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9/47)

5

운전하던 사내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모른 체하고 손바닥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손수건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내는 그런 나를 힐끔거리더니 기어이 말을 붙였다.

“저기…… 괜찮으세요?”

“예.”

애써 미소를 짓자 그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가리켰다.

“여기도 있는데……. 핏자국.”

그가 가리키는 부분을 문질렀다. 그러는 와중에도 창밖을 주시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레지던스가 멀어지고 있는데도 안심이 되긴커녕 오히려 점점 불안해졌다.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기하가 카운트를 세는 것도 아닌데 보내 주라는 명이 떨어지자마자 그 길로 정신없이 입구를 달려 나와 도로 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차에 무작정 탑승한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쫓아온 보안 팀에게 목덜미가 잡아채일 것 같았다. 문을 두드리는 내가 절박해 보였는지 다행히 운전자는 별말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근처 병원으로 가면 되나요? 아니면 경찰서?”

“아니요!”

걱정스럽게 내 몸을 훑어 내리며 물어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강한 부정에 그는 걱정을 넘어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그냥…… 손바닥만 조금 찢어진 정도라서요. 태워 줘서 감사합니다. 어디까지 가신다고 하셨죠?”

“종로 쪽으로 가긴 하는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엄청 안 좋아 보이는데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거기까지만 태워다 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아니 뭐 어차피 가는 길이라 상관없긴 한데.”

차이나 셔츠 앞에 떨어진 핏방울이나 창백하게 질려 있을 얼굴이나 쫓기는 듯한 행색까지. 심상치 않아 보이는 남자를 차에 들인 게 뒤늦게 후회되는지 그는 불안하게 계속 나를 살폈다. 그가 이만 내리라고 할까 두려워 얼른 아무 말이나 입에 담았다.

“어쩌다 보니 시비가 붙었거든요. 그래서 도망 나왔는데 잡힐까 봐 무서워서…….”

“치정 싸움이라도 했어요?”

“예?”

“아까 보니까 레지던스에서 나오는 거 같던데요. 그런 비싼 데서 사는 사람이 차도 없이 황급히 도망 나온 거 보면 뻔하지 뭐.”

느물거리며 말하는 폼새를 보니 내가 바람이라도 피워서 본처한테서 도망 나온 줄 알았나 보다. 범죄자로 오인하는 것보단 낫다 싶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긍정을 본 사내는 자신의 추리가 들어맞은 것에 기뻐하며 전보다 편하게 굴었다.

“그럴 줄 알았어.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니까. 그래서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돼요. 괜히 욕심내고 그러다가는 걸리게 되어 있다고.”

“……그러게요.”

“불장난도 젊어서 한때지. 나도 와이프 두고 잠깐 딴짓 좀 해 보려다가 한 방에 걸렸잖아요. 하하하. 시작도 못 해 보고 쥐 잡듯 잡혔다니까? 그 뒤로 무서워서 충성하고 살아요. 모를 줄 알았는데 기가 막히게 알더라고. 이젠 집에 조금만 늦게 들어가도 팬티 속부터 검사하니 집착이 아주 그냥…….”

집착. 집착이란 단어만 들어도 소름이 끼쳤다. 집착한답시고 기하가 내 주변에 무슨 짓을 해 놨을지 상상하면…… 아니 상상하지 말자. 죽고 싶어질 테니까.

열흘의 유예 기간을 준다고 했지만 지금도 분명 보안 팀이 내 뒤를 쫓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 잡히면 영원히 기하의 인형으로 전락하여 바깥의 생활은 종료될 것이다. 절대 잡혀선 안 된다. 혹시나 지나가던 사람이 얼굴이라도 볼까 봐 시트에 묻었던 몸을 더 끌어 내렸다.

제발 놔줘. 찾지 마. 내가 널 더 미워하지 않게 해 줘.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어떻게 해야 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 서울권은 어딜 가든 일영의 영향이 미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방으로 가야 하나? 연고 하나 없는 곳으로 빠지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무슨 수로 그곳에 내려가나. 일영이 운송권을 독점하고 있는데.

몸의 떨림을 좀 진정시키고 신나서 떠드는 사내에게 대충 맞장구쳐 주며 주머니 속을 뒤졌다. 이렇게 되고 보니 가방을 들고나오지 못한 게 아쉬웠다. 다행인 건 재킷 안에 지갑은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폐의 액수를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금을 좀 뽑아서 다닐 것을. 추적당할 게 뻔하니 카드도 사용할 수 없는데 이 돈으로는 고작 며칠 머무르는 것에 그칠 것이다. 휴대 전화도 박살 내 버리고 왔으니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할 방도도 없고…….

유일하게 외우고 있는 번호는 기하의 번호와 어쩌다 피치 못하게 외우게 된 그 남자의 번호뿐이다.

강준형. 그자와 엮일 일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랐는데.

백화점에서 만났을 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럼 나와 내기라도 하겠습니까?’

남자는 내기라고 말하면서도 지나치게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이 시계 안에 적어도 GPS 정도는 설치되어 있을 거라는데 걸지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죠.’

그는 일축해 버리는 내 손목에 얌전히 다시 시계를 채워 주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었다.

‘쓸데없는 소리가 아닌 걸 알게 되면 나한테 와요. 내가 이런 제안을 해 준 걸 감사할 날이 올걸? 어디 그때 돼서도 볼일 없는 사이란 소릴 할 수 있는지 봅시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자 말대로 이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동아줄이라곤 그뿐이다. 새삼 내 세계가 이리 협소했나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기하가 만들어 준 세상과 직업, 기하가 만들어 준 지인과 삶……. 그 아이를 떠나려고 마음먹은 순간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누리던 것들은 전부 그 아이를 섬기는 것에 대한 보상이었고, 내가 일궜다고 생각했던 건 허상이었다.

이렇게 만들려고 그랬구나. 이렇게 길들이려고 너는 그렇게 아릴 정도로 달콤했구나. 두려워서 몸이 떨리는데도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때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그 남자 하나뿐이라니.

강준형이 해 줬던 말은 얄궂게도 다 진실이었으니 이 시계에 GPS가 설치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럼 지금 이걸 보고 내 뒤를 따라오고 있을 거다. 그 생각이 미치자마자 섬뜩해져 뱀이라도 떼어 내듯 다급하게 시계를 풀었다. 밖으로 내던지려 창문을 내리려 했을 때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이걸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방법이.

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 게 괴이했는지 사내는 다시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실없이 웃는 그대로 지갑에서 수표를 몇 장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KNG백화점에 들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 * *

저번에 한번 와 봤다고 이번에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쉬웠다. 김태영과 투닥거리며 여유롭게 걸었던 길을 이번엔 도망자가 되어 걸어야 했지만.

피가 묻은 앞섶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여미고 강준형과 만났었던 명품관을 찾아갔다. 입구를 들어가자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가 얼굴을 알아보더니 만면 가득 영업용 미소를 띠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 고객님 어서 오십시오. 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 시계의 가치를 알아봤었던 직원이 출근한 상태라 다행이었다. 나는 가타부타 말할 것 없이 시계를 풀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걸 강준형 사장님에게 좀 전해 주겠습니까?”

“예?”

“그냥 저번에 왔던 손님이 주고 갔다고 하면 알아들을 겁니다.”

그녀가 엉겁결에 받아 들고 시계를 확인하더니 놀란 얼굴을 했다. 말을 붙이기 전에 다시 숍을 빠져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나며 뒤돌아보자 매니저가 내 쪽을 보며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이제 이걸로 강준형이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아차릴 것이고…… 다음은 어떻게 일단 서울을 벗어나느냐 하는 일이다.

위층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오르듯 타서 남성 캐주얼 매장에 도착했다. 청소년들이 많이 입는 듯한 브랜드에 들어가 청바지와 티셔츠, 모자를 입고 그 자리에서 결제를 마쳤다. 옷을 바꾸고 모자를 푹 눌러썼더니 위화감 없이 대학생 정도 나이로 보였다. 어차피 CCTV를 뒤져 금세 옷차림 정보를 공유할 테지만 이곳은 강준형의 백화점이었기에 다른 곳보다는 일족들에게 협조하는 것이 늦을 것이다. 늦으면 늦을수록 나는 조금 더 많이 도망갈 수 있을 테고.

오늘만큼은 까탈스럽고 안하무인인 강준형의 존재가 고마웠다. 기왕이면 일족들의 요구 사항에 더욱더 까다롭게 굴어 줬으면.

입었던 옷가지를 비치되어 있는 휴지통에 버리고 주차장 쪽으로 빠르게 빠져나와 대기하고 있던 사내의 차에 올라탔다. 사내는 15분 남짓한 시간 만에 모습을 바꾸고 온 게 신기하단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제 막 백화점으로 들어오는 차량들이 많아져 그새 도로가 북적거렸다. 타인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영위하는 것이겠지만 나 혼자만 동떨어져 다른 시간을 달리는 것 같다. 매일 반복되던 똑같은 스케줄과 풍경이 아닌, 낯선 환경에 도망치고 있는 실감이 났다.

아직도 안 잡혔어. 잘하고 있는 거야.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돼. 최대한 빨리 서울권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한숨 돌렸을 때였다. 반대편 도로에 새카만 차량 몇 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순간 심장이 뚝 떨어졌다. 그게 무엇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조정구와 보안 팀이 몰던 익숙한 검은 세단. 저 검은 차량은 일족들이 분명했다.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여기까지 따라붙었다고?

다급히 시트 밑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사내가 당황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그의 목소리보다 심장의 쿵쾅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안 돼…… 설마…….

“왜 그래요. 저기 학생? 아니, 뭐라고 불러야 하나. 이봐요?”

“아저씨…… 운전 좀……. 빨리…….”

위잉― 이명이 인다. 당황한 사내가 내 등을 두드렸다. 귀가 물속에 들어간 듯 먹먹하게 잠겨 들었다. 극도의 불안감에 잠시 멎었다고 생각했던 손가락이 발발 떨린다. 당장이라도 강제로 차를 세우고 일족들이 차문을 열 것 같았다. 내 멱살을 잡고 바닥으로 끌어 내릴 것만 같다.

“왜…… 그…… 아요?”

아예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울렁거려 사내가 등을 두드릴 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을 거 같다. 이렇게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뛸 수도 있는 거구나. 빨리 달려 달라고, 빨리 벗어나 달라고 애걸했지만 입에서는 괴상한 신음 소리만 나왔다.

사내가 내 반응에 놀랐는지 좀 더 과격하게 액셀을 밟았다. 한 몇 분이 지나고 그 자리를 완전히 벗어나서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차체에 속도가 붙는 것을 느끼면서도 무서워서 도저히 다시 허리를 세울 수가 없었다.

아니, 잘못 본 걸 수도 있다고. 그 세단이 일족들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잖아. 진정해. 진정해라. 정신 차려……!

“이봐요. 괜찮아요? 이게 대체 뭔 일이야.”

“아…….”

“괜찮아요? 말 좀 해 봐요. 예?”

“괜찮……습니다.”

“여기 물 좀 마셔요.”

사내가 글러브 박스에서 물통을 꺼내 건넸다. 감사하다고 말할 정신도 없이 허겁지겁 물을 들이켰다. 손을 떠는 통에 제대로 삼키지 못한 물이 턱을 타고 지저분하게 흘러내렸다.

“뭘 봐서 그렇게 무서워해요? 진짜 죄라도 지었어요? 웬 땀을 그렇게 흘리고 그래. 이거 가만 놔둬도 되는지 모르겠네.”

이제야 자기가 태운 게 폭탄이었다는 자각이 오는지 걱정스레 묻는다. 그래도 내리라는 소리는 하지 못하고 착실하게 내가 원했던 곳으로 차를 몰아갔다. 나는 간신히 용기를 내 창밖을 내다보았다. 세단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오는 검은 차가 없는지 백미러를 확인하고서야 겨우 시트 위에 앉을 수 있었다. 뒤늦게 현실감이라도 밀려들었는지 몸의 떨림은 끝내 가라앉지 않았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내가 다 깜짝 놀랐네. 진짜 뭐에 쫓기고 있기라도 해요?”

“몸이 안 좋아서…… 쉬면 괜찮아집니다.”

“괜찮은 거 맞아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는데. 병원으로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괜찮아요. 속도만 좀…… 올려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고작 세단 한 번 본 걸로 이렇게 동요하면 앞으로 어떻게 버텨 나가려고 그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제 완전히 잠적할 때까지 계속 이런 일이 있을 텐데. 자책하며 등받이에 기댔다.

무섭다. 너무 무서웠다. 괜찮은 척, 센 척을 하며 빠져나왔지만 무서워 미칠 것 같다. 지옥을 벗어나고 있는 기쁜 순간에도 어떻게 자유가 아닌 공포가 더 가깝게 느껴질까. 누가 목덜미라도 채어 끌어낼까 봐 떨리는 손가락으로 안전벨트를 꽉 움켜쥐었다.

“심호흡 좀 해요. 그러다 숨넘어가겠네.”

“……죄송합니다.”

“허 참, 죄짓고는 못 사는 양반이네.”

사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내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제 그에게 변명을 할 기운도 없어 그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숨을 쉬지 못했던 것이 타격을 줬는지 뒷골이 욱신거린다. 아니 견딜 수 없게 욱신거리는 건 머리가 아니라 아까부터 고장 나 있던 심장이었다. 심장은 겨우 하나뿐인 기관인데 어떻게 이리 복합적인 마음이 드는 것일까. 공포를 다스리면 그다음은 기다렸다는 듯 죄책감의 차례였다. 애써 감정의 차단기를 내렸지만 사이를 비집고 나온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떠나지 않을 거라면서, 날 버리지 않을 거라면서. 또 거짓말이었어. 내게 했던 모든 약속을 지킨 적도 없는 당신이 날 비난할 자격이 있습니까? 같이 도망치자는 약속조차도 잊고 혼자 도망간 당신이……!’

사무치듯 외치던 아이의 원망이 귀에 왕왕 울린다. 현기증이 나 헐떡이며 등받이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날…… 사랑하시잖습니까.’

다른 말은 원망이었지만 그 말만은 애원이었기에 비참해져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가가 뜨거워진다. 감정마저 부정하며 버렸기에 내 도망은 성공이어야 했다. 이제 널 볼 수 없으니 최선을 다해 도망가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날 사랑하시잖아요.’

‘날 사랑하잖아.’

‘형님……!’

아무리 너에게서 도망치고 있다 한들, 너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한들 네 목소리에서까지 멀어질 순 없겠지만.

* * *

“더 도와주고 싶은데 내가 회사를 비울 수 없어서.”

사내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날 만나 오전 시간을 허비한 그에게 미안한 건 내 쪽이라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정말로…… 뭐라 말할 수 없이 감사드립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앞섶에 피를 묻히고 수상쩍어 보이는 남자에게 그가 호의를 베풀어 기꺼이 차 문을 열어 주지 않았더라면 벌써 본가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지갑을 꺼내 수표를 몇 장 더 꺼내 디밀자 사내는 물끄러미 내 눈을 보다가 밀어 내더니 오히려 아까 건넸던 수표마저 얹어 되돌려주었다.

“아니…… 아닙니다. 이건 당연히 드려야 하는 건데요. 제가 너무 감사해서…….”

“나보다 그쪽이 더 필요할 거야. 도망가는 거 맞잖아요?”

말도 안 되게 대충 둘러대선지 사내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쫓기는 걸 눈치챈 듯싶었다. 도망자인 걸 뻔히 알아채 놓고 내리라고 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할 말을 잃은 나를 보고 그가 사람 좋게 웃었다.

“거 무슨 사연인진 몰라도 그렇게 힘들어 할 거면 차라리 빌러 가는 게 좋을 거 같지만.”

“…….”

“세상 물정 모르고 귀하게 자란 도련님 같은데 이렇게 턱턱 돈 쓰다 보면 힘들어져요. 앞으로 돈 들어갈 일도 많을 텐데 아껴야지.”

“하지만…….”

“그냥 가던 길이라 태워 준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아요.”

가던 길이라고 하기엔 처음에 남자가 말했던 곳보다 훨씬 떨어진 곳이었다. 선의에 값을 치르지 않았던 적이 없었기에 얼떨떨해하다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그럼 몸조심해요. 난 이만 가 볼게요.”

마지막으로 충고한 뒤 그가 차를 몰고 사라졌다. 당장 걸음을 옮겨도 모자랄 판에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떠나는 뒷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지켜봤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아무런 대가 없이 나를 도와주었다. 손에 남자가 그대로 두고 간 수표가 바스락거렸다. 흔들리는 눈으로 손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에게는 작은 해프닝에 불과할지 몰라도 사내의 선의에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세상엔 날 착취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착취하지 않고 순수하게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다. 동전을 넣으면 물건을 뱉어 주는 자판기같이, 대가를 지불하면 딱 그 대가만큼의 호의를 되돌려주던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내게 제일 가까운 이들은…….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에 주저앉을 것만 같아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었다. 부모의 손을 놓치고 갈 곳을 잃어버린 아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저 빠져나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 달렸지만 그 후에 내가 가야 할 곳은 없었다. 돌아갈 곳도 없고 목표한 곳도 없이 그저 망연히 먼지가 일고 있는 도로의 끝만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것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나서였다. 그 소리가 나를 쫓아오고 있는 건 아닐 텐데 그새 도망자가 됐다는 걸 인식한 몸이 먼저 반응했다. 사이렌 소리가 나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

흐리멍덩한 눈을 굴려 주변을 살피다 근처 상가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다. 세면대에 다가가자 거울 속에 눈이 빨간 볼품없는 남자가 비친다. 누가 봐도 죄를 짓고 도망가는 걸로 보이는 완전히 겁에 질린 얼굴. 그게 보기 싫어 차가운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쳤다. 하얗게 뜬 피부가 붉게 부어오르자 물을 끼얹었다. 찬물에 손가락이 새파랗게 얼어서야 겨우 멈췄다. 이제야 좀 정신이 맑아진 것 같았다.

밖에 나와 몇 대의 차가 나를 스쳐 지나는 걸 보며 표지판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을 벗어나진 못했지만 역세권이 아닌 외곽이었다. 일단 거리를 벌려 뒀으니 그들이 이곳까지 추적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터미널 같은 곳에 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대중교통도 위험하다. 실내에 CCTV가 설치되어 있을 교통편은 만일을 제외하고는 타지 않기로 했다. 도망을 실패한 적도 있으니 신중해서 나쁠 것 없었다.

사내가 이거라도 쓰고 다니라며 쥐어 줬던 마스크를 올려 쓰고 걸음을 옮겼다. 휴대 전화라도 있으면 뭐라도 찾아볼 텐데 정보를 서치할 기계가 없다는 건 많이 아쉬웠다.

혹시 도로변을 걷다가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서 카페부터 찾았다. 사람들이 별로 가지 않을 제일 작은 카페에 들어서서 카페모카를 주문했다. 직원이 서빙 하러 다가왔을 때 이 근처에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두 블록을 걸어가시면 초등학교 옆에 PC방이 하나 있어요.”

직원의 설명대로 PC방을 찾아가 구석에 자리 잡았다. 점심시간이라 손님이 얼마 없는 게 다행스러웠다. 커피를 빨며 인터넷으로 필요한 정보를 하나씩 검색했다. 가장 먼저 찾아봐야 하는 정보는 종이접기 안에 쓰여 있던 장소로 가는 방법이었다. 지금 상황으로는 원승호조차 의심스러웠지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었다. 비빌 언덕이 그것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하지만 종이접기와 열쇠는 연구소의 내 캐비닛 안에 보관해 놨던 상태다. 가지러 갈 수도 없으니 그 역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무력으로 사물함을 열어야 할 거다. 그래도 근거 없이 그곳에 먼저 가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곳에 가면 내가 찾던 것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은 그 실낱같은 희망에라도 기대야 한다.

지도를 프린트하고 가장 최단 루트로 역에 도착하는 방법을 메모했다. 택시나 버스를 이용하면 안 될 테니 3시간의 거리임에도 암담하게 느껴졌다. 길에서 아무 차나 얻어 타고 간다고 치면 시간이 두 배로 들 텐데 그러는 와중에 혈족들이 바짝 추적해 올지 모른다. 부디 그러기 전에 강준형이 제대로 미끼 역할을 해서 시간을 벌어 줘야 할 텐데.

저녁 무렵에 PC방을 나와 근처에서 간단한 옷가지와 생필품을 산 뒤 최대한 외곽 도로를 따라 걷다가 허름해 보이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CCTV는커녕 TV나 제대로 나올지 의심 갈 만큼의 시설이다. 직원이 돈만 세고는 얼굴도 보지 않고 던지듯 룸 키를 내려놓았다. 난생처음 이런 낙후된 시설과 불친절한 서비스를 겪어서 조금 위축되었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며 놀려 대던 김태영이 생각난다. 기하의 세상에 가둬져 보살핌만 받았으니 이런 걸 겪어 봤을 리가 없지. 삐걱거리는 복도를 걸어서 방에 도착하는 동안 다른 방의 문 사이로 신음 소리가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몇 번이나 문단속을 하고 침대로 가 주저앉았다. 방음이 되지 않는 방이니 보안 수준은 말할 것도 없을 거라 씻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이제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해외로 나가는 게 실패할 경우 최후에는 산속이라도 들어가야 할 테니 고급스러운 취향은 이만 버려야 했다.

비척비척 움직여 간신히 서 있을 공간만 되는 욕실에서 몸을 씻고 나왔다. 옆방에서는 사랑을 나누다 틀어지기라도 했는지 고함 소리가 들렸다. 거친 억양이 오가는 소리를 들으며 TV 리모컨을 조작하자 화질은 더러웠지만 뉴스를 볼 수 있었다. 의미 없이 TV에 눈을 고정하고 머릿속으로는 오늘 내게 일어난 일과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하루가 지독히 길었다. 하지만 앞으로 남은 9일은 돌이킬 수 없게 쏜살같을 것이다.

* * *

피곤했지만 잠이 올 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침대 끝에 앉아 해야 할 것들을 적는 동안 몇 번이나 눈꺼풀이 내려갔다. 고개가 꺾일 때마다 깜짝 놀라 졸다 깨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짧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여지없이 네가 나왔다. 그토록 네 꿈을 많이 꾸었는데도 흔치 않게 등장했던, 아버지가 죽던 날의 네 모습이었다. 그날의 너는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온몸이 눈물로 만들어진 것처럼 울고 또 울고 있었다. 그때 괴물이라 불리던 나는 아버지가 목을 매단 별채가 불길에 휩싸이는 것을 보며 웃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지.

그래. 나는 왜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나 웃음이 나왔을까.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네 작은 몸은 울다 지쳐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얗게 도드라진 목덜미. 까마귀 깃털처럼 새카맣고 윤기가 도는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나는 정복감에 취해 있었다. 나를 보러 오는 시간을 쪼개서 아버지를 만나러 갔던 너를 독점할 수 있다는 기이하고 추악한 정복감에.

기하야 널 괴롭힐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어. 널 아프게 할 사람도 없어. 너한텐 나밖에 없어. 이제 내가 네 주인이다!

작은 동물같이 온전히 내게 의지해서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이 사랑스러워서, 온몸에서 전해지는 달콤한 온기가 너무도 기꺼워 절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렇게 동생을 끌어안고 계속해서 미친 사람처럼 웃고 또 웃다가 불현듯 잠에서 깼다.

쾅쾅쾅!

커다란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잠에 취해 현실 구분 못 하고 눈을 껌벅거렸다. 때가 끼어 군데군데 새카만 낯선 천장이 계속 꿈속인 것만 같았다. 문 쪽에서 누군가가 내 방문을 부실 듯 두드렸다. 설마 집안사람들이라도 찾아온 건가 싶어 깜짝 놀라 침대 끝에서 굴러떨어지자 밖에서 욕설 섞인 고함이 들렸다.

“씨발, 나와 보라고! 아니 잠을 못 자게 밤새 TV를 틀어 놓음 어쩌자는 거야? 엉?”

“…….”

“여기 네가 전세 냈어? 전세 냈냐고!”

당황해서 TV를 보니 정규 방송이 끝나 지지직거리는 소음이 흘러나오고 있다. 시끄럽게 해 두고 잤던 습관 덕분인지 밤새 TV가 틀어져 있었던 것도 모르고 깜박 잠들었나 보다. 일단 보안 팀이 쫓아온 게 아님에 안도하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여기 방음이 형편없었지, 화가 날 만도 했다 싶어 얼른 종료 버튼을 누르고 방문으로 다가갔다.

“씨발…… 너……?”

허술하기 짝이 없던 잠금장치를 풀고 벌컥 문을 열자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내가 문 열기를 맞춰 위협하려 했는지 주먹을 치켜들고 있다가 깜짝 놀란다.

“너…….”

쥐어진 주먹에 나도 놀랐지만 잠이 덜 깨 어눌한 발음으로 재빨리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저기…….”

“…….”

“제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한대 정도는 맞을 각오를 했지만 그는 어어 하고 몇 번 신음만 내뱉었다. 내가 움츠러들지도 않고 눈을 껌벅이며 바라보고만 있자 머쓱하게 주먹을 내린다. 뭔가 더 욕할 말이 남았나 기다리는데 내 쪽으로 손가락질을 하더니 흠흠 숨을 가다듬는다.

“거…… 씹, 사람들 다 자는 시간에 매너 없게…….”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쇼.”

그가 내 어깨너머로 힐끔 방안을 살펴보기에 한 번 더 사과하고 그냥 문을 닫았다. 아직도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아 얼떨떨했지만 왠지 기분이 좀 이상했다. 예민한 걸지도 모르지만 내가 혼자 있는지 아닌지 확인해 본 것 같아 찝찝하다. 사내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려 방문 앞에서 기다려 보았다. 그런데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외시경도 없는 여관방이라 밖을 볼 수도 없어 긴장하며 그저 소리에만 집중했다. 한 10분 정도 흐르자 뭐라 중얼중얼거리며 다른 쪽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가 떠난 걸 확인하고 어차피 더 이상은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아 새벽이지만 짐을 꾸렸다. 간단히 샤워한 후 어제 입었던 옷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집어넣고 새 옷을 입었다.

방을 빠져나와 여전히 어두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내려갔다. 어제만큼은 아니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1층에 다다라 입구 쪽으로 갔을 때였다.

“어, TV?”

편의점에라도 들렀다 오는 길인지 사내가 비닐봉지를 든 채 입구를 들어서고 있었다. 깜짝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어두운 실내에서 단둘이 조우한 것이 두려워 제자리에서 얼어 버렸다.

“일찍 나가네. 시끄럽게 해서 잠도 못 자게 하더니.”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굳어 있다가 모르는 척 옆으로 비켜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당황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TV? 와 싸가지 없게 사람 말도 무시하나.”

그의 옆을 바로 스쳐 지나갈 땐 걸음을 빨리했다. 사내가 내 팔을 잡으려는 시늉을 하면 곧바로 주먹이라도 날릴 생각이었지만 의외로 그는 무시당한 것에 욕을 했을 뿐이지 나가는 나를 잡진 않았다. 잔뜩 긴장한 채로 재빨리 입구를 빠져나와 도로 쪽으로 뛰어갔다.

사방이 어두운 이른 시간이라 큰 도로에 나와도 오가는 차가 없었다. 그나마 몇 대 지나다니는 차들도 도로가 한적하다 보니 규정 속도를 지키지 않고 달리느라 서는 차가 없다.

몇 번을 그렇게 허탕을 치고 다른 쪽 도로로 가 봐야 할까 아니면 다른 대안이라도 생각해 봐야 하는 건가 쭈그리고 앉아 고민하고 있는데 화물을 가득 실은 대형 트럭 한 대가 지나가다 경적을 울렸다. 도로에 너무 가깝게 앉아 있어서 그랬나 싶어 뒤로 물러났다. 트럭은 몇 미터쯤 더 가다가 서더니 한 번 더 경적을 울렸다.

뭔가 싶어 주춤거리며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창문이 내려갔다.

“TV? 위험하게 도로에서 뭐 하는 거요?”

조수석에 앉아서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은 아까의 그 사내였다.

* * *

“거 TV도 배낭여행? 그런 거 하는 중인가?”

그런 거치곤 배낭을 메고 있지도 않았지만 아저씨는 오랜만의 동승자에 신이 났는지 쉼 없이 떠들었다. 첫 번째로 차를 태워 줬던 운전자의 감상대로,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척 보면 모릅니까. 요새 대학생 사이에서 그런 게 유행이라 하대요.”

운전하는 아저씨의 말에 호응하는 건 여관에서 나를 위협했던 사내였다. 처음의 험악하고 신경질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사내는 정말 단순한 성격이었다. 여관에서는 새벽에 이동해야 하는 운송업을 하고 있어 잠이 중요했기에 신경질을 냈다고 했다. 그냥 문을 두드리다 내가 좀처럼 깨지 않으니 점점 더 열이 받았던 것 같고. 술이라도 진탕 마신 줄 알았는데 자기가 성격이 좀 괄괄하다며 너스레를 떠는 것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학생인 걸 알았으면 그렇게 위협 안 했지. 미안했수다.”

“이 새끼 봐라. 아까 옆방 놈 때문에 잠이 안 온다며 족치러 갔다가 돌아와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 형님. 왜 그러십니까 진짜.”

무슨 소릴 했는지 사내가 다급하게 아저씨의 입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거보다 그의 입이 열리는 속도가 빨랐다.

“옆방에 눈 돌아가게 잘생긴 애가 있다고 와서 어찌나 호들갑 떨던지.”

“아! 내가 언제요!”

“아까 그랬잖어. 그렇게 생긴 앤 첨 봤다고 얼굴은 빨개져 가지고.”

그때 빨개졌는지야 모르겠지만 지금은 확실히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고는 소리 지른다.

“잠이 덜 깨서 그랬소.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서!”

“아서라. 네 새끼가 굶긴 굶었구나. 남자를 보고도 눈이 도는 걸 보니.”

“아, 형님 진짜 아침부터 술 자셨소? 왜 그래요?”

“네 새끼 얼굴 빨개지는 게 웃겨서 그런다.”

낄낄거리는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게 뭐 그리 웃긴 일인가 고민하다 억지로 입을 끌어 올려 웃는 척을 했다. 어찌하다 보니 동승하게 된 상태였다. 말투를 보니 같은 지역 출신도 아니고, 집안의 사주를 받은 자들도 아닌듯하고 그들의 직업도 도움이 될 것 같아 태워 주겠다는 친절을 받아들였다. 집안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속 도로를 타고 내려가기엔 화물차만큼 안성맞춤인 것도 없었다.

“아침 먹어야지. TV는 뭘 좋아하나?”

자꾸 TV라고 부르는 게 거슬렸지만 얌전하게 대꾸했다.

“아침 안 먹습니다.”

“지금 안 먹으면 점심까지 아무것도 못 먹어. 빨리 따라와요.”

그러면서 고속도로에 있는 휴게소에 주차하고는 제멋대로 우동을 세 개 시켰다. 당연하게 앞에 놓이는 그릇을 보고 눈치를 보다 젓가락을 들었다. 백날 고용인들이 차려 줘도 먹지 않았던 아침을 억지로 먹는 척했다. 어제부터 위장 안은 텅텅 비어 있었으므로 우동 면발 몇 가닥이 들어갔을 뿐인데도 안 받는 느낌이 난다. 내가 깨작거리는 걸 보고 사내가 쯧쯧거렸다.

“TV 입맛에는 안 맞나?”

“아니요. 맛있는데…… 원래 아침을 안 먹는 편입니다.”

속이 부대껴서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만 들이켰다.

“그럼 아침은 아무것도 안 먹는 거요?”

“그냥…… 커피나 마시고 때웁니다. 먹으면 힘들어지더라고요.”

사내는 자기 몫의 우동을 국물까지 다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나야 하나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었는데 아저씨가 팔을 잡아 저지하더니 히죽 웃는다.

“남자 놈이 저래서 불쾌하겠지만 좀 참아 줘.”

“예?”

“TV가 워낙 곱상해서 잘해 주고 싶나 봐. 나도 저런 건 첨 보네.”

“……예?”

무슨 뜻인지는 편의점에서 돌아온 사내가 내 앞에 커피를 종류별로 내려놓는 걸로 알아차렸다. 한두 개도 아니고 거의 쓸어 왔다 싶을 만큼 브랜드별로 다 골라 온 것에 말문이 막혔다.

“커피는 마신다면서.”

그가 물끄러미 내려 보며 턱짓을 한다. 이건 거절하기도 애매해 망설이다 제일 당도가 높아 보이는 것을 집어 들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이 새끼. 평소에 나한테도 좀 이래 봐라. 이런 거 한 번 안 사 줘 놓고.”

뭐가 그리 웃긴지 아저씨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남은 커피 중 하나를 낚아챘다. 사내는 아까보다 더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고는 버럭 성질을 냈다.

“아 왜 오버십니까. 아까 쟤한테 실수해서 그런 겁니다. 미안해서!”

이번 호의도 수표를 건네면 안 되는 것일까 고민하다 커피 뚜껑을 열었다. 한 모금 마셔 본 커피는 생각했던 것보다 달아서 긴장이 좀 풀어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하루 종일 커피 한 잔으로 버텼지.

볼멘 목소리로 투닥거리며 식당을 나서는 사내들의 등을 따라가려 자리를 일어났다. 이제 해가 완전히 떠 눈이 부셨다. 앞을 가리는 햇빛을 막으려 손바닥으로 시야를 가렸다가 뗐는데 전면에 크게 비치되어 있는 TV 화면에 아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무심코 바라봤다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퍽!

손에서 떨어진 커피가 내용물을 흩뿌리며 입구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TV?”

자기들을 따라오지 않는 나를 돌아보고 사내가 불렀다. 내가 쳐다보지 않자 조금 더 크게 부른다. 헤드라인으로 찍힌 글자를 보고 믿어지지 않아 눈을 크게 떴다. 뉴스 앵커가 평이한 목소리로 방금 들어온 뉴스를 말하고 있었다.

―선일그룹 장녀 박현진 씨가 오늘 새벽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현재는 중환자실에서 집중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박현진 씨는 20xx년부터 일영그룹 소속 주치의로…….

“왜 그래요?”

사내가 돌아와 커피를 주워 들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내 표정을 보고 그도 뉴스를 흘깃 쳐다보더니 혀를 찼다.

“하여튼 있는 것들은. 먹고 살기도 퍽퍽한데 약이나 먹고 앉았고. 근데 이제 그만 우리 출발해야 안 늦는데.”

“…….”

“TV?”

“누님이…….”

“누님?”

그가 뉴스를 다시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의아하게 물었다.

“저 여자, TV가 아는 여자요?”

도로 위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차가운 침대에 누워 이송되고 있는 박현진의 모습이 보였다. 늘 내게 웃어 주기만 했던 여자가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입에는 산소마스크를 끼고 늘 사내아이처럼 동여맸었던 머리카락은 풀어헤친 채로,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뉴스거리 잡았다고 신이 난 기자들의 플래시가 연신 터져 가는 가운데 앰뷸런스 옆에 서서 무표정하게 기자들의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고 있는 조정구의 얼굴이 보였다. 사람이 의식을 잃은 것을 보고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아니 오히려 전시하기 위한 행위인 게 명백한 존재감을 드러내고서.

화면 속 그의 어두운 눈과 마주쳤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이건, 배신한 나에게 보여 주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 * *

손가락으로 버튼을 터치해 숫자를 입력했다. 화면에 머무는 숫자가 11개가 되기 직전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다 다시 수화기를 들어 버튼을 다시 두드리고 숫자의 나열이 11개가 되기 전에 내려놓는 것을 계속 반복했다.

늘 애틋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11자리의 숫자였는데, 이게 이렇게 무서운 숫자가 될 줄은 몰랐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수화기를 내려놓고 전화박스에 기댔다. 불안 증세로 손가락이 떨린다. 나도 모르게 뜯기 시작했는지 입가에 가져간 손톱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침에 보았던 현진의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누님에게 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나.

기하의 힘이면 약물 정도는 쉽게 빼낼 수 있다. 내가 연락하면 즉시 힘을 사용해 줄 것이고, 그녀는 뉴스거리가 되었던 것이 무색하게 더 건강해질 것이다.

수화기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내 위치가 들통나겠지만 전화해서 애원한다면…… 나 때문에 저렇게 되었을 누님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집안 놈들이 원하는 바겠지.

“괜찮아요?”

공중전화 박스 옆에 서서 지켜보던 사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꺼칠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한 시간 내로 끝나니 태워 줄 테니까 병원 가 보던지.”

우리 일족들이 좍 깔려 있을 병원을 어떻게 들어가라고. 누님 얼굴을 보기는커녕 병원 진입로에 들어서자마자 붙들릴 것이다. 차마 사내에게 속사정을 말할 수 없어 침묵했다.

“장운!”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투덜투덜대더니 금방 다시 오겠다 하고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되자 다시 수화기를 들고 10자리 숫자를 누른 뒤 마지막 버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내가 너무 병신 같았다. 누님은 나를 위해 위험을 무릅써 주었는데 나는 그저 여기에 숨어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쓸데없는 가정이나 하며 회피하고 있다니.

너를 어떡하면 좋을까 기하야.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다고 가르쳐야 하나. 겨우 도망친 지 둘째 날인데 벌써 이런 짓을 저지르는 너를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도덕관념이 희박한 집안에서 신으로 추앙받으며 자랐으니 지금 하고 있는 짓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그저 네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 왔고 그게 당연하고 옳은 것이라 여길 테니.

하지만 너는 틀렸어. 네가 이런다고 난 돌아가지 않는다. 네가 하는 일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네 뜻대로 움직여 줄 수는 없었다.

이제 반밖에 남지 않은 손톱 끝을 잘근거리며 기하의 번호를 써 둔 걸 지우고는 기억하고 있던 다른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신호가 한 번 가자마자 바로 덜컥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내가 번호를 잘못 누른 게 아닐까, 아니면 남자가 번호를 바꿨으면 어쩌나 잠시 잠깐 걱정하던 찰나였다.

―이제야 전화하네.

“…….”

한두 번 말 섞어 봤다고 벌써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친근한 응대에 자기소개하려고 준비했던 말문이 막혀 입을 연 채로 굳었다. 다른 전화라도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듣고 있어요? 기현 씨?

내가 누군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순간 나는 당황스럽게도 그가 알아보는 것에 조금 안도하고 말았다.

“아…… 네. ……강준형 씨.”

―이제 좀 한 번호에 정착해서 걸어 줬음 좋겠는데. 매번 다른 번호는 신선하긴 하지만.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부탁할 게 있습니다.”

―나한테 폭탄은 던져 놓고 처음 하는 소리가 그겁니까?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닌가?

반응을 보니 시계가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많이…… 곤란해진 겁니까?”

―곤란하기만 한 정도겠어? 하루 종일 시달려 업무 마비까지 왔는데. 오늘 내로 기현 씨한테 전화 안 오면 나도 사람 풀려고 했습니다.

“화풀이는 다음에 몰아서 하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러게 상황을 왜 어렵게 만들어. 시계만 던져 주고 갈 게 아니라 당신이 직접 남았으면 좋았잖아. 덕분에 나는 있지도 않은 당신을 내놓으라는 협박도 들어 먹고.

역시 백화점 앞에서 봤던 세단은 집안사람들이 맞았나 보구나. 내가 행동을 빨리하지 않았음 하마터면 입구에서 마주칠 수도 있었다. 옷을 고르느라 지체라도 했든지 핏자국을 본 보안 요원이 붙들기라도 했었다면…… 그대로 내 도망은 종료였다.

―내가 당신 하나 못 숨길 만큼 못 미더워 보였습니까? 왜 그대로 도망갔어요?

“밖에서 할 일이 있어서요. 죄송하지만 일영 측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도와준다니까? 당신은 고생이 안 어울려. 괜히 힘 빼지 말고 돌아와요. 이 시간이면 멀리 가지도 못했을 텐데.

그답지 않게 대단히 정중한 목소리였지만 말의 내용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으로 범을 피해 도망쳤더니 사자의 손을 잡게 된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든다. 내게 집착하는 성질은 기하나 이놈이나 매한가지잖아.

―그래서, 어디예요? 데리러 갈게.

“그쪽이 먼저 날 도와준다고 했었기에 전화한 겁니다. 곤란하게 만들 생각인 거면 이만 끊겠습니다.”

―하하, 너는 네가 아쉬워도 센 척을 하네. 지금 그렇게 뻗댈 때가 아닐 텐데.

불만스러운지 그가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제멋대로 구는 내게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뭐…… 좋아요. 알겠지만 일영에서 당신 신병을 요구했습니다. 매장 전체 감시 카메라 화면 공유와 함께요. 협조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관계가 대단히 유감스러워질 거라던데……. 법적 절차를 동원하기 아슬아슬한 수준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다음은 또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군요. 그 양반들이 시계 안의 GPS를 쫓아온 걸 테니 내가 내기에 이긴 거 맞죠?

“……그래서 어떻게 하셨다고요?”

―뭘 어떻게 했겠어. 기현 씨가 있는 척해 달라고 시계를 던지고 갔으니 그대로 응대해 줬지. 내 손님이니 기현 씨가 스스로 원하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고 해 뒀습니다. 잘했어요?

“잘했…… 아니, 감사합니다.”

역시 남자는 눈치껏 내가 원한 대로 움직여 주었다. 이제 저 거짓말이 밝혀질 때까지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의 시선은 KNG백화점에서 떨어지지 못할 것이다. 인원이 분산되면 분산될수록 내 도망은 쉬워질 테고. 설사 거짓임이 판명 난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란 가정을 놓지 못할 테니 끝까지 강준형은 내 미끼 역할이 되어 줄 것이다.

―덕분에 일영과 맺었던 협력마저 흔들리고 있는데 기현 씨가 이 보상을 어떻게 해 줄 것인지 기대하겠습니다. 내가 녹록하지 않은 거 잘 알죠? 말도 없이 날 이용해 먹다니……. 빚 갚으려면 각오해야 할 텐데.

“강준형 씨도 내게 빚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로 퉁치죠.”

유치하게 나가긴 싫었지만 모른 척 던지자 남자의 웃음소리가 깊어졌다.

―퉁치는 건 감히 내 백화점을 미끼로 삼은 것에서 끝내지. 생각보다 일영에서 강경하게 나와서 보상 없음 이제 나도 어찌할지 몰라요?

“내 뜻대로 움직여 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어떻게든 최대한 보상할 생각입니다.”

―하하. 그래요. 기대하고 있죠. 기왕 날 끌어들인 거 잘 이용해 봐요. 그래서, 부탁이라는 건 그거였습니까?

“그것도 그렇고 뭐 좀 알아봐 주셨으면 해서요.”

―말해 봐요.

흔쾌히 물어 왔지만 내가 이걸 부탁해야 하는지 한 번 더 망설였다. 강준형에게 빚을 지고 싶진 않았다. 않았는데…….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이자뿐이다. 화면에 보였던 현진의 모습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아침에…… 박현진 씨가 약물 중독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나도 봤어요. 그러고 보니 그녀가 당신 주치의라고 했나? 유감입니다.

“병세가 어느 정도인지 상세하게 알고 싶습니다. 위험한 상황인…….”

거기까지 얘기하다 말을 흐렸다. 날 끌어내기 위함이었을 테니 위험할 리는 없었다. 내 동생이 그렇게까지 잔인하진 않을 거라 믿었다. 그럴 거라, 믿고 싶었다.

“KNG산하 병원이 있는 걸로 아는데…… 가능하다면 박현진 씨를 그쪽으로 옮길 수 있을까요?”

요청이 뜻밖이었는지 그가 잠시 침묵하더니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내가 가족도 아니고 보호자도 아니니 곤란합니다. 뭐 일반인이면 돈으로 어떻게든 해 보겠는데 하필 일영과 선일이 동시에 끼어 있잖아요? 게다가 병원 쪽 일은 법적으로 상당히 민감하거든. 자칫 잘못해서 환자한테 문제라도 생기면 독박 쓰는 건 일도 아니라고.

“……그럼 현진 씨가 입원한 병원에 연락책을 좀 두고 싶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바로바로 보고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나 설명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침묵하자 남자가 말꼬리를 늘이더니 알겠다는 듯 픽 웃었다.

―둘이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퍽 깊은 사이였나 보네. 그녀는 당신 때문에 저 상태가 된 걸 테고 말이야.

“……강준형 씨.”

―그 남자가 아닌 나한테 전화를 한 건 참 잘했어요. 근데 설마 병원을 가 보겠다든지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내가 지금 쓸데없이 댁한테 부탁을 왜 하고 있겠습니까?”

―그럼 뭐가 문제예요? 흔들리지 말고 볼일이나 빨리 보고 돌아와요. 내가 언제쯤 마중 나가면 됩니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잖습니까. 박현진은 나 때문에 다친 건데. 날 도와주다가…….”

―그래서?

그가 나긋하게 비난했다.

―그동안 어지간히도 꽃밭에서만 뒹굴었나 보네. 이기현 씨. 누군가를 등지기로 작정했는데 좋은 일만 일어날 줄 알았습니까? 보아하니 당신이 동요할 걸 뻔히 알고 저런 짓을 저지른 거 같은데.

“…….”

―정신 차려요. 넘어가면 제 2의, 제 3의 박현진이 생길 테니까.

마음을 후벼 파는 말이었지만 남자의 말이 맞았다. 이번에 박현진에게 달려가면 그 뒤로는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길 거다. 친구가 별로 없는 편인데도 당장 생각나는 사람만 둘이 더 있었다.

“도와줄 능력이 없어서 이렇게 말이 길어지는 겁니까? 내게 필요한 건 충고가 아니라 도움입니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그쪽이 해 줄 수 있는 건 뭡니까?”

―도울 수 없다고는 안 했어요.

“그럼 쓸데없는 말은 좀 닥치고 도와주시죠.”

강준형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화난 건 알겠는데 괜히 나한테 분풀이하지 말아요. 그녀를 저렇게 만든 건 내가 아니잖아. 이미 그렇게 된 걸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선일 산하의 병원이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원한대로 사람을 심겠습니다. 그거면 됐습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하죠.”

―그래요. 아, 이기현 씨.

끊기 직전에 남자가 다시 나를 불러 수화기를 도로 귀에 대었다.

―내가 나쁜 맘먹기 전에 꾸준히 연락해야 할 겁니다. 난 기다림에 익숙지 않거든. 인내심이 다 닳기 전에 내 곁으로 올 준비를 해요.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협박이었다. 이대로 이용만 해 놓고 버리면 곤란해질 거라는.

기다리는 걸 제일 잘한다고 말했던, 심지어 나를 기다리는 것이 기쁨이라 말했던 기하와는 너무 다른 대답이다. 나는 그 짧은 대화로도 기하와 그를 비교한 것에 환멸이 나 음울한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로써 강준형을 이용해 먹기만 하고 만나진 않으려 했던 계획조차 어그러졌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고 있다. 아귀가 잘못 맞은 톱니바퀴가 굉음을 내며 억지로 꾸역꾸역 돌아가는 느낌이다. 나 하나만 망가지면 모르겠는데 나 때문에 맞물려 있던 다른 톱니바퀴들도 전부 상하고 망가지고 있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조금씩 조금씩 갉아 먹히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정신이 계속해서 피폐해지는 게 실감이 났다.

모자를 눌러쓰고 전화박스 안을 빠져나왔다. 소나기라도 내리려는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공기가 전율하는 소리가 들렸다. 습한 걸 보니 금방이라도 빗줄기가 쏟아질 것 같다. 오늘이 가기 전에 역에 가려 했는데 날씨조차 도와주지 않았다. 일단 목적 없이 무작정 앞을 향해 계속 걸었다.

몇 발자국 가기도 전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곧 굵은 줄기로 변했다. 소나기 같았지만 피할 생각도 없이 그냥 고스란히 맞으며 나아갔다.

“TV!”

몇 분을 그렇게 땅만 쳐다보며 뛰듯 걷고 있는데 작업장에 있어야 했을 사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용케 뒤를 따라와 팔을 잡아채었다. 깜짝 놀라 억세게 붙들린 팔을 힘껏 뿌리쳤다.

“왜 따라옵니까.”

“왜 따라오냐니?”

“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따라오진 마십시오. 여기서부턴 혼자 갈 테니까.”

허, 하고 사내가 바람 빠지는 소릴 냈다.

“하여튼 TV 싸가지하곤…… 기껏 도와줬더니 하는 말이 그거요?”

“그럼 무슨 말을 더 해야 합니까.”

나중에 날 도와줬다는 게 밝혀지면 이 사람도 해를 입을 수 있다. 추적하고 있는 자들에게 괜한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선한 사람들이 다치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나 때문에 다친다 하더라도 책임질 수도 없었다.

뺨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닦아 내리고 무겁게 중얼거렸다.

“아저씨께도 감사했다 전해 주십시오. 인사 못 드리고 가서 죄송하다고요.”

“죄송한 거 알면 직접 가서 인사하고 가든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툴툴거리는 걸 들으며 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실례 많았습니다. 여기까지 태워다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인사를 마치고 그냥 뒤돌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사내가 무어라 소리쳤지만 무시했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에 얇게 입은 셔츠가 완전히 젖어 들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가방 따위를 머리 위에 지고 정신없이 내 앞을 질러 뛰어갔다. 나야말로 뛰어야 했지만 뛸 기분이 아니라 그냥 걸었다. 머릿속이 뜨거워선지 젖어 드는 온몸은 얼고 있었지만 얼굴은 화끈거렸다.

금세 물웅덩이가 생긴 도로를 차들이 요란하게 물을 튀기며 스쳐 갔다. 몇 대쯤 그렇게 지나치는데 익숙한 경적 소리가 울려 고개를 들었다. 조수석의 창문이 내려가며 사내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다 젖어서 누가 차를 태워 주겠냐고.”

“…….”

“일단 타쇼. 따라오지 않게 하고 싶으면 멀쩡하게나 가던지. 찝찝하게 그러고 가면 어쩌라는 거요. 일부러 그러는 건가?”

“나는…….”

“일단 타라니까. 더 젖으면 나도 안 태워 줄 거요.”

그는 아예 조수석 쪽의 문을 열어 버리고 위험하게 운전을 했다. 뒤차가 날카로운 경고음을 내며 앞질러 간다. 내가 타기 전에는 계속 문을 열어 두고 운전할 기세라 당황해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시트에 착석하자마자 사내가 뒷좌석에서 수건을 꺼내 내 무릎 위에 던졌다. 망설이다 흠뻑 젖어 버린 모자를 벗고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 닦았다. 커다란 수건에서는 오래 차 안에 있던 탓인지 꿉꿉한 냄새가 났지만 촉감만은 보송보송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문지르고 목덜미를 닦아 내렸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떨리는 걸 본 사내가 여름인데도 히터를 틀었다.

“그 여자가 TV의 소중한 사람이었나?”

습한 속눈썹의 물기를 닦으려 수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내게 사내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내 치기 어린 고집을 보면 저런 말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눈가를 꾹꾹 누르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거짓말 말라는 눈으로 그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비에 젖어 가닥가닥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박현진은 내게 고맙고 미안한 사람이었지만 소중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내 소중한 사람이 해친 사람이다. 그래서 이제 평생 내 죄책감의 범주에 들어갈 사람이었다.

* * *

앞이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일기 예보에서는 맑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고 투덜거리는 사내의 말을 들으며 종이접기에 쓰여 있던 폐역에 도착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원승호가 무슨 뜻으로 이곳을 적어 둔 건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여기가 맞아요? 저렇게 귀신 나올 거 같은 데를 오려고 했다고?”

“그럴걸요.”

비가 좀 잦아들면 나가려고 했는데 금방 지나가는 소나기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사내가 라디오 주파수를 조절해 뉴스를 틀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뉴스에서도 갑작스럽게 쏟아진 폭우에 대한 말만 나올 뿐 언제쯤 그칠 거 같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러다 해가 지겠는데요.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이 비를 뚫고 가겠다고?”

우박이라도 떨어지는 듯 물줄기가 루프를 거세게 두들기는 소리를 들으며 사내가 놀라 물었다.

“그칠 기미가 없으니 어쩔 수 없네요. 그럼 태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내가 차 문을 잡자 그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뒷자리를 뒤적거려 손전등과 비옷을 꺼내 건넨다.

“대체 저 폐역에 뭐 중요한 게 있다고 기어이 이 비를 뚫고 가겠다는 거요? TV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그냥 내일 다시 와 보면 안 되나?”

“시간이 없어서요.”

“시간이 왜 없어? 대학교 방학이면 남는 게 시간일 텐데.”

태워다 준다고 바득바득 우기기에 신세를 지긴 했지만 그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 박현진의 일도 그렇고 이곳의 일도 그렇고 이 남자에게 쓸데없이 너무 많은 걸 흘렸다. 이대로 그냥 보내도 괜찮은 걸까 망설였을 때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덧붙인다.

“정 꼭 가야 하면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갔다 오던지.”

“아…… 예. 고마웠습니다.”

괜한 생각하지 말자고 다독이며 문을 열고 화물차를 빠져나왔다. 발을 밖에 내딛자마자 첨벙거리며 발목까지 젖어 든다. 언제부터 운행이 중지되었는지 역 앞의 잔디를 관리하지 않아 이 일대는 온통 발목 위까지 잡초가 자란 상태였다. 시커먼 구름이 온통 덮고 있는 폐역이라니. 당장 공포 영화의 배경으로 쓰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음울하고 서늘한 광경이다.

비 맞는 걸 개의치 않고 역의 입구까지 물을 튀기며 달렸다. 다다른 입구에 사람의 출입을 막기 위해 쳐 둔 철골 울타리가 보였다. 열리진 않겠지만 얼기설기 얽혀 있는 틈으로 몸을 구겨 넣으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휘어져 있는 철골 사이로 어깨를 들이밀어 빠져나가는데 팔에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

얇은 비옷이 불거져 있는 철근에 스치다 걸린 모양이다. 빗물에 섞여 배어 나온 피가 흰 티셔츠에 보기 흉하게 번졌다. 팔을 대충 문지르고 역 앞 광장으로 진입했다.

겉의 모습도 그렇고 광장 앞도 관리가 안 되어 흉물스럽기 그지없었다. 멋대로 자라난 잔디가 바닥 전체를 덮었고 쓰레기장이 연상될 만큼 곳곳에 부서진 차량이나 기물들이 방치되어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반쯤 부서진 유리문 사이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쓰러져 있는 벤치들이 눈에 띄었다. 전쟁이라도 났던 것처럼 대부분의 설치물들은 멀쩡한 것 없이 엎어져 있거나 부서져 나동그라진 채였다. 문에서 떨어져 나온 유리 조각을 밟아 파삭파삭 깨지는 소리가 섬뜩했다.

젖은 어깨를 감싸 안고 걸음을 옮겼다. 지독하게 내리는 빗소리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잦아든다. 사내가 건네줬던 손전등을 켜고 주변을 비췄다.

이곳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종이나 쓰레기들을 쳐다보다 신문을 주워 들어 살폈다. 날짜는 11년 전 이맘때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못해도 11년 전에 폐쇄된 역이라는 소린가? 원승호는 왜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하려 했지?

11년 전 이때의 나는, 뭘 하고 있었지?

비옷을 벗어 옆의 벤치 위에 걸쳐 두고 손전등을 비추며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이렇게 어두운데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빨리 사물함을 찾지 않지 않으면…….

커다란 역의 복도를 걸으니 발자국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겁 없이 들어오긴 했지만 뒤늦게 공포가 몰려왔다. 차라리 사내 말대로 내일 다시 올 걸 그랬나? 잠시 잠깐 생각했을 때 손전등으로 비춘 복도 끝에 무언가 노란 선이 쳐져 있는 게 보였다. 한쪽 벽을 가로지르고 있는 그것은…… 폴리스 라인이었다.

‘기현아.’

폴리스 라인 근처로 다가갈수록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기분 좋고 아련한 기시감이 아닌 섬뜩하고 기분 찝찝한, 떠올려선 안 되는 것이 떠올라 버린 듯한 괴이한 기시감이었다.

멈춰야 했지만 절로 발이 움직였다. 허술하게 걸려 있는 폴리스 라인을 손으로 걷어 내고 복도 안으로 더 깊게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폴리스 라인 안쪽이 바깥쪽보다 훨씬 깨끗했다. 누가 임의로 닦아 낸 것처럼 유리 조각과 깨진 파편들은 바깥쪽에만 흩어져 있었고 이 안쪽은 흔하게 부서진 사물 하나 없었다.

‘기현아.’

홀린 듯 걸음을 더 빨리했다. 이 익숙함…… 아니 애초에 나는 누가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조금도 헤매지도 않고 사방으로 뻗어 있는 역 안에서 이 어두운 복도를 한 번에 찾았지. 손전등으로 비춰 겨우 시야를 확보하는 중이라 와 본 적이 있지 않고는 힘든 일이었을 텐데도.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눈앞으로 늘어져 있는 수십 개의 낡고 해진 하얀색 사물함들이 보였다. 이곳이 종착지였구나. 숨이 막혔다. 종이접기에 달린 열쇠의 번호를 기억해 낼 필요도 없이 나는, 그것이 가리키고 있던 사물함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앞에 다가가 천천히 열쇠 구멍을 쓰다듬었다. 동전을 넣고 열쇠를 받아 가는 구식 사물함의 시스템.

열쇠 구멍 사이로 반밖에 남지 않은 손톱을 넣어 긁어 대다 부실 수 있는 게 있나 살펴보았다. 복도로 돌아와 지렛대가 될 만한 얇은 철근을 찾았다. 사물함 입구 쪽 벌어진 부분에 넣고 힘을 주었다. 끼익끼익 듣기 싫은 쇳소리와 함께 낡은 철판이 우그러들었다. 몇 번을 그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역의 중앙 홀에서 무언가의 울림이 느껴졌다.

등에 삽시간에 소름이 돋아난다. 하던 것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손전등으로 내가 걸어왔던 길을 비췄다. 누가 있는 거냐고 소리 지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물었다가 정말 뭐라도 나타나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몇 분을 그렇게 숨죽이다 퉁퉁거리는 소리가 바닥이 아닌 천장에서도 울리는 걸 깨달았다. 빗물이 모여 배수구로 떨어지는 소리였나. 식은땀을 훔치고 다시 사물함을 여는 데 집중했다. 온 힘을 다해 사이를 벌리고 철판을 내리쳤다. 공허했던 복도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한참을 울리고서야 겨우 안의 물건을 비틀어 뺄 정도의 공간이 열렸다.

철근을 떨어뜨리고 손전등으로 사물함 안쪽을 비췄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익숙한 가죽 가방이었다. 익숙한……. 익숙한……?

팔을 집어넣어 가방을 억지로 빼냈다. 손전등을 바닥에 기울여 놓고 가방의 지퍼를 열어 뒤집어 털었다. 내용물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진다. 손전등을 들어 내용물 하나하나를 비췄다. 고등학교 교과서 몇 권, 잡지와 작은 파우치, 반으로 깨진 거울, 고양이가 그려진 손수건, 작은 초콜릿, 분홍색 필통, 뜯기지 않은 두 장의 승선권, 사용감이 있는 토슈즈. 그리고…… 다이어리.

다이어리를 잡고 빠르게 한번 넘겨 보는데 발밑으로 무언가 작은 종이가 떨어졌다. 허리를 숙여 집어 들고 불빛을 가까이 대었다.

‘괜찮아.’

손안의 것을 들여다본 순간, 숨이 멈췄다.

그것은 교복을 입은 두 사람의 스티커 사진이었다. 내 목에 팔을 두르고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애와 나. 아무리 동안 소리를 듣는 얼굴이라 해도 열 살은 어렸을 얼굴은 지금과 거의 흡사한 생김새였고 내 옆에 친근하게 붙어 웃고 있는 여자애의 얼굴은…… 최근에 보았던 어떤 여자의 얼굴과 비슷했다.

기하의 침실에서 마주쳤던, 하얀색 철릭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그녀의 얼굴. 아주 잠시 잠깐이었지만 그 순간에도 예쁘다고 생각했었던 그녀가 사진 속에서 내 목을 끌어안고 있다.

‘괜찮아. 기현아.’

몰려드는 목소리에 현기증이 일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섰다.

‘나만 믿어.’

‘……하지만.’

‘괜찮다니까.’

천진하게 웃으며 그녀가 가방을 잠그고 사물함에 집어넣은 뒤 입구를 닫았다. 동전을 집어넣고 열쇠를 꺼내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빙글빙글 돌린다. 역 안은 표를 사고 짐을 맡기러 온 사람들로 시끄러웠다. 낯선 장소에서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내게 다가와 팔짱을 끼고 힘을 줘 끌어당긴다.

‘가자. 도망치고 싶다고 했잖아.’

그녀는 내가 말했던 ‘도망치고 싶다’는 것을 무슨 모험을 떠나는 것으로 알고 신나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내게 감화된 그녀의 순진함이 눈이 부셔서 나는 눈을 깜박였다.

‘내가 구해 줄게.’

‘…….’

‘내가 널 위해 무슨 짓이든 할 테니까.’

“하…….”

충격으로 손안에서 사진이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믿어지지 않는다. 아예 짓밟혀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완전하지 않은 모습으로 물밑에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11년 전 그녀와 함께 이 역에 온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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