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승호 (29/47)

이승호

이승호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창 밑으로 던진 시선 끝에 돌아가는 소년의 등이 보였다. 소년은 울고 있는지 팔을 들어 얼굴을 훔쳐 내고 있었다. 걸음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린다. 후― 연기를 그쪽으로 불었다. 소년의 등이 연기 속에 잠겼다가 나타났다. 이승호는 소년이 골목길을 돌아 완전히 사라지고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담배를 태웠다.

손가락 사이를 툭툭 털었다. 이미 재떨이는 수북하게 쌓여 탁자 위로도 꽁초가 넘쳐 있었다. 아무렇게나 꽁초를 던진 뒤 새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닮았다. 그 사람을. 지나가다가 봤던 것보다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니 확실히 그 사람의 아들인 티가 났다. 젖은 듯한 먹먹한 분위기에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 아직 덜 여물었지만 섬세한 이목구비가 그의 피를 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저 눈.

저 눈은 틀림없이 사료에 나오는 그것임이 분명했다.

몇 번 빨지 않은 담배를 그냥 튕겨 버렸다.

저 아이는, 액신이다.

이승호는 손을 들어 천천히 자신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늘 뽑아 버리고 싶었던 자색의 눈동자였다. 이 눈알로 인해 죽을 고비를 맞은 게 몇 번이더라. 하지만 진짜를 마주하고 보니 허탈감이 밀려왔다. 진짜인 저 눈은 가짜인 내 것과는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유리구슬에 불과해 보이는 탁한 자신의 눈알과 달리 저 액신의 눈은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듯 무구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바로 그 ‘진짜’라고, 숨길 수도 없는 빛을 저렇게나 발하고 있는데.

나란히 두었다면 누구도 착각하지 못했을 것을, 저렇게 뻔히 판가름되는 것인데도 내몰렸던 거다.

아물었다고 생각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억울함과 분노가 사무친다.

나는 그 고초를 겪었는데, 네놈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너는 그 사람도, 그자도 보호하려고 악을 쓰고 있다.

나는 저 아이의 대용품에 불과했던 것인가. 말 좀 해 봐. 이지헌.

이지헌.

이승호가 선대 가주였던 이지헌을 만난 것은 이지헌이 가주가 된 후였다. 혈족들에 의해 매장 당했던 이승호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고, 이후에 몸을 숨겨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직계 혈족이었음에도 누구에게도 복속되지 않고 아이러니하게도 저주 때문에 저주를 벗어난 남자였다. 하지만 자신이 나름 구원받았음을 알지 못하고 다시 뱀의 손을 잡아 버렸다.

이지헌은 보석 안을 가진 자들을 병적으로 찾고 있었다. 자색 눈을 가진 자가 집안에 액운을 불러올 것이라는 저주를 없애 주고 자신 대신 복수를 하는 이지헌에게 집안에 버림받았던 이승호가 매료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충성을 맹세하고 마음을 바쳤다. 자신의 신에게. 자신의 구원자에게.

반쪽짜리 신이었지만 이승호는 자신이 이지헌의 권속이라고 믿었다. 둘은 연인 사이에 가까울 만큼 친밀하게 발전했다. 그가 이승호의 눈알에만 집착하고 있는 걸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눈알 색 때문에 내쳐진 자신이 그 눈알 색 때문에 운명을 만났다고 여겼다. 그가 장자를 보기 전까지는.

이상하리만치 권능을 이은 신의 후계들은 자신의 후계자를 생산하고 나면 광증을 보이곤 했다. 종마로서의 역할을 끝나고 나면 쓸모가 다해 버려지는 것처럼.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고 자신의 형제가 그러했고 자신의 연인 또한 그러하고 있었다.

그렇게 될 것을 알고도 막을 수가 없었다. 여우 신들은 강박증에 가깝게 자손을 남기는 것에 필사적이었다. 그것이 자신들의 존재 의의인 것처럼 사랑하지도 않는 처를 들이고 밤을 보내고…… 또 보내고…….

그 꼴을 보다 못해 함께 도망가자고 애원한 적이 있었다. 순진하게도 그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가 베풀었던 은혜가, 애정이, 복수극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의 유언만은 자신이 반드시 들어주겠노라고 맹세했었다. 그게 남겨진 그가 연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임무라 여겼으므로.

애달픈 삶이다. 끝의 끝까지 이 빌어먹을 핏줄에 이용만 당했다는 것도 모르고. 사실 모든 것은 전부 다 저 아이의 것인 줄도 모르고.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저 애는 곧 내 손아귀에 떨어진다.

천천히 삶아서 죽이는 게 좋을까 아니면…….

원승호는 연인으로 믿었던 자가 선물했던 지팡이를 그윽하게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여우 문양의 금각이 멋스럽게 새겨진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저주받은 피가 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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