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오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감사하면서, 충성하면서. 목숨을 유지하게 된 것에 만족하며.
박종오의 하루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것으로 시작했다. 감사해라, 복종해라, 인이 박이도록 들었던 가르침은 그의 성격과 행동을 규정했다. 거대한 체구를 움직여 침대를 벗어난 남자는 감정 없는 짙은 눈으로 머리맡에 놓인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림은 한 소년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사진 한 장 가질 자격도 없는 그가 직접 수천, 수만 번을 그렸던 얼굴이었다. 그의 주인을 꼭 닮은 그것을 볼 때만은 물기 없는 검은 눈동자에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감돌았다.
그가 그려진 그림조차 감히 손을 댈 수 없다. 박종오의 손은 그림 위를 쓰다듬듯 허공을 맴돌았다. 그러다 시끄러운 알람이 울리고서야 상처투성이의 몸을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
진작 죽었어야 할 목숨을 신께서 관대하게 용서해 주신 거라며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했다.
배신자의 아들, 그리고 그 아들도 배반의 낙인을 가진 자. 아이러니하게도 아비의 목숨을 거뒀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던 패륜아.
신은 주인의 생명을 구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박종오도 그 운 좋은 자들 중 하나였다. 처분되어 광에 들어가야 했지만 차출되어 주인을 위한 그림자로 살 수 있는 훈련을 받게 해 준 것도 신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박종오가 감사하며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주인을 볼 수 있다. 주인을 지킬 수 있다. 삶의 의미는 그것뿐이었다. 그것으로도 차고 넘쳤다.
이기현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박종오는 그를 주인으로 섬겼다. 그의 주인은 그를 기억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는 단 하루도 그날을 잊은 적 없었다. 매번 복기하며 그 순간을 상기했다. 아들이 그 누구에게도 복속되길 원치 않았던 어머니 탓에 신의 후계들을 만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늘 옳은 말만을 했다. 이번에도 이연화의 판단은 옳았다.
여름치고 서늘한 날씨였다. 지면을 쓸어내리는 바람에 습기가 가득했다. 어머니를 위한 효심이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우산을 두고 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문 옆에 서 있던 박종오의 눈앞에 중학교 하복의 하얀 소매가 팔랑거리며 지나갔다. 그는 새가 날갯짓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박종오를 발견한 소년의 자색 눈이 휘어졌다. 넋을 잃은 그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넌 누구야? 이름이 뭐야? 왜 여기에 있어? 종알대며 쏟아진 질문에도 얼어붙은 입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옆에서 지켜보던 이기하의 눈이 차가워졌다. 형의 팔에 매달리며 그가 무어라 속삭이자 박종오에게 향했던 관심은 금세 다시 이기하의 것이 되었다. 곧 이기하의 손에 이끌려 그들은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잠시 뒤 무슨 변덕인지 소년이 다시 박종오에게로 다가왔다. 그때 박종오는 거의 기절할 것 같은 상태였다. 나중에 보자는 말을 하며 소년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지도 대답하지도 못하는 그의 손에 손수 쥐어 주기까지 했다.
그들이 떠나고 한참 뒤에야 박종오는 손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은 작은 초콜릿이었다.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다 녹아 포장지만 남아 버린.
그날 이후로 박종오는 어떻게든 제 주인의 곁을 맴돌려고 애썼다. 나중에 보자는 인사가 무색하게 주인은 늘 동생인 이기하와 함께였고 그가 들어갈 틈 따윈 없었다. 형제는 벽을 두르고 단둘만의 세상을 살고 있었다. 이방인은 그저 멀찌감치 두 형제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서로 연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쌓아 올리는 것을 보며 박종오도 함께 열병을 앓았다. 그가 웃으면 박종오도 웃었고 그가 울면 박종오도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가 쥐어 준 초콜릿은 박종오가 가장 사랑하는 음식이 되었고 주인이 즐겨 마시는 커피도, 취미도 취향도 모두 똑같이 따라 했다.
문신 역시 그러했다.
주인이 문신을 새겼다는 걸 알자마자 박종오의 손목에도 같은 것이 새겨졌고 이는 아들이 죽은 듯 살길 바랐던 이연화에게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신께서 알게 되면 지워지는 게 아니라 손목째로 잘리게 될 거다.’
혈족들 사이에 혹여라도 소문이 퍼질까 지우러 갈 수도 없었다. 박종오의 손목은 어머니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지져졌다.
감사하거라. 분수를 알고 살면서 넘볼 수 없는 것을 넘보아선 안 된다. 꿈꾸는 것만으로도 잃을 수 있다.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여길 날이 올 거다.
어머니의 말은 늘 옳다. 이기현이 도망친 것을 전해 들었을 때 박종오는 그리 생각했다. 자신이 욕심을 내서. 감히 그분의 곁에 다가가려 해서. 쪽지를 넣어 두었기 때문에 그를 잃을 뻔한 거라 믿었다.
구원으로 그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보다 차라리 나락에 떨어뜨려 곁에 두는 것이 낫다.
박종오 역시 집안 것들과 같은 핏줄이었다.
박종오는 고개 숙여 드러난 이기현의 목덜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주인의 목에는 못 보던 검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얼핏 가느다란 초커를 두른 듯 보이기도 했다. 손목에도 다시 문신이 생겨났다. 하얀 피부 위의 검은 줄 두개가 애처로워 보였다. 어떻게 이 사람은 뭘 해도 이렇게나 어울리는 것일까. 거세해 둔 감정조차 동하게 만들 만큼.
“수고했어요. 이만 가 봐요.”
자료가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축객령이 떨어졌지만 박종오는 한참 동안 그 문신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기현이 이상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중간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왜요? 또 무슨 볼일 있습니까?”
“박사님 목에.”
돌려 말하지 못하는 박종오가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물었다. 이기현이 아아, 하고 말을 흐렸다.
“아, 이거 어제 새겼어요.”
“왜 새기셨습니까?”
“그냥 내 맘이죠.”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은지 이기현은 현미경으로 시선을 내렸다. 박종오는 끈질기게 옆에 붙어서 이기현의 목덜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낙원에 이주한 이후에 둘의 관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이기현은 박종오에 대한 부채감으로 그가 곁에 있는 것을 허락했지만 박종오를 공기 취급하곤 했다. 물론 박종오는 이마저도 기꺼웠다. 조용히 주인의 근처에서 그의 모습을 마음껏 훔쳐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마침 나타난 김태영이 박종오의 목을 휘감았다.
“땡땡이치지 말고 이제 그만 일하러 가지이? 누가 자네보고 놀라고 명령했나?”
과장된 말투에도 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혀를 차는 이기현과 여전히 이기현만 응시하고 있는 박종오를 보고 김태영은 거의 끌어안다시피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박사님.”
“얘는 내가 데려간다~ 이따가 점심시간에 보자고.”
이기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을 뒤로하고 박종오는 거부할 수 없는 억센 힘에 의해 연구실 밖으로 끌려나왔다. 김태영은 연구실 문이 닫히자마자 박종오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눈깔 간수 잘해라. 확 파 버릴 수도 있어.”
그러고선 싱글싱글 웃었다. 표변하는 그를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라, 박종오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박사님이 왜 문신을 새기신 겁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신경 끄세요.”
“신께서도 같은 걸 새기셨습니까?”
“왜? 질투 나?”
아, 너랑만 있으면 담배가 땡긴다니까, 그는 웃옷을 뒤적거리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여기 오기 전에 원 없이 폈는데 에휴, 저 녀석이랑 일하려면 필수가 없으니 환장하겠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인마.”
“신께서도 같은 문신을 하셨나요?”
“아니 네가 그게 왜 궁금하냐고. 그만 포기 못 하냐?”
박종오가 미련 넘치는 얼굴로 손목시계로 가려 둔 손목을 매만졌다. 지져진 부분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하던 김태영이 밥맛 떨어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야말로 모가지가 날아가고 싶어서 그래? 너 어떻게 목숨 부지해서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냐. 신기하다니까.”
“그건 저번에 박사님이 도망치셨을 때 제가 이승호를.”
“아니! 말하라는 게 아니잖아. 그냥 넋두리라니까? 너 어디 가서 함부로 그런 말 하지 마라. 응?”
가지 않으려 버티는 덩치를 꾸역꾸역 끌어당기며 김태영이 욕을 짓씹었다. 시한폭탄 같은 놈. 모자란 놈. 어째 돌봐 줘야 할 놈이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이라 짜증이 솟는다. 김태영도 박종오가 이기현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승호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자식의 묫자리가 세워졌을 거다. 타인을 죽임으로 생을 유지하는 자라니. 운이 지지리도 많은 건지 없는 건지. 투덜거리며 그의 어깨를 더 단단하게 붙들었다.
“가자. 내가 잡생각 안 들 정도로 죽어라 굴려 줄 테니까.”
* * *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퇴근을 했다. 본가에도 레지던스에도 가기 싫었던 나는 최대한 야근을 끌어서 하는 편이었다. 이제는 기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차츰 퇴근을 앞당겼다.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집. 내 집. 돌아갈 수 있는 장소. 범인들이 집이라는 단어에 안정을 느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으로 가는 해안 도로에 진입하면 해가 저물어 가며 해수면이 붉게 물드는 황홀한 광경이 펼쳐진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넉넉해졌다. 창문을 열고 속도를 높였다.
상사화의 정원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조용히 안뜰에 들어갔다. 바깥까지 갓 볶은 커피콩 향이 진동을 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 그를 기쁘게 해 주고 싶어 발소리를 죽여 거실로 들어섰다. 공방에 서서 커피를 내리는 그의 등이 보였다. 단정하게 뻗은 허리와 넓게 벌어진 어깨 아래로 솟구친 승모근. 그리고…….
‘잘 어울려요.’
어제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형님에게 잘 어울린다고. 예쁘다고.
인기척을 느끼고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형님, 하고 부르는 반가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를 맞이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팔을 벌린다. 넋을 놓고 그의 모습을 보던 나는 그제야 그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잘 어울린다.”
손가락으로 그의 목에 새로이 새겨진 문신을 덧그렸다. 정말이지 그는 문신이 잘 어울렸다. 손목 문신 때도 그랬지만 목의 문신도 원래 그의 몸에 지녔던 것처럼 꼭 맞아떨어졌다. 관능적인 그의 분위기에 한층 더 힘이 실린다. 겨우 자해 흔적을 가리기 위한 일이었던 나와는 달리 그는 무엇을 해도 아름다움이 추가될 뿐이었다.
갑자기 입을 맞추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정말 잘 어울려, 재차 건넨 칭찬에 그가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 기뻐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예쁘다, 예쁘다 하는 것이 오랜만이었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붉게 부풀어 있는 피부에 입술을 댔다. 뜨거운 피부에서 배어 나오는 바닐라 향은 커피 냄새와 어우러져 고통스러울 정도로 좋은 냄새를 풍겼다.
이건 반칙이에요, 그가 웃으면서 속삭였다. 난처해하면서도 밀어내진 않는다. 아래가 부풀어 오르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계속 목에 입을 맞췄다. 내 허리를 감고 있던 기하의 손이 셔츠를 쓸어 올리다 조금씩 속살에 닿아 갔다. 거실을 꽉 채웠던 붉은 노을이 어느새 푸르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기하의 움푹한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충족된 소유욕에 더없이 충만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