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날씨가 변했다.
하늘의 색이 변했다.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구름의 모양이 변했다. 그림자의 길이가 변했다.
변하지 않은 건 기현의 시간뿐이었다. 갇힌 그 순간부터 이기현의 시간은 멈춰 버렸다.
시계 초침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방 안에 앉아 기현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까지가 기현의 새로운 새장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세상이 자신만 두고 변하는 모습을 매일 조용히 지켜봤다.
창밖의 어디쯤 던져둔 시선에 비치는 하얀 빛이 점차 사그라지며 줄어든 면적을 파란빛이 채워 갔다. 창문이 열려 있는 것도 아닌데 한기를 느끼고 어깨를 움츠린 것도 잠시, 곧 따뜻한 손바닥이 어깨를 감쌌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리고 또 변하지 않는 한 가지. 기현의 세상 안 유일한 방문자인 그가 돌아오지 않는 인사를 건네고 정수리에 짧게 입을 맞췄다.
“무얼 보고 계신 건가요?”
대답 없는 그의 시선을 좇아갔다. 창밖에는 겨울이 코앞인데도 시든 것 하나 없이 싱싱한 꽃무리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한동안 정원을 돌볼 여유도 없고 무리하게 힘을 쓰는 바람에 계절감을 맞출 시간을 내지 못했다. 서리가 내리고도 생생한 꽃망울들의 색채감이 섬뜩했다. 이제 이기현도 정원의 모습이 기이하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새 많이 자란 앞머리가 예쁜 눈을 덮고 있는 게 거슬려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
고요하던 이기현의 눈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노골적인 거부감을 모른 척하며 남자는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사락사락 손가락 사이에 스치는 머리카락이 제법 길었다. 내일은 머리카락을 한번 잘라 볼까. 경험은 없지만 손재주가 좋은 편이니 금방 익힐 수 있을 거다.
“꽃을 보고 싶으신 거면 정원에 나가 볼까요?”
밖에 나가자는 말을 했는데도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 인형처럼 살고자 한다더니 감정을 거세한 듯 굴었다. 이런 식으로 살다 보면 언젠가 남자가 떨어져 나갈 거라고 기대하는 것처럼. 그게 퍽 가련해 보여서 이기하는 쓰게 웃었다. 그한테 미쳐 있는 동생은 그가 이리 청승맞게 구는 것도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기현의 어깨를 끌어당겨 머리를 기댔다. 탄탄했던 몸이 요새 좀 말랐는지 불거진 어깨뼈가 느껴졌다. 팔을 둘러 꼬옥 껴안고 그의 몸에 체중을 실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형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엮으며 그가 속살거렸다.
“조금만 참아요. 당신이 여길 끔찍하게 여기는 이유를 알아.”
“…….”
“곧 벗어나게 해 줄게요. 그때까지만 이렇게 있어요.”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얇은 가운만 걸친 이기현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씻겨도 사라지지 않는 이기하가 남긴 체취였다.
그게 기꺼워 손가락 하나하나, 도드라진 관절마다 연거푸 입술을 눌렀다. 햇빛을 잘 받지 못해 하얗게 바랜 피부에 울긋불긋한 순흔을 남겼다. 얼마나 결핍되어 있었던 건지. 이렇게 뒤틀려 있는 상황에도 남자는 만족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마음대로 손을 댈 수 있는 형의 몸. 매일 자신의 침대 위에서 함께 잠드는 생활. 이기현의 몸을 침대로 쓰러뜨리며 쇄골의 움푹한 부분에 입을 맞췄다. 형의 체취에 물들어 가며 남자는 안락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상관없었다. 이렇게나 선명하게 맥박이 뛰고 있으니까. 자신을 밀어 넣을 때마다 경직되는 표정만으로도, 형이라고 부를 때마다 어깨를 떠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보다 확실하게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증거는 없지 않은가. 긴 정사를 마치고 밭은 숨을 토해 내며 이기현의 허리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다리로 형의 다리를 감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보호하듯이, 가두듯이, 먹어 치우듯이.
그러다 잠시 잠깐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은 찰나의 시간이었다. 품 안이 허전하다는 걸 느끼자마자 남자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침대 위에는 그 혼자뿐이다.
어떻게?
또다시 그가 도망쳤다는 공포에 그는 다급하게 쇠사슬을 끌어당기려 했다. 그때 바닥에 나란히 서 있는 하얀 발을 발견했다.
“형, 님…….”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망간 줄 알았던 이기현은 무겁게 매여 있는 사슬을 끌고 창가에 서서 물끄러미 이기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을 등지고 반쯤 드러난 얼굴이 낯설 만큼 차가웠다. 터질 듯 뛰고 있던 심장이 간신히 제자리를 찾았다.
“언제부터, 깨어 계셨습니까?”
품에서 벗어나는 것도 몰랐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남자가 더듬거렸다. 아무리 그동안 잠을 설쳤어도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자 버리다니. 도망이라도 갔으면 어쩌려고. 쇠사슬을 매어 두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자책하며 서둘러 다시 그를 품으로 데려오려 몸을 일으켰다.
그런 이기하를 내려다보던 이기현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기하.”
이름을 불린 것뿐이었는데 남자는 명령을 받은 것처럼 제자리에 우뚝 섰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형의 음성이다. 목소리에 기이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것을 거부할 수 없어 몸이 움찔거렸다.
“……형님.”
“언제까지 이럴 셈이야?”
“…….”
“언제까지 이런 의미 없는 짓을 계속할지 궁금해졌어.”
이기하는 침을 삼켰다. 오랜만에 듣는 형의 음성에 들뜨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 미간에 힘을 주었다. 조금 전 잠에서 깬 탓에 도무지 현실같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제 내가 액신임을 알았으니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도 알면서 곁에 두어 어쩌겠다는 거지?”
“…….”
“나를 불행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너희들은 죽어 나갈 거야. 나는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으니 그들이 가만 놔둘 리 없고 네가 가짜임을 알게 된다면 충성하던 이들 역시 등을 돌릴 테지. 네가 누리던 권능이 과연 영원할까?”
고저 없이 읊조리는 목소리에 조바심이 났다. 당장이라도 그를 붙잡아 다시 침대 위에 쓰러뜨리고 싶었다. 제 손을 떠난 이가 그 자리에서 바로 날아오를 것 같아 그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너는 결국 나를 포기하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
“형님 목소리…… 오랜만에 듣습니다.”
예상과 다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기현이 눈썹을 찡그렸다.
“제 걱정을 해 주신 건가요? 저는 괜찮습니다.”
“…….”
“걱정하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지금껏 저들의 신 노릇을 해 왔으니까요.”
“이렇게 실패해 놓고?”
“제가 실패한 거라 생각하셨나요?”
나뭇가지가 바람에 이리저리 부딪치는 스산한 소리가 들렸다. 비난하고자 하는 이와 비난이라도 듣고 싶어서 안달 난 이 사이에 제대로 된 대화가 될 리 없었다. 이기현의 얼굴에 피로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기하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형님.”
“…….”
“다시 시작해요 우리.”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요. 조금만 있으면 어긋난 걸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시간을 주세요.”
“네가 내게 한 짓들을 잊었어? 나는 너 용서 못 해.”
“용서를 바라는 게 아니라 속죄하려는 겁니다. 응당 누리셨어야 할 자격을 되찾아 드리고 원하시던 삶을 살게 해 드리기 위해 제가…….”
“네가 기만으로 축조한 새로운 새장 따위, 저들이 세운 것과 뭐가 다르지? 똑같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할 뿐인데.”
진저리 치는 이기현에 옷자락을 움켜쥐려던 손가락이 멈췄다. 어떤 말을 해도 단단했던 이기하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형님께선 사랑한다는 말은 그리도 어려워하셨으면서…… 끔찍하다는 말은 이토록 쉬우시군요.”
……나 역시 끔찍했는데, 당신이 씌워 준 신의 굴레는.
남자는 무심코 원망이 입 밖으로 쏟아질 것 같아 입술을 짓씹었다. 결코 그렇게 말할 순 없다. 너는 그 말을 빌미 삼아 영영 가 버릴 거니까, 그걸 기대하며 이러는 것일 테니. 사실 너도 나를 증오하지 않느냐고 너도 나를 놔 버리고 싶지 않냐고.
나는 놔 버리고 싶긴커녕 미워해 본 적도 없는데.
당신이 나를 제물로 택했을 때도 기쁘기만 했어. 열렬한 고백을 받은 기분이었지. 네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소리였으니까.
내가 그랬으니 너 또한 그럴 줄 알았지만…….
“마음대로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
“끔찍하다고 생각해도 괜찮고 성에 찰 때까지 매번 밀어내도 괜찮아. 어차피 나는 앞으로도 파렴치한 짓을 할 테고 당신은 점점 더 나를 미워하게 될 테니. 당신은 날 증오할 자격이 충분해요.”
결국 그에게 할 수 있는 건 괜찮은 척뿐이었다.
“나도 용서를 빌지 않을 겁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참회하듯 고개를 떨궜다. 때려 달라고 말했던 때처럼 이기현의 손을 조심스레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이기현은 이 사악한 존재가 너무도 끔찍해서, 이 아름다운 존재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숨이 막혔다. 발로 걷어차고 싶기도 하고 끌어당겨 키스를 퍼붓고 싶기도 했다. 당장 이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기도 하고 무릎을 꿇으며 숭배하고 싶기도 했다. 이 양극단으로 비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감정이 이기현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문고리를 잡고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덜컹덜컹, 덜컹덜컹.
덜컹덜컹, 덜컹덜컹.
잠겨 있지도 않은 문고리가 점점 더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아니, 이름이 아니라 곡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다음 대의 신을 향한 저주를 퍼붓는 소리였을지도.
“뭘 해도 괜찮다고 했지.”
이 굴레를 끊어 내야 했다.
“그럼 이번에도 용서해 봐.”
멍하니 중얼거린 이기현이 손을 휘둘렀다. 붉은 물방울이 안개처럼 사방에 흩뿌려졌다. 새하얀 침구에도, 천장에도.
이기하는 얼굴에 튄 미지근한 액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다 서서히 쓰러지는 이기현을 보고 뒤늦게 무너졌다.
“형……님……?”
반사적으로 이기현을 끌어안은 남자가 신음했다. 힘이 빠진 기현의 손에서 무언가가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떨어지더니 한쪽 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게 수면 향을 피워 두었던 향로의 철제 뚜껑임을 인식하는 것조차 오래 걸렸을 정도로 이기하는 한순간 판단 능력을 상실했다. 이기현의 목에서 왈칵왈칵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몸을 뒤틀며 잘게 기침을 했다. 그가 쿨럭거릴 때마다 쏟아지는 양이 더 많아졌다.
“형……!”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기하가 급히 피가 솟는 부분을 눌렀다. 압박하는 손가락 사이로 막지 못한 핏줄기가 줄줄 쏟아졌다. 날카로운 것도 아니고 뭉툭한 금속제에 깊게 찢어진 목의 상처는 심각하게 깊었다. 억지로 갈린 표면은 체액만으로는 아물기 불가능할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면도칼로 깔끔하게 베였던 때와는 다르다. 의사를 불러야…… 아니 그러면 늦어. 자칫 잘못하면 후유증을 남길 수도 있다. 다른 부위면 몰라도 여기는 안 돼.
고용인들을 물린 것을 후회하며 찢긴 곳에 입술을 댔다. 출혈이 너무 심해 어찌하지도 못하고 상처에 매달렸다.
“읏…….”
피거품을 토해 내는 이기현의 목을 받쳤다. 입술이, 혀가, 온몸이 온통 피범벅으로 물들어 갔다. 하도 많이 쏟아져 상처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피를 마시고 있는 느낌이었다. 제발, 제발, 남자는 신을 찾으며 자신의 신에게 매달렸다.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앞뒤 재지 않고 모두 쏟아부었다. 이기현은 가물가물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남자의 입술과 혀의 움직임은 생생했다. 살리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있구나. 예상과 다르지 않은 그의 행동에 눈이 시큰해졌다.
그때 한참을 상처에만 몰두하던 이기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믿어지지 않는단 표정이었다.
흐려지는 눈에 아직도 피를 뿜는 이기현의 상처가 들어왔다. 이미 남자의 몸은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워하던 그는 몸을 일으키는 대신 절망스러운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느 순간부터 목의 통증은 사라지고 상처에 따뜻한 감각만이 감돌았다. 솟던 피의 양이 점점 줄어드는 것과 함께 남자의 머리가 무겁게 내려갔다. 그가 피투성이의 손을 더듬어 이기현의 손을 쥐어 잡았다. 엉켜드는 손가락이 잠잠히 떨렸다. 잡은 손의 힘이 점차 빠져나갔다. 그러다 힘이 완전히 풀렸을 때 무거운 소리와 함께 이기하의 몸이 기현의 위로 쓰러졌다.
기현은 눈을 깜박이며 제게 포개진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기하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다급하게 뛰다가 이윽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약을 도포했던 피부 위를 매만졌다. 조금만 손을 잘못 대면 또 벌어질 만큼 얇게 생성된 새 피부가 만져졌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정신을 잃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손은 아직도 쥐고 있는 채다. 그게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들게 해 이기현은 넋을 놓고 그 자리에 잔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짤막한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리고 문이 조용히 열렸다. 허락도 없이 들어온 자는 소리도 없이 피투성이가 된 형제의 옆으로 다가왔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기현 님.”
이연화였다. 그녀는 핏자국으로 난장판이 된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쓰러져 있는 이기하를 끌어안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기현을 나직이 나무랐다.
“정신 차리세요. 지금 움직이지 않으시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갑니다.”
기현은 아무런 동요 없는 얼굴로 눈을 감은 동생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기현 님? 그녀가 다시 한번 대답 없는 그를 불렀다.
“알아차렸어.”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차렸는데.”
그는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거렸다. 상태가 심상치 않아 그녀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가까이 오지 마.”
위압감에 이연화는 순순히 발을 멈췄다. 기현이 동생을 꽉 끌어안았다. 일을 벌인 걸 후회라도 하는 건가? 싶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만약 내 동생이 혹시라도 잘못되면.”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녀가 눈을 치켜떴다.
“당신네들 전부 무사하지 못할 거야.”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기현 님께서도 멀쩡히 일어나셨으니까요.”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이기현의 얼굴이 험악해졌으나 이내 납득했는지 안고 있던 몸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직도 쥐어진 채인 기하의 손을 발목의 족쇄에 가져다 대자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족쇄의 잠금이 풀렸다. 발이 자유로워졌다. 곧바로 일어날 줄 알았지만 그는 여전히 얽힌 손가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이연화가 다시 재촉하려는 순간 천천히 손을 떼어 내더니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계속 침대 생활만 했던 다리가 자신의 의지로 걷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티를 내며 후들거렸다. 이연화가 준비해 준 옷을 입고 조용히 근육을 매만져 제 기능을 회복시켰다.
이연화는 앞장서는 그의 얼굴을 날카롭게 뜯어 내렸다. 변했다는 소리를 전해 들어선지 어딘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돌아오신 뒤 내내 움직이지 않으셔서 저흰 마음을 바꾸신 줄 알았답니다.”
길을 지키고 있던 고용인 몇이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 이연화가 안내하는 대로 뒷문을 나섰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기현은 손바닥에 빗물을 받아 아직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목을 닦았다. 앞섶이 핏물로 흉하게 얼룩졌다. 몇 번 닦아 내리다 손바닥에 묻어 있는 핏물을 사방에 털어 냈다.
“……조용하네요.”
“워낙 장례를 치를 인원이 많아서 한동안 이 상태였습니다.”
겨울임에도 꽃이 만발했던 안채와는 달리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은 꽃은커녕 관리되지 않아 말라 비틀어져 있는 수목들로 가득했다. 이 밖으로는 완전 다른 공간이었다. 얼핏 밖의 정기를 모두 빨아들여 커다란 꽃을 피워 낸 듯 안채만 파랗게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빛이 조명하고 있는 연극 무대와 같은. 그리고 빛이 소멸되어 어둠속에 잠긴 무대 뒤의 공간.
“옮겨 갈 날짜가 나오고 본채의 관리에는 아예 손을 떼셨습니다. 집안 전체가 전부 그분의 생명력으로 유지되던 곳이니 이질감이 있지요? 신의 힘이 특정 영역의 생명체를 아우른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영향이 클 줄은 몰랐습니다. 집 전체가 저분의 몸이나 진배없더군요.”
“…….”
“해서 집안의 유지도 있는데 이렇게 버리고 떠나도 되는 것인가 우려의 목소리도 큽니다. 신께서 워낙 강경하셔서 다들 숨죽이고 있지만요. 덕분에 제가 일을 벌일 수 있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죠.”
“불안한가요?”
내내 말이 없던 이기현이 툭 던졌다. 무슨 의미이냐 묻기도 전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스름한 달빛이 비추는 남자의 홍채가 기이한 빛을 뿜고 있어 이연화는 얼른 시선을 떨구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나직이 다음 말이 이어졌다.
“당신답지 않게 묻지도 않은 말이 많아서.”
“그게…… 무슨 뜻이신지.”
이연화가 온화한 얼굴로 되물었다.
“고모님. 숨기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원승호의 배후였음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표정 관리 못 하는 건 이 집안에 나 하나뿐이었지. 이기현이 씁쓸하게 자조했다. 귀찮아져 던진 직구에도 이연화의 표정에는 일말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더 사근사근한 미소만 깊어졌다.
“배후라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박종오가 그러더군요. 원승호를 은사님이라 부르게 하고 따르게 지시한 것이 당신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꺼내자 그녀가 동요했다. 뒤에 따라오는 걸음도 조금 늦어졌다. 박종오의 말에 의하면 상황실의 불이 꺼지는 것은 이기하가 안채에 머물 때뿐이라 했다. 이상한 낌새만 보여도 다시 상황실의 불이 밝혀질 것이다. 동생이 깨어나기 전에, 어둠이 내렸을 때 모든 일이 끝나야 했다.
“항상 당신이 뒤에 있더군요. 내 권속이라는 박종오를 빼돌린 것도. 내가 봤던 쪽지를 신께 고했다는 것도. 내 연구소에 박종오를 들여보낸 것도. 그때 후계에 대한 얘기를 하며 나를 부추긴 것도.”
“…….”
“늘 뒤에 빠져 있어서 몰랐는데 전부 당신이 엮여 있었어.”
기하의 입김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뇌부. 신의 권속에 저항이 있다는 직계의 피를 받은 혈족. 그리고 내게 원한이 있을…… 동기가 있는 사람.
“연미연을 자극한 것도 당신이었겠지? 그녀는 당신의 말에 선동돼서 내게 왔던 것일 테고.”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음을 아는 이연화의 얼굴이 삽시간에 돌변했다. 가면을 바꿔 낀 것처럼, 아니 가면을 벗어던진 것처럼 선득한 표정이었다.
“알면서 용케…… 내게 도움을 요청했군요. 그것도 내 아들의 목숨을 빌미 삼아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기현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당신네들이 그걸 따지고 들기엔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닌가?”
피해자와 가해자.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자와 인생 전체를 이용당한 남자. 지치고 징글징글한 이 원한을 저울질할 수 없기에 그녀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인 집안이었다. 저주받은 피였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연화였다. 저 액신의 탓으로 돌려 죄를 묻기엔 그들이 저지른 짓 역시 용서받지 못할 것들이었다.
“왜 하필 나였습니까? 나는 당신을 살려 보내지 않을 걸 아셨을 텐데요.”
“그랬으니까요.”
“그랬다니……?”
“나를 확실하게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내게 감응되지 않는 인물로.”
이기현은 덤덤한 말투로 대꾸하고 저만큼 앞서서 걸어갔다. 그를 어떻게 막아서지도 못하고 고용인들은 어정쩡하게 그 뒤를 따랐다.
이연화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기현의 말이 무슨 뜻인지 표면 그대로의 말이었음에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따라붙었다. 여섯 개의 그림자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별채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붙잡혀 온 뒤로는 첫 외출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본가의 모습은 기억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황폐화된 건물들은 흡사 몇 년은 방치돼 보였고 고즈넉한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게 바뀌었다. 아무리 정신을 놓고 살았어도 이렇게까지 시간이 흘렀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감금되어 있는 동안 필시 집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다.
별채에 다다르기에 앞서 사라진 고용인이 누군가를 또 처리하고 왔는지 소매에 묻은 피를 가리며 나타났다. 도망갈 것을 염려한 건지, 혹은 내가 해칠 것을 경계하는지 이연화는 줄곧 뒤에서 따라오는 중이었다.
“이곳이 광입니까?”
내게 할 수 있는 말이 정해져 있는 것인지 말을 붙여 보아도 한결같은 반응만 돌아왔다.
“이쪽입니다.”
덜컹.
“…….”
나도 모르게 우뚝 자리에 섰다. 문을 잡아 흔드는 소리…… 아니다. 저건 바람 소리일 뿐이다.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옮기는 등 뒤로 또 다시 문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하게.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 주변을 에워싼 자들은 유령처럼 미끄러졌고 발소리를 내는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발목이 묶이는 느낌에 몇 번이나 발을 털어야 했다. 소리가 나던 복도를 지나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무얼 어떻게 했는지 가려졌던 문이 열렸다. 겉으로 봤을 때 이런 곳에 문이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타난 공간은 위와는 달리 완벽한 신식 구조였다. 평생을 나고 자란 집의 지하에 이런 곳이 있었다는 게 소름끼쳤다.
“기다리십시오.”
고용인 둘이 먼저 승강기를 타고 내려갔다. 긴장감에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지금껏 내가 했던 것들 중 확신을 줬던 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만큼 불안한 것도 처음이었다.
뒤따라 탄 승강기는 제법 오랫동안 작동하더니 귀가 먹먹한 느낌이 들 때쯤 멈춰 섰다.
“…….”
도착한 곳은 웅장한 지하 회랑이었다. 눈앞의 광경에 절로 탄식했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회랑은 새하얀 대리석으로 시공해 온 사방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빛이 하얀 벽과 바닥을 타고 거대한 공간 속을 계속해서 투과하고 있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구조물에는 불투명한 관이 수없이 늘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세공이 수놓인 관 앞에는 시들지 않은 싱싱한 꽃다발들과 묻힌 자의 이름 석 자마저 쓰여 있다.
다른 관들은 과하다시피 장식된 것에 반해 유독 꽃 한 송이 놓여 있지 않은 새 관이 눈에 들어왔다. 관에 새겨진 이름을 확인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원승호로 알고 있던 자의 진짜 이름. 밖에서 죽었어도 시체는 끝내 이곳으로 돌아온다. 이 피를 가진 이들은 영원히 자유란 없는 것이다.
“언제까지 가야 합니까.”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이연화의 명령으로 한 명의 고용인만이 따라붙고 나머지는 뒤에 남았다. 관을 양옆에 끼고 점점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얼마 전 당신께서 장례식 때의 일을 물어보았을 때,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닌가 내심 걱정을 했었는데.”
그때 이연화도 예외 없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동안 어떻게 참았습니까? 누구보다 날 죽이고 싶었을 텐데. 당신에겐…… 기회도 많았잖아요.”
다른 혈족들과 달리 그녀의 신분이라면 독대할 상황쯤이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얄팍한 내 의문을 이연화는 단번에 깨뜨렸다.
“기회라…… 지아비도 아들마저도 저렇게 됐는데 기회라니. 가주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바닥에 조아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기회는커녕 늘 시험대에 올랐지요.”
“…….”
“당신의 삶은 매 순간마다, 하다못해 마주치는 타인마저도 다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당신에게 손을 댈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연미연이나 이경헌을 부추긴 겁니까?”
연미연도 이경헌도 나를 그들의 신에게 바치기 위해 온 신경이 쏠려 있었을 테니, 이연화는 그저 충심 어린 혈족의 얼굴을 하고 사료의 내용을 흘리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지아비를 잃고 아들마저 배신자가 되어 버린 그녀였기에, 다음번에 나올 배신자를 염려하는 말은 어리석은 이들을 충동질하기 충분했을 것이고.
“덕분에 가주께서 배신자인 남편과 아들을 둔 저를 온전히 놔두시지 않았습니까. 꽤 좋은 수단이었죠.”
나도 제물이었던 나를 그나마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집안에서 내 존재를 달갑게 여길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당신 하나 붙들어 놓겠다고 그토록 노력했는데 왜 만족할 수 없었던 건가요? 당신을 인간으로 살게 하기 위해 그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는데도.”
“그건 내가 바란 게 아니었으니까.”
“거짓말.”
증오가 서려 있을 줄 알았는데 내 말을 자른 그녀의 목소리엔 오히려 측은함이 묻어 있었다.
“왜 죽으러 돌아온 겁니까? 왜 죽겠다고 따라나섰어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말을 잃은 나를 뒤로하고 다시 앞장섰다. 목표한 곳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거대한 철문 앞의 경비원을 처리하는 동안 이연화가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잇조각을 꺼냈다. 종이에 인쇄된 익숙한 카페의 로고에 시선을 빼앗겼다. 원승호가 씨를 뿌리고 내가 미끼를 물었으며 이연화가 이끌었다. 처음에 정해진 대로 나는 여기에 서 있다. 처절하게 발버둥 쳐 봤자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현 님? 도착했습니다.”
재촉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린 곳은 층고가 높은 넓고 거대한 공간이었다. 회랑 때도 그랬고 이곳도 별채 밑 지하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드러난 광의 구조는 아쿠아리움을 연상시켰다. 최소한의 푸른빛을 제외한 어두컴컴한 사방은 거대한 수조로 둘러싸여 있었고 알 수 없는 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무엇보다도 어마어마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경계하며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지나쳐 이연화는 먼저 광 한가운데에 도달했다. 그녀는 어떤 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지독히도 쓸쓸하게 느껴져 나는 한동안 지켜보다가 발을 디뎠다.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이연화가 보던 것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수조 속에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로만 보였다. 해초 더미에 엉켜 있는 거대한 고래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침 그것이 내 쪽을 향해 천천히 몸집을 돌렸다. 그리고―.
당신이 그토록 찾으시던 것입니다, 조롱하는 음색이 속삭였다.
“―…….”
“인고(人蠱-인간으로 만든 고독)가 되다가 만 실패작이죠.”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고 전율했다.
해초로 착각했던 것은 길고 짧은 각양각색의 머리카락이다. 눈앞으로 검은 머리 다발이 부유하며 물속에서 아른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해파리 떼가 촉수를 드리우고 유영하는 듯했다. 핏줄이 비쳐 보이는 기형적으로 꺾이고 뒤틀린 사지는 원래의 모양과 형태를 잃고 제멋대로 얽혀 있다. 애초에 한 덩어리처럼 울퉁불퉁하게 솟구친 채로.
기괴한 그 유영체는 개폐를 반복하며 간헐적으로 공기 방울을 뿜어냈다.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색색거리며 불규칙하게 산소를 흡입하는 소리도 점차 커져 갔다.
흐름이 없는 물속에 잠겨 너울거리는 사이사이로 얼굴들이 보였다. 인간. 아니 인간이었던 것들이.
다리에 힘이 풀렸다.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어떠십니까? 장례식장의 생존자들입니다. 신의 피를 탐닉하는 자들이 당신을 해치려 했었고 그 결과 이렇게―.”
“…….”
“당신의 악의를 실현했습니다. 단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고 죽이는 것. 가주의 명보다도 당신에게 더 강하게 현혹되었던 이들은 이지를 상실해서 공격성만 남은 병기가 되었습니다. ……내 아들처럼요.”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이연화는 일렬로 늘어서 있는 불투명한 유리관 중 하나를 가리켰다. 밀려드는 공포에 머리카락 끝이 쭈뼛쭈뼛 섰다.
“광에 들어가는 것만은 피하려 노력했지만 가주께서 더 이상의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더군요.”
떨리는 손으로 박종오가 누워 있는 유리관 위에 손바닥을 댔다. 밖은 이렇게 차가운데 관의 뚜껑에서는 미온한 열기가 느껴졌다.
‘착하구나.’
‘그럼 나를 도와줘야지.’
“왜 조용하느냐고 물으셨지요.”
“…….”
“당신에게 해를 끼치거나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족들은 이렇게 광으로 보내 수집했습니다. 더 이상 효용 가치가 없거나 당신의 정체를 꿰뚫어 본 이들도요. 이곳은 당신만을 위한 산 무덤입니다.”
관들의 이름을 확인했다. 몇몇 낯익은, 그러고 보니 한동안 도통 얼굴을 볼 수 없던 이름들이 보였다. 이경헌, 연미연, 그리고 한때 동료였던 사람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틀림없이 주변에서 사라졌을 이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시야 끝에 더 이상 담을 수 없는 저 멀리까지, 모든 곳이 관의 행렬이었다.
‘나를 위해 해.’
‘나를 위해.’
빗물에 완전히 젖어 있던 어린 박종오의 얼굴. 맹목적으로 올려다보는 까만 눈망울에 오롯이 나만 비춰지고 있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서서 나는…… 웃고 있었다.
‘전부 다.’
―죽여.
내 입술에서 흘러나온 저주의 말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내게 감응하는 이, 내 피에 감응하는 이 모두 벌레 떼처럼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업고 있던 기하의 몸과 함께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핏줄기가 공중으로 튀어 나갔다. 시뻘건 손이 갈고리처럼 내 몸을 찢어발기려 뻗어 왔고 그 손은 곧 다른 손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다. 그건 신을 차지하려는 지극히 당연한 쟁탈전이었다. 눈앞에서 흩어지는 살점들을 보면서도 나는 피하지 않았다. 그저 피 웅덩이가 멀리 퍼지는 것을 보면서 웃고 있었을 뿐이다. 최후의 한 명이 남길 기다리며.
“…….”
상념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한 발의 총성이었다. 소리가 난 곳에 고용인이 쓰러져 있었다. 연기가 나는 총을 든 이연화가 내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 아들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
“이제 저와 하신 약속을 지키실 차례군요.”
웃고 있었던 자신이 너무 끔찍하고 낯설어 입술 끝을 매만졌다. 조금 전까지 폭발할 것처럼 날뛰던 심장이 지금은 도려낸 듯 고요했다. 기억을 하나하나 되찾을 때마다 내가 내가 아닌 것을 확인하는 것만 같았다.
“죽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감응되기라도 했다면 그거만큼 골치 아파지는 게 없으니까요. 아주 진절머리 나게끔 겪어 보았으니.”
멀리서 알 수 없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상황실에서 알게 된 모양입니다.”
그녀가 앞에 놓인 컨트롤 박스의 패널을 조작하자 전면 수조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거품이 뿜어 나오던 곳에서부터 붉은색이 천천히 번져 나갔다. 그것은 아주 소량에 불과했지만 수조에 섞인 순간 유영체들은 격렬한 움직임을 보였다.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되듯이 순차적으로. 붉은 것이 번진 곳을 향해 몰려드는 기괴한 덩어리들을 보고 그녀가 수조에 푼 게 나의 혈액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움직임이 거의 없던 유영체들도 꿈틀거리다 점차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묵직한 것이 단단한 장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반대 방향에서는 이미 내 쪽을 향해 유리 벽에 몸을 던지는 중이었다.
“어떻게 당신을 처리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어찌해야 이 복수를 끝내고 저주를 완성시킬 수 있을지…….”
“…….”
“내 손으론 건드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남을 시키자니 감응되어 버리고 정말이지 곤란했답니다. 현 가주만 아니었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진 않았을 텐데. 설마하니 제어하기 위한 이 그릇마저도 깨 버릴 거라고는 예상치 못해서 말이에요. 이런 불확실한 방법은 저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생각해 낸 것이 이겁니까?”
“호고(狐蠱)로 여우를 다스렸고, 인고(人蠱)로 인간을 다스렸죠. 그렇다면 신으로 담근 고독이라면?”
내 앞에 총구를 들이밀고 기뻐하던 원승호와 같은 얼굴을 하고 그녀가 물었다.
“내게 거짓말을 했군요.”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어. 내 오라비가 네게 홀려 일을 그르친 걸 봤을 때 손을 썼다면 적어도 저것들이 만들어지진 않았겠지. 아니 적어도 당신이 이기하에게 힘을 주는 것을 봤을 때 처리했더라면.”
“그걸 본 사람들은 모두 죽였을 텐데, 어떻게 살아 있었…….”
그런 말을 내뱉은 자신에 놀라고 말았다. 죽였다고? 내가 왜 이런 걸, 언제 알고 있었지? 낯선 기억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 기억이 아닌 것을 붙여 놓은 것같이 혼란스러워 이마를 짚었다.
“아니…… 아니야.”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기억을 선별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누구도 내게 잊는 것을 명한 적 없었다. 그 증거로 잊고 있던 기억은 하염없이 소생했다. 이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여우 신이 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녀의 입에서 토해진 말에 나는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이연화는 그 말을 내뱉고 숨이 막히는지 목을 움켜쥐었다.
“하하, 그게, 당신의 소원이었지요. 그리고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었던 진음이었습니다.”
「여우 신이 되지 않게 해 주세요.」
“혈족들 모두 진짜 신의 음성을 처음 들었지요. 처음으로 내려진 명령이었습니다. 신의 피가 섞이지도 않은 것들은 저항하지도 못하고 당신의 명령에 감응했습니다. 진실은 잊고 거짓을 믿으며 그게 진짜라고 여겼죠. 집안에 들어온 것이 귀신인 줄도 모르고 어리석게……! 이 핏줄을 끊어 놓으려는 것도 모르고 몽땅 네게 홀려서는.”
“…….”
“선대였던 내 오라비도, 네 동생도 네가 원흉인 걸 알고도 숨겼어. 혈족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도 너 하나 차지하겠다고……. 애초에 전부 당신의 꼭두각시였어요. 다 네 탓이란 말입니…….”
그녀는 악을 쓰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울컥 핏덩이를 토해 냈다. 변화는 순식간이었다. 당황하여 날 바라보는 눈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곧이어 입에서도 핏물을 줄줄 쏟아 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시간조차 없었다. ‘어째서―….’ 그새 굳은 혀로 간신히 내뱉은 그 단어가 마지막이었다.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그녀는 허물어졌다. 진음을 거스른 자들이 으레 맞게 되는 최후였다. 그렇게 수많은 혈족들이 내게 진실을 고하려다가 스러졌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묻어 둔 것을 들추지 말고 살라고. 누가 그렇게 얘기했더라? 그렇게 얘기한 것이 한 명이었나?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다리 아래로 수조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고여 들었다. 투명했던 것이 붉은색으로 번져 나갔다. 우레 같은 소리가 나며 벽면 한쪽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 무엇도 내 주의를 끌지 못했다.
‘여우 신이 되지 않게 해 주세요.’
내가 진짜 신이었다는 소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한 생각은 신이었다는 것에 대한 공포도 절망도 분노도 기쁨도 원통함도 아니었다. 그저.
아, 내가 신이라면 틀림없이 기하가 내 제물이겠구나. 나는 기하를 선택했겠구나, 라고.
오직 그 생각만을 했다.
‘여우 신이 되지 않게 해 주세요.’
치기 어린 소원이었다. 어린애가 할 법한 떼쓰기, 우기기. 지금까지 해 왔던 패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빌면서도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소원으로 무언가가 바뀔 거라고는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이를 끌어안고 몇 번이나 신이 되지 않겠노라 다짐하면서도.
진음은, 나 자신마저도 속여 버렸다.
‘형님께서 제일 바라시던 선물을 해 드릴게요.’
달을 등지고 젖은 뺨을 한 아이가 부드럽게 읊조렸다.
‘그러니…… 내 꽃은…….’
너는 그저 내 소원을 완성시켰을 뿐. 거짓을 믿는 이들 사이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침묵하면서.
턱으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시야가 붉게 물들어 손등으로 닦아 내렸다. 손등은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귀에서도 미지근한 것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연화가 작동시킨 것이 기폭 장치였는지 차츰차츰 금 가던 표면들이 기어코 요란하게 무너졌다. 순차적으로 유리가 터져 나갔지만 내 귀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상실된 침묵의 세상에서 텅 빈 눈을 들었다.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들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 마치 폭우가 퍼붓는 것 같다. 푸욱 가슴 속까지 베이는 느낌과 함께 심장 부근이 뜨끈했다.
고개를 떨궜다. 살을 맞은 것처럼 기다랗고 투명한 여러 개의 유리 파편이 온몸을 뚫고 나와 있다. 핏방울이 떨어지는 자리마다 붉게 피어올랐다. 허리를 더 깊게 숙여 하늘거리는 수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심연 속에서 나를 쳐다보는 여우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잊어버렸고 잃어버렸던 모습이다. 왜 이제야 직시하냐고 탓하는 듯한 투명한 눈동자. 그것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내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이내 커다란 물결이 밀려와 내가 보던 것을 지워 버렸다. 유리 벽을 탈출한 부유물들이 비틀린 몸을 난폭하게 흔들며 피가 번지는 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몸을 뉘일 곳을 기억해 냈다.
내 무덤을 찾아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