 하체를 맞붙였다.

“흐윽…….”

이미 이건 키스라고 하기엔 애매한 행위가 되어 버렸다. 삽입하듯이 기하의 허리가 유연하게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든다. 철썩철썩, 벗은 살갗에 젖은 옷감이 들러붙는 소리는 정사의 소리 그 자체였다. 옷을 벗지 않는 것이 마지막 양심이나 마찬가지였다. 구멍 쪽으로 부풀어 오른 하체를 천천히 쳐올리며 기하가 입술을 물었다. 욕조 안인 게, 다 젖은 상태였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내 것은 쿠퍼액을 꿈질꿈질 기하의 셔츠에 뱉어 대고 있었으니까.

“아…….”

이러다가 내가 먼저 기하의 바지에 손을 댈 것 같아서 더럭 두려워졌다. 구멍 사이를 스치는 살덩이에 감질이 났다. 좀 더, 더 닿고 싶었다. 적어도 살갗을 맞대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들키고 싶지 않아 일부러 더 그의 입술에만 매달렸다. 내가 기하의 뺨을 쥐고 입술을 겹치자 자유로워진 한 손으로 내 다리를 더 바짝 들어 올렸다. 완전히 곧추선 기하의 것이 바지 위로도 확연하게 보였다. 젖은 통에 머리 모양까지도 선연하게 드러난 것을 확인하고 얼굴에 확 불이 붙었다.

그는 들려진 엉덩이 쪽으로 삽입하듯 허리를 들이밀었다. 동그랗게 굳은 고환을 사정없이 짓누른다.

“으…… 읏…….”

성기의 끝에서 진득한 액체가 묻어 나와 기하의 배 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수치심보다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앞이든 뒤든 손도 대지 않았는데 지리고 있다는 사실에.

“미안해요. 참으려고 했는데…….”

아플 만큼 긴 키스를 마치고 기하가 내 콧등을 가볍게 깨물면서 속삭였다. 정사를 치른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이 몽롱했다. 뜨거운 물에 잠겨 있던 탓인지 체력은 더 고갈된 기분이었다. 완전히 방전되어 욕조를 붙잡고 있는 팔이 후들거렸다. 뭐 하는 짓이었는지.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얼마나 낯부끄러운 짓을 하며 동생과 엉겨 붙어 있었는지 실감났다. 아무리 휩쓸렸다고 해도 나도 완전히 호응해 버렸다. 그의 눈에는 아쉬움이 철철 넘쳤다.

“목욕하시는 걸 망쳐 놓고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제 그만하고 나오셔야겠습니다. 피부가 온통 달아올랐어요.”

긴 다리부터 먼저 욕조 밖으로 빠져나간다. 그가 나가고 나니 욕조 안에 남아 있는 물이 거의 없었다. 죄다 넘쳐흘렀거나 그의 옷에 흡수되어 버렸다. 기하가 피부에 완전히 달라붙어 있는 옷을 쥐어짜 냈다. 그의 몸에서 로즈마리 오일 향기가 풀풀 풍겼다. 다리 사이 곧추선 것은 여전히 묵직하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너 씻고 가야 할 텐데.”

내 것이 더럽혀 놓은 셔츠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중얼거렸다. 벗고 씻으면 편할 텐데 그는 고집스럽게 물을 짜내고만 있었다.

“같이…… 목욕할래?”

“위층에서 씻으면 됩니다.”

당연히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거절이었다. 내가 눈을 깜박거리자 그가 머쓱하게 웃음 지었다.

“여기서 더하면 진짜 못 참게 될 거 같아서요.”

굳이 거절하는 이유는 스스로 해소하기 위해서구나. 낯 뜨거워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기하는 금방 나오라는 당부를 한 번 더 하고 욕실을 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물도 없이 앉아 있어 등줄기에 소름이 돋고서도 한참 동안이나.

* * *

“헉……!”

머리를 짓누르는 악몽에 급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형님……?”

“…….”

“괜찮으세요?”

옆에서 자고 있던 기하가 반쯤 몸을 일으켰다. 아직 흐릿한 눈으로 서둘러 사방을 살폈다. 높은 천장. 내가 멋대로 달아 뒀던 일루미네이션이 보였다. 본가가 아니다. 여기는 우리 집이다. 우리 집이었다.

“미안, 나 때문에 깼나 봐.”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서 아무렇지도 않게 꾸며 말했다. 갇혀 있었을 때의 꿈을 꾸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꿈속에서의 잔인했던 아이를 몰아내려 애썼다. 전생에서 나를 가둔 것은 아버지였고 현생에서는 기하였다. 두 부자는 각자 나를 차지하기 위해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최종 승자는 기하였다. 아버지는 멀어지는 내게 무어라 외쳐 댔다. 그 얼굴이 너무나도 원통하고 원통해 보여서…….

내가 말을 잃고 멍하니 앉아만 있자 기하가 내 쪽으로 상체를 굽혔다. 쪽, 하고 눈가에 가벼운 키스를 한다.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고 어리광을 부렸다. 지금 악몽 꾸다가 깬 건 내 쪽인데 커다란 덩치를 구겨 내 어깨에 비비적거린다. 나는 어느샌가 기하의 흐트러진 머리를 차근차근 매만져 주고 있었다. 평소보다 가슴이 빠르게 진정되었다. 악몽의 주체를 품에 안고도 이럴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미안해. 잠 깨게 해서…….”

“멀리서 형님이 악몽을 꾸는 걸 지켜볼 때마다 얼마나 이러고 싶었는데요.”

항상 형님을 안고 이렇게 위로하고 싶었어요. 그가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이지 미워할 수가 없다.

“잊게 해 드릴까요?”

살짝 턱이 붙잡히고 아주 부드럽게 입술이 겹쳐진다. 달콤한 혀가 입 안으로 파고든다. 입을 벌려 받아들이며 생각했다. 그 사람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한 번이라도 들어 볼 걸 그랬다고. 대체 무슨 소릴 하려고 그렇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애처롭게 불렀는지.

* * *

새로 지은 병원은 아예 대학 병원 규모로 만들어졌다. 벌써부터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박현진을 만나기 위해 미리 연락을 하고 왔다. 그녀는 낙원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이었다.

이상하네……. 박현진은 거즈로 등을 닦아 내면서 중얼거렸다.

“아프진 않아?”

“하나도 안 아픈데요.”

“이렇게 크게 상처가 나 있는데 안 아프다고?”

등이라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데 나는 그녀를 따라 고개를 최대한 뒤로 빼서 보려고 노력했다. 박현진은 손거울 하나를 들고 와서 내 등이 보이도록 갖다 대었다. 뭐가 튀어나왔다 꺾인 거니 양쪽 날개 부근 표면이 붉게 돌출돼 울퉁불퉁하다.

“심장이 뚫렸었다면서. 그건 멀쩡해졌는데 등 상처는 왜 아직도 이래?”

“안 아프면 됐죠. 뭐.”

소독이 끝나고 심드렁하게 다시 셔츠 단추를 꿰었다. 이번부터 다시 검진을 시작했다. 잔뜩 피를 뽑은 뒤 책상에 팔을 대고 앉아 있으니 그녀가 사탕 하나를 건넸다.

“저번보다 키가 좀 컸어. 자기 아직도 성장긴가?”

“와 정말요?”

“김태영 말로는 자기는 오히려 어려진다던데.”

“누님한테 걔가 벌써 그런 말도 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요?”

사탕을 빨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해지긴커녕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가 된 줄도 몰랐는데.

“친해? 누가? 김태영이랑 내가?”

본인이 더 정색한다. 사적으로 연락을 나누면 상당히 친한 게 아닌가? 내가 눈을 가늘게 좁히자 그녀가 자기 일로 물어볼 게 있어서 연락 트게 된 거라며 어물어물 변명을 한다. 하여튼 솔직하지 못하긴.

“오늘도 장운 씨는 안 보고 갈 거야? 그러다 그 사람 말라죽을 거 같던데.”

장운은 내가 도망쳤을 때 도와준 사람의 이름이었다. 나를 TV라고 불렀던 사람. 나 때문에 총에 맞고 칼마저 꽂혔던 사내. 박현진을 낙원으로 데려오면서 그녀에게 장운의 거처를 부탁했었다. 옷깃이 스치기만 해도 인연이 생겨 버리는 건 사실이었다. 신세진 사람이 그 짧은 기간 동안 몇 명이나 생긴 건지. 총과 칼의 상처가 다행히도 치명적이진 않았다지만 그의 피부에도 영구적일 상처는 남았다고 했다. 더더군다나 내게 감응마저 되는 바람에 사내의 운명은 둘 중 하나로 나뉘어 버렸다. 내 권속으로 살아가든지, 혹은 죽든지. 그래서 한 손에 셀만큼 몇 없는 내 감응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박종오처럼 이상적으로 되든가 아니면 계속 감시 상태로 살든가 해야 할 텐데. 아직까진 모르겠다고 하더라. 훈련이 아무나 되는 건 아니었나 봐.”

내 악의에 휩쓸리지 않게 되는 훈련을 완료하면 사회에 복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결국 그 사내의 삶을 빼앗아 버린 셈이다. 내가 침울해하는 걸 느낀 박현진이 다정하게 어깨를 쓰다듬었다.

“위로가 될 진 모르겠지만, 복속인이 되면 그만한 보상이 따라와. 그래서 대부분은 복속이 된 후를 더 만족하는 편이야. 애초에 변치 않는 젊음과 영생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거기다 제 역할만 수행하면 경제적으로도 자유로워지는걸. 말 그대로 낙원의 삶이지.”

“그거 세뇌예요.”

“글쎄. 아닐걸. 아무나 감응하고 아무나 복속되는 건 아니거든. 복속될 만한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따로 있어.”

“어떤 거요……?”

“결핍을 가진 사람.”

복속되는 것은 결핍이 채워지는 일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사실 나, 스파이 짓하고 있었어.”

“스파이……요?”

“응. 역시 피는 어쩔 수 없나 봐. 아버지가 그렇게 하면 기회를 주겠다고 했거든. 다시 상속 자격도 회복하고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겠다고. 그게 내 결핍이었어. 인정받는 것. 그래서 여기서 우리 집안의 정보를 아버지에게 전달했었지.”

배신했다고 고백하면서도 이곳을 우리 집안이라 지칭하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뭐 내 선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었지만 말이야. 아버지 입장에서는 사람 한 명 심어 두는 거만큼 안심되는 게 없었겠지. 게다가 내가 신의 짝이 될 거라고 굳게 믿으셨고. 이곳 동향이나 자기에 대한 정보 같은 것도 말했었어. 신의 피에 관한 것들도.”

“그거 혹시 기하도 알아요?”

“아시더라. 이미 전부 다 알고 있더라고.”

“괜찮아요? 변절자는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다치진 않…….”

의식의 흐름대로 내뱉었다가 아…… 했다. 박현진은 시원스레 웃었다.

“뭐야 괜찮냐고 물을 게 아니라 내게 배신당했다는 것에 화내야 하지 않아?”

“제가 그럴 주제가 되나요…….”

“하여튼 다정하다니까.”

제멋대로 묶인 갈색 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녀는 후련해 보였다. 그런 일을 다 겪고도 아직도 신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보다 훨씬 단단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나 따위가 그래 봤자 상관도 없으셨던 거 같았어. 뛰어 봤자 그분 손바닥 안이었지. 자기나 나나.”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다시 사과할게요. 나 때문에 그런 일까지 겪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나야말로 사과받을 주제가 되니. 그럼 우리 하나씩 주고받은 거니까 화해한 거다. 자 악수.”

웃으며 그녀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박현진의 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부드러워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나저나 자기. 가주님과 사이는 어때? 다시 회복했어?”

“뭐…… 어느 정도는요.”

태연하게 얘기했지만 표정 관리 못 하는 특기가 십분 발휘됐다. 박현진은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가운을 뒤적거렸다.

“그럼 이거 받아. 선물이야. 사과하는 겸해서.”

가운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선물 상자를 불쑥 들이민다. 납작하고 붉은 리본이 매어져 있는 아주 가벼운 상자였다. 엉겁결에 받아들고 우물거렸다.

“전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요.”

“혼자 있을 때 열어 봐. 알았지?”

다음번에 만날 때는 장운을 대동하고 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아직 그 사람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헤어지고 집에 도착해 침대에 앉아 상자를 풀었다. 안에 있는 건 또 알록달록한 상자다. 초콜릿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뭐지. 낯선 물건에 갸웃했다. 집어 들고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것을 읽었다. 그리고 끙, 신음했다. 아 정말 누님……. 귀가 뜨끈해졌다. 이걸 대체 어떻게 처리해. 누가 볼세라 얼른 다시 뚜껑을 닫고 침대 옆 협탁에 넣으려다가 멈췄다. 나 지금 기하랑 같이 살잖아.

벌칙 폭탄이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상자를 들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가져왔던 가방에 도로 쑤셔 넣었다.

* * *

“오늘은 좀 멀리 나갈까요?”

다음 날, 일찍 귀가하자 기하가 물었다. 묻고 있는 것치곤 외출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상태였다.

“어디로?”

별로 반갑지는 않았다. 기하와 번화가를 가고 싶진 않았다. 저번에 기념할 만한 첫 영화관을 입성했을 때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평소에 소, 닭 보듯 나를 지나쳐 가던 인간들은 기하에게만큼은 무관심이 통용되지 못했다. 우리가 주차를 하고 차를 나서는 순간 잔뜩 긴장된 분위기가 거리 전체를 휘감았다. 무슨 전운이 감도는 줄 알았다. 다들 나름대로는 필사적으로 못 본 척을 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인간들의 시선이 전부 기하에게로 꽂히고 있었다. 힐끔거리는 눈동자, 하던 일을 중단하고 온 신경을 다 우리에게 쏟고 있는 인간들. 그 순간 거리는 시간이 정지한 듯했다. 흘러넘치는 긴장감에 내가 다 질식할 것 같았다. 토할 것 같아졌고 실제로 토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끔찍한 경험이었다. 인생을 관찰당했던 영화의 주인공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도시를 세운 것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예전과 똑같이 집과 연구소와 본가 정도만 오가는 삶을 영위했다. 남들 좋은 일만 해 준 꼴이었다.

나는 좋은 성능의 빔 프로젝터를 사들였다. 그러고 보니 그거 개시도 해 봐야 할 텐데.

내 생각을 읽었는지 기하가 느슨하게 웃었다.

“한적한 곳에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했어요. 거기 가서 식사하고 다른데 한 군데만 더 들르면 됩니다.”

“그럼 내 차로…….”

선수를 빼앗겼다. 기하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차 쪽으로 당겼다. 어쩔 수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옆 좌석에 앉았다. 박종오랑 같은 선생님한테 배웠나 싶을 만큼 기하는 지나치게 성실히 운전했다. 어차피 인구수가 적은 인공 도시라 번화가와 산업 단지 쪽을 제외하고 도로에 차라고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도 모든 도로를 60킬로 이상 밟지 않았으며 신호도 모조리 준수했다. 운전 스타일마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망나니처럼 구는 건 오직 침대 위뿐인……까지 생각하고 미쳤나 싶어 얼굴을 감쌌다. 이게 다 누님 때문이다. 괜히 그런 걸 선물해 가지고 의식하게 되잖아.

레스토랑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어 아늑하고 조용했다. 빈티지한 전등이 장식된 야외 정원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해가 완전히 저문 바다는 어둡고 시원스레 뚫려 있었다. 기분이 좋아져 와인을 두 잔이나 곁들였다. 기하는 술을 마시지 않는 편이었다. 운전 때문에도 그랬지만 애초에 즐기지 않는 듯했다.

“왜 안 마시는 거야?”

“좋아하지 않아서요.”

“대리 부르면 되니까 마셔 보지 그래. 이거 꽤 괜찮은데.”

저렇게 나오니까 억지로라도 마셔 보게 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취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기하도 취하면 주정을 부릴까? 무슨 종류의 주정일까? 얌전하게 잠들려나? 소리 지르려나? 추하게 흑역사를 생성하려나? 설마 취해 놓고도 멀쩡하진 않겠지? 나는 한 가지 생각에 꽂히면 맹렬하게 그것만 파고드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어떻게든 기하를 취하게 만들어 보고 싶었다. 사회생활하며 다져진 술 경력도 있겠다 대작을 하면 이길 것 같은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원래 이런 건 어른한테 배우는 거랬거든. 마셔 봐. 가르쳐 줄게.”

“나중에요.”

도발했는데도 넘어오지 않은 그가 마시던 찻잔을 들어 보였다. 나중에 언제? 따라붙는 물음에도 웃기만 한다. 술 마시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저렇게 거절을 하지. 갸웃거리며 작게 잘린 고기를 입에 넣었다. 언제가 되던 기필코 취한 걸 봐야겠어.

“여기 진짜 평화롭다.”

검은 수면에 하얗게 밀려드는 거품, 시원한 파도 소리와 약간 서늘한 바람, 부드러운 색의 조명과 테이블 위에서 하늘거리는 양초의 불빛. 이보다 평화로울 수 있을까.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몰랐는데, 내가 바다를 좋아했었나 봐.”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자 기하는 그런 나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우리 주변만 둥글게 밝히는 등불 덕에 반쯤 음영 진 기하의 얼굴이 전시장 안의 예술품같이 보였다. 살아 숨 쉬는 것이 믿어지지 않게끔 어느 한 부분도 흠 하나 없이 매끄럽고 고아했다. 속절없이 가슴이 뛰어 와인 잔을 만지는 척하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너는 어때?”

“어떠냐니요?”

“바다 말이야. 너도…… 진짜 어릴 때 빼곤 오랜만에 보는 걸 거 아냐.”

기하는 지그시 검은 수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빛을 등진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도 떠오르고 있지 않았다.

“글쎄요……. 저에게 바다란 좋은 수단의 장벽 외에 다른 의미는 없어서.”

“그래서 이런 험한 지형의 섬을 골랐어?”

“침입하기 어려운 지형일 것이 우선순위이긴 했죠.”

도망가기 어려운 지형이라는 말을 그는 돌려서 표현했다. 이제 그런 것 따위 상관없어진 나는 씁쓸해진 입 안을 와인으로 씻어 버렸다.

“이렇게 너랑 마주보고 바다 옆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게 신기하다니까. 이런 거 다신 할 수 없을 줄 알았거든. 지금도 사실 좀…… 안 믿기기도 하고.”

“저도요. 매일 아침 형님이 옆에 누워 계신 걸 보면서 이젠 정말 꿈이 아니구나, 현실이구나 깨닫곤 합니다.”

자고 있는 내 허리를 끌어당기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면서 기하는 종종 현실임을 확인받으려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기하를 느끼면서 이것이 현실임을 직시했다. 시간이 깊어지며 차가워진 바닷바람에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너는 뭐 원하는 거 없어? 보고 싶은 거라든가 하고 싶은 거라든가. 이제 다 할 수 있게 되었잖아. 영화관은…… 좀 더 생각을 해 봐야 할 거 같지만.”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무수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물었다. 함께 마트에 가 보기, 나란히 앉아 도서관에서 책 읽기, 한낮에 분수대가 있는 공원을 하염없이 걷는 것 등의 누구나 당연히 누리고 살아왔던 일상들을. 그런 것들을 바라는 것만으로도 기하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는데.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우선순위를 정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수를 세며 무얼 먼저 해야 하나 고민하는 나를 바라보던 기하가, 나직하게 고했다.

“사랑하는 거요.”

“…….”

“바라는 만큼. 마음껏 어루만지고 껴안으며 사랑하는 걸 원합니다.”

헤아리던 손가락을 민망하게 만드는 단호한 음성이었다. 아직도 형제의 그늘에서 벗어날 생각을 않는 나를 질책하는 다정한 꾸지람이었다.

나는 수치심과 가벼운 흥분을 동시에 느끼고 건넬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님께서도 저를 원하셔서 허락하실 날을요.”

내가 널 동생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드러내면, 곧바로 이렇게 남자로 보도록 방향을 정정해 준다. 심장이 크게 방망이질 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허둥대던 나는 또 나쁜 패를 꺼내들어 버렸다.

“내가…… 평생 원하지 않으면 어떡하려고?”

“…….”

“평생 기다리게 되면 그때 너는…….”

유혹을 한 상대에게 던지기엔 한심한 도발이었다. 말실수에 얼어 버린 나를 보고 기하는 뜻밖에도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살며시 웃었다.

“왜…… 웃어?”

도저히 웃을 만한 대답이 아니었을 텐데 웃는 모습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기하는 미소 지은 그대로 그냥, 이라 흘렸다.

“그냥.”

“…….”

“그냥 형님의 평생에 제가 있는 게 당연해진 것이 기뻐서요.”

뺨에 이토록 열이 오르는 것은 분명, 술기운 탓일 거다.

“슬슬 일어날까요?”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일어났다. 다음 장소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미리 연락을 돌렸는지 가는 곳마다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살면 된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번 외출 때 워낙 질색하긴 했었다. 그래도 괜찮은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됐는데.

이 낙원은 우리가 이렇게 손을 맞잡고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누구에게 보인다 해도 지탄받을 걱정도, 변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되니까.

옆에서 흔들리는 기하의 손을 내가 먼저 살짝 쥐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깍지를 껴 왔다. 슬그머니 잡은 손을 흔들었다. 기하가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앞만 바라보았다. 가끔 스치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보일 듯 안 보일 듯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그들의 눈에는 혐오감이 아닌 경외가 떠올라 있었다.

한적한 인도 위를 손을 잡은 채로 걸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감싼 손은 따뜻했다. 무언가 벅차올랐다.

다 먹은 아이스크림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문득 하지 못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마워.”

이유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기하는 미소를 띠며 저도요, 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손을 놓지 않고 우리의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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