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6/47)

2

매년 강수량이 증가한다더니 이젠 정말 나라가 우기라도 맞은 것처럼 며칠간 쉬지 않고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지대가 낮은 곳은 침수되었다고도 하고 기상청에 의하면 못해도 한 주간은 계속해서 이렇게 내린다 해서 슬슬 본가의 꽃들이 걱정되던 참이다.

지붕이 돔 형태인 식물 연구소는 장마철만 되면 유리 지붕 중앙을 개방해서 빗줄기가 폭포수같이 연구소 중앙을 관통하며 떨어지게 만든 구조였다. 개방되어 있는 유리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고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물줄기가 쏟아지는 1층을 번갈아 구경했다.

“미안, 오래 기다렸어?”

태영이 성큼성큼 옆에 다가왔다.

“비 장난 아니게 오지? 소리 한번 굉장하다.”

“그러게. 이렇게 많이 오는 건 어릴 때 빼곤 오랜만이네.”

그와 1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유리 물기둥이 에스컬레이터 바로 옆이었기에 물이 쏟아지는 요란한 소리가 더욱 크게 귀를 울렸다.

“홍수라도 나게 생겼다니까.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방주라도 건설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뭐, 노아라도 되시겠다?”

“응. 나는 방주를 지으면 여자분들만 골라서 태울 거야.”

하렘을 차려야지, 그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방주가 있다 한들 너같이 신실하지 못한 교인이 만든 게 물에 뜨겠냐? 두 발이 다 배 위에 올라가기도 전에 가라앉을 거라는 데 내 손모가지를 건다.”

“무슨 소리야. 우리처럼 아예 실체화된 진짜 신을 모시는 독실한 교인들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리고 너 한번 잘렸던 손모가지라고 쉽게 건다?”

내 자해 흔적을 농으로 삼는 것도 역시나 김태영밖에 없을 거다. 결국 나도 그 실없는 농담에 동참해 웃어 버렸다.

“너 실수라도 우리 집안사람들 앞에서 그런 소린 하지도 마라. 혹시라도 기하 귀에 들어갈까 무섭다.”

막 외근을 마치고 들어오는 다른 파트 동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의 바짓단이 온통 젖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나저나 이 날씨에 꼭 나가야겠냐.”

“어쩌냐 그럼. 돌잔치가 내일인데 빈손으로 갈 순 없잖아.”

태영이 유아용품점에 혼자 가기 싫대서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서는 길이었지만 비 내리는 걸 보니 가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진다. 녀석에게는 그동안 워낙 신세를 많이 졌기에 거절할 명분이 없어 뒤쫓으며 한숨을 쉬었다.

연구소 근처에는 선물을 살 만한 큰 유아용품점이 없어 길을 헤매다 근처에 있다는 백화점에 가기로 하고 차를 돌렸다. 괜히 동승했다가 만에 하나라도 사고가 났을 때의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다며 내 차로 이동 중이었다. 내내 운전 한번 더럽게 한다며 잔소리하는 김태영과 옥신각신하며 겨우 도착해 백화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너 담부터 내 차 타지 마.”

“와 여기 진짜 크네. 우와 젠장 기현아 이거 봐! 신발 진짜 쪼그매! 이런 게 발에 들어갈까? 장난감 아냐?”

옆에서 짜증 부리는 내 말은 무시하고 김태영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벌써 점원한테 달라붙어서 조카 사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렇게 생긴 애한테 입힐 옷을 추천받는다느니, 돌 지난 애한테는 뭘 사서 줘야 하냐고 신나서 묻는 게 꼭 자기 애가 생겨 좋아 죽으려는 새내기 아빠같이 보였다. 애는 고사하고 현재 애인도 없다는 놈이 그러는 게 웃기기도 해서 쳐다보다 꽤나 오래 나를 응시한 듯한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녀석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던 거다.

그가 웃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안타깝고 답답하고…… 묘한 기분. 나야 제물의 신분이니 평생 가정을 이룰 수 있을 턱이 없고 그럴 생각조차 없으니 내 아이를 위한 것을 사러 오지 못하겠지만 다음에 나 역시 조카를 위한 선물을 고를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과연 내가 그때 김태영처럼 행복한 얼굴을 할 수 있을까? 조카 사진을 자랑할 수 있기는커녕 감히 그 아이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자격이나 될는지.

“뭐 하고 있어? 너도 와서 골라 달라니까.”

손가락 길이만 한 신발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보고 김태영이 빨리 오라며 재촉했다.

“내가 센스가 없는 편이라고 어디 사는 누가 하도 난리셨어서 감히 고를 수가 없네.”

“하여간 뒤끝 장난 아니야.”

우리가 입씨름하면서 뭔지 모를 것들을 카트에 대충 집어넣자 옆에 대기하고 있던 점원의 얼굴이 뭐라 말할 수 없이 미묘해졌다.

“이거랑 이거 중 뭐가 더 나은 거 같냐? 왜 내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지?”

“난 이게 더 나은 거 같은데.”

그가 집어 든 평범한 무늬의 옷을 무시하고 아주 화려한 드레스 형태의 옷을 건네자 김태영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내가 조카가 아들이라는 얘기를 안 했나? 사진 안 봤어?”

“흠……. 아들……이라고 꼭 바지만 입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아니 그렇긴 해도 이건 좀. 바지가 아닌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레이스가 안 달린 부분이 없는데?”

“너 그렇게 패션에 꽉 막힌 놈 아니잖아. 애일 때 이런 걸 입혀 봐야지. 커서는 못 입을 거 아냐.”

“오…… 나름 일리 있어.”

내 조카가 이런 옷을 소화할 수 있을까, 중얼거리면서도 내가 고른 옷을 카트에 집어넣는다. 그 외에도 손에 잡히는 특이한 것은 죄다 쓸어 담아 카트에 물품이 산처럼 쌓였을 때에야 겨우 우리의 쇼핑이 끝났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김태영이 점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숍을 나왔을 때 나는 옆의 매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뭐 더 살 거 있어?”

“그냥 구경 좀.”

“같이 와 준 김에 사고 싶은 게 있으면 골라 줄게.”

“됐어.”

“왜? 돈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그냥 보지 말고 다 사 버리지.”

내가 쓰고 있는 모든 물품을 기하가 선물해 주는 바람에 식비 외에 모든 돈이 세이브 됨을 알고 있는 김태영이었다. 돈은 부족하긴커녕 내 선에서 사고 싶은 건 전부 살 수 있을 정도로 모여 있었다. 월급의 절반 이상을 선물 받은 것의 지출이라며 동생 편에 보내고도 다른 곳에 돈을 쓰질 않으니 계좌는 언제나 풍족한 상태다. 돈을 번다고 해도 막상 내가 쓰고 싶은 곳에는 쓸 수가 없어 쓰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느껴 보질 못했다.

“사실 뭘 사야 할지 모르겠어. 전부 다 가지고 있을 사람한테는 뭘 사 줘야 기뻐하지?”

조카에게 줄 선물을 고르며 기뻐하지 못한다면 기하에게 주는 선물을 고르면서 기뻐할 수 있는 감정이라도 가지면 좋을 텐데 그마저도 내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김태영은 내가 누구에게 선물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차리고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런 걸 고민하냐. 가주께서는 네가 신다 버린 양말을 선물한다 해도 좋아하실 분인데.”

“나한테는 매번 좋은 것만 주는데 어떻게 그래.”

“인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남들한테 하듯이 쿠키라든지…… 뭐 케이크라든지 간단한 거라도 일단 드려 봐. 네가 주는 거라면 무조건 기뻐하실걸?”

“기하는 나랑 입맛이 완전 정반대거든. 내가 고르는 건 아마 걔한테는 벌칙 게임이나 다름없을 거라고.”

듣고 보니 자기가 생각해도 그랬는지 김태영이 입을 다물었다. 기하가 즐겨 마시는 차 종류 같은 걸 알아내서 선물로 해 주면 더할 나위 없이 간단하고 좋긴 하겠지만 그가 마시는 것은 하필 듣도 보도 못한 특이한 찻잎이었다. 아주 희귀해서 돈을 주고도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 그동안은 대체 무슨 선물을 했었는데? 가장 최근에 뭘 줬어?”

“최근이라고 해 봤자……. 제일 마지막에 선물해 봤던 게 십 년도 더 전 일이네. 그때는 네 말대로 아무거나 다 줬었어. 기하가 어렸었으니까.”

“뭐라고? 십 년?”

너도 지독하다는 표정을 하는 태영을 쳐다보다 씁쓸하게 웃었다. 가벼운 선물이야 대중없이 줬었지만 어릴 때 나는 기하의 생일마다 찻잔 선물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번에는 찻잔이 아닌 다른 것도 한번 선물해 보고 싶었다. 내가 줬던 찻잔 하나하나 흠 없이 관리하다 장을 짜서 정성스럽게 보관해 뒀던 기하의 성격을 봐서라도, 기왕이면 기하가 진심으로 좋아할 만한 것을 골라야 했다. 쓰지도 못하고 처박힐 물건을 사기 위해 그 아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을 하러 올 순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네가 선물로 준다면 가주께서 엄청나게 기뻐하실 만한 것이 딱 한 가지 있긴 한데 말이야…….”

“그래? 뭔데?”

반색하며 묻자 고개를 젓는다.

“그건 좀 나중에 사야 할 것 같고 일단은 선물 초보니까 남자가 제일 많이 하는 넥타이나 지갑이라든지, 구두나 시계 같은 거부터 사 보자고.”

“그런데 기하는 넥타이를 잘 하지 않는 편이거든. 집 안에서는 외부 손님이 오시지 않는 한은 거의 가운 차림이니까. 지갑 역시 줬다간 밖에도 나갈 수 없는데 놀리는 꼴이 되어 버릴 거고. 구두도 거의 신지 않으니 줘도 의미가 없을 테고 시계는…….”

하나씩 소거해 나가다 시계가 남았다. 시계만은 차고 있는 것을 자주 본 적 있었다. 아니, 아예 기하가 유일하게 몸에 걸치는 액세서리가 바로 시계였다. 복장에 상관없이 집 안에서도 계속 쓸 수 있는 물품이기도 했고.

“시계 괜찮네. 다른 거 생각할 것 없이 그걸로 해야겠어.”

결정을 내리고 바로 명품관으로 들어갔다. 곧 직원들이 섬세한 설명을 곁들이며 곁에 붙어 시계를 하나하나 보여 주었지만 딱히 눈에 차는 것이 없었다. 추천해 주는 시계들을 둘러봐도 감흥이 일어나질 않는다. 전부 다 돌아다녀도 맘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해 마지막 남은 브랜드로 들어갔다.

“잘 모르겠지?”

“그러네.”

기하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의 손목에 채웠을 때 어울릴 만한 시계를 상상했지만 그의 격이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만한 디자인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기왕이면 내가 차고 있는 것과 같이 문 페이즈 시계를 사고 싶어서 헤드를 한정 지으면 다음에는 색이 걸렸다. 신을 생각한다면 차가운 메탈 밴드가 어울리는 은색 바디가 좋을 것 같았지만 또 기하를 생각하면 메탈보다는 따뜻한 느낌의 검은 스트랩이 어울리는 금색 바디를 끼워 주고 싶기도 해서 뭐 하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앞에 놓이는 시계만 늘어났다.

먹어서 사라져 버릴 것을 고를 때에는 쉬웠는데 항상 지녀 주길 바라는 물건을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대상이 소중한 사람이면 더더욱. 직원이 내 요청에 최대한 원하는 시계를 꺼내 보여 줬지만 끝까지 끌리는 것이 없었다.

“기현아. 완벽한 시계를 산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적당한 것을 골라. 선물 하나 하는데 이렇게 고민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기왕 주는 거 내 마음에도 들고 동생한테도 어울리는 걸 주는 게 좋잖아?”

“글쎄 어차피 네가 뭘 주든지 상관없이 그분께선 기뻐하실 거라니까. 삑삑 소리 나는 플라스틱 캐릭터 시계를 줘도 좋아하면서 차실 거라고.”

저게 그냥 던지는 농이 아니라 정말로 기하라면 그럴 것 같아서 픽 웃음이 나왔다.

“어째 네 비웃음을 듣다 보니 더 완벽한 시계를 골라야겠다는 사명감이 드네.”

“고집부리지 말고 적당한 걸 고르라니까 그러네. 이러다가 저녁도 못 먹고 폐점 시간 다 되게 생겼다고.”

“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그래. 멀리 나온 김에 좋은 것 좀 먹으러 가자더니 오늘 내로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김태영이 우는소리를 냈다. 미안하다며 그냥 그중에 그나마 제일 눈길이 갔던 디자인을 사자 싶어 앞의 여직원을 불렀을 때였다.

“괜찮습니다. 폐점 시간이야 늘려 드릴 테니 느긋하게 고르셔도 됩니다.”

우리 대화를 들었는지 아까부터 내 옆에 가까이 서 있던 직원이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아, 그래도 됩니까? 감사합니다.”

여기 명품관은 개인한테 그런 서비스도 가능하구나. 감탄하며 옆쪽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다시 고른 시계를 가리키는데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어라. 최근에 분명 저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옆에 선 직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얼어붙었다.

“…….”

방금 내게 말을 걸었던 직원, 아니 직원인 줄 알았던 남자는 오해가 무색하리만치 명품관 직원과는 전혀 다른 세퍼레이츠 차림을 하고 있었다. 차갑고 거만한 인상이지만 지금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싱글거리고 있다.

기가 막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살면서 한 번 정돈 마주칠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말없이 바라보는 내게 고개를 까딱이며 먼저 인사를 해 왔다. 여전히 입에 걸린 웃음은 지우지 않은 채였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도저히 모른 체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아는 척을 하며 입을 열었다.

“……강준형 씨.”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떨떠름하게 건넨 인사에 강준형이 어울리지 않게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내 이름 부르는 목소리 듣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혹시 이름을 잊으셔서 못 부르시나 싶어 서운할 뻔했습니다.”

잊었던 거라면 정말 좋겠지. 근데 빌어먹게도 이 남자는 얼굴도 기억하고 이름도 기억하는 데다가 한술 더 떠 환장하게도 번호마저 기억하고 있는 상대였다. 평생 잊어버리지도 못하게 타인 중에서는 가장 최악의 첫인상을 선사했던 남자.

지금만큼은 표정 관리를 더럽게 못하는 장점을 발휘해서 마음껏 인상을 구겼다. 더러운 인상을 보고 좀 알아서 피해 가라는 뜻이었지만 강준형의 입가엔 오히려 미소가 더 깊어졌다.

아, 맞다. 이 남자는 이러면 더 불타오르는 스타일이었지.

“오랜만입니다. 이기현 씨. 보고 싶었어요.”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같은 물음을 두 번째 던지자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재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새카만 명함을 한 장 꺼내서 건넨다.

“알고 들르신 건가 했는데 역시 그건 아니었군요. 제 첫인상이 안 좋긴 안 좋았나 봅니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며, 앞에 내밀어진 것을 보고도 받지 않자 직접 손을 잡고 건네주려 들어 얼른 손가락 사이에서 명함을 빼냈다. 강준형은 내가 명함을 들여다볼 때까지 지켜보다 끝내 볼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짓궂은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첫인상 점수가 빵점이었으니 안 한 걸로 치고, 다시 인사하지요.”

“…….”

“반갑습니다. KNG백화점 사장 강준형입니다.”

눈살을 찌푸렸더니 그가 내 표정을 구경하며 놀리듯 안내원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다음 말을 이었다.

“저희 백화점에 오신 고객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 *

강준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안의 명함을 꾸깃하게 구겼다. 저희 백화점이라고? 이렇게까지 멀리 나올 일이 없어 여기가 그의 것인지도 몰랐다. 나를 내려다보며 빙글빙글 웃는 그의 낯에 짜증이 치솟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요?”

“뭐 기현 씨를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내 영역에서 당신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거 정말 기쁘네요.”

그의 영역. 그 말이 비릿하게 들려 입꼬리를 비틀었다. 기하의 체면을 생각해 지금 당장 무시하고 돌아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내리눌렀다.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몸소 이런 데까지 와서 일일이 고객 응대를 하는 걸 보면 경기 불황을 직격탄으로 맞았나 봅니다. 고생 많으십니다. 강준형 씨.”

“하하, 아무리 바빠도 얼굴 한번 뵙기 힘든 귀한 분이 오셨는데 응당 직접 모셔야지요.”

“한번 보기 힘들긴요. 용건 없는 사이인 거치고는 불필요하게 자주 마주치는 편 같습니다만.”

“용건이 없는 사이라니 너무하네. 나는 기현 씨한테 볼일이 대단히 많은 사람인데요.”

“제 용건은 끝난 지 오래입니다. 그럼 이만 수고하십시오.”

머리를 숙여 보이고 뒤로 물러나는 내 앞을 그가 요령 좋게 가로막았다.

“뭘 그렇게 퍽퍽하게 굽니까. 약속도 잡지 않았는데 두 번이나 만난 인연이라면 인사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든가, 그동안 잘 지내셨냐라든가 건넬 말은 많잖아요?”

“제가 그렇게 일반적으로 살갑게 구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그쪽과 그런 인사를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저런. 혹시 그때 내가 말을 안 들은 걸로 아직도 화나 있나요?”

강준형이 불쌍한 척을 하며 눈꼬리를 선량하게 접어 보였다. 몸이 가까워지고 그가 쓰는 인공적이고 자극적인 향수의 향이 예민한 후각을 자극했다. 향뿐만 아니라 은근히 돌려 가며 말을 낮추는 것도, 놀리는 듯 들떠 있는 억양도 거슬린다. 모르는 사이로 만났으면 괜찮다고 느꼈을 잘생긴 마스크마저 재수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그 통화 때 말을 듣지 않은 건 기현 씨도 피차 마찬가지였잖아요. 아니지. 기현 씨가 나한테 더 잘못하지 않았나? 사람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자기 용건 끝났다고 그냥 매몰차게 끊어 버리질 않나, 그 뒤로 계속 연락을 취해 보려고 노력했는데도 무시했지 않습니까.”

“아…… 연락했었나요? 몰랐습니다. 제가 워낙 바빠서 개인적으로 연락 오는 것은 애초에 잘 받지 않는 편이라.”

“아아, 바쁘셔서 하루에 네다섯 번은 떠 있었을 부재중도 무시하셨다? 보통은 그렇게 며칠째 계속 연락이 찍혀 있다면 한 번쯤은 다시 걸어 볼 만도 한데 말이지.”

“그렇게 일반적으로 상식적인 성격도 아니라서요. 그런 걸 기대하고 있음 안 될 텐데.”

“내 번호 뜨는 걸 분명히 봤을 거면서 모르는 척하기는. 이 대표가 형님 버릇을 아주 안 좋게 들여 놨다니까.”

“갑자기 제 동생은 왜 들먹거립니까. 불쾌하군요. 여기 없는 사람 얘기는 쓸데없이 꺼내지 말아 주시죠.”

남자의 도발에 발끈하며 받아치자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내 쪽으로 몸을 깊숙이 숙였다.

“사실 계속 무시당해서 화가 좀 났었거든. 내가 당신 전화번호 알아내겠다고 무슨 짓까지 했는지 압니까?”

“제가 그걸 알아야 합니까?”

“알아 달라고 지금 이러는 거 아닙니까.”

내 얼굴이 흉흉해지자 앞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직원의 낯빛이 창백해져 갔다. 사장이 직접 숍에 행차한 것도 부담스러울 텐데 그 사장과 대거리를 하고 있는 나 때문에 힘들기도 할 거다.

“제가 연락해 달라 부탁한 것도 아닌데 왜 화가 났습니까? 서로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서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걸 그때 제대로 표현하고 끊었다고 생각하는데 뒤늦게 이렇게 나오니…… 솔직히 당황스럽군요. 실리에 밝은 분이 내가 일영과의 관계에서 눈곱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걸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영양가 없는 제게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그쪽 말대로 남자가 영양가 없는 사람한테 들이대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지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아는 이유에 그쪽이 해당되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당신도 나를 의식해서 필요 이상으로 날을 세워 대며 귀엽게 구는 거 보면 답 나온 거 아닙니까? 다 알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는 소린데. 뭐― 좋습니다. 난 곰 과든 여우 과든 예쁘기만 하면 다 좋아하거든. 이렇게 머릿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것도 재미있고.”

“……한마디로 제대로 된 용건은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말은 이렇게 틱틱대면서 내가 신경 쓰여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건 압니까? 당신이 날 특별히 여기고 있으니 내가 기대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와 그렇게 안 봤는데 굉장히 긍정적이시네요.”

내 비아냥에 남자는 소리 내어 웃더니 성큼성큼 진열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귀찮은 듯 손을 내젓자 직원이 알아서 눈치껏 허리를 숙이고 물러난다. 그는 자기가 명품관의 직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앞에 자리를 잡고는 손을 내밀었다.

“뭡니까.”

툭툭, 앞에 진열된 시계를 가리킨다.

“그렇게 고심하는 걸 보아하니 누구에게 선물해 줄 건지는 알겠고……. 마음에 드는 시계가 없다면 맞추면 될 일 아닙니까. 당신도 시계를 차고 있을 테니 보여 달라고요. 어떤 스타일을 원하길래 직원을 계속 괴롭히고 있었는지 한번 봅시다.”

“보여 드린다고 당신이 압니까?”

“내 취미가 시계 수집인 거 몰랐습니까? 이거 꽤 유명한데. 웬만한 전문가보다 내가 나을 겁니다.”

그가 능글맞게 말하며 내 쪽으로 팔을 뻗었다. 예전에 한번 내 몸을 더듬었던 낯선 체온이 손등 위를 덮더니 뭐라 하기도 전에 솜씨 좋게 시계를 벗겨 낸다. 그러자 내내 시계 밑에 감추고 있었던 새카만 낙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른 소매를 늘어뜨려 감추었지만 눈치 빠르게 캐치해 낸 강준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떻게든 가리려 드는 나와는 달리, 오른손잡이임에도 늘 왼손이 아닌 오른손에 시계를 착용해 문신을 가리지 않았던 기하의 손목에서 몇 번이고 보았을 문신이었을 것이다.

강준형은 손안에 들어온 내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결국 또다시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것 참.”

“…….”

“진짜 재미있다니까. 당신네들.”

남자가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우리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뒤에 서 있던 직원이 얼른 다시 곁으로 다가붙었다. 내 시계를 건네받아 살피는 직원의 눈에 경탄이 번졌다. 강준형이 가까이에 비치되어 있던 얇은 장갑을 능숙하게 끼고 시계를 건네 들었다.

“이런 걸 차고 다니니까 여기 있는 애들이 눈에 차지 않을 수밖에.”

골동품이라도 만지듯이 섬세한 손길로 시계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얇은 천으로 글라스 위를 닦았다.

“사과해야겠군요. 이 정도 급은 당장 구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괜한 시간 낭비를 했군요. 다른 곳에 가 볼 것을.”

“아마 한국 내에 입점한 숍 어딜 가더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내게 시계를 도로 내밀기에 엉겁결에 받으려 손을 뻗었더니 그가 내 손바닥에 올려놓지 않고 시계를 반 바퀴 돌려 보여 준다. 남자의 손안에서 붉은색 하늘이 새겨진 후면 헤드가 조명을 받아 빛을 뿜었다. 내 시계는 앞면은 하얀색의 일반적인 헤드였지만 반 바퀴 돌리면 뒷면에 달과 별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붉은색의 스카이 차트가 장식되어 있었다. 하늘을 보길 좋아하는 내 취향을 고려한 동생의 생일 선물이었다.

“시계 선물은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군요. 이미 이것과 페어인 시계를 이 대표가 차고 있는 걸 본 적 있습니다.”

“……예?”

이것과 짝을 이루는 시계가 있었다고? 기하가 내 것과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면 그걸 몰라봤을 리가 없는데.

“내 것과 짝이 있단 말입니까?”

“음, 전면 헤드는 좀 다른 모양이긴 한데 후면은 같을 겁니다. 한때 한국에 레드베릴 한정판 시계 한 쌍이 들어왔다고 애호가들 사이서 소문이 자자했거든. 그러고 보니 내가 일영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 시계가 계기라면 계기였지. 돈을 퍼부어도 못 구하는 물건이었는데 무슨 재주로 손에 넣었나 싶어서.”

돈을 줘도 못 구하는……. 하필 강준형이 시계 수집가였기에 기하와 연이 닿았던 거라니. 그래서 또 하필 내가 시계 선물을 하겠답시고 여기를 들어와서 만나게 되었고.

얄궂은 생각이 들어 괜스레 지금은 비어 있는 손목을 움켜쥐자 남자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시선이 가려진 문신께로 가닿았다.

“일영의 대표가 희귀한 예물 시계를 장만한 걸 보니 성혼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 같다며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다들 선일 막내딸이 상대인 것으로들 알고 있던데 그 시계의 짝을 당신 손목에서 보게 될 줄이야. 이런 걸 끼워 주다니 확실히 당신이 단순한 정부는 아니었군요.”

“…….”

“계속 듣고 있어야 해? 볼일은 끝난 것 같은데 이만 나가자.”

지켜보다 못한 김태영이 몇 차례고 나가자고 속삭여 와 시계를 돌려받으려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갑자기 강준형이 예고도 없이 문신이 새겨진 팔을 거칠게 움켜쥐더니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어찌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자의 품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사적으로 진열대 위에 힘을 싣자 손 밑에서 쩌억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기현아!”

“…….”

“기현아! 괜찮아? 젠장, 당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김태영이 새파래진 얼굴로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손 떼! 그가 지른 소리에 내가 손을 짚은 유리판이 큰 균열로 깨지고 있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들자 강준형 역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눈을 하고 있었다.

“……미쳤어요?”

“아, 이런…… 괜찮습니까?”

곁에 서 있던 직원들이 내 손에서 피가 번지는 걸 보며 허둥지둥 숍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하나 둘 멈춰 서서 숍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피가 점점이 번져 있는 유리 위로 시선을 던진 채 계속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저 반반한 낯짝을 한 대 쳐 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남자가 손수건을 쥐어 주려는 걸 쳐 냈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낸다.

“정말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었네? 근데 그땐 왜 못 피했을까?”

“무슨 헛소릴하는 겁니까?”

“그렇게 싫어 죽겠다는 눈을 하면서 왜 피하지도 못하고 그 남자 손에 얌전히 붙잡혀 있느냔 말입니다.”

“뭐……?”

왜 이랬나 했더니 설마 기하가 안아 들었을 때의 얘기를 하는 건가. 피할 수 있는지 본 거라고? 진짜 미친놈이 따로 없다며 얼굴을 굳히자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제까지 낙오자 취급을 하며 일선에서 나오지도 못하게 막아놓고 안채에서만 굴리는데 당신 성격상 곱게 그 수치를 당하고 살 줄은 몰랐지.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자존심이 없는 타입이었나 봅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당신 제정신이야?”

균열이 간 유리 위를 짚었기에 상처는 크기만 했지 깊지는 않아 보였지만 김태영은 제가 상처라도 입은 것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급히 손수건으로 상처 부위를 눌러 지혈해도 면적 넓은 상처 덕에 금세 새빨갛게 젖어 올라온다. 다친 것보다도 기하가 알게 될 것이 걱정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도 설마하니 기현 씨가 이렇게 다칠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보상해야 할까요. 원하는 걸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그 입 닥쳐! 당신이 지금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를 안다면……!”

“됐어, 그만해 둬. 보기보다는 안 다쳤어.”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걸 보며 다급히 김태영을 저지했다. 모여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자칫 잘못하면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거다. 피를 보는 거야 내겐 흔한 일이었지만 저놈 때문에 이렇게 된 걸 알면…… 어떻게든 이걸 덮어야 했다.

“이봐요. 강준형 씨.”

“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합니까? 첫 번째는 손님이라 참는다고 했었지요.”

비로소 내 손에서 시선을 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번에 일이 이렇게 됐지만 덮어드릴 테니 대신 다음에 또 만나면 서로 모르는 척하도록 하죠. 우리 피차 좋은 인연 아니지 않습니까.”

“누구 마음대로 좋은 인연이 아니란 겁니까? 오늘 만나게 된 건 당신이 여기 왔기 때문인데 내 탓인 것처럼 들리는군요.”

“댁이야 좋은 인연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요. 이거 일 크게 벌이지 않고 조용히 덮는 편이 당신한테도 좋을 텐데요?”

“날 후속 조치도 안 해 주는 개새끼로 만들 셈입니까? 손바닥이 완벽하게 아물기 전까지 당신은 날 못 벗어나요. 내가 다치게 만들었으니…… 보상은 제대로 해 드릴 겁니다.”

“이걸 공론화하면 단순히 보상하는 데서 끝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상황 파악이 안 돼요?”

이번에도 거절하기 쉽지 않을 제안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어디서 또 배알이 뒤틀렸는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인상을 썼다.

“나와 연관되는 게 그렇게 싫어? 이미 당신에게 빚을 지고 있으니 하나 더 생기는 게 뭐 어때. 오히려 기껍지.”

그래, 말이 안 통하는 상대였지. 내가 훨씬 손해 보는 제안을 해도 어쩜 매번 이렇게 걷어차는지 남자의 뇌 속이 진심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상극도 이런 상극은 없을 거다.

강준형의 비서가 도착했는지 매장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가 조용해졌다. 곧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직원에게 김태영이 의료진부터 데려오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야근을 밥 먹듯 해선지 육체적으로 지쳐 있는 상태에 이런 일마저 벌어지니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내몰리는 느낌이었다.

“피곤해 보이는군요.”

대꾸도 해 주기 싫어 무시하다 문득 아까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아까 한 말은 무슨 뜻입니까?”

“무슨 말?”

“낙오자 취급이라느니, 잘못 살고 있다느니.”

“그냥 당신이 왜 그러고 사나 안타까워서 한 말이었습니다. 거슬렸다면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왜 그런 말을 했냐는 겁니다. 내가 그쪽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는데요.”

내가 받아치자 강준형이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멀쩡한 남자가 죄인처럼 사생활도 없이 사는데 그럼 뭐라고 할까요.”

“내 사생활이 없다니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그것도 흔히 우스갯소리로 도는 소문 중 하나입니까?”

화가 나서 쏘아붙인 말에 남자가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왜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듯 억울한 얼굴을 하더니 웬일로 고분고분하게 입을 연다.

“장남이라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형편없길래 차남이 다 뺏고 모든 기득권을 누리고 있나 했었는데……. 얼마나 모자라면 들어오는 혼담도 족족 깨지는 수모를 당하며 재계엔 얼굴 한 번 못 내밀고 죽은 사람 취급을 당하나 했었단 말입니다. 보통 병신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일거수일투족을 동생에게 다 관리당하며 살진 않으니까 그쪽이 불구라도 되는 줄 알았지.”

내게 혼담이 들어왔었다니? 죽은 사람 취급? 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어안이 벙벙해져 남자를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또 이 대표가 남 보기 수치스러워서 얼굴도 못 내놓게 감시하는 건가 싶었는데, 오히려 형을 제 계집으로 삼으려 손안에 쥐고 안 보여 줬던 거라니.”

‘설마 친형이었습니까?’

‘이기하 대표가 브라콤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직설적으로 쏟아진 남자의 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남들이 다 알 정도로 내가 계속해서 내내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고? 죽은 사람이라 조롱할 만큼?

내가 할 말을 잃어버리자 날카롭게 기색을 살피던 남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설마 당신…… 아무것도 몰랐나요? ……이런, 그 남자가 그런 얘기는 또 안 해 주는 겁니까?”

지금껏 강준형이 던진 어떤 미끼에도 반응을 하지 않던 내 동요에 남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음을 후비고 들어온다. 조롱받는 것에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유감스럽단 목소리를 내면서 그는 웃고 있는 입을 숨기려 하지도 않고 몸을 숙여 속살거렸다.

“모범생이라더니.”

“…….”

“이 대표도 참 나쁜 남자네.”

남자의 말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손톱이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뻔히 저런 말로 날 휘두르려 하는 걸 알면서도…… 알면서도 속절없이 휘둘리고 있었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걸 참아 가며 살 만큼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내민 손도 안 잡고 버티길래 나는 또 다른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설마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당신 상황에 나보다 좋은 탈출구가 있을 턱이 없었는데.”

처음부터. 처음부터 강준형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서 질척거렸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스스로 우위를 점하고 나를 깔아뭉개고 있었던 거다. 내게 선택권이 얼마 없음을 알아보고 선심 쓰듯 돌파할 썩은 동아줄을 내리며.

지금껏 내가……. 그렇게 신음처럼 뱉어 내고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어떻게 관리당하고 있단 말입니까?”

“하하, 이제야 내 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네. 이제 나도 당신의 용건이 있는 사이로 승격된 겁니까?”

칼자루가 자기에게 넘어간 걸 확인한 남자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어깨너머로 힐끔 아직도 김태영이 비서에게 붙잡혀 있는 걸 보고는 손가락을 뻗어 부드럽게 내 상처 위를 매만진다.

“그 남자의 개가 올 것 같으니 시간 낭비하는 건 그만두지요. 뭐― 간단합니다. 당신이 어딜 가든지 차량 몇 대쯤 기본으로 따라붙는 정도? 당신네 본가를 중심으로 특별히 기현 씨 동선 안에 있는 건물이든 사람이든 모조리 일영 일가의 소유라 몇 시에 어딜 이동했는지 뭘 했는지, 누구와 만나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다 보고되고 있는 정도랄까. 근무한다는 연구소는 물론이고 자주 가는 편의점이나 단골 도넛집 같은 아주 사소한 것도 포함해서……. 아, 당신이 하도 자주 사길래 괜찮나 싶어 나도 따라 사 봤는데 거기 별롭니다. 우리 백화점에 입점한 도넛 선물해 줄 테니 이따 가져가요.”

묻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가 술술 쏟아 내는 말들은 하나같이 충격적이었다. 연구소나 도넛집같이 사소한 것들까지도 모조리 꿰뚫고 있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말이라 오히려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거짓말도…… 작작하셔야 믿는 척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 말대로면 지금도 내 뒤를 쫓는 사람이 있다는 소린데, 나는 한 번도 그런 자를 본 적 없습니다.”

“오늘 비가 많이 와선지 그쪽 뒤를 따르는 데 꽤 어려움이 있었나 보더군요.”

“…….”

“내가 이 넓은 백화점 매장에 당신이 와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여길 왔겠어. 일영 측이 VIP 전용 주차장에 당신 차 번호가 있는지 확인을 요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쪽 새로운 번호 등록도 함께.”

“…….”

“또 당신 소유의 휴대 전화나 계좌 등의 개인 정보는 모조리 법정 후견인인 그 남자가 열람하고 있는 정도? 사실상 당신은 법률상 무능력자에 가깝지. 뭐 이건 재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깁니다. 명색이 명문가 후손인데 당신 명의로는 손바닥만 한 땅 한 점 없으니……. 오늘은 웬일로 그쪽이 여기 와서 만날 수 있었지만 평소에 당신 뒤를 따르는 사람들 덕에 기현 씨 보러 연구소까지 가는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고요. 얼굴 한번 뵙기 힘든 귀한 몸이라니까 당신.”

기하는 약속했었다. 나를 놔준다고. 자기가 원할 때에 돌아와만 준다면 집 밖에서는 자유인으로 살 수 있도록 놓아주겠다고 그랬었는데.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목줄이 풀려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단지 줄 길이를 늘였을 뿐이라고?

……아니야. 아닐 거다. 내 동생이 내게 그랬을 리 없어. 이자는 날 가지고 놀려고 꾸며 내는 거다. 넘어가선 안 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이런 신뢰 없는 남자의 말을 믿을 셈이야?

“……장난은 그만두죠. 원래 과장하길 좋아하는 분인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생각해 보십시오. 직접 만나러 가면 쉬운 일을 내가 왜 계속 전화밖에 못 걸었겠습니까. 내가 일 없어서 계속 전화만 걸고 있었겠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 허세를 부려도 뒷말을 흐리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깨달은 강준형의 웃음이 깊어졌다.

“뭐, 거짓인지 아닌지는 내 손을 안 잡을 거라면 이제 당신이 재주껏 알아봐야 할 일이고…….”

문신 위를 매만지던 손가락이 뿌리치기 애매한 정도로 슬며시 뺨 위로 올라왔다. 뱉어 준 정보의 값을 치르듯 내가 싫어하는 티를 내며 고개를 비껴 피해도 집요하게 달라붙어 쓸어내렸다. 그러더니 내 눈앞에 불쑥 들고 있던 시계를 들이민다.

“그럼 나와 내기라도 하겠습니까?”

기하의 눈을 닮은 붉은색의 헤드가 위협하듯 빛을 뿜었다. 영롱한 붉은색이 기하의 눈동자 색 같아 시선이 붙잡혔다. 하늘을 손안에 담으라고 준 선물이었는데 어째서 아이가 푸른색이 아닌 붉은 하늘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무심했던 나는 그 아이의 선물을 받고 단 한 번도 기뻐하며 의미를 물은 적 없었으니까.

“나는 이 시계 안에 적어도 GPS 정도는 설치되어 있을 거라는 데 걸지요.”

* * *

“서재와 베란다 모두 점검했습니다. 깨끗합니다.”

“발코니를 통해 들어오는 외부 전력 이상 없습니다. 바깥에서 볼 수 있는 각도 내에 특이점을 보이는 다른 시설물도 발견 못 했습니다.”

“좌측 욕실과 화장실 점검 끝났습니다.”

“우측 방 완료했습니다.”

각 방으로 장비를 들고 들어갔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다시 거실로 모여들었다. 가장 번잡스러웠을 드레스 룸을 점검하러 간 기사들 역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과 함께 돌아왔다.

“팀장님. 죄송한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훑어봐 주십시오.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땀을 뻘뻘 흘리며 장비를 점검하던 사내들은 내 말에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 높다란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또 전 구역을 말입니까?”

“귀찮으시겠지만 부탁드립니다.”

찢어진 손바닥 치료가 우선이라고 소리 지르는 김태영을 무시하고 백화점에서 나온 뒤 제일 먼저 탐지 업체를 찾아갔다. GPS, 도청기, CCTV 등등의 설치 여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 뒤 레지던스로 돌아와 현관에서부터 시작해 모든 방을 벌레 기어 다닐 구멍 하나까지 다 훑어봐 달라고 했다. 단 한 개도 지나치지 않도록.

뭐라도 나올 줄 알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탐지를 시작한 집 안은 기기가 쏟아질 거라는 내 예상에서 빗나가 지나치게 깨끗했던 것이다.

믿을 수 없어 몇 차례고 재검해 달라 요청하는 나를 바라보는 기사의 눈은 점점 강박증을 가진 미친놈 보듯 변해 갔다.

“정말 깨끗합니다. 고객님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그런 사설 장비가 설치되어 있으려면 무조건 설치 흔적이라도 남아야 하는데…… 보십시오. 설치하기 제일 용이한 시어터에도 구멍 하나 나 있지 않잖습니까. 장비에 걸리는 게 단 한 개도 없어요. 외부 전파 추적을 해도 흔한 무선 인터넷조차 걸리지 않고…….”

“혹시 탐지되지 않는 도청기나 폐쇄 회로 기기가 있진 않을까요? 아주 최신형에 고성능이라면 걸리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들고 있는 기계가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최신형인데요. 고객님께서 착각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이 집의 가전 기기들은 전부 순정 상태입니다. 없는 걸 자꾸 있을 거라 우기시니 저희로서는 어떻게 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계속 똑같은 소리를 해도 납득하지 않는 내게 결국 탐지 업체 팀장은 볼멘소리를 냈다. 탐지를 할 게 아니라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눈으로 바라본다. 하긴 결벽증이라도 있는 듯 지나치게 깨끗한 집 안에 CCTV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예민한 독신남이라, 누가 봐도 지금 정상 같진 않을 것이다.

“고객님뿐만 아니라 요새 사회적으로 몰래카메라며 뭐며 하도 이슈가 돼서 집에 그런 게 설치되어 있을 것이라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까.”

몇 시간이고 고생시킨 게 미안해 계약한 것의 두 배의 금액을 치른 뒤 업체를 돌려보냈다. 집 안의 가구들을 전부 뒤집어엎으며 수색했음에도 결국 단 한 개의 기기도 찾지 못했다.

강준형이 또 내게 헛소리를 한 건가? 나는 그의 말에 보기 좋게 낚여 버린 건가?

“볼일은 끝나신 겁니까?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이곳에는 외부인을 들이면 안 된다고 막아서는 고용인들을 반 협박해서 업체를 불러 놓고도 소득이 없는 것이 허탈해 계단에 앉아 있자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조정구가 옆으로 다가왔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던 집 안은 구둣발로 짓밟고 다닌 사내들 덕분에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지. 틀림없이 뭐라도 나올 줄 알았다. 그래서 조정구와 고용인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진행했던 것인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니 오히려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깨끗하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으나 안도함과 동시에 부끄러움이 몰려들어 붉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뻔뻔한 나라도 조정구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저기.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미안합니다. 내가 알아서 치울 테니까 두세요.”

왜 강준형의 말이 그토록 신빙성 있게 들렸을까. 안 그런 척하며 완전히 휘둘려 버렸으니 그 남자 눈에 내가 또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조정구는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다 엉망이 된 집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워낙 평소에도 집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다시피 하니 대수롭잖은 얼굴이었다.

“의혹이 풀리셨으면 됐습니다만 기현 님께서 머무시는 곳에 우리 집안이 아닌 외부인을 들여서는 안 됩니다. 밖에서 무슨 말을 듣고 오셨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독단으로 행동하시면 곤란합니다.”

“조정구 씨.”

“예. 말씀하십시오.”

“혹시…… 신께서 내 신변을…….”

“예.”

“신께 내 신변에 관한 어떤 보고를 올리는 겁니까?”

무감정한 유리알 같은 눈이 물음을 기다리며 내 쪽을 향했다가 심드렁하게 붕대를 감아 둔 손바닥을 향했다.

“기현 님의 출퇴근 시간만을 보고드립니다. 신께서는 기현 님이 귀가하실 때까지 주무시지 않으니.”

“그게 다입니까?”

“그럼 다른 게 더 있어야 합니까?”

조정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내 곁에서 멀어지며 전화를 받는 그의 뒤로 그새 약국에 들렀다 왔는지 약국 봉지를 든 김태영이 나타났다.

“이제 끝났냐?”

“……그래.”

“난장판이네.”

옆에 와 털썩 주저앉더니 상처 위에 임시로 감아 놓은 붕대를 조심스레 벗겨 낸다. 찢긴 상처가 드러나자 자기가 다친 것처럼 이맛살을 확 찌푸렸다. 워낙 깔끔하게 찢겼던 터라 피만 많이 났을 뿐이지 상처는 벌써 반쯤은 아문 상태였지만 김태영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한동안 자해도 안 하길래 좀 멀쩡해진다 싶더니. 네 손은 피가 마를 날이 없구나.”

김태영이 멍청한 자식이라고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라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난 오늘 진짜로 멍청했다.

“대체 그 자식이 너한테 뭐라고 했길래 그래? 뭐라고 하며 네 속을 들쑤셔서 이렇게 집을 다 뒤집어엎었냐고.”

스파링할 때 매번 손에 붕대를 감아 버릇해서인지 태영의 드레싱 실력이 제법이었다. 이 정도면 따로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듯싶다. 붕대 감긴 손을 쥐었다 폈다 해 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냥…… 내가 존나 병신같이 사는 게 딱해서 오지랖을 부리셨단다. 한심하대. 이러고 사는 게.”

“뭐? 미친 새끼……. 역시 그냥 뒷일 생각하지 말고 면상 한 대 치는 건데 그랬다. 뭐 그런 재수 없는 게 다 있냐?”

“쳐도 내가 쳐. 나도 참았는데 네가 못 참으면 안 되지. 아마 네가 손이라도 댔으면 그걸 빌미 삼아 또 미친놈처럼 달라붙었을걸?”

“하……. 넌 어쩌다 그런 환장할 새끼랑 엮였냐. 왜 걸려도 지독한 놈한테 걸리냐고. 그것도 재주라니까?”

“그놈 말로는 내 시계에 적어도 GPS 정도는 설치되어 있을 거라던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중얼댔다.

업체 사람에게 시계에 들어 있는 기기의 유무를 검증해 달라 하니 겉에선 감지되는 게 없지만 혹시 몰라 속을 보려 한다면 아예 분해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시계가 다시는 움직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워낙 말도 안 되게 고가의 시계라 차마 자기들 선에서 책임지고 분해는 할 수 없다 해서 열어 보는 걸 포기했다. 기하가 몰래 페어로 가지고 있는 선물이라는데 만에 하나라도 망가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워 머리를 짚었다. 강준형이 했던 말 중 제일 중요한 것이 거짓으로 판명 났는데도 어째선지 석연찮은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어째선지 내가 무언가를 못 보고 지나친 기분이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것을.

그 남자는 뭘 바라고 내게 접근하고 있으며 뭘 기대하고 내게 그런 말을 한 걸까. 날 흔들어서 뭘 어쩌려고? 내게 사생활이 없다는 말을…… 내가 죽은 자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서 그자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단순히 흥미 본위로 그런 말을 하며 상대를 흔드는 저열한 남자였을 수도 있다. 기하와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사이가 깨지는 걸 보며 즐거워하는 유형의 쓰레기였을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에 불안했다. 그리고 이 예감이 맞았을 경우의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가 했던 말 중에 하나라도 진실이 있다면?

우리가 그러고 있는 동안 전화 통화를 끝냈는지 조정구가 다시 옆으로 돌아왔다.

“기현 님. 죄송하지만 지금 본가로 가실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예? 이 밤중에 말입니까?”

본가에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낭패였다. 적어도 손바닥이 조금은 나은 다음에 불려 가기를 원했는데. 다친 손바닥을 본 기하가 보일 반응이 두려워 최대한 시간을 끌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내일 알아서 갈 생각이었습니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쉬겠습니다.”

“치료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바로 모시겠습니다.”

“치료야 보다시피 이 녀석이 다 해 줬는데요. 내일 퇴근 후에 들르겠다 전해 주십시오. 요새 많이 바빠서 자리를 비우면 안 됩니다.”

“연구소의 일이야 본가의 명령으로 손을 대고 있지 않을 뿐이지 원하신다면 부서에 임시 인원을 충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까요?”

“날 따라다니며 감시할 줄만 아는 임시 인원 말입니까? 됐습니다. 본가 출입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지금 시간도 늦은데다가 비도 저렇게 심하게 오니 그냥 날 밝을 때 가겠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자르자 사내는 융통성 없는 성격답게 더 딱딱하게 입매를 굳혔다. 그답지 않게 조금 초조하게도 보였다.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지금 당신이 부름을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신께서 이번 일을 전해 들으시고 노여움이 극에 달하셨다고 합니다. 본가 큰 어른들은 더 잘못되기 전에 기현 님을 전의 제물들처럼 집 안에 유폐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하고요. 자칫하면 일이 크게 번지게 생겼는데 부름마저 무시해 버리시면 아마 입장이 대단히 난처해지실 겁니다.”

“오늘 있었던 일이 지금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벌써 사람들 귀에 다 들어갔단 말입니까? 어떻게 알고요?”

“그럼 그 보는 눈 많은 백화점에서 사장과 실랑이가 붙어 다치시기도 했는데 원로들이 모를 줄 알았습니까? 레지던스에선 외부인을 들이며 이렇게 난리까지 피우셨는데요.”

“그럼 적어도 말하기 전에 내 의사를 물어볼 순 있잖습니까. 하다못해 대응할 시간이라도 줬어야죠. 지금 이 상태로 가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제게 있어 기현 님의 의사보다는 가주님의 명령이 상위에 있다는 걸 알고 계시잖습니까.”

“뭐라고요?”

“지금 밖에 계신다고 본가의 명을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당신은 원래 안에 계셨어야 할 분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조정구가 내 옆에서 한발 물러났다. 기막혀하는 내 얼굴은 시선도 주지 않고 손을 까딱하자 멀찍이서 대기하던 사내들이 곁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어차피 가주의 명 없이는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는 주제들이.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그들이 가까이 오기 전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기분이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

* * *

한밤중에 도착한 본가는 전부 불을 켜 둔 상태였다. 그럼에도 지독하게 어둡고 고요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정구가 큰일이 났을 거라 언질했기에 날 잡아 죽이려고 이를 가는 혈족들이라도 마주칠 거라 생각했건만 비를 뚫고 도착한 본채는 오히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정적이 감돌았다. 비 내리는 소리마저 삼켜 버린 듯한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앞장선 고용인들도 웬일인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사무적으로 나를 안내했다. 말을 붙일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나 역시 입을 다물었다.

“여기입니다.”

그들의 안내가 끝나고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구두 끝에 던져 뒀던 시선을 들어 열린 방 안을 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들어왔지만 언제나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다. 차마 나라도 방 안에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 그냥 망연히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집무실 바닥에는 입구에서부터 미리 도착해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부복을 하고 석고대죄라도 하듯 꿇어 엎드려 있었다. 신음 소리, 숨소리 하나 나지 않는 상태라 팽팽하게 당겨진 등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지 않으면 살아 있는 자들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혈족들이.

중죄라도 저지른 듯 그러고 있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그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머리 위에, 웅크린 몸 위에, 붉은 벨벳 카펫이 깔린 방 안 전체에 족히 몇백 장은 넘어 보이는 사진들이 무슨 홍보물같이 정신없이 뿌려져 있었다.

피가…… 식는 게 느껴졌다. 내 사진이었다. 강준형과 접촉했던 모든 순간들이 초 간격으로 찍혀 있는.

내가 강준형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진. 강준형이 나를 바라보며 웃는 사진. 우리가 가깝게 마주 서서 밀담이라도 나누는 듯한 사진. 그가 내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사진. 시계를 풀어 주기 위해서였지만 명백히 손을 잡고 있는 사진. ……각도에 따라 끌어안긴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사진. 그가 날 달래듯 얼굴을 쓰다듬는 사진까지.

멍하니 고개를 돌리다 바닥에 나뒹구는 사진 중 내 얼굴을 근접하게 찍은 게 들어왔다. 나는 당연히 세상에 다시없는 쓰레기를 보는 눈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사진상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내 눈은―.

‘말은 이렇게 틱틱대면서 날 볼 때마다 신경 쓰여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건 압니까? 당신이 날 특별히 여기고 있으니 내가 기대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

왜 강준형이 그렇게 호언장담했는지 이젠 수긍이 간다. 내가 봐도 나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말을 잃고 바닥만 바라보니 방의 끝에서 지금의 집무실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제법 잘 찍었지?”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들자 커다란 집무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계속 일을 하고 있었는지 셔츠 앞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어 올린 모습으로 날 보며 미소 짓는다. 남자가 손안에 움켜쥐고 있는 사진 다발을 보고 왜 이렇게 바닥에 사진들이 뿌려져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왜 혈족들이 남자의 발밑에 꿇어 엎드려 있는지도.

그는 손안의 사진들을 전부 허공에 털어 버리고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만큼은 곧장 내 곁으로 와 줄 줄 알았는데 이럴 때조차 부르기 전엔 오지 않다니, 너무하잖아.”

흩어지는 사진들을 차마 멀쩡한 정신으로 쳐다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들어갈 생각을 않자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누가 뒤에서 민 것도 아닌데 떠밀리듯 방으로 발이 옮겨졌다.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다. 조정구가 그답지 않게 난처해했던 데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몸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내게 그가 팔을 넓게 벌렸다. 온화한 표정이었으나 발밑에 꿇어 엎드려 있는 인간 군상들과 수백 장의 사진 더미 덕분에 기괴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를 부르는 그의 손길에 학습된 대로 저절로 다리가 움직였다. 주춤거리며 방 한가운데까지 걸었을 때였다.

아.

아주 찰나였지만 남자의 등 뒤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방 안 가득 커다랗게 뻗어 나갔다가 흩어졌다. 투명한 물잔 위에 한 방울의 검은 잉크를 떨어뜨린 듯 순식간에……. 뼈대만 남은 거대한 날개의 형상 같기도 하고, 사방으로 펼쳐진 날카로운 칼날 같기도 한 그것은 그저 등불의 그림자에 불과했는지 삽시간에 어두운 방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내가 당황하여 멈추자 그가 재촉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불길한 것은 대체 뭐였지? 이 상황을 두려워하는 무의식이 보여 준 환영이었나? 환각을 본 게 처음이 아님에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는 기하가 틀림없었지만 눈을 크게 뜨고 확인해야 했다. 티 하나 없이 하얘서 날 사로잡았던 과거의 소년은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피를 먹고 자란 것처럼 붉게 물들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냥 도망가고 싶다.

한동안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냥 끌어안고 싶다.

마음이 대답했다.

도망가고 싶다.

안아 주고 싶다.

도망가자.

안아 주자.

도망쳐.

안아 줘.

머리와 마음의 목소리보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더 커졌을 때 나는 남자의 앞에 서 있었다. 앉아 있는 채라 평소와는 다르게 눈높이가 맞춰진 상태로 그가 가까이 온 날 바라보았다. 흉포한 분위기를 하고도 나를 향한 붉은 눈에는 천진함이 가득했다.

“어서 와.”

내가 지친 만큼 그 역시 지쳐 보였다. 내 동생을 뒤흔들기 위해, 나를 옭아매기 위해 악의를 가지고 사진을 한 장 한 장 프린트해서 그의 앞에 가져다줬을 혈족들을 향한 살심이 치솟았다. 비뚤어진 집착……, 비뚤어진 충성심……, 비뚤어진 애정……. 우리 집안사람들은 단 한 명도 제정신인 자가 없었다. 전부 다 미쳐 있었다. 여기서는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자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대신 팔을 들어 그의 목에 감았다. 머리를 어깨에 떨어뜨리고 목덜미에 비 냄새가 묻은 차가운 뺨을 비볐다. 그가 밀어 낼 거라 예상했지만 오히려 가슴이 맞닿게 바짝 끌어당겨졌다. 귀 뒤쪽에 다정히 입술을 누르더니 나에게만 들리게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왜 그렇게 겁에 질렸어. 기현아.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니요.”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단 말인가. 그의 목을 끌어안는 팔에 더 힘을 주며 나 역시 그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아무것도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남자는 너무도 순순히 내 말에 동의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한다면 어떻게든 억울함을 호소하려 준비했던 말들이 턱하고 목구멍에서 막혔다. 분출되지 못한 오만 가지 감정이 마음속에서 휘몰아쳐 울컥하고 치받치는 걸 안간힘을 쓰며 참아 냈다.

겨우 하루, 집에서 조금 먼 곳으로 외출을 나갔을 뿐인데. 고작 친구의 선물을 사러 따라갔을 뿐이었는데. 나는 물가에 내놓은 다섯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몸가짐을 조심해야 할 공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든 행적을 까발려야 할 범죄자나 위험인물도 아닌데. 왜 이렇게 늘 내몰려야 하는 거지.

왜 이렇게 매번 목이 졸리고 손발이 묶인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어찌 널 탓하겠어.”

“…….”

“꽃이 아름다운 것을, 향기로운 것을 탓할 순 없지. 주인이 뻔히 있는 걸 알고도 탐내며 화단에 들어온 벌레가 잘못이지. 그렇지?”

“…….”

“그래서, 다쳤다고?”

그가 눈동자만 굴려 붕대가 감긴 손을 내려다보았다. 온후한 눈을 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소름이 끼쳤다. 본능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발밑에서 바스락, 하고 내 얼굴이 담긴 사진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린 내 눈앞에 그의 손이 다가왔다.

“혹시 아팠나?”

김태영이 손수 감아 준 붕대를 굳이 끌러 내며 상냥하게 묻는다. 나는 뻣뻣하게 굳어서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가 전혀 아프지 않았습니다, 하고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남자는 듣고 싶던 대답인지 만족하며 눈꼬리를 접었다.

꼼꼼하게 덧댄 붕대가 풀리고 커다랗게 사선으로 찢긴 상처가 드러났다. 애초에 상처가 깊지 않았던 탓에 벌써 아물어 보기 흉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남자는 내 손바닥으로 고개를 숙였다.

“…….”

따뜻한 혓바닥이 상처 위를 쓸었다. 부드럽고 축축한 것이 얇게 아문 곳을 핥아 내릴 때마다 몸이 움칠거렸다. 집요하게 핥는 통에 다시 찢어진 상처에서 미지근한 피가 흘렀다. 김태영이 아끼지 않고 연고를 들이부었기에 지독하게 쓸 텐데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손바닥 전체를 피와 함께 다 핥아 내렸다. 핏줄기가 멈추지 않자 이번에는 빨기 시작한다. 등에 식은땀이 배어 들었다. 아찔한 탈력감에 정신을 못 차리자 남자가 엄하게 입을 열었다.

“누가 고개를 들라고 했지?”

“……?”

나무람에 가물가물한 눈을 드니 내게 한 얘기가 아니었는지 그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의 사내는 혼자만 물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땀으로 완전히 젖어 있었는데 겁에 질리다 못해 거의 극한의 공포에 내몰린 표정이었다. 자기를 지목했다는 걸 깨달은 사내의 눈동자가 절망스럽게 오그라들었다.

“생존보다 더 강한 본능이라는 건가. 좋은 그릇인데 아깝게 됐어.”

사내의 목에 걸린 기자증과 발밑에 내팽개쳐 있는 커다란 사진기가 눈에 들어왔다. 얼핏 보아도 일반인이 가지고 다니기엔 굉장히 전문적이고 고가로 보이는 카메라를 보고야 깨달았다. 사진을 찍은 사람이 이자라는 것을.

그의 발밑에는 그밖에도 나로 추정되는 사진 수백 장이 깔려 있었다. 오늘과 다른 옷을 입고 있는 내 사진들을 보자마자 약에라도 취한 듯 몽롱했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얼핏 보더라도 쫓아다닌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귀신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도 내게서 눈을 떼질 못했다. 신이 말했던 본능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에게 있어서는 신의 명령보다도 나를 보는 것이 더 중한 모양이었다. 그랬기에 이 사달이 남에도 나를 눈에 담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넋을 놓고 쳐다보는 눈을 거두지 않는 사내를 향해 여우 신이 신랄하게 웃었다.

“그를 보는 게 그렇게 신기한가? 가까이서 보니 더 예쁘지? ……좋은 눈을 가져 스스로 알아봤으니 각별할 수밖에 없겠지.”

속이 뒤집혔다. 넘어올 것 같은 기분 그대로, 사내를 향해 원망을 토해 냈다.

“왜 날 찍었습니까?”

“…….”

“왜 날 찍었냐고.”

윽박질렀는데도 남자는 그저 멍하니 날 올려다보기만 했다. 흡사 말을 하는 법을 잊은 자 같았다. 그는 동공이 풀린 채로 말이 나오지 않는 입을 뻐금거리며 멍청한 얼굴을 했다.

“이걸 찍고 싶어서겠지. 기현아.”

웃음소리와 함께 남자가 기댔던 책상에서 일어나며 내 턱을 움켜쥐었다. 피 냄새가 밀려듦과 동시에 입술 사이로 비릿한 맛이 느껴지는 혀가 파고들었다. 우리의 입술이 포개지자마자 발밑의 사내가 거칠게 침음했다. 놀란 것은 잠시였고 그가 이끄는 대로 숨을 들이켰다. 지금 당장 총에 맞아 죽더라도 발밑의 사내는 이 광경을 찍고 싶었으리라. 여유롭게 입술을 누르는 남자에게 맞춰 고개를 기울이고 입술을 열어 그의 것을 맞아들였다.

절반은 알 수 없는 도취감 때문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사내에 대한 복수와 억하심정 때문이었다. 내가 호응하자 남자가 단 한숨을 쉬며 뒷머리를 쥐고 더 깊게 끌어당겼다. 내 상처를 핥은 입술을 내가 도로 핥았다. 호흡이 어지럽다. 연고가 입 안에 남아 씁쓰레한 맛이 나는 혀를 일부러 더 난잡하고 질척하게 섞었다. 내 피를 마셔선지 그의 입 안이 더 습하고 뜨거웠다.

“…….”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방 안에서 그렇게 한참을 혀를 섞으며 젖은 소리를 내던 우리는 내가 호흡을 따라가지 못하고 남자의 소매를 움켜쥐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신이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을 마저 핥아 주는 동안 숨을 헐떡이며 전부 지켜보고 있었을 사내를 노려보았다. 동생과 키스를 나눈 것은 나였는데 사내가 오히려 터질 것같이 벌게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찍어서 증거를 남기지 못하니 각막에라도 새기려는 듯 한 번 깜박이지도 않는 그의 눈이 불쾌했다.

저런 눈. 나를 저런 식으로 바라보는 눈. 살의를 일으키게 만드는 저 시선. 할 수만 있다면 저 눈을…….

들끓는 화를 어쩌지 못하고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그가 기꺼워하며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날 다루는 게 점점 더 능숙해지니…… 이렇게 나오니 화를 낼 수도 없고.”

정말 초반에 보여 줬던 노여움이 풀렸는지 그가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며 발밑에 꿇어 엎드려 있는 혈족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만하고 다들 물러가. 그가 피곤해 보인다.”

“……하지, 큭……, 하지만, 가주님…….”

나와 가까운 자리에 있던 원로가 목을 움켜쥐고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쿨럭거리며 한 음절씩 끊어 발음하는 것조차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기어코 끝까지 입을 열었다.

“저분을…… 이대로 두시면……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그래서 불러들였잖아.”

“이번…… 역시 그냥 넘어가시는 겁……니까?”

“그럼 그냥 안 넘어가면 어떻게 할까.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험하게 대하는 걸 봐야 너희들 입이 조용해질까?”

“그런 뜻이 아니옵…….”

“그저 내 것 하나 제대로 지키라는 명령도 못 지키는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간언을 하는 거냐.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뿐이라고 말했을 텐데 그마저도 못 하는 무능한 것들이.”

그나마 차분하던 남자의 목소리에 분노가 실리자 사내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으키기 시작한 다른 혈족들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극우주의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차마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나만큼이나 표정 관리를 못 하는 그들의 얼굴에서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인간 제물인 네가 우리의 신을 망가뜨리고 있다, 라고.

맞는 말이야. 나는 점점 아버지의 뱀같이 변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모두를 파괴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내 남자를 독차지하고 내 남자를 숭배하는 것들을 파괴하는 상상을. 전부 다 사라져 버리고 오직 내 편이 되어 주는 너만 남는다면 어떨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밖에 나돌아 다니는 이기현의 사진을 모두 회수해. 단 한 장이라도 빼돌리거나 남겨 뒀다가는 어떻게 될지야 잘 알고 있겠지.”

그는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사진을 팔로 밀어 바닥으로 쏟아 버렸다. 우수수 바닥으로 흩어지는 사진 사이로 지금 신이 내게 하는 행동과 똑같이 내 뺨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는 강준형의 얼굴이 보였다. 사진 속 그는 대단히 기분이 좋아 보였지만 만져지고 있는 나는? 내 표정은 저 때 어땠지? 초 단위로 찍혀진 사진이기에 흐트러지는 사진 무리에 내 쪽으로 앵글이 돌려져 찍기 시작한 게 보였지만 끝내 찍힌 표정은 확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사진을 한 번이라도 담았던 어떤 저장 매체든 마찬가지다. 전부 불태워.”

그의 팔이 이끄는 힘에 딸려 끌려갔다. 오늘 하루 만에 닥친 일들에 피로감이 극을 달했는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막 집무실 밖으로 발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허공을 찢으며 비명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기현 씨!”

쾅!

눈앞에서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시야가 차단되어 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가 손을 다시 이끌었다. 하지만 끌어당기는 힘이 아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강하고 강제적이었다.

“기현…… 씨! 이기현 씨? 잠깐만요……!”

“…….”

“할 얘기가…… 할 얘기가 있습니다! 예……? 이기현 씨……!”

방문에서 멀어지는 동안 날 부른 사내는 몇 번이고 내 이름을 연호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한순간 비명 같은 것이 울려 퍼졌고 내가 흠칫하며 어깨를 움츠린 이후 그 방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 *

손목을 붙들린 채로 방을 나온 뒤 내내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수십 가지의 상념이 떠올랐다가 흩어진다. 강준형이 했던 말…… 내가 확신을 가지고 했던 일…… 어리석음을 질책하던 혈족들의 소리…… 나를 채우고 터지게 만들려 했던 것들이 남자가 붙잡은 손목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집어삼켜졌다.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 모두가 내게 악의를 쏟아붓는데도 너만은 여전히 내 방패가 되어 주었다. 이끄는 대로 방 안으로 밀려들어 가 단둘이 되자마자 그가 팔을 잡아당기며 포옹을 해 왔다. 뒤에서부터 맞닿는 남자의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에 얼굴을 비비며 더 바짝 끌어안았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생명력이 차고 넘치는 그의 고동 소리가 날갯죽지에서 심장을 타고 울렸다. 너무도 가까워서, 넋을 놓고 있다 그의 맥동에 휩쓸려 버릴 것 같다.

그가 에스코트하듯 정중한 태도로 내 몸을 이끌었다. 몸을 돌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나를 안고 뺨에 입을 맞추는 남자에게 속삭였다. 못 들었을 리 없었지만 대답 없이 입술을 미끄러뜨리는 남자의 귀에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헤집던 손을 멈추고 곤란하단 얼굴로 웃었다.

‘괜찮아.’

‘내게 돌아왔으면 됐어.’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착하게 내 옆으로 돌아오면 돼.’

그럼 나는 네게 계속 관대해질 테니.

칭찬하듯 부드러운 손길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강준형이 매만졌던 부분을 더 뜨거운 체온이 덮는다. 어쩐지 안달이 났다. 옷감 위로 만지는데도 열기가 느껴지는 손바닥이 가슴 위를 진득하게 쓰다듬었다. 남자의 손이 몸을 더듬어 내려가 허리를 움켜쥐었을 때 견디지 못하고 내가 먼저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입술을 겹치기 전에 보였던 기하의 손목에는 내 것과 색만 다르고 같은 디자인의 시계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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