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2/47)

5

점심을 먹고 기하가 자리를 비운 새에 의료 센터로 갔다. 만성 편두통이 또 도지기 시작해서 진통제도 받고 오랜만에 박현진 얼굴도 볼 셈이었다.

시설에 들어가자 나타난 의사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스태프들이 대대적으로 물갈이라도 한 것처럼 싹 처음 보는 얼굴들로 바뀌어 있었다.

“선생님은 주말만 담당하지만…… 기현 님께서 오셨다고 하면 나올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혹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닐지 걱정하다 안심했다.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로 오셨나요? 기현 님.”

어디론가 전화 통화를 한 뒤 신기한 듯이 내 얼굴을 힐끔거리던 여자가 수줍게 물었다.

“약을 좀 타 가려고요.”

“저에게 말씀하시면 처방전을 써 드릴게요.”

최근 신과 사이가 좋아진 이후에 고용인들은 전에 없이 상냥하게 굴곤 했다. 동생이 무슨 명령을 내렸는진 몰라도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다들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고 내가 나타날 때마다 신을 영접하는 것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그때 일 덕분에 벌을 받고 강등된 집사장 대신 졸지에 본채에서 안채 담당으로 서열이 수직 상승한 집사는 내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러고 보니 그날 나 때문에 팔을 다쳤을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난리 통 속에 여자를 때려 놓고 도움도 받은 주제에 지금껏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 하지 못했다.

“혹시 최근에…… 팔에 타박상이라든지…… 멍 같은 걸로 치료를 받으러 온 여자분이 있었습니까?”

그녀는 내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타박상이라……. 아무래도 우리 센터를 이용하는 환자분들은 타박상 같은 상처로 오시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대부분은 내상을 입고 오시죠.”

내상. 신의 기분 여하에 따른 벌을 받고 온다―. 혀끝에 구현되지 않은 말을 알아듣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자신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해 기분이 상한 걸로 오해했는지 그녀가 다급하게 다른 말을 덧붙였다.

“혹시 제 환자분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야간에는 담당이 바뀌거든요. 야간반 담당을 불러드릴까요?”

“됐습니다. 제가 생각나면 물어보죠 뭐.”

대수롭잖게 넘겼지만 뭘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자가 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기현 님께 숨기려고 드는 게 아니라…… 정말입니다. 못 미더우시다면 환자 차트라도 보여드릴까요?”

“네? 아닙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그때 등 뒤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평일엔 웬일이야?”

이제 많이 자라서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어 올린 박현진이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오늘은 그녀의 근무가 아니라선지 평소처럼 가운이 아닌 편한 사복 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누님.”

그녀가 나타나자 의사는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녀를 보고 현진이 등 뒤를 쿡쿡 찔렀다.

“왜 그래?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쟤가 저렇게 사색이 돼서 도망가는 건데?”

“저도 잘…… 그냥 뭐 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데요.”

“뭘 물어봤길래?”

“전에 신세를 진 여자분이 있는데 좀 다쳤거든요. ……저 때문에요. 그래서 치료를 받았나 궁금했는데.”

현진은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쓰게 웃으며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어휴. 도망갈 만하네. 겁도 없이 그런 걸 함부로 물어보고 그래.”

“네?”

“자기한테 말 한 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사달 나는 거 몰라? 가뜩이나 물어보는 게 여자였다면서? 만에 하나 불똥 튀면 안채 고용인들 꼴 나는 거라고. 자기는 한동안 이곳에 안 와서 모르겠지만 지금 저쪽에 그때 다친 사람들이 아직도 입원해 있거든.”

“아직도요……? 그렇게나 많이 다쳤습니까?”

다치는 걸 직접적으로 눈앞에서 봤으니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았으나 지금껏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나마 자기가 신께 예쁜 짓하기 시작해서 다들 살아남은 거지 그때 그렇게 뒤집은 다음 그냥 가 버렸으면 줄초상이라도 치러야 했을걸? 에이 그런 표정 할 것 없어. 그치들이 잘못한 건데 뭘. 맨발로 흙바닥을 걷는 걸 놔뒀다는데 하필 그걸 또 직접 보셨으니 그분 성정상 눈 뒤집힐 만하지.”

괜히 그들에게 미안해져 코끝을 긁었다.

“근데 어떻게 거기서 갑자기 질투했다고 말할 수 있어? 그렇게 안 봤는데 자기도 참 대단하다. 듣고 내 귀를 의심했다니까? 잘못들은 줄 알았어. 깜짝 놀랐다고.”

“이렇게 본채랑 먼 곳에 있으면서도 들을 건 다 들으시네요.”

나는 건너 건너 기를 쓰며 캐고 다녀야 겨우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소문을 주워듣는데,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내 얘기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신기할 따름이라 기가 막혀 웃고 있자 건너편에 와서 앉으라며 의자를 가리킨다.

“요새 소문도 들었어. 듣자 하니 제물과 신이 드디어 맺어졌다고 난리도 아니던데? 혼난 건 벌써 까먹고 수군수군 귀 아플 정도로 어찌나 떠들어 대는지.”

“내 일에 관심들이 이리 많을 줄 알았으면 연예인이라도 할 걸 그랬습니다. 공개 연애 발표라도 해야 할까 봐요.”

현진이 빈정거리듯 말해서 나도 편하게 웃으며 대꾸했을 뿐인데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그녀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지워졌다.

“……저런.”

“네?”

“맙소사. 정말이었구나. 나는 그냥 또 말 지어내기 좋아하는 것들이 설레발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박현진도 신과 내가 잘 지내길 바라는 인물 중 한 명이었기에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반응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왜 갑자기……? 저번엔 신을 벗어난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강준형이랑도 그랬던 거잖아.”

“네.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겁니다. 그게…… 어떤 일이라 해도요.”

도와주면서도 신을 거스르지 말라고 안절부절못하던 아가씨가 막상 내가 신과 잘 지내보겠다고 하니 석연찮은 태도를 보인다. 혹시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누님?”

내가 몇 차례나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겨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왜 그런 반응이에요?”

“응? 아냐. 그냥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자기, 여기는 왜 온 거라고 했지?”

“아직 왜 왔는지에 대한 건 말씀드리지 않았는데요. 여자 한 분 찾는다는 얘기만 했고요.”

“아, 참 그랬지……. 그 여자분에 대한 건 잘 모르겠는데 언제 다쳤다고?”

그녀는 원래 하려던 얘기를 묻어 버리고 다른 주제로 회피하는 듯했다.

“보름 전쯤에, 나이는 한 이십 대 중반……. 아니, 잘 보면 이십 대 초반 정도로도 보이는 미인을 만났는데 제가 팔을 좀…… 세게 때렸거든요.”

“뭐?”

세상에 이젠 하다 하다 여자를 때린 거냐며 현진이 눈을 커다랗게 떠 나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실수였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내상을 입은 사람은 많이 봐 왔지만 타박상 같은 걸로 온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고 대꾸했다.

“한동안은 여기가 헬 게이트였으니까 뭐 놓쳤을 수도 있지. 근데 자기가 미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신기하네. 자기 나를 보고도 예쁘다고 한 적 한 번도 없었잖아. 난 그래서 여자를 보는 눈이 아예 안 달려 있는 줄 알았지.”

“누…… 누님요?”

그야 제 타입은 아니시지 않……까지 말하고 눈치껏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기 옆에 붙어 있는 남자가 워낙 수려해서 그렇지 나도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소리 들어 본 적 없거든? 무, 물론 예쁘다는 소리보다는 잘생겼다는 소리를 더 듣기는 해.”

자기가 잘생겼다고 인정하라며 잔소리하던 김태영이 떠올라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내 웃는 모습을 보던 박현진은 놀림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세모꼴로 떴다. 왠지 둘이 만나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다. 보지 않았는데도 그림이 그려지는 느낌이다.

“아무튼 이 집안에 눈 돌아갈 만큼 미인이 있었다 이거지? 와…… 다시 생각해 봐도 그때 자기가 질투했다고 매달리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끔찍하다. 자기 질투가 사람을 구했네요.”

현진은 혀를 차는 건지 정말 감탄을 하는 건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다시는 그 여자를 찾을 생각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여자를 찾지 않는 게 은혜를 갚는 길이야. 내가 조용히 찾아보다가 만나게 되면 말해 줄 테니까. 아까처럼 겁도 없이 모르는 사람한테 여자를 찾아 달라느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럴게요.”

“내가 어쩌다 자기랑 만나 가지고…… 어쩌다 휘말려 가지고…….”

이제야 겨우 안심하고 있는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오늘 나는 그녀가 한숨 쉴 만한 질문을 한두 개 들고 온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가장 큰 고민거리를 내놓을 차례였다.

“누님. 혹시 저번에 알려 주셨던 강준형의 전화번호 한 번만 더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또 왜?”

역시나 열화 같은 반응을 보여 주며 현진이 눈에서 불을 뿜었다. 또 전화기라도 빌려 달라고 했다가는 목이라도 짤짤 흔들 기세라 얼른 청바지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흔들었더니 그녀가 불을 뿜던 그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몇 주 전부터 계속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고 있거든요. 보다 보니 모르는 번호는 아닐 거 같아서요.”

계속 부재중 전화가 올 때 대충 누구겠거니 짐작은 했다. 애초에 전화와 관련된 해프닝은 그동안 그 남자뿐이지 않았는가.

“그 남자가 자기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고? 그 남자인 게 확실해? 목소리는 들어 봤어?”

“아뇨. 그 뒤로도 계속 전화가 와서 차단했더니 다른 번호로도 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내 전화도 자주 씹었지……. 근데 가뜩이나 자기 번호 최근에 바뀌어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아? 나도 아직 안 알려 줬잖아.”

“아, 그랬습니까?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녀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화면을 두들기더니 찾은 번호를 액정에 띄워 들이밀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그 번호는 빌어먹게도 차단한 번호가 맞았다.

“맞네요. 그 남자 번호.”

외우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하도 봐서 외우게 생겼다. 그럼 내가 외우고 있는 번호는 동생의 번호와 강준형의 번호 두 개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진짜 짜증 나네. 혹시나 해서 울리는 전화를 보고도 받지 않고 계속 모른 체한 게 다행이었다.

“자기, 이 남자가 전화 걸고 있었다는 걸 절대로 가주님께 들켜선 안 돼. 알지? 들키면 끝장난다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안심시켜 주지 않으면 오늘에야말로 반드시 멱살이 잡힐 것 같았다.

“강준형이 이렇게 집요할 줄 알았으면 그때 좀 더 확고하게 말릴 걸 그랬는데. 진짜 내가 알던 그 남자는 이런 타입이 아니었단 말이야.”

“모르죠. 제가 동생과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으니 사이에 끼어들면 뭐라도 떨어질 줄 알았을지도.”

“아무튼 전에 약속한 대로 이 남자와는 절대로 엮이지 마. 왜 이렇게 전화 걸고 있나 내가 대충 알아볼 테니까 자기는 그냥…… 그냥 그쪽은 신경 끄고 있어. 알았지?”

“정말요? 그럼 저야 감사하죠.”

부탁해 볼 생각도 안 했는데 알아서 짐을 덜어 준다는 말에 갑자기 신이 났다.

“누님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누님이 없었음 어쩔 뻔했는지.”

“그렇게 띄워도 아무것도 안 나온다―.”

“그래서 말인데 제 약은요? 저번에 말씀해 주기로 하셨던 거요. 무슨 약인지 나왔나요?”

슬쩍 덧붙인 다른 용건에 현진은 질린 얼굴을 했다.

“내가 진짜 어쩌다 자기랑 만나서…….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현진이 아까 내가 신과 사이가 좋아진 게 사실이라는 걸 알았을 때 보였던 석연찮아 하는 반응이 방금 또 나타났다. 아무래도 확실히 뭔 문제가 있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 좋은 얘긴가 보죠? 계속 말씀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안 좋은 얘기는 무슨…… 그냥 약 많이 먹어서 뭐가 좋다고. 되도록이면 약을 먹지 말라고 말하려고 한 거야. 성분이 막 좋은 약은 아니더라고.”

“그러잖아도 약을 안 먹고 있기는 합니다. 요새는 달라고 해도 잘 주지 않더라고요.”

“누가? 가주께서?”

내 긍정에 그녀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만 데록데록 굴리더니 ‘왜 또 그러는 거지…….’ 하며 말을 흐린다.

“그래서 그 약이 대체 뭐였는데요?”

대답을 재촉하자 난처하게 내 눈을 들여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한번 주변을 휘둘러보고 아무도 근처에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에이, 몰라―.’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박현진은 김태영보다도 설득이 쉬운 사람이었다.

“별건 아니고…… 국내에서 시판되는 제품은 아니라 해외에서 들여온 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어. 특수하게 새로 정제해서 조제된 약이라 성분이 아주 독특하더라고. 왜 자기한테 먹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이제 둘 사이가 좋아졌다니까 말하기 좀 그러네.”

“왜요? 독약이라도 됩니까?”

그녀가 너무 분위기를 잡길래 편하게 얘기하라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는데, 박현진은 오히려 내 말에 더 얼굴을 굳혔다.

“자기는 뭔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것도 아닌데 왜 말을 못 하십니까.”

“독약은 아닌데 미묘한, 아주 미묘한 약이었어. 안정제 성분이더라고. 우울 증세를 겪는 환자에게 쓰이는.”

기하는 그냥 해열 진통제라고만 말했었는데, 역시 거짓말이었구나.

그 성분이 다일 거라고 애초에 믿진 않았지만 확실하게 거짓말을 하며 정신병 약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입맛이 좀 쓰긴 했다.

“뭐 그랬습니까? 별거 아닌데 왜 그렇게 뜸을 들였어요. 내가 자해하거나 우울 증세를 달고 사니까 줬나 본데.”

현진이 내 눈치를 계속 살피더니 안 되겠는지 목소리를 한껏 더 낮췄다.

“그게 말이야…… 사실은…….”

나와 십여 년을 알고 지낸 시간 동안 못 볼 꼴을 몇 번이나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주저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내 눈은 차마 못 들여다보겠는지 무릎을 내려다본 채로 한참을 우물쭈물하다 안 어울리게 더듬거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있지. 사실은 그 약이 독해서 사람한테는 금지 품목이라 못 쓰고 동물……한테만 쓸 정도로……. 정신을 마비시켜서 사고를 흐리게 만드는…… 좀 그런 안 좋은 성분이 들어 있었거든. 치료 목적이라기보다는 저기…… 다른 목적에 더 쓰이는 거 말이야.”

동물들에게 쓰이는 정신을 마비시키는 약.

한 마디로 멍청이로 만들어 온순하게 만드는 약.

뜻밖의 얘기에 내가 말을 못 하고 있자 이런 소리를 하게 된 게 자기 죄인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떨군다.

“물론 아주 소량의, 일부분에 불과한 성분이긴 했어. 자기한테 투약하는 그 꼴랑 몇 정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건 아니고…… 그래도 사람에게 처방하기엔 금지된 성분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내내 두통을 호소했던 것도 혹시 그게 이유인가 싶어서 나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모르겠어. 약에 대해서 추적하고 난 다음부터는 나도 좀 혼란스러워서……. 이건 좀, 이상하잖아……? 가주께서 어떤 의중으로 이런 걸 자기에게 계속 투약했는지 모르겠고, 그리고 사실 그동안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이런 생각까지 한다고 넘겨 버리고 말았었는데 한 달에 한 번 자기한테 하는 검사 중에 말이야…….”

“예.”

“그게, 그 검사 중에…….”

대체 또 무슨 충격적인 말이 남아 있는지 그녀는 몇 차례나 끙끙거리며 입을 열었다가 뒷말은 결국 잇지 못하고 입술만 계속 깨물었다. 이미 나는 동물에 쓰는 약이라는 소리에서 정신이 포화 상태가 되어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말로 독약이라고 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것 같다. 그런데 동물한테 쓰는 안정제라는 게 대체 뭘 의도하고 쓴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런 건 도대체 왜 투약한 걸까?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그런 걸 써서 뭘 하려고. 나에게 죽으라고 명령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기꺼이 죽을 텐데 굳이 그런 고생을 할 이유가……. 나를 바보로 만들어서 무얼 어쩌려고.

“아니야. 이건 진짜 내가 과민한 거 같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는 소릴 할 뻔했네. 요새 내가 좀 예민해. 미안.”

겨우 마음을 잡은 나한테 괜한 얘기를 꺼낸 거 같다며 그녀가 쓰게 웃었다. 웃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박현진이 나를 너무 걱정하는 게 보여 억지로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녀는 내가 찾아오면 주려고 했다며 서랍을 열고 약이 제법 들어있는 봉투를 꺼냈다.

“혹시 몰라서 전부 새로 처방한 거야. 항정신 약제는 다시 한번 검사받아 보고 처방하자.”

“감사합니다.”

손에 쥔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런 약을 먹였다는 기하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내 동생이든 신이든, 나를 해치려고 약을 먹였을 리는 없다. 막연하게 그런 믿음이 들었다. 기하라면 그런 짓을 저지른 타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내게 말 못 할 사정이라든지.

하지만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나로선 알 수 없었으니 그것만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그런 내 얼굴을 쳐다보던 현진은 가만히 내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자기. 내가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았지만.”

고개를 들고 바라본 현진의 눈이 염려로 가득했다. 다른 뜻이 있을 거라 오해할 수 없는 순수한 걱정만이.

그녀는 아주 조용히, 누가 훔쳐 듣고 있기라도 한 듯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가주님을 너무 믿지 마.”

* * *

사방이 고요했다. 이따금 멀리서 새가 우는 소리,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풀벌레의 날갯소리만 새어 들 뿐, 기다려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자는 척을 멈추고 슬며시 눈을 떴다. 어두운 방 안에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몰래 몸을 일으켰다. 잠옷 위에 겉옷을 구겨 넣고 조심스레 방 밖으로 나왔다.

밖은 달빛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어 제법 밝았다. 불빛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기에 천만다행이었다. 달이 구름 뒤에 숨기 전 서둘러서 발걸음을 옮겼다.

별채 근처에 다다랐을 때 말소리가 들렸다. 밤중에 몰래 나온 것을 어른들에게 들키면 혼난 뒤 돌아가야 할 것이다. 얼른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튀어 들어갔다.

‘준비…….’

‘……채에 발작을 일으키시니…….’

‘하지만 경헌 님은…….’

순찰을 도는 세 인영은 내가 숨어 있는 나무 근처까지 왔다가 멀어졌다. 아예 사라질 때를 기다려 반쯤 뛰듯이 걸었다. 바로 저 모퉁이만 돌면 아버지가 머물고 있는 별채였다.

어제저녁부터 기하가 이곳에 있었다. 아버지의 명으로 불려 갔다고 했다. 나는 금방 돌아오길 바라며 자지 않고 동생을 기다렸지만, 기하는 밤이 되도록 안채로 돌아오지 못했다.

무언가 아주, 말할 수 없이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화려한 장식이 수놓아진 문을 지나 조심스럽게 마루 위로 올랐다. 기하가 있을 만한 방문 앞에 다가가서 소곤소곤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방문에 귀를 대 보았다. 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방문 앞마다 다가가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삐그덕, 그러다 약한 부분을 밟았는지 나무가 길게 울었다. 인기척 없는 별채에서 그 소리가 귀곡성처럼 멀리 퍼져 뒷덜미의 솜털이 쭈뼛 섰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도 주변에 살펴보러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이곳에는 ‘그것’이 있었다.

쉭, 쉬익.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안심해 몸을 세우자마자 등 뒤에서 겉껍질이 나뭇결을 따라 비벼지는 소리, 파들파들 떨며 비늘을 세워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등줄기가 오싹하게 섰다.

‘……아.’

언제 다가와 있었는지 내 키 반만 한 길이의 노란 뱀 한 마리가 대가리를 곧추세우고 혀를 날름거리며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리 지를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노란 몸에 같은 노란색 눈을 한 그 뱀은 아버지의 제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제물은 새카만 피부를 가진 어른 몸집만 한 커다란 구렁이였다. 이것은 제물에게 파생된 다른 뱀이었다.

‘저,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손을 휘두르다 물릴까 봐 신발을 벗어 내둘렀다. 저리 가! 끔찍한 것! 내가 소리를 낮춰 지른 으름장에 뱀은 요사하게 고개를 좌우로 갸웃갸웃했다. 그리고 한껏 더 위협적으로 몸을 부풀렸다. 쉭쉭거리며 내뱉은 소리에 근처의 뱀들이 응답했는지 복도 끝에서 바닥 위를 쓸며 다른 것이 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뒷걸음질 쳤다. 그때― 천장에서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으악!’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머리 위에서 떨어진 건 또 다른 뱀이었다. 그것은 내 비명에 몸을 웅크렸다가 튀어 오르며 캬악! 소리를 냈다. 나는 결국 참을 수가 없어져 손에 쥐고 있던 신발로 그것의 대가리를 쳐 버렸다.

퍽! 소리가 나며 붉은 뱀의 머리가 옆으로 꺾이자마자 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사방에 숨어 있던 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기도, 길이도, 굵기도, 색도 제각각인 뱀들이 내 쪽으로 비늘을 세운 채 일제히 기어 왔다.

‘으아아아악!’

신고 있던 신발도 놓치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빛 한 점 없는 복도 속으로 뛰어갔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 나았다. 기하를 구하기 위해서 온 것도 잊고 미친 듯이 뛰었다. 문이란 문고리는 다 흔들어 잡아당기다 열려 있는 방을 찾아 뛰어들었다.

‘하악…… 하아…….’

불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새카만 방구석으로 정신없이 기어들었다. 두 손으로 비명이 나오는 입을 막고 있자 사방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쥐 죽은 듯이 고요해진다. 그게 너무 무서웠다.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고 소매에 얼굴을 비벼 닦으며 한참을 쪼그린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뭣도 모르고 뱀 소굴인 별채에 혼자 온 걸 후회했다. 기하가 별채에 끌려갔다는 걸 듣고 구해 올 참이었는데. 내가 너무 한심해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기하야…….’

못 나가겠어.

미안해. 미안해.

형이 미안해.

기하의 이름을 부르면서 계속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형이 한심해서 미안해. 겁이 많아서 미안해. 뱀을 무서워해서 미안해. 지켜 준다고 해 놓고 숨어 있어서 미안해. 소리 질러서 미안해. 혹시 비명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깼으면 어쩌지. 나 때문에 네가 또 아버지께 혼나면 어쩌지.

벌을, 내리면, 어쩌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나에게는 생전 화도 안 내던 아버지가 기하에게는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화를 내던 게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고작 나한테 매달린다는 이유였다. 작고 하얀 두 뺨에 빨갛게 손톱자국이 나고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손찌검을 했다. 웬만해선 신을 거역하지 않는 고용인 누나들도 새파랗게 질려 말릴 정도로.

아버지는 자기를 보러 온 기하가 꼴도 보기 싫다며 목침을 집어 던진 적도 있었다. 그때 피가 철철 나는 이마를 하고 돌아온 기하를 보며 이러다 내 동생이 죽는 게 아닐까 싶어 펑펑 울었다. 네가 죽는다면 나도 함께 죽겠다고 울었다. 아버지를 원망하며 다시는 보러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이 세상에 가족은 너랑 나뿐이라고 다짐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숨어서 멍청하게 주저앉아 있을 때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닦으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드시 기하를 찾아야 한다. 아버지의 밑에서 데려와야 했다. 아버지는 기하를 싫어하셨으니까 무슨 짓을 저지르실지 모른다.

주변을 둘러보자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는지 방 안의 풍경이 어렴풋이 보였다. 뱀이 오면 휘둘러 쫓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기다란 물건을 찾아내어 단단히 쥐고는 잠갔던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문 앞에 뱀들이 가득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방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 두려워 잔뜩 긴장한 채 복도로 나왔다. 아무 곳에나 뛰어들었던 터라 여기가 별채의 어느 곳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겁에 질린 눈을 들어 커다란 문들을 올려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넓은 건물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릴까? 신이 있는 건물인데 어떻게 모시는 고용인이 아무도 없는 거야? 왜 이렇게 복도에는 빛이 하나도 없는 거지? 차라리 혼나도 좋으니 누구라도 만났으면.

‘기하야……. 기하야……?’

형 여기 있어. 있으면 대답 좀 해 봐.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문을 손으로 더듬어 가면서 찾아다녔다. 그렇게 복도를 몇 개나 확인했는지 모르겠다. 방문마다 달라붙어 열쇠 구멍에 대고 기하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실망했다. 발을 옮기는 것조차 무서운 어둡고 고요한 이 공간에서 헤매며 슬슬 지쳐 갈 때였다.

‘…….’

아주 가냘프게, 이렇게 지옥 같은 침묵과 고요가 아니라면 결코 듣지 못했을 희미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렸다. 잘못 들은 걸까 싶어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자 허밍 같은 투명한 음색이 다시 복도 위를 덮었다.

‘홀어머니를 ……아주 ……씨 착한 ……이 있었어요.’

‘……기하야?’

내가 기하를 재우기 위해 수십 번은 더 읽어 줘서 외웠던 구절이라 알 수 있었다. 저건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전래 동화의 도입부였다. 얼어붙어 있던 나는 홀린 듯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걸었다.

‘……효자 ……에서 칭찬이 매우 ……했답니다…….’

‘……나무꾼 ……덕에 새들도, 작은 짐승들도 ……친구라 그는 외롭지 않았어요.’

‘나무꾼이 ……할 때마다 숲속의 친구들이 찾아와 ……주고 노래를 불러 줬거든요.’

‘나무를 찍을 때마다 왼쪽에서는 새들이 서로 노래를 부르고…… 오른쪽에서는 작은 동물들이 ……맞춰 신나게 발을…… 췄어요.’

쿵! 앞을 제대로 안 보고 뛰어가다가 모퉁이에 몸이 부딪혔다. 끙끙거리며 아픈 어깨를 잡고 고개를 돌렸다. 소리는 분명히 근처에서 들리고 있었다. 노래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방문이 없었다.

‘그날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나무를 했답니다.’

‘기하야……! 어디 있어?’

문도, 창문도 하나 없는 막다른 복도 끝인데 대체 아이의 목소리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며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 찰그락, 하고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가 바로 발밑에서 들렸다.

‘……!’

소스라치며 얼른 뒷걸음질 쳤다. 더 물러나는 내 발목을 기하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나무꾼이 숲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조용하던 숲이 시끄러워지더니 풀숲이 흔들리는 거예요.’

어둠에 익은 눈으로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방금 내가 밟고 있던 것이 문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건 문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조잡한 것이었다. 동물도 그런 곳에는 집어넣지 않을 것 같은 작고 허름한 지하로 연결된 문 철창 사이로 동생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무너지듯 천천히 그 문 앞에 주저앉았다. 설마…… 설마…….

믿을 수 없어 바닥에 엎드려 문에 나 있는 구멍 안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눈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인영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더니 사슴 한 마리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와…….’

내가 손을 구멍 사이로 집어넣자 그것은 덜그럭거리는 사슬 소리를 내며 내 밑으로 다가왔다. 쿵쾅쿵쾅, 귀가 얼얼할 정도로 심장 소리가 울렸다.

‘나무꾼님.’

‘……살려 주세요. 하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아이가 내 손을 잡으며 문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손에 와 닿는 부드러운 촉감은 틀림없이 내가 아는 동생이었지만― 얼굴이……! 얼굴이……!

‘으……아아악!’

사랑스러울 아이의 얼굴을 생각하고 지하 문에 매달려 있던 나는 시야에 맺히는 형상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손을 뿌리쳤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아이의 얼굴은……!

쟁반만큼 푹 패어 꺼진 시커먼 두 개의 눈동자와 흉물스럽게 주름진 피부, 한가운데에 늘어져 있는 콧구멍 두 개. 머리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털 하나 없이 새카맣게 죽은 갈색 피부만 존재하는…….

아이는, 아이는 돼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끔 우리 집안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곤 했던 잘린 돼지의 머리를.

‘기하야……! 기하야!’

울부짖으며 지하 문에서 미친 듯이 물러났다. 복도 끝에 몸을 부딪치고 그대로 미끄러져 내렸다. 머릿속이 진탕이 되어 간다. 눈앞도 새빨갛게 변했다. 필사적으로 바닥을 긁어 뒤로 물러나며 비명을 질러 댔다. 세상에, 내 동생이, 사랑스럽던 내 동생이, 그 예쁘던 얼굴이, 괴물같…….

‘기하야!’

‘형, 형아……!’

‘아아!’

‘아냐, 아냐, 형.’

내가 고개를 도리질 치며 소리 지르는 동안 기하는 끊임없이 내 이름을 부르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그 애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기어이 아버지가 요술이라도 부려서 내 동생을 이렇게 바꿔 놨구나 싶었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지하 문에 달려들어 문짝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쾅! 쾅!

가지고 온 기다란 막대를 사용해서 온 힘을 다해 지하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걸쇠를 때려 부셨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모른다. 워낙 조잡한 나무 문이어서 수차례 내려쳤더니 결국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기하야……! 기하야!’

문을 열기 무섭게 나를 향해 손을 뻗는 돼지머리를 한 아이를 끌어안았다. 빨려 들 듯 안겨 오는 몸에서는 수없이 맡아 본 익숙한 냄새가 났다. 아까부터 이미 기력이 다했던 나는 무너지듯 아이를 안고 바닥에 쓰러져 헐떡거렸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진이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내 품에 안긴 아이는 늘어진 나를 가만 놔두지 않고 다급하게 흔들었다.

‘형, 형아!’

‘어떻게…….’

‘이건 내 얼굴이 아냐! 형아!’

‘…….’

‘가죽이야. 형! 아버지께서 주신 벌이었어. 내 얼굴이 아냐!’

‘……뭐?’

‘잘 봐.’

눈물범벅 된 눈을 깜박여 아이의 목을 살피니 정말로 희미하게 드러난 이음새가 보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당장 손부터 뻗었다.

‘…….’

아아, 말캉하게 손끝에 닿는 것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죽은 피부였다. 살아 있는 동생의 피부가 아니었다. 심장이 꺼질 것 같이 안도감이 밀려옴과 동시에 아이의 얼굴 위에 불길하고 더러운 것을 씌운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혐오감으로 몸이 떨렸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미안해. 벌을 받고 있어서 벗을 수가 없었어.’

동생의 말을 듣고 기가 막혀서 더 말이 안 나왔다. 할 수 있는 모든 욕설을 내뱉으며 동생의 얼굴에서 돼지가죽을 벗겨 냈다. 그 흉물스러운 것을 바닥으로 확 패대기친 뒤 나는 힘없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내가 없는 사이 당했을 고초를 생각하니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계속 흐느꼈다.

‘기하야 미안해. 형이 늦게 와서 미안해! 무서웠지?’

‘괜찮아. 나는 형이 와 줄 줄 알았어. 알아서 기다렸어.’

‘다친 덴 없어? 어디 아픈 데는?’

‘응, 나는 멀쩡해.’

제어가 안 될 정도로 흐르는 눈물을 오히려 아이가 작은 손을 움직여 닦아 주었다. 기하의 뜨거운 손에 얼굴을 비비며 울었다.

‘왜…… 왜 이런 벌을 받은 거야. 기하야.’

‘아버지가 형을 데려오라고 했는데 계속 어겼으니까. 그래서 벌을 받았어.’

겨우 그런 일 때문에. 결국은 또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했다는 거야? 도대체 왜?

덜덜 떠는 나와 달리 아이는 오히려 별일 아니라는 듯 안겨 왔다. 아이의 머리를 서럽게 쓰다듬자 어둠 속에서도 미모가 가려지지 않는 아름다운 아이가 천사처럼 웃었다. 그냥 나한테 안겨 있기만 해도 좋다는 듯이 아직 풀리지 않은 발목의 사슬을 끌면서도 마냥 해맑게 얼굴을 비빈다. 너무 처연하고 가슴 아프고 사랑스러워서 숨이 막혀 왔다.

이 아이를 어쩌면 좋아.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이렇게 예쁘고 순한데.

그때 우리 머리 위로 더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흉포하게 목을 울리는 소리와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물비린내. 오한이 들어 가까스로 위를 보자 어둠 속에서 등잔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는 두 개의 녹색 눈과 마주쳤다. 어둠에 녹아들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굵은 몸체가 똬리를 튼 채 혀를 날름거리며 구멍 안에 들어와 있는 나와 동생을 관찰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것은 아버지의 제물이었다. 신의 허물이었고 악의 원흉이었다.

‘……가자. 빨리 가자 기하야.’

커다란 검은 구렁이는 언제부터 우리를 보고 있었는지 내 말에 파르르 떨며 비늘을 세웠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그 피부를 식은땀을 흘리며 바라보다가 서둘러 동생의 발목을 살폈다. 문을 열었던 막대를 다시 집어 들어 사슬 부분을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다. 만약 별채에 사람이 남아 있다면 결코 못 들을 수 없을 소음이 울려 퍼졌지만 문의 걸쇠와는 달리 사슬은 견고해서 몇 번을 내리쳐도 부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이래. 왜 안 부서져. 초조하게 중얼거리며 힘을 줬지만 그럴수록 더 어긋나기만 했다. 구렁이는 내가 한 번씩 사슬을 내려칠 때마다 자신을 때린 것처럼 더 심하게 몸집을 부풀렸다. 파르르르르 위협하는 소리와 함께 구렁이의 비늘이 피부의 결을 타고 세워졌다. 끔찍한 형상이었다. 그러더니 커다란 머리를 불쑥 구멍 안으로 들이밀었다.

‘윽! 저, 저리 가!’

‘형! 괜찮아.’

내가 구렁이를 향해 휘두르려 막대를 치켜들자 기하가 저지했다.

‘하지 마. 자극하면 안 돼.’

‘하지만……!’

‘괜찮아. 안 해칠 거야.’

우리는 신의 후계니까.

기하는 마치 뱀의 언어를 알아듣는 것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기하를 내 등 뒤로 숨기자 구렁이는 허락받은 걸 안다는 듯 녹색 눈을 번뜩거리며 천천히 구멍 안으로 진입했다. 부서진 문짝에 차례대로 닥닥거리며 쓸리는 비늘 소리가 징그러워 이를 악물었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아버지를 미치게 만든 원흉. 미친 아버지가 자식인 우리보다 아끼는 생명체.

막대를 붙잡은 손을 꽉 쥐었다. 여차하면 머리를 뚫어 버리겠다고 다짐하면서.

제물은 그런 내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더니 날름거리던 혀마저 집어넣고 몸을 도사려 기어들었다. 발목을 물까 싶어 뒤로 물러났을 때였다. 그것의 눈이 가늘게 찢어지더니 순식간에 입이 활짝 벌어졌다. 그때 제물의 이가 눈앞에 돋아난 광경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까……. 그저 머리가 새하얘지도록 원초적인 공포가 몰려왔다. 그것은 내가 감히 해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힘으로 대적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내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기하의 손을 움켜쥐었을 때 제물은 소리 없이 벌린 입을 사슬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역시 소리 없이 입을 닫았다. 순간 찰그락,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슬이 잘려 떨어졌다. 내가 몇 차례나 내리쳤을 때도 부서지지 않던 사슬이 입질 한 번에 산산조각이 났다.

믿어지지 않아 발밑에 떨어져 잘린 사슬을 바라보았다. 잘린 것도 잘린 거지만 그걸 제물이 잘라 줬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걸 하려고 구멍으로 들어왔어? 사슬을 잘라 주려고? 인간도 아닌 네깟 것이 어떻게 알고?

정말 그게 볼일이었던 듯 제물은 심드렁하게 다시 몸을 물려 기다란 몸체를 구멍 밖으로 천천히 빼내었다. 그게 완전히 나간 걸 확인한 뒤 기하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 일단 제물이 날 도와준 이유고 뭐고 중요한 건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거였다.

‘가자. 이젠 정말 가야 해.’

아이를 안고 구멍을 빠져나와 복도를 에워싸고 있는 제물의 똬리 튼 몸을 넘어 뛰었다. 뒤에서 커다란 비늘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따라왔지만 도망에 집중했다. 도와준 건 사실이었지만 제물은 아버지 것이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저게 나를 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체 어디가 출구인지 알 수 없어 무작정 뛰는 뒤로 새된 아버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기현! 이기하!’

‘……가자.’

그 난리를 피우며 소음을 만들었으니 깨는 게 당연했다. 지금껏 고용인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뒤에서 아버지가 계속 나와 기하의 이름을 부르며 이리 오지 못하겠냐고 고함을 질렀지만 무시하고 그냥 달렸다. 하지만 운이 나빴다. 선택한 길이 막다른 복도였던 것이다.

‘어쩌지…….’

울상을 짓는 동생을 토닥거리며 달랬다.

‘괜찮아. 형이 있잖아.’

‘하지만…….’

‘형이 있으니까 아버지께서 크게 혼내진 못하실 거야.’

내 말에 겁에 질린 눈으로도 기하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숨어 있는 복도 지척으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캬악!

복도 반대편에서 커다란 것이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제물을 핍박할 때 나던 소리. 묵중한 게 건물 이곳저곳에 몸을 부딪치며 아픔에 몸부림쳤다. 안고 있던 기하를 복도 끝에 몰아넣고 끌어안았다. 듣지 마. 기하야. 너는 들으면 안 돼.

‘이기현!’

드디어 나타난 아버지는 우리가 얼싸안고 있는 걸 보더니 더 고함을 질렀다.

‘네가 미쳤구나!’

대체 무얼 하다가 온 건지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무언가의 방해에 의해 그는 소음을 듣고도 오지 못했던 것이다.

‘당장 그 끔찍한 것에서 손 떼지 못해?!’

그는 손가락으로 내가 가슴에 안고 있는 기하를 가리켰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동생을 해칠 것 같아 얼른 내 등 뒤로 숨겼다.

‘이제 그만하세요. 우리 둘 다 아버지의 자식이잖아요!’

자식이라는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욕을 하는 것에 맞서 나 역시 바락바락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냐고. 이 아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가축 다루듯 가둬 놓은 거냐고. 우리가 미친 게 아니라 당신이 미친 거라고!

‘후회하게 될 거야 기현아. 네가 지금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그는 보이지도 않을 내 등 뒤만을 쏘아보았다.

‘‘저것’은 너를 망칠 거다.’

‘그러지 마세요. 애가 들어요!’

내가 품 안의 아이를 끌어안고 귀를 막아 주자 아버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까지는 죽일 것같이 노려봐 놓고서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하소연하듯 두 손을 내민다.

‘내가 다 설명해 주마. 네가 아직 어려서 차마 말해 주질 못했어. 응? 기현아! 아버지 말을 들어야지? 너를 봐야 했다. 기현아!’

‘저리 가요! 가까이 오지 마요.’

‘너는 나하고 같이 가야 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이다.’

‘가요! 제발 부탁이니 가라고!’

‘나는 널 지키려고 하는 거다. 네가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해 줄게. 금방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이 세상에 네 편이 나뿐이라는 걸.’

‘내 편은 기하뿐이에요.’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동공이 커졌다. 눈알의 핏줄은 시뻘겋게 번지고 얼굴은 터질 듯이 부풀어 아까의 제물보다 더 괴물 같아 보이는 그가 고개를 저으며 발악했다.

‘기현아, 기현아 제발! 저것과 함께 있으면 너는 타락하게 돼!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아. 네가 미치게 된다.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야? 저 여우 새끼는 도둑놈에 거짓말쟁이라고!’

아버지의 말에 내 등을 꽉 잡고 있는 기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당신이야. 이렇게 어린애한테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고……! 단단히 미쳐 버렸어. 당신 따위의 말은 듣지 않을 거야. 죽어도 다시는, 여기 오지 않을 거라고!’

우리 형제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은 건 본인이면서, 내가 한 말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스러운 얼굴을 하고 더 이상 다가오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허망하게 동생을 안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배신감과 고통, 그리고 혼곤을 담은 눈을 하고.

‘이기현.’

그는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망연하게 내뱉었다. 검은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눕듯이 무릎을 꺾었다. 그래도 여전히 내 등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을 내리지 않은 채였다.

‘네 눈에는 저 괴물이 어린애로 보인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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