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김태영 (28/47)

김태영

저 멀리 하얀색 가운을 입은 여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팔을 펼쳐 위아래로 휘저었다. 그 광경이 슬로 모션 같이 늘어진 프레임으로 눈에 박혀 든다. 김태영은 동그랗게 뜬 눈을 끔벅였다. 위협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땅을 지지하고 있는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주먹도 꽉 쥐어진다. 여자의 가운 자락이 마구잡이로 나부꼈다. 돼지 꼬리같이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도 이리저리 튀어 나온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뛰어온 여자는 이상한 소리를 외치며 이기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자기!”

얼씨구.

김태영은 입을 떡 벌리고 그들의 재회를 지켜보았다. 무슨 백 년 만에 만난 가족 상봉같이 난리가 났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볼 만큼 큰 소리로 외치는 그녀를 보며 김태영은 슬며시 한 발 물러나 어깨를 으쓱하며 일행이 아닌 것을 어필했다.

박현진. 특별 관리 대상. 선일의 장녀이자 이기현의 주치의. 읽었던 그녀의 프로필을 되새겨 보았다. 여자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이기현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방방 뛰고 있었다. 프로필 속 그녀와 현실의 그녀는 꽤나 매치가 안 되는 모습이었다. 동통 성애자, 저래 봬도 의도적 의료 사고를 몇 번이나 낸 사이코패스. 선일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는 반쪽짜리 변절자.

어딜 보아도 그런 무시무시한 옵션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역시 사람이란 무섭단 말이야.

감시자에 걸맞게 상대의 평가를 마친 김태영은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티를 철철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쯤 둘을 떼어 놓으면 되나 가늠하면서 끼어들 틈을 쟀다. 그녀는 이기현이 유독 약한 여자라고 했다. 이기현의 표현에 따르면 야생마 같고 사랑스러운(대체 야생마와 사랑스러운이 어떻게 공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라고, 김태영과 아주 잘 어울릴 거라는 평가를 덧붙였는데 당사자로서는 도무지 절대 공감할 수 없는 바였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 다 자기 덕이야. 고마워서 어떡하지?”

“제 덕은요…… 오히려 저 때문에 고생한 건데.”

“고생은, 자기가 한 게 고생이지. 자기 한국에서는 실종 처리된 거 알아?”

아니 굳이 저런 얘기는 왜 해서 애 시무룩하게 만들어? 어깨가 축 처지는 이기현을 보고 김태영의 못마땅한 눈초리가 도끼눈으로 변했다.

“하하…… 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어쩜 좋아.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 마. 앞으로 나도 함께 있을 테니까.”

“정말요?”

“그러엄. 우리 이제 여기서 행복하게 살자. 여기서는 남들 눈치 안 보고 영원히 함께할 수 있잖아?”

“음―, 저기요?”

아주 둘이서 애틋하고 난리가 났다. 날 혹시 잊고 있는 거 아니냐며 손을 휘저었다. 거기 그쪽 상당히 불온한 발언을 하고 계시거든요?

“아무튼 덕분에 살았어. 날 낙원으로 부른 게 자기라면서? 안 그랬으면 영영 광에 갇힐 뻔했는데 생명의 은인이야.”

“저 아니었으면 그런 일도 안 겪었을 텐데요. 일찍 모셔 오지 못해서 죄송했어요. 여기가 좀 정리된 다음에 오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착하기도 해라. 사실 나도 자기한테 고백할 게 있어. 이따 다 얘기해 줄게.”

“저도 할 말이 많아요.”

“몸은 좀 어때? 세상에 왜 이렇게 야윈 거야. 잘 살고 있었어야지 이 누나 마음 아프게.”

“어이, 좀 떨어지지 그래요.”

여전히 이기현을 꼭 끌어안고 있는 여자의 가운을 잡아당기자 매서운 눈으로 돌아본다. 기세에 눌려 슬그머니 손을 뗐다.

“여기 오자마자 벌을 받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알아서 조심하자구.”

“누구신데 반말이세요? 저 아세요?”

뾰족한 목소리에 이기현이 끼어들었다.

“이쪽은 김태영이에요. 제 친구고 같은 연구소 동료구요. 이쪽은 박현진 누님. 내 주치의시고 어려 보이지만 우리보다 연상이셔. 둘이 인사해요.”

서로 노려보면서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이기현은 뭐가 좋은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붕붕 흔드는 손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악력도 추가되는 게 느껴졌다. 김태영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참내, 내가 여자라고 져 줄 줄 아나.

……그 뒤로 완전히 기 싸움에서 밀린 김태영은 그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걸어가는 뒤를 얌전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왜 신께서 그녀를 싫어했는지 너무 잘 알겠다. 진짜 기분 나쁘게 만드는 여자다. 저 여자 진짜 신 쪽으로 복속된 사람 맞아? 이기현이 아니고? 지나치게 이기현에게 감응되어 있는 거 같은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처음에 내렸던 평가에 사심을 그득그득 담아 어떻게 보고를 올릴지 궁리하는 김태영 앞으로 이기현이 다가왔다.

“기다렸지? 미안. 오랜만에 만난 거라 할 말이 많았어.”

“다 끝났어? 더 얘기해도 괜찮은데.”

“이제 시간은 많으니까.”

병원 건물 앞에서 손을 흔들던 박현진이 안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 걸음을 옮겼다. 이기현의 표정이 편하게 풀어져 있었다. 신께서 왜 위험을 감수하며 죄인들까지 낙원으로 이송했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정 많은 여우는 살면서 내내 죄책감에 시달렸을 테니까.

이기현은 옷깃을 여미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말이 맞지? 둘이 잘 어울릴 줄 알았어.”

“뭐어? 네 눈은 옹이구멍이냐?”

“역시 잘 어울린다니까. 아까 누님도 너랑 똑같은 소리 하더라고.”

“아니 내가 어디가 어때서? 그 여자 진짜 웃기네?”

볼멘소리에도 이기현은 즐거운 듯 웃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뭐가?”

말끝을 흐리며 바람결에 제멋대로 헝클어진 앞머리를 매만졌다.

“친구끼리 인사시키는 거. 지인끼리 소개해 주는 거. 그런 거 책이나 드라마에서나 봤거든.”

이래서 굳이 그녀를 만나는 자리에 따라온다는 나를 만류하지 않은 거구나. 감시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선선히 허락하기에 온 건데 설마하니 그런 걸 해 보고 싶었을 줄은 몰랐다. 이기현은 때때로 의도하지 않고도 이렇게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아마도 여우여서가 아니라, 인간인 이기현의 능력일 거다. 아니 능력보다는 매력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기하가 만들어 준 인연들이 싫었거든.”

주차장으로 연결된 오솔길을 걸어가면서 중얼거린다. 김태영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새로 깐 지 얼마 안 되는 도로에 낙엽이 소복했다.

“어차피 대부분은 다 집안 것들이라서 숨이 막혔어. 어디를 가도 이 집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분이라서. 정을 붙이고 싶지가 않았어.”

“나도 집안 것이잖아.”

씩 웃으며 덧붙인 말에 이기현은 음, 하고 말을 골랐다.

“너도 싫어했어. 그래서. 알잖아. 처음에 네가 친해지자고 다가왔을 때 어떻게 대했는지.”

“그래. 아주 싸가지가 바가지였다고.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었다니까.”

“더더군다나 넌 날 감시하러 온 거라고 직접 얘기씩이나 했으니. 더 진절머리 났었지.”

“어차피 들통날 거 빨리 얘기하는 게 낫겠더라고.”

“그러게…… 친해지고 싶지 않았는데.”

친해지고 싶지 않았는데.

그건 내 쪽도 마찬가지였어. 그에게 휩쓸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으며 김태영은 쓰게 웃었다.

처음에는 싫었다. 나의 주인인 신에게 반하는 자. 집안에 재앙을 몰고 올 수도 있는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인간 제물. 볼 거라고는 신을 닮은 아름다운 용모밖에 없는 천덕꾸러기로 여겼다. 그리고 그렇게 교육받았다. 그에게 감응해서는 안 되었으니까.

가능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어떤 종류의 마음도 피어나지 않도록 훈련받았다. 하지만 이처럼 너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된다.

……역시 보고는 적당히 쓰는 게 좋겠어. 남 말 할 처지가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느슨해진 거지. 입 안이 썼다. 맹렬하게 담배 생각이 났다.

* * *

김태영이 감시자로 발탁된 것은 연구소에 들어가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수뇌부는 가문의 아이들 중 이기현과 비슷한 나이대를 선별하여 친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했다.

품성과 자질을 시험하고 최종적으로 발탁된 두 명의 아이. 김태영과 김시연. 연년생의 오누이였다.

한집안에서 둘이나 자격을 가진 것에 부모는 가문의 자랑이라며 기뻐했다. 신과는 감히 닿을 수도 없는 거리에 있던 집안은 두 아이의 희생으로 한층 더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계급이 부여됐다.

한 살이 더 많았던 김태영은 이기현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기보다는 그의 주변에 맴돌면서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누이는 이기현을 진짜 신이 아닌 제물로 인식한 상태였다.

제물이 즐거운 학업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우미 역할, 그런 가볍다면 가벼운 임무였다. 신의 소유가 혹시라도 흠집이 나지 않도록, 감히 발칙하게 도망가지 못하도록, 사실상 이게 진짜 의무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기현에게 과도하게 관심을 갖는 자들이 많다는 걸 보면서도 이상함은 느끼지 못했다. 그저 얼굴값을 한다 정도의 감상이었다. 이기현에게 말 한번 붙여 보겠다고 같잖은 수작질을 거는 남학생들은 양반이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성인 남자가 뒤를 쫓은 적도 수번이었다. 어딜 가도 끈적끈적한 시선들이 반드시 따라붙었기에 제물이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들에 염증을 느낄 만도 했다.

‘그렇게 잘생겼나?’

우유팩에 남은 우유를 소리 내어 빨아들인 김태영이 난간 아래의 이기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멀리서도 흰 피부에 가느다란 목덜미가 눈에 들어오는 걸 보니 흡인력이 있긴 한 거 같은데……. 남자치고 매가리 없고 약해 보이지 않나.

‘왜 저렇게 난리들이지.’

소매를 붙잡는 여자애의 손길을 야멸차게 뿌리친 이기현이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분명 여자애는 고백이라도 할 심산이었을 텐데 시비 거는 걸로 받아들인 게 분명했다. 아이고 저 성질머리 어디 안 가네.

‘그럼 잘생긴 거지 못생긴 거겠니.’

교복 치마를 팡팡 쳐 먼지를 털어 낸 김시연이 쏘아붙였다. 흠…… 김태영이 빤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키도 내가 더 크고, 덩치도 내가 더 크고. 성격도 내가 더 좋고, 얼굴도 뭐.

‘내가 더 낫지 않나?’

‘미쳤나 봐.’

질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옆으로 다가온다. 그녀가 휘두른 주먹을 얼른 옆으로 피했다. 김시연은 난간에 기대 바로 아래를 지나가는 이기현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짜증을 숨기지도 않고 풀풀 풍기는데도 밉지 않고 앙칼진 맛이 있는 얼굴이었다. 휘익, 불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예쁘게 생겼잖아. 곱상하니 왕자님같이. 실제로 왕자님 같은 대우를 받고 계시기도 하고?’

‘쟤가 뭐라고 우리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나라면 그냥 집에 틀어박혀 있겠다. 신께서도 그러시는데 지가 뭐라고 남들을 고생시켜. 그러니까 집안 어른들이 맨날 욕을 하지.’

‘직접 가서 그렇게 말해 보든가. 여기에 숨어서 종알거리지 말고. 앞에선 찍소리도 못 할 거면서.’

‘야 인마. 말 다했냐.’

‘다 안 했는데.’

김시연은 깔깔거리며 휘두른 주먹을 피해 옆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제발 조신해지라며 가르친 발레는 호신용으로만 써먹는 중이었다. 우아하게 발끝을 세워 까닥까닥거리더니 곧 가방에서 편지 몇 장을 꺼내 흔들었다.

‘오늘도 이만큼이나 있더라. 읽어 볼래?’

김태영의 여동생인 김시연은 유별났다. 되바라졌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똑 부러졌다. 명령한 것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수행하고 있는 김태영과 달리 김시연은 독자적으로 이기현의 주변을 파고들었다. 대내외적으로 상냥하고 우수한 모범생의 가면을 쓰고. 자신이 이기현의 친구 역할에 선발될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똑똑한 여동생 덕분임을 김태영은 알고 있었다.

불치병을 앓아 시한부였던 어머니는 신의 은혜를 입고 무한의 생을 얻었다. 죽는 게 낫다고 울부짖던 고통도 멈췄다. 비록 병은 치유되지 못하고 정지된 상태였지만 김태영의 집안은 신의 은혜를 갚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충성을 증명해야만 했다. 김태영보다도 김시연이 유독 신의 후계들과 가까워지길 원했다.

제물에게 여자 친구 따위가 생기면 큰일 날 거라고 생각한 것도 그녀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제물의 여자 친구 자리를 본인이 가지길 원했다. 그 어떤 것보다 신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 위험한 줄다리기라는 걸 알면서도 계획했다. 우선은, 이기현에게 들러붙는 잔챙이들을 제거할 것.

사물함에 있던 다른 여자아이들의 러브레터를 훔치며 김시연은 사악하게 웃었다. 마치 다른 새의 알을 둥지 밖으로 떨어뜨리는 뻐꾸기 새끼가 된 것 같다며.

‘얘는 진짜 너무 집요해. 이렇게 집요하면 인기 없는 것도 모르나. 몇 번을 보내는 거야 정말. 얘는 또 이 촌스러운 편지지를 골랐네. 센스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냐고. 적어도 이기현이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는 좀 파악해라.’

이름을 확인하며 휙휙 편지들을 넘겼다. 김태영은 씁쓸하게 그 중 하나를 뺏어 들었다.

‘이런 짓도 해야 돼?’

‘그럼. 손 놓고 있다가 홀딱 여자 친구 만드는 거라도 지켜볼래?’

‘쟤 여친 못 만들어. 만들어도 저 성질머리면 하루를 못 갈 거라는데 내 성을 건다. 아까 하는 짓 못 봤어? 그리고, 쟤 눈 높던데? 웬만한 여자애로는 성 안 찰걸. 너 같은 걸 좋아할 리가 있나.’

‘무슨 소리야. 난 정공법을 아는데. 틀림없이 쟤는 날 좋아하게 될 거야.’

‘정공법? 그게 뭔데.’

의심스러운 눈을 하고 묻는 김태영을 보며 김시연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곤 발끝을 세운 뒤 아라베스크 자세로 다리를 쫙 폈다. 발레로 다져진 예쁜 발목을 이리저리 돌린다.

‘그런 게 있어.’

그의 동생을 내려다보며 꽃이 피는 듯한 미소를 띠던 이기현의 얼굴을 알고 있다. 자신마저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 근사한 미소를. 김시연은 그 미소를 떠올리며 자기도 싱긋 미소를 지었다. 파고들 틈도 알고 있다. 어떤 유형에게 약한지도 잘 알고 있다. 다행히도 외탁한 내 얼굴은 그분을 많이 닮았어.

‘좋아할 수밖에 없을 거야.’

* * *

그건, 스스로한테 했던 말인 걸까.

김태영은 누워 있는 여동생을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좋아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자신감 넘치던 말을 하던 아이는 다리가 부러져 다시는 춤을 출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사실 발레를 좋아하지 않았어. 그러니 상관없어, 그딴 말을 위로랍시고 건네고 있다.

김시연의 단언대로, 이기현은 분명 김시연을 좋아했다. 하지만 김시연이 훨씬, 훨씬 더 많이 좋아했다는 게 문제였다. 감응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이기현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줄 어린 그들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김태영은 그가 사실 제물이 아닌 진짜 신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공개한 수뇌부들을 전부 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누이의 희생으로 비로소 감응에 관련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는 것은 제게 전혀 보상이 되지 않았다.

괴물, 그런 괴물을 사회에 풀어놓고 심지어 우리 오누이에게 지키게 만들었어.

여자 친구라는 역할놀이에 그쳤어야 했는데 김시연은 순식간에 이기현에게 매료됐다. 그녀가 이기현을 보고 예쁘다고 감탄했던 그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을 것이다. 타오를 것을 뻔히 알고도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격이었음을 왜 그땐 몰랐을까.

좋아하고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이기현을 독점하고 싶어 했다. 다른 권속들이 그러하듯, 다른 변절자들이 그러했듯.

도망치자고 이기현을 꾀어내고 어리석게도 도망쳤다. 결과는 보다시피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놓고도 김시연은 웃었다고 했다. 여우의 힘에 잠식되어 더 이상 예전의 여동생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권속으로 화한 자는 주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그대로 놔뒀다가는 이기현의 악의에 물들어 수많은 이들을 해칠 것이다.

천만다행히도 그녀는 신의 너그러움에 구원받았다. 처분되지 않고 대신 영원히 그분 곁에서 감시당하게 되었다. 또다시 신에게 은혜를 입어 버렸다.

김시연이 이기현과 만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내 동생을 그분이 감시한다면 이기현은 내가 감시해야 했다. 그래서 너의 친구로 자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발령이 난 첫날,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건넨 인사였다. 그에게는 꽤나 쥐어짜 낸 용기였건만 구부정하게 몸을 숙이고 꽃을 들여다보는 이기현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김태영은 입술을 비틀었다.

‘이기현 씨?’

몇 차례나 불러도 그대로다. 인내심이 닳고 있었다. 욕이 나올 것을 꾹꾹 참아 내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기현의 귀에 꽂힌 이어폰이 보였다. 망설이다가 툭툭, 그의 어깨를 쳤다.

아, 이기현이 고개를 돌렸다. 약간 놀란 듯 커진 눈동자. 그보다 놀란 것은 김태영이었다. 얘가 이런 얼굴이었나? 이렇게나 처연하고 슬퍼 보였나?

휘익, 휘파람을 불던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예쁘게 생겼잖아. 곱상하니 왕자님같이…….

왕자님같이…… 그렇게 말하며 난간에 기대어 웃던 김시연의 목소리가 오래오래 성가시게 귓가를 맴돌았다.

이해할 수 없었어. 네 말은. 왜 감응이 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피투성이의 그녀를 흔들면서 어째서냐고 외쳤었다. 네 계획은 그게 아니지 않았느냐고.

그런데 너는 휩쓸렸던 거구나. 이 아이의 쓸쓸함에. 외로움에.

시선을 싫어하는 습관은 버리지 못했는지 뜯어보는 그에게 이기현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누구……?’ 하고 묻는 말은 짧았다. 경계하는 눈초리는 그가 마주하고 있는 것이 예전의 그 예민한 소년임을 깨닫게 했다.

‘잘해. 그를 사랑하지 마.’

뜨끈하게 올라오던 감정은 다행히도 차게 식었다. 이번에도 네 도움을 받았다. 시연아.

‘그리고 나 대신 좋은 친구가 되어 줘. 나처럼 실패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 한다. 우리 오누이의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휩쓸리지 말고 그를 지키고 너를 지키기 위해서는…….

김태영은 감시자의 눈을 하고 그의 일인극을 관람할 유일한 관객을 향해 준비해 온 대사를 풀기 시작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그쪽 친구 역할을 하러 온 김태영이라고 하는데…….

* * *

오랜 기간 준비하고 노력한 덕분에 섬의 운영은 안정권에 들어서 있었다. 선별한 혈족들의 이주가 끝나고 제2 지구의 이주가 시작됐다. 소위 스폰서로 분류하는 자들, 세계 각국의 유지와 명사들, 추리고 추려 가문에 도움이 될 만한 명망 있는 극소수의 인물만을 선택하여 이주 자격증을 부여했다. 이기현은 혈족들 만큼이나 그런 자들도 경시했다. 권능의 은혜를 입으려 인간의 고유함을 포기한 자들이라며 세력에 편승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럼 하명하신대로 처분하겠습니다.

고저 없는 조정구의 목소리가 모니터 밖으로 흘러나왔다. 실내가 어두운 탓에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한층 더 딱딱하게 보였다. 어떤 명령을 내리든 결코 의문을 갖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지시한 대로만 수행하는 게 그의 미덕이었다. 이어지는 몇 가지 명령이 끝나고 내가 바라보는 화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다른 자들이 지시를 하달받고 자리를 옮겼다. 조정구가 다른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다음 말을 이으려 했다.

“잠깐.”

집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그의 말을 막았다.

“다음에 다시 얘기하지.”

화면을 다른 것으로 돌리고 방문 밖의 그를 불렀다. 곧 문이 열리고 이기현이 문가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다녀왔어.”

“다녀오셨어요.”

평소보다 조금 이른 퇴근이었다. 구름 낀 하늘이 낮게 드리워 있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해가 저물자 비를 뿌렸다. 내가 불러들인 비는 바다 위에 있었으므로 자연적으로 발생한 구름이었다. 약속이 있다던 이기현은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바로 집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비 오는 날에는 함께 있는 것. 그건 우리 사이에 암묵적인 룰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잠깐 들어가도 돼?”

“그럼요.”

방 안에 들어서는 그의 손에 차탁이 들려 있었다. 팔을 벌리자 내 목에 팔을 감고 가벼운 키스를 한 뒤 떨어졌다. 내가 거실 한쪽에 공방을 차려 커피를 내려 주기 시작하자 그도 곁눈질로 차 내리는 것을 보고 가끔 이렇게 차를 끓여 주곤 했다. 내가 피를 섞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왜 자신이 내리면 차 색이 붉지 않느냐고 투덜거렸다. 십 년 넘게 다도를 익힌 나와 차 맛이 다른 건 당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끓인 차는 또 특유의 맛이 있어 좋아했다. 조금 성급하게 달여 끝맛이 살짝 떫은 것이, 온도를 맞출 줄 몰라 과하게 우러난 것도. 그가 해 주는 것 중 뭔들 안 좋은 게 있겠냐마는.

“좀 늦으실 거라더니 일찍 오셨네요.”

“응, 비도 오고 해서 다음에 만나든지 하려고 일찍 헤어졌어.”

“오자마자 이것부터 내리신 거예요?”

“아래층에 차향이 안 나길래……. 슬슬 마시고 싶지 않을까 해서. 그나저나 이번에도 차 내리는 거 실패한 거 같아.”

“향기 진짜 너무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그러면서 찻잔이 아닌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한껏 체향을 들이켰다. 아직 씻기 전이라 차가운 바깥 냄새가 목덜미에 묻어 있었다. 은은하게 틀어 두었던 클래식에 빗소리가 연주를 덧칠했다. 유리창에 달라붙는 빗방울들을 보며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어김없이 그를 내 옆으로 데려오는 그들에게.

“저녁은 전골 괜찮아? 오늘은 내가 요리할게.”

“벌써 고용인들이 준비해 놓고 갔을 텐데요. 형님께서 고생 안 하셔도.”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재료도 다 사 왔어.”

그렇다니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비 오는 날이 되면 이 사람은 내가 어리광 부리길 바랐다. 자신이 망가뜨렸다고 믿는 왼쪽 손목 덕분에. 비가 오면 손목 힘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 봤자 보통 사람 수준이었다. 평소의 악력에 익숙한 내가 힘 조절을 못 하고 들고 있던 물건을 놓치거나 불편함에 미간을 찌푸리거나 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걱정하는 눈길이 따라붙었다. 그러면서 차마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냥 혼자서 저렇게 시키지도 않은 죄책감과 싸우는 중이다. 그게 나의 형이었다. 그리고 나는 먼저 나서서 괜찮다고 말해 줄 호인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베푸는 걱정과 염려를 고스란히 누렸다.

“와 진짜 맛있는데요.”

“정말? 진짜로? 다행이다.”

같이 살면서 종종 서로 요리를 해 주기도 했다. 이기현과 나는 입맛만큼은 상극이라, 각자의 취향에 맞춰 요리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이기현의 말에 따르면 지나치게 간을 하지 않았고 이기현은 바깥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서인지 지독히도 달고 짠 것을 선호했다. 그의 입맛을 차근차근 바꾸기 위해 적어도 식사만큼은 최대한 건강식을 섭취하도록 종용했다. 삶은 야채를 입에 넣으며 이기현이 생글생글 웃었다.

“오늘 연구소 주차장에서 길고양이를 봤어.”

“정말요?”

“응, 사진도 찍었어. 이거 봐 봐.”

코트 색이 검은 제법 커다란 고양이였다. 슬라이드해서 보여 주는 사진 대부분은 초점이 나가 있었거나 고양이의 움직임이 꽤 역동적으로 나타나 있었다. 키우고 싶으면 데리고 와도 괜찮다고 말했더니 고개를 젓는다. 처음 이곳에 정착하고 이기현에게 개를 키워 보자 제안한 적 있었다. 어릴 적 이기현의 꿈 중 하나였으니까. 작은 집에 개 한 마리를 키우며 함께 살자는.

그의 말에 맞춰 작은 집을 짓고 강아지의 종류는 그가 선택하길 기다렸다. 그런 생명체 하나 들여놓으면 정을 붙여 떠날 생각을 덜하지 않을까하는 사심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이기현은 이 집만으로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집 안팎을 꾸미는 데에 상당히 심취해 다른 것에는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천장에는 그가 골라 매달아 둔 일루미네이션들이 늘어져 부드러운 빛을 발하고 있고 식탁 위에는 테라리엄이, 거실에는 그가 가꾸는 행잉 플랜트들로 가득했다. 침실과 내 집무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그의 취향으로 하나씩 채워져 갔다.

이기현이 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거였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사람이 사는 냄새가 나는 집, 자신의 손으로 가꿔 나가는 집이었다는 걸. 감시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수단이었지만 그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겨 두던 것을 다 지우게 명령했었으니 그 레지던스에 정을 못 붙였던 게 당연했다.

그럼 지금은 괜찮을까? 이 집에는 안정감을 느끼고 있을까? 저렇게 안주한 듯 보이면서도 기회가 온다면 도망갈 생각을 품고 있는 건 아닐까?

이기현이 가끔 악몽을 꾸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악몽에 시달리다 깨면 나도 잠을 깼다. 나를 깨우지 않기 위해 몸을 떨며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을 등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무슨 꿈을 꾸었냐고 묻고 싶었다. 무엇이 아직도 너를 그렇게 힘들게 하냐고. 입술을 섞으며 위로하고 싶었다. 나를 깨우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조용히 체온을 나눠 주는 일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악몽의 빈도수는 차츰 줄어들었고 이기현은 내 품에 조금 더 파고들어 도로 잠을 청하곤 했다.

집무실로 돌아가려 복층 계단을 오르다 반쯤 문이 열린 드레스 룸을 바라보았다. 이기현이 막 셔츠 단추를 풀어내고 있었다. 저절로 걸음이 멈췄다.

옷이 벗겨지며 그의 등이 드러났다. 날갯죽지에 두 개의 커다란 상흔이 붉은 선으로 남아 있다. 낙인과도 같은 흔적이 하얀 피부에 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가느다란 목선부터 보기 좋게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까지 떨어지는 유려한 곡선이 시선을 빼앗았다. 매끈해 보이는 신체에는 타고난 근육이 빠짐없이 들어차 있어 조각 작품 그 자체였다. 남성의 육체가 빚어낼 수 있는 극치의 미였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했다. 그 빌어먹을 감응 따위가 아니라 그라는 사람 본래의 미모가 사람을 홀린다는 걸 알지 못하고, 저주받은 힘 탓이라 여기며 몸을 감추려고 가진 애를 썼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손을 넣어 만지기 쉽게끔 그의 홈 웨어는 전부 한 사이즈 이상 크게 주문했다. 이기현은 꺼내 든 옷의 크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별 불만 없이 몸에 걸쳤다. 줄줄 흘러내리는 목 부분을 추스르고 소매를 걷어 올린 그가 거울을 쳐다보다 비치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어,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올라가다가 문이 열려 있어서.”

뻔뻔하게 둘러댄 변명에 그는 머쓱하게 목을 만지작거렸다.

“아, 미안…… 내가 아직 같이 사는 거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아무런 흔적 없이 깨끗한 목덜미가 도리어 도착적으로 보였다. 그는 누가 자신을 보고 범하기라도 할 것처럼 쇄골 아래로 늘어진 옷을 끌어 올려 목덜미를 가렸다. 자연스레 체득한 저런 버릇들이 지켜보고 있는 사람을 더 충동질하는 걸 그는 몰랐다.

목이 타는 기분에 침을 삼켰다.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비가 많이 오기 시작했다고 씁쓸해했다.

“일이 남은 거면 차 더 끓여 줄까?”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더 필요한 건? 더 해 줄 만한 건 없어?”

도와줄 건 없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말해 보라고 그가 내 소맷자락을 살짝 붙들었다.

어떻게 할까. 내가 정말 필요한 게 뭔지 말한다면 너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할 텐데. 이쯤에서 살짝 당겨 볼까. 아니면 호의에 부응할까. 무엇이든 요구하길 바라며 기대에 찬 눈빛을 내려다보고 내 안의 짐승을 숨기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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