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8/47)

4

텅 빈 광장에 도착해 아득하게 먼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도, 별도 보이지 않는 그저 새카만 장막 아래로 검푸른 물줄기만 쏟아지고 있다.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깨와 얼굴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따가웠다. 철벅거리는 물방울이 종아리를 적신다. 몸이 온통 젖어 있었는데도 물리적인 차가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길로 시선을 돌렸다. 늘 시선이 느껴지던 타인의 거리와 달리 이 거리만큼은 살아 있는 것 없이 오직 나 혼자였다. 맨발이 시커먼 웅덩이에 잠겨 있는 걸 물끄러미 보다 발을 옮겼다.

목적 없이 한참을 그리 걷던 내 앞에 본당의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이곳이 언제나 도착지다. 다른 방향으로 걷더라도 늘 예외 없이 최종적으로 당도하는 건 이곳이었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대기도 전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음울한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린다. 문 사이로 본당을 향해 부복하고 있는 혈족들의 등이 보였다.

익숙한 광경이다. 꿈속에 갇혀 있는 내게 이날은 깨어지지 않고 수없이 반복되는 날이었다.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그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갔다. 중앙에 서서 빈소를 쳐다보고 있던 네가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하야.

얼굴을 확인하는 걸로도 벅차올라 내가 중얼거리자 아이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짓는다. 저 미소는 내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꿈 안에서만큼은.

자리에 멈춰선 내 몸을 뚫고, 나와 똑같이 생긴 청년 한 명이 기하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 넘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뛰어간 그가 동생의 앞에 당도해 숨을 몰아쉬며 얼굴에 손을 뻗었다. 네가 그에게 고개를 기울이더니 몸이 포개졌다. 비에 젖은 뺨을 비비며 서로를 끌어안는다. 간신히 닿은 연인인 것처럼 애틋한 스킨십을 나누자 기하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이제 저에게 남은 건.’

이제 내게 남은 건.

‘형님뿐입니다.’

너뿐이야.

아이의 입 모양에 맞춰 몇 번이나 반복됐던 고백을 대신했다. 그가 어린 내게 키스하는 것을 먹먹하게 지켜보았다. 이제 시작될 살극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을 이기지 못한 기하가 목을 떨궜다. 그가 시들자마자 등에서 지독하게 시커멓고 불길한 것이 허공으로 치솟는다. 흉흉하기 그지없는 그것은 하늘을 향해 갈기갈기 찢어졌다가 내가 자신을 발견했다는 걸 알고는 주저 없이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귀를 찢는 날카로운 귀곡성과 함께 그것들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하지만 바람이 스쳐 가는 것과 헛헛한 기운만이 느껴졌을 뿐 그 사악한 것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붙잡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무슨 짓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내 몸을 토막 치며 가르던 갈퀴들은 자리를 찾지 못하고 부복하고 있던 혈족들을 몇 바퀴 쓸고 지나갔다. 진짜 실체를 찾으며 배회하던 것들은 결국 기하를 부축하던 다른 내 몸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내 몸은 통과한 것들이, 딱 맞는 과녁을 찾았다는 듯 거세게 다른 내 몸으로 몰려들었다. 심장에 살(煞)을 맞은 몸이 크게 흔들렸다. 살들은 처음부터 그 다른 몸의 것인 양 자연스레 흡수된다. 그게 사라지는 걸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뺨을 타고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나와 가까이 위치해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혈족들이 그것들이 전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소리를 질렀다. 또 다른 나도 소리를 질렀다. 맨 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물웅덩이에 잠겨 있던 검은 눈의 성인 남자는 오래 꿇고 앉아 잘 풀리지 않는 다리를 하고도 필사적으로 동생을 업은 내게 손을 뻗었다. 멱살이 잡혔다. 곧 혈족들이 나를 에워싸는 걸 보며 타인이 된 나는 계속 소리 없이 울었다.

어른들이 몰려가는 것을 멍하니 서서 지켜보고 있던 한 아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빗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의 소년은 완전히 홀린 얼굴을 하고 날 돌아보고 있었다.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알아들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목적인 그 반응에 조금 웃었던 것 같다.

착하구나.

그럼 나를 도와줘야지.

내가 걸음을 옮기자 시간이 멈췄다. 번개가 내리치는 소리가 정지하고 억수같이 쏟아지던 빗방울이 바닥에 떨어지지 못한 채 허공에 머문다. 소년에게 당도해 그의 키에 맞춰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내렸다. 그의 귀에 대고 뱀과 같이 속살거렸다.

나를 위해 해.

나를 위해.

소년의 손 위를 손바닥으로 한번 훑었다. 비어 있던 아이의 손아귀에는 빗줄기에 닦여 반짝이는 칼날이 쥐어져 있었다. 내가 물러나자 멈춰 있던 빗줄기가 다시 발아래로 쏟아졌다.

작은 소년은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또 다른 나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의 사이로 뛰어갔다. 콰아앙! 어두운 하늘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물줄기를 퍼부었다. 이 저주받은 집이 통째로 물에 잠기고 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기껍게 웃고 있는 뺨으로 빗방울이 흐른다.

무리 속에서 첫 번째 비명이 울리는 것과 함께 나는 산산이 흩어졌다. 잿더미로 변한 시커먼 내 몸이 가루가 되어 날린다. 비 냄새보다 더 강한 코를 마비시키는 쇠 비린내가 사방에서 풍겼다. 차례차례 허공으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기분이 끝없이 고양했다.

아아, 이건 귀살(鬼殺)이었어. 이건 원래 내 것이었지. 사람이 둘러싼 곳의 바닥에서부터 검붉은 장판이 서서히 퍼지더니 내 발밑까지 번져 들었다. 비로소 자유로워진 느낌에 입을 가늘게 찢으며 몸체를 날카롭게 벼렸다. 그러고는 아까까지 날 꿰뚫었던 갈퀴가 되어 무리에 묻혀 있는 내 몸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리꽂혔다.

완전해져 눈을 뜬 내 앞에는 충혈된 검은 눈동자의 사내가 있었다.

내 멱살을 쥐고 있는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부릅뜬 눈으로 그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팟, 하고 뺨으로 빗줄기가 아닌 뜨거운 것이 튀었다. 남자의 하얗던 셔츠의 앞섶은 온통 붉었다. 몸속이 미친 듯이 끓는다. 극렬한 분노와 기쁨과 공포에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뭐든지 잡아 뜯고 부셔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내가 비명을 지르기 직전이었다.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손바닥이 내 눈 앞을 가렸다. 저항하며 벗어나려 하자 확 끌어당긴다. 숨을 들이켠 귓가에 공간감을 상실한 청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잊어. 형.’

순식간에 날 미치게 만들던 광기는 쐐기가 뽑히듯 몸에서 빠져나갔다. 저주를 퍼부으려던 입이 막혔다. 발버둥 치는 몸도 잡혔다. 주박에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반항하며 몸부림쳐도 소용없다. 겨우 완전해진 나보다 더 거대한 것이 짓누르고 있었다. 그 달콤한 음성은 주문을 외듯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익숙한 지배자의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몸 안에 숨어 있던 것들이 잡아 뜯겼다. 채워졌던 몸이 텅 비어 가고 있었다.

‘잊어버려. 잊어.’

‘이건 꿈이야.’

‘그저 악몽일 뿐이야. 기현아.’

잊어. 잊어. 잊어버려…….

이 죄는 내가 지고 갈 테니.

그리고 어마어마한 압력이 몸 위로 쏟아진다. 뱀의 피부같이 서늘한 게 온몸에 칭칭 감겨들었다. 삽시간에 내 몸은 떠밀려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질척하게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속으로 잠겨 든다. 저항하면 할수록 더 깊게…… 끝없이 가라앉았다.

“―――아!”

신음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일으킨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뭐…….”

아직 한밤중이다. 내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 등이 차례로 켜지고 침실 벽을 가리고 있던 블라인드가 걷히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어둠 속에 잠긴 강과 다리를 둘러싼 불빛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대부분이 잠들어 고요한 도시의 풍경 속에서 나만 혼자 볼썽사납게 헐떡이고 있었다.

“뭐야…….”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난 자세 그대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 응어리져 있던 숨을 토해 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시달리다 가까스로 깨긴 했는데, 좀 전까지 무척이나 답답했던 것 같은데 잠에서 깨는 것과 동시에 전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헐떡거리며 한참을 그 자세 그대로 있다가 반사적으로 움켜쥐었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왜 움켜쥐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악몽을 꾼 건가.

허탈하게 한동안 허공을 쳐다보다 별 모양 무드 등에서 쏟아지는 불빛들로 시선을 옮겼다.

최근 또다시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는 중이었다. 두통약을 처방받으러 간 센터에서 박현진 누님이 휴가 중이라며 대신 나타난 의사는 내가 스트레스를 줄이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말했다. 약을 먹는 것보다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맨날 똑같은 소리.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아나.

스트레스를 안 받고 싶어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강준형이 흔들려고 했던 거짓말 덕분에 난 어디 외출할 때마다 누군가가 내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거기에 생판 모르는 자가 내 모습을 찍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도 추가였다. 하긴 이건 망상이 아니라 현실이었지. 아직도 방 전체에 내 얼굴 사진이 깔려 있었던 소름 끼치는 광경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내가 밖에서 생활하는 한 언젠가는 그런 일이 또 생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기하가 날 방어해 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동생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혈족들 말대로 내가 본가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최근 내게 폭탄 같은 말을 던지고 간 박종오도 추가였다. 내가 주인이라고 선언한 날 이후부터 그는 눈에 띄게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뒤돌아보면 어김없이 내 등을 쳐다보고 있던 박종오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덕분에 최근의 내 정신은 지나치게 과민 상태였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척비척 방문을 열고 나오며 입고 있었던 가운을 떨어뜨리자 뭐 치울 게 생긴 줄 착각한 로봇 청소기가 반갑게 다가와 발 근처에 오기 전에 툭 쳐서 밀어 내 버렸다. 자면서 웬 땀을 이렇게 흘렸는지 온몸이 찝찝했다.

손바닥에 물을 받아 뺨을 달궜다. 뜨거운 물로 피부가 익을 때까지 한참을 씻으니 어느새 단발성 두통은 사라져 있었다.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 널널한 시간대라 물을 흘리며 나와 휘적휘적 돌아다녔다.

발끝마다 떨어지는 물방울에 저만치 떨어졌던 청소기가 다시 따라붙었다. 차 버리려다 그만두고 선반에서 팝콘 봉지를 꺼내 사방에 흩뿌렸다. 신이 났는지 몸체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난리를 치며 어질러진 바닥 쪽으로 달려든다. 팝콘을 씹으면서 피리 부는 사나이라도 된 듯이 로봇 청소기를 몰고 다니며 한동안 바닥에 팝콘을 뿌리고 먹으면서 놀았다. 한참을 그런 잉여 짓을 하며 보내는데 시간이 제법 흘렀는지 침실 안에 둔 자명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슬슬 출근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가방을 챙기며 도착해 있을 기하의 문자를 보려고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때 시선의 끝에 침대 단이 들어왔다.

원승호가 구해 준 문서를 숨겨 두었던, 그날 딱 한 번 읽고는 더 이상 꺼내지 않기 위해 궤에 넣어 보관한 장소.

사실 숨기지 말고 태워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와 기하를 제외하고는 결코 아무도, 아무도 읽어서는 안 되는 사료였기에.

그때 읽었던 구절이 생각날 때마다 심장이 죄어들었다. 강준형이 이 사료를 동생에게도 전달했을 테니 그 아이는 틀림없이 이것을 읽어 보았을 텐데. 이걸 읽었음에도 나를 대하는 태도에 변함이 없는 걸 보고 죄인이 되는 것 같았다. 그날 사료를 읽으면서 이것을 찾아 헤맸던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겨우 이런 것을 확인받기 위해 내가 그리 발버둥을 쳤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내 동생을 구하는 방법을 찾으려던 것이.

주저하다 침대 밑에 쪼그려 앉아 단에 깊숙이 팔을 집어넣고 더듬거렸다.

내 동생을 죽이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손끝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요철로 맞물려 놓은 궤를 천천히 돌려서 잡아 빼낸 뒤 조심스럽게 꺼냈다. 뚜껑을 열자 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는 종이 다발이 보였다. 내 피가 묻어 있는 표지를 확인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저주의 시작이 쓰여 있는 사료. 정확하게는 건국되었을 당시 여우 신의 저주 때문에 무너졌던 왕가에 대한 기록이었다. 남들이 읽으면 그저 신화에 가까운 건국 설화에 불과할 허무맹랑한 이야기. 다른 설화들과 달리 구전으로 전해지기엔 잔인해서 사장되어 버린 이야기였다.

문서의 표지에 그려진 문장을 손끝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도저히 다시 안을 펼쳐 읽어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사료의 대부분에 빽빽하게 쓰여 있던 것은 내가 기대한 저주의 해제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니 넓은 의미로 보면 해제법은 맞았다. 훼손되어 보이지 않는 몇 부분을 제외하고 남아 있는 모든 부분에는 인간이 여우 신을 죽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쓰여 있었다.

이걸 본 이후로 겨우 이딴 걸 신의 자료랍시고 찾으려 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동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제 그만 없애야겠지.

혹시라도 고용인들이 발견하면 큰일이었다. 들추지 말 것을, 찾지 말 것을. 감당하지도 못하고 결국 회피해 버릴 거면서 대체 무슨 배짱으로 나는 이걸 보고 싶어 했던 것일까.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오늘 연구소 소각장에서 태워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충동적으로 가방에 쑤셔 넣었다.

* * *

“일찍 나가시는군요.”

가드들과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던 조정구가 평소보다 삼십 분은 먼저 주차장에 내려온 나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예. 좀 일찍 일어났네요.”

“피곤하시겠군요. 오늘은 빨리 귀가하시길 바랍니다.”

경비원이 건네주는 키를 받아 들고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며 차에 올랐다. 시간이 많이 남는 김에 새로운 카페를 뚫을 예정이었다. 더 이상 박종오랑 같은 카페를 이용하고 싶지도 않았고 강준형 때문이라도 단골을 싹 바꿀 필요가 있었다. 레지던스 앞의 큰길에서 가지 않던 쪽으로 차를 돌렸다. 이쪽 근처에 커다란 카페가 있었던 기억이 났다. 일단 당을 충전하고…… 적당히 이십 분 정도 시간을 때우다 출발하면 되겠지 싶었다.

사거리에 세워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핸들을 두드리다 옆자리에 놔둔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본가 사람들의 눈이 득시글거릴 연구소에서 사료를 꺼내는 게 옳은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날을 잡아 사설 소각장을 찾아 태우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최근 박종오가 계속 뒤를 따라다니고 있지 않은가. 그 생각이 미치자 다시 돌아가 집에 두고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레지던스가 코앞이었기에 깊게 고민하지 않고 좌회전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유턴을 했다. 주차장으로 다시 진입하는 내 차를 확인하고 이런 적이 여태 없어선지 경비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다시 돌아오셨습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뭘 두고 가서요. 금방 다시 내려올 겁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팀장에게 연락하겠습니다.”

“뭐 하러요?”

다른 데로 갔는지 조정구와 그를 따르던 다른 가드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홀까지 따라왔어야 할 그 없이 혼자 거주 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복도로 발을 옮겼다. 한 번도 자리를 비운 적 없는 복도의 가드도 자리를 비운 상태다. 대수롭잖게 여기고 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었을 때였다.

“……?”

눈에 들어오는 거실을 보고, 나는 순간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바로 집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놀라 현관문에 적힌 룸 넘버를 확인했다. 분명히 내가 사는 집이었고 당연히 내가 사는 집일 수밖에 없었는데 마치 남의 집에 잘못 침입이라도 한 느낌이다. 고개를 돌려 현관 안을 쓱 쳐다보고 몇 번을 확인하고서야 집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머쓱하게 신발을 벗고 거실 위로 올라가니 아침에 봤던 로봇 청소기가 나타났다가 청소거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쑥 사라졌다. 그제야 내가 느끼고 있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팝콘.”

아침에 뿌리고 놀았던 팝콘의 흔적이 어디에도 없었다. 청소기가 다 빨아들였다 해도 책상 위나 소파 같은 곳에 쏟아 뒀던 것까지 청소할 순 없는 노릇이었을 텐데. 내가 발을 디딘 거실은 완벽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내가 집을 나선 지 불과 10분도 안 된 상황이었는데도. 사람이라면 무슨 수를 써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도저히 다 치울 수 없는 양이었다.

당황해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빨래 바구니 안에 오늘 내가 벗어 던지고 간 샤워 가운과 사용한 수건과 속옷이 없는 것과 식탁 위에 놓여 있어야 할 식은 아침 식사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이 집은 의심할 것 없이 내가 사는 집이었다. 하지만 내가 머물고 간 흔적이 전혀 없는 집이었다.

반질반질 닦여 광택이 흐르는 거실 바닥을 밟으며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가설에 몸이 크게 떨렸다.

그럴 리가.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는 없어.

바닥에 던져뒀던 가방을 도로 움켜쥐고 침실로 들어갔다. 급하게 방문을 열어젖히자 역시 내가 자고 일어났던 흔적 따윈 없이 지금이라도 당장 손님을 맞을 수 있게 흠 없이 정돈되어 있는 침구가 보였다. 방금까지 사람이 없었다는 걸 증명하듯이 내 움직임을 읽은 등불이 차례로 켜지고 블라인드가 새벽에 놀래 켠 것처럼 소리를 내며 걷혀 올라간다.

순서대로 눈을 돌려 취미로 모아 뒀던 장식장과 잡동사니가 놓여 있는 책상 위를 훑었다. 오늘 아침에도 보았던, 틀림없는 내 침실 안이다. 그저 내 흔적이 온데간데없을 뿐.

이거야말로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넋이 나가 방 안을 배회하다 주저앉듯 침대 밑에 수그렸다. 아까와 같이 손을 더듬더듬 단 안으로 집어넣었다. 손끝에 딱딱한 궤의 촉감이 느껴진다. 맞물려 놓은 부분을 돌리자 달칵, 하고 끼어 있던 게 떨어지는 경쾌한 음이 들렸다.

제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틀렸다고 해 줘. 그저 내 망상에 불과했다고.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줘서 궤를 끌어당겼다. 곧 눈앞에 나타난 것은 틀림없이 내가 몰래 제작해 넣었던 상자가 맞았다. 맞았지만…….

심호흡하며 궤의 뚜껑을 잡고 돌려 열었다. 눈을 내려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비어 있어야 할 상자 안에는―.

내가 갖고 나가 가방 안에 있어야 할 사료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 * *

눈앞이 크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어 계속 눈을 의심하다 환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다. 내가 또 헛것을 보는 건 아닐까? 사료를 꺼내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참을 정신 못 차리다 옆에 내려 뒀던 가방 안을 더듬어 서류 뭉치를 꺼냈다. 서류 사이에 있던 사료를 들어 궤 안에서 꺼낸 것과 비교했다.

얄궂게도 손가락이 베여 표지에 떨어져 있던 핏방울도, 손바닥으로 대충 닦아 내려 흉하게 번진 자국마저 똑같았다. 이렇게 바로 옆에 두고도 절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완벽히 같은, 두 개의 사료가 내 손안에 있었다.

“하…… 세상에.”

미친 것처럼 웃음이 나왔다. 덜덜 떨리는 등을 수그린 채 흐르는 웃음을 주체 못하고 터트렸다.

매번 들어설 때마다 낯선 느낌의 집.

아무리 어질러도 다음에 문을 열 땐 항상 새것같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던 집.

내가 몇 년을 살았음에도 사람 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늘 위화감이 감돌던 집.

다른 층.

같은 구조의 레지던스.

이제야 왜 탐지를 했을 때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간단하다. 그날 보여 준 것은 내가 살던 층이 아닌 구조가 똑같은 다른 층의 레지던스였던 것이다. 구조만 똑같은 것도 아니고 가구도, 전자 제품도, 심지어 내가 놔둔 모든 물품들을 전부 똑같이 복제해서 가져다 둔, 이기현 표 모델 하우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팀장에게 연락하겠습니다.’

‘뭐 하러요?’

엘리베이터에 타서 버튼을 누르고 닫히는 문 사이로 사라지던 경비원의 표정이, 뭐라 형용할 수 없이 이상했었다. 돌발 상황에 판단할 타이밍을 놓치고 벌어지는 사태를 손쓸 도리 없이 지켜보고 있는 그런, 절망 어린 표정.

그게 이미 다른 층으로의 조작이 끝난 상태여서였었나.

실성한 듯 웃으며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탐지 업체 팀장이 보여 주며 볼멘소리를 했던 시어터 앞으로 걸어갔다. 그 남자가 손가락으로 짚어 줬던 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보십시오. 설치하기 제일 용이한 시어터에도 구멍 하나 나 있지 않잖습니까.’

틀림없이 그때 당시 구멍이 없었던 시어터에는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릴 아주 작은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다. 유리 렌즈일 게 분명한 반질거리는 그것을 보고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토해 내지도 못하는 그것은 가슴속을 불태우며 나를 좀먹어 들었다.

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시어터를 걷어찼다. 큰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진다. 그걸 시작으로 집 안에 놓여 있던 모든 가전제품을 밀어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와장창! 가구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손에 잡히는 것을 전부 잡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유리도, 도자기도, 잘 가꿔 장식해 둔 찻잔과 술병들도 죄다 잡아 집어 던지며 악을 썼다. 가짜 거실이 엉망이 되어 갔다. 깨어진 와인 병에서 흘러나온 와인들로 바닥이 온통 붉게 변했다. 사방으로 부서지고 깨어진 것들이 흩어지는데도 내 기분은 점점 더 쓰레기 같아졌다.

내가 그리 패악을 떨고 있을 때 현관문이 급하게 열렸다.

다급히 문으로 들어서는 것은 조정구와 가드들이었다. 이제야 겨우 내 뒤를 밟다 돌아왔는지 그들은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오더니 그새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둔 꼴을 보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감정이 없던 조정구마저도 동요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현 님.”

“늦었네?”

“…….”

“내가 안 가던 길로 가서 쫓기 힘들었나 봅니다.”

내 비아냥에 남자들은 더 이상 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제자리에 섰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완전히 개판이 된 거실 바닥으로 눈을 돌렸다. 벌어져 속이 보이는 가전제품들 뒤에 아주 작은 빨간 불빛이 동시에 점멸하는 게 보였다. 카메라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이젠 정말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하하……. 진짜.”

“…….”

“진짜, 미치겠네.”

자조 섞인 물음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동안 아주…… 가지고 놀았네?”

“기현 님.”

“내가 정말 장난감이었어?”

닥치는 대로 던지다 유리에라도 베였는지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남자들은 내 광기에 섣부르게 곁에 다가오지 못하고 몸을 움찔거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다들 이 사태를 어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자칫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몽땅 다 뒤집어써야 할 상황에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굳어 버린 자들 사이로 정적을 깨뜨리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조정구가 항복하듯 양손을 올리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신중하게 손을 움직여 재킷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

“받지 마.”

누가 전화했을지 예상하고 이를 갈며 외쳤지만 조정구는 무시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받지 말라고 했잖아!”

내 고함에 귀에 휴대 전화를 댔던 조정구가 내 쪽으로 기기를 내밀며 딱딱하게 말했다.

“가주님이십니다.”

끓어오르던 피가 이번에는 차갑게 식었다.

* * *

기하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사고가 마비된 것만 같다.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 연인에게 치부를 들킨 것처럼 악다구니를 쓰던 게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정작 내 분노의 대상은 그 아이였는데도.

지독하게 학습되어 있구나. 이를 갈며 휴대 전화를 내민 조정구에게서 한발 물러났다.

“당장 꺼요.”

소용없을 협박을 내뱉었다. 조정구는 물끄러미 그런 나를 쳐다보더니 액정을 조작했다. 사내가 손가락을 미끄러뜨리자 방 안에 동생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형님.

평소처럼 날 부르는 온화한 저음에 대비했음에도 심장이 크게 요동친다. 집어 던질 것을 움켜쥔 손아귀가 덜덜 떨렸다. 엉망이 된 잔해 위에서 들리는 동생의 목소리는 잔인하게 전의를 꺾었다. 늘 자해를 하거나 제정신이 아닐 때마다 나를 구원하려 내렸던 목소리였기에.

네가 아니길 바랐다. 차라리 여우 신이기를 바랐다. 만약 그였다면 나한테 왜 이런 짓을 했냐고 소리 지르고 욕을 할 생각이었다. 악다구니를 퍼붓고 죄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네가 상대면 나는 죽도록 약해졌다. 분노가 모조리 원망으로 치환되어 버린다. 내게 이런 미친 짓을 한 너를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어진다.

―형님…….

내가 대답 없자 좀 더 애타는 목소리를 했다. 피가 묻은 손바닥으로 힘겹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는 지금도 어딘가에 설치해 둔 카메라로 나를 보고 있을 거다. 네가 한 짓은 내 기준에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짓이었다.

―제발…… 뭐라도 좋으니 말씀을 해 주십시오. 뭐라도 좋아요. 부탁입니다.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 날 보며 기하의 목소리가 애원하는 어조로 변했다. 내가 네게 약한 걸 너무 잘 아는 너는 이렇게 해야 흔들릴 걸 뻔히 계산하고 있겠지. 어렸을 때부터 저렇게 약한 목소리를 내며 날 휘둘렀으니까.

나는 다 알면서 휘둘려 줄 수 있었어. 그리고 휘둘리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나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너는 무서웠지만 한편으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이건 아니야.

―질책이든 욕이든 분노든 뭐든 괜찮습니다. 형님. 제발…….

부서진 잔해에서 굴러떨어져 놓고도 아직 점멸하고 있는 카메라를 발로 짓이겼다. 이게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을까. 이런 짓까지 한 걸 보면 애초에 나를 이 레지던스에 들일 때부터 설치되어 있었다고 봐야겠지. 여기 사는 동안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누군가는 계속 보고 있었을 거다. 그 생각을 하면 미칠 것 같다. 속이 완전히 뒤집힌다.

―우리 얘기 좀 해요. 전화 받아 주십시오.

재킷 안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얼마나 몸을 떨고 있으면 전화가 오고 있는데 눈치채지도 못하다니.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휴대 전화를 꺼낸 뒤 그대로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기하가 선물해 줬던 휴대 전화는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깨진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내 거친 행동에 사내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대화를 거부하겠다는 태도에 기하조차도 한동안 말을 걸지 못했다.

나는 널 해방시키려 했는데 너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형님…….

“그만둬.”

―…….

“지금은, 네 목소리 듣고 싶지 않아.”

내가 들어도 놀랄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랑하던 것에 배신당하면 이렇게 냉담해질 수 있구나. 내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겼던 아이는 나를 새장에 가두고 우롱했다. 나만 알던 내 이기심이 나를 살리는 순간이다.

“날 감시하면서 재미있었어? 다 보고 있었으니 그동안 내가 네게 어떤 마음이었는지도 다 알았겠구나. 알면서…… 전부 눈치채 놓고서 모른 척을 하고 있었어.”

―형님.

샤워기 아래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닦으며 울었던 것도, 네가 싫다고 말하면서도 과거의 너를 그리워하며 전화기를 붙잡고 잠들었던 것도, 버려지지 않는 사랑과 증오 때문에 몸부림치며 밤새 네 이름을 부르는 것도 너는 전부 다 보고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앞에서 그렇게 밀어내는 데도 끊임없이 붙잡을 수 있었겠지.

날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그런 줄 알았다. 내가 상처를 줘도 날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저 모진 말을 해도 날 보며 웃음을 잃지 않는 네가 너무 딱해서…… 너무 마음이 가서 차마 완전히 미워하지도 못했는데, 널 볼 때마다 죄책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그게 다 거짓이었단 말이지. 나는 병신처럼 그것도 모르고 네게 매여 있었는데.”

내 자조 섞인 중얼거림에 기하가 애걸하듯 말했다.

―부탁입니다. 형님. 제게……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제발 나쁜 생각하지 말아요. 지금 혼란스럽고 화가 나실 거 압니다. 하지만 형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

―제가 왜 이래야만 했는지 설명하겠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형님께 해를 끼치려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해를 끼치려 한 것이 아니었다고……?”

―저는…… 당신을 지키려고 이런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제가 얼마나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내게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저 여우 새끼는 도둑놈에 거짓말쟁이라고!’

등 뒤에 숨긴 기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외치던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후회하게 될 거야 기현아. 네가 지금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저것’은 너를 망칠 거다.’

“그거 알아?”

절로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너 지금 예전에 아버지가 내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거?”

―…….

“이제 완전히 신이 다 되었구나. 내 동생.”

설마 그런 소릴 듣게 될 줄은 몰랐는지 기하가 또다시 말을 잃었다. 아득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출근길에 보곤 했던 강가에 비치는 햇살이 창문을 넘어서서 엉망이 된 발끝을 비추고 있다. 나는 저 햇살을 목도할 때마다 너에게서 빼앗은 미래를 미안해했다. 너를 두고 혼자 밖으로 나온 것을 자책했었다. 이 광경을 보지 못할 너를 떠올리며 가슴 메어 했다.

그런 나를 다 지켜보고 있었을 네가, 지금껏 말하지 못한 죄책감에 시들고 있을 나를 뻔히 보고 있었을 네가, 그 죄책감을 이용하고 있었을 네가 대체 이래야만 했던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래 좋아.”

주먹 쥔 손으로 꾹꾹 뜨거운 눈가를 눌렀다.

“말해 봐. 왜 이런 짓까지 했는지.”

감정은 계속 치솟는데도 정작 머릿속은 반대급부로 차가워진다. 놀랄 만큼 빠르게 이성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너무 화가 나서였을까. 아니면 아직도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사실 나는 더 이상 너에게 실망할 마음이 남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자신이 말해 주겠노라고 해 놓고 정작 내가 되묻자 기하가 몇 차례고 신음을 흘리더니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일단 본가로 오십시오. 여기서 이렇게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일단 본가에 오셔서…….

“기하야.”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너는 정신 못 차리고 나를 새장으로 불러들이려 하고 있었다.

“난 이제 거기 가지 않을 거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어떻게든 타이밍을 맞춰 거실로 진입하려는 그들 앞을 조정구가 팔을 들어 막았다. 내가 본가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이, 가주의 명 없이도 내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경우의 트리거였던 모양이었다. 이번만은 조정구의 판단이 현명했다. 내 주변에는 부서지고 깨져 흉기가 될 만한 것들이 산재해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거실 한가운데로 도착하기도 전에 상황을 훨씬 악화시킬 수 있는 무기들이.

움찔거리며 자꾸 내게로 튀어나오려는 사내들 쪽으로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날 이런 새장에 전시하고 구경하며 조롱하고 있었을 저것들을 부숴 버리고 싶다. 다 잡아 뜯어 버리고 싶다. 폭력적인 상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자신도 놀랄 만큼 구체적이고 잔혹한 망상이 수면 위에 떠 있는 검은 기름처럼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내 의식의 꼭대기에 떠오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내들이 내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신음성을 흘렸다. 어째선지 흰자위가 새빨갛게 변해 똑같이 분노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지금은 안 돼.”

“…….”

“눈을 직접 보지 마. 잘못하면 휩쓸린다.”

조정구가 사내들에게 경고했다. 뜻을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사내 중 몇 명은 아예 고개를 떨궜다. 날 아주 역병 취급하는구나. 기가 막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웃고 싶었지만 이 싸구려 희극에 이젠 더 이상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약을 더 먹여서 병신을 만들지 그랬어.”

―……형님.

“말도 생각도 못 하는 병신을 만들어 그냥 네 침대에 묶어 놓고 너만 기다리게 만들지 그랬어. 이런 짓까지 하지 말고.”

그럼 적어도 내 세계가 모래 위에 세워진 소금 성인지는 모르고 살았을 텐데.

―제 말을 전혀…… 믿지 못하시는군요.

허탈한 건 내 쪽이었는데, 기하가 더 허탈하게 되뇌었다.

―겨우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다 부질없었단 말입니까.

“날 더 이상 기만하지 마.”

결국 북받치는 감정을 이겨 내지 못하고 눈이 뜨거워졌다. 참지 못한 눈물이 흘러내려 피를 닦아 내는 척 손등으로 문질러 지웠다. 숨겼던 내 나약함을 몽땅 엿봤을 그였지만 지금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지금은, 지금은 소중한 네 심장을 뜯어내서라도 벗어나야 한다.

“보내 줘.”

보내 달라는 말이 내 입 끝에서 떨어지자마자 거실에는 무시무시한 침묵이 감돌았다. 조정구도, 가드들도 숨 쉬는 것조차 잊고 휴대 전화에서 흘러나올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이를 악문 듯한 기하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날 놔줘.”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앵무새처럼 비슷한 말을 계속 주고받았다. 나는 계속 놓아 달라 말하고, 그는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의미 없는 소모전에 가뜩이나 지쳐 있는 정신이 힘겹게 늘어졌다.

“이런 짓을 해 놓고 들킬 줄 몰랐어?”

―…….

“들키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렇게 사육하려 했어? 우리에 집어넣고 밥을 주고 예뻐해 주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전…….

“기하야. 젠장……, 나는…… 나는 네 애완동물이 아니야.”

―…….

“나는 이렇겐 못 살아.”

깨진 유리가 밟히는 바닥을 내려 보았다. 저것을 집어 들어 그냥 동맥을 가를까……. 그럼 편해질까. 하지만 이미 몸을 가지고 하는 협박이 통하지 않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편해지기는커녕 내 동생의 손목에 줄 하나가 더 생길 뿐이다. 인질극을 벌인다면 인질은 내가 아니라 기하였다.

지끈거리는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지그시 감았다.

“보내 줘.”

―그럴 수 없다는 거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착각하지 마 이기하. 이건 부탁이 아니야.”

―…….

“보내 주지 않으면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네가 부르는 것에 일체 대답을 하지 않을 거다. 내 의지대로 살 수 없음을 알았으니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원하지도 않고 정말 가축처럼 살겠어.”

이게 본가의 악마들이 원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사랑을 갈구하던 너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 어차피 이미 닳아 빠져 망가진 몸뚱이, 갖고 놀든지 굴리든지 네 멋대로 하라고. ……다만 내 마음까지 가지진 못할 거야. 다신 네 목소리에 호응하는 일도, 네 손길에 기뻐할 일도 없을 거다. 네가 진짜 원하는 건 죽어도 못 가져.”

―형님……!

“널 없는 자 취급할 거야. 차라리 예전에 널 증오하던 내가 낫다고 생각될 만큼. 내 동생은 이날 이후로 죽었다고 생각할 거다. 네가 내 영혼을 죽이는 거야.”

다른 혈족들이 들었다면 말도 안 된다고 했을 이런 유치한 협박에 너는 동요했다. 버석거리는 목소리로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린다.

―그렇게까지 해서 또 버리겠다고?

“…….”

―……어떻게 그렇게 쉽지?

내게 하는 말이었지만 혼잣말에 가까운 어조였다. 그는 한참을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배신당한 건 누가 봐도 내 쪽이었는데, 너는 내가 네게 지독한 배신이라도 한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버려 버리시는군요. 어떻게 내 말을 들어 볼 생각도, 한번 재고할 생각도 없이 바로 떠나겠단 소리부터 입에 올립니까.

“…….”

―당신은 늘 그랬죠. 날 사랑하면서도 어떤 사소한 계기만 생기면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을 뿌리치고 떠났습니다. 버려진 사람이 어떤 상처를 받을지 뻔히 알면서 늘 그랬어.

알고 있는 힐난이었는데도 심장이 지끈거렸다.

―제가 괴물 같습니까? 날 이렇게 만든 게 당신입니다. 날 이렇게 내몬 게 형이라고. 당신은 죽어도 이런 마음을 알지 못하겠지. 알면 내게 결코 이럴 수 없어……. 내가 무슨 마음으로 너를 위해서…….

“…….”

―내가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했는지 알아볼 생각은 전혀 없습니까? 들어 줄 생각은 없어요? 왜 당신 동생이 미친놈이 돼야 했는지는 관심 없어요?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네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있을 너를 보지 않고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짓을 해도 혼자 감내하던 네게서 늘 진심을 듣고 싶어 했지만 그게 얄궂게도 오늘이 될 줄은 몰랐다.

―떠나지 않을 거라면서, 날 버리지 않을 거라면서. 또 거짓말이었어. 내게 했던 모든 약속을 지킨 적도 없는 당신이 날 비난할 자격이 있습니까? 같이 도망치자는 약속조차도 잊고 혼자 도망간 당신이……!

나도 잊지 않았어, 무심결에 튀어 나갈 뻔한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모른 체 해야 된다. 네 상처를 외면해야 내가 살 수 있다. 무표정하게 벼렸던 표정이 계속 무너질 것만 같았다.

아이가 애원하고 원망하고 종래엔 매달렸지만 나는 기계처럼 놔 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놔줘.”

―나한테 왜 이럽니까. 왜 날 자꾸…… 잔인하게 만들어요.

“……그만 놔줘.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 신뢰는 끝났다고.”

―날…… 사랑하시잖습니까.

날 사랑하시잖아요.

기하가 애절하게 토해 놓은 확신에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사랑. 우리 사이에 붙이기엔 너무도 로맨틱한 단어가 아닌가. 내가 아는 다른 자들의 사랑은 적어도 우리 같은 색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사랑은 이렇게 핏빛이 아니었다. 이렇게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혹자들은 사랑을 하면 행복해진다고 노래 불렀지만 내가 하고 있는 것은 하면 할수록 날 진창에 빠뜨렸다.

그러니 이것은 사랑이 아니어야 했다.

“……이건 사랑이 아니야.”

―…….

“……난 널…… 사랑한 적 없어.”

내 입에서 최종적으로 떨어진 파국 선언에 기하가 거칠게 신음했다. 수화기 너머로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요란하게 부서지는 굉음이 울렸다. 이제 도저히 감출 수 없게 흘러내리는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상처받는 것보다 상처 주는 게 더 아프구나. 서 있는 것도 버거워 주저앉을 것만 같다.

내게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아이가 보였던 표정을 애써 지웠다. 돌아오지 않을 애정을 속삭이면서도 기하는 행복해했다. 틀림없이 행복해하고 있었다. 또 동생의 감정을 모욕한 것을 외면했다. 날 둘러싼 세계가 가짜이듯 네 마음도 가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 초가 일 분, 한 시간처럼 여겨질 듯한 시간이 지나고 수화기에서 잡음이 아닌 기하의 숨소리만 들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래요.

물기 하나 없이 바스러질 것 같은 목소리로 그가 허가했다.

―가세요.

가라는 말보다 가지 말라는 어조에 가까워 받아들이지 못한 머리 대신 몸이 반응해 움직였다.

―열흘의 유예 기간을 드리겠습니다.

믿어지지 않았는지 보안 팀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놔줄 줄 알았던 것은 거기서 나 혼자뿐이었다. 내가 네게 약하듯 너 역시 내게 지독히 약하다. 내가 진심으로 날 파괴하려 든다면 넌 내게 져 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집안사람들은 내가 망가져도 상관없으니 박제하라 명하겠지만 오직 너만은 내가 망가지는 걸 원할 리 없었다.

―놔드리는 게 아닙니다. 열흘이 되기 전 제게 돌아오십시오. 형님의 발로 스스로 돌아와 주신다면 우리 사이는 예전과 똑같을 겁니다. 저도 지금까지와 똑같은 형님의 동생으로 남아 있을 거고요.

“내가…… 돌아오지 않겠다면?”

재고할 필요도 없다는 듯한 되물음에 기하가 씁쓸하게 웃었다. 한동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수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웃는 소리만 들리더니 결국 내가 원한 답이 아닌 그 아이다운 차분한 협박이 돌아왔다.

―제가 형님께서 기억하시는 것보다 조금 더…… 잔인해질지 모르겠습니다.

“…….”

―기억하십니까? 우리 숨바꼭질의 승자는 언제나 저였지요. 어디에 숨어 계시든 전 한 번도 형님을 찾지 못한 적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숨을 흘리듯 말꼬리를 흐리더니 이윽고 단호하게 예언했다.

―이번 역시 그럴 겁니다.

도망치기 전에 자신의 얼굴을 보고 가라 했던 기하의 말을 떠올리며 휴대 전화를 응시했다. 나를 너의 인형으로 만들려 했던 혈족들이 내게 마지막으로 베풀었던 시간인 열흘. 그것과 똑같은 시간을 네가 말하고 있었다.

일시적이지만 목줄이 풀렸다. 너는 예전처럼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 자신하고 자비를 베풀었겠지. 그렇게 날 교육시키고 길들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다. 네 바닥을 보았으니 이제 내 바닥을 보여 줄 차례야.

―열흘 뒤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열흘 뒤에 나는 영원히 네 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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