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3권) (15/47)

1

누군가가 옆에 왔다 가는 기척이 느껴진 것 같아 이어폰을 빼며 뒤를 돌아보았다. 휘둘러보자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문이 뒤늦게 닫히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의자 바로 옆에 샘플로 요청한 자료가 가지런히 쌓여 있다. 대충 훑어봐도 오늘까지 부탁했던 자료가 빠짐없이 들어가 있어 굳이 왔다 간 사람을 불러 세울 필요는 없었다. 그쪽은 인사를 할 생각도 없던 것 같고 나도 말을 붙이지 않으면 편했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다시 이어폰을 끼고 현미경의 배율을 조정했다. 쿵쿵쿵, 듣고 있던 시끄러운 록 음악이 귀를 울리며 바깥과 나를 단절했다.

“본가에서 보냈다던데.”

점심시간이 되어 사내 식당으로 이동했을 때 멀찍이서 식사를 하고 있는 남자를 젓가락으로 가리키며 김태영이 말했다. 엊그제부터 우리 팀에 소속된 연구원이었다. 정확하게는 내 부사수로 들어왔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난 못 본 얼굴이야.”

“네가 집안사람 중에 기억하는 얼굴이 있기는 하냐.”

힐끔 남자를 훔쳐보았다. 나도 연구소에서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는데 남자는 아예 필요하지 않은 대화는 일체 거부하는 타입인지라 같은 팀이 되고서도 이제껏 제대로 된 통성명을 하질 못했다.

“우리 가문 사람이면 누구 소속인데?”

“거기까지는 못 들었는데 아마 수뇌부의 사람일 거야. 연구소장에게 직접 오더를 받더라고.”

“연구소장이?”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의 옆에서 젊은 여자 연구원이 몇 번 말을 붙이다 도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내가 계속 쳐다보고 있자 흥미가 있는 걸로 오해했는지 묻지도 않은 것도 알려 준다.

“원래 전공이 이쪽이 아니었는데 억지로 꽂아 넣은 거 같던데……. 경아 씨가 물어봤다는데 유학파라고 했대. 나이가 스물여섯이랬나? 운도 없지. 첫 직장을 이런 거지 같은 델 오다니.”

“스물여섯이면 아직 어리네. 해외로 내보냈으면 다른 용도로 쓸 인재였을 텐데 왜 여기로 들여보냈지?”

“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 여기 은근히 3D직종이라니까? 아무도 안 온다고.”

“……그럼 제2의 김태영으로 보낸 건가. 네가 어지간히도 일을 안 했나 보네.”

나를 감시하라고 보내 놨더니 내게 쥐어 잡혀 있는 태영이었다. 슬슬 본가에서 새 감시인을 보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아닐걸? 그런 거치고는 지금도 봐. 너한테 관심 한 번을 안 주잖아. 따로 인사를 오는 것도 아니고.”

하긴 남자는 다른 연구원들보다도 더 내게 관심이 없었다. 내게로 눈길을 돌리는 걸 본 적도 없고 오가다 마주쳐도 어색한 목 인사 외에는 말을 붙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모르지. 너 같은 놈을 또 보냈을 리는 없으니까. 이번에는 다른 스타일을 보낸 걸지도.”

“아무튼 아닐 거야. 만약 그런 용도였으면 아마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을걸? 네놈이 똑바로 일 못해서 새 사람을 썼다고 집안의 수치라며 난리를 치셨겠지.”

“그럼 왜 굳이 우리 집안사람을 들여보낸 거지? 대부분 나랑 엮이면 피 본다는 걸 알아서 온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을 텐데.”

“아직 팽팽하고 아무것도 모를 때 한번 고생해 봐라 이거겠지. 뭐 우리야 똑똑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 들어왔으니 땡큐지만 말이야.”

“뭐…….”

뷔페 코너로 다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덩치가 있는 편이어서 하얀 가운이 지독히도 안 어울렸다. 학자 스타일로 가득한 이곳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상당히 튀어 초식 동물 사이, 그 홀로 육식 동물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니다, 초식 동물이 더 덩치가 컸으니 반대인가?

“잘하긴 하더라. 말귀도 밝고 일도 금방 배우고. 굳이 시켜 먹지 않아도 혼자 일 잘 찾아서 알아서 하더라고.”

“진짜……? 젠장 부러워 죽겠네. 웬만하면 내 쪽으로도 좀 돌려 줘. 이러다 나 또 불려 가게 생겼어.”

“너 하는 거 봐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식사 후 돌아와서 남자를 호출했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따로 부른 적이 없어서 내 연구실로 들어온 그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박사님.”

그냥 오가면서 대충 얼굴을 익히거나 인사를 했을 뿐이지 이렇게 단둘이서 독대한 건 처음이었다. 김태영의 말을 들은 후라 그런지 남자의 단정한 얼굴에서 익숙한 생김새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가슴에 걸려 있는 출입증에 쓰인 이름을 외우려 노력했다. 박종오. 박종오라.

“아 다른 일이 있어서 부른 건 아니니 긴장할 거 없어요. 앉으세요.”

커피를 내리며 ‘설탕은?’ 하고 물으니 큰 덩치와는 맞지 않게 뺨을 좀 상기시키더니 다섯 개쯤 넣어 달라고 한다. 나와 취향이 같다는 게 의외라 가만 쳐다보다 그의 잔과 내 잔에 각설탕을 쏟아부었다.

“일이 힘들진 않습니까? 우리 층이 다른 층에 비하면 인원도 턱없이 부족하고 하는 일은 많은 편이라서 적응하기 힘들 텐데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들어오자마자 끊이지 않고 일을 줘 미안합니다. 적응할 시간도 없이 부려 먹기만 했네요. 그래도 종오 씨가 와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제가 박사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어지간히도 FM이군. 재미없긴.

설탕 범벅이 된 잔 안을 티스푼으로 휘저어 녹이며 앞에 정자세로 앉아 있는 남자의 온몸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종오 씨는 어쩌다 우리 팀에 배속된 겁니까? 내내 구인을 해도 오는 분이 없었는데 이렇게 엘리트인 분이 올 줄은 몰랐거든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이요……. 누구 명이었습니까?”

그가 빤히 나를 쳐다보길래 지지 않고 마주 봐 주었더니 슬그머니 눈을 피한다. 호기롭게 명을 받아서 내 밑으로 왔다고 솔직하게 말해 놓고는, 특이한 남자였다.

“어머니께서.”

“어머니……요?”

“예. 어머니께서 박사님 곁에서 일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실례지만 어머님 성함이……?”

“이 연 자 화 자를 쓰십니다.”

아, 고모님……. 어쩐지. 크게 한숨을 쉬며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우리, 사촌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제껏 얼굴 한번 못 봤지요?”

“저는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그랬나요? 언제?”

“장례식 때였습니다.”

“장례식이요.”

하긴 우리 집안에서 혈족이 전부 모이는 건 큰 행사가 있을 때뿐이지. 고개를 주억거리자 관찰하듯이 내 행동을 지켜보던 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예. 외숙모님의 장례식 때 뵈었었습니다.”

박종오의 외숙모라면 내 어머니였다. 이젠 얼굴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 그의 말을 듣고 어머니를 잃었다는 자각보다 강렬하게 그날의 잔상이 떠올랐다. 완전히 비에 젖어 사자 같던 내 동생의 모습이. 그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의 일을 캐내려 틈이 날 때마다 고용인들에게 말을 흘렸지만 아무도 그날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기억이 잘려 나간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장례식 날 나를 보고 있었습니까?”

“…….”

“박종오 씨?”

“예, 보고 있었습니다.”

선선히 인정하는 그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렇게 인정하는 사람을 만난 것도 처음이었다. 대수롭잖은 만남이었는데 한순간에 등줄기가 팽팽해져 늘어져 있던 몸을 바짝 세워 앉았다. 이제부터는 말을 신중하게 골라서 해야 했다.

“벌써 몇 년 전이죠 그럼? 그때부터 봤으면 지금 제법 친해졌을 텐데 아쉽네요. 그때 어디에 있었습니까? 본당 앞에 모두 꿇어 엎드린 상태라 전 친척들 얼굴은 못 봤는데요.”

“어머니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럼 거의 맨 앞이었겠군요. 왜 고모님이 종오 씨를 내게 소개하지 않았을까. 우리 나이대도 어느 정도 비슷해서 함께 자랄 수도 있었을 텐데.”

“방계 혈족인 제가 어찌 감히 신의 후계자분들과 함께 자랄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는 제가 집안일에 되도록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게 꽁꽁 숨겨 두었으니 이제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거겠지.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았다. 그냥 대충 일 잘하는 직원 한 명 들어온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의외로…….

“고모님이 너무하셨네요. 직계면 어떻고 방계면 어떻습니까. 제가 어릴 때부터 집 안에만 가둬져 자라 친구라고는 동생밖에 없어 외로워했던 걸 뻔히 아시고서……. 또래라면 친구 삼게라도 해 주시지.”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박사님의 밑에 들어오게 된 것도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나도 만나서 기쁩니다. 새삼스럽게 반갑기도 하고. 그냥 동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가까운 사촌이었다니.”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선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눈이 마주치는 듯싶다가 또다시 검은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아 숨긴다. 내 눈이 불길함의 상징인 건 잘 알고 있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피하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는다. 입술 끝을 매만지며 어찌 구슬려야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필 저런 목석같은 스타일이라니. 이런 타입은 다루기가 골치 아픈데.

“유학파라고 들었는데 그럼 한국에는 언제 들어오신 겁니까?”

“저번 달에 귀국했습니다.”

“그럼 거의 쉬지도 못하고 바로 취직한 거네요? 이거 대화를 할수록 고모님이 너무하셨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종오 씨 같은 엘리트가 올 만한 곳도 아니고……. 솔직히 여기가 그렇게 좋은 직장은 아니라서요. 월급도 박봉이고 말이 연구소지 거의 막노동꾼이나 다름없이 일해야 하거든요. 분명 다른 쪽으로 쓸 인재였을 텐데 겨우 이곳에 온 게 아까워서……. 아, 말실수였을까요? 종오 씨가 이제라도 퇴사한다고 나오면 곤란한데.”

이렇게 말하며 웃자 딱딱했던 그의 얼굴에도 설핏 미소가 비쳤다. 몇 가지 당부와 함께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례상 부탁들을 곁들이는 동안 남자는 아주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고모님과 고모부님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고모님은 최근에 뵌 적이 있고…… 고모부를 뵙지 못한 지 정말 오래된 거 같네요.”

지나가는 말로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남자의 얼굴에 겨우 띤 미소가 순식간에 걷혔다. 어라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나? 남자는 한층 억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예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 그랬었나. 집안사람들한테 관심이 없으니 알 턱이 없었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박사님께서는 기억이 안 나시는 모양이군요.”

“음……, 내가 실은 친척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닙니다. 사실 고모부를 만나 뵌 기억도 없어서……. 정말 미안합니다.”

“박사님께서 왜 사과를 하십니까.”

남자는 아까와 달리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 눈. 아까부터 묘하게 저 눈이 거슬렸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저 얼굴도. 분명히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생김새였다. 하지만 전혀 떠오르지 않는 생김새기도 했다.

“당신께서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죽을 만해서 죽은 거니까요.”

뭐? 황당해하는 나와는 반대로 박종오는 다시 아까처럼 덤덤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자기 아버지가 죽을 만한 사람이었다는 소리를 해 놓고 일말의 동요도 없는 모습이었다.

“고모부가 대체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기에 그런 소리를 합니까.”

“…….”

“그래도 아버지였을 텐데.”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더듬거리는 나를 그는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외숙모님의 장례식 날 돌아가셨습니다. 박사님의 눈앞에서요.”

“…….”

“안심했습니다. 혹시 아버지 때문에 절 보는 게 힘드시지 않을까 싶어 얼굴을 들고 다니기 송구했었는데.”

황망한 시선을 돌리다 그의 무감각한 눈과 마주쳤다. 박종오의 눈과 생김새는 고모와 전혀 닮아 있지 않았다. 우리 집안 직계 순혈들에게 나타나는 색채가 강한 눈동자와는 달리 그는 색이 없는 새카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전혀 열이 오르지 않은 무표정을 하고 있음에도 어쩐지 비릿하게 느껴지는 시선을 보고야 깨달았다. 남자의 얼굴이 기묘하게 낯이 익었던 이유를.

저 얼굴, 저 눈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순식간에 머리채를 잡혀 닫아 두었던 그날로 끌려들어 간다. 소파에 닿은 등이 비라도 맞은 듯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향냄새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새빨간 조등이 시야를 밝혔음에도 일어난 물안개가 눈앞을 뿌옇게 가렸기에 지옥같이 어두웠다. 등에 진 동생의 무게가 비와 함께 천근처럼 등을 짓눌러 발을 내디딜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더러운 피가 고여 있는 진창에 머리를 처박을까 봐 바닥을 내려다보지도 못하고 비 웅덩이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한 명, 한 명 몸을 일으킬 때마다 내 다리를 타고 혐오감이 뱀처럼 기어오른다.

옷 속으로 파고들던 썩은 가지 같은 손가락들 사이로 무기물의 검은 눈을 한 남자가 있었다. 제일 먼저 물웅덩이에서 나에게로 걸어와 멱살을 움켜쥐던. 쥐어짜 내도 보이지 않던 내 마지막 기억을 채우고 끊기게 만들었던 사람.

역한 물비린내가 코끝으로 확 끼쳐 들었다. 속이 넘어올 것 같아 황급히 숨을 멈췄다.

나는. 나는 고모부를 본 적이 없는 게 아니었구나.

* * *

―왜 그렇게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요.

마시던 맥주 캔을 조심스럽게 옆에 내려놓고 전화기를 어깨에 끼었다. 근처 공원에서 마실 셈이었는데 날이 저물고 추워서 차 안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를 냈는데도 동생은 내 기분 변화를 눈치채고 무슨 일이냐 물어왔다. 가끔은 그가 사실 내 몸의 주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 자신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알았다.

“별일 아냐. 이제 막 퇴근할 참이었어.”

저녁 바람에 소름이 돋아난 피부를 쓸어내리며 히터 버튼을 눌렀다. 궁상맞게 혼자 있지 말고 일찍 들어가 쉴 걸 그랬다. 하긴 내가 가고 싶은 곳도, 갈 수 있는 곳도 없었지만……. 괴물의 소굴 같은 본가도, 홀로 남겨진 듯한 레지던스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비가 내리려는지 먹구름이 가득 끼어 별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힘없이 시트에 몸을 묻고 전화기를 더 가까이 대었다. 기하의 목소리를 안주 삼을 셈이었다.

“넌 뭐 하고 있었어?”

―일할게 좀 남아서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 피곤할 텐데 그만하고 자지.”

―제가 피곤해 봤자 형님만 하겠습니까. 저야 집에서 가져다주는 서류나 훑어보면 되는걸요. 밖에서 일하시는 형님께서 고생이시죠.

밖에서……. 두 번 다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몸이면서 어떻게 그리 질시하지도 않고 태연히 나를 위로할 수 있을까. 너는 평생을 갇힌 것이나 다름없이 살아가면서.

“너는 진짜…… 늘 상냥하게 말하네.”

―그런가요? 다행입니다. 다들 나를 무서워하기만 하는데.

“그건 너를 몰라서 하는 소리야.”

별이 없는 하늘을 처음 본 사람은 그저 새카만 장판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네 찬란함을 보지 못한 사람은 눈부심보다 그 위에 도사린 어둠만을 기억할 것이다. 그래도 다른 자들에게는 베풀지 않는 애정을 온전히 나에게만 쏟아 주는 게 좋았다.

캔을 홀짝이며 기하와 오늘 있었던 얘기를 하나씩 주고받았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다는 얘기나 날이 점점 더워진다는 얘기, 무슨 업무가 있었고 어떤 손님이 찾아왔었다는 얘기, 점심 메뉴가 뭐였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말들을 나누었다. 물론 박종오에 대한 얘기는 제외하고.

―그래서 어디십니까?

“이제 집으로 가려고.”

―우리 집으로요?

우리 집이라니. 한순간 혹해서 대답할 뻔했다. 열을 떨쳐 내려 고개를 흔들었더니 얘기하며 제법 마셔서 그런가 취기가 확 올라온다.

“아니. 내 집…… 아니다. 네 집인가? 누구 집이라고 해야 하지 거길.”

사는 건 나니까 내 집인가? 네가 사 준 집이니까 네 집이라고 해야 하나?

―형님.

혹시 취하셨나요? 내 횡설수설에 다정했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겨우 두 캔 마셨을 뿐이라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쩡한데 무슨 소리냐고 부인했다. 단지 좀 졸리고 피곤하고 지쳤을 뿐이지 취한 건 절대 아니라고.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어디십니까?

“아니라니까. 일이 좀 밀려서 피곤해서 그래. 술은 무슨. 나 술 잘 안 마시는 거 알잖아.”

―어디예요. 운전대는 잡지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

역시 동생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나. 뜨끔해져 머쓱하게 운전대를 쓸어내리던 손을 떼었다.

“……화내지 마 기하야.”

―화내는 거 아닙니다.

“맞잖아. 화내고 있는 거…… 목소리가 화났는데?”

―맞네요. 형님도 취하신 거.

들고 있던 맥주 캔의 마지막 모금을 넘기고 손안에서 캔을 우그러뜨리며 웃었다. 취한 건 인정할 수 없지만 계속해서 저조해지고 있는 건 맞는 거 같다. 기분이 널을 뛰듯이 극과 극을 왔다 갔다 했다.

“그냥 봐줘. 오늘은 좀 마시고 싶어서 그랬어. 운전은 대리 부를 테니까.”

―멀쩡한 집을 놔두고 왜 밖에서 그러고 있어요. 제가 당장 보러 달려갈 수도 없는데 형님께서 그러시면 제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정 마시고 싶으셨으면 제게 오시지.

“너는 별로 좋은 술친구가 아니거든. 취해서 너한테 무슨 추태를 부릴 줄 알고.”

뜨거워지는 목을 쓰다듬었다. 온몸은 차가웠는데 술이 들어가고 있는 목구멍과 심장 부근만 뜨끈뜨끈해졌다.

―술친구쯤이야. 뭐든지 되어 드린다고 약속했지 않습니까. 형님이 되어 달라는 건 뭐든지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독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난 이제 절대 너에게 뭐가 되어 달라고 하지 않을 셈이었다. 내가 네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줄 수 없는데 너에게만 요구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이미 너에게 진 빚이 너무나도 많았다.

“기하야.”

―예. 형님.

“네가 아직…… 계승하기 전에 함께 하늘을 보러 다녔던 것 기억나?”

―물론입니다. 특히 본가 근처 산에서 보는 하늘이 맑아서 예뻤었죠.

“그때는 어디를 가도 별이 보였던 것 같은데 이젠 어디를 가도 별이 보이지 않네. 많이 더러워졌나 봐.”

내가 더러워졌듯이 하늘도 더러워졌나 보다.

마지막 말은 꺼내지 못한 채 새 캔의 뚜껑을 열었다. 외로움을 달래 보려 찾았던 곳은 도리어 더 상실감만 안겨 주어 씁쓸하게 입술에 닿은 맥주 캔을 기울였다. 어릴 때 보았던 고래의 지느러미 같은 별들을 볼 수 있는 곳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기하와 갔던 산을 홀로 오르기에는 나는 너무 겁쟁이였고.

그곳은 내 마지막 보루였다. 기하의 손을 잡고 두 번 다시는 오르지 못하는 그곳은 내가 정말 죽고 싶어질 때 홀로 몸을 눕히기 위해 남겨 두었다. 나도, 동생도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그때 그 풍경만큼은 변색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거라 믿으며.

기하는 전화 너머로 캔 마개가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침묵하더니 고해하듯이 속삭였다.

―사실 저는 형님께서 하늘을 보시는 게 싫었습니다.

“그것만 싫어했는지 알아? 내가 다른 데 가는 것도 싫다. 하늘을 보는 것도 싫다. 다른 사람이랑 친해지는 것도 싫어했고 남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싫어하고. 싫은 것투성이였지. 널 돌보는 게 얼마나 힘들었다고.”

힘들기는커녕 예뻐 죽을 것 같은 동생이었지만 그렇게 주정 부리자 그가 낮게 웃었다.

―좋아하시잖아요. 형밖에 모르는 동생이라고 자랑스러워하셔 놓곤.

“그래. 그렇게 너는 예나 지금이나 나밖에 몰랐었어. 어떻게 그럴까 이해 안 될 정도로……. 네가 하도 나를 따라다녀서 다른 형제들도 다 우리 같은 줄 알았어. 평생 변하지 않고 함께 있을 수 있을 줄 알았지.”

―…….

그가 무얼 하는지 부스럭거리다 덜컹하는 소리가 났다. 바람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창문이라도 연 것 같았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들려오는 희미한 한숨에 그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호흡하는 게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변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을 겁니다.

눈가가 뜨끈해져 손으로 비볐다. 그 애 말대로 이제 우리는 평생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제물이고 아이가 신인 이상 우리는 영원히 묶여 있을 것이다.

나오고 싶지 않냐고.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너도 나처럼 나오고 싶지 않냐고 물어보고 싶은 걸 꾹꾹 참았다. 봐, 확실히 나는 취한 게 아니었다. 예전에 한번 똑같은 물음을 했을 때처럼 기하가 나를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나올 수 없다고 대답하면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어 말을 삭혀 버렸다. 이젠 내 힘으로는 기하를 그 피 웅덩이에서 구해 줄 수도 없으면서 그렇게 실없는 물음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언제나 동생에게 물어볼 말이 수없이 많았고 수없이 많은, 듣고 싶지 않은 대답도 있었다. 그래서 그 수많은 것들을 그냥 술과 함께 전부 삼켜 버렸다.

“매번 늦게 전화해서 미안해. 목소리 들어서 좋았어.”

―저도요.

“그만 들어갈게. 너도 이제 그만 쉬어.”

―대문을 열어 두라고 하겠습니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가 올 것을 대비해 항상 문이 잠겨 있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그래. 잘 자.”

―형님도요. 좋은 꿈 꾸십시오.

우리는 인사를 건네고도 전화를 끊지 않고 한참 동안 상대방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내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기하의 목소리, 숨소리가 들리지 않고 사방이 고요해지자 미칠 것 같아져 손을 뻗어 오디오 판부터 조작했다. 금세 선곡해 두었던 시끄러운 록 음악이 쾅쾅거리며 차 안을 가득 메운다. 소리의 분자 같은 게 무수히 쏟아져 피부를 두들기며 공허해진 몸을 채워 나갔다.

볼륨을 더 크게 키웠다. 귀가 터져 나갈 것 같고 신고가 들어올 정도의 소음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맥주 캔에 힘을 주자 알루미늄 몸체가 구겨졌다. 낮의 박종오는 내게 멱살이 잡힌 채로도 아무런 동요 없이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혈족들과는 달리 기다려 주기만 한다면 아주 느리고 조용하게 물음에 답을 붙여 주면서.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더는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가주님의 제어가 없는 당신은 벌거벗겨 불개미 둥지 위에 던져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진정시키려는 듯 아주 천천히 내 손 위로 손바닥을 포개 왔다. 그의 체온이 닿기 직전에 소스라치게 놀라 멱살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밀려오는 혐오감에 황망해하는 나를 지켜보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는 당신께 감응해서 죗값을 치렀습니다.’

‘…….’

‘진실을 알고 싶어 하시는 거야 당연하지만 묻어 둔 것을 들춰내시면 가주님의 죄 역시 드러날 겁니다.’

그래도 계속 알아보시겠습니까?

그건 충고도 아니고 경고였다. 계속 들쑤시고 다니면 내 동생이 다치게 될 거라는 협박.

눈을 감고 심호흡하며 기대어 있자 술이 오르면서 문신을 새겼던 손목 쪽이 뜨거워졌다. 알아보고자 했던 일들이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원승호가 건네준 사료도, 박종오와의 대화도, 결국 내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오히려 그동안 내가 해 왔던 일들이 전부 기하에게 해가 되는 일이었다는 것만 알려 줬을 뿐이다.

어떻게 이렇게 나란 인간은 무력하고 쓸모가 없지. 내가 하고 있는 게 과연 옳은 일이기는 해? 그냥 혈족들의 말대로, 기하가 원하는 대로 신의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안주하는 게 제일 현명한 일이지 않은가.

나만 가만히 있으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그게 사실이었다.

다 마셔 버린 빈 캔을 옆 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쾅쾅 울리는 차 안의 음악 소리에 맞춰 숨을 헐떡거리고 있을 때였다. 틀어 두었던 록 음악이 종료되고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기 위한 공백의 기간에.

똑똑똑.

창문을 두드리고 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음악을 중지시키고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려 밖을 확인했다. 창문 밖에서 차 안을 들여다보려 허리를 굽히고 있던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다. 차창을 내리자 옆에 서 있던 경관이 내 얼굴을 확인하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실례합니다. 선생님. 너무 시끄럽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술을 많이 드셨네요.”

“이제 들어갈 참이었습니다. 시끄럽게 해서 미안합니다.”

경찰의 요구에 재킷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통째로 건넸다. 고개를 가누기 힘든 걸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이제 귀가하신다고요. 그럼 제가 운전해서 모시겠습니다.”

그가 자신의 배지를 보여 주며 무어라 얘기하더니 동의 없이 차 문을 열었다. 어쩔 수 없이 남자의 손에 부축받아 뒷좌석에 앉았다. 최근 이렇게 많이 마신 적이 없어선지 고작 맥주 몇 캔이었는데도 알코올을 이겨 내지 못한 몸이 힘들어하는 게 느껴졌다. 곧 젊은 경관이 운전석에 앉고 옆자리에 다른 동료 한 명이 더 타는 걸 끝으로 시동이 걸렸다.

시트에 깊게 몸을 묻고 머리를 기댔다. 술 냄새가 나는 단 한숨이 흩어졌다. 향이 진한 술을 마시지 않은 게 아쉬웠다. 차 안에서 술 냄새라도 진동하길 바랐는데 이 차 안에서조차 나 혼자만 취해 있었다.

거칠게 운전하는 내 방식에 비해 경관의 운전은 대단히 조용해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미끄러지듯 레지던스로 향하는 고가 도로로 진입했다. 새카만 차창에 가로등 불빛이 기이하게 늘어지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위화감이 느껴져 입을 열었다.

“경관님.”

“예.”

“……제가 주소를 말한 적 있었나요?”

“예. 신분증에 나와 있는 걸 봤습니다.”

경관의 눈이 백미러를 향했다. 거울 속에서 시선이 마주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가 도로에 촘촘하게 세워진 가로등 불빛이 차량의 속도에 맞춰 하늘하늘 흔들리며 따라왔다. 별빛이 들지 않는 강바닥은 인공적인 불빛으로는 한가운데를 밝혀 주지 못해 중앙이 뻥 뚫린 블랙홀 같았다. 새카만 구를 건너보자 아까부터 뜨거웠던 손목이 이젠 바늘로 찌르듯 욱신거렸다. 삶을 비관하여 저 어두운 곳에 몸을 던지러 온다는 자살자들이 감탄스러웠다. 겁쟁이인 내겐 따라 하지도 못할 용기였다. 진실로 죽고 싶었던 때조차 나는 힘줄까지 가르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살갗에 겨우 이런 얄팍한 상흔만 만들었을 뿐이다.

어느새 차는 레지던스 바로 근처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엔진을 끄지 않은 차체가 부드럽게 흔들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묻자 루프 위로 툭, 툭, 무언가가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빗방울보다 소리가 먼저 장마를 몰고 오고 있었다.

* * *

‘장마가 시작되려나 보네요.’

물비린내를 품은 스산한 바람이 창문을 넘어와 읽고 있던 책장이 저절로 팔랑팔랑 넘어갔다. 손으로 누르기도 전에 책상 위의 종이들이 바닥에 사뿐거리며 내려앉아 뒤에 자리해 있던 고용인이 주워 건네주었다. 그녀가 창문을 닫아 드리냐고 말했지만 등불의 세기를 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

달강…… 달강…….

처마 밑에 걸려 있던 풍령이 부딪히는 소리가 점차 잦아진다. 외풍에 열어 둔 유리창이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것 같은 흐린 구름이 집 위를 온통 덮고 있었다. 답답한 집 안이었다. 고용인이 입고 있는 새카만 상복이 보기 싫어 다시 책 속으로 눈을 파묻었다.

아버지가 타계한 지 7년째였다. 여우 신이 일족의 곁을 떠난 지 겨우 7년 지났지만 집안에서는 곡소리가 가실 날이 없었다. 신이 떠나고 난 이후, 베풀었던 것들을 응당 거둬 간다는 것처럼 피를 이은 자들에게 흉사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얼굴 한 번 본적 없던 일족의 누가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하더라, 친척 누구의 자식이 사고를 당했다 하더라, 굳이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아도 집안이 망해 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일족들은 나와 내 동생에게 미친 듯이 집착했다. 하루빨리 신이 발현되기만을 빌었다. 여우 신이 내려와 가문을 구하기를 손꼽아 염원했다.

나와 기하를 바라보는 눈들이 선뜩하게 변했고 혹시라도 후계자들이 본가를 떠나 도망칠까 염려해 사방팔방에 감시가 붙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처럼 등굣길이나 하굣길을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인파가 많은 상점가는 물론이었다. 가문은 망해 갔지만 언제나 최고급 차량과 수행원들이 딸려 있었기에 학우들은 우리가 어마어마한 재벌가 자제들인 줄 알았다. 겉은 멀쩡하고 화려할지언정 속은 완전 썩어 들어가 뭉그러진 채 악취를 풍기는 것을 남들은 몰랐다.

하루 종일 창문을 열어 두어도 빠지지 않는 향냄새에 결국 질려 버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문가로 걸어가자 수발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이 얼른 따라나서기에 손을 내저었다.

‘어디로 가시나요? 차를 대기시키겠습니다.’

‘아니요. 그냥…… 근처 좀 걸으려고요.’

‘더운 바람이 부는 걸 보니 곧 있으면 비가 몰아칠 텐데요. 건물 안에 계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알아서 해요.’

툭 쏘아붙이자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는 게 가소로웠다. 내가 신이 될 줄 알고 저렇게 고분고분한 걸 뻔히 아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그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여우 신 따위는 되지 않을 것이다. 신이 내 몸을 뺏기 위해 내려온다면 나는 콱 죽어 버릴 작정이었다.

여우 신이 되지 않게 해 주세요.

평생 이 끔찍한 집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신 따위. 제물과 붙어먹는다는 더러운 신 따위가 되느니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나았다. 이지를 상실하고 영혼과 몸을 빼앗긴 채 꼭두각시로 사느니 그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아버지 같은 건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복도를 달음박질하여 대청마루에 다다랐다. 정말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습기를 머금은 뜨거운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마루 밑에 놓여 있는 신발을 꺾어 신는데 매번 옆에 있던 동생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치워 두었나 싶어 장을 들여다보았지만 아이가 집 안에서 신는 신발이 없었다.

‘……혹시 기하가 어딜 나갔습니까?’

‘예. 잠깐 별채에 가셨습니다.’

그곳엔 또 무슨 볼일로 갔을까. 뱀을 제물 삼았던 선대 신 덕분에 뱀 굴이나 다름없었던 그곳이 뭐가 볼 것이 있다고 드나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아직도 별채에 가면 그것들이 보이는 듯 섬뜩하여 발을 들이고 싶지 않던데.

다른 건물들은 시대에 맞춰 겉은 한옥이긴 해도 현대식으로 실내를 꾸며 놓은 것에 비해 별채만은 아버지의 특이한 취향에 맞춰서 옛것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겉과 안이 제일 잘 어울리는 건물이었지만 동시에 본가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동떨어진 건물이기도 했다. 보수하지 않아 아직도 밟으면 삐걱거리며 우는 나무 마루에 올라 기하가 있을 만한 방을 찾아갔다.

아버지가 머물렀던 방. 아버지가 스스로를 유폐하고 감금했던 방. 아버지의 비명 소리가 환청이 되어 들리는 듯한 커다란 방문 앞에 서서 조용히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끼익…….

어렸던 손으로 내 키만 한 위치에 있던 문고리를 잡은 순간이 스쳐 지나간다. 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방 안 가득 알 수 없는 매캐한 연기가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하곤 했었다. 달콤한 듯하면서도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던 연기의 냄새가. 시야를 가리는 연기를 뚫고 들어가야 겨우 흐트러져 있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누운 그의 발밑에는 언제나 모양과 색이 제각각인 뱀들이 도사렸다. 아버지가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그 사특한 것들은 자기들이 그의 눈이라도 되는 양 대가리를 들고 어린 나를 주시했다. 세로로 쫙 찢어진 짐승의 눈동자 수십 개가 번뜩이며 신성한 영역에 들어선 이방인을 해체하고 조각했다.

뱀들이, 사악한 제물이, 누워 있는 아버지를 잡아먹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그가 고개를 돌려 내 모습을 확인하고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뒷걸음질 치다……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도망쳤었다. 뒤늦게 내 발소리를 확인한 아버지가 애타게 이름을 불렀지만 무시했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았다.

눈앞을 메우는 자욱한 연기에 숨이 멎을 것 같아 발을 멈췄다. 연기 속에 숨어 있던 뱀들이 발밑으로 고여 들 것만 같아 그때처럼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을 때였다. 등 뒤로 메아리치던 아버지의 음성 대신 나를 붙잡는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형님?’

‘…….’

‘형님이신가요?’

청명한 어린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겨우 멋대로 뻗어 나가던 생각이 멈췄다. 정신을 차린 내 눈앞에는 그때처럼 기어들던 뱀도, 비명을 지르던 아버지의 환영도, 눈앞을 가득 채우던 연기와 그림자를 드리우던 어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이제는 주인을 잃고 텅 비어 버린 커다란 방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전면부의 창틀에 기대앉은 동생이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하얀 빛이 오롯이 동생의 신체를 비추고 있다. 눈이 부셔서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이며 빛을 가만히 흐트러뜨렸다. 어릴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아 왔던 기하의 자세는 항상 흐트러짐 없이 바르고 정아했다. 어디에 앉아 있건 곧게 뻗어 떨어지는 등의 라인과 목덜미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쿵…… 쿵…….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보다 더 크게,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로.’

별채에 좀처럼 발걸음을 하지 않는 나를 알기에 동생이 다시 물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자 이윽고 해사하게 웃는다.

‘절 찾으러 오셨군요?’

언제부터였을까. 기하가 나를 보고 저렇게 천진하게 웃어 주면 심장 한구석이 지끈거리며 반응하는 것이. 저릿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통증은 최근에 겨우 자각하게 된 생소하고 낯선 감각이었다. 무심결에 가슴팍에 손을 올려 쓸어내리며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응.’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 내 대답에 환하게 밝아졌다. 아직 덜 여물어 보송보송한 느낌을 주는 얼굴로도 위험하리만치 사람의 기분을 달뜨게 만드는 미모였다. 그리고 동생은 자기가 남에게 그렇게 보일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기뻐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이 그가 걸터앉은 창문에서 들이쳐 내 앞까지 흘러들었다. 바람결을 타고 어렴풋이 동생의 체취가 느껴졌다. 아주 아기 때는 우유 냄새라고 생각했던, 달콤한 바닐라 같은 향기였다.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켜며 향기를 더 들이마시려 애썼다. 그냥 동생의 곁에 다가가면 쉬운 일일 텐데도 감히 동생의 옆에 가지 못하고 그저 문가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기하가 입은 흰 반팔 셔츠의 소매가 나부끼듯 팔랑팔랑 흔들리는 게 예뻤다.

불현듯 꽃이 피어 있는 것 같다고, 창가에 꽃이 한 송이 피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게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을 그때 바로 자각했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저기…… 같이 나가서 좀 걷지 않을래? 비가 올 것 같은데.’

방 안에는 들어가지 않은 채로 머뭇거리며 말했지만 아이는 한 번 더 나를 재촉했다.

‘이리 오세요 형님. 여기 정원이 정말 잘 보여요.’

‘…….’

‘어서요.’

손을 내밀어 오라고 부르는데 가지 않을 재간이 없어 결국 나는 방 안에 발을 들이고야 말았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안아 달라며 팔을 벌렸지만 그냥 반대편 창틀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동생이 내밀었던 팔을 그대로 뻗어 가만히 내 손을 찾아 쥐었다. 수백…… 아니 수천 번은 잡았을 손이었지만 이상한 기분이 고조되어 뿌리치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최근 이상하게 기하의 스킨십이 편하게 느껴지질 않았다.

아이의 말대로 아버지가 서서, 혹은 앉아서 보고 있었을 창문 앞의 풍경은 실로 아름다웠다. 작은 연못 옆의 정돈된 화단에는 연보라색 수레국화가, 하얀 싱아꽃과 수정란풀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오색 빛이 돌도록 섬세하게 측량하여 심어 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누가 관리했는지는 몰라도 아마 엄청난 애정을 쏟아부으며 가꾸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뱀을 발목에 감은 채로 이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을까. 불러도 오지 않던 나를 여기에 앉아 기다리고 계셨던 건 아닐까.

‘그러네. 진짜 잘 보이네. 이걸 보려고 별채에 왔던 거였어?’

‘여기 있는 게 좋아요. 마음이 편해져서.’

‘너는…… 여기가 편해?’

‘예. 아름답지 않아요?’

‘글쎄 나는 별로……. 꾸며 둔 걸로 보면 안채의 정원이 훨씬 예쁘잖아.’

그만하고 나가자는 식으로 은근히 말을 흘렸지만 눈치 빠른 동생이 오늘따라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딴소리를 했다.

‘여기는 신이 머물던 곳이라 고용인들이 함부로 오질 않거든요. ……조용해요. 아주. 여기서 뭘 해도 아무도 모를 정도로 말이죠.’

아이의 붉은 눈이 내 몸을 훑는 게 느껴지자 옆구리 부근이 쓸데없이 간질거렸다. 일부러 외면하며 정원의 꽃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굴하지 않고 기하의 눈이 계속해서 내 온몸을 훑었다. 핥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기하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괜히 민망한 느낌에 열이 올랐다. 정원을 보자고 꼬여 내어 앉혀 놓고 정작 아이는 창밖으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있었다. 나도 눈으로는 정원의 꽃을 보면서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죄 없는 꽃들에게 거짓 시선을 주며 입 밖에 결코 꺼내지 못할 망연한 생각을 쓰고 상상을 그려 나갔다.

내 머릿속의 주인공은 언제나 내 어린 동생이었다. 다만 순수하게 채색되었던 이야기가 점점 더러운 얼룩으로 덧칠되어 갔을 뿐. 상상은 언제나 무게를 더해 가다 결국 헛된 망상이 되고야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툭, 툭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뺨 위에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져 내렸다.

‘비 오네.’

아주 멀리서 구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에 앉아 울어 대던 풀벌레들이 비를 피해 일제히 날아올랐다. 후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정원의 잎사귀들이 점점 빠르게 쏟아지는 빗방울을 맞아 젖어 들며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솨아아……. 금세 쏟아지는 빗줄기에 사방으로 물보라가 일어난다. 정원의 풀 냄새……, 흙냄새……. 물비린내가 솟아오르며 바짝 말라 있던 옷이 젖어 들었다. 원래도 눅눅했던 분위기가 아예 물속에 잠겨 드는 듯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우리가 앉아 있는 바로 근처의 창틀까지 차가운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그 와중에도 동생은 아직 내 몸을 쓸어내리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입 안에 신 침이 고여 들어 연신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나를 보는지 몰라도, 내년에 고등학생이 될 나는 내 몸을 지배하려 드는 이 야릇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몸의 바깥은 젖어 가고 있었는데 목구멍 안은 바짝 타들어 갔다.

……미쳤어. 내가 미쳐 버린 거야. 그러지 않고서 이런 생각을 할 리가.

입술을 깨물며 방금 막 자각하기 시작한 감정을 부정하고 흩어 버리려 애쓰자 기하가 좀 더 힘을 줘서 깍지를 껴 왔다. 맞잡은 손이 뜨거워서 땀이 차올랐다. 체온이 차가운 편이라 여름에도 웬만해선 땀을 흘리지 않는데 그냥 손깍지를 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땀이 났다.

땀이 배어나 축축해지는데도 아이는 손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땀이 났다는 핑계로 손을 풀려 드는 나를 벌하듯 더 깊게 손가락을 얽었다. 엄지로 땀에 젖어 있는 손가락 사이의 여린 살을 매끄럽게 문지르자 기다렸다는 듯 하반신에 은밀하게 힘이 들어간다. 숨이 가빠졌다. 막 자위하는 법을 배워 침구에 대고 비벼 대기 직전에 느꼈던 그 느낌이었다.

‘기하야.’

‘네.’

내가 느꼈던 시선은 역시 착각이었는지 기하가 순진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왔다. 그 얼굴을 보며 죄악감과 죄책감이 묘연하게 올라왔다.

‘……손에서 땀나.’

‘그래서요?’

‘좀…… 더운데.’

‘그래요? 그럼…… 벗으실래요?’

‘뭐?’

당황하는 나를 보고 그가 천진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여기 고용인들이 잘 안 온다니까. 더우면 벗고 있어도 아무도 보는 사람 없어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지만…….

네가, 네가 보고 있잖아.

내가 혼란스러워하자 기하가 내 쪽으로 조금 더 바짝 다가왔다. 창틀은 상당히 큰 편이었지만 중학생인 두 남자애가 걸터앉아 있기에는 비좁아서 가뜩이나 얽혀 있던 다리가 겹쳐서 비벼졌다. 좁다며 자세를 달리하다가 반쯤 선 다리 사이가 보일 지경이었다. 아무리 동생과 막역한 사이라 하더라도 이런 꼴을 보여 줄 순 없어서 몸을 물려 그 애에게서 멀어지려 애썼다. 더더군다나 내가 흥분한 이유가 동생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건 죽어도 알려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등 뒤의 창틀에 바짝 몸을 붙일수록 기하가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더 다가와 마음껏 맡을 수 있었던 체취가 이젠 아예 위협적으로 코끝에 밀려들었다. 내 몸에서는 물비린내와 합쳐져 맡기 싫은 눅눅한 땀 냄새만 나고 있었는데 어린 동생의 몸에서는 달콤하고 좋은 향기만 난다. 푸른 물에 잠겨 있는 세상에서 그 홀로만 따사로운 햇살 같았다. 몸이 가까워져 향이 짙어지며 다리 사이는 더 뜨거워졌다.

……울고 싶어졌다. 차라리 조금 이상한 낌새가 났을 때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기라도 할 것을.

콰르릉! 하늘이 몇 번이나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마다 그게 나를 벌하는 것이라도 된 양 움질거렸다.

아이의 눈길이 반쯤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는 내 가슴팍에 오랫동안 지그시 머물다 올라왔다. 기하의 옷도 새하얀 색이라 비에 푹 젖어 있는 옷 위로 옅은 피부색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는 상태였다. 현기증이 인다. 옷감에 작은 돌기가 걸려 있는 걸 보자 옆구리의 간질거림이 심해지다 못해 아예 욱신거렸다. 아이가 어릴 때는 서로 발가벗고 씻겨 준 적도 적지 않은데 오늘따라 내 몸이 너무 이상했다. ……아버지가 머물던 장소라서일지도 모른다. 신을 가둬 두었던 이 미친 장소는 누구라도 그렇게 만드는 걸지도.

‘……하지 마세요.’

‘…….’

‘피 나겠어.’

언제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는지 기하가 조심스럽게 손을 눌러 저지시킨다. 네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도 이렇게 다정할 수 있을까? 어린 티가 가시지 않아 솜털이 보이는 보드라운 얼굴이 한 점의 티끌도 묻어나지 않을 만큼 무구해 보여서, 그런 그를 앞에 두고 불결한 생각을 한 스스로가 짐승같이 느껴졌다. 자신이 너무나도 하찮았다. 저렇게 깨끗하고 티 없는 존재를 보고 감히 그런 것까지 상상하다니.

숨을 참으며 억지로 그의 얼굴과 몸을 외면한 채로 나를 욕했다. 다행히 자신을 더럽고 추악하게 느낄수록 가랑이 사이는 힘을 잃고 수그러들었다. 아예 죽어 버리길. 싹을 뽑아내어 짓밟기를. 다시는 그런 부도덕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더 강하게 계속해서 본인을 지탄하며 채찍질했다. 이런 감정을 품는 자는 인간도 아니고 짐승보다도 못한 것이라고 되뇌었다.

동생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모호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들어 차가워진 내 뺨을 어루만졌다. 마치 그가…… 내 더러운 생각을 모조리 읽고 있는 것 같아 움직일 수 없었다.

비에 젖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수려한 얼굴 위에 흩어지는 것을 보며 동요하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뛰지 마…… 뛰지 마 제발. 깨끗한 빗방울이 섬세한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려 턱에 맺혀 떨어졌다. 그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습하게 물든 속눈썹 아래에서 보석 같은 눈이 요사한 빛을 뿜었다. 조금만 고개를 올리면 바로 입술이 닿을 가까운 거리에서 겁에 질린 채로 동생의 밑에 짓눌렸다. 이러다 정신을 못 차리고 내 망상을 현실화시킬까 봐 그것이 제일 두려웠다.

그렇게 자학하는 나를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어 왔다.

‘크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응?’

‘내가 작은 게 좋아요?’

‘무슨…… 소리야……?’

기하는 내 차가운 뺨을 손등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혼잣말하듯 속살거렸다.

‘내가 커 갈수록 형님이 무서운 것을 보듯 바라보시니까…….’

‘…….’

‘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형님이 절 예뻐하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망설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아니……. 빨리 자랐으면 좋겠어요. 얼른 자라나서…….’

아이는 자신이 성인이 된 모습을 상상하듯 가늘게 눈을 떴다. 창틀 끝에 간신히 매달린 채로 그가 몇 차례나 앞의 내용을 반복해서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매만지며 그가 고아하게 웃었다.

‘형님보다 훨씬 크게 자라났으면 좋겠어요. 더 힘도 세지고 키도 더 크고 덩치도 더 커져서…….’

‘…….’

‘형님이 쉽게 밀어 낼 수 없을 정도로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거칠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기하는 내 입술을 훑어 내려 젖어 버린 손가락을 혀를 내밀어 핥았다. 커다란 굉음이 들리고 번쩍거리는 섬광과 함께 한바탕 지축이 울렸지만 그의 붉은 입술이 열리는 것에서, 새빨간 혀가 손가락을 빠는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체 기하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나는, 결국 죄를 지을 것이다.

습한 냄새가 올라온다. 물비린내도 아니고, 풀 냄새와 흙냄새도 아니었다.

그것은 발정한 사춘기의 냄새였다. 내가 지켜 오던 것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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