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7/47)

3

“L-112번 고객님 음료 나왔습니다.”

카페 안의 의자에 앉아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다 주문 번호를 부르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이라 다들 카페인을 충전하겠다고 주문한 사람들로 커다란 카페 안이 바글바글했다. 트레이 위에 내가 주문한 휘핑크림이 가득 얹어진 카페모카와 따로 또 주문한 휘핑크림만이 가득 담긴 컵 두 개가 놓여 있다. 주문 번호가 써진 종이를 건네고 트레이를 들었다.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제 음료 같습니다.”

누군가가 내 목에 두른 스카프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스카프가 풀려 버릴까 봐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가 당황했다.

“어, 어?”

“아.”

“박종오 씨.”

이렇게 바깥에서 만나니 어색해서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박종오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박사님.”

“종오 씨도 이 카페 이용했었구나. 맨날 일찍 와서 못 만났었나 보네요. 근데 이거 내가 주문한 건데.”

“112번이어서 제 건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도 112번인데?”

심드렁하게 내 손에 남은 영수증을 다시 들여다보고 민망해졌다. 분명 112인 줄 알았는데 내 번호가 121이었다. 번호를 대충 보기도 대충 본 거였지만 설마 다른 사람도 나처럼 휘핑만 한 컵 따로 또 시킬 줄은 몰랐기에 당연히 내 음료로 착각했다.

“내가 잘못 본 거네요. 미안합니다. 나랑 똑같이 시키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

트레이를 내밀었지만 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손가락에서 영수증을 빼 갔다.

“제가 이걸 마시면 되겠네요. 잘 마시겠습니다. 박사님.”

그러더니 몸을 돌려 픽업 장소로 걸어간다. 돌려줄 타이밍을 놓쳐 할 수 없이 카페 안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곧 몇 분 뒤 내 번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박종오가 트레이를 들고 자연스럽게 다시 곁으로 돌아왔다. 그와 내 쟁반 위가 짠 듯이 똑같아서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우리 같이 당 체크하러 가 봅시다. 종오 씨도 위험할 거 같은데.”

내 말뜻을 이해한 박종오가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별로 표정 변화가 없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첫인상 때문에 내가 오해한 듯싶다. 처음 제대로 대화를 했을 때 고모부에 대한 일로 껄끄러워져 대하기가 어려울 거라고 벽을 세우고 있기도 했었다. 한동안은 박종오의 그림자가 보이면 피하기도 했었고…….

“요새 연구소는 좀 다닐 만합니까?”

앞의 의자에 각을 잡고 앉아 있던 박종오는 내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닐 만합니다.”

예의상 해 본 물음에 나올 예의상 대답을 예상했던 나는 직설적인 그의 대답에 또 픽 웃어 버렸다. 꾸밀 줄을 모르는 남자였다. 이러니 김태영에게 붙여 줬을 때 불협화음이 나올 수밖에. 이 우직하기만 한 남자는 자기 때문에 사수 속이 터지고 있는 건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을 테지만.

“태영이가 잘해 주나 보네.”

“네 잘해 주십니다.”

이번에는 좀 반응도 빠르고 긍정적인 대답이다. 김태영이 정말 잘해 주나? 속으로 그놈이 웬일이지 생각하고 있자 박종오가 몇 마디 더 덧붙였다.

“제가 힘들까 봐 걱정하셔서 일을 전혀 안 시키십니다. 박사님 혼자만 고생하시고……. 전 아무거나 시켜도 상관없는데요. 같이 거들어 드린다고 해도 됐다고 하시고.”

아……, 그거 널 위해 그러는 게 아니야.

얼마 전 태영이 나한테 달려와서 했던 말들이 떠올라 쿨럭거렸다. 얘는 김태영이 자길 싫어해서 돕지 말라는 걸 자기 생각해서 그러는 줄 착각하나 보다.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듣고 농담을 농담으로 듣질 않아서 같이 일 못 해 먹겠다고 징징거리던데.

‘야 이기현. 박종오 쟤 이상해. 너 도로 데려가.’

일 잘한다고 칭찬한 걸 듣고 자기한테 붙여 달래서 붙여 줬더니 이번엔 데려가라고 난리였다.

‘빨리 데려가. 쟤 내 취향 아니야.’

어련하실까. 들은 척도 안 하고 작업을 계속했더니 옆에서 세상 서러운 목소리로 이른다.

‘내가 아까 박종오한테 ‘딸기가 실직하면 뭐라고 하게?’라고 개그 쳤거든? 그놈이 한참을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뭐라는 줄 아냐?’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겠지.’

개소리 좀 하지 마라, 하지 마. 중얼중얼대는 내 앞에서 짜증 났는지 들고 있던 장갑을 내팽개쳤다.

‘아니라고! 보통 그럴 때는 술이나 한잔하러 가시죠, 라고 하지 않냐고.’

‘맞는 말이잖아.’

‘처맞는 말이겠지! 아무튼 내가 빡쳐서 진지한 게 아니라 개그로 묻는 거라고 했거든. 그랬더니 또 뭐라는 줄 알아?’

이거 내가 어디까지 반응해 줘야 하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음……. 이번에야말로 개소리하지 말라고……?’

‘야 이 미친놈아 아니라고! 걔가 갑자기 날 되게 실망하는 눈으로 보더니 남의 불행을 가지고 개그로 물으면 안 된대. 나는 단지 딸기시럽이라는 개그를 한번 써먹어 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 자식이 날 쓰레기로 만들었어.’

‘너…… 이번에도 신입 내보내고 싶어서 그러냐?’

‘야. 네가 제대로 안 겪어 봐서 그래. 걔 진짜 이상하다니까?’

매사 진지한 박종오에게 그런 걸 물은 김태영이 잘못한 거였다. 태영은 쟤가 맘에 안 든다고 틈이 날 때마다 도로 데려가라며 난리를 쳤지만 그동안 태영이 치던 사소한 실수나 사고들을 박종오가 커버 쳐 주기 시작해 대단히 흡족한 상태였다. 일 잘하고 말귀를 잘 알아듣는……. 아니 김태영의 헛소리를 무시하며 심지어 튕겨 내기까지 하는 막 써먹기 좋은 신입이 흔하진 않잖아. 좀 찝찝하긴 했지만 나가지 않고 오래오래 같은 파트에 남아 있어 줬으면 좋겠다. 김태영이 일도 안 시킨다는데 스스로 할 일 찾아서 하는 모양이니 얼마나 기특해.

위에 올라가 있는 크림을 다 먹고 옆 잔의 휘핑을 추가했다. 박종오가 내 앞이라 그런지 커피를 마시지도 못하고 잔을 계속 쥐고만 있었다. 이제 슬슬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는데 먼저 일어난다고는 말 못 하고 앓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요령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만 갈까요?”

남은 커피도 입 안에 털어 넣고 묻자 반색하며 벌떡 일어난다. 날씨가 제법 더워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웠지만 나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조금 더 바짝 끌어 모양을 잡았다. 그리고 당연한 듯 뒤따르는 남자에게 물었다.

“차 가져왔습니까? 없으면 내 거 타고.”

“가져왔습니다.”

“그래요. 그럼 정문에서 봅시다.”

대충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주차했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방에서 차 키를 꺼내 누른 뒤 걸리는 시동 소리를 들으며 차 문을 열려던 때였다.

“제가 운전할까요?”

“……깜짝이야.”

간 줄 알았는데 박종오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옆에 서 있었다.

“왜 따라왔습니까?”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차 가져왔으면 박사님과 같이 가면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지만…… 차가 두 댄데 어떻게 같이 갑니까. 옆 도로에 나란히 서서 경주라도 해요?”

피식거리며 농을 걸었지만 박종오의 표정은 진지했다.

“경주는 다음에 하고 오늘은 제가 태워다 드리고 싶어서요. 제 차를 타고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마음이야 고맙긴 한데 나도 차가 있잖아요. 그럼 내 차는 누가 운전하나?”

얘가 갑자기 왜 태워주고 싶다고 우기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튼 되게 이상한 매너를 배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박종오는 들고 있던 휴대 전화를 몇 번 터치하더니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밑도 끝도 없이 여기 주소를 부르고 내 차 번호를 말했다. 뭐 하는지 물을 새도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내 차 번호는 왜요? 지금 건 전화는 뭡니까?”

그는 천진하게 입을 열었다.

“대리운전 불렀습니다.”

“…….”

“박사님께서 차는 누가 운전하냐고 하셔서……. 이러면 해결되잖습니까.”

‘네가 제대로 안 겪어 봐서 그래. 걔 진짜 이상하다니까?’

태영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 * *

진짜 이상한 놈.

저거 진짜 어딘가 이상한 놈이 틀림없어.

카페에서 연구소까지 전속력으로 밟아 15분이면 찍는 거리를 그 빌어먹을 대리 운전기사를 기다리느라 10분 이상을 허비하고, 어어 하며 휩쓸리다 정신 차려 보니 나는 대리 기사에게 차 키를 넘긴 뒤 박종오의 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좀 전에는 연구소에 주차시켜 달라는 주문을 듣고 우리 뒤에 출발했던 내 차가, 박종오의 차를 추월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박종오는 운전 습관까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모든 교통 법규를 너무 심하게 수호하면서 가는 바람에 신호란 신호엔 다 걸렸고 결국 지금은 20분째 도로 위에 정체 중이었다. 마침 근처 회사들 출근 시간과 맞물려 환상적인 콜라보로 네 번째 우리 쪽 신호가 켜졌음에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계속 같은 도로 위라는 건 덤이다.

대리 기사를 불렀다는 소리를 했을 때부터 내 표정이 망가지기 시작했는지 박종오는 계속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사실 이제 슬슬 단 커피로 인한 각성 효과가 떨어지는 중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본인도 불안한지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풀 죽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둘이서 쌍으로 한 30분 이상 늦을 것 같다. 톡톡, 짜증을 참으려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콘솔 박스를 계속해서 두드렸다. 왜 기하가 화가 날 때마다 손가락으로 뭘 두드리나 했더니 이래서였나 보다.

“박사님.”

“됐습니다. 어쩔 수 없지.”

속이 터져서 할 말은 많긴 했지만 저놈이 이상한 놈인걸 알게 됐으니 말을 안 섞는 게 상책이었다. 말을 섞으면 아마 더 속이 터질 말을 꺼내서 내 속을 더더더더 터지게 만들 게 분명하다. 참아야 했다. 좀 아까만 해도 착한 신입이라고 생각했지 않은가. 내 성질머리를 고대로 보여 주면 놀래서 퇴사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 내 밑에 안 붙이고 김태영한테로 붙여 놓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틀림없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어딘가가 미묘하게 핀트가 나가 있었다. 엉뚱해도 정도가 있지. 하여튼 우리 집안 놈들은 하나같이 다―.

거기까지 사고가 진행되자 눌러놨던 성질이 기어코 폭발했다.

“아니 근데 박종오 씨는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서 나랑 같은 차를 타고 가야 했습니까? 예? 나는 출근 차 같이 타자고 대리 부르는 새…… 아니 사람은 또 처음 봤네?”

내가 짜증을 버럭 내자 그가 물끄러미 얼굴을 쳐다보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뭐 하는 건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그의 손이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벌려진 안에는 각종 초콜릿과 과자 같은 게 가득 차 있었다.

“좀 드시면서 가세요. 박사님.”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뭐 하자는 겁니까? 이게.”

“아침 못 드셨을 거 같아서요.”

“못 먹은 게 아니라 안 먹은 겁니다. 그리고 내 질문은 왜 무시합니까?”

“무시한 적 없습니다.”

“근데 왜 대답을 안 해요? 나랑 왜 이렇게까지 같은 차를 타야 했냐고 물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여 드린 건데요. 그거.”

“이거. 뭐?”

내 날카로운 목소리에 그가 천천히,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 카페서 뵈었을 때 얼굴이 수척하시기에 뭐라도 드셔야 할 거 같았는데 카페에서도 커피만 시키셨지 않습니까. 다른 거 사 오기엔 출근 시간 때문에 애매해서 이거라도 드셨음 싶어서요.”

“뭐라고요?”

“왜 대리를 불러 가면서까지 같이 가야 했느냐고 물으신 것에 대한 답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가 굶은 듯해서 이것들을 먹이려고 같이 가고 싶었단 소리다. 카페에서 그리 미적거리며 커피 마시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것도, 얼른 가고 싶어서 꿈지럭거린 게 아니라 뭐 다른 걸 사 와도 될 시간인가 고민을 하고 있었단 거고.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는데 내 생각해서 그랬다니 정말이지 말이 안 나왔다. 진짜 괴상망측한 방향으로 매너를 장착한 남자였다. 이건 뭐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죽어도 진심으로 고맙단 소리는 안 나올 거 같아 그냥 말없이 과자 봉지를 뜯자 그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출근 시간은 진작 30분을 훌쩍 넘기고 있다. 도로 꼴을 보니 한 시간 정도 지각하면 그나마 다행일 기세다. 아, 옆의 놈이 교통 법규를 살짝이라도 어겨 준다는 전제하에.

“요새.”

차 안에 부스럭거리며 내가 과자를 먹는 소리만 들려 라디오라도 켜자고 하려던 참에 타이밍 좋게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한동안 연구소에 모습이 안 보이시기에…… 걱정했었습니다.”

“출장이었어요. 김태영이 말해 주지 않았나?”

비식이며 대꾸하곤 초콜릿을 고르려 글로브 박스를 뒤졌다. 처음 커피에 각설탕을 쏟아붓는 걸 봤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남자가 취향만큼은 나와 판박이라 하나같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뿐이었다.

“말해 주셨습니다.”

“들었다면서 뭘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나.”

포장을 깐 초콜릿을 입에 집어넣으며 쓰레기를 박스 안에 그대로 쑤셔 넣었다. 남은 초콜릿보다 쓰레기의 양이 더 많아졌을 때 휘저어진 초콜릿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하얀 종이가 보였다. 무시하고 다음 초콜릿을 집다 이상하게 대단히 낯익은 느낌에 다시 눈을 돌렸다. 순간 먹는 것도 멈추고 본능적으로 그것을 잡아 들었다.

옆자리의 박종오가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 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에 딸려 올라오는 것은 종이접기였다. 잘 접어 놓고 심장 부근을 억지로 동그랗게 뜯어낸, 뾰족한 귀를 가진 여우 모양의 종이접기.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뚫린 심장에 작은 열쇠가 키링처럼 매달려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이것은 원승호가 사료를 건네줄 때 내게 접어 줬던 것이었다. 당황해서 들고 있는 채로 박종오를 향해 흔들어 보였다.

“이거, 어디서 났습니까?”

“제 은사님이 주셨습니다.”

“은사님?”

우리 집안사람이 원승호를 은사라고 부르는 걸 듣게 될 줄은 몰라 놀란 눈으로 손안의 종이접기를 도로 들여다보았다. 다시 살펴본 것은 내가 가진 것보다 낡았지만 두꺼운 재질로 더 깔끔하게 접힌 여우였다. 이건 내 것이 아니었다. 원승호가 자신의 사람에게 준 거였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눈치챈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설마 당신이, 내 주머니 속에 전화번호를 넣어 두고 간 사람이었습니까?”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 옛날, 외투 주머니에서 발견한 종잇조각은 나를 죽음이 아닌 원승호에게로 이끌었다. 그 당시 여유라고는 없던 나는 전화번호에만 집중했을 뿐이지 누가 내게 이런 위험을 감수한 호의를 베풀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박종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날 보는 눈을 거두지 않았다. 우리가 수 초간 서로를 응시하는 동안 신호가 바뀌어 뒤에 서 있던 차가 경적을 울렸다. 그가 차분하게 기어를 올리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체가 점점 속도를 받는 걸 느끼며 혼란스러운 입을 열었다.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습니까?”

“박사님께서 물어보지 않으셨으니까요.”

그건 그랬지. 번호를 넣은 건 고용인 중 한 명일 줄 알았던 데다 얼마 전까지도 박종오는 내게 존재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랬던 자가 날 해방시키려 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니.

“그럼 그 은사님이란 분이 이걸 준 이유가 뭡니까?”

“박사님께서 만족하신다면 몰라도 원하시는 삶을 사시는 게 아니라면 드리라고 했습니다.”

“내게 주라고 했다고요? 근데 왜 주지 않고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는 내 물음에 입술을 달싹이다 꾹 다물었다. 말하기 싫어할 때 나오는 버릇 같았다. 내가 한 번 더 대답을 강요하자 한숨을 쉬며 뜸을 들이더니 마지못해 털어놓는다.

“예전에도 박사님께서 삶에 만족하시는 게 아니면 그 종이접기를 전해 주라고 했었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서럽게 우시는 걸 보며 드려야겠다고 생각했고요.”

“…….”

“뭐가 쓰여 있나 궁금해서 드리기 전 몰래 종이접기를 펼쳐 봤었습니다. 전해 드리라곤 했지만 보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으니까요. 쪽지 안엔 은사님의 번호와 힘들면 연락 바란다는 말이 쓰여 있었지요.”

내가 주머니에서 발견했던 종이는 꾸깃하게 구겨져 있었다. 종이접기가 펼쳐져 있어서 그랬던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는데 그래서였구나. 그때 나는 갓 중학생이었을 박종오가 내 곁을 맴도는 것을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었다.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해서 전한 거였습니다. 숨어 우시는 걸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좀 울컥한 목소리를 냈다. 남자의 달라진 분위기에 놀라 옆 좌석을 바라보자 도로 한복판에서 차를 세우다시피 속도를 줄이고는 마주 본다. 놀란 뒤차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며 우리 차를 지나쳐 갔다. 비릿하게 느껴지는 검은 눈동자는 담담한 박종오의 얼굴에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았다. 다른 것은 다 무기물의 기계 같은데 눈만은 동물의 것을 붙여 둔 듯 날것의 느낌을 내고 있었다.

“제가 그걸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께서 도망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붙여 준 가드들을 따돌리고 잠적하셨다고……. 저는 결코 도망가길 원해서 준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서 했던 일이었는데.”

“잠깐만. 위험하게 도로 한복판에서 지금 뭐 하는…….”

“제가 볼 수 있는 곳에서 행복하시길 바랐습니다. 볼 수도 없는 곳에서 행복한 건 원치 않았습니다. 차라리 그러면 불행한 것이 낫지요.”

한번 시작하니 둑이 터진 것처럼 말을 쏟아 낸다. 그의 말에 기가 차서 이름을 불렀지만 박종오는 들리지 않는 듯 하고픈 말을 계속했다.

“은사님이 한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어머님께 제가 했던 일과 봤던 번호를 알렸었습니다. 당신이 제가 한 일 때문에 떠났다고요.”

“……지금 뭐라고요?”

“어머님은 신께서 알게 되시면 살아남지 못할 거라며 한동안 저를 집 안에 가뒀습니다. 저도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대로 다신 볼 수 없을까 봐 심부름을 한 것을 후회하고 후회했습니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당신께선 보름이 되던 날 돌아오셨죠.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다친 데 하나 없이 무사히 돌아오신 모습을 보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남자의 자백에 입이 떡 벌어졌다. 처음부터 이 차에 타는 게 꺼림칙하더라니, 우리 집안 놈 아니랄까 봐 이 자식도 훌륭하게 미친놈이었다. 이놈 말대로라면 내가 그때 빠르게 붙잡힌 것도 이놈 탓일 거다. 고모가 원승호의 존재를 알게 된 시점에서 기하의 진음을 받았다면 자백제를 쓴 것같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술술 토해 냈을 것이다.

“또다시 이걸 전하게 되면 다시 당신을 볼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전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 탓이라니…… 기가 막혀서……. 그때 날 엿 먹인 게 그쪽이었단 말입니까?”

“…….”

“어쩐지 집안 놈들이 쉽게 따라왔다 싶더라니…….”

꼬리가 밟히게 행동하긴커녕 출국이 불가능한 걸 확인하자마자 집 안에만 박혀 있었음에도 놀랍도록 빠르게 찾아낸 게 신기하긴 했다.

“내 행복을 빌어 준다는 개소릴 할 게 아니라 얌전히 입 다물고 있었으면 알아서 행복해졌을 겁니다. 그쪽이 내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압니까?”

“섬기는 분이 잘못될 걸 뻔히 알면서 입 다물고 있을 순 없었습니다. 종자로서 지켜야 하는 것이 사명이었기 때문에.”

변명을 내뱉는 그의 평온한 어조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고자질을 했다고?”

“…….”

“참 대단한 사명이네. 덕분에 나는 평생 네가 섬기는 분께 매였습니다. 댁 같은 자들 때문에 지금도 내가 자의로 내 동생 곁에 있는 건지 아님 억지로 있는 건지 가늠이 안 돼. 내 애정을 신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켜 더럽히는 게 당신네들이라고. 그래 놓고 날 위하는 거라고? 내 행복? 개 같은 소리!”

빠아앙!

도로 중간에 서 있는 우리를 보고 지나치는 차마다 클랙슨을 울리며 욕설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내린 채 손가락질을 하는 운전자들을 보며 나는 그가 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상이 불손하다든지 신을 모욕했다는 적반하장의 받아침을 기다렸으나 그에게서 나온 말은 엉뚱한 그답게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제가 섬기는 분은 가주님이 아닙니다. 박사님.”

조심스레 종이접기를 쥔 손을 향해 팔을 뻗는다. 그가 빼앗아 갈 것이라 생각해 꽉 움켜쥐었지만 박종오는 오히려 쥐고 있는 손에 자신의 손바닥을 포개 더 세게 쥐어 줄 뿐이었다.

“전 당신의 종자입니다. 기현 님. 제 주인은 당신이십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그랬고.”

“…….”

“멀어져 있을 때도 단 한 순간도 섬기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손안의 피부에 파고드는 차가운 열쇠의 질감을 느끼며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일그러져 있을 내 표정과는 달리 그는 폭탄 같은 말을 꺼내 놓고도 여전히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치미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는 나를 보며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아버지의 일도 있었으니 제가 이러는 게 기분 나쁘시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박사님.

소름 끼쳐 그 길로 당장 차 문을 열라고 윽박질러 빠져나온 후 뒤에 오고 있던 택시를 잡아 연구소로 들어왔다. 대체 저 미친놈이 무슨 꿍꿍이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조용히 내 뒤를 뒤따르는 걸 알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도착하자마자 책상 위를 뒤졌다. 한참을 찾아 헤맸지만 원승호한테 받았던 종이접기가 보이질 않는다. 책장과 개인 캐비닛까지 샅샅이 뒤집어엎어도 찾을 수 없었다. 서류 정리하며 파쇄하다 딸려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얼핏 보면 그냥 종이 쓰레기에 불과했으니 청소하는 분들이 서류 위에 아무렇게나 올라가 있는 걸 보고 버렸을지도 모른다.

허탈해졌다. 단순히 다루지 말고 한번 펼쳐라도 볼 것을. 종이접기 안에 무언가가 쓰여 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원승호 씨가 언질해 주고 가지도 않았는데.

결국 내가 받았던 것은 찾지 못하고 대신 박종오의 차 안에서 가지고 나온 종이접기를 펼쳐 보았다. 낡고 헤져 꾸깃한 종이 안에는 가지런한 글씨체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역 이름이 쓰여 있었다. 휴대 전화를 꺼내 역 이름을 검색해 보니 차로 달려서 세 시간은 가야 하는 곳의 지명이 나왔다. 심장이 있던 자리에 달린 것은 역에 비치된 사물함의 열쇠인 듯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으면 주라고?

그 비슷한 말을 원승호 씨도 했었다. 내 앞에 여권을 놓아 주면서. 도망은 행복을 찾아 주긴커녕 트리거가 되어 기하에게 고칠 수 없는 분리 불안 장애만을 안기고 지독한 집착을 시작하게 만들어 버렸지만.

이번에도 이건 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물품이 아니라 불행의 전초가 될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겨우 기하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겨우 내려놓고 조금 평온해졌는데, 관계를 망치게 만들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이제 두 번 다시 도망가시지 못하는 도련님께 제가 해 드릴 건 이런 잔심부름밖에 없겠군요.’

‘왜…… 두 번 다시는 도망가지 못한다고 단정 지으시는 겁니까?’

내가 도망가지 못할 거라 단언하는 원승호의 말에 괜히 울컥했었다. 너는 이제 끝났구나 하고 조롱하는 것만 같아서. 그렇게 말해 놓고 뒤에선 박종오를 조종해 이런 것을 건네주려 한 사내의 저의가 궁금했다. 그때 내가 원승호의 발언에 기묘한 적대감을 느꼈던 것은 남자가 나를 도발하고 있었던 것을 본능적으로 느껴서였을지 모른다. 원승호는 어떻게든 날 도망가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그리 생각했다.

내 행복이 목적인 게 아니라 그저 도망시키는 게 목적인 것처럼.

나는 달달한 게 좋다. 입 안이 썩어들어 갈 만치 달수록 좋았다. 한번 맛본 달콤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잠겨 죽을지언정 스스로 꿀 독 안에 빠지는 벌레의 심정이 이런 걸까. 손안의 열쇠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결국 바지 안으로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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