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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덜컹거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여전히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가 시커먼 차창을 소란스럽게 때리고 있었다. 내가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박종오가 시선을 던졌다.
“죄송합니다. 깨셨습니까?”
“얼마나 지났지?”
“30분 정도 됐습니다.”
“겨우?”
못해도 서너 시간은 지난 것 같았는데 30분이라니. 몸이 으슬으슬 떨려 덮고 있던 외투를 끌어안았다. 온도 차로 차창에 물이 줄줄 흘러내릴 만큼 히터를 돌리는데도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를 딱딱 부딪치는 걸 본 박종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늘은 그냥 이동을 포기하고 쉬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거리를 더 벌려야 돼.”
조금만 지체했어도, 조금만 방심했어도 붙잡힐 뻔했다. 허름한 모텔에 어울리지 않는 종업원의 의전이 몸에 배인 태도와 본가에서 보았던 걸음걸이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 사람도 죽였어?”
박종오의 눈이 나를 향했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잠들게만 했습니다.”
군사 훈련을 받은 박종오의 경험으로 뒤로 따라붙었던 가솔들이 모텔 방에 들이닥치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뒷좌석에 뉘어 둔 사내가 몸을 뒤틀며 거칠게 기침했다. 한번 정신을 잃더니 그 후로 계속 깨어나지도 못하고 저 상태였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어 보았다. 아무리 솜씨 좋게 치료를 했다 한들 상처가 워낙 깊어 감염으로 인한 열이 굉장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죄 없는 그도 잘못될 것이다.
“강준형을 믿으십니까?”
결국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는 걸 듣던 그가 물었다.
“난 이제 아무도 믿지 않아. 지금 필요하기 때문에 이용할 뿐이지.”
“지금 박사님께 필요한 것은 그 남자가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 애 얘기……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가 정색하자 입을 다문다. 동행하게 된 후로 박종오는 틈만 나면 내게 본가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강준형이 보낸 사람들과 만날 지점으로 이동하며 나는 계속 쪽잠을 자다 깨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몸은 급격하게 나빠지는 중이었다.
“약을 드셔도 소용없습니다. 이건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약국에 들렀다 온 박종오가 약봉지를 내밀었다. 한 번에 며칠 치의 약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물을 들이켰다. 며칠 동안 커피 외에는 아무것도 소화하지 못한 배 속이 뒤틀렸다.
푸석푸석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지겹게 내리는 빗줄기로 시선을 옮겼다. 다행히도 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바람에 집안 것들이 쉽게 추적해 오지 못했다. 등받이에 머리를 파묻고 이제 앞으로 해야 할 일들만을 생각하는 동안 도착했는지 속도가 느려졌다. 어두운 곳에 주차시키고 바깥 상황을 보기 위해 나갔던 박종오가 몇 분 뒤 다시 차로 돌아왔다.
“집안사람들은 안 보입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래.”
약속한 건물 안으로 이동해 내릴 준비를 하며 안전벨트를 푸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먼저 접촉한 적 없기에 돌아본 눈동자가 커져 있었다.
“부탁이 있어.”
“예. 명하십시오.”
“본가로 돌아가.”
그가 이해가 안 가는지 멍한 얼굴로 잡힌 손만 바라보았다.
“돌아가서 기하에게 내가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전해. 열흘이 아니라 몇 년이 지난다 해도…… 난 돌아가지 않을 테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박사님.”
박종오의 안전벨트를 도로 채웠다.
“넌 거짓말을 못하니 사실대로 말해. 내가 널 버리고 강준형에게로 갔다고 하면 살 수 있을 거야. 날 팔아야 한다면 팔아.”
“전 박사님 옆에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집안 놈을 옆에 끼고 도망칠 생각 없어.”
“전 당신의 권속입니다.”
“네 말대로라면 고작 내 감정 하나로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널 옆에 두는 게 더 위험하겠지.”
“……명하신다면 아무도 해치지 않습니다. 감응에 저항하는 훈련은 이미 받았습니다.”
“내 명은 돌아가라는 거야. 무사히 외국으로 나갈 때까지 네가 수고를 좀 해 줘야겠다.”
내가 내리는 몇 가지 짤막한 지시를 듣던 박종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말 그러길 원하십니까?”
“그래. 날 위해 해 줄 수 있겠지?”
주차장 저쪽에 주차된 차에서 사내 여럿이 내리는 게 보였다. 약속한 대로 구급차도 보인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차 문을 열었다. 박종오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차 안에서 내리지 못했다.
“안녕하십니까. 이기현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다가온 사내가 아는 척을 했다. 언제 봤나 했더니 강준형과 처음 대면했을 때 옆에 붙어 있던 비서실장이었다.
“늦게 도착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저 사람인가요?”
전화상으로 말했던 뒷자리에 누운 사내의 상태를 보더니 서둘러 손짓을 한다. 곧 구급차에서 의료진들이 이동용 침대를 끌고 차로 다가왔다. 간단한 조치를 취하고 옮겨지는 그를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동안 간단한 통화를 끝마친 비서실장이 타고 왔던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선상으로는 환자 한 명만 동행한다고 하시더니. 저분도 함께 가는 겁니까?”
명 때문에 내리지도 못하면서 박종호는 계속 뚫어져라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시 정지 버튼이 눌린 기계 같았다. 그의 눈이 마치 버려진 그 아이 같아서, 일 초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날 휘어 감는 죄책감을 떨쳐 내고 싶어 고개를 젓고 다른 차에 올랐다. 차가 건물을 벗어나고서야 내가 그동안 박종오에게 나를 구해 줘 고마웠다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늦었잖아요. 이게 대체 몇 시야.”
한 시간가량 걸려 도착한 안전 가옥에서 기다리던 강준형은 자고 있었는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왔다.
“저녁엔 도착한다더니 새벽이 다 되어 오면 어떡합니까. 기다리는 사람 생각 좀 하지.”
다음에 만나게 되면 서로 모르는 척을 하자고 뻗댔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 말을 들은 적 없는 것처럼 동거인을 대하듯이 군다. 그 뻔뻔하기까지 한 친근한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가 간신히 항의할 말을 찾아냈다.
“왜 내가 당신 집으로 온 겁니까? 각자 다른 곳에서 머물 줄 알았는데요.”
“여기 내 집 아닌데? 누추하지만 들어와요.”
뒤에 서 있는 실장이 인사하고 나가자마자 자동으로 문이 잠겼다. 삼중이 넘는 보안 장치를 거치고 들어와 자력으로 나가지도 못할 테지만 반사적으로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강준형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 번 더 들어오라고 말하더니 먼저 복도를 돌아 사라졌다.
“…….”
건물에 들어올 때도 느꼈지만 안전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이 집도 결국 감시당했던 레지던스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이곳은 CCTV가 아예 보이는 게 다를 뿐. 붉은 등을 점멸하며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를 지켜보다 남자가 들어간 길을 따라 들어갔다.
감각적인 그림들이 걸려 있는 긴 복도를 지나자 주거 형태에 가까운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방은 몇 개 없고 거실이 큰 서구식 스타일이었다. 강준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사방을 둘러보고 있으니 복층 계단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편하게 있어요. 여긴 CCTV 같은 건 없으니까.”
“입구에 있던 건 장식입니까?”
“그건 출입자 확인하는 용도라 달려 있는 거고 이 안은 깨끗해요.”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CCTV가 있든 없든 중요한 게 아니었지만 굳이 꼬투리를 잡자 혀를 찬다.
“애인 데려오는 덴데 변태도 아니고 그런 걸 달아 놨을 리 없잖아요? 난 누구처럼 음험하지 않고 건강한 연애를 하는 남자라.”
애인 데려오는 데를 안전 가옥으로 만들어 둔 남자가 할 만한 말은 아니라 비웃음을 삼키며 거실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탁 트인 거실은 모던한 인테리어와 어울리는 미술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복도에 배치된 작품들처럼 세미 전시회를 연상케 했다. 내 미적 감각으로는 작가가 의도한 바를 알 수 없는 조형물을 쓰다듬으며 구조를 뜯어보았다.
전면 거실부는 안전 가옥답게 전부 콘크리트 슬래브로 마감되어 있고 한쪽 면 전체는 통유리로 짜져 바깥이 훤히 보였지만 창살 대신 철제 셔터가 매달려 있다. 외부로 나갈 수단은 육안으로 판단하기엔 방금 들어왔던 문이 유일했다.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나뉘겠지만 이 집에 대한 감상은 사치스러운 감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커먼 바깥을 내다보며 모자를 벗고 눌린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는데 강준형이 위층 계단에서 옷걸이에 걸린 옷 몇 개를 들고 내려왔다. 이곳에서 머물 생각인지 원래도 편했던 복장이 가운 차림으로 바뀌어 있다.
다가온 남자는 내 얼굴을 뜯어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습니까? 밥도 못 먹고 다녔어요?”
손부터 올라가는 건 습관인가 자연스럽게 뺨으로 손을 뻗었다. 고개를 돌려 피했지만 그보다 손이 더 빨랐다. 턱을 움켜쥔 남자는 억지로 자기 쪽을 보게 힘을 줬다.
“잠도 못 잤나 눈이 빨갛네.”
“놓으시죠.”
“흠, 밥부터 먹여야 하나, 아님 잠부터 재워야 하나. 이 시간에 밥은 좀 그러니 잠부터 할까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거 놓고 부탁했던 것부터 주십시오.”
놓으라는 소리엔 반응하지 않더니 부탁했던 걸 달라는 소리에는 씩 웃으며 손을 놓는다.
“일 얘기는 쉰 다음에 하지. 지금 그쪽 꼴이 말이 아닌데.”
그러고서는 들고 있던 옷걸이에서 옷을 빼 내 쪽으로 던졌다. 가슴으로 날아드는 옷가지를 반사적으로 받아 들고 당황했다.
“뭡니까?”
갈아입을 옷, 하고 다시 복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문 하나를 향해 턱짓한다.
“일단 씻어요. 저기 쓰면 됩니다.”
“……갑자기 씻으라고?”
“씻어야 잠을 자지. 잠자리 봐 두고 있을게요.”
“잠? 지금 잠 같은 걸 잘 때가 아닐 텐데요. 내가 데려온 사람은요?”
쏟아지는 내 질문에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 사람이야 수술실 들어갔겠지. 끝날 때까지 어차피 할 것도 없으니 쉬라고요. 쫓기느라 제대로 자지도 못했을 거 아냐.”
억지를 부리려다 꾹꾹 참았다. 이용해야 할 남자와 벌써부터 척질 필요는 없다. 그가 가리켰던 욕실 문을 향하다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잡니까? 설마 여기 머무는 건 아니겠죠?”
“왜?”
“…….”
“불안해?”
말을 고르려다 그냥 솔직하게 답했다.
“전적이 있는 분이잖습니까.”
“난 싫다는 사람 손 안 대요.”
그 능청스러운 말에 표정을 구겼다. 자기가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니었는지 딴청을 피우며 고갯짓을 했다.
“못 믿겠으면 잠그고 들어가면 되잖아.”
“잠가 봤자 주인이 따고 들어오면 그만 아닙니까.”
“응? 주인? 이 집 주인은 당신인데?”
이해가 안 가 그를 올려다봤다.
“아까 말했잖아요. 내가 여기 주인이 아니라고. 당신 주려고 산 안가니까. 그래서―.”
내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강준형이 싱글거리더니 내 쪽으로 한껏 몸을 굽히고 물었다.
“새집은 마음에 들어요?”
* * *
샤워실에 들어와 뜨거운 물부터 틀었다. 부옇게 차오르는 수증기가 유리 칸막이에 번지고서야 천천히 옷을 벗었다. 피부가 어찌나 얼어붙어 있었던지 뜨거운 물이 닿자 찢어지는 것 같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을 샤워 부스에 기대고 온도를 한 단계 더 올렸다. 어느 정도 몸이 데워졌을 때 박종오가 둘러 준 붕대를 끌러 냈다.
늘 놀랍다고 생각했던 회복력은 어디 가고 며칠 만에 상처는 더 덧나 있었다. 해외로 나가 잠적에 성공하면 제일 먼저 이 문신부터 지울 생각이었다. 가솔들이 쉽게 나를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은 모조리 지워 버릴 거다. 성형해서 얼굴을 바꾸고 유동 인구수가 높은 마을을 선택해 숨어든다면……. 아시아 출신의 평범한 남자 한 명 정도야 인파 속에 쉽게 녹아들 수 있겠지. 그렇게 몇 년만 버티다가 기반을 닦아 인적이 없는 산속으로 들어가자. 잊을 때까지. 잊혀질 때까지. ……그 애가 포기할 때까지.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을 멈춰야 했다. 이제 와 죄의식을 가져 봤자 뭘 하겠는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한참을 물줄기 아래에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욕실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잘못 들었나 싶어 기다리자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을 비껴가지 않는 행동에 쓴웃음이 나왔다.
“잠그고 들어가라더니…….”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불투명해진 유리 막 저편으로 문가에 기댄 실루엣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뻔히 왜 들어왔는지 알면서 물었다. 침묵하던 남자는 곧 웃으며 대꾸했다.
“살아 있네요? 한 시간이 다 되도록 안 나오길래 와 봤습니다.”
“멀쩡한 거 알았으면 그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웃음기 감도는 목소리는 내 축객령에 문 언저리에서만 머물더니 점차 가까워졌다.
“생각해 보니, 당신이 작정하고 엿 먹이려 하면 큰일이더라고.”
욕실 바닥에 고인 물을 철벅거리며 성큼성큼 걸어온 남자가 샤워실을 가로지르는 유리 막의 문을 거리낌 없이 열었다. 가득 찼던 수증기가 들이닥친 찬 공기로 삽시간에 흐려진다. 눈이…… 마주쳤다. 목소리처럼 얼굴도 비웃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남자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례한 짓에 대한 타박이 반박자 늦게 튀어 나갔다.
“뭡니까?”
“…….”
“뭐냐고요.”
“뭐…….”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고 턱을 쓸어 대다 툭 내뱉는다. 수증기 속에 잠겨 있던 건 나였는데 오히려 그의 목소리가 꽉 잠긴 채였다.
“하도 비싸게 굴길래 뭐 특별할 줄 알았는데.”
“…….”
“별거 없네.”
그는 못 볼 걸 본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거품을 헹궈 내고 남자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구경 다했음 그만 나가시죠.”
벌어진 사이로 손을 넣어 유리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였다. 닫히기 직전 강준형이 힘을 줘 도로 열어 버리더니 내 앞으로 훌쩍 다가왔다. 몸이 겹쳐지기 직전 옆으로 물러났지만 그보다 한발 빠르게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단 한 걸음 만에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틀어져 있는 샤워기 덕에 그가 입고 온 가운이 순식간에 젖어 든다.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숨을 들이켰다. 위험했다.
“별거 없다더니?”
내 조롱에야 겨우 그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음…… 그래서 내가 싫다는 말을 했던가?”
서로를 노려보던 것도 잠시, 적막을 깨고 남자의 손이 뺨으로 올라왔다. 눈을 찌푸리며 피했더니 그의 손이 그만큼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인다. 애완동물에게 주인의 손길을 가르치듯 신중하게, 그래서 방만한 손길이었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산으로 놔두었다. 내게 발정하는 두 남자 모두 고분고분하게 대하면 신기하리만치 태도가 변했다. 네가 예쁘게 굴면 이만큼 다감하게 변할 수 있다고, 아량을 베푸는 척하며 내 행동을 교묘히 통제하려 든다. 어깨를 붙잡은 손이 팔뚝으로 매끄럽게 내려갔다. 자해한 흔적을 들여다보는 줄 알았는데 그가 확인하고 있는 건 문신이었다.
“지우는 게 더 아프다던데…… 전문의를 붙여 주죠. 내일 바로 해도 괜찮지?”
지우겠다 맘먹은 걸 읽은 듯이 물었다. 기하가 내 몸에 멋대로 같은 문신을 남겼다고 생각하는 걸까. 강준형은 상대방이 남긴 또 다른 흔적이 없는지 이젠 거리끼지도 않고 훑어 내렸다.
“나름 기대했는데, 그 남자가 뭘 얼마나 그려 놨을까 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그런데 이렇게 깨끗한 걸 보니 기분이 진짜…….”
뒷말은 물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짙은 눈매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쳐다보며 남자의 손이 기하의 손보다 크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생각 따윌 했다. 이건 내게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손이었다.
기하가 손을 들 때는 그것이 내게 고통을 줄까 봐, 혹은 쾌락을 줄까 봐 정처 없이 휘둘렸는데.
남자는 만지는 대로 고스란히 남는 흔적이 신기한지 양 팔목을 한참이나 문지르며 붉은 자국을 남겼다. 그러다 아래를 밀어붙이는 힘이 강해졌다. 예상대로 얼굴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보며 고개를 돌렸다.
강준형은 뺨에 입술을 미끄러뜨리더니 잠시의 침묵 후 탁하게 중얼거렸다.
“입술도 안 돼?”
“될 거라 생각했습니까?”
“해도 되는 분위기였잖아. 지금 우리.”
“우리……? 우리라고?”
“나한테 온 건 내 배 위에 타겠다는 뜻 아니었나?”
무감하게 그의 하복부를 밀어 냈다.
“태워 주겠다 약속한 배는 이 배가 아니라 다른 배일 텐데요.”
날을 세운 말에 역시나, 더 날카로운 대꾸가 돌아왔다.
“내 돈은 이용해 먹어야겠는데 같이 뒹굴진 못하겠다고?”
“즉물적으로 말하는 편이 낫다면 앞으로 그렇게 하죠.”
“이제 새 남자가 필요할 거 아냐. 그렇게 억압하던 남자 대신 자유도 주고 뭐든지 해 주겠다는데 왜 싫어?”
네가 원하는 대로.
내게 홀린 사람들은 예외 없이 내뱉는다는 저 주종의 고백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렇게 도망치고 도망쳐도 여우의 꼬리는 그림자가 되어 붙어 온다. 쌓여 왔던 피곤함이 이제야 몰려든 건지도 몰랐다.
“내게 남자는 동생 하나뿐입니다. 이런 식의 배신은 안 합니다.”
“와―, 즉물적으로 말한다는 게 몇 초나 됐다고.”
그가 감탄하며 내 뺨을 툭툭 건드렸다.
“이렇게 된 마당에 거리낄 거 없다 이거야? 아무리 그래도 내 앞에서 그딴 소릴 하면 어쩌나. 기껏 데려오느라 그 고생을 했는데.”
“말을 가려 할 만한…… 사이는 아니지. 그쪽과 내가.”
그의 눈이 개구쟁이같이 빛났다. 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뒤로 물러났지만 그보다 빨리 입술이 다시 와 닿았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입이 아니라 뺨이 목적이었는지 좀 더 부드러운 접촉만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이제 그런 사이 좀 돼 보자고 이러잖아.”
지금껏 어떻게 상대를 꼬여 냈는지 잘 알 것 같다. 저 얼굴과 재력을 가지고 개수작을 부려 대는데 안 넘어가는 상대가 없었겠지.
“강준형 씨는 거절이 뭔지 모릅니까?”
“지조를 지켜 봤자 내일이면 네가 나와 같은 침대 썼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걸?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즐기는 게 낫지 않겠어?”
“왜 내가 그쪽이랑 즐길 수 있다고 장담하지?”
“…….”
의아해하는 그를 마주하며 솟구쳐 있는 것을 꾸욱 짓눌렀다.
“난 그 애 아니면 서지도 않는데.”
노골적인 말에 그의 시선이 저절로 아래를 향했다. 그러곤 웃던 표정을 천천히 굳힌다. 육안으로도 확연히 차이 나는 흥분의 강도에 그답지 않은 수치심이 어렸다.
“너도 왜 그렇게 장담해. 내 침대 위에 올라와 본 적도 없으면서.”
“그런다고 달라지겠습니까?”
“억지로 할 수도 있어.”
“할 수 있으면 해 보든지. 어떻게 되나.”
말은 저렇게 하지만 흥이 깨진 게 역력했다. 강제 운운하는 것 역시 짓밟힌 자존심 때문에 한순간 반발한 것에 불과하다. 그가 내가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좋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도 이젠 이 남자가 훤히 보였다. 이 사람은 손해 보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자신의 계획에 해가 갈만한 일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하, 이 상태로 그만두라니…….”
남자는 젖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씨근덕대더니 결국 붙잡았던 팔을 놓아주었다.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잡혔던 부분이 얼얼했다.
“아니면 셋이서 해 볼래? 나는 그래도 좋은데.”
“개소리하지 마시죠.”
“재미없기는.”
정색하는 나를 보고 그는 전과 같이 입만을 움직여 웃었다. 그러더니 다 젖어 달라붙어 있는 가운을 벗어 샤워실 한구석에 처박는다. 슈트 차림일 때도 느꼈지만 그의 몸 역시 운동을 꽤 했는지 대단히 탄탄한 편이었다. 전라가 되어 아랫배에 바짝 붙어 서 있는 것을 드러내 놓고 거리낌 없이 내 옆으로 다가섰다. 타인과 같은 샤워실을 쓴 적은 없어 생경해하는 나를 두고 이제 내 몸에는 볼일이 끝난 듯 샤워기의 온도를 조절하고 그 밑에 서서 제 몸만을 씻어 낸다.
“온도 좀 내려요. 익는 줄 알았네.”
“…….”
“그만하고 나오고. 수술 결과 나왔다니까.”
천연덕스럽게 거품까지 내서 샤워를 마치더니 어깨를 툭툭 치고 나갔다. 여차하면 주먹을 휘둘러서라도 저항하려 했던 몸의 긴장이 풀리며 현기증이 일었다. 욕실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하고 유리문을 닫았다. 오래 폐쇄된 공간에 있던 탓인지 귀가 멍했다.
김이 서린 거울을 쳐다보았다. 흐릿하게 비치는 턱과 쇄골 부근은 손버릇 나쁜 남자의 손자국으로 울긋불긋하게 변해 있었다.
* * *
그가 마련해 준 옷을 입고 머리를 털며 거실로 나오자 테이블 위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 잘 모르는 용어들로 빽빽한 종이를 몇 장 뒤적거리다 도로 던졌다. 곧 손에 술병과 잔을 든 강준형이 다가왔다.
“피곤할 테니 금방 끝내지. 와인 좋아해요?”
술잔에 술을 반 정도 따라서 내민다. 마시면 바로 뻗어 버릴 것 같았지만 그냥 받았다. 남자는 내 바로 옆의 의자에 앉아 긴 다리를 꼬았다.
“수술은 어떻게 됐습니까?”
“잘 끝났습니다.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다행히 재활하면 걸을 수 있게 회복될 거라더군요.”
혹시 장애라도 생긴다면…… 하고 각오하고 있던 터라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후속 조치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남자는 또 누구예요? 아주 몸이 넝마가 됐던데.”
“박현진 씨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강준형은 들고 있던 잔을 단숨에 비우더니 탁자 위의 서류 중 하나를 골라 내 쪽으로 밀었다.
“무사한 겁니까?”
“늦기 전에 위세척을 해서 목숨엔 지장이 없을 거 같긴 한데…… 약의 종류에 문제가 있네요.”
“약이요?”
술을 더 따르며 어깨를 으쓱한다.
“헤로인이 검출됐다던데? 지금 선일에서 새 나가는 걸 필사적으로 막고 있긴 하지만.”
“헤로인이요……? 그럴 리가, 그녀는―.”
“목숨에 지장이 없는 게 확인될 시엔 내 말을 따르겠다 했었죠?”
이번에는 그가 솜씨 좋게 내 말을 잘라 냈다.
“약속한 조치는 다 취해 놨습니다. 이제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롑니다.”
“…….”
“내 허락 없이 뭘 할 생각은 말아요. 당신도 머리가 있으니 알 거 아냐. 박현진을 살리려면 어중간하게 손을 대느니 차라리 빨리 사라져 주는 게 낫다는 걸. 내 말만 따라 주면 원하는 대로 박현진이나 오늘 그 남자나 멀쩡하게 걷게 만들어 주지.”
‘너 때문에 엮인 인간들이 불행해진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나?’
‘당신 곁에는 늘 향냄새가 떠돌아.’
동요를 들키기 싫어 손에 쥐고만 있던 술잔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목 넘김은 부드러웠지만 빈속에 들어가는 순간 짜르르하고 고통이 느껴진다. 내 수긍을 눈치챈 강준형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의자에 기댔다.
“그럼 그렇게 알고 우리 거래나 시작해 볼까요.”
이제 본론이었다.
* * *
길지 않은 대화를 끝내고 방에 들어와 푹신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만 대면 정신을 잃을 줄 알았는데, 다시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피곤한데도 잠은 오지 않았다. 시트 속에 웅크려 강준형과의 거래를 상기했다.
나는 한국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어차피 포기할 생각이었고, 강준형은 내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싶어 했다. 버리려는 것만 건네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공식적으로 일영의 장자가 KNG산하에 들어간다. 내 보호자는 기하에서 강준형으로 옮겨 간 셈이었다.
저 세계의 세세한 속사정이야 외부인인 내가 정확히 알 순 없겠지만 강준형은 나를 이용해서 그룹 내의 입지를 다지고 싶어 했다. 그동안 나누었던 짧은 대화에서 그가 묘하게 기하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사생아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무리 기를 써도 본처 소생의 장남을 이길 수 없던 좌절감이 불러온 자충수였을까. 남자는 형제의 밑에서 죽은 듯이 살던 내가 복수심이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했고 본인에게 동조해 주기를 원했다. 어쩌면 자신을 내게 투영했을지도 모른다.
‘그 남자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가져야 할 것들을 그 남자가 다 빼앗아 갔는데 억울하지도 않아?’
공증받기 위한 서류를 작성하는 말미에 그가 은근히 속삭였다.
무너뜨리고 싶다니. 내가 그 아이를? 가당치도 않다.
몸을 둥글게 말고 웅크렸다. 그저 도망갈 수만 있으면 된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그 집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아이의 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강준형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내줄 생각이었다.
뜨거운 물을 그렇게 오래 맞았는데도 느껴지는 한기에 이불을 끌어안았다. 텅텅 빈 마음처럼 머리마저 비워 버리려 노력했다.
커튼 사이에 부연 빛이 스며들 때까지 결국 나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언가 시커먼 것이 다가오는 느낌에 놀라 몸을 들썩이면 여전히 인기척은커녕 시곗바늘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고요한 방 안이었다. 겨우 진정하고 다시 눈을 감아도 몇십 분 지나지 않아 또 놀라 깨는 것을 반복했다. 잘 수 있는 것도, 깰 수 있는 것도 아닌 가위에 눌린 듯한 상태였다.
몇 시간 동안 눈을 뜨지도 못하고 누워 있으니 어느 순간부터 방 밖에서 희미하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무언가 무거운 것을 나르는 소리와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두 명 이상의 말소리가 오간다. 일어날 수가 없어 그냥 멍하니 밖의 소리를 들었다. 그저 무기력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도, 할 수도 없었다. 예전에 원승호와 함께 도망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전부 다 포기해 버리고 쉬고만 싶었다.
저혈압 탓에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지러운 머리를 짚었다. 잠을 거의 못 자서인지 온몸이 깨질 것 같이 통증이 인다. 누가 린치를 가한 것 같기도 하고 밤새 덜덜 떨면서 시달려 근육통이 온 것 같기도 했다. 비척비척 일어나 방에 딸린 욕실에서 대충 몸을 씻고 방문을 나섰다.
왜 이렇게 오전부터 시끄러웠나 했더니, 계단 밑으로 훤히 보이는 거실 한쪽에 새벽엔 보이지 않던 침대와 병원 기기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들이 인기척에 계단 위를 올려다봤다. 한 명은 어제 나를 마중 나왔던 비서실장이었고, 다른 한 명은 초면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기현 님.”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는 그에게 나도 어설프게 인사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더 쉬셔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사장님께서 최대한 빨리 처리해 달라고 하셔서…….”
“괜찮습니다.”
“안가에는 오늘까지만 외부인이 들어오고 내일부터는 사장님과 저만 출입할 겁니다. 어디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최대한 빨리라. 말 꺼내기가 무섭게 수술을 준비한 걸 보면 어지간히도 거슬렸나 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부터 하시고 수술하시죠.”
“아니요. 지금 하겠습니다.”
식사고 나발이고 얼른 끝내고 방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왼 손목을 걷어 올렸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는 조심스럽게 내 손목을 확인하더니 문신보다 그 주변 자해한 흔적에 관심을 기울였다.
“면적은 넓지 않아 절개하고 봉합하는 방식으로 하면 빠를 텐데 피부가 이미 많이 손상되어 있네요. 표층도 얇은 편이라 흔적이 남을 거 같습니다. 레이저로 하면 두세 번 더 시술받아야 하겠지만 그편을 추천드립니다.”
“절개해.”
내가 입을 열기 전에 하려던 말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언제 나갔다 왔는지 평소같이 슈트 차림을 한 강준형이 싱긋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제일 빠른 걸로 해. 회복이야 내가 도와주면 되니까.”
“그 방식이면 보조가 최소한 한 명 이상 필요합니다.”
“옆에 비서실장 있잖아.”
그는 둘둘 만 신문으로 의사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할 말을 잃은 의사에게 나도 고갯짓을 했다.
“그렇게 해요.”
침대에 누워 마취 주사를 맞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눈꺼풀이 무거워졌을 때 옆으로 수술 장비가 들어왔다. 졸지에 수술 보조가 된 비서실장이 정장 윗도리를 벗고 셔츠 팔뚝을 걷어 올린 뒤 손을 세척했다. 손목 부근에 차가운 약 같은 게 발려지고 천이 씌워졌을 때 거실에서 웅장한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졌다. 리모컨으로 곡을 선곡한 후 볕이 잘 드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다 기계를 조작하는 의사에게 물었다.
“선곡은 제가 하면 안 됩니까?”
완전한 내 발음에 마스크를 쓴 그가 눈만 동그랗게 떴다.
“약이 안 들었습니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가 눈에 띄게 우왕좌왕하자 신문을 읽던 강준형이 무슨 일이냐고 다가왔다.
“마취가 안 들은 모양입니다.”
“더 쓰면 되잖아.”
“이미 과한 양을 주사했는데요.”
말실수를 깨달은 의사가 아차 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왜 마취가 듣지 않는지 대충 짐작했기에 씁쓸하게 더 놓아 달라고 말했다. 아까 놓인 것과 같은 게 또 한 번 주사되고 원래라면 바로 의식을 잃어야 할 내가 여전히 말짱한 걸 본 의사는 황당해했다.
“괜찮으니 그냥 진행해요.”
그래도 혀끝이 조금 뭉개지는 걸 보니 뒤늦게 약효가 미약하게나마 도는 것 같았다. 의사는 이 상태로는 무리라 주장했지만 강준형이 당장 끝내라고 윽박질러 메스를 집어 들었다.
“…….”
표면에 날붙이가 닿았다. 손목을 가르는 일이야 스스로의 손으로 수도 없이 행했지만 맨정신으로 타인이 피부를 자르는 건 처음이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무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강준형이 얄밉게 속삭였다.
“손이라도 잡아 줘?”
노려보는 나를 응시하며 웃더니 자기 손을 시트를 움켜쥔 내 손과 얽었다. 거리끼지 않고 손톱이 피부에 파고들도록 움켜쥐었다. 퍽 아플 텐데도 강준형은 손을 빼지 않고 내 옆에 서서 수술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아픔에 정신을 잃는 것이 나았지만 나는 그의 손에 화풀이를 하며 계속 제정신을 유지했다. 눈앞이 시뻘게질 정도의 고통이 휩쓸고 뒤늦은 마취가 들었는지 손목에서 감각이 반쯤 사라졌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무리가 될 시점에 협주곡의 종장을 알리는 바이올린들의 질주가 울려 퍼졌다. 수술이 끝났는지 수고하셨다는 비서실장의 인사가 들렸다. 강준형이 반대편 손으로 내 이마를 짚고 괜찮냐고 묻는 것과 동시에 나는 까무러쳤다.
* * *
다시 눈을 뜬 것은 밤이 되어서였다. 누가 옮겨 줬는지 옷이 갈아 입혀진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만을 굴려 사방을 훑어보았다. 고요한 방 안에 은은한 커피 향이 감돈다. 몸을 일으키려 습관적으로 왼팔로 침상을 짚었다가 통증에 깜짝 놀랐다. 손바닥 반절에서 손목 위까지 두툼한 붕대로 감겨 있다.
침대 옆의 협탁에 놓인 커피 잔을 들고 목을 축였다. 희미한 온기가 남아 있는 걸 보니 이걸 가져다준 지 그리 오래 지나진 않은 것 같았다.
천천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왔다. 거실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로 소파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 강준형이 보였다. 그가 내 인기척에 위를 올려다봤다.
“잘 잤어요?”
“네.”
“그럼 내려와요. 밥이나 먹게.”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강준형을 따라갔다. 식탁 위에는 벌써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 그가 먼저 숟가락을 드는 걸 보다가 천천히 수저를 놀렸다. 겨우 한 숟가락을 떴는데도 입에서 모래를 굴리는 듯했다. 꾸역꾸역 밥을 넘기고 물을 들이켰다.
“안 넘어갑니까?”
무심하게 식사를 이어 가던 강준형이 물었다.
“커피 없습니까?”
“그건 밥 다 먹고.”
“속이 안 좋아서 못 먹겠네요.”
“억지로라도 먹어요. 그래야 약을 주지.”
밥 타박을 할 걸 알았다는 듯 대수롭잖게 대꾸하고 이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죽을 가져왔다. 간신히 몇 숟갈 떠먹다 일어나자 그도 입 주변을 닦고 따라나선다. 그가 건네주는 커피 잔을 쥐고 거실로 돌아왔다. 남자가 일하고 있던 자리의 노트북 화면엔 무언가 그래프 같은 것이 급상승해 있었다. 읽다가 구겨 놓은 신문도 보인다. 앞 장으로 넘기니 헤드라인에 커다랗게 일영과 KNG그룹명이 적혀 있었다.
이런 매체에 내 이름이 쓰여 있는 게 신기하기도 해 읽어 내리고 있자 강준형이 옆에 다가와 앉았다.
“행동력 빠르네요. 벌써 이런 기사가 나고.”
“미리 준비해 뒀으니까.”
그의 계획에 동참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신문을 던져 버리고 눈 주변을 꾹꾹 눌렀다.
“저는 언제 나갈 수 있습니까?”
“모레 홍콩편 배를 수배해 뒀습니다. 일단 그때 같이 출국하는 걸로 하고 일영 쪽 동향을 좀 보죠.”
“더 빨리는 안 됩니까? 그리고 홍콩은 너무 가까운데요.”
“이번에는 거기로 참아요. 대륙을 이동하려면 시간도 더 필요하고 준비해야 할 게 있어요.”
내가 한국을 나가기만 하면 버리고 잠적할 생각임을 모르는 남자가 내가 소화해야 할 일정을 읊어 주기 시작했다. 나를 자신의 파트너로서 옆에 세우려는 계획을 건성으로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무엇을 더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중에 강준형이 생각났다는 듯 물어 왔다.
“그런데 열흘이 뭡니까?”
“……예?”
귀를 의심했다. 강준형은 노트북 타자를 치며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아까 당신이 자는 동안 일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통화를 요청하기에 거절했더니 열흘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해 달라던데.”
“누구한테…… 왔다고요?”
“누구더라? 조 실장?”
“정확히 뭐라고 하던가요.”
내 분위기가 바뀌자 하던 일을 멈추고 지그시 나를 응시한다.
“그냥 당신 안부를 묻더니 통화가 가능하냐 물었고 거절하자 저 말이 끝이었습니다. 열흘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몸 조심히 돌아오시길 고대하겠다라나?”
열흘 전에 돌아오라는 협박. 의미는 모르지만 기하가 베푼 열흘을 가솔들은 나름 충실히 이행 중이었다. 불안해져 그 말을 곱씹는 내게 아, 하고 운을 띄운 남자가 뒷말을 이었다.
“맞다. 이런 말도 했습니다. 당신 동생이 보고 싶어 한대요. 기다리고 있노라고.”
“…….”
“귀엽게 굴죠? 한다는 말이 기껏 보고 싶다고 돌아오라니. 무슨 형아가 친구 집 놀러 간 거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그가 픽 비웃더니 다시 타닥타닥 타자를 쳤다. 반면 나는 속이 울렁거려 입을 틀어막았다. 그나마 몇 숟갈 넘긴 죽이 넘어올 것 같았다. 기현 씨? 강준형이 이름을 불렀을 때 기어코 견디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황급히 변기 커버를 열고 속의 것을 게워 냈다. 울컥거리며 피가 쏟아졌다. 뒤따라온 강준형이 시뻘겋게 변한 물을 보고 혀를 찼다.
“겨우 저 말 한마디에 이렇게 돼? 벌써 망가져 있는 건 재미없는데.”
몇 번 더 피를 토하고 헐떡거리는 내 앞에 손수건을 내민다. 받는 대신 비틀비틀 일어나 세안대로 향했다. 원래도 비었던 속을 더 끄집어내 기력이 달리는지 눈앞이 어떻게 할 수 없게 핑 돌았다. 얼굴을 씻고 쓰러지지 않으려 세안대를 붙잡고 버텼다.
강준형은 나가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계속 나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나갈 때까지의 보안은…… 확실한 겁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그쪽이 요구하는 것도.”
“더 빨리 나갈 순 없겠습니까?”
“앞당기긴 어렵다니까. 지금도 갑자기 생긴 일정에 무리 중이라.”
“당신 스케줄이야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 있잖아. 내가 나가는 걸 알고 대기하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서 대역을 세워 달라며. 그거론 부족해?”
내 대역과 강준형의 대역은 전용기로. 나와 강준형은 크루저를 통해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내가 강준형에게 와 있는 걸 아는 일족이 이렇게 조용할 순 없었다. 늘 도망쳤을 때마다 귀신같이 알고 따라붙었던 자들이다. 차라리 지금 안전 가옥 앞에 들이닥쳐 나오라고 총이라도 쏴 대는 게 현실적일지 몰랐다.
“새파랗게 질려서는.”
타월로 얼굴을 닦아 주며 그가 어린아이를 다루듯 달랬다.
“이렇게 무서워 벌벌 떨면서 왜 여태 버텼어? 그러게 금방 나한테 왔으면 좋았잖아. 미련한 구석이 있다니까.”
말뜻은 차가웠지만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백화점에서 손바닥이 찢겼을 때 그가 보여 줬던 표정이 떠올랐다.
“잘못되면 어떡합니까? 만에 하나 틀어지면?”
“그런 일 안 만들려고 내가 잠도 못 자고 처박혀서 이러고 있잖아요.”
“…….”
“며칠만 참으면 됩니다. 그럼 당신은 안전하고 자유로워질 거야. 내가 장담하지.”
내 권속이 이마에 대고 달콤하게 속살거렸다.
* * *
‘안전하고 자유로워질 거야.’
폭풍우가 쳤다.
선체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다.
파도가 하얀 배의 옆을 내리칠 때마다 쩌억쩌억 갑판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휘청, 걸음을 옮겼다가 바닥에 들이친 물에 미끄러졌다.
내 뒤쪽에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살아 있는 사람.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둑한 눈을 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안전한 여행되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 말했던 비서실장의 비명 소리였다.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선실에서 들렸던 비명은 곧 멎었다. 사람의 소리가 끊기는 것과 함께 내 걸음도 멈췄다. 처음부터 다시 귀를 기울였다.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했다.
전신의 감각이 일시에 해방된 듯 세포 하나하나의 운용이 느껴진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꺼풀 발라진 것처럼 예민하게 돋아났다. 눈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모든 감각이 열린 상태였다. 주변 몇십 미터 반경 내에 살아 있는 온갖 것들의 호흡이 바로 옆에 닿는 듯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쿵, 쿵, 쿵, 쿵, 쿵, 쿵.
각자 다른 울림을 가지고 뛰는 생명력. 나와 동화되어 똑같은 박동을 가진 권속도, 나를 해치려 달려들었던 짐승들의 박동도 모조리 느껴진다. 내 몸에 들어오는 정보들을 흡수하며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앞은 어두웠지만 생명체가 뿜어내는 생기들의 흐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것들을 보자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목마르다.
지독한 기갈에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생기를 향하다 무언가 발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엎어진 곳에 물컹한 게 잡혔다. 이미 영이 빠져나가 천천히 식고 있는 몸뚱이. 이제 생기라곤 다 닳아 찾아볼 수 없는 덩어리를 감흥 없이 발로 밀어 벗어났다.
목말라.
허공에서 퍼부어지는 빗줄기가 온몸을 적시는데도 목구멍은 메말라 연신 혀로 입술을 축였다.
아, 목말라. 어찌 이리 목이 탈까.
목을 움켜쥐고 비린내가 풍기는 바닥을 올랐다. 큰 파도가 덮친 선체가 크게 기울어 한 번 더 굴러떨어졌다. 계속 다리에 걸리는 것들 덕에 반쯤 기다시피 걸으며 어렴풋이 잔상을 남기는 푸른 것을 따라갔다.
한쪽 구석에 웅크린 푸른 덩어리는 목을 축이기엔 하찮고 희미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가까이 다가가 막 손을 뻗었다. 그때, 그것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형님!”
부지불식간에 얼어붙었다.
형님.
형님.
내가 움직임을 멈추자 그것은 벌벌 떨며 반쯤 벗겨진 내 바짓단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죄송합니다. 형님!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
“죽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형님!’
목적을 잃은 손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취해 있던 정신이 순식간에 현실로 끌려 올라간다. 그와 함께 좀 전에 일어났던 일들도 딸려 왔다.
새카맣게 동공이 확장돼 달려들던 사람들의 모습.
넘어진 내 위에 올라타려던 남자들, 여자들, 인간들. 인간들. 인간들. 인간들.
멍하니 고개를 들자 안개가 걷히듯 멀었던 시야가 천천히 밝아졌다. 피투성이가 되어 반쯤 찢겨나간 옷이 눈에 들어온다. 내 다리에 매달려 공포에 질린 낯선 사내의 얼굴도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자색의 불이 비치고 있었다.
젖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빗물과 바닷물로 완전히 씻겨 있는데도 손바닥에서는 감출 수 없는 피비린내가 난다.
‘안전하고 자유로워질 거야. 내가 장담하지.’
아아, 바보 같은.
바보 같은 소리다.
누가 안전하고 자유로워진다는 건가.
이 배에는 액신이 타고 있는데.
* * *
‘왜 이렇게 몸이 차갑습니까.’
내 옆에 앉으며 강준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내일이 출항인데 이래서 갈 수는 있겠어요?’
피를 토했던 날 이후로 몸 상태는 눈에 띄게 악화되고 있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핏기가 사라지고 손끝이 파래지는 걸 감출 수는 없었다. 처음엔 손이 많이 가니 아기를 키우는 거 같다고 농을 걸었던 강준형도 심각해 보였는지 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마취제만 안 듣는 게 아니라 어떤 약이든 안 받습니다. 이 장비로는 부족해요.’
당장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우기는 말을 무시하고 약을 넘겼다. 문신을 지운 부분도 심각했다. 내 몸의 재생력은 전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봉합한 그날 이후로 수술 자국은 전혀 아물지 않고 있던 것이다.
‘국외로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저분 몸이 좀 이상해요. 처음 수술할 때는 일시적이거나 체질이겠거니 넘겼는데…… 맥이 약하다 못해 거의 안 느껴집니다. 이런 환자는 처음 봅니다.’
몸 자체는 망가지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감각들은 전보다 몇 배는 더 예민하게 돋아났다. 방 밖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대화하듯 들릴 정도로.
의사와 비서실장은 강준형에게 출항을 미룰 것을 계속 회유 중이었다.
‘심장 쪽에…… 있을 수 있어요. 일단은 ……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자칫 ……하면 ……측이랑 아주 크게 틀어질 수도…… 원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잖습니까. 이번 일이 ……되면 회장님께서…….’
청각처럼 후각도 예민했다. 어떤 냄새가 누구의 체취인지도 구분이 가능했다. 의사와 얘기를 끝마친 강준형이 내 방문으로 걸어오는 소리, 그가 몰고 온 연기 냄새가 가까워지는 것도 느껴졌다.
‘잠이 안 오나?’
용케 내가 눈만 감고 있는 걸 알아채고 물었다. 그의 손이 뺨을 감싸 쥐어 어쩔 수 없이 눈을 뜨자 나를 내려다보며 모호한 표정을 한 강준형과 눈이 마주쳤다. 첫날 이후로 남자는 손을 대지 않는 대신 종종 저런 얼굴을 했다. 기억 속의 여자 친구였던 김시연과, 박종오와 같은.
그는 내가 손을 뿌리치기 전에 거두더니 커피 잔을 내밀었다.
‘일영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잔을 입술에 대려다 멈칫했다. 내 침묵에 그가 팔짱을 꼈다.
‘당신 말대로 정말 쉽더군요. 당신 대리인이라 이름만 대도 턱턱 다 내놓으니 이건 뭐…… 이렇게 쉬운 걸 그동안 그 고생을 했으니.’
‘그럼 이제 거래는 성립됐다는 말이네요.’
‘꼭 나가야 합니까? 당신 배를 탈 상태가 아니라는데.’
이 안가마저 새장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남자가 가증스러운 걱정을 해 왔다.
나는 그대로 진행하라 말했고 강준형은 결국 약속을 지켰다. 출항 준비를 끝마치고 대역이 무사히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우리 쪽도 안가를 나섰다. 그때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주변에 잠복하고 있는 가솔들도 없었고 대비했던 것에 비해 허탈하게도 아무 일 없이 항구에 도착해 수속을 끝마칠 수 있었다.
‘이상해.’
내가 중얼거리는 걸 들은 강준형이 담뱃불을 붙이며 대꾸했다.
‘총상 환자도 달고 왔길래 나름 각오하고 있었는데 너무 조용하니 이상하긴 하네.’
‘아니, 진짜 이상해.’
‘뭐가?’
뭐라고 설명할 순 없었지만 이상하다. 누가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것도 아닌데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무언가가 맹렬하게 쫓아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인간이나 짐승이 낼 수 없는 속도로.
시커먼 구름이 가득 끼어 있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벼락이 치려는지 구름 사이가 번쩍번쩍거렸다.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분명 무언가가 내 쪽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빨리…… 가는 게 좋겠어요.’
‘그만 출발해.’
반쯤 태운 담배를 던지고 강준형이 재촉했다.
‘안전한 여행되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승선했다. 곧 선체가 육지에서 멀어졌다. 불안을 잠재우려 세웠던 계획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크루저로 중간까지 간 다음 미리 연락해 둔 화물선으로 옮겨 탄다. 그리고 화물선에서 홍콩 쪽에서 보낸 요트로 또 갈아타는 간단한 밀항이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수행 인원도 단출했다. 평소에 안가에 드나들던 인원에 열 명 남짓한 경호원이 더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도망에 성공했으니 좀 웃지 그래. 아니면 벌써 향수병이야?’
강준형이 이제 육지가 보이지 않는 바다로 나왔음에도 계속 그쪽을 바라보는 내게 물어 왔다.
‘저거 보입니까?’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강준형은 담뱃재를 탁탁 털며 ‘적란운?’이라고 답했다. 떠나왔던 방향의 하늘에는 탑 모양을 한 기다랗고 어두운 구름이 생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물었던 것은 구름이 아니다. 구름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얼핏 그물 형태인 것 같기도, 펼쳐진 새 떼 같기도 하고 혹은 거미줄 같기도 한…….
저것을 어디서 봤더라? 하고 생각하자마자 뒤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강준형이 뒤를 돌아보더니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이것들이 왜 이래?’
등 뒤가 조금 소란스러웠지만 나는 하늘을 덮어 오는 그림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인식한 순간부터 검은 장막이 무서운 속도로 배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눈을 한 번, 두 번, 깜박일 때마다 하늘이 점점 더 까맣게 물든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누군가가 선실에서 오작동시켰는지 귀가 떨어질 것 같은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기괴한 사이렌 소리는 아무도 정지시키지 않아 한참 동안 선상 위를 덮다 한순간 뚝, 하고 그쳤다.
‘…….’
그 뒤로는 소름 끼치는 적막이었다. 그림자는 배 바로 위로 드리웠다. 바로 지척에 드리우고서야 그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고 탄식했다. 그것들은…… 뱀이다. 무수히 많은 검은 뱀이 그물의, 거미줄의 형태를 하고 도사리고 있었다.
술래가.
술래가 찾아왔구나.
깜빡이지도 못하고 있던 동공이 시렸다. 뱀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수군거린다. 수군수군. 수군수군. 하나를 시작으로 둘이, 셋이, 점점 퍼져 나가 곧 전체가 웅성거린다. 귓가를 울리는 이명은 점차 커지더니 킬킬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킬킬거리는 소리는 귀가 멀 것 같은 끔찍한 굉음으로 변했다.
그것들은 주체할 수 없이 기쁜지 몸을 비튼다. 그 움직임으로 검은 장막이 커다랗게 물결을 쳤다. 하늘 위에서도, 바다 위에서도 검은 파도가 일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귀곡성 같은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지척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