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별채는 어느 시대든 다른 공간과는 이질적이었다. 본채의 고아함과 위엄은 별채의 음산함과 죄를 가리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신이 머무는 곳. 신을 가둔 곳. 땅속에 파묻혀 있을 뱀과 여우들의 시체. 대들보 하나, 서까래 하나하나에도 여우의 피를 섞은 염료를 바른 곳. 가솔들마저 두려워 오지 못하는 이곳에 아이는 오늘도 숨어들었다. 나오지 못할 죄수를 감시하기 위해.
마루 끝에 앉아 문 건너편의 아버지를 응시했다. 인사 대신 고했다. 당신이 부르던 ‘이기현’은 결코 오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그렇게 불러도 소용없다고.
이기현의 이름과 함께 쏟아지던 원망과 저주를, 참회와 고백을, 담장 밖으로 새 나가지 못하게 조용히 먹어 치웠다. 저주도 고독도, 권능도 그의 몫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기현 역시 소년의 몫이어야 했다.
그 무렵 별채에는 늘 뱀 시체를 태운 냄새와 재가 날렸다.
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교교한 어둠 속에서 남자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새카맣게 물기를 머금고 있던 눈동자에 점차 붉은 기가 감돌더니 이윽고 빛을 뿜어냈다. 사위를 둘러본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가슴 위에 뉘여 둔 전리품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것이 깰까 봐 아주 주의 깊고 신중한 손놀림이었다.
바람이 부는지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의 소리가 경박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일어나는 대신 손바닥으로 형의 귀를 살며시 덮었다. 달강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어서야 손을 거두고 다시 머리를 어루만졌다. 참을 수 없이 연심이 치솟으면 입술이 아닌 머리카락에 입 맞추는 걸로 대신했다. 그렇게 연인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자신의 품에서 잠들기를 바랐다.
밤이 오고 날이 바뀌었는데도 그는 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감히 신의 유희를 방해할 순 없었던 혈족들이 수차례나 안채에 왔다가 물러갔지만 그는 자신의 시야 안에 형을 두고 몇 가지 업무만을 간신히 처리했다.
추도제 마지막 날에, 드디어 이기현은 눈을 떴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남자의 가슴에 뺨을 비비며 잠에 취해 있던 그는 자신이 타인의 몸 위에 누워 있음을 깨닫자마자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던 이기하도 덩달아 놀라 손을 든 자세 그대로 굳었다.
“…….”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아직 혼곤한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불과 조금 전만 해도 강준형과 함께였는데, 함께 크루즈에 탑승하고 있었는데. 뚝 끊겨 버린 기억에 그는 황망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 분간 그리 시선을 옮기던 그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매끈한 손목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환상이 아니라 붙들린 거다. 또다시.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으로.
이기현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던 남자는 그의 눈에 총기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형님…….”
그가 손을 뻗는 것을 신호로 이기현은 침대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니, 뛰쳐나가려 했다.
“읏……!”
침대 밑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무언가에 의해 발목이 잡아채어 휘청 몸이 기울었다. 떨어진다―. 침대 밑으로 곤두박질하기 직전 이기하의 팔이 급하게 허리를 감아올렸다.
“형님.”
그가 달래며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놀란 심장이 쿵쾅거렸다. 무엇이 발목을 잡았던 거지? 이기현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무거운 다리를 들어 올렸다. 쇳소리와 함께 발목을 속박한 쇠붙이가 보였을 때였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온 힘을 다해 손을 휘둘렀다.
“…….”
공기를 가르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잠시 뒤 이기하가 떨어진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피부가 흰 탓에 붉게 번진 따귀 자국이 선연했다. 잘못 맞았는지 입술마저 찢어진 걸 발견한 이기현의 눈동자가 흔들린 찰나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보고 싶었습니다.”
치켜 든 손이 우뚝 굳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형님.”
“이거, 당장 풀어.”
“보고 싶었어요.”
“풀어.”
“보고 싶어서…….”
“풀라고!”
“정말 죽을 것 같았어.”
윽박지르며 멱살을 잡아 올리자 힘을 주는 대로 순순히 딸려 올라왔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당황해 이기하의 가슴을 확 밀어 버렸다. 내던져진 남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원망이라곤 없는 맹목적인 눈이었다.
변하지 않았다. 하나도. 그렇게 끝이라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아이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되감기를 해 재생 버튼을 누른 듯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말.
이기현은 비틀거렸다. 결국 또 제자리다. 악을 쓰려 벌린 입에서는 바람 빠진 신음 소리만 흘러나왔다. 발산하지 못한 감정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이기하는 그가 진정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어, 애틋한 목소리로 어르고 속삭이며 머리를 기댔다.
밀쳐 내지 못하는 걸 확인하고 조금씩 욕심을 부려 결국 그를 품에 안았다. 그의 몸은 손길이 닿는 부분마다 노골적으로 떨렸다. 그걸 모른 척하며 남자는 도드라진 날개 뼈 부근을 쓸었다. 당장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산산조각 난 신뢰야 어떻게든 다시 쌓으면 된다. 아직 이 사람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
백 대든, 천 대든, 네가 마음을 풀 수만 있다면 죽도록 맞아도 좋아. 하지만 착해 빠진 내 여우는 겨우 한 대 손찌검해 놓고 그마저도 맞은 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약한 마음의 틈새에 또다시 스며들어야 했다.
어떡하면 다시 나를 사랑해 줄까. 무슨 변명을 해야 내 말을 믿어 줄까.
매만지는 손길을 최대한 다정하게 하며 다급히 머리를 굴리는 그의 귓가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왜 그랬어.”
그의 물음에 등줄기를 쓰다듬는 손길이 멈췄다. 이기현은 자신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이기하를 주먹을 쥐고 강제로 밀어 냈다. 해가 져 어둑하게 그늘이 드리운 방 안에서 보는 기현의 눈은 자색보다는 새파랗게 날이 선 청색에 더 가까웠다. 물기가 어려 있어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왜 그랬어?”
“…….”
“왜 그런 거야.”
대답을 이미 알고 있는 물음,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 물음, 대답을 들어야만 하는 물음이 입 안에서 메아리쳤다. 어디서부터 물어야 하나,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건가.
“너였어?”
“…….”
“내내, 너……였던 거야?”
그동안 차마 물을 수 없었던 것을 입술 위에 올렸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신에게서 종종 느껴지곤 했던 아이의 흔적을 외면하면서,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이라 자신을 세뇌했다.
“아니, 지?”
적어도 이기현의 세계에서 둘은 완벽히 다른 사람이었다.
마지막 안식처와도 같았던 동생. 그가 물리쳐야만 했던 원흉인 여우 신.
소중하고 연약한 동생. 그를 착취했던 여우 신.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생, 그 하나마저 빼앗아 갔던 여우 신. 하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에게 사랑을 줬고, 그가 사랑을 했던 두 남자.
“대답해.”
이기현은 결국 뜨거워지는 눈가를 눌렀다.
“내가 틀렸다고. 내 생각은 틀렸다고 대답해.”
“…….”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다고, 헛소리라고.”
“…….”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라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보다도 더 지친 목소리로 이기하가 대꾸했다.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요.”
“…….”
“내가 나 이외의 것이 당신을 만지게 허락했을 리 없잖습니까.”
그 말이 기어코 이기현의 한계를 건드렸는지 가까스로 유지하던 표정이 무너졌다. 이기하는 눈썹을 찌푸리고 형의 시선을 피했다. 모든 답을 내어놓으라는 그에게 무심코 화풀이를 해 버릴 것 같아서. 내가,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는데. 이렇게까지 됐는데.
“나라고 이러고 싶었을까요?”
감정을 싣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원망이 묻어 나왔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내가 꿈꿨던 미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약속했던 미래 역시 이런 게 아니었지.”
“…….”
“이런 짓까지 안 했으면, 평생 당신이 날 남자로 여기기나 했을까?”
이기하는 함께 밤을 보낸 뒤 어김없이 죽음을 선택한 이기현을 떠올리며 자조했다. 동생으로서 몸을 섞었던 서툰 밤들을 그는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에게는 늘 첫 번째였고, 이기하에게는 수십 번이었던 자살 시도 또한 잊었다. 죽겠다고 침실에 숨어들어 면도칼을 꺼내 들었던 일들을. 쏟아붓던 그 악담들을. 그 지독하고 끔찍한 밤을 반복하며 이기하 역시 영혼이 죽어 가는 걸 느꼈다.
‘신이 되어 줘.’
재생시켜도, 세뇌해도 바뀌지 않는 그에게 지쳐 무엇이 되길 바라냐고 물었을 때 연인은 잔인한 명령을 했다.
‘신이 되어 줘. 나를 안을 때만큼은 신이 되어 줘. 제발 이런 날 동생이 보지 못하게 해 줘. 날 안는 게 동생이 아니게 해 줘.’
무정한 연인. 알맹이는 이미 그를 위해 신이 되었는데 이제 껍데기마저 신이 되라 말한다. 지켜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나를 지우라는 명만을 내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곁에 남아 주기만 한다면 뭐든지 되어 줄 생각이었으니.
결국 그의 바람대로 해 주었다. 너를 위해 아버지도 잡아먹었는데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것쯤이야. 어차피 늘 착한 동생을 연기하지 않았는가. 선대들의 지식과 힘을 쥐고 네 대신 고독을 거느린 날 너는 아무 의심 없이 신으로 인식했다. 다른 남자 흉내를 내며 잠자리를 가진 뒤 처음으로 핏물이 아닌 눈물만을 흘린 널 봤을 때 얼마나 비참했으며 또 기뻤는지 당신은 평생 모르겠지.
“이 방법뿐이었어.”
“…….”
“내 힘으로 너를 붙들 수 있는 방법이라곤 이런 것뿐이었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손을 놔 버리면 그대로 사라질 존재인데. 다음이란 아량 따윈 결코 베풀지 않을 지고하고 먼 존재인데. 감히 내가, 나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당신을 잃지 않으려면 대체 어떻게 했어야 한다는 겁니까? 나는 최선을 다했어. 당신이 명령한 대로 했어요. 해 달라는 건 다 해 줬어. 그런데 왜 당신은―.”
격양되어 언성을 높였다가 겁에 질린 표정을 보고 가까스로 목소리를 낮췄다. 극도의 피로감에 미간을 눌렀다.
“나한테 안겼다고 바로 손목을 긋는 당신을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이 되어 달라고 애원하는 당신을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 그럼……?”
“…….”
“언제나 단 하나였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한테 원했던 것은.”
“그래서 그런 짓거릴 했어?”
스치듯 나온 말에 그가 멈췄다. 뭐라고? 되묻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어서 이기현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후계를.”
“…….”
“내게서 후계를 보려 했잖아. 내가…… 임신이 가능하다는 걸 숨기고.”
그 역시 이기현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는지 아득한 표정을 했다. 후계에 대한 이야기가 샐 것을 염려해 극소수의 가솔들만이 이기현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진음을 사용해 변절한 이승호가 했던 말을 박종오의 뇌에서 모조리 긁어냈지만 그 얘기는 없었다. 이기현은 오직 자신이 진짜 신이었다는 사실에 동요하고 있을 뿐이라 했는데.
이기하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몇 번이고 말을 고르고 골랐지만 끝내 꾸며 낼 어떠한 말도 찾아내지 못해 침음했다.
“……형님.”
그가 부르며 내민 손을, 이기현은 손끝이 닿기도 전에 물러났다. 남자는 빈손을 피가 날 정도로 꽉 움켜쥐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다. 결국 또 반복이었다. 죽도록 발버둥 쳐 봤자 아비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이미 보았다. 감히 신을 탐낸 대가를 치르는 것을.
“그게 잘못됐습니까?”
“……뭐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아이를 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습니까.”
“무슨…… 너 진짜 미쳤구나.”
“…….”
“제정신이, 제정신이 아니야. 그런 미친 소리를 잘도.”
경악한 표정을 물끄러미 관조하던 남자가 읊조렸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래. 미친 거겠지.”
“왜…….”
“…….”
“왜 그랬어. 나한테 대체 왜 그런 짓까지…….”
“제일 좋은 방법이었으니까요.”
비틀린 얼굴로 허리를 곧게 폈다. 이제 회유 따윈 먹히지 않음을 안 목소리에도 서늘함이 어린다. 눈빛이 달라지고 몸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동생에서 신으로 변하는 과정이라 늘 속아 왔었던 모습으로.
“아니,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표현이 옳겠군요. 내가 원하는 것을 전부 이뤄 줄 가장 효과적인 방법.”
“효과……적이라고?”
“아이를 좋아하는 당신이니 자신의 아이라면 더 귀히 여기겠지요. 어차피 우리가 몸을 섞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겼을 겁니다.”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알고 있…….”
“아이가 생기면 도망가기도 쉽지 않겠지. 낳은 다음에는 아이 때문에라도 도망갈 수 없을 테고.”
한계까지 뒤로 물러난 이기현의 발목에서 사슬 소리가 났다. 남자는 붉은 눈을 굴려 팽팽하게 당겨진 사슬로 시선을 옮겼다.
“너는 아이의 친부를 버리지도 못할 테니 말이야.”
이기하는 허리를 숙여 하얗게 질린 형의 뺨을 쓰다듬었다.
“일 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안으면 하루 정도는 그 빌어먹을 번식기에 맞아 떨어지겠지. 노력해 봐요 우리.”
긴 손가락이 목을 감싸고 있는 단추를 툭툭 뜯어냈다.
“짐승도, 제 형제에게 그런 짓은 안 해.”
넋이 나가 버린 기현이 횡설수설하며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와서 그런 말 하긴 너무 늦지 않았어요? 아니면 설마 아직도 부정 중입니까? 지금껏 같은 침대를 쓴 게 나라는 걸?”
“그만…….”
“확실하게 말해 줘요?”
그는 고개를 젓는 이기현의 턱을 움켜쥐고 자신을 보게 한 뒤 또박또박 읊었다.
“내내 너랑 섹스한 게 네 친동생이라고.”
커다랗게 확장된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제발…… 이러지 마…….”
“말했잖아요. 잔인해질 거라고.”
그러니 돌아오라고 경고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이제 본성을 숨기지도 않고 지껄였다. 벗기기 쉽게 만들어진 옷을 뜯어 내리고 어깨에 입을 맞췄다. 허리를 끌어안아 침대 위로 눕히며 이기하는 아이처럼 이기현의 품에 파고들었다. 좋은 향기가 난다. 부르는 목소리도, 대하는 태도도, 눈빛조차 달라졌지만 어릴 때와 똑같은 오직 단 한 가지였다.
그래서 더 조급하게 옷을 벗겨 내고 맨살에 코를 묻었다. 그가 우는 것을 무시하고 얼굴을 붙잡아 입술을 벌렸다.
“…….”
습해진 숨결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집요하게 입술을 빨고 혀를 섞었다. 울음소리를 내지 않는 그의 목구멍에서 가느다란 헐떡임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몸을 바르작거리는 이기현의 목을 움켜쥐어 더 바짝 끌어당기며 남자는 반대로 어떻게든 깊이 닿으려 애를 썼다. 그럴수록 더 멀어지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퍽 소리와 함께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이번엔 입 안이 터졌는지 피 냄새가 올라왔다. 개의치 않고 다시 이기현의 뒷머리를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도망가는 입술을 물어뜯고 짐승처럼 입을 맞췄다. 반항이 심해질수록 남자는 더 난폭해졌다. 머리채가 잡히고 혀가 거칠게 입 안을 휘저었다. 몇 번이나 욕설이 입 안에서 뭉그러졌다. 겨우 키스에 불과했는데도 모든 진이 빠질 만큼 그는 지독하게 몰아붙였다.
온몸의 힘이 빠지고 호흡 곤란으로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내몰렸을 때 겨우 남자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이기현은 간신히 헐떡거리며 몸 위를 덮쳐 올라온 남자를 응시했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 속 그는 커다랗고 시커먼 덩어리로 보였다. 남자의 손아귀가 허벅지를 붙잡아 벌렸다. 막고 있는 게 무색하게 얇은 면바지가 힘없이 끌려 내려간다. 비참한 기분에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눈앞을 가렸다.
“네가 하고 있는 건 강간이야. 알아?”
순간 남자의 손길이 멈췄다.
방 안에 지옥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내내 들리던 구슬픈 풍경 소리도 멎었다. 이기하의 움직임이 멈춘 것과 함께 시간조차도 멈춘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단 한 번이라도…… 아니라 생각한 적은, 있었습니까?”
그건 이기현이 이제껏 들어 보지 못했던 비통한 목소리였다.
* * *
“눈 떠요.”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기현의 턱을 깨물었다. 억지로 삽입한 부분의 열기가 얼마나 심한지 아랫도리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닦아 내야 할 만큼 젖었을 구멍 안이 뻑뻑했다. 아무리 입으론 싫다고 해도 짝이 교미 요구를 하면 젖던 몸이었다. 그렇게 길들였다. 그렇게 길들였을 텐데.
당장이라도 움직이고 싶어 날뛰는 하반신을 진정시키며 남자는 이기현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눈 좀 떠 봐. 이제 내가 누군지 알잖아.”
끝없이 눈물을 흘리는 눈가를 핥아 올렸다. 기현이 끔찍해하며 고개를 돌리는 걸 붙잡고 집요하게 입술을 눌렀다. 이렇게 진심으로 거부하며 질색하는 것도 오랜만이라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하긴, 원래 우린 이런 관계였지 않은가. 나는 억지로 취하고. 너는 나를 혐오하고. 그가 받아 주기 시작한 게 얼마나 됐다고. 그는 자조하며 형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동생이라 싫어?”
동생이라는 말에 밀어 내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게 속을 뒤틀리게 해 이기하는 거부하는 게 분명한 몸을 억지로 비틀어 열고 들어갔다.
“나는 네가 형이라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
“같은 배에서 태어난 걸 감사했어. 사랑하는 사람이 성장하는 내내 옆에 있었으니까. 안고 싶으면 안았고 키스하고 싶으면 했지. 그러니 너랑 섹스하고 싶으면 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읏…….”
모멸감에 이기현이 진저리를 쳤다. 삽입 직전까지 지독하게 반항해 이미 상처투성이인 남자의 어깨에 새로운 핏방울이 맺혔다. 그가 반항하면 이기하도 무력을 써 이기현의 몸 곳곳도 잇자국과 피멍으로 만신창이였다. 남자는 몇 번 얕게 내벽을 쳐 대다가 여전히 젖지 않는 몸에 욕을 짓씹었다.
“눈 떠.”
“…….”
“눈 뜨지 않으면 지금 바로 네 안에 쌀 거야.”
기겁을 하며 눈을 뜬 이기현의 앞에 남자의 얼굴이 다가왔다. 분노하고 있어야 할 것은 이기현 쪽일 텐데 남자의 얼굴이 더 비틀려 있었다. 집요하고 잔인한 눈동자가 찢어발길 것처럼 이기현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대치하다 이기하가 고개를 기울였다. 예전과 다르게 피딱지가 앉은 까슬한 표면이 맞물렸다. 이번에는 아예 도망가지도 못하게 머리카락을 세게 휘어잡았다. 강제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사정을 봐주지도 않아 숨이 막힌 기현이 괴로워하며 이기하의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혀를 얽으며 이기하의 성기가 몸속을 제멋대로 휘젓기 시작했다. 젖지도 않은 여린 내벽이 금세 홧홧하게 부어올랐다.
“흐읏…….”
함부로 내벽을 쳐 대는 통에 결합한 부분이 당장이라도 찢어지기 직전으로 팽창했다. 진저리 치며 벗어나려는 이기현의 몸을 사정없이 찍어 눌렀다. 무게 탓에 숨 쉬기가 버거운지 그가 거칠게 몸을 뒤치며 기침을 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만끽하는 구멍 안이 남자의 것을 사정없이 쥐어짰다. 기침이 한층 심해졌지만 더 심하게 기현의 팔다리를 속박했다. 오늘만큼은 참지 않을 셈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그를 봐주고 있었는지 뼈저리도록 느끼게 해 줄 생각이었다. 이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새겨 주고 감히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망가뜨릴 거다.
“한때는 당신이 내 아버지였으면 하고 바랐어. 친동생에게도 이렇게 약한 너라면, 자기 자식에겐 얼마나 끔찍할까. 내가 네 아들이었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벗어날 생각조차 못 했을 텐데.”
“…….”
“그러니 당신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라는 걸 알아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을 것 같아?”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게 치고 올라왔다. 이기현은 이를 악물었다.
“미친…… 새끼.”
“응.”
“이러지 말고 차라리…… 죽여.”
“우리 아이는, 당신을 닮아 진짜 예쁠 거야.”
“닥치지…… 못…….”
“나는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있어요.”
완벽한 가정을 만들어 줄 수 있어. 당신이 원하던 거잖아.
끔찍한 말을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헐떡이는 목소리로 내뱉는 욕설은 흥분을 부추겼다. 어지간히도 겁이 났는지 새파란 혐오가 남아 있는 자색 눈동자에 공포가 덧씌워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까보다 물기 어린 접합부가 찰박거렸다. 이기현은 자신의 몸이 수정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필사적으로 남자의 몸을 밀어 냈다.
“날 봐요.”
결합한 부분이 잘 보이도록 기현의 다리를 어깨 위로 올리고 허벅지를 벌렸다. 다리 사이로 들락거리는 동생의 성기를 보고 참지 못한 그가 시선을 돌렸다. 견딜 수 있는 역치를 넘어섰는지 몸의 떨림이 심해졌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뺨을 핥으며 한계까지 서서 프리컴을 줄줄 흘리는 선단을 구멍 근처에 진하게 문질렀다.
“보라니까.”
턱을 붙잡아 시선을 고정시켰다.
“누가 네 안에 들어가는지 똑바로 봐.”
하얗게 질린 얼굴과 달리 날이 선 눈빛이 처연함을 더했다. 전이라면 눈물을 핥으며 달래 줬을 텐데 지금은 더 가학적으로 울리고 싶었다. 이 고고한 존재를 꺾어서 엉망진창으로 짓밟고 싶다. 다시는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하게, 일어서지도 못하게 나락으로 떨어뜨릴까. 이기하는 잔인한 상상을 하며 발목을 힘껏 움켜쥐었다. 끔찍한 고통에 이기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멈췄다.
이기하는 빨갛게 붓기 시작한 입구 속으로 성기를 도로 밀어 넣었다. 방금까지도 남자를 받아 놓고 처음인 것처럼 내벽이 꾸역꾸역 기둥을 삼켰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애초에 한 번도 남자를 반가워한 적 없는 몸이다. 늘 이렇게 관계를 치렀다. 기현의 말대로 매번 강간이었다.
“왜 이렇게 됐……어.”
“…….”
“왜…… 읏…… 이렇게 변한 거야.”
숨도 간신히 쉬는 주제에 겨우 내뱉은 말이 또 저런 거라니. 귀를 기울였던 남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너 이런…… 이런 애 아니잖아. 아니었잖아.”
“변해? 무슨 소리야. 나는 처음부터 이랬어요. 단 한 번도 변한 적 없었어. 변한 건 네 쪽이지. 언제나.”
이기현은 무언가 더 말하려고 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포기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이기하는 고개를 내려 도톰해진 입술을 핥았다. 도망가는 혀를 깨물고 당겼다. 하아…… 입 안에서 뜨거운 숨이 터진다. 그의 머리를 움켜쥐고 정신없이 혀를 놀리며 그것과 같은 속도로 허리를 움직였다. 쳐 댄 탓에 아까보다 연해진 안이 탄력 있게 성기를 빨아들였다.
자꾸 눈앞을 가리려는 기현의 손목을 억지로 떼어 내며 남자는 그의 몸 위에 온전히 체중을 실었다. 땀이 뚝뚝 떨어지는 이마를 이기현의 목덜미에 비벼 댔다. 이미 한차례 물어뜯긴 상처에서 희미하게 올라오는 다디단 혈 향에 군침이 돌았다. 이를 세워 상처 근처를 물고 핥는 걸 반복했다. 이가 스치면 내벽이 움찔움찔 조여드는 게 또 환장할 것 같아 거친 욕이 맴도는 입술을 이기현의 피부에 정신없이 문질렀다. 바지런히 오물거리는 내벽의 감각에 선단 끝에서 끈적한 액이 끊임없이 비어 나온다. 배 안이 젖는 걸 느끼고 기현이 도리질 쳤다.
“안에…… 윽…… 하지, 마.”
호흡도 힘들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수치스러운지 이기현의 눈가가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제발……. 부딪쳐 오는 아랫배를 온 힘을 다해 밀어 냈다. 돌덩이 같은 몸은 그럴수록 더 세게 몸을 짓눌렀다. 기현의 애원이 남자의 귀에는 쾌감으로 앓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성기에 붉은 기가 보이기 시작한 것조차 몰랐다. 이기하는 그저 안이 젖어 들어 기분 좋아진 것에만 열중했다. 그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이 사람을 해칠 것 같아서.
메말라 가는 입술을 이기현의 타액으로 축이며 자꾸만 밀어 내려고 올라오는 손과 다리를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뺨을 내려치려던 손은 방향 감각을 잃고 남자의 턱 언저리만 힘없이 휘저었다.
마디마디 피멍이 얹은 손가락을 빨고 핥았다. 물릴 때마다 밑에 깔린 기현의 입에서 교성이 아닌 비명이 맴돌았다. 교접이 아닌 섭식을 하는 것 같았다. 퍽! 퍽! 젖은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속살을 뭉개는 살덩이가 무섭도록 부풀었다. 쾌락의 극치에 이기하의 잇새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본인의 몸이 남자를 쥐어짜고 있다는 건 알지도 못하고 이제 곧 사정할 때가 됐음을 직감한 이기현이 공황 상태에 빠져 몸부림을 쳤다.
“안……. 안 돼, 그만…….”
“하아…….”
“하지 마. 하지…….”
“사랑해요.”
저주 같은 말이 끝나고 머리채가 휘어 잡히더니 베개 위로 처박혔다. 충격에 눈앞이 핑 돌았다. 남자가 목덜미를 움켜쥐어 단단히 고정시켰다.
“사랑해. 형.”
무시무시한 힘이 이기현의 머리를 내리눌렀다. 옴짝달싹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목이 콱 깨물렸다. 경악으로 눈앞이 새하얘졌다. 그 틈을 비집고 한발 물러나 있던 성기가 배 속으로 단번에 파고들었다.
한계까지 처박힌 남자의 성기 끝에서 뜨거운 정액 줄기가 울컥울컥 뿜어졌다. 몸 안이 메워지는 걸 깨달은 이기현의 의식이 기어코 끊어졌다.
그가 정신을 잃은 건 내벽의 상태로 바로 알 수 있었다. 끊어 먹을 듯 아득하게 조이던 근육이 의식의 부재와 함께 조금 느슨히 풀어졌다. 이기하는 아까보다 더 편안하게 형의 몸 안에 파정했다. 이번에야말로 수정되기를 바라며 오래도록 진한 씨물을 쏟았다. 성에 차도록 구멍 속을 뭉갠 다음에야 겨우 숨을 터트렸다.
심장이 피부를 뚫고 터져나올 듯 쿵쾅거렸다. 이기하는 늘어진 형의 몸을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더 진입할 수 없었음에도 그의 안에 더 깊게 들어가고 싶어 안간힘을 썼다. 이렇게 연결되어 봤자 한 몸이 될 순 없겠지만.
혼곤한 머리를 그의 목덜미에 기대고 숨을 가다듬다 아직 수그러들지 않은 것을 길게 잡아 뽑았다. 피가 섞인 점액질이 끈적하게 딸려 나오는 것을 보고 그제야 안이 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끝끝내 젖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라 이기하의 입술이 비틀렸다. 엉덩이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정액을 성기 끝으로 그러모아 입구 속에 꾹꾹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다시, 삽입을 시작했다. 듣는 이 없는 애처롭고 잔인한 고백을 끝없이 반복하면서.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기현은 가물거리는 눈을 간신히 뜨며 생각했다. 침대 밖을 나가지 못한 지 얼마가 됐는지도.
흐리멍덩한 상태로 잠들었다 깰 때마다 창밖의 색채가 바뀌었다. 새파란 달빛이 들어오다가도 다음번에 눈을 깜박였을 땐 빛이 하얗게 번졌고 정신을 차리려 애쓰다 보면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모호해진 감각으로도 몸이 흔들리는 것만은 느껴졌다. 통제력을 잃고 들린 다리가 허공을 제멋대로 휘저었다. 이걸 몇 날 며칠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울지 마요.’
헐떡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울지 마…….’
속을 모질게 파들어 가면서 남자는 원망을 쏟아 내기도 했고, 다시 회유하기도 했다.
‘당신은 내게 이럴 수 없어요.’
잘못했다고 해요.
잘못했다고 해 기현아― 다신 안 그러겠다고.
억지로 몸을 가르고 삽입한 것을 추어올리며 남자가 재차 권유했다. 발에 족쇄까지 달아 놓고도 이기하는 그가 도망갈까 두려워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하체의 결합이 깊어지며 기다리던 말 대신 신음이 터졌다. 몇 차례나 사출한 아래가 온통 젖어서 물에 잠긴 것 같았다.
‘사랑한다고 해.’
어느 날은 애절한 부탁이었다.
‘사랑한다고 해 줘.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그렇게 애원해 놓고 남자는 자신도 터무니없는 부탁을 한 것을 아는지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비볐다. 젖은 뺨에 닿는 피부는 전보다 훨씬 까칠해져 있었다.
‘아무것도 못 하겠다면 그냥, 내 이름만이라도 불러 줘.’
그가 기대하는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이기현은 또다시 눈을 감았다.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이 계속되는 잠자리 탓인지, 아니면 모든 정신을 소모해 버린 탓인지 알지 못했다. 이렇게 그저 침대 위에서 숨만 붙어 있는 것을 원했다면 성공이었다. 족쇄를 달아 둔 것이 무색하게 이기현은 스스로 침대 밖에 나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몸 안을 채운 정액을 긁어내려 몸부림치는 것도 그만두었고, 씻고 먹고 하는 기타 모든 것을 이기하의 품에 안겨 그의 손을 거치면서도 전처럼 반항을 하는 일도 없었다.
아주 가끔, 그의 손길을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할 때 빼고는.
조심스럽게 기현의 손톱을 깎던 이기하가 자신의 손길을 뿌리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톱깎이의 날이 들어간 상태에서 빼낸 탓에 잡아 뽑힌 손톱에서 피가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동요를 숨기고 차분히 형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렇게 형님 몸 상하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
“제 입술이 닿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익숙한 일이었기에 상처 난 부분을 혀끝으로 부드럽게 감싸 핥아 내렸다. 이기현은 그런 남자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화를 내고 싶으시면 차라리 절 때리세요.”
치료를 마친 남자가 기현의 손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다른 데를 향해 있었다. 서로를 진득하게 마주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아 이기하는 부러 형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손가락 사이사이와 손끝까지 키스하는 동안에도 기현은 이기하를 바라보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남자가 무릎 꿇고 있던 몸을 일으켜 기현의 뺨을 감싸 쥐었다. 기울어지는 고개에 그제야 이기현이 싫은 내색을 비추며 얼굴을 틀었다.
표정 관리를 전혀 못 하던 형이었다. 말로는 인정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애정을 담고 있던 눈은 타인을 대하는 것처럼 생경한 빛만 남았다. 그날 밤 이후로 이기현은 무언가가 사라진 사람같이 굴었다. 쏟아지리라 예상했던 질문조차도 하지 않고 매번 발작하듯 몸을 떨면서도 밀어내진 않았다. 끌어당기면 끌려오고, 침대에 눕히면 눕혔다. 형제 모두를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던 지독한 반항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형님.”
기하는 그의 뺨을 매만지며 억지로 자신을 보게끔 고개를 돌렸다.
“저 좀 보세요.”
그의 부탁에 고분고분하게 눈을 돌렸다. 코끝이 스치자 기현이 기계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남자의 심기를 상하지 않게 하겠다는 듯, 남자를 돌아 버리게 하겠다는 듯이 얌전하게 원하는 것을 해 줌으로써 그가 바라는 것을 결코 주지 않겠다는 표현을 했다. 부드럽게 겹친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차가운 반응과 달리 입 안은 뜨거워 이기하는 더 미칠 것 같았다. 젖은 소리를 내며 몇 번 혀를 섞지도 않았는데 기현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목덜미나 도톰하게 부어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붉은 입술이 요사스러웠다. 요새 이기현의 모습은 부쩍 폭력적인 충동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열기가 치솟아 어떻게든 손대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끔.
이기하는 다시 입을 맞추는 대신 그를 꽉 끌어안고 목덜미의 상처에 입술을 묻었다. 심장 소리만은 동요를 숨기지 못했는지 점차 세게 쿵쿵거렸다. 그마저도 자신을 의식한 게 기뻐 형의 몸을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이렇게 당신은 날 혐오하는데, 그런데도 난.”
뼈마디가 거칠게 드러난 커다란 손이 뿌리내리듯이 허리를 감싸 쥐었다. 그 손길에 결국 기현의 몸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지만 모른 척 머리를 기댔다. 완전히 품에 안긴 모양새를 하고 그는 나직이 속삭였다.
“당신이 사랑스러워. 이런 당신도 너무 예쁘기만 해. 그러니 포기해요.”
네가 기대하는 대로 되지 않을 거니까.
이렇게 되리라 예상했다. 최악의 최악까지도 각오했기에 사지 멀쩡하게 숨이 붙어 있는 이기현이 곁에 잔류하고 있는 지금은 예상한 시나리오에서는 온건한 축이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망가져도 좋으니 포기하길 바랐다. 부서져도 되니 내 것이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의 형이 그가 한 모든 짓을 다 알고도 전과 같은 눈으로 쳐다볼 리가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그런데도 형을 보고 있으면 끝 간 데 없는 욕심이 또 싹을 텄다. 이제 신인 것을 알게 된 그가 힘을 되찾고 자신을 버릴까 봐 견딜 수가 없었다. 족쇄 하나만 채운 것을 후회했다. 양손과 양발에 모두, 가능하다면 목에도 채웠어야 했는데.
이기현의 배에 뺨을 비볐다. 이 배 속에 매일매일 마르지 않게 씨를 뿌리다 보면 언젠가는 부풀어 오르겠지.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예쁨받고 싶어서, 당신이 원하는 건 다 해 주고 싶은 욕심에 내 욕망을 누르고 누르다가 일을 그르쳤다. 처음부터 끼고 살았으면 지금쯤 우리 사이에 아이가 둘은 있었을 것을.
빨리 임신해.
빨리 임신해 제발.
남자는 입에 담지 못할 파렴치한 상상을 하며 이기현의 맨다리를 쓰다듬었다. 동요한 그의 발에서 스산한 사슬 소리가 났다. 이젠 익숙해진 그 소리를 들으며 가운 끈을 끌러 내고 연인의 안에 자신의 몸을 묻었다.
* * *
“괜찮으십니까?”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귀에 수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기하는 눈을 떠 느릿하게 눈을 굴렸다. 잠깐 잠이 들었는지 손에 들고 있던 서류가 구겨진 채 흩어졌다. 뻑뻑한 눈 주변을 문질렀다. 요새 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을 자더라도 이렇게 잠깐씩 의식을 놓은 것처럼 선잠이 들 뿐이다. 이기현을 잡아오느라 힘을 거슬렀던 것이 타격이 큰 모양이었다.
“피곤하시다면 물러가겠습니다.”
물러간다는 말에 손을 들어 막았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이주시킬 인원 선별이 끝났습니다. 사상 검증도 통과했고 전부 결격 사항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가 흥미를 보일 때 얼른 태블릿을 건넨 수하가 기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번 달 말이면 신변 정리를 끝낸 자부터 순차적으로 이주가 시작됩니다. 관리자급과 특수 기술직을 우선순위로 섬을 가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인물들로 구성했습니다. 빠르면 해가 지나기 전에 신께서 거주하시기 어긋남 없이 정상화될 겁니다.”
인적 사항이 뜬 화면을 심드렁하게 넘겨 보다 다시 던져 버렸다.
“2지구는?”
“아무래도 외부인들은 선별이 까다로운지라……. 혈족을 통째로 이동시키는 것보다 변수가 많을 테니 일단은 1지구의 상황을 확인한 후에 마저 진행해야 할 듯합니다. 다만 우리 쪽 움직임을 주시하던 제1 세계 스폰서들에게서 문의가 있었습니다. 소란스럽기 전에 미리 언질을 주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말끝이 흐려지자마자 이기하의 차가운 눈이 따라붙었다. 뱀 앞의 개구리가 된 기분에 그는 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문질렀다.
“송구합니다. 알현을 청하는 자들을 막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중간에 정보가 샌 모양입니다.”
“그렇게 쳐 냈는데 아직도……?”
비딱하게 고개를 돌려 이제 주인을 잃고 군데군데 비어 있는 자리를 훑었다. 그의 눈길을 느낀 혈족들이 숙였던 고개를 더 깊게 조아렸다. 혈족 중 아직도 이지헌과의 권속이 이어진 자, 정통을 의심하고 이지헌의 유언을 실행하고 있는 자들은 솎아 내었다. 이승호를 처리했으니 그가 부리던 수족들도 뿌리 뽑았다. 간사하게 복속된 척을 하고 피를 빨아먹던 쥐새끼들과 복속임에도 끊임없이 의심하며 간언을 아끼지 않던 자들까지도.
“저번 일로 신의 건재함을 확인하고 싶은 듯합니다. 한 번만 모습을 보여 주신다면 다들 기꺼이 다시 충심을 다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낭비하라고?”
“죽을…… 고비를 넘긴 자들입니다. 앞날을 위해서라도 시간을 들이시는 게 어떠하신지요. 결국 언젠가는 양분이 될 자들이니까요.”
변절자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아는 수하였기에 죽을 고비라는 말을 흐렸다.
톡, 톡, 남자의 손가락이 의자의 팔걸이 끝을 두드렸다.
“영생을 살게 해 줬더니 늙은이들이 겁만 많아져서는.”
집 밖으로 나갔으니 이기하와 생명이 연결되어 있던 자들은 적든 많든 모두 피해를 봤을 것이다. 자칫 일가가 살을 맞고 몰살당할 수도 있는 위험을 남자는 제 짝 하나 붙잡겠다고 강행했다. 그 과정에서 거세게 항의하는 수뇌부들은 광으로 끌려들어 갔다. 정확히 열흘째가 되던 날 이기현을 쫓기 위한 새로운 고독들이 광 안에서 탄생했다. 풀려난 저주는 도망가는 신을 향해 날아갔다. 숨바꼭질의 승자는 언제나 이기하였다.
“너무 얌전히 살았더니 네놈들이 내가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나 잊은 모양이야.”
추도제를 지냈던 조등이 아직도 집 안팎에 매달려 있었다. 뉴스에서는 이기현이 사라졌다고 떠들고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은 하나 둘 숙청을 당했으니 저치들이 두려울 만도 할 거다. 이기하는 손가락을 두드리던 걸 멈추고 관대한 척 허락을 내렸다.
“방계 쪽 인원들을 추려서 연락해. 썩은 걸 잘라 냈으니 이 기회에 새로 선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뜻하지 않은 명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혈족들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신의 곁에 더 가까워질 기회를 잡은 것이다. 타이밍 좋게 이기현을 감시하던 고용인이 앞으로 나섰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가주님. 기현 님이 깨어났습니다.”
수하들을 물리고 이기현의 모습이 담긴 태블릿을 건네받았다. 막 잠에서 깨어나 어지러운지 화면 속의 그는 이마를 짚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 그렇게 얼굴을 숙이고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기현이 자해라도 하지 않을까 만일을 대비해 피워 두었던 수면 향의 효과가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 며칠간은 잠에 취해 일어나지도 못했었는데 그새 내성이 생긴 모양이라, 과연 신체다웠다. 이제 전보다 센 게 아니면 재우지도 못하게 될 거다.
약을 쓰지도 못할 테고 회유도 실패했으니 어떻게 제어해야 하나 고민하던 이기하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기현이 고개를 들더니 정확하게 CCTV가 있는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들킨 건가. 이기현도 당연히 감시하고 있음을 알 테니 굳이 숨길 생각도 없었지만 뜨끔한 기분으로 지켜보는데 흥미가 떨어졌는지 그가 곧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평소와 똑같은 행동을 다시 이어 갔다.
조용히 침대 끝에 앉아 창밖만을 바라보는 일. 사슬의 범위가 닿는 근처에 책과 전자 기기처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른 물건들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이기현은 그날 이후로 그저 창밖에 핀 꽃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없어 불안했다. 이제 그만두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 것에 오히려 조바심이 인다. 내가 아는 형이라면 여기서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는데. 포기는커녕 이기현의 눈빛은 밟을수록 더 고요하게 살아났다. 그래서 더 환장할 것 같았다. 아직 도망은 멈추지 않았음을,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서.
“사슬을 길게 해 줄까. 그럼 움직이려나…….”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며 왼쪽 손목을 주물렀다. 감각이 둔해지고 뻐근한 것이 또 비가 올 모양이었다. 이기하는 뼈대가 불거진 손목을 문지르며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