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꿈에서 깨어나 힘겹게 눈을 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눈앞의 화려한 수국이 잠에서 깨어난 나를 맞이했다. 새벽녘의 경계선에서 선명한 색채가 유난히도 도드라졌다. 나는 수국을 보고 눈을 끔벅이며 방금 꾸었던 무채색의 꿈을 몰아내려고 애썼다. 분명 나쁜 꿈은 아니었는데, 힘든 꿈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검은색인데 나만 하얀색인 꿈.
꿈속의 나는 나의 다름에 겁에 질려 있었다. 누구도 나를 탓하지 않았지만 검어지길 바라며 몸을 웅크리고 문질러 댔다. 몸이 조각조각 나서 흩어지는데도 계속 그랬다. 그러다 지나가던 검은 아이가 내 조각 하나를 입에 넣었다. 검은색이 살짝 희미해졌다. 나는 얼른 다른 조각들도 내밀었다. 아이가 내 조각들을 한꺼번에 삼켰다. 그렇게 아이는 회색이 되었다.
나는 계속 몸을 조각내 아이의 입에 집어넣었다. 아이는 커지고 내 몸은 작아진다. 아무리 아이가 커져도 나처럼 하얀색이 되진 못했지만 나는 그것을 멈추지 못한다.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계속 잘라 냈다…….
동이 트고 있는지 창가에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가만히 웅크려 어둠이 물러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곳은 평화로웠다. 뛰는 가슴과 달리 너무 평화롭고 고요해서 불안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내 머리채를 잡고 끌어 내리며 이것은 네 몫이 아니라고, 꿈일 뿐이라고 윽박지를 것만 같았다.
그때 귓가에 기하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팔이 단단했다. 잠이 든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꿈이 아니라 이것이 현실이라고 알려 주는 듯했다. 등에 느껴지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체취에 기대어 호흡을 가다듬었다. 같이 살게 된 후에 알게 된 기하의 버릇 중 하나가 그는 내가 잠이 들어야만 잠을 자고, 내가 깨어나야만 깬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나는 일부러 게으름을 피웠다.
기하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도로 눈을 감았다. 가까운 곳에서, 파도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사방이 밝아져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파도 소리가 한층 더 가깝게 들렸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자 수국이 가득한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기하가 보였다. 이미 하루를 시작한 말쑥한 차림새였다. 산뜻한 상아색 셔츠에 검은색 진이 평소보다 그를 더 어려 보이게 했다. 계속 내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붉은 눈동자가 따뜻하게 빛났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저혈압 탓에 어지러워하는 내 미간에 짧게 입술을 누르고 인사한다. 방금 내린 향긋한 커피 냄새가 묻어 있었다. 반쯤 눈을 뜨고 좋은 아침이라고 중얼거렸다. 양쪽 뺨에 입술이 내려오는 동안에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허리 밑에 팔을 넣어 안아 올리기에 기하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가 원하면 이대로 같이 누워서 아침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혹은 지금처럼 나를 씻겨 주기 위해 그가 안아 올리기도 했다. 죽을 뻔했던 그날 이후로 본가에서부터 이곳까지 계속되어 왔던 일과였다. 처음에는 기겁을 했는데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자연스럽게 힘을 빼게 된다. 기하가 미리 온수를 받아 둔 욕조 안에 조심스럽게 내 몸을 내려놓았다. 물기가 닿자 벌어진 등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아프면 말씀하세요.”
젖은 가운이 벗겨지고 습관적으로 그의 팔에 매달렸다. 무거운 머리를 가누고 있으면 거품을 낸 커다란 손바닥이 몸 구석구석을 훑는다. 기하는 내 목욕 시중을 드는 것을 기뻐하는 듯했다. 의존하는 것이 하나 늘어날수록 안심하는 걸 알기에 스스로 씻을 만큼 회복이 되었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손을 반사적으로 잡았다.
“여긴 내가…… 할게.”
숨이 거칠어지기 전에 말했다. 기하는 물끄러미 욕조 안에 시선을 돌렸다가 선선히 물러났다.
“옷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욕실을 떠나는 등을 보며 젖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창백한 피부가 물결에 하늘하늘 흔들렸다.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살결을 문지르다 몸을 낮춰 뜨거운 물에 더 깊숙이 들어갔다. 기분 좋은 온도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유리 파편이 박혀 있던 가슴팍 상처들은 벌써 아물어 새살이 돋아나 있었다. 다만 어깻죽지에 난 상처는 간신히 덧나지 않을 정도로만 회복되고 있었다. ……내 주인이 아물지 않길 바라고 있기 때문에.
그날, 그 밤에 죽어 가던 몸은 아이의 품 안에서 재생했다. 나의 신이자 제물인 기하의 시간에 종속되며 신으로서의 내 시간은 종료되었다. 너를 선택하고 나의 정체성을 버리기로 한 순간부터 그가 축조했다는 세상을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썩은 것을 도려내 버리고 애초에 썩지 않은 척을 하면서.
기묘한 동거였다. 참상의 당사자들이 영위하기에는 지나치게 평화로운.
그가 아무것도 묻지 않기에 나도 그리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기에 나 역시 그리했다.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서로에게 상처가 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나의 죄를 고백할 용기가 없었고 기하의 죄를 물을 자격도 되지 못했다.
우린 신이 되기 전 어디쯤을 흉내 내고 있었다.
상사화의 밤에 손을 잡고 내려오던 길에 바꿔치기 당했던 동생을 되찾아 온 듯, 시간을 되감아 다시 한번 기회를 얻은 것처럼.
그가 준비했다는 것은 정말 완전히 새로운 삶이었다. 한국을 떠나 아예 낯선 땅으로 이주했다. 새로운 보금자리는 어느 제도에 붙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거대한 섬이었다. 일부러 여기가 어디인지, 어느 대륙의 경계에 속해 있는지 묻지 않았다. 더 이상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새로 이주해 온 곳은 한국보다 춥고 해의 길이가 짧았다. 기후도 꽤나 변덕스러웠다. 신이 강림하기 이전에는 아마도 척박했을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는 종이 뿌리내린 적은 없는, 생태계를 보전했을 땅이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내가 살았던 도시를 재현해 놓은 듯 생활권에 있던 것들이 모두 옮겨 와 옛 모습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조금 더 시간이 허락되었다면, 더 완벽하게 만들 수 있었다고 그는 아쉬워했다. 사건이 일어나며 강제로 이주하는 바람에 아직 섬 외곽은 개척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공사 중이었다. 그래도 쳇바퀴처럼 돌던 내 삶은 고스란히 영위할 수 있었다. 머무는 곳만이 달라졌을 뿐, 똑같이 지어 놓은 연구소를 올려다보며 밀려드는 소름에 팔을 쓸어내렸었다.
새로운 새장. 이번에야말로 어디에도 도망칠 수 없는. 그런 의지가 엿보이는 곳이었다.
“너무 오래 계시면 상처가 덧날 수도 있어요.”
기하가 웃으며 수건을 들고 곁에 다가왔다. 옷이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그의 팔에 또 몸을 맡기며 머리를 기댔다.
아침을 먹고 테라스에 나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구경했다. 이것도 하루의 일과 중 하나였다. 나도 내가 이렇게 바다를 좋아하는 줄 몰랐다. 늘 갇혀 있던 생활을 해서 그런지 끝없이 펼쳐지는 해안선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고양됐다. 시원한 파도 소리, 물결이 부서지는 소리, 밀려드는 바람에 셔츠가 부풀면 날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기하는 내가 혹여라도 밑으로 몸을 던질까 봐 테라스에 나갈 때마다 불안하게 지켜보곤 했지만 나는 절벽 위의 테라스와 온천수가 나오는 수영장이 있는 이 집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집의 규모는 본가의 안채보다도 작았지만 정원만은 뒤지지 않았다. 아마도, 사시사철 피어 있을 상사화의 꽃밭이 들판으로 이어지는 뒤뜰까지 만발하여 언뜻 보면 빛에 감싸인 듯했다.
새 집은 해안 절벽 위에 세워진 특이한 구조의 작은 복층형 저택이었다. 층고가 높고 내부는 전부 개방된 구조로 1층 한쪽은 작은 공방과 주방이 있으며 커다란 거실을 사이에 두고 다른 쪽에 개인실이 존재했다. 스킵플로어로 설계한 반층에는 욕실과 드레스 룸이, 2층에는 서재와 집무실 등이 있었다. 그리고 침실은 하나, 침대도 물론 하나였다.
바람이 앞머리를 헝클고 지나갔다. 눈가가 조금 뻑뻑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이었다. 손바닥으로 눈 밑을 꾹꾹 눌렀다.
함께 자는 것에 슬슬 익숙해질 법도 했건만 여전히 나는 옆에 누워 있는 동생의 존재에 간간이 잠을 설쳤다. 그건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기하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나를 어루만지곤 해 잠이 깨는 날이 잦았다.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깰 수밖에 없는 집요한 손길이었다. 손가락을 겹쳐 만지작거리다 손바닥으로 팔을 쓸어내리고 머리카락에는 입을 맞춘다. 등 뒤의 그가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졌다. 안고 있는 게 나라는 걸 계속 상기하듯이 체취를 들이켜고 달콤한 한숨을 내쉰다. 그러다 결국 견딜 수 없어졌는지 허리를 끌어안은 힘이 강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흘러나올 뻔한 신음을 간신히 목 안으로 삼켰다.
차라리 그냥, 하면 될 텐데.
함께 살면서 자연스럽게 예전과 같은 행위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기하는 의외로 참을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초반에는 내 몸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이후에는…….
청바지에 쑤셔 넣은 단말기가 울리고 있었다. 발신인을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인사말을 읊기도 전에 징징거리는 목소리가 쏟아진다.
―이 녀석아. 잘 지내고 있냐?
일 처리 때문에 아직 한국에 남아 있는 김태영이었다. 내가 해 놓은 짓이 있어서 얌전하게 굴었다.
―자료 보낸 거 봤어? 봤으면 회신을 했어야 할 거 아냐.
“좀 늦잠 잤어.”
―얼씨구. 누군 여기서 누구 때문에 개고생 중인데 너는 팔자 좋게 늦잠이나 잤다 이거지.
“미안하게 됐네.”
받아 주면 한도 끝도 없는 김태영답게 잔소리가 이어졌다. 고생은 고생인 모양이었다. 대충 맞장구나 쳐 주며 난간을 휘감고 올라와 있는 이파리를 매만졌다.
―원래대로면 나도 벌써 낙원에 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뭔 꼴인지. 거긴 좀 어떠냐. 살 만하냐?
“똑같지 뭐. 너도 오면 깜짝 놀랄걸. 너무 똑같아서. 소름이 끼칠 정도야. 네 단골집도 그대로 있다니까. 달라진 게 거의 없어서 기분이 이상해.”
―아 부럽다 부러워. 나도 얼른 낙원에 가고 싶다.
이곳의 통칭은 어느새 낙원이 되어 있었다. 낙원. 그리고 방주 계획. 우수한 종자만을 골라 낙원으로 이송한다. 신에게 복속하고 충성을 맹세한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나 섬의 건설에 필요한 인재들만이 이 섬에서 살 수 있었다. 모형 도시를 건설하고 인간을 선별한다니. 모르는 사람이 말했으면 헛소리도 참 거창하게 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진짜였다. 기하가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납득이 갔다. 아무리 그래도 낙원에 방주라니. 뱀의 사도에 가까운 자들이 그런 명칭을 붙인 게 사특하기만 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김태영이 방주에 대한 말을 흘린 적이 있었다.
“다 알면서 배신자…….”
―응? 지금 뭐라고?
여자만 골라 태울 거라느니 하던 게 어디의 누구더라. 괜히 배신당한 느낌에 울컥했다.
“……아니다 됐다 됐어. 그나저나 방금 경아 씨가 뭘 했다고?”
―네가 실종된 거 알고 엄청나게 울었다고. 이 죄 많은 남자야. 덕분에 나도 옆에서 같이 우는 시늉을 해야 했다고. 얼마나 짜증 났는지 아냐.
이미 나는 실종 처리되어 법적으로 죽은 자였다. 나다운 결말이긴 했지만 살아왔던 기록이 아예 사라져 버렸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를 납치했다는 누명을 쓴 강준형은…… 어떻게 되었는지 감히 누구에게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한테 관심이 하나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러지. 네가 알아서 잘 위로해 줘.”
―아무래도 네 주변부터 정리가 시작된 거라 연구소는 어수선하지, 사람들은 빠져나가지 분위기 완전 작살났거든. 문경아가 네가 실종되자마자 후임 뽑는다고 꽤나 반발했어. 돌아올 사람이라 믿고 싶었나 봐. 나보고도 어쩜 그렇게 태연하냐고 어찌나 한 소리를 하든지. 박종오 놈이나 문경아나 사람 쓰레기로 모는 덴 참 일가견이 있다니까. 확 다 불어 버릴까 보다.
“넌 언제쯤 들어올 수 있는데?”
―여기 일 좀 정리되면 바로 들어갈 거야. 원래대로라면 네 친구 역할이라 1순위로 비행기에 탔어야 하는데……. 네가 그 난리만 안 쳤어도…….
“이따 메일 보낼게. 그럼 수고해라.”
잔소리가 더 이어질 것 같아 얼른 전화를 끊었다. 단말기를 집어넣기가 무섭게 바로 뒤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기하가 베란다 문에 기대서 있었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바람이 찰 텐데 너무 오래 계시기에.”
그가 내 쪽으로 팔 한쪽을 벌렸다. 그 사이로 자연스럽게 들어가 기댔다.
“김태영이었어. 일이 많이 바쁜가 봐. 꽤 투덜거리더라고.”
“사람을 충원하라고 하겠습니다. 친구분이 얼른 들어오셔야 형님도 편하실 테니.”
기하의 말대로 바람이 쌀쌀했는지 그의 품 안이 평소보다 더 따뜻했다. 애초에 기온이 낮은 땅이라 내게는 좋지 않은 기후였다. 내가 몸을 가볍게 떨자 그가 웃으며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침대로 갈까요?”
그 말에는 조금도 성적인 의도가 없었음에도 흠칫 굳어 버렸다. 알아차렸을 터인 기하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아니면 차를 드릴까요? 몸을 덥히기에 좋은 잎이 있는데.”
그 아이다운 너그러움이었다. 화제를 돌려 준 관대함에, 차를 권해 준 것에 시선을 애매하게 비키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괜찮은 척, 예전과 똑같은 척하고 있는 것이 이렇게 들통 날 때마다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아직 트라우마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집에서 감금당한 채 수도 없이 몸을 열어야 했던 것에서.
괜찮을 거라 여겼지만 알량한 몸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정신은 분명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데, 몸이 괜찮지 않다고 외친다. 기하도 그걸 알기에 억지로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억지로 해도 돼. 나는 괜찮으니까.’
같은 침대를 쓰면서도 건드리지 않는 것에 그렇게 말했었다. 함께 살기로 한 이상 나 또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통한 지금은 괜찮다고. 다듬어지지 않은 서툰 허락에 기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급히 덧붙였다.
‘오해하지 마. 나쁜 뜻으로 한 소리가 아니야. 그냥 내가…… 너도 알다시피 예민해서 언제 고쳐질지 모르니까. 그래서.’
‘…….’
‘……억지로 하면, 하다…… 보면 괜찮아지는 걸 알잖아. 그동안 그렇게…… 아니 그랬다는 게 아니고.’
어째 말을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것 같다. 식은땀을 흘리며 더듬거리는 내 머리꼭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기하가 픽 웃음을 흘렸다.
‘물론 억지로 하는 것도 취향이긴 하지만.’
화가 난 건지 기분이 풀린 건지 알 수 없는 낮은 목소리였다.
‘이젠 그걸로는 부족해요.’
정중한 태도로 기하는 내 왼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빈 내 손목에 그의 문신이 남은 손이 겹쳐진다.
‘이번에 허락하면 그때부터 우린―.’
쇄골에서부터 올라가던 시선이 그의 드러난 목에 찍힌 선명한 상흔에 머물렀다. 목을 가른 듯 횡으로 길게 나 있는 상처. 그 상처에 시선을 빼앗겨 방금 그가 했던 뒷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
“형님?”
그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역시 컨디션이 안 좋으신 모양인데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시는 게 낫겠습니다. 아까 바람을 너무 많이 맞았나 봐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 기억을 되새기자마자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차마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 얼굴만 쓸어내렸다.
‘이번에 허락하면 그때부터 우린 부부처럼 살게 될 겁니다.’
‘……뭐?’
짙게 가라앉은 붉은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다른 뜻은 듣지 않겠다는 단호하고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을 때 허락하세요.’
그의 고백을 듣고 더 이상 놀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하나를 허락하면 두개를 요구하는 자다운 선언이었다.
그러니 저런 소리를 들은 이후부터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한 공간 안에 있으면 성적인 긴장감에 온 신경 다발이 비죽비죽 섰다. 허락하기 전까지는 담백한 스킨십만을 나누고 있는데도 가슴이 떨렸다. 지독하게도 의식하고 있었다. 동생의 목소리에, 손짓에, 불온한 상상을 더하면서.
쉬라고 만류하는 동생의 권유를 뿌리치고 결국 연구소로 출근했다. 일종의 도피였다. 운전대를 잡고 상념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해안 도로 옆에는 기암절벽들이 줄지어 있었다. 제멋대로 튀어나온 형용이 상상하는 어떤 것과도 닮아 보였다. 액셀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시원한 소리를 내며 차체에 속도가 붙었다. 창문을 내리고 바람을 맞아도 얼굴의 열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 사이에 선행돼야 할 무수한 말들을 제치고 기하가 선택한 말이 그것이라니. 아무것도 아닌 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우리 중 한 명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만들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의 태연함에 끌고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 일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날들을 위한 초석에 불과했다고. 그리고 진짜로, 그 선언을 들은 순간 머릿속을 지배하는 고민거리는 온통 그것뿐이게 되어 버렸다. 말 그대로 여우에 홀려 버린 것 같았다.
찰나긴 했어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쥐어뜯었을 만큼 그가 미웠던 때도 있었다. 나를 이용하고 능멸하며 기만했다는 사실에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도망칠 당시에는 진심으로 그랬었다. 적어도 이렇게 평화로운 생활을 다시는 함께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그걸 또 해내 버린다. 그 일이 얼마나 지났다고 얼떨떨하게 그의 페이스에 휘둘려서 예전처럼 살뜰한 형제로 돌아갔다가, 심지어 이제는…….
‘이번에 허락하면 그때부터 우린 부부처럼 살게 될 겁니다.’
그런 말을 들어 버렸으니 지금처럼 형제의 관계로만 살아갈 순 없을 것이다. 내게 칼자루를 넘겼지만 그의 선언은 도망가지 말라는 경고였다. 우유부단하게 구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압이었다. 그다운, 폭력적이기까지 한 고백이었지만 가슴이 뛰었다. 마음은 진작 답을 내렸다.
허락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이런 교착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 * *
연구소 지상 주차장으로 그가 탄 차가 진입하는 게 보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시간인 걸로 보아 꽤 속도를 낸 것 같다. 하던 일을 미뤄 두고 이기현이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화면 안의 얼굴에는 아직도 근심이 가득했다. 잰걸음으로 연구소 정문에 들어선 그가 출입증을 찍고 CCTV가 있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원.
망설이다가 머쓱하게 손을 들어 보이는 그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이기현은 저번부터 툭하면 CCTV 방향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자기를 지켜보고 있을 줄 알고 내게 인사를 건네는 것 같긴 한데…….
그 나름대로 노력하는 중인 거다. 내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슴 근처가 간질거려 턱을 쓸었다. 저렇게 사랑스러우니 도통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가 무심코 나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도 너그럽게 넘길 수 있는 게 저 때문이었다.
그가 연구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화면을 껐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라, 그 홍역을 치르고도 나는 그를 훔쳐보는 것을 그만두지 못했다. 대신 그와 상의하여 몇 가지 룰을 만들었다. 보안용 폐쇄 회로 기기 외의 다른 것은 설치하지 말 것. CCTV가 설치된 곳은 전부 고지할 것. 자신을 보는 것은 오직 나만이어야 할 것.
어차피 무슨 짓을 해서라도 훔쳐볼 생각이었던 나는 그가 허가를 내려 주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믿어 주겠다는데 허튼짓을 할 수가 없어 얌전히 그가 요구하는 곳에만 CCTV를 달아야 했던 것이 아쉬웠지만 그 만한 게 어딘가.
다기 뚜껑을 열고 차를 내렸다. 무색의 투명한 찻물이 고인 잔 위에 작은 병 안의 액체를 흘려 넣었다. 붉은 액체가 떨어지고 순식간에 사방에 특유의 향기가 퍼진다. 이기현의 체취였다. 향을 음미하다가 천천히 들이켰다.
어릴 때부터, 거슬러 올라가 전생 때부터 여우의 피를 마셔 왔다. 신체를 제물로 변이시키기 위해서. 아버지가 내게 교육한 수많은 것들 중 지금도 유지를 잇고 있는 것이었다.
붉은 찻물을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여우 피가 발린 살대를 짜 넣은 문 뒤에서 통곡하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는 나를 덫으로 만든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돌려줘.’
돌려 달라고 말했다.
‘내 것을 돌려줘. 도둑 새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가 누구 거라고? 강제로 짝을 짓게 만든 것은 아버지였을 텐데. 나는 정당한 내 몫을 돌려받았을 뿐이었다.
‘이기현을 불러와. 네 실체를 말해 버릴 거야. 전부 다 까발릴 거라고.’
무엇을?
‘그의 짝이 사실 나였다는 걸 말해 버릴 거야.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착각하는 중이라는 걸……!’
정말이지 웃음밖에 안 나오는 말이다.
사실 그 방에 갇혀야 했던 게 당신이었다고? 갇히기 싫어서 나를 생산해 대신 제물로 만들었다는 걸 고백하겠다고? 애초에 운명을 거스르고 나를 태어나게 한 건 당신이었을 텐데.
‘고백하면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형이 다 알게 돼요.’
여우를 모조리 잡아 죽인 게 당신이라는 것도. 이 성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을 해쳤는지도. 그가 가진 모든 증오들의 주인과 저주의 시작이 당신이라는 진실을.
그리고 그가 진짜 신이라는 것도.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그가 알아서는 안 돼. 날개옷을 찾은 선녀는 인간 따위야 버리고 날아가 버릴 테니까.
우리는 나무꾼이었고 공범이었다. 서로의 입을 봉하고 모든 사료를 불태웠다. 이경헌의 고발 덕에 끝까지 읽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저것을 읽고 전생을 떠올렸듯 형 역시 사료를 읽었다면 자신이 느끼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기현이 집안일에 염증을 느껴서 다행이었다. 아무것도 묻고 싶어 하지 않았고 아무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나의 꽃. 나는 너를 위해 태어났어. 그러니 네 날개를 꺾은 것도 정당한 일이야.
그의 온몸에 입술을 눌러도 어깻죽지에만은 키스하지 않았다. 매끈했던 등에는 커다란 상흔이 남아 버렸다. 내 허락 없이 그것이 아무는 날은 없을 것이다. 늘 이기현에게 어떤 방식이든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던 나로서는, 영구적으로 남은 상처가 그저 기꺼웠다.
앞으로 한 걸음만 더. 기다림이 보답받을 날이 머지않았다. 기꺼운 기분으로 이기현의 피를 탄 찻잔을 손안에서 굴리다가 단숨에 마셔 버렸다.
돌려줘, 돌려줘 제발……. 회환에 찬 아버지의 울음소리는 차츰 사그라지다가 흩어져 버렸다.
* * *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통칭 낙원으로 이주해 온 지 두 달째, 내 주변은 한국에 있을 때와 완벽하게 일치해졌다. 집을 둘러싼 정원에 심어 둔 꽃들은 벌써 봉오리가 올라온 녀석도 있었다. 날씨는 점점 더 추워져 나는 침대 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이 늘어났다. 원래도 에너지가 넘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육체는 꼭 필요한 에너지만 할애된 듯한 느낌이었다. 더 이상 신체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김없이 침상을 장식하고 있는 꽃 더미에 얼굴을 묻고 향기를 맡았다. 오늘은 기하가 일찍 집을 비웠다. 혈족들을 위한 가짜 본가(그곳 또한 예전의 본가와 똑같이 만들었다고 했다.)에서 정무를 보는 날이었다. 기억을 되찾고 난 후엔 본가 쪽으로는 얼굴도 돌리고 싶어 하지 않는 나와 달리 기하는 여전히 본가에 적을 두고 싶어 했다.
과거의 기억들, 전생의 기억들.
기하는 비교적 생생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태생의 한계 때문인지 신이었을 때의 기억이 무성 영화처럼 답답하게만 보인다. 신인 이기현보다 인간으로, 기하의 형으로 살았던 세월이 더 길었기에 전생의 기억은 타인의 기억을 양도받은 느낌이었다.
강준형 덕분에 사료의 진본을 확인했을 때에도 그랬다. 수없이 읽었던 전설과 신화와 설화의 하나 같았다. 현실감 없이 방관자의 눈으로 읽히기만 했다.
누워 있는 그대로 손을 올려 들여다보았다. 끝이 바스러지던 손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보다 더 매끄럽고 부드럽게 재생되어 있었다. 내 제물이었던, 그리고 신인 이기하의 힘이었다.
최후의 순간에 토해 내듯 고했던 이연화의 외침이 귀에 맴돌았다. 그녀는 내가 기하에게 힘을 넘기던 순간을 목격했다고 했다.
이 가문의 원념이었을,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했을 인간이자 신이 내 품 안에서 태어났다. 이 핏줄에 내려오던 권능을 두르고 불멸의 몸을 지닌 진정한 의미의 신. 그때 내 업은 완수되고 인간으로서의 삶은 끝을 맺었을 터인데 이렇듯 생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전부 그 아이의 염원 덕분이다.
손으로 목 근처를 쓰다듬었다. 아주 조금의 흉터도 남지 않은 매끄러운 표면이 만져진다. 나와 달리 기하의 목에는 상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내 상처를 자신에게로 옮긴 탓이다. 눈을 가리고 살던 그 많은 날 동안 너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자신의 몸을 희생해 내 상처를 없애 왔겠지.
지워지길 고대하며 지켜보아도 끝내 그 흔적은 선명한 색으로 남아 내 죄책감을 부추겼다. 그것을 볼 때엔 시선이 과거의 저편을 떠돌았다. 내가 손목을 가르고 그 아이가 손목을 가르고 둘이서 함께 보냈던 처절한 밤이……. 손목에 남겨진 흉터가 보기 싫어 예전엔 그 위를 문신으로 덮었다.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기하도 나를 따라 문신을 새겼다. 그걸 보았을 때 후회하고 절망했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안도하고 있었다. 내 죄를 덮어 준 그 애에게. 같아진 우리에게.
“다시 문신을 새길까 해.”
그래서 이번에도 충동적으로 말했다. 기하는 겉옷을 옷걸이에 걸어 두다가 멈추었다. 전등이 비추는 그의 등은 아름다운 근육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뒤에서 끌어안고 싶은 욕망을 가라앉히며 내 무릎을 끌어안았다.
“내가 지우긴 했지만…… 없으니까 허전해서.”
허락을 받을 일이 아니었지만 허락을 구하듯 말하고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가 등을 보이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초조하게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렇잖아도 언제쯤 말씀드릴까 하던 참이었어요. 제가 함부로 새길 순 없는 노릇이니까.”
전등 빛이 닿는 곳보다 더 키가 큰 탓에 그의 눈이 어스름한 불빛 속에서 붉게 빛을 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꿰뚫어 보는 듯해서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문신은 다음 날에 바로 새기러 갔다.
그 옛날 울면서 찾아갔던 시술소는 기억 속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내 덕분에 신과 연이 닿을 수 있었다고, 낙원에 올 자격을 받았다며 수년 만에 만난 타투이스트는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곳에서는 잔혹한 시간의 흐름은 힘을 잃고 과거만이 흐르고 있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과거를 떨치려고 했던 내가 과거의 발자취를 되짚고 있다는 게. 그에게 과거에 새겼던 것과 같은 것을 주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내 몸에 새겨진 문신은 두 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