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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헌 (30/47)

이지헌

‘기현아, 이기현!’

발소리가 멀어진다.

그 아이가 도망가고 있다. 멀어진다. 나의 것이, 또 다시 내 손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지헌은 필사적으로 문고리를 흔들었다. 기현아, 기현아 가지 마라, 가지 마. 할 얘기가 있어. 너에게 해 줄 얘기가……. 외치고 또 외쳤다. 다 쉬어 버려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하지만 발소리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이지헌은 무너져 내렸다. 습한 비린내가 가득한 방 안에서 그의 곁으로 기어오는 수십 개의 살덩이들이 보였다. 비늘이 나무 바닥에 쓸리는 소리. 차가운 파충류의 피부가 발목부터 와 닿는다. 이지헌은 소름 끼쳐 비명을 질렀다. 몸을 필사적으로 웅크리고 문에 바짝 붙었다. 여우 신이 그랬던 것처럼 문고리를 흔드는 소리가 격해졌다. 제발 누가, 누가 좀, 와 줘.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어째서, 내가 갇혀 있는 것일까. 내가 축조했을 이 새장에.

내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어. 나는 분명히 운명을 바꾸었단 말이다. 그가 나에게 약속했어.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했어. 영생과 권능을 내려 줬어. 신이, 신께서 분명 그렇게 약속하셨어, 그런데 왜.

왜 내 몸을 타고 오르는 것은 이런 것들이지?

몸을 칭칭 감아 오르는 검은 뱀의 형상에 그는 이를 딱딱 부딪쳤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린다.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무언가가 잘못되었어. 기현아, 이기현…….

이지헌이 타고난 운명은 잔혹한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사교의 주술에 눈을 뜬 그는 자신의 사주를 확인하고 절망했다. 신의 제물이 되어 개국의 초석이 될 운명. 후손들에게는 영웅으로 칭송받겠지만 그 자신에게만큼은 저주와도 같은 사주. 가주의 자리에 오른 뒤 그는 온갖 사특한 주술들을 동원해 운명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별의 궤도를 인위적으로 뒤바꾸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훔치기로 한 운명은 다름 아닌 친아들의 것이었다. 용의 관을 타고난 왕의 별. 초석이 된 자신을 잡아먹고 신의 곁에 설 아이. 원래대로라면 자손이 관을 쓰는 길을 닦아 주는 덕이었지만 이지헌은 자신과 아들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가 왕이 되고, 아들이 제물이 되는 것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을 강림시키는 일이었다. 신에게 버금가는 주술을 완성하기 위해 독을 가진 무수한 것들이 갈려 나갔다. 성을 축조하는 토대 아래로 고독의 찌꺼기들이 묻혔다. 신의 그릇이 놓인 끝에 결국 그의 계획은 성공했다. ―아니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신은 아들의 육체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탄생했다. 그 경이로운 모습에 이지헌은 한순간 본인이 조물주가 된 환상에 젖었다. 자신이 만들어 낸 피조물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 아름다운 생명체가 두 손을 들고― 등줄기에서 가느다란 날개를 돋아 내고― 수개의 풍성한 꼬리를 펼치던 순간까지는―.

여우에 홀린 거야.

어째서 감히, 감히 한낱 미물인 인간 따위가 신을 건드릴 생각을 했을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 버린 거라고. 그런 생각이 머문 것조차 찰나에 불과했고 이지헌은 자신을 끌어안는 신의 다정함에 감격의 눈물을 쏟아 냈다. 생리적 공포에 동공은 확장되고 온몸의 구멍에서 땀을 쏟으며 벌벌 떨었지만 마음만은 구름 위를 뛰놀았다. 선택을 후회했던 것을 깡그리 잊고 다행이라고, 이 품이 내 것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잘된 것은 없다고 읊조렸다.

결계를 구축했던 주술사들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와 발치에서 멈췄다.

여우에 홀린 거야.

귓가에 길게 늘어지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이지헌은 그 웃음소리를 따라 입술을 벌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를 따라 함께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도 알지 못한 채로 웃으며 이 품을 벗어나면 절명할 것처럼 절박하게 신의 품에 매달렸다. 하하하하하 바닥에 누워 꿈틀거리며 웃었다. 냉혈 동물의 차가운 피부가 몸을 파고든다. 비로소 신의 품이 아닌 감금된 별채 안임을 깨달아 버린다. 웃던 얼굴 그대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안 돼. 그 말을, 그 말을 했어야하는데. 원래 내가 네 짝이었다고, 그가 아니라 내가 바로 네 제물이었다는 얘기를, 지금 네 목을 끌어안고 있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나라고.

‘이기현을 데려와. 이기현을, 이기현을 데려오라고. 내가 할 얘기가 있다니까. 기현아, 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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