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47)

2

연달아 내리치는 파도에 배가 기우뚱 기울었다. 강준형은 선미로 굴러떨어졌다가 가까스로 난간에 매달렸다. 하마터면 그대로 바다에 추락할 뻔했다. 이미 의식을 잃은 몇 명의 경호원은 파도에 속수무책으로 삼켜졌다. 그는 얼굴을 아는 자들이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무감하게 지켜보았다. 본인을 따랐던 보좌관이 발목을 붙잡았지만 발로 차 떨어뜨리고 달려드는 남자의 목을 비틀어 바닥에 처박았다.

원래도 타인에게 감흥이 없던 기질은 권속이 된 이후에 더 심화되었다. 김시연이 권속이 된 후 잔인한 순수성이 폭발한 것처럼, 박종오가 권속이 된 후 맹목적인 충성심이 폭발한 것처럼, 강준형 역시 내재되어 있던 본성이 발아한 상태였다.

주변을 다 정리한 후 숨을 가다듬으며 선상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를 독차지할 기대에 부풀어 있던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그가 혼자가 아니다. 이기현을 향해 손을 뻗는 사내가 보였다. 그것이 이기현의 다리에 매달리자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극렬한 질투와 살심이 치솟았다.

“이기현!”

그를 향해 달려가려고 발을 뻗은 순간 고꾸라졌다. 조금 전 다쳤는지 관절이 비틀렸다. 그러나 강준형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이기현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멍하니 매달린 사내를 쳐다보고만 있어서 다시 한번 소리 질렀다. 이기현의 상태가 이상하다. 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을까. 저러다 사내가 아까처럼 그를 해칠까 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이기현!”

이번에야말로 고함지르는 게 들렸는지 이기현이 고개를 돌려 강준형 쪽을 바라보았다. 자색의 불길이 치솟는 그의 눈을 보자 강준형은 절로 무릎이 꺾였다. 주인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권속은 극도의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시선이 그에게로 갔다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다. 주인의 눈은 그가 아닌 허공을 향해 있었다. 애타게 이름을 불러 보아도 그의 관심이 강준형에게 베풀어지는 일은 없었다.

“…….”

주인의 시선이 향한 자신의 등 뒤에서…… 강한 빛이 쏟아졌다. 강준형은 눈앞에 길게 자라나는 그림자를 보고 다급히 뒤를 돌았다. 자욱이 낀 안개 사이를 뚫은 불빛 수십 개가 선상 위를 비추며 가까이 오고 있었다. 눈을 찌르는 빛을 피해 몸을 웅크리는 것과 동시에 선체가 굉음과 함께 크게 요동쳤다. 강준형은 중심을 잃고 바닥을 굴렀다. 손바닥에 산산조각 난 사이렌 파편이 박혔다. 저것은 중간에 접선하기로 한 화물선이 아니다. 사이렌. 이것이 부른 유령선이었다.

크루저와 추돌한 거대한 배는 크루저의 선미에 뱃머리를 박아 놓고 고요하게 정지했다. 기다랗게 튀어나온 선수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작살처럼 크루저를 꿰고 있었다. 끼기긱, 파도에 맞물린 두 배가 흔들리며 철판이 우그러뜨려지는 소리가 음산하게 퍼졌다.

곧 엉망이 된 선상 위에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열 명 남짓한 무리가 환영같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강준형은 선두에 서 있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이……기하……?”

이름을 불린 당사자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쳤지만 뒤를 따르던 가솔 몇이 주인의 이름에 반응해 일제히 돌아본다. 그들의 동공은 파충류같이 세로로 찢어져 번뜩거렸다. 권속이 되어 개안한 상태로 보이는 이기하의 뒷모습에 강준형은 말을 잃었다.

슈트 위에 검회색 롱 코트를 걸친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검은 자국이 그들이 있는 선박 위로 퍼져 나갔다. 마치 습자지 위에 떨어진 한 방울의 먹이 순식간에 번지는 듯했다. 남자는 뭐라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한 모습이었다. 단정하게 입은 슈트 사이로 살짝 비치는 속은 온통 붕대로 감싸 있었고 피가 새어 나온 건지 희었을 붕대는 전부 시커멓게 물든 채였다.

몸에서 뻗어 나온 수만 갈래의 검은 자국들이 핏줄기처럼 너울거렸다. 그것들은 남자의 온몸에서 체취를 뿜어내듯, 사방으로 어둠을 드리우며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완벽하게 착장을 한 그의 모습은 마치 ‘그것들’이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않도록 어떻게든 가둬 두려 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가닥가닥 넘실대는 그 끔찍한 잔상들은 온갖 틈으로 남자의 몸에서 비어져 나와 당장이라도 크루저를 집어삼킬 듯 비대하게 덩치를 늘렸다.

보기만 해도 목이 졸리는 압박감에 강준형은 목을 쥐고 헐떡였다. 익히 저런 것을 본 적 없었다. 그 어떤 것에서도 저렇게 불길한 형태를 구현해 내진 못했다. 이 공간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이기현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귀신이라도 보는 표정이었다. 이기하는 한 발짝도 채 되지 않을 간격을 두고 서서 그런 형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정중하게 건넨 인사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남자 역시 자신에게서 도망친 형이 반갑게 맞아 주리라는 기대 따윈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팔을 벌려 보였다. 그리고 저절로 품에 들어올 리 없는 그를 향해 남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코트를 벗어 이기현의 어깨에 둘러 주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못 본 사이에 품에 들어오는 몸이 더 가냘팠다.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아마 정신도 다소 붕괴되었을 테지만……. 괜찮다. 놓치지 않았으니까. 남자는 속으로 뇌까렸다.

이렇게 될 거라고 했잖아. 너는 나 없이는 못 살 거라고.

“약속대로 모시러 왔습니다.”

다감하게 속삭이며 얼음 조각 같은 형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온기 하나 없던 몸에 체온을 옮겼다. 이렇게 안고 형의 냄새를 맡으니 그제야 살 것 같아 한껏 숨을 들이켰다. 진짜 신에게로 되돌아온 독들이 더 강한 독에 고통스러워 몸부림친다. 그 반동으로 이기현의 몸이 계속 움찔거렸다.

“기……하…….”

목이 졸려 바람이 새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기하…….”

“예. 접니다.”

넋이 나가 있는 이기현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제가 왔습니다. 나의 신.”

당신의 제물이 왔어요.

귓바퀴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비에 젖은 솜털을 덧그릴 때마다 그가 흠칫흠칫 놀란다. 피가 튄 뺨은 백색의 피부와 대조를 이뤄 눈이 시리도록 선연한 색채를 띠었다.

어째서 당신은 매번 참상의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서 이리도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왜 그런 눈이에요. 정말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가만가만 코끝을 비비다 고개를 기울여 부드럽게 입술을 포갰다.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느른하게 빨았다. 다정한 입맞춤이었지만 이기현은 얻어맞는 듯 굳어 갔다.

그의 밀랍 인형 같던 낯빛에 홍조가 오른다. 파랗게 질린 손끝에도 온기가 흘러들었다. 느리게 뛰던 박동도 점차 거세졌다. 쩌억쩌억, 뼈가 부서지고 갈리는 참혹한 소리가 났다. 자성을 가진 것에 쇳가루가 다닥다닥 달라붙듯 도처에 흩뿌리던 어둠이 이기하의 등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둠을 거둬 낸 자리에 더한 어둠이 자리한다. 비대하게 몸집을 늘리는 그 끔찍한 형태에 강준형은 압도되어 뒷걸음질 쳤다.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에야 겨우 자신이 발을 들여선 안 되는 영역에 겁도 없이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여태껏 여우에 홀려 있었다는 사실도.

입술이 떨어지고 이기현은 텅 비어 허물어졌다. 이기하는 무너지는 몸을 익숙하게 안으며 피 냄새를 쫓아 이기현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자해를 했는지 손목에 매인 붕대에서 고약한 약 냄새와 달콤한 체 향이 진동했다.

붕대를 끌러 내고 상처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남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크헉……!”

멱살이 잡혀 땅으로 처박힌 강준형의 입에서 피거품이 튀었다. 눈 깜짝할 새였다. 이기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몇 번 더 바닥에 그를 처박았다가 힘을 줘 끌어 올렸다.

“네놈 짓이지?”

핑 도는 시선 끝에 쓰러져 있는 이기현의 손목이 들어왔다. 절개된 부분이 아물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것을 보자 우월감이 치솟았다. 네가 만들어 놓은 건 지워지고 내 흔적만 남았다. 내가 이긴 거다.

“아아, 저거……? 그가 원한 거야.”

“원했다고?”

“지우겠냐 물었더니 마취도 제대로 안 하고 손목을 내밀던…… 컥!”

한 번, 아니 두 번 더 머리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머리가 깨지며 영향을 줬는지 한쪽 귀가 먹먹해지면서 기능을 상실했다.

“그래. 너 때문에.”

“허억…….”

“너만 빨리 치웠어도 쉬웠을 텐데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고요한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처음에는 반항하러 올라오던 손이 곧 힘을 잃고 떨어졌다. 권속이 됐을지언정 힘의 차이는 월등했기에 한쪽의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이기하는 한참을 그렇게 화풀이를 하다 피떡이 된 그를 내던지고 일어났다. 후유증으로 강준형의 몸이 움찔거렸다. 가까스로 헐떡거리며 입 안에 고이는 피를 겨우겨우 밖으로 뱉어 낸다. 이기하는 그 꼴을 무감하게 내려다보다 피가 튄 뺨을 장갑으로 닦고 그의 위에 던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도로 쓸어 올리고 구겨진 옷매무새를 고쳤다. 방금까지 지독하게 폭력을 행사하던 남자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끔해진 그가 이기현에게로 돌아가려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모습을 가물가물한 눈으로 쳐다보던 강준형이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네…… 형 말야.”

“…….”

“몸이 아주…… 깨끗하더라. 색도 예쁘고.”

이기하의 발걸음이 멈췄다. 예상대로의 반응에 강준형의 피 묻은 입술이 호를 그렸다.

“의외였어. 손목에만…… 그려 놓을 게 아니라 속살에 이름이라도 새겼을 줄 기대했더니. 나라면 방울이라도 달아 놨을 텐데. 그런 취향은 없었나 보…….”

말은 채 마무리되지 못했다. 컥 하고 입 안에서 핏덩어리가 터졌다. 으깨지는 듯한 감각이 귀에서, 턱에서, 온몸으로 가해진다. 모든 세포에 퍼져 나가는 끔찍한 고통에 소리도 못 지르고 몸만 비틀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다시 다가온 이기하가 구둣발을 들어 손목을 지그시 짓밟았다.

“몸을 봤다고?”

“……!”

“어떻게?”

“아악―!”

귓구멍에 칼날이라도 쑤셔 넣는 듯한 통증에 이번에야말로 비명을 질렀다. 평소 단정했던 얼굴은 어디 가고 이기하는 야차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너덜너덜해진 손목을 걷어차고 그의 커다란 손이 부숴 버릴 것처럼 턱을 움켜쥐었다. 강준형은 그가 들어 올리는 대로 딸려 올라갔다가 고통에 헐떡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네가…… 큭…… 싫다고 도망친 사람이야. 버림받아 놓고 무슨 낯짝으로 쫓아와?”

“어디까지 봤어?”

“진절머리 내는…… 거 안 보여? 널…… 끔찍하게 여기는 게 안 보이냐고……!”

“허락했을 리가 없는데.”

“저 사람은 나를 선택했어. 널 버렸다고.”

“선택?”

두개골이 파열되는 소리가 남은 한쪽 귀에 울렸다.

“일회용 도구 주제에 착각하지 마. 이기현이 선택한 건 오직 나뿐이니까. 너희들은 그저 우연찮게 걸린 장기 말일 뿐이지. 아직도 모르겠나? 그의 손을 잡고 도망갔던 게 네가 처음이 아니라는 거?”

그리고 또다시 폭력이 쏟아졌다. 의식이 흐려졌다가 통증에 강제로 깨어나는 과정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주인의 박동이 이기하가 나타난 순간부터 선명하게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지독한 남자가 주인의 생명을 틀어쥐었다는 걸.

“괴……물…… 새끼.”

“그런 말 많이 들었어.”

그가 엄청난 힘으로 붙잡은 턱에서 으드득, 으드득, 금이 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죽음에 이르러야 할 상황이었음에도 생명이 유지되는 것은 권속이 된 덕분이었다. 그래서 강준형은 세포 하나하나 빠짐없이, 이기하가 퍼붓는 처참한 고통을 낱낱이 느껴야 했다.

완전히 가면을 벗어 던진 남자는 이제 온몸이 검게 물들어 원래의 모습 따윈 온데간데없었다. 시커멓게 타오르는 남자의 뒤로 압살당할 듯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그것을 눈치챈 것과 동시에 이기하의 등에서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솟구쳤다. 뱀의 굴을 잘못 건드렸다가 잠들어 있던 뱀들이 깨어나 눈앞을 까맣게 메우며 쏟아지는 것처럼……. 그림자는 강준형의 위를 덮을 만큼 몸집을 확장해 가다가 뚝, 움직임을 멈췄다.

“…….”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 용했다. 극도의 공포에 강준형의 턱이 덜덜 떨렸다. 눈앞까지 밀려든 그림자 속에서 수천 개도 넘을 눈동자들이 일제히 가느다란 눈을 떠 강준형을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형형하게 안광을 뿜는 짐승들의 눈동자…….

이 남자는, 이 괴물의 정체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설마 그 고서의 내용대로…….

‘원본을, 볼 수 있을까요. 아니 보게 해 주십시오.’

고서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 표정이 달라졌던 이기현이 떠올랐다. 뭘 가져다 바쳐도 심드렁하던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였던 것이었다.

표면적으로 여우 신을 숭상해 부를 축적했다 전해지는 이 씨 일가였지만 실상은 여우 신을 통제하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독성을 지닌 생물체를 한곳에 몰아넣고 서로 죽이게 한 뒤 마지막에 남은 것들로 독을 만드는 고독(蠱毒)이라는 저주. 이 씨 일가는 그 사악한 저주를 불러일으켰다.

여우 신의 힘을 꺾기 위해 여우의 씨를 말리고, 가둬 두기 위해 제물이라는 이름으로 독뱀 수천 마리를 생매장해 그 위에 성을 세웠다. 그들이 자리 잡은 성채는 고독을 생성하는 거대한 그릇이었다. 희생당한 제물들은 성공적으로 주춧돌이 되어 발목을 잡았고 신은 시체를 넘고 도망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씨 일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으로 제어당한 신은 그들이 원했던 신이 더 이상 아니었던 것이다.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여우 신과 저주를 받은 일족. 그게 설화 따위가 아니라……. 강준형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왜 그렇게 이기현에게 집착했는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수많은 꽃들에 둘러싸여 있던 모습을 본 첫 만남부터 불나방이라도 된 듯 속수무책으로 끌렸고, 지배당했다.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의 공기 냄새, 바람의 온도, 꽃들의 색채. 그의 뺨 위로 고요히 침전하던 빛. 주인의 푸른 동공이 열리고 자신이 반사되어 맺히던 그 순간. 그 순간. ……그 순간.

신을 모시는 마지막 가문. 기묘한 그들의 영역에 휩쓸려 백일몽을 꾸었다. 그리고 이제 그 꿈을 누린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

“어쩐지…….”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상하다 했지……. 그래.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았……어.”

첫눈에 반한 게 아니었다. 고작 그런 충동적인, 애정 따위에 기반된 감정이 아니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별안간 치어 버린 사고에 가까웠다. 영혼이 빨려 나가고 텅 비어 버린 몸을 채우기 위해 발악하는 빈 쭉정이가 되었던 거다.

저 사람을 위해선 뭐든지 해 주고 싶었다. 가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속박하기 위해 세워 두었던 계획 따위 그가 눈썹을 찌푸리고 말 한 마디만 하면 무너졌다. 지금도 국내에 억류시키겠단 생각은 어디 가고 계획에도 없던 배를 타고 있었지 않은가.

멍청하게 손에 떨어진 것을 잘 구슬려서 뽑아 먹고, 아둔한 생각에 대충 맞장구쳐 주고, 어르고 달래서, 혹은 협박해도 좋고, 몸마저 갈취해서 그의 새로운 주인이 될 셈이었다.

그럴 요량이었는데.

강준형은 실없이 흘리던 웃음을 거두고 물었다.

“그……였나? 너희 가문이 성을 세워 가면서까지 숨기고 있던 게.”

충동적으로 내뱉은 답에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네가 저것들을…… 부리고 있는 거지?”

몇 단계나 뛰어넘은 물음에 이기하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역시 영민해. 어떻게 무의식으로 홀려도 이렇게 하나하나 감당하기 버거운 것들만 걸렸는지.

남자의 긴 손가락이 강준형의 심장 부근을 꽉 짓눌렀다. 순간 구역질이 치밀었다. 이물질을 뱉어 내려는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속에…… 무언가가…… 있다?

“부리고 있는 게 아니야.”

남자의 음성에 화답하듯 심장에서부터 차가운 것이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그것의 정체를 눈치챈 강준형의 표정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언제부터……? 심어 놓고 발현시킬 때를 기다렸다고?

퍼져 나가는 독에 천천히 흉부가 굳어 갔다. 고통에 오그라든 강준형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기하가 이를 드러냈다.

“내가 그것들을 다 먹어 치웠거든.”

이기현에게로 흘러들 독들을 전부 먹어 치워 마지막 한 마리가 되었다. 어린 이기하가 형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비록 신보다 귀신에 더 가까워졌을지라도.

“그도…… 알……아? 네가…… 이런 괴물……인 것을.”

힘겹게 뱉어 낸 물음에 이기하가 부드럽게 웃었다.

“굳이 알려 줄 필요가 있나?”

“네……놈…….”

“이 아이들에 중독되면 가장 두려워하는 걸 본다던데.”

“…….”

“네겐 무엇이 보이지?”

독이 폐로 번져 갔는지 강준형의 흰자위가 붉게 물들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도 점점 다급해졌다. 흐려지는 눈앞에 보이는 남자의 시커먼 형상이 기다랗게 늘어졌다가 성인 남성의 몸집으로 줄어들었다.

남자는 그의 입 가까이 귀를 대고 답을 기다리다 곧 흥미를 잃고 일어났다. 권속은 이번에는 주인에게 가는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 어느새 입술이 굳어 아예 부를 수조차 없었다.

이기하가 형의 몸을 정중하게 안아 올렸다. 대기하고 있던 가솔들이 손에 들고 있던 것에 불을 붙여 사방으로 던진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선상 위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강준형은 곁을 지나가는 그들의 바짓단을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겨우 붙들었다.

“…….”

혀가 완전히 굳어 버려 그저 입술만 뻐끔거렸다. 이기하는 그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다 품 안의 이기현을 고쳐 안아 그의 시야에서 차단했다.

“이래 봬도 네게는 제법 감사하고 있어.”

“…….”

“일 처리를 아주 잘해 준 덕분에 아무도 이기현이 출항한 사실을 모르더군. 목격자도, 기록도 없애 줘서 일이 쉬웠어. 이렇게 희생자도 적고 덮기도 쉬운 적은 처음이야. 네 덕분이지.”

“…….”

“KNG그룹의 사생아가 일영의 장남을 납치해서 자취를 감췄다―. 공식적으로 너는 범법자가 될 거고 이기현은 영원히, 실종 상태로 남을 거다.”

강준형이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원망할 거 없어. 자비를 베풀어 겨우 네 선에서 책임을 묻고 끝내 주는 거다. 대를 이어 영원히 죗값을 치르는 자들에 비한다면야 감사할 일이지.”

붙잡은 손을 쳐 내고 다시 발길을 옮기려던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여태껏 강준형이 남자에게서 본 적 없는, 진심 어린 예우였다.

“형님을 안전하게 감출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

그 말을 끝으로 귀가 떨어져 나갈 듯 시끄럽던 주변이 완전히 잠잠해졌다. 그들의 무리는 왔을 때처럼 신기루같이 서서히 사라졌다. 강준형은 유일하게 남은 감각인 시각으로 그들의 뒷모습만을 좇았다.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뚱이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죽음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죽는 것이 두렵기보다 이제 다시는 저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제일 공포스러웠다.

겨우 닿았는데, 겨우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겨우, 겨우.

고(蠱)에 중독되어 몸의 주도권을 전부 빼앗긴 남자의 의식이 화마가 덮치는 것과 함께 점멸했다.

남자의 넓은 등에 가려져 가까스로 보이는 하얀 손목.

그게 강준형에게 베풀어진 주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사내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땀이 밴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그는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약속했던 시간은 한참 전에 지나 있었다. 혹시 약속 시간을 착각한 것은 아닌지 휴대 전화를 켜서 확인하고는 불안한 눈으로 연신 방 안을 살폈다. 그러다 참다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향해 몇 걸음 걸었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기도 했다. 어째 너무 운이 좋더라니. 역시 좀 더 운신을 했어야 했나. 잘못되면 어떡하지? 속임수였으면?

이제라도 발을 빼고 도망가야 하는지 가늠하는 찰나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문가에 나타난 것은 밝은색의 머리를 한 남자였다. 그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내를 보더니 씩 웃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지요?”

늦었다는 말과 달리 행동과 목소리에는 여유가 넘쳤다. 그와는 상반되게 급하게 오느라 옷조차 갈아입지 못해 흰 가운 차림인 사내가 어색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취재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최진호라고 합니다.”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내가 손을 맞잡으며 재빨리 상대의 모습을 살폈다. 호의를 불러일으키는 선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그의 시선에 미소를 더했다.

“아까 간략하게 설명드렸으니 바로 시작할까요. 선생님께서도 시간이 없으실 테니.”

소형 녹음기를 내려놓으며 시간을 확인하는 남자에게 사내는 침을 삼키며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저기…… 약속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아. 그럴까요.”

남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지고 왔던 브리프케이스 입구를 연 뒤 사내 쪽으로 돌렸다.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최진호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평생 개같이 벌어도 만져 보지 못할 금액이 눈앞에 있었다. 한 시간도 안 될 짧은 취재에 응한 대가치고 지나치게 과한 액수였다. 그래도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정보일 거라고, 사내는 짓누르는 불안감을 날리려 애썼다.

이들이 원하는 정보는 강준형이 데려왔던 그 청년에 대한 것이었다.

[KNG그룹의 차남 강준형이 일영의 장남 이기현을 납치]

아침에 일어나 헤드라인을 확인하고 기겁했다. 바로 어제만 해도 멀쩡하게 배에 올랐을 강준형은 어느 순간 납치범이 되어 수배가 떨어진 상태였다. 상황을 아는 최진호는 미칠 노릇이었다. 하필 강준형 쪽에서도 고액의 수고비와 함께 입막음을 단단히 해 둔 터라 안가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기밀 사항이었다. 심지어 그를 제외하고 안가에 머물렀던 모든 이들은 다 크루저에 승선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들은, 모두 증발했다.

“원래라면 저도 출항에 합류했어야 하는데 피치 못할 개인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빠진 게 이리 돼 버렸습니다.”

그 대신 대타가 되어 승선했던 동료의에게서도 연락이 끊겼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몸을 사리던 중, 유일하게 단 한 곳만 납치가 아니라는 논조의 기사를 싣고 제보를 바란다는 문구에 연락한 것이 지금이었다. 누명을 벗겨 줄 기사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액수의 보상도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 한 분 빼고는 다 승선한 게 확실한가요? 기왕이면 제보자가 많은 편이 좋을 텐데요.”

“워낙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라…… 아마 없을 겁니다. 인원을 더 선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요. 드나들던 사람은 전부 배에 탔던 걸로 기억해요.”

“그럼 안가에 머물던 것을 증명해 줄 사람도 없는 게 확실하고요? 상황이 안 좋네요……. 그래도 선생님 동료분들께는 말해야 했을 텐데.”

“말씀드렸다시피 애초에 비밀 유지를 서약한 일이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병원에는 집안일로 한동안 휴가를 낸 걸로 되어 있습니다. 가족한테도 말하지 못했는걸요.”

“흠…… 그럼 확실히 함께 사시는 모친께서도 모르신단 말씀이시죠?”

모친의 얘기에 사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제가 가족 관계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나요?”

“다른 제보자를 찾으려 병원에 전화해 봤더니 동료분이 알려 주던데요.”

그랬나, 납득한 사내가 몇몇 동료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윽고 몇 차례 형식적인 질문이 둘 사이에 오갔다. 사내가 입을 열 때마다 열심히 기록을 하던 남자가 불쑥 특이한 물음을 던졌다.

“혹시 다른 곳에서 낸 기사를 읽어 보셨습니까? 어떻던가요? 아직 증거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납치라고 단정 짓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납치라니 말도 안 돼요. 이기현 씨는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그곳에 있다는 인상이었는걸요. 일단 도망가려는 행동을 보인 적도 없고 문신을 지워 달라는 말도 본인 스스로 했었고…….”

“문신이라……. 지워 달라고 했다고요? 스스로요.”

“예, 이기현 씨 손목에 가느다란 문신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실 팔찌를 찬 것처럼요. 급하게 지워 달라고 해서 제가 투입됐었습니다. 아무튼 정황상 납치라고 단정 짓긴 좀 어렵다고 봐요. 제 발로 배를 타러 간 사람한테 납치라니 너무 자극적으로 왜곡해서 보도하는 거 아닌가 싶고.”

“문신을 지운 뒤 어떻게 되었나요?”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부분을 지적당한 최진호는 당황했다. 의사의 본분을 어기고 강준형의 지시대로 마취를 일정량 이상 사용한 것에 여태 채무감이 있는 것을 간파당한 기분이었다.

“기왕이면 안가에서 있었던 일을 세세하게 알고 싶어서요. 저희도 제보자가 선생님 한 분이다 보니 아주 사소한 것도 다 여쭙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슬그머니 피어오르던 의구심은 그가 선량하게 웃으며 덧붙인 말에 다시 쓸려 내려갔다. 이상하게 이 남자가 친근했다. 분명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저 사람 좋은 미소 때문인가. 아니면 그동안 혼자 비밀을 짊어지고 있던 불안이 해소되어서인지도 모른다.

“사실 문신을 지우고 이상한 일이 있긴 했습니다.”

“이상한 일이요?”

“간단한 절개술이라 수술 자체는 문제가 없었거든요. 마취가 잘 안 드는 체질이었는지 그 부분에서 살짝 미스였을 뿐이지 수술이야 잘됐는데……. 이상한 건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를 않았어요.”

“아물지를 않았다고요.”

그는 또 펜을 움직였다.

“아, 제가 뭘 실수한 건 절대 아닙니다. 수술은 확실히 잘됐…… 아니 완벽했습니다.”

“그럼요. 선생님 명성이 대단하시던데요.”

“약을 써도 봉합이 안 되니 이거 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회복력이라는 거 자체가 아예 없는 사람같이 수술했던 직후랑 똑같은 거예요. 세포가 노화되어 회복력이 줄어든 사람은 있어도 아예 재생조차 안 되는 몸이라니……. 혹시 맥이 잡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들어 보셨습니까? 수년간 의사 노릇을 해 왔지만 그런 사람은 처음이더군요. 심장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으니 몸이 이상한 건 당연했죠.”

찜찜했던 부분을 털어놓으니 봇물이 터진 것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뭐 그때부턴 좀 난리가 났었습니다. 강준형 사장은 뭐가 문제인 거냐 들들 볶아 대지,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를 해 봐야 될 것 같은데 안가에서 절대 데리고 나갈 순 없다지 거기서 대체 제가 뭘 할 수 있겠냔 말입니다. 저도 거의 반감금 상태였다니까요?”

“그러게요. 확실히 이상하네요.”

“근데 말이에요. 그것만 이상한 게 또 아니었어요. 사실 이기현이란 사람은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사람이었죠.”

“가령 어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 같긴 했는데 유독 본인을 쳐다보는 것에 민감하더군요. 아무래도 눈길을 끄는 외모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어찌나 난리를 치던지.”

창문 앞에 서 있던 그의 뒷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최진호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혹시 그를 보신 적 있나요? 눈이 굉장히 예쁘거든요. 특히 노을이 질 때 눈동자가 휘판이 있는 것처럼 빛을 반사하는 게 인상적이었는데. 아직도 그게 생생하게…… 아, 대체 어디로 간 건지……. 그 사람 무사하겠죠? 일영 장남이라는데 왜 포털 사이트에 사진 한 장 안 나올까요? 그것도 이상해요. 일 터지고 저도 나름 알아볼 만큼 알아봤는데 일영이라는 그룹 자체가 좀…… 오너 일가에 대한 정보가 이렇게 없을 수도 있나요? 의도적으로 요청해서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그 집안사람들에 관한 사진 자료가 아무것도 없던데요. 왜 이걸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죠? 그 정도 규모의 그룹인데 말입니다. 납치되었단 소문만 무성하고 뉴스에서 떠들어 대는 건 전부 헛소린데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집안 내에 문제가 생겨서 일영에서 손을 쓴 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전부 맞거든요. 그 정도 가문의 장남이 그런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뭐겠습니까? 실무에서 뒷전에 죽은 사람이란 소문이 도는 걸 보니 취급이 어땠는지는 뻔하죠.”

한참을 맞장구만 치며 종이 위를 오가던 남자의 펜이 뚝 멎었다.

“병원 내에서도 그런 소문이 도나요?”

“소문까진 아니고…… 뉴스 뜨는 거 보고 너무 심란하다 보니 병원에서 잘 아는 사람한테 물어봤습니다.”

“아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요? 확실하게 해 주셔야 하는데?”

“아 안가에 대한 얘기나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이기현 씨에 대해서 궁금한 점만 물어본 겁니다.”

“그 잘 아는 사람이 누군지 이름과 연락처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최진호는 머쓱해하다가 지갑을 꺼내 명함 한 장을 찾아 내밀었다.

“이 친구입니다. 근데 안가 얘기나 이번 일에 대해 말한 게 아니라 그저 뉴스에서 떠든 일영 관련 가십에 대한 것만 물은 거라 문제 될 건 없을 텐데요.”

“아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선생님 얘기에 힘을 실어 줄 물증을 더 찾고 싶은 거라서요.”

건넨 명함을 확인하고 재킷 안에 갈무리하며 그가 다시금 사람 좋은 미소를 했다. 하긴 저만한 금액을 지불하는 유일한 제보자니 확실히 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겠지. 그의 부드러운 인상과 눈앞에 바로 보이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지폐 다발을 보고 최진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소에는 하지 않을 안일한 판단을 연속해서 하고 있음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제가 좀 불안했나 봅니다. 뉴스는 너무 편향되게만 보도하지, 안가 일은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지, 아는 사람들은 다 사라져 버리고…… 사실 스트레스가 좀 심합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선생님께서 연락하시기 전까지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요. 선생님께서 저희에게 연락 주신 게 얼마나 다행인지.”

“사장님이 뭐가 아쉬워서 멀쩡한 집 자제분을 납치하겠냔 말입니다. 신문에 실렸던 사진도 봐요. 그게 어딜 봐서 납치하는 장면이냐고요. 손목 잡고 차에 태우는 게 납치라니, 차라리 남자 후계자끼리 밀회라도 했다는 거면 또 몰라도.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데 왜 다들 그런 헛소릴 믿고 있는 거죠? KNG 측에서도 대응을 안 하고 있으니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잖아요.”

“두 사람이 밀회를 하는 것처럼 보였나요? 그렇게나 친밀해 보였습니까? 그 두 사람이.”

“아니, 아니요.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보통 남자 둘이 손잡고 있는 게 일반적인 건 아니잖아요? 선생님께서 그리 생각하시는 게 자연스럽죠.”

손사래 치면서도 최진호는 자신의 뺨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은연중에 하고 있던 생각이 또 입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두 사람은 확실히 여간 사이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 성격 더러운 것으로 유명한 강준형 사장이, 더 더럽고 까탈스럽게 구는 그 청년의 요구를 군말 없이 전부 수용해 주고 있었으니까.

누가 봐도 강준형은 이기현에게 목매고 있었다. 최진호가 평소 익히 알던 강준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손끝 하나 닿지 말라고 가시를 세우는 이기현의 주위를 강준형은 끈질기게 맴돌았다. 자존심 따위 없는 사람같이 하루에 한 번 이상 설전이 오가며 저급한 취급을 당하면서도 한 공간 안에 있는 것만큼은 고집하면서.

남자는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빙글빙글 돌렸다.

“선생님이 보시기에 두 사람은 어떤 관계 같았나요?”

어떤 관계라. 예쁘장한 청년 하나를 스폰하고 있는 것이라 여겼는데 그러기엔 이기현의 태도가 너무 아니었다. 어느 누가 스폰서에게 그렇게 고압적으로 굴 수 있단 말인가. 더더군다나 둘은…….

“두 사람이 같은 침실을 사용했나요?”

최진호는 방금 들은 말을 의심하며 눈을 크게 떴다. 정작 그런 질문을 한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최진호를 응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말을 잃은 그에게 남자는 재차 물었다.

“두 사람이 한 침대를 쓰는 사이였습니까?”

“아니…… 무슨 질문이 그렇게 대놓고…… 좀 무례한 거 아닙니까?”

무례하다고 말하는 말끝이 조금 떨렸다.

“그게 제일 확실하잖아요?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알기에는.”

“아무리 취재에 응했다고 해도 그런…… 얘기까지 자세하게 해야 하나요? 그건 사생활 침해가…….”

“사생활? 이 자리에 나와 계신 시점에서 그런 말이 의미가 있나요?”

그가 비아냥거리며 펜 끝으로 브리프케이스를 건드렸다. 최진호는 무심코 그의 손길을 따라갔다. 보여야 하는 것은 지폐여야 할 텐데,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건 이기현의 맨몸이었다.

맹세코 그런 짓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열망을 가진 것도 처음이었다. 한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이기현의 침실에 휴대 전화를 설치해 뒀던 것이 떠올랐다.

자해 흔적이 있는 사람이니까. 혹시라도 잘못되면 안 되니까. 처음엔 이런 마음이었다. 아니, 이런 변명이었다. 그러다가 찍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변명으로도 덮어지지 않을 추악한 마음이 싹을 텄다.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살면서 보기 드물 정도로 예쁜 청년이었으니까.

궁금했으니까.

그렇게 예쁜 건 침대 위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선생님?”

안타깝게도 기대한 것을 끝까지 찍을 순 없었다. 이기현의 잠버릇이 워낙 유별나서 온 집안이 떠나가도록 음악을 틀어 놔야 잠을 잘 수 있었으므로. 음악을 끄면 잠이 깨 버리는 통에 강준형은 번번이 이기현에게 손대지 못했다. 사실 누가 와도 그 소음을 뚫고 이기현을 건드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두 사람은 따로 침실을 썼습니다.”

그가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따로 썼다고요.”

“예.”

흠, 좋아요― 좋네요. 남자는 활짝 웃었다. 마치 들어야 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어찌 보면 사실 저것만 궁금했던 사람처럼.

그제야 사내는 이것은 취재 따위가 아니었다는 걸 느꼈다. 지금껏 들이밀어진 것들은 질문이 아니라 취조였다. 사내의 눈에 남자가 들고 있는 수첩의 앞면이 보였다. 줄곧 열심히 적어 가던 것은 취재 내용이 아니다. 수첩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것은 휘갈겨 쓰인 고어였다. 그걸 확인한 순간 사내는 이성을 잃고 순식간에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

그의 주먹이 닿기도 전에 사내의 몸은 힘없이 남자 위로 허물어졌다. 수도(手刀)로 급소를 내려친 남자가 최진호의 몸을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곧 얼굴 위에 머물던 미소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그는 재킷 안쪽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통화를 걸었다.

“김태영입니다. 네, 감응자가 맞았습니다. 아니요. 한 명 더 나왔습니다.”

챙겨 둔 명함의 인적 사항을 읊어 주고 이번에는 최진호의 휴대 전화를 찾아내 화면을 켰다. 잠금이 얼굴 인식인 것을 확인하고 한 손으로 멱살을 잡아 올려 카메라에 가져다 댔다. 사진첩을 눌러 확인하던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가득 차 있는 것은 온통 친구의 사진이었다. 스크롤을 내리던 손끝이 멎었다. 거의 모든 사진이 몰래 찍혀져 초점이 어긋난 가운데에 유일하게 이기현이 렌즈를 응시하고 있는 사진이다.

짐승처럼 빛을 반사하고 있는, 아니 빛을 뿜어내고 있는 듯한 한 쌍의 자색 눈동자.

김태영은 낮게 탄식하며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쫓기듯 방 안을 빠져나갔다. 조용해진 방 안에는 쓰러진 사내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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