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이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말 그대로 방울이 구르는 듯한 예쁘고 맑은 웃음소리였다. 근처에 어린애가 있나 보다. 한참을 서서 듣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끊기지 않는 웃음소리가 나를 부르고 있는 양 쫓아갔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솟아오르듯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발길이 닿는 위치에 이런 호수가 있었나? 구경하며 다가가자 물가 근처에 얌전히 앉아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제 몸집만큼 커다란 털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좋은 집안의 자제인지 금실이 수놓아진 고급 명주옷을 입은 아이가 열심히 털실을 쓰다듬으며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뭐가 그렇게 좋으니?’ 하고 다가가 친근하게 말을 걸려고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흠흠, 목을 가다듬어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그렇게 좋으니?’
그런데 바로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내가 할 말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대신 해 주었다. 나는 놀라 그가 부딪치지 않게 옆으로 비키려 했다. 하지만 그 인영은 그런 내 몸짓에는 아랑곳없이 간단히 내 몸을 통과해 앞으로 걸어갔다. 어안이 벙벙해 두 손을 내려다보고 그제야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뭐야. 어쩐지. 이건 꿈이구나.
‘아버님!’
아이는 나타난 남자를 보고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부모가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라 불린 남자가 큰 손을 내밀어 혼자 놀고 있던 아이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의 의복도 독특했다. 아이의 옷을 볼 때도 신기하다 생각했지만 남자의 옷은 아예 의장으로 보이는 복식이었다. 차림새만으로도 그가 아주 고귀한 신분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가 웃으며 몸을 굽혀 고개를 숙이자 아이가 두 팔을 벌려 고사리같이 작은 손으로 그의 목을 감았다. 나도 기하가 어릴 적에는 종종 저렇게 해 주었었지. 품에 들어온 아이의 엉덩이에 팔을 받쳐 안은 채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익숙하게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부드럽게 어르자 아이가 또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두 부자가 너무 좋아 보여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는데 그제야 나를 봤는지 남자의 어깨에 매달린 아이가 내 쪽으로 시선을 주는 게 보였다.
…….
안녕? 나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 모양으로 말했다. 너 정말 귀엽다.
아버지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아이는 나를 보고 수줍었는지 얼른 어깨 밑으로 얼굴을 감췄다. 그러더니 다시 살금살금 고개를 내밀어 나를 확인하고는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나도 따라 웃었다. 아이가 손을 내밀어 살며시 흔들기에 나도 따라 흔들며 인사했다. 정말이지 예쁜 아이였다. 만약 기하의 아이가 생긴다면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
기하의 아이라면?
흔들던 손을 나도 모르게 멈췄다.
아직도 내게 인사하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아니, 뜯어볼 것도 없었다. 새카만 머리칼에 밀빛 피부를 가진 아이는 멀리서도 확연하게 보이는 보석 같은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의식하고 본 아이는 마치 기하의 축소판 같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주…… 이상해졌다.
내가 흔들던 손을 멈추자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에게 웃어 줘야 하는데. 꿈일 뿐인데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멈춘 손마저 씁쓸히 밑으로 늘어뜨렸더니 아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버님!’
아버님!
아버님!
그 부름은 예전에 기하가 신이 된 직후 내 이름을 애타게 불렀던 것과 같은 울림을 가지고 있어서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꿈이라는 걸 알고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이가 나를 부르는 게 아닐 텐데도 그 작은 눈이 나를 향하고 있어서, 흔드는 손이 나를 향하고 있어서 나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이는 내가 물러나는 걸 보고 울상을 지으며 더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이야. 네 아버지는 거기서 너를 안고 계시잖아.
‘아버님!’
아이가 칭얼거리며 나를 향해 오기라도 하려는 듯 몸을 들썩거리자 아이의 아버지가 서서히 뒤를 돌았다. 아이와 똑같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반쯤 돈 상태로 보이는 옆모습의 날카로운 콧날과 깊은 눈매가 익숙했다. ……아니, 익숙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 옆모습은 내가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는 것이었다. 만져 보지 않고도 촉감을 아는 것이었다. 그가…… 완전히 뒤를 돌기 직전, 붉은 빛이 그와 내 사이를 궤적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의 얼굴을 보려고 눈을 크게 떴을 때―.
“―읏.”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 *
시야를 가득 채운 부유하던 꽃가루와 눈이 부실만큼 찬란하게 빛났던 풍경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것처럼 내 눈앞에서 빠르게 가라앉았다. 애초에 내가 보아선 안 되는 것이 보였던 듯 흔적 없이 녹아서 사라진다. 귀를 가득 채우던 아이의 애타는 울음소리가 침전하고 그 자리를 고요한 정적이 채웠다. 아이의 목소리에 익숙해져 있던 귀가 찾아온 적막에 적응하지 못하고 먹먹하게 들떴다. 꿈에서 빠져나오기 직전에 본 찬연한 붉은 빛 대신 파란 어둠이 눈앞을 가렸지만 나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서 눈만 느릿느릿하게 깜박였다.
“…….”
방금까지 꿈을 꾼 건 맞는 걸까. 지금은 꿈을 깬 게 맞는 걸까. 나는 아직도 몽리를 헤매는 중인 게 아닐까.
호흡이 와 닿게 가까운 내 눈앞에는 꿈의 연장선상처럼 눈을 감고 있는 단정한 얼굴이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던 잔상이 그대로 구현되어 빚어낸 듯이 섬세한 얼굴과 손을 대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로 수려한 이목구비를 한……. 나를 보기 위해 뒤를 돌던 그 사람과 같은. 아이를 부르며 웃던 그 입술과 단 일 초만 더 늦게 잠이 깨었더라면 마주쳤을 눈을 품고 있는.
숨이 턱 막힐 것 같아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아름다움 그 자체인 광경을 보아 놓고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이야말로 꿈인 듯해 계속해서 눈꺼풀만 깜박이며 잠든 모습을 눈 안에 새겼다.
몸을 일으키는 건 고사하고 지금 이렇게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호흡을 멈춘 채 하릴없이 남자의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뺨에 손을 올려 만져 보고 싶었지만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아 참았다. 깨우면 안 될 것 같았다. 모래성처럼 사라져 버린 그들같이 이 남자도 내가 깨우거나 내 목소리가 닿으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 아까워서…… 아까워서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내 불안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그가 깊게 감긴 눈을 천천히 뜨기 시작했다. 내려앉은 그림자를 털어 내듯 짙은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윽한 눈매 안에 잠겨 있을 땐 색 없이 새카맣게 보이는 눈동자가 완연하게 모습을 드러내더니 팔에 안겨 있는 나를 확인하고 붉은 광채를 빛낸다. 부서져 흔적이 사라질까 염려한 내 생각과는 반대로 오히려 눈을 뜸으로 인해서 그에게 생명이 응집되는 것처럼 보였다.
……안녕.
……안녕하세요.
내가 입술을 달싹이자 이제 잠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붉은 눈동자가 내 눈을 조용히 훑으며 다정하게 휘어졌다. 사라진 아이에게도 그 남자는 이런 표정으로 이렇게 웃어 주고 있었을 거다. 내가 만들어 낸 꿈속이었으니 그토록 사랑스럽던 아이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웃음을 보여 주고 있었겠지.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는 하지 않은 채 우리는 눈을 마주하고 한참 동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고 지켜만 보는 나처럼 그 역시 인사 대신 미소를 지은 채로 서로의 품에 안겨 체온을 나누었다. 오늘만은 정적을 끔찍이 여겼던 나도 남자가 이어 주는 침묵이 반가웠다. 이때껏 고요가 이렇게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거울 같은 그의 적안에 비치는 내 눈동자가 파랗게 보이다가 날이 새며 주변이 밝아짐과 함께 청보라색으로 물들 때까지,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저 한동안 시선만을 섞고 있었다.
그러다 남자가 가슴을 부풀려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팔을 움직였다. 운 적도 없는데 눈물을 닦아 주듯 내 눈매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팔베개를 한 팔을 움직여 나를 바짝 끌어당겼다. 뜨겁게 체온이 올라 있는 가슴에 얼굴이 비벼졌다. 그의 품에서는 놀랄 만큼 좋은 향기가 나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잠잠히 뱉으며 호흡했다. 남자가 나를 안을 때마다 참아 왔던 숨을 전부 몰아쉬는 것처럼 나 역시 아가미를 가진 어류가 된 듯이 그의 품을 물속 삼아 마음껏 숨을 터트렸다.
잠깐이지만 이렇게 꿈속의 남자에게 안겨 있던 아이가 생각났다. 내 자격지심이 만들어 낸 산물일 아이의 붉은 눈동자를 지우려 눈을 감았다. 그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그때는 이 품이 내 것이 아니게 되겠지. 그렇기에 그 아이가 아무리 사랑스러웠어도, 꿈 안의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웠어도 내게는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너에게는 죽을 때까지 말할 수 없는 악몽.
나쁜 꿈을 꾼 척하며 어리광을 부리는 내게 그가 낮게 웃으며 뒷덜미를 사근사근하게 쓰다듬더니 머리카락에 입술을 눌렀다. 이마부터 시작해서 미간 사이에, 눈가 아래에, 콧잔등에 짧은 키스가 차례대로 내려진다. 간지러운 느낌에 기분 좋게 신음을 흘리자 뒷덜미에 손이 받쳐지고 저절로 턱이 들렸다.
자연스레 벌어진 내 입술 사이로 남자의 젖은 혀가 파고들었다. 눈을 감고 받아들이니 평소에는 기갈에 시달리듯 허겁지겁 덤벼 아프게 치러지는 키스를 천천히 상냥하게 하기 시작한다. 신음조차 흐르지 않도록 정중하게 혀를 움직여 애무해 왔다.
“흐…….”
입술에 피가 몰리게 빨다가 아릿할 정도로 부어오르면 가볍게 이로 물고, 타액이 흐를 땐 모조리 핥아 삼키며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혀의 움직임은 애가 타게 느렸지만 반대로 감정은 더 빠르게 고양되었다. 곧 나도 얼굴을 돌려 그의 애무를 따라 혀를 움직였다. 그가 물었다가 놓으면 나도 물었다가 놓고, 그가 흔적이 남을 만큼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면 나도 그렇게 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오직 서로를 탐닉하며 숨을 들이켜고 입술의 맛을 보며 호흡을 나누었다. 끈적거리는 타액이 연신 내 목구멍으로 넘어와 내가 앓는 소리를 내면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머금고 빨면서 내가 호흡을 되돌리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조심스레 혀를 내밀어 내 혀에 대고 비볐다. 머릿속을 진탕으로 만들 정도로 야하고 상스러운 키스를 나눌 때보다 지금이 더 야릇하게 고조되어 견디지 못하고 남자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음탕하고 난잡한 행위가 아닌 소중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에게 하는 애틋한 스킨십 같았다.
남자의 뒷덜미를 움켜쥐며 어떻게든 그에게 바짝 다가가려 안달을 하자 그가 상체를 반쯤 일으켜 내 위로 올라왔다. 키스만 했을 뿐인데 체중을 실으며 포개지는 그의 온몸이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있어서 하반신에 간질간질하게 불이 피어올랐다. 뜨거워진 숨을 몰아쉬며 달아오른 눈을 뜨자 몸 위에 올라온 그의 눈에서 주체하지 못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어찌 참고 있는지 신기하도록 교염하고 애절한 눈이었다.
“…….”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게 끔찍했었다. 내가 들을 수 없는 말이자 내가 들어서도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런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었다. 실제로 그가 그런 말을 하면 나는 무시하며 더 이상 하지 말라고 차갑게 일갈해 버리기도 했다.
그랬더니 다음부터 남자는 입으로 고백하는 대신 눈으로 사랑을 말하는 법을 배웠다. 누가 알려 준 적도 없을 텐데 눈에 연정을 품는 법을 터득하고 눈으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쳐다보지 말라고까지는 차마 요구할 수 없었기에 차라리 내가 보지 않는 편을 택했다. 아예 안 보면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저 눈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나를 쳐다보며 행복해 보이는 남자의 뺨에 손을 올려 아까 하고 싶었던 대로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잘 빚어져 매끈한 얼굴선을 따라 제멋대로 손을 움직여 만지자 기분이 좋은지 그가 달콤한 한숨을 내쉬고는 내 손바닥의 움직임에 맞춰 뺨을 비비고 핥으며 교태를 부렸다. 더 만져 달라는 듯 떼지 못하게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어루만지기도 했다.
“하― 아…….”
그렇게 내 손이 그의 손에 이끌려 얼굴을 더듬다가 손바닥을 미끄러뜨려 탄탄하게 짜인 가슴에 닿자 그가 몸을 굳히며 혼탁한 신음을 내뱉었다. 겹쳐 있는 하반신이 뜨겁게 꿈틀거리며 존재감을 알렸다.
이미 한참 전부터 그의 것이 한계치에 달해 있었다는 걸 알았기에 내 몸도 그를 맞을 준비를 하며 젖어 들었지만 그는 성욕을 자신의 몸 안으로 욱여넣으며 곁에 머무는 걸 택했다. 아래에 느껴지는 열기로는 틀림없이 참을 수 없는 상태일 텐데도 내 다리를 벌리는 대신 입술을 움직여 계속 턱을 깨물고 기분 좋게 핥아 주기만 했다.
주변이 온통 조용한 만큼 그가 혀를 굴려 목과 쇄골을 핥는 젖은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할짝거리는 소리, 고인 침을 혀로 훑어 마시는 소리. 앓듯이 끙끙거리며 몸을 뒤치면 도드라진 뼈를 따라서 평소와는 다르게 이를 세우지 않고 부드러운 부분만을 사용해 핥아 내린다.
흥분으로 입 안에 침이 고여 들었지만 목구멍에 넘기는 소리마저 내지 않으려 애를 쓰고 삼켰다. 발가락에 힘이 바짝 들어가 발톱으로 연신 시트를 긁어내렸다. 듣는 자가 아무도 없는데도 우리 둘은 숨어서 정을 나누는 것처럼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새벽의 파란 기색이 이미 사라지고 날이 밝아 창문 안으로 새하얀 빛이 들어오고 있는데도 그는 내 몸 위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안으려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옆에 있는 게 좋은 것뿐이었다. 나도 그랬기에 남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가슴팍에 내려간 남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고 그가 하는 버릇대로 머리카락을 어르듯 쓰다듬어 주자 그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다시 올라와 귓불을 지그시 깨물었다. 척척하게 젖은 귀가 희미한 날숨에조차 예민하게 도드라져 떨릴 때까지, 긴장해서 굳은 어깨가 흐물흐물하게 녹아 그의 품에서 늘어질 때까지 귀를 핥고 빨던 남자는 갑자기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열어 젖은 음성을 흘려보냈다.
“……기현아.”
잠겨 있었던 터라 평소보다 더 지독하게 낮고 느른한 음성에, 고요에 익숙해져 있던 귀가 적응하지 못하고 바르르 떨렸다.
“……이기현.”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재차 이름을 불렀다. 쏟아붓듯이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또 한 번 내 이름을 부르고 그걸 먹어 치우듯이 혀를 내밀어 귓불을 감아올리고, 내가 그 감촉에 웅크려 떨면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게 수차례나 반복되는 동안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귀를 핥으며 나는 젖은 소리가 머릿속을 먹먹하게 만들어서, 그의 품 안에서 한숨이 나올 정도로 좋은 향기가 나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낮은 울림이 듣기 좋아서 나는 또다시 밀려오는 잠을 거부하지 않고 그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계속되는 철야에 시달렸던 몸은 남자가 주는 모든 것이 너무 달콤하게 다가왔다.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던 것마저 포기하고 나는 그의 목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남자가 낮게 혀를 차며 뒷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꽉 끌어안겨 맥박의 진동을 느끼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그만…… 같이…….”
“…….”
“……하자.”
“…….”
“……현아.”
그의 저음이 자장가처럼 흐릿한 반향을 가지고 머리 한구석을 조용히 건드렸다. 그가 무언가 동의를 구하는 듯한 물음을 한 것 같았는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응?’ 하고 남자가 나에게 답을 요구했지만 나는 느릿하게 숨을 내뱉으며 그냥 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어서 잠긴 목은 간단한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웅얼거리며 단어를 흩어 버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남자가 나지막이 웃었다.
그가 내 이마에 다정히 입술을 누르는 감촉을 끝으로 점멸하던 내 의식이 끝내 잠겨 들었다. 남자가 내 이름이 아닌 다른 말을 속삭였던 것을 듣지 못한 채로.
* * *
같이 살자. 기현아.
같이 살아 줘.
그가 완전히 잠에 빠져들어 더 이상 듣지 못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들어 주는 이 없는 말을 속삭였다.
같이 살자, 어릴 때처럼 같은 방에서 같은 침대에서 오늘처럼 함께 일어날 수 있게. 대답 없는 그의 귓가에 대고 대답을 기약할 수 없는 간청을 해 본다. 입 밖에 꺼내기 어려워 내내 품고만 있었던 말은 한 번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둑이 터진 듯 혀끝에서 밀려 나왔다. 지금이야 의미 없이 허공에 흩어져 버릴 말이었지만 늘 그랬듯이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하면 언젠가는 너한테 닿겠지.
너무 예뻐 미워할 수도 없는 남자를 품에 안고 자장가가 되지 못할 원망 어린 한탄을 중얼거렸다.
나와 같이 살아 줘.
약속했었잖아. 형.
내가 크면 같이 살겠다고.
“…….”
함께 살겠다고 해 놓고 같이 살기는커녕 일주일에 몇 번 본가로 돌아오는 것도 힘겨워하는 남자였다. 어렸을 적 나에게 해 줬던 약속을 기억하고는 있을까. 사탕으로 아이를 꾀어내듯이 해 줬던…… 얄팍했지만 내게는 천금 같은 무게를 지녔던 약속을. 네가 그 약속을 해 줬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잦아드는 그의 숨소리를 감상하다 까딱하면 이성을 잃을 만큼 위험한 향기가 나서 품에서 떼어 냈다. 따뜻했을 품이 멀어지자 그가 본능적으로 어린 동물같이 끙끙거리는 소리를 낸다. 나를 찾는 그 모습에 익숙한 열기가 올라와서 이를 사리물며 천천히 아래로 몸을 물렸다. 어떻게든 풀지 않으면…….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가 완전히 서 있는 것을 대충 붙잡고 아래위로 거칠게 훑었다.
“후…….”
끓는 숨소리를 들키기 싫어 손목을 물고 수음하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져 그의 충혈된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오랜 키스 후라 적당하게 부어오른 감촉이 넋이 나갈 정도로 좋았다. 그대로 잡아당기며 쭉쭉 빨아들이자 아팠는지 손으로 더듬더듬 내 가슴을 밀어 낸다. 물러나는 대신 밀어 내던 손목을 움켜잡고 손가락부터 하나하나 입 속에 넣어 빨았다.
일을 하면서 어찌나 거칠어졌는지 성한 부분이 없이 죄다 갈라져 우툴두툴하게 변해 버린 부분을 정성스레 핥아 내렸다. 장갑 좀 끼라고 해도 그런 섬세함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기에 매일 물이 닿는 기현의 손가락은 항상 살갗 곳곳이 터져 있는 상태였다.
손가락과 손목이 푹 젖을 만큼 빤 뒤 이번에는 드러나 있는 발목에 입을 댔다. 손가락에 했던 대로 발가락 하나하나를 입에 머금으며 질척하게 빨아들였다. 평소같이 피가 맺힐 만큼 물어뜯고 싶은 가학적인 감정을 애써서 억누르며 기분 좋을 정도로만 느릿하게 혀를 굴려 오목한 부분을 집요하게 핥아 내리자 그가 목구멍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몸을 파들파들 떨기도 했다. 발까지 다 적신 후에는 천천히 종아리부터 타고 올라가며 입술을 눌렀다. 허벅지를 이로 긁으며 훑었더니 금세 새빨갛게 잇자국이 올라온다.
“…….”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부풀어 있는 성기를 천천히 허벅지의 붉은 자국에 대고 문질렀다. 기현의 몸에서 두 번째로 부드러운 부분이었다. 첫 번째는 당연히 그의 안이었고.
선단 끝에서 밀액이 새어 나오기 시작해 손바닥을 적신 후 반쯤 서 있는 그의 것과 함께 겹치고 주물렀다. 그가 깨지 않게 지겨울 만치 느린 움직임으로 흔들었지만 예민하게 금방 곧추서서 일어난다. 연한 색으로 덮여 있던 음경이 흥분하며 점차 붉게 물드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아찔했다.
한 손으로는 계속 내 것을 잡고 훑으며 선홍색으로 부푼 그의 것을 끝부분부터 조심스럽게 입 안에 머금었다. 그가 잠들어야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손끝과 발끝은 만져 주지 않으면 깜짝깜짝 놀랄 만큼 차가운 주제에 성기와 구멍 안만은 델 듯이 뜨겁다. 그래서 더 환장할 것 같았다. 어떻게 되어 먹은 몸뚱이기에 이렇게 구석구석 나를 미치게만 만드는지. 실수로 기현의 차가운 손을 잡은 놈은 있어도 그의 몸에 이리도 뜨거운 부분이 있다는 건 나밖에 모른다.
“으…… 읏…….”
오랜만에 물어 보는 감촉에 흥분해서 입 안을 조이며 크게 빨아들이자 형은 잠결에도 느끼고는 허벅지를 경련한다. 평생 사람의 체내에 들어가 본 적이라고는 내 입 안이 전부일 그의 것은 몇 번 빨아 주지도 않았는데 금방 갈 것같이 파들거리며 몸집을 키웠다. 깨어 있을 때는 눈을 가리지 않고는 가지도 못해 나를 애태우면서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는 이토록 참을성 없이 착하게 군다.
음낭부터 시작해서 선단까지 계속 길게 핥아 주었다. 타액이 뚝뚝 떨어질 만큼 적셔 가며 깨지 못하게 조심히 혀를 움직이자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그것에 맞춰서 그의 성기가 말간 액을 뻐금거리며 토해 내는 걸 달게 빨았다. 어느새 수음 중인 내 손도 흘러내린 쿠퍼액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 끈적하게 젖어 있는 손가락을 그의 구멍에 대고 지분거렸다. 들어올 줄 안 구멍 입구가 놀라 크게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하.”
미치……겠네.
중얼거리며 회음부의 오목한 부분을 지그시 누르고 삽입하듯 손가락을 쓸었다. 그냥 사정없이 처박아 버리고 싶다. 몸 안의 뜨거움과 감촉을 알고 있는 내 것이 아프게 팽창했다.
잔학한 상상을 하며 뿌리까지 삼킨 상태로 기현의 것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픔을 좋아하는 몸답게 이가 표면을 긁어내리며 자극할 때마다 금방이라도 내보내려 힘이 들어간다. 혀를 뾰족하게 세워 요도구를 벌릴 듯 헤집은 채 뺨에 힘을 줘 빡빡하게 조여 자극하자 결국 그가 신음을 흘리며 음액을 쏟기 시작했다.
찔끔이며 나오던 것이 울컥 쏟아져 목울대를 울리며 조용히 마셨다. 금세 입 안 가득 그의 맛이 난다. 달다기보다는 씁쓸한 맛인데도 달게 느껴져 입술을 축이며 정신없이 그의 것을 빨았다. 내 것을 훑는 손에 힘을 가하며 그의 안에 들어가 있는 상상을 했다. 그의 속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얼마나 쫀득하게 조였는지를 더듬어 갔다.
이마에서 솟은 땀이 뺨을 지나 턱으로 굴러떨어진다. 상박이 몇 번이나 펌핑한 것처럼 엉겨 붙으며 단단하게 차올랐다. 위험하게 달음박질하는 호흡이 그의 피부에 닿아 부서졌다. 절정이 바로 눈앞이었다.
“하아……. 형.”
“…….”
“형님, 후…… 기현아.”
거칠어진 숨을 고르지도 않고 음경을 쥐어짜며 그를 불렀다. 돌덩이같이 굳은 것을 파정 후 부드럽게 시드는 그의 것에 마구잡이로 치댔다. 곧 강렬하진 않았지만 기분 좋은 사정감이 허리를 휘어 감는다. 그의 머리카락에 코를 박은 채 밀려드는 이기현의 페로몬을 마음껏 들이마시며 그의 다리 사이에 꿈틀거리는 성기를 멋대로 짓눌렀다. 정신없이 그의 귓가에, 이마에, 꽉 잠긴 눈과 다물린 입가에 키스를 할 때마다 뜨거운 것이 쏟아진다. 이대로 흘리지 않고 그냥 그의 안에 억지로 쑤셔 박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아 내며 하얀 그의 허벅지를 더 하얗게 물들였다.
“큭…….”
파정을 하고도 허기가 가시질 않아 한참 동안 질척거리는 몸을 비비며 그에게 매달렸다. 화기를 담은 몸이 발산하지 못한 열기를 주체 못 하고 날뛰었다. 미칠 것 같았다. 한 번 쏟고 나니 더 통제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
기현아. 짝을 맺는다는 게 이런 거라는 걸 알려 줬어야지. 이런 거라는 걸 알려 줬어야 내가 너한테 덜 미쳤을 거 아냐.
나를 어찌 감당하려고 기다렸어?
젖은 그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대충 훑어내려 잠들어 있는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대고 문질렀다. 그가 입술에 발라지는 정액의 감촉에 착하게도 스스로 붉은 입술을 열었다. 손가락을 집어넣자 잠들어 있는 상태로도 새빨간 혀를 내밀어 아이처럼 우물거리며 빨아 준다. 말캉하고 보드라운 혀가 무의식중에 손끝을 핥을 때마다 불이 붙는 것 같았다.
혀 밑동을 지그시 눌러 목구멍을 열어 다 삼키기를 유도했다. 입천장과 볼 안쪽의 점막을 쓸어내리며 그가 다 핥아먹도록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가 뜨거운 물을 적신 천을 가져와 몸을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턱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준 뒤 침대 옆의 줄을 잡아당겨 발을 내리자 곧 햇빛이 하얗게 들어오던 침대 안이 다시 어둑해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창문의 커튼도 내리니 어두워서 한밤중이라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알량한 눈속임이었지만 이걸로 그가 조금이라도 더 내 침대서 잠이 들길 바랐다.
“…….”
네가 같이 살아 줬으면.
십 년을 자유롭게 만들어 줬으니 이제 그만 내 옆에 앉혀도 되지 않을까. 아직도 그게 내 욕심이라고 생각해? 이제 나를 사랑하니 용서할 수도 있잖아. 착한 동생에겐 상을 줘야지 형님.
드러난 그의 발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뻗어 가볍게 쥐었다. 그새 살이 조금 더 빠졌는지 복숭아뼈가 도드라져 손바닥에 감긴다. 족쇄를 채우듯 손가락으로 발목을 채워 보았다. 커다란 손안에 전부 들어오는 가느다란 발목은 하얀 맨발목으로 놔두는 것보다 무언가를 매 두는 게 훨씬 어울릴 거다. 사슬이 끌리는 환청이 들려오는 듯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정제되지 않은 타인의 기억이 파도같이 거세게 흘러 들어왔다가 흩어졌다.
과연 이 발에 구속구를 채울 날이 올까?
허리를 숙여 그의 발에 조용히 입을 맞췄다. 지금은 이런 행동을 해도 머리 위로 욕설이 쏟아지거나 발길질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이면 되었다.
* * *
샤워하고 나와 그의 옆에서 자는 모습을 구경하며 머리를 도닥이다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끌어안았다 놓고 일어났다. 그와 보낼 때는 매번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지 못해 평소보다 기상 시간에서 한참 지난 상태였다. 문을 열고 나오자 새벽부터 대기하고 있었을 네댓 명의 고용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기침하셨습니까.”
“기침하셨습니까. 가주님.”
고개를 조아린 채 조심스럽게 내 곁으로 다가와 시계와 핀이 놓인 상자를 내민다. 적당한 것을 골라 매며 물었다.
“이경헌은?”
“돌아온 후부터 쭉 본채에 있습니다.”
“불러들여. 오늘은 안채에만 머물 테니까.”
“알겠습니다.”
“손님들은.”
집사의 옆에 서 있던 비서가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태블릿을 열었다.
“오늘 새벽에 다 귀가했습니다. 아직 특별한 지시가 없으셔서 다음 일정은 고지하지 않았습니다만…… 특별히 가주님을 따로 뵙고 싶어 하는 자들이 다시 연락해 왔습니다. 선물도 보내왔지만 명분이 없어 아직 돌려보내진 않았습니다.”
“받아. 받고 열 배에 상응하는 현물을 보내.”
수행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제 자꾸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선일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그룹 수뇌부 몇 명을 초대했었다. 얌전히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원하는 만큼 살 수 있게 해 준다는데 감히 내 옆자리를 인간 여자로 채우려는 욕심을 버리질 못하다니. 오히려 영생을 살 수 있게 되니 내리는 벌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은 벌을 받을지언정 그 자리가 탐났다든지.
신의 피를 옮기고 싶은 건가. 그 욕심 많은 늙은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흡수하긴 했어도 일영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지금처럼 다른 그룹의 그림자 속에 도사린 채 단물만 빨아먹는 형태를 원한다. 그러니 신에게 너무 심취해 있는 선일 일가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거치적거려 버리자니 너무 달콤한 방패막이라 대체품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고 아직은 나도 그들이 필요하다. 이이제이라, 구슬리는 게 여의치 않다면 다른 것들과 경쟁을 붙여 대신 싸우게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그리고 이제껏 그래 왔듯이 반항하지 못하게 그들의 자식을 볼모로 삼아 버리면 된다.
“기록은?”
“여기 있습니다.”
그녀의 손에서 태블릿을 건네받았다. 어제 모임에 참석했던 자들의 아주 사소한 대화까지도 전부 기록해 둔 문서를 눈으로 훑었다.
어제 모임은 거대한 시험관이었다. 일영에 복속할 수 있을 만한 종자와 아닌 자를 구분하기 위한 시험관. 대화에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그물을 쳐 두고 내 종자가 될 수 있는 소양을 가진 자를 골라 내 사람으로 만든다. 얄팍하고 자기애가 강하며 겁이 많고 신중할수록 좋았다. 의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진짜라는 걸 깨닫고 믿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니까. 원래 믿는 자는 처음부터 타고나는 법이다.
“보고할 다른 일이라도?”
비서를 따라 방을 나서려는 찰나, 남아서 기현을 돌봐야 할 집사가 따라붙기에 물었더니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알아서 보고하던 그녀가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할 말은 있으되 내 기분을 해칠 만한 주제라는 거였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송구합니다……. 오늘 아침부터 닥터가 꼭 가주님을 뵙고 싶다고 몇 번이나 요청해 와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일단 응접실에 안내해 두었습니다.”
“닥터 중 누구?”
“그게…… 박현진입니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 석 자에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집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박현진은 저번 일로 특별 관리 대상에 들어가 있는 인물이었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서문으로 제출하라고 해. 안채에서는 당장 내보내.”
“그것이…… 감히 가주님께 이런 말을 옮기는 걸 용서하십시오. 만약 뵙지 못한다면 대신 기현 님을 보겠다고 나와서…… 미천한 제 머리로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일단 들여보냈습니다.”
“뭐?”
어이없어 혀를 찼다. 그런 식의 협박이 후에 대단히 좋지 않으리라는 걸 뻔히 아는 여자가 왜 그랬을까. 다른 건 몰라도 이기현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안내해.”
내 것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해 결국 발을 돌렸다. 문이 열리자 소파에 앉아 있던 박현진이 다급히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의 이름을 써먹기에 단단히 각오라도 한 줄 알았는데 정말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당황한 얼굴을 한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쩐 일입니까? 박현진 씨.”
“가주님을 뵈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단둘이 보는 건 처음인 것 같군요.”
항상 대동하던 고용인이나 비서를 뒤에 두지 않고 자리에 앉으니 박현진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입을 열길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자 시선을 테이블 위 어딘가로 던져두고 그녀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제 모임 이후에 아버지 편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내용이 심상치 않아서 아무래도 가주님께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랬습니까. 내 연인의 이름을 이용한 만큼 가치 있는 정보길 바랍니다.”
변명이라도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망설인다.
“이런 말씀드리기 대단히 민망하지만 아무래도 아버지는 지금껏 제가 내쳐지지 않았으니 신의…… 반려가 될 거란 가능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나 봐요. 현재 가주님의 옆에 있는 여성들 중 그래도 제가 제일 현실성이 있고 선일과도 닿아 있으니까요. 가주께서 총애하시는 여자가 없다고 했으나 설마하니 짝이 남자일 줄은 몰랐던 거지요.”
“…….”
“얼마 전부터 어떻게 알았는지 기현 씨의 존재를 물어 왔습니다. 그냥 일영의 장남으로서 기현 씨가 아니라, 신의 짝인…… 기현 씨를요.”
“그래서요?”
“어제 제게 따로 기현 씨에 대한 진료 기록을 요청하더군요. 정말 짝으로 삼은 게 맞는지나 왜 지금껏 대외적 활동을 하고 있지 않았는지, 정말 가주님과 친형제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 같았습니다. 제게 진료 기록만을 요구한 걸 보면 기현 씨의 외적인 정보는 이미 전부 수집하고 있는 상태일 겁니다. 제가 제안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아마 사람을 심으려고 할 거고 아니면 이미 심었을지도 모르고요. 애초에 제가 일영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도 제 성향을 알게 된 아버지가 사람을 시켜서 일을 벌였기 때문일 정도로 아버지 방식은…….”
“알고 있으니 굳이 첨언할 필요 없습니다.”
“……예? 알고 계셨다고요?”
알기만 하겠나. 그런 판을 짜게 만든 게 우리 쪽인데. 박현진에게 특이 성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도 우리 쪽 정보였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선일 일가 모두의 약점 하나씩은 전부 내 손에 쥐고 있다. 그들이 만일 나를 배신했을 경우의 대비는 끝난 상태다.
박현진은 동통 성애자였다. 상처 입은 것을 보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건 벌어진 상처를 더 벌리는 일이었다.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상처를 악화시켰던 날, 그녀의 머리 위에는 폐쇄 회로 화면이 돌아가고 있었다. 딸에 대한 내 조언을 믿지 않은 회장 일가가 반신반의하며 설치해 두었던 기록기가.
VTR에서 흘러나오는 딸의 비정상적인 취향을 목도한 회장은 그룹 이미지가 실추될 것을 염려해 장녀의 처분을 송두리째 나에게 맡겼다. 굴지의 대기업을 등에 진 가문도 알맹이가 사람이었기에 파고드는 건 늑대가 양을 모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제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아시면서 기현 씨를 그냥 그렇게 노출시켜도 괜찮은가요? 아마 저나 동생이 일영 안주인으로 들어앉기 전에는 결코 포기할 분이 아닌데요.”
“현진 씨가―.”
그녀가 하고픈 말은 저게 아니었을 텐데 뻔히 보이는 수작을 하고 있다. 가소로워 소파에 깊게 몸을 묻고 깍지를 낀 채 검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이 시점에서 걱정해야 할 사람은 내 사람이 아니라 현진 씨의 혈육일 텐데요.”
“그건…….”
“전부터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만, 현진 씨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내 것에 관심이 지대하더군요. 저번에도 한번 주의를 줬는데 이번에도 또 이기현의 정보 열람을 시도했다 들었습니다. 당신 말대로라면 아버지에게 가져갈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랬습니까?”
“제가 기현 씨의 주치의입니다. 십 년 이상을 봐 왔던 환자의 진료 기록을 주치의가 볼 수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내 집에서는 말이 됩니다.”
박현진은 의료 센터에 잠입해 있던 선일그룹과 자기 라인을 전부 쳐 내자 전보다 불안하고 조급하게 굴었다. 양다리를 걸치고 간을 보고 있는 것을 들킬까 염려해서인지, 아니면 내 실체에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애초에 처음 계약할 때를 잊었습니까? 병원의 근무 조항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간단하지 않았나요?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주 사소한 것도 외부 발설을 금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주의 명에 따른다. 어길 시에는 어떠한 처분이라도 받는다. 그게 그렇게 어려웠나?”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당신의 명을 따르는 조항에 선서를 어기는 일이 그토록 많을 줄 그땐 몰랐죠.”
“저런……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누구보다 의사 서약에 있어 자유로운 분이라 생각했는데.”
“제…… 성향이 괴팍하기는 해도 의사로서 책임감과 의무감은 있습니다.”
“책임감과 의무감? 일부러 더미를 늘려 갔던 분이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군요. 환자에 대한 책임감이라. 그래서 이제 좀 명을 어겨 보려 이기현을 흔들어 볼 참입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럴 리가요. 제가 비록 이가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기는 해도 저 역시 이 집안사람입니다. 제 심장과 이어져 있는 분을 어찌 배신한단 말입니까?”
“그렇지. 그렇게 충성스러운 분이 이기현에게 왜 약 얘기 같은 걸 꺼냈는지 나는 도통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박 한 번 못 해 보고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는 표정을 보며 혀를 찼다. 아니라 부정하는 시도라도 해 보라고 멍청한 것 같으니.
“그걸…… 그걸 어떻게……, 혹시 기현 씨가.”
“뒤에서 들쑤시는 걸 몇 번이나 봐줬더니 이제 제멋대로 시설을 휘젓고 다니고……. 선일 쪽에 다리를 걸쳐 놓고 약을 빼돌려서 조사한 걸 모르고 있을 줄 알았습니까?”
사실은 약의 성분에 프로텍트를 걸어 두었기에 국내에서 누군가 성분 조회를 하면 바로 걸리게 되어 있었지만, 이기현이 말해 준 것이라 오해하도록 놔두었다.
“이기현이 그 이슈를 무감하게 넘어간 것에 감사하길 바랍니다. 내가 하는 말에, 내가 하는 일에 의문을 가지지 말라고 내내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저…… 주치의로서 내 환자에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기현 씨가 매번 정기 검진을 할 때마다 새로운 병세를 보였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렸지만 당신을 배신하려는 게 아닌 기현 씨의 몸에 문제가 생길까 염려되어서 했던 일이었습니다.”
배신하려는 게 아니었다……라, 그렇게 주장하려면 약의 성분을 알았던 시점에서 이기현에게 쪼르르 일러바칠 것이 아니라 지금처럼 나에게 먼저 왔어야지.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 쪽으로 몸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속살거렸다.
“당신 말대로 이제 우리 집안사람이 다 되었군요. 어쩜 그렇게 다들 하나같이 하지 말라는 일을 굳이 우겨 가면서까지 해서 내 신경을 긁을까……. 그래 놓고 변명은 항상 나를 위해서 그랬다, 가문을 위해서 그랬다, 짜증 날 정도로 똑같은 소리를.”
“……가주……님.”
“소속을 똑바로 하셔야겠습니다, 박현진 씨. 정말로 나를 위한다면 내 말만을 들었어야지. 당신이 하고 있던 일이 나를 위한 일이었을지 나에게 반하는 일이었을지쯤은 분간할 수 있지 않습니까?”
대놓고 스파이 짓을 하고 있는 걸 봐줬더니 같잖게 이기현에게까지 감정을 걸쳐 놓고 나를 위한 일을 하고 있었다 말하는 게 퍽 가증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가 이기현과 붙어 있던 시간이 제법 길었었지. 감응받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을 거다. 그 예쁜 게 처지를 비관해 괴로워하는 걸 곁에서 몇 년을 지켜봤을 테니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었을 테고.
과연 어디까지 감화됐으려나. 내 힘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물들었을까?
“그냥 가만히 내가 시키는 것만 하고 있으면 됩니다. 간단하지 않나요? 나서서 일을 망치지 말고 이제껏 해 왔던 대로만 하면 되는 겁니다. 이런 쉬운 명령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의 성향 다 덮어 주고 실험체마저 제공해 주는 직장에 뭐가 불만 있어서 거슬리게 구는지 모르겠군요.”
“…….”
“다음엔 이런 무의미한 대화를 하지 않길 바랍니다. ……알다시피 나는 모든 인내심을 내 연인에게만 쏟아붓고 있기에 다른 자들에게까지 너그럽지 못합니다.”
몸을 일으키자 얼굴을 올려다보던 박현진이 뺨을 붉히며 고개를 떨군다. 맞잡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벌의 경중을 가늠하며 고개 숙인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기어들어 가는 것 같은 음성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대체…….”
“…….”
“……신께서는 무얼 하실 생각이십니까?”
“무슨 말이지?”
“그런 약을 먹이면서…… 기현 씨를 데리고 뭘 하실 작정이십니까?”
목소리에 두려움이 가득한데도 용케 머뭇거리지 않고 묻는 걸 보면 애초에 이걸 듣기 위해 기현의 이름을 팔았던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 것이야 많지. 하지만 그녀가 무슨 의도로 묻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내가 하는 모든 더럽고 추악한 일들 중 오직 이기현에 관한 것만큼은 하나의 티끌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애정이라 장담할 수 있다. 그걸 내 시간과 연결된 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아니, 느낄 수 있을 터였다.
“당신이 볼 때는 내가 뭘 하고 싶은 것 같습니까?”
그래서 뻔한 것을 대답해 주는 대신 나긋한 태도로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네 눈으로 볼 때는 내가 이기현을 데리고 대체 무얼 할 것 같은지 추궁했다. 박현진은 내 되물음에 크게 어깨를 떨었다. 어떻게 나에게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혼곤한 눈으로 나를 올려 보다 내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겁에 질렸다. 덕분에 나는 조금 유쾌해졌다. 이기현이 저런 눈으로 쳐다볼 때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었는데, 그가 아닌 다른 자의 눈에 공포가 박혀 드는 것을 보는 것은 이토록 즐거운 일이었다.
“대답해 봐. 당신 오늘 그걸 나에게 물어보고 싶어서 온 것 아닙니까.”
협박하듯 단어를 짓씹어 내뱉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빨리 입을 열어 보라고,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끄집어내라고 선악과를 권한 뱀과 같이 속살거리며 은근하게 능력을 풀었다. 가뜩이나 곤죽이 되고 있는 여자의 뇌 속을 뒤집고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낭떠러지에 떠밀린 것처럼 망연한 신음을 내뱉었다.
“왜…….”
“…….”
“왜 정기 검진을 할 때마다…… 남, 남자인 기현 씨에게…….”
배…… 배란…… 검사 따위를 하는 겁니까……?
마지막 말은 거의 목이 졸려 가까스로 새어 나오는 소리에 가까웠다. 나는 결국 겁에 질린 그녀를 앞에 두고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왜 하겠습니까.”
“설, 설마…….”
“…….”
“그냥 형식상 하는 검사가 아니라 진짜로 기현 씨에게서……?”
“상상만 해도…… 정말 예쁠 거 같지 않습니까?”
내 아이를 가진 이기현이라니.
그녀는 내가 입 밖에 꺼내지 않은 말을 알아듣고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경악했다. 지금껏 수태를 할 리가 없는 남자에게 진행되는 쓸데없는 검사들에 의문을 품기는 했었겠지만 다른 쓰임새가 있겠거니 치부하고 넘겼을 거다.
정말 그게 가능하냐고 현진의 눈이 물었다. 남자의 몸으로 후계를 가지는 게 가능하냐고. 하긴 아무리 복속되었다 해도 여우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외부자이자 의사인 박현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 게 당연했다. 그녀의 상식과 직업적 소양이 신이라는 실체와 충돌하고 있었다.
그녀를 놔두고 방을 가로질러 뒤늦게 술잔을 꺼내 들었을 때 등 뒤에서 아까보다는 명백히 힐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그런 일까지 하시면―.”
“…….”
“이번에야말로 기현 씨는 못 견딜 겁니다.”
절대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그녀는 고장 난 테이프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금 기현 씨의 정신 상태가 누더기 같다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겉으로 멀쩡해 보인다고 멀쩡한 게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당신께서 그분을…….”
“그래서 필요합니다. 지금 내가 좋아 환장할 것 같은 눈을 하고도 그는 반나절 만에 마음을 바꾸고 도망갈 수 있는 남자거든.”
박현진이 보는 눈앞에서 투명한 약병을 꺼냈다. 약병 안에는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분홍색 캡슐이 가득 차 있었다. 캡슐을 하나하나 뜯어 잔 속에 가루를 흘려 넣었다. 그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 그녀는 어리석게도 필사적으로 내 생각을 돌리려 애썼다.
“그러다 정말 죽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저번에도 자해하다 과다 출혈로 쇼크가 왔었지 않습니까……! 그냥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기현 씨는 이미 입원해야 할 수준의 중증 우울증을 겪고 있어요. DSM(정신 장애 진단) 결과를 보셨잖아요. 지금 저렇게 체념한 게 얼마나 된 일이라고……. 기어이 죽이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고작 죽이려고 이렇게 공을 들일 정도로 나는 멍청이가 아닙니다.”
“…….”
“내 연인은 그렇게 약하지도 않고.”
약하기는커녕 맞붙을 때마다 부서지는 건 그가 아닌 내 쪽이었다. 지금도 어찌하지 못해 이런 저급한 수까지 쓰고 있지 않은가. 내게서 도망갈까 겁에 질려서. 그가 잘못될까 겁에 질려서.
“……사랑하시잖아요.”
“…….”
“그분을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사랑하고말고.”
과도하게 넣어 다 녹지도 못해 밑바닥에 침전한 약이 그대로 보이는 술잔을 가져가 박현진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공포와 경악에 얼룩진 눈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억지로 잔을 쥐어 주자 손을 덜덜 떠는 통에 술이 조금 흘러넘쳤다. 손수건을 꺼내 젖은 그녀의 손에 꼼꼼히 덧대 주었다.
“죽도록 사랑하고 있습니다.”
“…….”
아, 그녀의 눈동자가. 과거 이기현이 나를 볼 때의 눈과 똑같아졌다.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든다.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자신의 귀를 뜯어 버리려 몸부림치던, 나 같은 괴물이 하는 건 결코 사랑이 아니라며 발악하던 연인이.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 미친 감정을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
내가 내뱉은 진음에 공기가 전율하며 그녀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덧대 놓은 손수건이 한 번 더 붉게 물들었다. 지배자의 음성에 지배당한 복속인은 이지를 잃기 시작한 눈으로 연소하듯 타오르고 있는 내 눈을 응시했다. 중추 신경을 통제당한 박현진의 동공이 짐승의 것처럼 좁게 오므라든다.
시커먼 능력이 거미줄과 날개의 형태를 하고 등 뒤에서 돋아 뻗어 나가며 여자의 얼굴 위를 난도질했다. 자기(磁氣)를 가득 머금은 먹구름이 드리운 듯 불쾌한 쇠 냄새가 사방으로 퍼진다. 순식간에 방 안을 점령한 이글거리는 어둠 속에서 하얀 얼굴이 파랗게 빛났다. 그녀가 기억할 수 있도록 검은 그림자 안에서 다정하게 눈을 휘어 웃었다.
「마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