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터미널 창문 밖에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먹이를 조금씩 뿌리다가 양을 조절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뜨렸다. 비둘기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발밑으로 삽시간에 모여든다. 깜짝 놀라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의 곁으로 부모로 보이는 여자가 바삐 다가와 아이를 안아 올렸다.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엄마의 품에 안겨 창 안으로도 들릴 정도로 우렁차게 울어 댔다.
‘기현아. 기현아?’
그녀가 내 눈앞에 손을 들어 휘휘 흔든다. 멍하니 빨대를 물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자 빤히 쳐다보고 있는 다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얼굴 좀 풀어. 내가 억지로 끌고 나온 것 같잖아.’
그녀는 파르페를 숟가락으로 휘저으면서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자꾸 그러면 나 삐뚤어질 거야.’
‘미안해.’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진짜로 미안해. 음…… 뭐 더 먹을래? 케이크 사 올까?’
‘누가 더 먹자고 그랬니? 나 좀 보라는 거지. 너 참 무심하다.’
그녀는 종종 자신에게 집중해 주지 않으면 화를 냈다.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마다 나는 사과를 했다. 내가 사회성이 없는 타입이라는 것을 알려 준 게 그녀였다.
‘원래 너는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처음 봤을 때의 이기현은 좀 더 밝고 반짝반짝했었다고.’
손목에 걸어 뒀던 머리 끈으로 어깨까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한데 올려 묶으며 그녀가 눈을 흘겼다.
내가 밝고 반짝반짝하던 때가 있긴 있었나? 네 착각이겠지.
‘집 떠나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노래를 부르더니, 막상 나오니까 무서워?’
‘아니. 안 믿겨.’
학교도 째고 충동적으로 그녀와 함께 셔틀버스를 타서 터미널로 도착한 뒤 아무 표나 사 기다리던 중이었다. 행동파인 네가 부추기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냈을 행동이었다.
‘앞으로는 더 안 믿기는 일만 생길 거야.’
그녀의 손에 이끌려 처음 들어 보는 지명의 도착지명이 붙어 있는 버스에 올랐다. 중학생 때 딱 한 번 수학여행을 가 본 경험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먼 지역으로 가는 버스에 탄 경험도 없었기에 촌스럽게도 조금 설렜다. 휴게소를 들를 때마다 수학여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함께 군것질을 하고 디지털카메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지나 하교 시간이 다가오자 나오지 않을 나를 기다리며 교문에 대기하고 있을 고용인들이 생각나 조금 후련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놀면서 한참을 달려 도착한 역에 내렸다. 짐을 내리는 사람들 틈에 섞여 역 안의 여행객들을 구경하는 동안 그녀는 잠깐 내게 기다리라 말한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한쪽 면이 유리인 역 바깥의 저무는 해를 쳐다보았다.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이상했다. 해가 지기 전에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던 적이 없었기에.
다시 돌아온 여자 친구는 내 앞에 두 장의 승선권을 내밀었다. 받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바로 앞에 대고 흔든다.
‘가자.’
‘…….’
‘바다 보고 싶다며.’
내가 그런 말도 했었나? 너한테 내가 대체 어디까지 얘기했어? 본가에 가기 싫다고? 사실 내 동생이 자꾸 내 위로 올라오려 한다고? 나는 집안의 남창 노릇을 하고 있다고?
‘왜 그렇게 울 거 같은 얼굴을 해.’
표를 받아 들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던 내가 무슨 얼굴을 했는지 그녀야말로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나는 가방을 끌어안고 몸을 숙였다.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아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기대어 말없이 그렇게 계속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
‘미안해.’
‘뭐가?’
‘배는 못 탈 거 같아. 그렇게 멀리는 못 가.’
‘…….’
‘그래도 따라와 줘서 고마워. 기분이 좀 풀렸어.’
그녀가 내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서 꼼지락거렸다. 기하가 종종 하던 행동이었기에 내가 움칠하자 목에 무게를 더 실어 왔다.
‘돌아가려고? 집안사람들이 싫다며. 진짜 나쁜 놈들이라고 했잖아.’
‘그 사람들 때문 아냐.’
‘……그럼 좋아한다던 사람 때문에 그래?’
착한 애였다.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고 고백했는데도 겨우 뺨 한 대에 용서해 줬을 만큼. 내 마음이 다른 데로 가 있어도 좋으니 친구라도 되어 준다던 아이였다.
내 곁에 머무르는 보답하지 못할 마음이, 한 개 더 늘어났다.
‘그 애가 걱정돼. 걔한텐…… 나밖에 없거든.’
‘대체 누구길래 그래? 아직도 비밀이야?’
‘……미안.’
‘누구길래 그렇게 말도 못 하고 끙끙 앓는 거야. 나한테라도 털어놓으면 편해질 텐데.’
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냥 웃기만 하자 한숨을 내쉬고는 손가락에 끼어 있던 승선권을 도로 가져가 자신의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씩씩하게 일어나 손목을 잡아끈다.
‘좋아. 그럼 배는 못 타지만 외박은 하자! 이렇게 그냥 돌아가기엔 너무 아깝잖아.’
‘그런 짓을 했다간 네 부모님이 난리 나시지 않을까?’
‘괜찮아. 나만 믿어.’
‘하지만.’
‘괜찮다니까.’
사물함에 가방을 집어넣고 열쇠를 잠근 그녀가 옆으로 돌아와 팔짱을 꼈다.
‘가자. 도망치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구해 줄게.’
‘…….’
‘내가 널 위해 무슨 짓이든 할 테니까.’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저 말은 기하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낯익은 말에 기시감을 느낀 것도 잠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기현 님.’
‘…….’
‘즐거우셨나요? 이만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뒤를 돌아보자 늘 내 옆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고용인들의 얼굴이 보인다. 쫓아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잡힐 줄은 몰랐다.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알고 따라왔을까. 설마 처음부터 뒤를 밟고 있었을까?
그녀의 손을 꽉 쥐어 잡았다. 사물함 앞에 있던 사람들이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의 출현에 놀라 그들과 대치하는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나를 이렇게 구속하는 그들에게 화가 났다. 여자 친구를 등 뒤로 숨기고 쏘아붙였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늦었습니다. 귀가하셔야지요.’
‘내가…… 알아서 돌아가려 했어요.’
‘이렇게 멋대로 행동하심 안 됩니다. 모시겠습니다.’
‘……잠깐 바람 쐬러 나온 것뿐이에요. 하루 정도는 봐줄 수 있잖아요.’
가면을 쓴 듯 동요 없이 상냥하게 웃고 있는 그들의 얼굴에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말을 따르지 않고 버티자 그들이 웃는 얼굴 그대로 눈만을 치켜떴다.
‘이렇게 멀리까지 나오면 안 되는 걸 알면서 그러십니까. 여자 친구를 만드신 것도 눈감아 드렸는데 이러시면 곤란하지요. 둘이서 도망이라니, 이번 일은 보고드리지 않을 수 없겠군요.’
‘기현아……!’
남자들이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겁에 질려 사물함 쪽으로 바짝 붙어 반항하자 내 등을 꽉 끌어안고 있는 여자애를 떼어냈다. 내 팔을 놓지 않는 그녀를 억지로 힘을 줘 끌어 내렸다. 끝까지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진 그녀가 남자의 품에서 버둥거리며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왜 이래요! 손대지 마!’
‘잠깐만, 걔는 아무 상관 없잖아!’
우리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억센 팔뚝에 붙들려 저만치 멀어지는 여자 친구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역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우리 쪽을 쳐다본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기현아! 기현아!’
‘걔를 놔! 그 아이는 상관없다고!’
남자의 팔 안에서 그녀 쪽을 향해 악다구니를 썼다. 옭아매는 남자의 가슴을 밀어 내며 벗어나려 애썼다.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여자애의 절망이 어린 갈색 눈과 마주치자마자 눈앞이 핑 돌았다. 핑 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멀어 버린 것처럼 새카맣게 시야가 암전되었을 때였다.
인파 속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내 여자 친구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 생전 처음 듣는 사람들의 것으로. 공포 영화에서나 들었던 기나긴 비명 소리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내 몸을 꽉 쥐고 있던 남자가 욕설을 내뱉는 것이 들린다.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눈앞에 당황하고 있자 누가 확 내 등으로 뛰어들었다. 그 충격으로 나를 단단하게 잡고 있던 팔에서 밀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
떨어지며 짚은 팔이 잘못되었는지 고통이 내달렸다.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당황하는 사이 내 옆에 또 무언가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진다. 그리고 내가 있는 사물함 쪽으로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던져진 먹잇감에 몰려드는 좀비 떼처럼. 눈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느껴지는 그 격렬함에 압도되어 얼어붙었다.
갑자기 이게…… 이게 무슨 일이지?
내 주변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비명 소리, 고함 소리,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뭔가 떨어져 사방으로 흩어지는 통에 내 얼굴에도 파편이 튀었다. 쾅! 쾅!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커다란 굉음이 바로 옆에서 들렸다.
‘무슨…….’
‘――― ―!’
‘무슨 일이에요? 이 소리는 뭐예요? 저기요!’
소리는 바로 곁에서 발생하고 있는데도 내 고함 소리에는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워 주는 자도 없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다 정체불명의 고성에, 이상하게 비릿한 냄새와 쉴 새 없이 내 근처를 오가는 인기척까지.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렸다.
‘눈이 안 보인다고요! 눈이 안 보여요!’
날카로운 것이 몸으로 쏟아져 공포에 질린 채로 바닥을 기었다. 더듬거리는 손에 물컹한 것이 잡혔다. 무언가 질척질척한 게 내 바짓단과 손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누가 대답 좀…….’
쿵…… 쿵…… 쿵……. 부서지는 것들을 피해 몸을 웅크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싸움이라도 일어났나? 아니면 뭐가 쳐들어오기라도 했어? 갑자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냐고!
여자애의 이름을 부르고, 고용인들을 부르고, 내 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누가 듣고 있는진 모르지만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진 것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또 소름 끼치도록 정적이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꽉 틀어막고 있던 귓가의 손을 떼는 순간 바로 내 앞에서 여자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현아. 하…… 기현아?’
‘…….’
‘나 좀 봐. 이제 괜찮아.’
괜찮다는 그 말에 고개를 들고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눈을 깜박였다. 다행히 흐릿하긴 해도 눈앞의 인영이 보이기 시작한다. 재차 깜박거릴 때마다 조금씩 눈동자가 맑아졌다. 그녀가 내 앞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까처럼 눈앞에 손을 휘젓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여자 친구의 뒤에 역 안의 사람들이 촘촘하게 서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나를 둘러싸고서.
그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무서운 눈으로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 저 생선 눈알 같은, 죽어 있는 검은 동공…….
이번에야말로 극도의 공포에 숨이 턱하고 막혔다. 할 말을 잃은 내 눈앞에서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마주 웃어 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이, 아니 온몸이 피로 젖어 있었기에.
‘이제 우릴 방해하지 않을 거야.’
‘……시……연아.’
‘저 사람들 없으니 나랑 같이 갈 수 있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삐걱대며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는 나를 데리러 왔던 고용인들이 전부 기괴하게 뒤틀려 쓰러져 있었다. 뜯어 발겨지고 해체되어 그들 스스로가 흘린 피 웅덩이 안에 잠겨서.
눈앞이, 새빨갛게 전율했다.
* * *
“헉……!”
손에서 놓친 손전등이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저쪽 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숨을 쉴 수가 없어 가슴팍을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내 것이 아닌 듯 불규칙하게 쿵쾅거리는 심장의 울림에 잡아먹힐 것 같다.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이젠 깨끗하게 닦여 피 냄새도,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한번 일어난 기억은 생생하게 구성되어 눈앞을 어지럽혔다. 가슴을 부여잡은 손이 벌벌 떨렸다. 끔찍했던 참상이 좀 전에 일어난 일인 것 같다. 이 지옥 같은 기억은 뭐지. 어떻게 이런 기억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지?
아니 애초에 이게 진짜 있었던 일인가?
내 팔목을 잡아채서 끌어당겼던 본가에서의 모습도, 기하의 침대 옆에서 일어나던 모습도, 그 피 묻은 손을 내밀던 그녀에게 오버랩된다. 방금까지도 잊고 있었던 내 여자 친구의 이름이 그 기억과 함께 되살아났다. 그것이 꿈이었는지 진짜였는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분명한 건 나는 이곳을 그 아이와 함께 왔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쏟아 두었던 여자 친구의 물품이 눈앞에서 굴러다녔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이마를 짚었다. 억지로 덮어 놓고 내리눌러 놨던 것이 사이를 비집고 꾸역꾸역 기어 나오려 하고 있었다. 단전에 도사리고 있는 응어리가 툭 하고 불거져 가슴을 뚫고 나올 것 같아 안간힘을 썼다. 내가 누르지 않으면 그것들은 튀어나와 나를 잠식할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바닥을 기며 한참을 헐떡거렸다. 공허한 폐허 속에서 천장을 빗줄기가 두들기는 소리와 그렇게 내가 간신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만 들리고 있을 때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확실하게 바닥을 걷는 진동 소리가 섞여 들렸다.
“…….”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무언가가 저쪽에 있다. 습기가 맺혀 있는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한 번…… 두 번……. 내가 깜박이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울리는 소리가 다가온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굴러간 손전등을 주워 복도 끝을 비췄다. 눈앞을 흐리게 만드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닦고 심호흡을 했다.
“……누구.”
“…….”
“누구 있습니까?”
공터에 울렸던 소리가 내 물음에 응답하듯 멈췄다. 혹시나 싶어 물었던 것이었는데…… 극도의 공포감에 전신의 털이 바짝 섰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는데 오직 입 안만 바짝 말라 있어 입술을 축이며 좀 더 큰 소리로 물었다.
“거기 누굽니까?”
텅 빈 공간에 내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이번에는 좀 더 리드미컬하게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가 하나 더 추가되어 들렸다. 무서워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집안사람들인가……? 아니면 대체 누구……?
“누구야……!”
“TV.”
복도 끝에서 내 고함에 사내가 응답했다. 그의 목소리에 안도하여 간신히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었습니까? 깜짝 놀랐잖아요.”
안심하며 손전등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비췄다. 그런데…….
“당……신…….”
비틀거리며 눈앞에 나타난 사내는 조금 전의 잔상처럼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끔찍한 상처를 달고 고통에 얼굴을 찌푸린 채로 그는 발을 끌며 복도 끝에 서 있었다. 내가 들었던 건 그가 낸 소리가 아니다. 너무 놀라 말을 잃은 내 앞으로, 사내의 그림자에서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도련님.”
“…….”
“이렇게 뵈니…… 정말이지 반갑군요.”
바닥을 울리던 소리는…… 간헐적으로 지면을 두드리던 소리는 그가 든 지팡이 끝에서 나는 거였다.
눈을 크게 떴다.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원승호였다.
“원승호…… 씨.”
평소였으면 반가워 그에게 달려갔을 텐데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원승호가 사내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기에. 현재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원승호 씨? 저 남자는 날 도와준 사람입니다……!”
사내를 피투성이로 만들어 내 앞으로 끌고 와 놓고 그는 내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발밑에 흩어져 있는 여자 친구의 물품을 지그시 훑었다. 그리고 주저앉아 있는 내 상태를 확인하고는 만족한 웃음을 흘린다.
“역시 이곳으로 하길 잘했군요. 여기라면 금방 떠올려 낼 줄 알았습니다.”
“……예?”
“감시하는 눈 없는 곳으로 꼬여 내려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몇 년을 그 남자 밑에서 감화된 척하며 엎드려 살았는데…… 드디어 이런 기회가 온 걸 보니 그 시간들이 헛되진 않았군요.”
“원승호 씨? 그게 무슨…….”
“보면 알잖아 TV……! 도망치라고……!”
사내의 외침에 원승호가 총을 든 손 그대로 사정없이 남자의 머리를 가격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핏방울이 튄다. 완전히 얼어붙어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며 원승호가 난처하게 웃었다.
“얌전히 있어야지. 그새 감응했는지 멍청하게 당신 편을 드네요. 이 꼴이 되고서도.”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신이 왜……. 왜…….”
상황 파악이 안 돼 말을 더듬자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보라색 눈동자가 휘어졌다.
“역시 너무 갑작스러웠나? 우리 도련님이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니 제가 조금 도와줄까요?”
그러더니 피가 떨어지고 있는 칼을 자비 없이 사내의 어깨에 쑤셔 넣는다. 아아악! 사내의 비명이 역 안에 길게 찢어졌다. 내가 겁에 질려 그만하라고 소리 질렀지만 원승호는 여유롭게 칼을 돌리기까지 했다.
“그만해!”
“크…… 아악!”
“원승호!”
“원래라면 데려가서 어떻게 없앨지 고민을 할 생각이었는데 당신이 고맙게도 다른 남자를 데려올 줄 몰랐습니다. 고생을 덜어 줘서 고마워요.”
칼이 돌아갈 때마다 그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살갗을 뚫고 튀어나온 칼날에서 피가 뿜어 나왔다.
“크읏…… 이 개새끼가……!”
“뭐 하는 거야. 당신…… 당신 미쳤어?”
“정신 차려야지. 미스터……? 총 한 번 맞은 걸로 엄살 피우지 맙시다.”
총. 사내의 허벅지 부근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장난하는 게 아니구나. 이미 해칠 생각을 하고 여기까지 저 사람을 끌고 온 거다. 내가 몸을 튕겨 일어나려 하자 그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사내가 더 다칠 것이라 엄포를 놓았다. 손전등의 빛에 반사된 칼날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며 혼란스러워 말을 더듬었다.
“대체 뭘 하는 겁니까! 그 사람은 그저 나를 도와주러 여기에……!”
“그럼 여기까지 온 김에 나도 도와줘요. 선대와 현 가주가 똑같이 암시를 걸어 놓는 바람에 내 손으로는 직접 당신을 해치지 못하거든. 하하, 부자가 쌍으로 당신에게 돌았다니까. 덕분에 내가 이 귀찮은 짓을 해야 하고 말이야.”
그러니 대역을 써야지. 그가 싸늘하게 웃으며 사내의 손에 강제로 총을 쥐어 주었다. 사내가 몸을 틀어 저항하자 칼을 꽂은 어깨를 압박해 억지로 총을 들게 만든다. 지독한 고통인지 연신 여과되지 않은 신음을 흘렸다.
“잘 들어야지. 허튼짓하면 이 칼이 그대로 가슴까지 쭈욱 내려갈 겁니다.”
“크……윽.”
“원……승호.”
“저기 착하게 가만히 앉아 있으니 맞추기도 쉽겠지? 오락실 같은 데서 총 쏘는 게임 많이 해 봤을 거 아닙니까. 한 번만 잘 맞추면 끝이에요.”
“씨발. 이…… 미친놈이……!”
원승호가 팔을 조절해 총구가 내 쪽을 향하게 만들었다. 힘겹게 기침하는 사내의 입가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의 절망스러운 눈동자와 마주했다. 죽음의 공포에 얼룩져 있음에도 사내는 입 모양만으로 내게 도망가라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마 버리고 가지도 못하고 자리에 못 박혔다.
“자 조준 잘하고. 한 번에 끝나야 나도 좋고 저분도 좋고 당신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봉인해 놨다고는 해도 저것은 괴물이거든.”
“왜 이러는 거야……! 이런 미친 사이코패스 새끼가……!”
“원승호. 그쪽이 날 죽이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왜…….”
도저히 물어보지 않고는 못 배길 말이기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여태 날 위해 그렇게 애써 줬잖아. 내 부탁은 전부 들어주고 해방시키려 노력했던 당신이…….”
“시간 끌 생각이면 소용없어요. 당신이 본가 것들 시선을 분산시켜 준 덕분에 여기까지 도달 못 한 걸 확인하고 왔으니까.”
철컥하고 총의 잠금이 해제됐다.
“머리에 총알이 박히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즉사하겠지. 그 잘난 남자의 능력으로도 죽은 몸은 되살리지 못할 거야. 그렇죠? 가주가 눈 뒤집혀서 돌아 버리는 꼴 보기 전에 도망가야 하는 게 아쉽군요.”
“내 동생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이러는 겁니까? 기하에게 복수하려고 날 죽이려고 해요?”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비틀었다.
“기억이 거기까진 돌아오지 않았나? 내가 정말 이러는 이유를 모릅니까?”
“모르겠습니다. 전혀 모르겠단 말입니다.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내가 당신에게 뭘 했길래?”
안경 안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이제 승리를 목전에 둔 살인마의 눈 같기도 한 잔인한 빛을 뿜는다. 그는 오랜 원한을 끝내려 하는 도취감에 취해 있었다.
원승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래. 확실히 아무것도 모른 채로 죽이는 건 안 되겠군요. 당신은 아무 죄가 없는 줄 알고 죽어 갈 테니까. 그 꼴은 못 보지. 너 때문에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알아야지.”
원승호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톡톡, 눈가를 두드렸다.
“당신과 닮은 이 눈알 때문에 나는 몇 번을 죽을 뻔했습니다. 보라색 눈은 불길하다. 보석 안을 가진 자가 태어나면 집안이 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 덕분에요.”
타인인 원승호가 왜……? 내 물음을 예상했는지 그가 웃으며 다음 말을 덧붙였다.
“내 몸에는 당신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내 형인 이원영은 여우 신이었죠.”
이원영은 내 조부였으니 그 말인즉슨, 나를 죽이려 지금 이 개 같은 짓을 벌이고 있는 원승호가 내 종조부라는 말이었다.
“그런 표정 할 거 없습니다. 우리 집안 피를 이은 남자들은 전부 광증을 타고난다는 걸 아시면서.”
“…….”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알아보았습니다. 집안에서 은폐하려 안간힘을 썼던 이 역의 사건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이 예언을 한 번쯤은 들어 본 적 있겠지요? 보석 안의 액신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그래서 결국 당신도 내 눈 색이 잘못이라는 거야?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억눌러 참았다. 손전등을 든 손에 땀이 찬다. 이걸 던져서 한 번에 남자를 맞출 수 있을까……? 그게 불가능할 것 같다면 차라리 꺼 버리면……? 이 복도에 빛이라곤 이거 하나뿐이니 도망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원승호가 사내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불빛이 없다면 제일 먼저 자기와 가장 가깝고 해를 입힐 만한 사내부터 죽이려고 들 게 분명했다.
“그 예언이 집안에 내려오는 바람에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박해가 시작됐습니다. 문헌의 내용을 알고 있는 소수의 원로들은 내가 더 크기 전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었지.”
“……당신은 신이 아니잖습니까.”
“원로들은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지 않았지요. 가문에 번영을 가져다준 문헌을 절대적으로 맹신하는 자들이었으니까. 덕분에 내 어린 시절은 지옥 같았습니다. 재앙의 싹을 잘라야 한다며 아직 신이 발현되기도 전인 어릴 때 죽여야 한다고들 했습니다. 눈이 뽑힐 뻔도 했지요. 결국 나는 종래에 산 채로 땅에 묻혀 매장되었고.”
“그런데 용케 살아 있군요.”
참지 못하고 비아냥이 튀어 나가자 내 말버릇의 대가는 사내의 상처가 헤집어지는 것으로 대신 되었다. 사내의 비명이 울려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살려는 의지가 있으니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더군요. 땅을 빠져나왔을 때 흙을 긁던 손톱은 다 빠지고 돌을 밀어 내며 발버둥 치던 온몸은 죄다 골절되었습니다. 상상할 수나 있겠습니까……? 가족들의 손에 생매장되었던 것을…… 그리고 아무도 날 구해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
“그 뒤로 도망가 이 씨 성을 버리고 숨어서 살았습니다. 집안에 재앙이 내리지 않았는데도 계속해서 세상에 없는 사람이어야 했지요. 당신의 아버지인 이지헌이 다음 대의 신을 계승할 때까지.”
“당신을 구제해 줘서 내 아버지를 섬긴 겁니까.”
“내 조카님은…….”
처음으로 원승호가 내가 익히 알던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날 그림자에서 끄집어내 준 것도 모자라 보석 안을 지닌 자가 저주받았다는 인식조차 없애 주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날 생매장했던 원로들에게 복수까지 해 주었지. 그래서 그 사람의 수족이 되어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은 당신을 어떻게 해 주라는 게 다였지만.”
기하를 피해 도망가는 루트를 만들어 주라는 것, 내가 행복하게끔 만들어 주라는 것.
“그런데 막상 당신을 만나니 알겠더군요. 내 어린 시절이 지옥이었던 건 당신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네 방패막이가 되어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흔들리고 있는 사내의 팔을 비틀어 다시 내 머리를 제대로 조준하며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예언에서 말하던 그 보석 안의 재앙은 바로 너였지.”
“크…… 헉!”
사내의 어깨와 다리에서 떨어지는 피의 양이 상당했다. 그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똑바로 내 이마를 겨냥하고 있는 총구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겨우 그런 억측 때문에 날 죽이려고 이런 미친 짓마저 벌였단 말입니까?”
“억측? 하하,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을 텐데? 당신 주위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사고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일생 한 번 겪기도 어려울 집단사를 목격한 것이 몇 번인지.”
“……집안사람들이 저주받은 게 내 탓입니까? 이런 집구석에서 태어난 것도 내 잘못이에요?”
“그건 저주가 아니라 당신에게 홀린 자들이 당신의 무의식을 실현했던 겁니다. 여왕벌이 자신의 페로몬에 홀린 일벌들을 조종하듯 말이지.”
“내 무의식이라고? 내가 집안사람들이 죽기라도 바랐다는 건가?”
“그럼 아닙니까?”
이번엔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저들이 죽었으면 좋겠다,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었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라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있었다. 내 여자 친구였던 그녀에게도…… 박현진, 김태영에게도.
하지만 나는…… 하소연을 했을 뿐이야. 나를 착취하는 것들에게 치기 어린 저주를 퍼부었을 뿐이었는데. 누구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을 하고 살잖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나만 이런 마음을 먹는 게 아니라!
“속 편하게 기억도 지워 버리고 사니 자신이 정말 사람인 줄 알았습니까? 당신을 평범하게 만들기 위해 희생된 사람들이 몇인지 알기나 해? 너한테 홀려 목숨을 내던진 사람들이 몇인지는?”
“듣자 하니 진짜 어처구니가 없군요. 내 의지대로는 살지도 못했는데 희생? 당신 말대로 내게 그런 힘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병신처럼 갇혀서 살지도 않았겠지!”
“어릴 때부터 철창 안에 있는 게 당연하도록 길들여진 맹수는 자신보다 약한 것들에게 사육당하는 줄도 모르고 갇혀 살게 되는 법이지. 자기 발톱이 인간들의 손톱보다 강한 것도 알지 못하고.”
“아까부터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네 인생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너 때문에 엮인 인간들이 불행해진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나? 당신 곁에는 늘 향냄새가 떠돌아.”
“……아니야!”
집안 놈들이 늘 하는 내 탓이다. 저건 거짓말이야.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또 뭐든 내게 뒤집어씌우려 하는 수작이라고!
“미친 소리 그만하십시오. 나는 신 따위가 아닙니다!”
내 부정에 원승호가 길게 웃었다.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싸늘한 공간에 퍼진다. 기괴하게 소리를 늘이며 한참을 웃던 그가 안면을 싹 바꿨다. 그리고 잔혹하게 속삭였다.
“그래. 당신이 신이 아니게 된 지는 오래된 일일 겁니다.”
“…….”
“짝을 잃고 타락하여 흉신이 된 편관(偏官). 그것이 네 이름이지 여우야.”
편관.
처음 들어 본 그의 말이 벼락같이 귀에 꽂혔다. 편관. 편관. 편관.
순간 방아쇠가 당겨진 것도 아닌데 맞은 것처럼 심장이 뚫리는 고통을 느꼈다. 왜…… 왜 저 말에 이렇게나 절망을 느끼는 거지?
숨을 쉴 수가 없어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헉하고 숨을 들이켜는 것과 동시에 이번에는 칠판을 긁듯 괴기스러운 이명이 귓속을 채운다. 오감이 하나씩 망가지고 있었다. 신음을 흘리며 웅크리고 귀를 움켜잡았다.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고 커진다. 듣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 몸에서 뻗어 나온 소리에 맞춰 바닥이 온통 쿵쿵쿵 진동했다. 주먹을 꽉 쥐고 버텨 봤지만 머릿속을 들쑤시는 이명은 점차 커져만 갔다.
“그런 것 들어 본 적 없어. 나는……!”
“…….”
“나는 인간입니다. 이젠 아예 날 괴물 취급하는 겁니까?”
“현 가주도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
“그자는 그저 당신을 땅에 묶어 두려 혈안이 되어 있기에 오히려 기뻐하더군요. 액신으로 변한 신수를 소유하려 들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지. 역시 당신 짝다워요.”
“뭐……?”
“신수는 인간과 달리 성별에 관계없이 씨를 품을 수 있다지요? 뭐 십 년간 소식이 없긴 했습니다만…… 봉인을 해 둔 게 문제였는지 아니면 운 좋게 지금까지 번식기를 비껴간 건지.”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힘겹게 눈을 깜박거렸다.
“평범한 남자의 몸이었다면 현 가주가 당신한테서 후계를 보려고 했겠습니까? 네가 인간이 아니니 가능한 일이지.”
“내게서 후계……를 보려 했다니……?”
계속되는 충격적인 말들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고 멍청히 남자가 내뱉은 말들을 입 속에서 따라 굴리기만 했다. 내 절망스러운 표정을 만족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원승호는 느긋하게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조작했다. 기기에서 무언가 흘러나오자 발로 차서 내 앞쪽으로 밀어 보낸다.
―그러게 미리미리 치울 건 치우라고 조언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내 앞까지 밀려온 휴대 전화에서는 녹음된 파일이 재생되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말소리는…… 기하와 원승호의 것이다. 친근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경계하지도 않는 기하의 목소리에서 그들이 예전부터 잘 알고 있던 사이였다는 게 느껴진다. 원승호가 종조부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원승호가 했던 말들은…….
―설마 그 여자가 그날 일을 가지고 그분을 흔들 줄은……. 기현 님께서는 틀림없이 제일 먼저 그날부터 파 들어가실 겁니다. 그때 일을 제법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족들이 몇 명 남아 있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목숨이 아까운 줄 안다면 입을 열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겠지. 혀를 잘못 놀린 대가로 연미연이 어떤 벌을 받는지 일족들에게 새겨 줄 생각입니다.
―정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 할아비한테 언제쯤에나 좋은 소식을 들려주실 겁니까?
기하야…… 기하야……. 들어선 안 되는 것을 듣고 있음을 깨달은 심장이 이젠 내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혼자 날뛰었다. 여유롭기 그지없는 네 목소리가 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후계 문제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당신은 그저 얌전히 내가 하라는 일만 하면 됩니다.
―두 분께서 이렇게나 금슬이 좋으신데 아직 소식이 없는 게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노인네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하고 용서해 주십시오. 같은 침대를 쓰신 지 이제 햇수로 십 년을 채워 가는데 이제나저제나 기다려도 경사스러운 소식이 들려오질 않으니…….
―왜 이렇게 다들 내 자식에 관심이 지대하지? 아이가 원한다고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생길 것을.
―아무리 수태가 어렵다곤 해도 두 분 다 건강하시고 몸에 문제가 없는데 말입니다. 사료의 내용대로라면 충분히 두 분 사이에서 후계가 생산될 텐데 어째서인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침대 사정엔 더 이상 관여하지 마십시오. 조급할 필요 있나? 당신 말대로 우리 금슬이 나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우…… 욱……!”
결국 참지 못하고 속이 뒤집어졌다. 상체가 허물어진다. 허리를 꺾으며 내장까지 다 비울 기세로 구역질을 했다. 눈물이 치솟아 가물거리는 눈앞이 시뻘겋게 변했다. 깨끗했던 바닥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었다.
“TV……!”
입에서 피를 쏟는 날 보고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자신이 지금 먼저 죽게 생겼는데 명백히 내 안위를 걱정하는 그에게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치솟는다. 인간이란 인간은 모조리 다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든 지켜 주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이.
내가 쏟은 피 웅덩이 안에서 웅크리고 거칠게 산소를 들이켰다. 위태로운 호흡에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다. 발발 떨리는 손으로 목을 쥐었다.
아아 그래. 이제야 다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봤는지 알겠다. 왜 내게 손끝 하나 닿는 것도 어려워했는지, 왜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동자들이 따라붙었는지, 왜 내가 입을 열기만 하면 두려워하고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들의 이름에 소스라쳐 했는지. 왜 신도 아닌 나를 그리 유폐하고 싶어 했는지.
나는 이방인이었고 불청객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집안의 귀신이 되어 있었다.
‘괴물.’
‘정말 괴물 같네요.’
‘인간 같지 않아.’
‘또 죽었나요? 이러다 씨가 마르겠군요.’
‘저 불길한 눈을 어찌해야 좋을지…….’
‘도련님께서는 운구 행렬을 보는 게 좋으신가요?’
‘그런 눈 하지 말라고 했지.’
‘도련님. 하지 마세요.’
‘참아야지. 기현아.’
‘기현 님만 참아 주시면…….’
도대체 무엇을 참으라는 거야? 무엇을?
살의를?
“나는 액신을 단죄하는 겁니다. 이것은 정당한 복수죠.”
들려진 턱을 타고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단죄라. 거창하기 그지없는 그의 말에 어이없어 실소가 나왔다. 네가 하는 개짓거리에 그런 고상한 단어라니.
“정당한 복수라 주장하려면 네 손으로 직접 해야지.”
피를 쏟은 입술을 훔치며 조용히 읊조렸다. 속에서는 불길이 일었지만 머릿속은 차갑다. 그토록 미치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다른 자의 손을 빌어 비겁하게 숨은 주제에 정당함이라……. 원승호 너는 그저 졸렬한 짓을 하고 있을 뿐이야.”
“…….”
“액신을 단죄하는 게 아니라 그저 종손을 죽이려는 패륜아에 불과해. 결국 너 역시 혈육을 생매장한 집안 것들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똑바로 원승호의 눈을 주시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대치하고 있는 것도 지겹다. 어차피 이 몸뚱이에 미련은 없었어. 나는 내내 내가 네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지. 여기서 악연을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 짓까지 해서 날 옭아매려 했던 너에게 괜찮은 복수가 될 거고.
내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것을 본 원승호가 흥이 깨졌단 얼굴을 했다.
네가 다음에 도망칠 땐 네 얼굴을 보고 가라고 했었는데.
내 시체를 보고 너는 어떤 얼굴을 할까.
울어 줄까. 절망할까. 그도 아니면 원망을 할까.
아프지 않게 끝나길 바라며 흐느적거리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공포에 질려 손을 덜덜 떠는 사내를 위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닥쳐올 고통을 기다렸다.
“쏘지 않으면 네가 대신 죽어.”
“TV……!”
“죽고 싶지 않으면 당겨!”
“도망가!”
“…….”
“쏘라고!”
탕!
원승호의 혀끝에서 고함이 떨어진 것이 트리거가 되어 커다란 파열음이 공간을 뚫고 지나갔다.
“…….”
거칠게 복도를 가른 소리는 찰나만큼 허공에 머물다 사라졌다. 틀림없이 총이 발포된 소음이었는데 내 머리는 멀쩡했다. 부서지길 소망했던 이마는 그저 계속 땀방울만 떨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내 머리를 겨눈 총구가 보인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러다 원승호의 표정이 비틀렸다. 뭔가 말을 하려 입을 벙긋거리더니 쿨럭, 기침했다. 그러곤 아주 서서히, 사내의 어깨를 쑤시던 칼의 손잡이를 놓고 무너졌다. 그가 쓰러지는 뒤로 다른 남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저 커다란 키와 어깨는……. 저 덩치의 실루엣은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었다. 방금 발포된 총을 다시 한번 장전한 남자가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이제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자가 없어진 사내가 어깨에 칼이 박힌 채로 주저앉더니 그대로 내 쪽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를 내며 다가온 박종오는 바닥에 허물어진 원승호를 흘깃 한번 내려다보고 내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꼬리를 떼느라 늦었습니다.”
“…….”
“어디 다치신 데는?”
그렇게 묻는 그의 눈이 피범벅이 된 내 앞섶에 머물더니 움찔했다.
“박사님 피입니까?”
“박……종오…….”
“…….”
“종오……야. 네가…….”
아직 숨이 완전히 끊기지 않은 원승호가 피거품을 토하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은사라고 했었으면서 그를 내려다보는 눈이 사물을 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바지를 붙잡는 걸 지켜보더니 무표정하게 총신을 들어 올리고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찢어지는 파열음과 함께 원승호의 몸이 들썩였다. 그리고 그대로 끝이었다. 말릴 새도 없이.
박종오가 또 장전을 하고 이번에는 내 곁으로 다가와 있는 사내에게 겨눴다.
“하지 마.”
팔을 들어 막자 덤덤하게 입을 연다.
“위험합니다.”
“상관없는…… 사람이야.”
“살려 두면 안 됩니다.”
“그만해.”
비에 젖어 있는 이마를 찡그리면서도 그는 반복되는 명령에 순순히 총을 내렸다. 그러고는 스스로 흘린 피로 얼룩진 내 몸을 훑으며 무시무시한 표정을 했다.
“내상을 입으셨군요. 빨리 돌아가셔야 합니다.”
“…….”
“괜찮으십니까?”
“…….”
“박사님.”
“그냥 연구원이 아니었구나. 네가 간 건 유학도 아닐 테고. 그렇지?”
늘 총기를 곁에 두고 살았던 사람처럼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쏘는 자세도 군더더기 없었고 장전하는 속도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살아 있는 사람을 쏘는데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박종오는 내 물음에 담백하게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기하가 보냈어?”
“씨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이게 다 뭔 미친 짓이냐고……! 당신들 대체 정체가 뭐야?”
사내의 욕설에 그새 내게서 관심이 사라진 원승호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늘 똑같다. 학습한 대로 죽음에 반응하긴 했지만 이미 생명이 빠져나간 거죽에는 어떤 감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내 종조부였다는데, 혈육의 죽음보다도 날 배신한 것에 대한 감정이 더 크게 다가왔다. 정말 괴상망측하게도 이 자리에서 원승호가 죽은 것에 제일 크게 반응하는 것은 아무런 피도 섞이지 않은 타인인 사내였다.
손수건을 꺼낸 박종오가 정중하게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더니 지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내 입 주변을 닦았다. 그의 시중을 받는 내내 내 눈은 원승호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가 일어날까 봐 두려워서도, 그의 죽음에 애도하기 위해서도, 시체를 지척에 둔 공포 때문도 아니다.
예의상 건네야 했던 명복을 빕니다 같은 상투적인 대사는 쥐어짜 내도 나올 것 같지 않은 내 자신의 비인간성이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 * *
―오후부터 내린 비로 지역에 따라 최대 150밀리미터가 넘는 강수량이 기록된 가운데, 일부 중부 지방에서는 폭우로 인해 침수 피해를…….
수신 환경이 좋지 않은지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노이즈와 빗소리가 음산한 화음을 이룬다. 이미 해가 져 버린 바깥은 계속해서 내리는 비로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손톱 끝을 물어뜯으며 창밖을 살폈다가 문가에 다가갔다가 하며 방 안을 배회했다. 모텔 주차장에 새로운 차가 진입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지레 놀라 내리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불안이 잦아들질 않는다.
더 이상 뜯을 것이 없을 만큼 짧아진 손톱을 잘근거리다 이번에는 강박적으로 손바닥을 옷에 문질렀다. 피가 말라붙어 있는 게 보기 싫었다. 아니, 내 몸에서 나는 피비린내가 싫었다.
세면대로 달려가 물을 틀어 손바닥을 닦았다. 피부를 벅벅 문지를 때마다 개수대로 붉은 물이 흘러내려 간다. 색이 옅어지다 종래엔 맑은 물만 흘렀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손톱을 세워 문신 근처의 피부를 긁어 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물의 색이 붉어졌다. 벅벅벅벅, 긁어 대면 그만큼 손목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그 화끈거리는 곳에 물이 스며들어 차갑고 따가운 감각이 내달리면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밖에서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사님. 괜찮으십니까?”
“…….”
“박사님.”
“…….”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내가 허락하지 않자 인기척은 느껴지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진 않는다. 대신 내가 대답할 때까지 끈질기리만치 노크를 했다.
끝내 견디지 못하고 들어오라 허락하자 트레이에 몇 가지 물품을 올려놓고 박종오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하얗던 와이셔츠 앞이 피로 온통 물들어 있다. 사내를 부축해 옮기라고 한 탓이다.
“다행히 총알은 관통해서 뺄 필요가 없었습니다. 급한 치료는 마쳤지만 상처가 깊어 빨리 병원에 가야 할 겁니다.”
내 몸을 훑는 그의 어두운 눈동자가 새로운 상처를 발견하고 더 짙어졌다.
“이제 박사님의 상처를 치료해도 되겠습니까?”
도착한 직후 내 상처부터 보려고 하기에 사내의 상처를 처리한 다음으로 미뤘더니 보상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굴었다. 말없이 응시하기만 하자 무릎을 꿇더니 그대로 기어서 내 앞으로 다가온다. 쳐 내기도 애매한 그 손길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그는 칼과 총알에 관통된 상처를 보고 와 놓고 고작 긁힌 것에 불과한 상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몸이 많이 차갑습니다.”
“…….”
“방 온도를 좀 높이겠습니다.”
“원승호는.”
도저히 꺼내지 않고는 못 배길 이름 석 자를 꺼냈는데도 남자는 그저 내 상처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자는 어떻게 된 거야?”
“그 사람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죽었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심장을 맞췄으니까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상처 위에 소독약을 바른 솜뭉치를 누른다. 그저 지나가는 말투에 오히려 내 말문이 막혔다.
“그게 끝이야?”
“…….”
“죽었을 거다. 그게 끝?”
“후속 처리는 뒤쫓아 올 집안사람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그런 뜻이 아니잖아. 사람이 죽었다고. 그것도 내 종조부라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것도 네가 총을 쏴 죽여 놓고 어찌 이리 태연하게 굴 수 있지?”
“박사님을 해치려고 했으니까요. 어차피 제가 아니더라도 처리되었을 겁니다. 더 고통스러운 방식으로요.”
그의 말에 할 말을 잃고 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다 결국 속에 담은 말이 튀어 나갔다.
“그는 내가 액신이기에 죽인다고 했어. 나를 단죄하겠다고.”
그제야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는 손이 멈췄다.
“빨리 본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너는 알고 있었구나.”
“…….”
“놀라지도 않는 걸 보니 이미 이런 상황을 겪어 본 모양이고.”
원승호의 뒤에서 그가 총을 쏜 모습을 보았을 때 날 위해 이런 일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거란 짐작을 했다. 그는 물끄러미 내 눈을 쳐다봤다가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나는 대체 뭐지? 아니 일단 너는 대체 누구지? 총을 휴대하고 있는 걸 보면 기하가 보낸 것일 텐데 날 끌고 오라고 보냈나?”
“끌고 오는 게 아니라 보호하라 하셨습니다.”
“보호? 보호라고?”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움켜쥐었다. 반들거리는 검은색 동공이 강아지처럼 충직하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 눈빛이 문득 기하를 연상시켜 목을 꽉 쥐어 잡았다.
“나를 보호해? 나는 오늘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죽을 뻔했는데 보호? 어차피 날 죽이려 드는 것은 너 같은 집안 놈들일 텐데?”
그는 거부하지도 않고 얌전히 내가 목을 죄는 것을 견뎠다. 손톱이 피부에 파고드는데도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아까 피를 토해 냈던 순간부터 몸이 좀 이상했다. 가슴 한구석이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처럼 헛헛하고 공허하다. 손바닥에 닿은 박종오의 맥박이 쿵쾅거리며 점차 조급하게 뛰었다.
“역에서 사진을 발견했을 때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게 환각 같은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한데…… 기억이 뒤죽박죽이란 말이다. 내가 액신이라서, 나 때문에 그 역이 폐쇄된 거였나?”
“박사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
“말해. 네 주인은 나라면서?”
목을 죄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박종오는 재차 협박하자 쇳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불가항력, 이었습니다.”
“불가항력?”
“누구도 그런 일이 일어날지 예상치 못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박사님도, 가솔들도요.”
“…….”
“그건 피치 못할 사고였습니다.”
그는 아주 천천히,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폐역에서 있었던 사건……. 내 여자 친구가 날 추적하러 온 가솔들에게 붙들렸을 때 갑자기 미치광이가 되어 칼을 휘두른 일. 그녀뿐만이 아니라 나와 눈이 마주쳤던 매표소 직원, 어깨를 스쳐 지나갔던 남자, 옆 사물함을 사용하던 여자 등 역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폭주한 그녀에게 휩쓸려 제정신을 잃고 추적 팀에게 살의를 가지고 달려들었던 것을.
그 결과는 내가 되찾은 기억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그게 여우 신의 능력이었습니다. 사람을 홀려 권속하고 무의식을 지배해 사역하는 것.”
“나는 그런 적 없어. 내가 사람을 홀렸다고? 그것도 사람을 죽이라고?”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가 손안에서 느껴지는 거친 박동에 흠칫 놀랐다. 목을 졸리고 있음에도 맹목적이기까지 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게 소름 끼쳐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겨우 양껏 숨을 들이켜게 된 남자가 바닥을 기며 거칠게 기침했다.
“너도 권속된 것들 중 하나였나? 너도 내 무의식을 실현했어?”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내 어머니의 장례식 날에 있었던 사건. 폐역에서 있었던 일처럼 깡그리 지워 버리고 있었던, 고모부가 내 멱살을 잡은 뒤의 사건을.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몸이 떨렸다. 정말로 내가 액신이라 나도 모르는 사이 인간들의 목숨을 앗는 행위를 해 왔단 말인가? 하지만 어째서 집안사람들은 나를 강제로 가둬 두지 못했지?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원승호의 말대로 나를 산 채로 땅에 묻고도 남았을 텐데?
설마 혈족들이 그러지 못했던 것은…….
“기하가.”
“…….”
“내가 액신인 걸…… 숨겼구나.”
혈족들에게 내가 액신임을 숨기고 제물로 위장해 옆에 묶어 놓으려 한 거다. 제물은 신을 떠나지 못한다는 우리 집안의 규율은 가장 효과적으로 날 취할 수 있는 수단이었을 테니.
집안에 내려오는 사료들은 전부 태워졌고 액신의 존재를 믿었던 원로들은 아버지 대에서 처리되어 남은 건 그의 말에 순종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수뇌부들뿐이다. 그들만 조종한다면 나머지 계급들은 내가 제물인 줄만 알고 살아갈 테고.
그렇게 너는 나를 구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원자의 얼굴을 하고 날 타락시켰다.
‘신수는 인간과 달리 성별에 관계없이 씨를 품을 수 있다지요?’
무의식으로 배 위에 손이 갔다.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지극히 그 아이다운, 잔인하고 끔찍하게 순수한 발상.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나를 소유코자 하는 너라면 그런 짓을 벌이고도 남았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 한들 너와 같은 피를 가진 친형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도.
눈물이 핑 돌았다. 겉잡을 수없이 뜨거워진 눈가를 젖은 손으로 눌렀다.
이기하. 왜 너는 항상 덮어 놓고 증오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게 만들까. 왜 나를 구원해 놓고 네 손으로 등을 떠미는 거야?
네가 저지른 악행을 하나 발견하고 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 역시 자동으로 따라왔다.
미칠 것 같다. 어떻게 이렇게 미칠 것 같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데도 네가 왜 그랬는지 이해해 버리는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고장 난 것처럼 손 틈새로 눈물이 쏟아진다. 한 번 터지니 후들거리는 손으로 아무리 막아도 끝없이 흘러내렸다. 목구멍 끝에서 막혀 버린 비명들이 속에서 메아리친다. 이번에 무너지고 나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필사적으로 두 다리를 짚고 버텼다.
그러자 그 어느 날 숨어든 뱀들이 종아리를 타고 오른 것처럼 서린 한기가 곧장 몸을 칭칭 감아 들었다. 잠시 잠깐씩 몸 위에 머무르던 그 애의 온기보다 내게는 훨씬 더 익숙한 냉기였다.
* * *
쟁반을 든 고용인들이 줄을 지어 본채의 긴 복도 위를 걷고 있다. 모퉁이를 돌아 다다른 끝에서 버튼을 조작하니 바닥이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층 내려가자 지금까지 걸어왔던 복도의 시커멓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새하얗고 밝은 복도가 나타난다. 의료 시설과 연계되어 있는 연구소의 한 층이었다.
도착한 곳의 문이 열리고 기다란 회의실 탁자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돌렸다.
고용인들이 쟁반 위의 잔을 원로들의 앞에 놓는 동안 이경헌의 앞에 놓인 휴대 전화가 울렸다. 단 한 번의 신호음에도 이번에는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렸다.
“그래.”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는 그의 낯이 점점 어두워졌다. 방 안에 남아 있던 고용인들은 하던 일을 끝내고 모두 목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이경헌이 통화하는 소리만이 남았다.
짧은 통화를 끝내고 그가 휴대 전화를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찾았습니까?”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반대편에 앉아 있던 원로가 물었다. 이경헌은 고개를 젓더니 앞에 놓인 잔으로 목을 축였다.
“두 시간 전에 체크아웃을 했답니다.”
“시트에 있던 피는 확인했습니까?”
“천만다행히도, 이기현의 것이 아닙니다. 도움을 주는 자의 것이겠지요.”
“그리 피를 흘릴 만큼 벌써 감응해서 돕는 자가 있다는 겁니까? 이러다 다른 혈족들마저 알아차리면 어떻게 수습하려고요?”
“더 뒤처지기 전에 추적 팀을 그 지역으로 집중시키세요. 당장 잡아 오라는 것도 아니고 소재 파악만 하라는 데도 이렇게들 무능합니까?”
원로들이 침음했다. 간단한 상황 설명을 듣는 다른 수뇌부들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상황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제물이 도망쳤을 때의 상황을 몇 번이나 대비했는데도 이런 꼴이라니.
이기현의 손목과 벨트 등에서 발신하는 GPS 좌표를 쫓았다 허탕을 치고 뒤늦게 레지던스 근처를 지나갔던 모든 차들의 번호를 조회해 태우고 간 차를 찾아냈다. 제물은 운 좋게도 출근 시간에 맞물려 일영의 영향권을 빠져나갔고 뒤쫓던 보안 팀은 정체에 휘말려 겨우 한발 늦은 것이 돌이킬 수 없게 사이를 벌렸다.
시계가 가리키던 GPS 좌표는 KNG백화점의 상층으로 향했고 벨트와 커프스의 좌표는 백화점 남성복 매장 층의 쓰레기통에서 끊겨 있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이기하가 보여 준 분노는…… 일족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랑하지 않는다며 자신을 버리고 간 형이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강준형의 백화점이라는 것에 그는 마침내 평정을 잃었다. 이기현을 저지하지 못하고 레지던스 거주 층에 스스로 올라가게 놔둔 보안 팀 담당자와 엘리베이터를 조종한 관리실 직원들은 화풀이 대상이 되어 시력과 청력을 상실했다. 그마저도 사실 이기현이 백화점에 머문다는 것이 페이크였던 게 밝혀져 그쯤에서 멈췄던 것이지 하마터면 살아서 방을 나오지 못할 뻔했다.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들을 끌어내면서 보았던 신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운이 나빴다. 정말 운이 나빴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필 제물이 그날따라 숨겨 뒀던 사료를 꺼냈고, 그날따라 집으로 되돌아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조작하는 직원이 잠깐 자리를 비울 줄은, 사료를 꺼내 간 것을 반영해서 궤 안을 비웠어야 할 시간이 나지 않은 것을, 가지 않던 길로 차를 돌린 제물의 행동 때문에 추적 팀과 보안 팀 모두가 경계 태세로 도로에 나가 레지던스가 빌 줄은 또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쳇바퀴를 돌듯 항상 같았던 제물의 패턴이 하나씩 어그러졌던 그날, 새장의 문은 열리고 말았다.
제물이 거주하는 레지던스는 초고층에 위치하고 있어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강과 다리뿐이라 층 사이 거리감을 느낄 비교 대상이 될 다른 건물들이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층이 바뀌어도 그동안 제물이 다른 집이라는 걸 눈치챌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카메라가 설치된 두 개의 층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게 만들고,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층은 저번처럼 혹시라도 불미스럽게 탐지할 것을 대비해 뒀었다.
그렇게 노력을 기울이고도 결국 단 한 번의 실수로 제물은 도망쳐 버렸다.
지독한 것.
이경헌은 오한을 느끼며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진작 무슨 수를 써서든 별채에 감금했어야 했다. 애초에 알량한 전자 기기 몇 대에 의존해 풀어 두어선 안 되는 존재였다. 아무리 길들였다고 해도 그 재앙을 세상에 방생하다니.
“시간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제일 상석에 앉은 머리가 희끗한 원로가 소란해진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약의 복용을 중단한데다 신과 멀어지고 있으니 평소보다 훨씬 빨리 증상이 나타날 겁니다. 본능을 되찾는 건 물론이고 자칫하면 며칠 내로 사상자가 나올 수도 있으니 각오하고 있어야 합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고는 증상이 많이 완화되지 않았습니까?”
“어리고 아무것도 모를 때의 얘기였지요. 장례식 때의 일을 파고들었던 것도 그렇고 폐역까지 도달한 걸 보니 시간문제입니다. 아니, 이승호를 죽이고 간 걸 보면 벌써 각성했다는 전제하에 움직여야 할 겁니다.”
“글쎄. 각성했다면 도망갈 게 아니라 제일 먼저 신을 죽이러 돌아오겠죠.”
감히 그런 말을 꺼낸 것에 책망하듯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의 생존 본능이잖습니까. 자기가 해방되려면 짝의 생명이 필요하니까.”
“신께서 허락하신 열흘이 그런 의미일까요?”
“그분의 뜻을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저항 못 하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말하는 원로들의 동공이 파충류의 것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길지 않던 회의를 파하고 본채 상층으로 돌아가는 이경헌의 뒤에서 누군가가 이름을 불렀다. 뒤돌아보니 아까 상석에 앉았던 원로였다.
“신께 가시는 겁니까?”
“다른 자가 연인 곁에 있음을 아시면 이제라도 명을 거두실지 모르니까요.”
“번복하시기엔 이미 늦지 않았습니까. 꼬리도 떨어졌고 이러다 전처럼 시체만 쫓게 생겼으니…….”
“이승호가 뒤통수만 안 쳤어도 일이 쉬웠을 텐데 말입니다.”
“쉬운 일 따윈 없죠. 그래서 신께서는…… 아직도 그때 그대로십니까?”
연인이 도망친 그 순간부터 잠도, 곡기도 전부 끊은 상태로 이기하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스스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신 거 같습니다만……. 지금까지의 패턴을 보면 그럴 확률은 거의 없을 겁니다.”
“돌아오면 끝인 걸 알면서 오겠습니까? 연구를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을 테니 쉽게 세뇌도 힘들 테고요.”
이 씨 일가 중추부는 가주의 명으로 비밀리에 연구소를 설립해 어떤 조건하에서 이기현의 능력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했다. 24시간 언제 어디서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이기현의 주변 인물들이 그에게 어찌 반응하는지를 기록하며 능력이 일어나는 촉매에 대해 관찰하고 있었다.
이기현은 저도 모르게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을 자유롭게 홀릴 수 있었고 그것에 공명한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그의 무의식을 실현했다. 공명하는 감정은 오직 ‘악의’. 공명한 상대방이 이기현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악의를 실현할 힘은 더 커졌고 더욱 견고해졌다.
실험체를 불특정으로 선별해 파트에 배속하고 그들이 어떻게 감응하는지를 본 결과,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났다. 이 씨 가문의 피를 이은 적통에 가까울수록 이기현의 현혹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 연구원들은 여우의 피가 짙게 섞여 저항력이 있는 것이라 해석했다. 이미 현 가주에게 복속되어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타인 역시 여우의 힘에서 자유로웠다. 그렇기에 이기현의 주변에는 이기현을 싫어하거나 이기하를 섬기는 자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호감을 품게 되면 그에 지배당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므로.
이기현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한 쌍인 이기하의 힘이었다. 이기현이 사방으로 퍼트리는 독을 자신에게 끌어들이고 본디 이기현에게 가야 할 살(煞)을 대신 맞아 보호한다. 이기현에게 있어 이기하는 자신과 상충하는 주적임과 동시에 반대로 땅 위에서 상생할 수 있게 만드는 존재였다.
“병원으로 온 연락에서는 건진 게 없습니까?”
이경헌은 상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오는 연락은 전부 확인하고 있지만 이기현으로 추정되는 자는 없답니다. 혹시 몰라 오는 발신자 전원을 추적하는 중입니다.”
“가깝던 자니 어떤 식으로든 접촉을 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인간화되었느냐에 따라 갈리겠다만…… 회의적입니다. 복수심에 액신이 된 여우가 고작 인간 여자 하나 따위에 흔들리겠습니까?”
“신께서 기다리시는 건 작은 계기 하나겠지요.”
달려가다가 잠시 잠깐 뒤를 돌아볼 만큼의 아주 작은 계기.
아직도 뒤틀려 있는 발가락을 느끼며 꺼칠한 턱을 쓸었다. 지하 깊은 곳에 뚫린 엘리베이터에 올라 지상에 가까워지는 이경헌의 눈에 멀리 하층부의 광이 들어왔다. 그곳은 연미연을 비롯해 액신인 이기현에게 살심을 품거나 해를 끼칠 수 있는 자들의 시간을 멈춰 가둬 둔 곳이었다. 세뇌가 완료되면 다시 지상으로 나올 수 있겠지만 지금껏 저길 벗어난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지헌이 이기현을 위해 지은 이 성 대신, 이기하가 타국의 섬에 짓고 있는 새로운 둥지가 완공되기 전까지 연미연은 저곳을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이 난리가 난 판국인데도 이경헌은 벅차올라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낙원을 건설하고 그의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염원이 이루어질 날이 코앞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초대 때부터 내려오는 원념은 약속대로 영원히 이기하의 몸속에서 잠들 것이다. 사람 한두 명쯤, 아니 수십 명쯤 희생되는 게 뭐 별거라고.
신의 뜻만 행한다면 앞으로 태어날 수백, 수천의 일족들은 영원한 건강과 젊음을 가지고 불멸의 삶을 살게 될 것인데.
선대를 비롯해 지금껏 능력을 이어받아 신의 이름을 가지게 된 역대 후손들은 이름만 신일 뿐이지 결국 가문의 액막이나 다름없었다. 일족에 내려오는 저주와 힘을 단일한 인간의 몸으로 받아 냈기에 짧은 생명이 다 타들어 가 닳으면 저주를 이기지 못하고 미쳐 가다 자멸했다.
하지만 이기하는 달랐다. 신을 받기 이전에도 불사의 몸을 가지고 있었던 이기하는 일족들이 그토록 기원하던 불로불사를 이루어 줄 진정한 신이었다. 시한부에 불과했던 역대 신들과 달리 핏속에 돌아다니는 저주의 고리를 끊어 줄 유일한 신이었다.
그런 신이, 그런 신께서 원하시는 단 하나가 제 짝과의 공생이라는데 따르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비록 그 짝이 액신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몸을 벗고 해방되려 발버둥 치는 마지막 여우 신수라 할지라도, 이기하가 원하면 바쳐야 했다.
사료에 쓰여 있던 인간들이 여우에게 행했던 악행을 애써 지우며 이경헌은 이기하가 머물고 있는 방 앞에 도달했다.
신체에서 흘러넘친 독기가 퍼지다 못해 문 밑으로 검게 고여 있다. 이기현이 곁에 없다면 굳이 독을 숨기지 않는 그였다. 대답이 돌아오진 않겠지만 들어가겠노라 고하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방 안에 가득 차 있던 검은 연기가 흩어지고 코끝으로 질식할 만큼 짙은 향기가 밀려들었다. 이기현의 체취였다.
그리고 선대 가주 이지헌이 죽기 직전까지 늘 달고 살았던 찻잎의 향이기도 했다.
“이경헌입니다.”
이지헌의 방과는 달리 뱀들도,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이경헌은 식은땀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조아렸다. 주인의 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곧 땅에 닿도록 이마를 숙이는 그의 귓가로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형님은.”
“…….”
“무사하신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신음성을 흘렸다. 누가 위에서 짓누르는 것도 아닌데 위압감에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무사하십니다. 무사하십니다. 가주님.”
황급히 내뱉은 대답에 방 저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삐걱거리며 바닥을 밟은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이경헌은 꼼짝 못 하고 몸을 낮췄다. 간신히 곁눈질한 시야로 남자의 발이 보였다. 어둠에 익숙해지니 방 안에 가득 찬 물품들도 눈에 들어온다.
숨을 들이켰다. 방 안을 메우고 있는 것들은 전부 이기현의 물건들이었다. 검은 연기로 가려져 있던 화면들은 하나같이 도망가기 직전의 그를 비추고 있다. CCTV에 마지막으로 잡혔던 그 모습 그대로.
사라진 그 순간부터 화면의 시간도, 신의 시간도 멈췄다. 이제는 자칫 잘못하면 일족의 시간도 멈출 것이다.
이경헌은 고통을 각오하며 준비해 왔던 거짓말을 꺼낼 준비를 했다.
삐걱거리며 다가오던 소리가 바로 머리맡에서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