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0/47)

3

이기현.

이기현.

나의 형.

그의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보는 것만으로도 내 심장은 황홀하게 달아올랐다.

자고 있는 그의 귓가에 몇 번이나 이름을 불러 보며 내가 성장하면 그가 내가 부른 이름에 화답하는 꿈을 꾸었다. 지금은 형으로 부르지만 훗날 다른 연인들처럼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러나 아이의 탈을 벗고 어른의 문턱을 밟자마자 현실을 깨달았다. 그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의 것이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하늘이 안배해 준 나만의 반려였지만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던 나와는 달리 그는 무슨 짓을 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그에게 나는 사랑스러운 동생, 하나뿐인 가족, 지켜야 할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리 사이를 이어 주는 수십 개의 연결고리가 있었지만 그는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를 잊은 상태였던 것이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아버지. 선대 여우 신이었던 그 남자 때문이었다.

이기현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씌웠던 각인은 올가미가 되어 내 숨통을 졸랐고 죽은 자 따위가 감히 현세의 여우 신을 이길 수 있을까 얕잡아 보고 성인이 될 때까지 방치해 뒀던 게 패인이었다. 능력이 자라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에게 씌운 각인은 풀리지 않았다.

반려의 자리를 망각한 채 여우의 피를 이은 내 연인은 가시를 돋치면 돋칠수록 범인의 이목을 끌었다. 오히려 그런 텅 비어 버린 위태로운 분위기가 뭇사람들의 기갈을 불러일으켰다.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모으며 사람을 홀렸고 뒤에서 그를 연모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 때마다 나는 미칠 것 같았다.

당신은 내 것인데. 비어 있는 그 자리는 바로 내 자리인데.

어째서 남들 눈에까지 보이는 거야.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해?

그리고 그보다 작고 어렸던 내 신체를 증오했다. 왜 나는 빨리 크지 않는 거지. 왜 아직 이렇게 작지.

자신보다 덜 여문 나를 사랑스러워하는 그를 보며 하루빨리 더 크게 자라나 위에 서서 그를 안을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가 해 주는 것처럼 나도 내 팔로 형을 안아 올릴 수 있기를.

내 애정이 뒤틀리고 음험한 방향으로 뻗어 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고 나에게서 멀어지는 그를 보며 질투와 독점욕으로 속수무책 일그러졌다. 망가진 내가 그를 해칠 것만 같았다. 동생 이상의 애정을 주진 않는 그를 보며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잔학해지는 걸 느꼈으니까.

그래서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자아를 버리고 이기현이 원하는 동생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나를 깎아 그의 이상형이 되도록 연마했다. 그가 못 알아보더라도 자연스럽게 나를 짝으로 선택하고 곁에 잔류할 수 있도록.

이기현이 ‘신’이라 믿고 있는 존재는 계승 이전, 훨씬 전부터 억눌러 왔던 내 진짜 성격이었다. 그는 이 모습이 가짜이고 동생을 죽이는 일이라 생각해 괴로워하지만 사실은 이게 그게 찾던 진짜 나였다.

나의 주인. 당신은 언제쯤이 되어야 나를 완전히 반려로 봐 줄까. 언제까지 내가 이 연극을 해야 할까.

기다리는 건 익숙하다. 참을 수 있다. 내 사랑이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인정했으니까. 아주 조금씩이지만 천천히 잘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이제 정말 내 것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그자의 각인을 벗겨 내지 못한다면 더 강한 각인을 덧씌우면 된다. 더러워진 벽지 위에 새 페인트를 바르듯이.

“…….”

어깨에 기대어 있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욕실에 가득 찬 수증기로 시선을 돌렸다. 살짝 숨이 가빠질 정도로 들어찬 온기가 만족스러웠다. 기현은 항상 뜨거운 걸 좋아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태어날 때부터 나와 짝을 이뤄 태어났으니 내가 곁에 없으면 계속해서 한증에 시달려야 할 거다. 나 역시 그를 품지 않으면 풀지 못한 화증 덕분에 성격이 잔학해졌으니. 그래서 가솔들은 내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이기현을 본가에 어떻게든 오래 머물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가 정신을 잃은 지 못해도 반 시진은 된 것 같아 가만가만 짓이겨 놓은 상처에 혀를 내어 핥으며 치유했다. 새살이 차오르는 느낌이 간지러웠는지 몸을 뒤채자 첨벙거리는 파동이 수면 위를 달렸다. 곧이어 자맥질하듯 꿈틀거리며 이기현이 내 몸 위에서 살며시 젖은 눈을 떴다.

몸에 차츰 생기가 도는 모습을 눈에 새기며 그가 놀라서 저항하다 떨어지지 않도록 좀 더 강하게 허리를 움켜잡았다. 보석 같은 자색 눈동자가 불규칙하게 껌벅거리며 의아한 빛을 띠더니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내 얼굴을 내려다본다.

“아…….”

수증기에 감싸인 젖은 남자는 평소보다 배는 더 아름답고 배는 더 관능적이라 눈앞이 아찔해졌다.

……너무 예뻤다. 평소에는 창백한 하얗고 핏기가 없던 피부가 뜨거운 물에 달아올라 복숭아색으로 상기된 것도 예뻤고 물기를 머금어 촉촉하게 젖은 새카만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굴러떨어지는 것도, 물고 빨려 평소보다 붉게 부어 있는 입술도 예뻤다. 이렇게 요염하고 아름다운 것이 내 짝이라는 게 기적 같아 숨이 막혔다.

“으……, 기하야…… 무슨……?”

명정하지 못한 발음으로 혀를 굴리던 기현은 자신이 방금까지 정신을 잃고 있었던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혼곤한 눈동자로 자신이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내 침실에 딸려 있는 욕실의 커다란 월풀 욕조 안이었다는 걸 확인하고 깜짝 놀라 옷깃을 부여잡는다.

그가 몸을 뒤칠수록 뜨거운 점막이 미친 듯이 오물거리며 더 깊숙하게 성기를 빨아들였다. 이성이 날아갈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그의 엉덩이를 움켜잡자 접합부에서 기포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이게…… 이게 뭐…….”

“기현아, 잠깐…….”

“이게 뭐야……? 여기…….”

아직 잠이 덜 깬 그는 내가 동생인지 아니면 예의 ‘신’으로 구분하고 있는지조차 판단을 못 하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계속해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써서 억지로 허리를 휘어잡아 강제로 다시 앉혔다. 몸 안을 깊숙이 파고드는 성기를 느끼고 여과되지 않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젖은 머리를 기대 온다. 저혈압 탓인지 그는 잠에서 깨 정신을 차리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흐읏……. 읏…….”

“괜찮아. 여기 욕실이야.”

힘도 안 들어가는 허벅지를 세우려고 애쓰며 바르작거려 벌어진 다리가 덜덜 부딪쳐 온다. 계속 뭐냐고 어디냐고 혼잣말하며 그는 나를 기하라고 불렀다가 신이라고 불렀다가 쉽사리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귓가에 계속 입을 맞춰 나라고 몇 번이나 속삭이며 달랬더니 그제야 어깨를 움츠리고 웅크린다.

“제가…… 왜 여기에……?”

“아까 하던 도중에 기절해 버린 거 기억 안 나나?”

“그랬……습니까.”

한 시간 전 흙발을 한 그를 안아 올려 욕실로 들어온 다음 뜨거운 물을 받으며 발을 씻기고, 발목을 씻기고, 바지 속에 손가락을 넣어 종아리를 애무하고, 그러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몸을 섞었다.

순수하게 내가 좋아 받아 줬다기보다 아직은 고용인들의 안위가 걱정되든지 내가 무섭든지 하는 얄팍한 감정이 조금 들어가 있겠지만 그저 그가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눈을 가리게 해 달라고 비는 소리를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첫날밤의 트라우마는 괴상한 성벽으로 발전해서 그는 인위적인 것으로 눈을 가리지 않으면 쾌감을 해소하지 못했다. 죽을 것 같이 한계로 몰아붙여도 사정이 불가능했다. 결국 해소되지 못한 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이기현은 중간에 내 품에서 혼절해 버렸다.

아직도 내가 몸속에 들어가 있는 걸 눈치채고 아픈 건지 느끼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완전히 끌어안겨 추울 리가 없는데도 형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매달려 왔다. 헐떡이는 젖은 숨결이 목덜미에 와 닿을 때마다 미칠 것 같다.

일어나자마자 할 생각은 없었는데.

조금은 적응할 시간을 줄 생각이었는데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미친 듯이 자극해 대니 어쩔 도리가 없다. 천천히 허벅지를 움켜잡아 들어 올렸다가 다시 주저앉히며 자극하자 그가 허리를 꺾으며 예쁘게 울었다. 물결이 이는 것에 맞춰 성기를 얕게 뽑아내었다가 밀어 넣는 걸 반복하니 손톱으로 내 쇄골을 긁으며 몸을 비튼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데다가 계속 내 것을 품고 있었던 터라 속이 평소보다 훨씬 예민하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날 좀 봐.”

이렇게 그의 눈을 보며 하는 것은 처음이라 억지로 얼굴을 들게 만들었다. 눈물이 가득 찬 자색 눈동자가 원망을 담고 몇 번 힘겹게 깜박거리다 결국 또 꽉 감아 버린다. 정말 예뻤는데 감아 버린 게 아쉬워 눈 좀 뜨라고 채근하며 몰아붙이자 속눈썹에 물기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가 내가 허리를 터는 것에 맞춰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기현아.”

눈 좀 떠 줘. 응? 눈을 떠. 이제 당신 눈동자를 보면서 하고 싶다고.

뭉근하게 하체를 비비며 그의 벌게진 눈가를 핥았다. 피부를 핥는 것뿐인데 단맛이 났다. 부드럽게 허리를 추어올릴 때마다 기현이 진저리를 치며 몸을 물렸다. 도망치지 못하게 팔을 움켜쥐고 파인 쇄골에 고인 물방울을 빨아들이자 붉게 울혈이 비쳤다.

“흐읏…….”

어깨를 밀어 내며 저항하는 그의 등에 팔을 둘러 바싹 끌어안았다. 끝까지 쑤셔 넣은 성기가 좋은 곳을 찔렀는지 가느다랗게 신음하며 허리를 무너뜨렸다. 이미 한차례 시달려 붉게 물든 유두를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핥아 올리니 심하게 느끼며 안쪽을 몇 번이나 수축시킨다. 입으로 오물거리며 빨아들이는 기분이었다.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구음을 받아 본 적 없었지만.

저 작은 입에 내 걸 물리면 어떤 느낌일까. 빨아 주는 것에 흥분하기보다는 아마 이기현이 내 것을 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금세 사정해 버릴 것 같았다. 저 붉은 혀가 내 것의 기둥을 휘감고 핥아 준다면…….

상상했을 뿐인데 하반신에 피가 몰려 귀두가 탱탱하게 부푸는 걸 느끼면서 입술을 오므려 유두를 물었다.

“아으…… 읏……. 하아…….”

첨벙거리는 물소리 사이사이로 끊어질 듯 위태위태한 기현의 신음 소리가 섞여 드는 걸 감상하며 붉게 물든 작은 살덩이를 입 안에 넣고 굴리면서 쭉쭉 빨아 당겼다. 내 혀의 움직임에 맞춰 그의 안도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성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어깨를 움켜쥔 기현의 손톱에 바짝 힘이 들어가더니 붉은 잔상을 남기며 쭉 미끄러졌다. 마음에 드는 크기가 되도록 물어 당기며 세웠더니 유두를 핥을 때마다 혀끝에 단내가 난다. 흥분한 성기의 밑동이 단단하게 부풀어 놀란 기현이 반사적으로 구멍을 꽉 조였다. 순식간에 미친 듯이 박고 싶다는 욕망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역시 잠자리에서 부드러운 건 취향이 아니다. 상대가 이기현이니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온몸을 통째로 발라먹어도 모자란데 감질나게 핥는 걸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일어나.”

억지로 팔을 움켜쥐어 일으켜 세웠다. 약에 취하기라도 한 듯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몸이 이끄는 대로 딸려 올라온다. 욕조 밖에 반쯤 기대게 만들고 허벅지를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그의 가랑이 사이로 구멍 안에 고여 있던 흰 액체가 줄줄 흘러내린다. ……환장하게 야했다.

아직 말랑거리는 성기와 고환을 훑어 내리며 손가락 두 개를 세워 구멍 안에 쑤셔 넣자 늘어져 있던 몸이 튀어 오르며 팔목을 움켜쥐었다.

“왜…… 이걸.”

“안에 빼내려고 그래. 씻어야지.”

사실 식은 씨물을 빼내고 새로 넣기 위함이었지만, 달래는 소리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잡은 손을 놓는다.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며 검지와 중지를 펼쳐 몸 안 깊숙이 밀어 넣었더니 이기현이 몸을 비틀며 신음을 흘렸다.

귀에 비단처럼 감기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오랜 시간 내 걸 품고 뜨거운 물속에 있던 형의 내부는 흡사 젤리같이 말캉거리며 손가락을 쭉쭉 빨아들였다. 그 자극에 팽팽하게 서 있던 성기 끝에서 울컥하고 프리컴이 망울져 흘러내렸다. 이를 악물며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을 쑤셔 넣고 긁어내자 손끝에 물컹한 진액이 걸렸다. 아, 젠장. 더 이상 참을 수가…….

급하게 손가락을 뽑아내고 그를 뒤집어 억지로 욕조 위에 기대게 만든 뒤 양옆으로 엉덩이를 벌렸다. 엄지를 세워 이미 충혈된 구멍 안에 집어넣고 입구를 꾹꾹 눌러 벌린 뒤 한계까지 몸집을 불린 성기를 가져다 댔다. 머리에 비어져 나온 쿠퍼액을 펴 바른 후 체중을 이용해서 귀두부터 푹 박아 넣자 끈적하게 입구 속으로 가장 굵은 부분이 쉽사리 빨려 들어간다.

“아…… 아, 하읏…….”

미끈거리는 점막이 기다렸다는 듯 무섭도록 성기를 빨아먹었다. 쫀쫀한 푸딩 속을 휘젓는 것 같아 경탄하며 사정없이 허리를 들이밀었다. 눈앞이 뚝뚝 점멸하더니 하얗게 날아간다. 허벅지에 힘을 주는 대로 성기는 깊숙하게 기현의 몸속을 가르고 들어갔다. 끝도 없이 밀려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깊……어요, 깊어서…… 힘듭니……. 읏…….”

기현은 우는소리를 내며 벗어나려고 바르작거렸지만 지금 내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몸속으로 더 깊게 들어갈 뿐이었다.

더 깊게…… 끝까지……. 그의 몸이 선사하는 쾌락에 정신없이 도취되고 있었다. 온몸이 젖어서 평소보다 뿜어 나오는 페로몬이 더 요사스럽게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점막은 그냥 발라먹으라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다닥다닥 달라붙어 온다. 내가 그를 잡아먹고 있는 건지 그가 나를 잡아먹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흡사 발정기라도 온 것 같이 몸이 달아오르며 고간이 욱신거렸다. 뿌리 끝까지 박은 상태로 도망치려고 바르작거리는 그의 목에 이를 세웠다.

“아윽……!”

욕실에 날카로운 그의 신음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허리 짓을 시작했다. 짐승들이 암컷을 제압하고 강제로 교미하듯 목을 물고 세게 누른 채로 성기를 반쯤 뽑았다가 거칠게 다시 밀어 넣었다. 위도 아래도 아픈지 기현이 평소와는 달리 신음 소릴 참질 못하고 귓속에 퍼부었다.

퍽, 퍽,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눈앞에 별이 번쩍번쩍 튄다. 신경 세포가 다닥다닥 일어나며 예민해진 성기 끝에서 쿠퍼액이 질금질금 비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두 번째 교합이라 눅진눅진하게 녹아 있는 그의 안이 처음 할 때보다 훨씬 기분 좋게 내 몸을 감싸고 우물거렸다.

“으흑……, 흐읏……!”

“큭…….”

달다. 그의 몸 안이 달았다. 달다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연신 혀로 입술을 축이며 푸딩 같은 내벽을 뭉개 버릴 것처럼 억지로 비틀어 열자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도 굵은 살덩이는 전립선을 자연스럽게 짓누르고 비벼 들어가 그의 울음소리에 쾌감이 섞여 들었다. 이젠 아파서 그러는지 좋아서 그러는지 분간할 수 없는 교성을 들으며 뭐에 홀린 듯 허리를 움직였다. 거센 움직임에 욕조 물이 범람해서 바닥과 몸뚱어리가 온통 젖어 들었다. 끝 간 데 없이 기분이 고양한다. 마구잡이로 들이박자 철썩철썩, 탱탱하게 올려 붙은 고환이 아직 말랑한 그의 고환을 얼얼하게 때려 댔다.

“아, 아앗! 흐윽……! 아! 아아!”

“읏…….”

들이박을 때마다 구멍에서 울컥울컥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피만 아니면 된다. 반쯤 뽑은 성기에 붉은 기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거칠게 쑤셔 박았다. 애액치고는 많은 양의 투명한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너무 많이 흘러내려서 겁이 날 지경이었다.

“제발요……. 감당 못 하겠…….”

“하아, 미친……, 기분…… 좋아. 기현아, 기현아…….”

한 손으로 그의 다리를 움켜잡아 들어 올린 채 각도를 바꿔서 꾹꾹 찌르고 들어가자 전립선을 제대로 긁혔는지 가뜩이나 힘이 들어가지 않던 허리를 꺾어 욕조 가장자리에 무너진다.

“그만……하세요. 으, 읏, 죽을 거 같아……. 흐……읏…….”

귀에 쏟아지는 우는소리도 달았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그가 쏟아 주는 모든 것이 다 달았다. 아마 그가 밑에서 욕설을 퍼부어도 달게 느껴졌을 것이다.

“더 울어. 계속해.”

신음이든 비명이든 좋으니까 계속 울어 봐.

그 뒤로는 한계가 없는 것처럼 쉼 없이 속도가 올랐다. 처음에는 워낙 안이 부드러워 철퍽거리는 젖은 소리만 나던 구멍 안이 시간이 지날수록 퍽! 퍽! 퍽! 하고 살을 뭉개고 가르는 소리로 바뀌었다. 허벅지로 튀는 애액의 양도 많아졌다. 극도의 흥분으로 근육이 돌같이 엉겨 붙은 허벅지를 발정 난 개새끼처럼 형의 다리에 대고 비비며 구멍 안을 제멋대로 휘저었다. 한 번씩 크게 돌리는 순간순간 그의 입에서 죽을 것 같은 비명이 울렸다.

“젠장……. 기현아. ……너무, 좋아. 미치겠어.”

“……흐읏! 아, 앗……! 아……!”

“진짜, 후…… 빌어먹을, 이게…… 가라앉지가 않…….”

느껴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늘 형과의 섹스는 극치의 쾌락을 선사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미칠 것 같았다. 전혀 자제가 되지 않는다. 커다랗게 몸을 앞뒤로 흔들면 뒷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정도로 폭력적인 쾌감이 온몸을 때렸다. 눈앞이 몇 번이나 아뜩하게 멀어지는 감각이 찾아왔는데도 정신을 차려 보면 계속해서 허리가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막 처음 접붙어 본 짐승 새끼처럼 헐떡이며 계속 형의 몸을 쑤시고 탐했다.

돌아 버릴 것 같다. 눅진하게 녹은 돌기들이 내가 성기를 잡아 뽑을 때마다 끈적하게 들러붙으며 매달려 와 정신없이 다시 쑤셔 넣었다. 이 몸은 요물이었다. 이렇게 혀가 내둘릴 만큼 요사한 걸 본 적이 없었다. 이건 날 미치게 하려 작정하고 만들어진 몸뚱이였다.

“기현아……, 아― 이기현……!”

다리를 들어 올려 어깨에 걸치고 들이박는 순간 끊어질 듯 성기가 강하게 조여들며 갑자기 시야가 암전되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다시 제 시야를 찾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다. 몇 초……? 아니면 몇 분……?

부유했던 정신이 뚝 떨어지며 자리에 돌아왔을 때 나는 허벅지를 무섭게 굳히고 그의 몸 안에 파정하고 있었다. 사납게 날뛰던 성기는 욕망을 풀어내는 순간에도 진정을 하질 못하고 위협적으로 펄떡거렸다. 축적되어 나를 기다리던 쾌감이 린치하듯 뇌신경을 타닥타닥 두들겼다. 새하얗게 터지는 빛의 포말이 눈앞을 몇 차례나 덮쳤다 물러나고, 온 신경이 밀려드는 자극에 견디지 못해 딱딱하게 죄어들자 내 밑에 형편없이 짓눌려 있던 그가 진저리를 치며 팔뚝을 연신 긁어 댔다. 그 날카로운 고통마저 쾌감이었다.

“흐…….”

그가 몸부림치며 물고 있는 성기를 뱉어 내려 허리를 비틀어 삽입이 한층 더 깊어졌다. 무게를 실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잡아 누른 뒤 다시 목을 물어뜯어 제압하고 사정을 계속했다. 두 번째 사정이었는데도 양이 많았는지 접합부에서 밀려나온 하얀 거품이 줄줄 쏟아졌다. 그의 몸 안을 뿌듯하게 채우는 걸 느끼며 정복감에 허리를 떨었다. 사랑스러웠다. 마킹하듯 그가 내 체액에 젖어 들어 온통 내 냄새로 물드는 게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조금도 가라앉지 않은 성기로 구멍 안을 휘저으며 씨물이 몸 깊숙한 곳으로 흘러 들어가게 허리를 움직이자 앓는 소리를 낸다.

“그만…….”

간신히 호흡하는 입술을 맞물며 반쯤 서 있는 기현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긴 행위 도중 전혀 만지지 않았지만 해갈되지 못한 쾌감이 몰려 있을 거란 걸 안다. 손가락을 움직여 부드럽게 발기시키자 내 팔뚝을 쥐어뜯으며 미약한 반항을 했다. 손안에서 탱탱하게 몸집을 부풀리는 성기를 굴리며 입맛을 다셨다. 마음껏 입에 물고 핥고 싶다. 지금이라면 억지로라도 물 수 있을 텐데……. 생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였지만 오늘은 참아야 했다. 지금은 약을 쓸 수 없으니까.

“아아, 아읏…….”

꽂아 놓은 성기를 느긋하게 돌려 전립선을 지그시 눌러 자극했더니 그의 입에서 고통 한 점 섞이지 않은 순수한 쾌락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 손과 내 것으로 느끼는 게 예뻐 죽겠다. 기왕이면 함께 가면 더 좋았을 테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눈을 가리지 않고 한 것만으로도 만족이다. 앞으로 길들일 시간은 많으니까.

“가.”

“흐윽…….”

“가도 돼.”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기현의 눈을 가리니 그가 견디지 못하고 가늘게 교성을 뱉으며 내 손안에 파정하기 시작했다. 색이 깨끗한 성기 끝에서 농도 짙은 백탁액이 울컥 쏟아졌다. 오래 시달린 만큼 평소보다는 제법 많은 양이었다. 끝까지 짜내도록 다독이며 마사지하다가 사정이 끝난 후 그대로 손을 입에 가져가 진득하게 묻은 액체를 핥았다. 인간의 것과는 달라 씁쓰레한 체액에서 들꽃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손가락 사이로 혀를 움직여 남김없이 핥아 먹었다. 기다렸다는 듯 고간이 다시 홧홧하게 뜨거워졌다.

내가 없었다면 형도 평범한 여자를 만나 이 씨물로 잘도 임신시켰겠지. 그래 그 여자 같은.

여자.

네가 여자에게 질투를 했다고?

그녀에게?

그 여자를 보고도 질투 외의 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어?

헐떡이며 간신히 숨을 들이켜는 남자의 입술을 깨물고 턱 끝을 핥으며 내게 엉망진창으로 물어뜯긴 목덜미에 얼굴을 대고 비볐다. 그보다 더 들끓는 숨을 그대로 형의 몸에 쏟아부었다.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걸 그가 알 수 있도록, 내 탐욕과 흥분을 숨기지 않고 보여 주었다.

“……기현아.”

“…….”

“이기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촉촉하고 연한 피부에 입술을 미끄러뜨리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전처럼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모진 대답 대신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떨군다. 밀어내지도 못하고 내 고백에 그저 뺨을 붉히고 무력하게 몸을 떨었다.

거부하지 않는다. 화내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이 흥분해서 나는 또다시 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 *

추워하는 건지 다시 몸을 섞는 내내 그가 심하게 몸을 떨어서 결국 침실로 안고 들어왔다. 방 안을 데우고 솜이불에 누인 뒤 뜨거워진 내 몸을 몇 번이나 겹쳐도 그의 떨림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고 몇 번이나 구슬리고서야 겨우 다시 몸을 열어 주었다. 그나마도 끝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또다시 혼절해 결국 제대로 사랑을 나눈 건 두 번째뿐이다.

생각보다 눈을 가리지 못하게 만든 게 타격이 심한 모양이었다. 하긴 초반에는 눈을 못 가리게 하면 발작하며 토하기도 했었으니 지금 이 정도 반응은 그나마 많이 나아진 거였다.

나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를 목격할 때마다 처음에 억지로 몸을 취한 게 잘못이었을까 하고 후회하곤 했지만 시간이 되돌려진다 해도 나는 똑같이 했을 것이다. 결벽이 심한 내 형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평생 나를 남자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피치 못하게 제물로 엮인 관계조차도 이날 이때껏 부정하며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데 그저 동생으로 옆에 있었다면 결코 내 욕망을 허락하지 않았겠지.

시트에 묻혀 곤하게 잠든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내리며 지켜보다 뒤에서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깨끗하게 씻긴 몸에서는 나와 같은 샤워 코롱 냄새와 뚜렷한 내 체취가 나 흡족해졌다. 양껏 안긴 몸은 따끈하게 온기를 품고 있어 기분 좋은 체온을 유지 중이다. 당분간은 한증에 시달리지 않을 거다. 나 역시 그의 몸에 풀은 덕에 이유 없이 들끓었던 화가 고요했다.

그의 귓가에 깨지 않을 만큼 살며시 키스를 퍼부으며 조심스럽게 귓불을 입에 물었다. 오늘같이 혹사시킨 날에는 웬만한 자극으론 깨지도 못했다.

“……형님.”

기현아.

형.

부르고 싶은 대로 마음껏 호칭하며 그가 자고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어린 시절에 꿈꾸었던 것처럼 그가 깨서 웃으며 안아 주길 바라기도, 아직은 내 연극에 속아 주길 바라기도 하는 이중적인 마음으로 귓가에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을 속살거렸다. 자장가를 불러 주듯이.

아이 때처럼 기하라고 불러 주며 안아 주면 얼마나 좋을까. 기하라고 부르며 사랑해 줬으면, 섹스를 할 때도 내 이름을 불러 줬으면. 그저 가면에 불과한 신이라는 이름 따위는 버려 버리고.

당신이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나는 정말 뭐라도 되어 줄 수 있는데.

얼마 동안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을 때 조용히 침실 문이 열리고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소리 하나 없이 근처에 다가온 누군가의 인영이 쳐진 발에 맺혀 흔들렸다. 그림자는 옆의 협탁에 무언가를 내려 두고는 허리를 접어 보이더니 왔던 그대로 소리 없이 다시 물러갔다.

발을 걷어 보았더니 협탁 위에 놓인 예의 의료 키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자 좋았던 감정이 조금 가라앉는다. 그를 끌어안고 단꿈을 꾸었다면 이제 쓴 현실로 복귀할 시간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기현의 목 위까지 이불을 끌어 덮고 다독여 준 뒤 몸을 일으켰다. 이 상태라면 아침 내내 깨지 못하겠지. 정신력이 강한 그가 어찌어찌 깬다 해도 내 허락 없이는 집을 나서지 못하게 고용인들이 막을 것이다.

착해 빠진 내 형은 어제 같은 일이 또 벌어질까 두려워 그녀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테고.

침대를 내려와 옆에 걸린 가운을 빼서 몸에 걸치고 의료 키트 안에 있는 투명한 약병을 집어 들었다. 라벨이 붙어 있지 않은 분홍색 캡슐이 짤깍이며 안에서 흔들렸다.

오늘은 먹여야 했다. 그래야 했지만…….

약병을 손에 넣고 침실 문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세 명의 고용인이 고개를 숙이며 나직하게 인사를 해 왔다. 어제 안채를 담당했던 고용인들이 아닌 본채를 담당하던 집사였다. 조절을 하지 않은 힘을 받았으니 아무리 독한 그들이라도 일주일 이상은 침대 신세를 져야 할 거다.

안채 인원의 실수 덕에 어부지리로 본채에서 안채로 이동한 새 집사의 표정이 밝았다. 상기된 얼굴로 접힐 듯이 허리를 조아린다.

“기침하셨습니까.”

“…….”

“바깥 어르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깨면 못 떠나게 해.”

“알겠습니다.”

그들은 나를 응접실이 아닌 침실 바로 옆의 방으로 안내했다. 아직 새벽이라 어둑한 방 안에 희미한 담배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오랜만에 맡는 불쾌한 연기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다가 죽이실 생각이었습니까? 애를 잡을 것 같던데요.”

담배 연기만큼이나 불쾌한 목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방의 기둥에 기대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눈매가 매서워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 숙여 목례하는 표정에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많아 봐야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얼굴을 쳐다보며 차갑게 응수했다.

“말조심 좀 하는 게 좋겠군. 누가 애라고?”

남자는 허허, 하고 웃더니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겨 끄며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 정도는 좀 봐주십시오. 내가 이치상 기현 님을 애라고 호칭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습니까.”

“…….”

“이래 봬도 제가 종조부니 말입니다.”

안경 뒤의 보석 안이 요사하게 빛났다. 방금까지 사랑을 나눈 연인의 보석 안은 그토록 찬연하고 아름다웠는데 남자의 보석 안은 말 그대로 불길한 보석 안이었다.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나를 향해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확실히 기현 님이 모신 날은 분위기가 유하시군요. 다음부터는 기현 님께서 계실 때만 와야겠습니다.”

몸이 나른했기에 독을 풀고 대했더니 그새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온다. 과연 여우의 피였다.

“허튼소리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텐데. 무슨 일입니까.”

“아직도 좋은 소식이 없나 싶어서 걱정돼서 찾아왔습니다. 기다리던 좋은 소식은 안 들리고 나쁜 소식만 들려오더군요. 무정한 당신께서는 필요할 때만 연락하시니 이 할아비가 직접 와야 손자님들 얼굴이라도 뵙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할 일이 없는 줄 알았다면 다른 임무를 줄 걸 그랬나 봅니다. 이승호 씨.”

주름 없이 매끄러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툭 덧붙였다.

“……아니, 원승호 씨라고 불러야 하나?”

내 말에 그가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기대던 기둥에서 몸을 세워 일어난 뒤 들고 있던 지팡이로 툭툭 바닥을 친다. 어둠 속에서도 멋을 낸 지팡이 손잡이의 여우 무늬 금각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못해도 육십 대는 넘었을 텐데 회색 줄무늬 양복을 착용하고 새카만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완벽하게 쓸어 올린 그는 이경헌의 형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듯한 젊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이승호든 원승호든…… 왕께서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이 남자에게는 독을 세워 봤자 소용이 없다. 선대 가주를 같은 방법으로 음지에서 보좌한 남자라 그런지 이지를 상실하지 않은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그저 허허 웃으며 손자의 재롱을 보는 것처럼 대응하니 맥이 빠진다.

한숨을 내쉬며 앞에 앉으시라 손을 내밀자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투명한 약병과 작은 USB였다. 약병 내용물의 색을 확인하고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말씀하신 자료와 약입니다. 요새는 약을 가져오라고 하지 않으시더군요. 저번에 드린 게 떨어질 때가 되었는데……. 어째서입니까? 일단 쓰기 시작하면 꾸준히 복용시키는 게 좋다고 말씀드렸건만.”

“뭐 좋은 약이라고 계속 먹입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조절합니다.”

침실에서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나왔던 약병을 탁자 위에 놓고 남자 쪽으로 굴렸다. 데굴데굴 구르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약병을 보는 원승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늘도 안 썼습니까? 어제 연미연이 쓸데없는 말을 흘렸다고 하던데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쓸 수 없었다. 쓰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이 약은 표면적으로는 향정신 약제였다. 급격한 우울 증세나 자해를 일삼는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일 때 복용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새로 조제한 이 약은 본래 목적보다는 부작용에 더 의의를 두고 만든 약이었다.

……그 부작용은 복용한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정신을 허물어뜨려 근시일에 있었던 강한 충격을 준 일을 차례차례 망각시켜 순종적으로 변하게 한다. 기억의 크기가 깊고 강하며 오래 뇌리에 남아 있을수록 효과는 더 강력했다. 하지만 선택적으로 지울 수가 없으니 이기현은 종종 나와 있었던 기억도 잊곤 했다. 나와의 추억이 강하고 잔상이 남았다면 제일 먼저 나부터 지우려고 들 것이다.

“오늘은 잊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결코 그 기억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냈던 고백을 평생 간직했으면 좋겠다. 나에게 처음으로 한 걸음 먼저 다가온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선 최소 몇 주 이상은 약 복용을 금지시켜야 안전하다.

아니, 비단 그 일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웬만해서는 약 복용을 시키지 말아야 했다. 드러나지 않은 다른 부작용으로 이기현은 이유 모를 성격 변화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강하거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망각한 채로 마음의 화만 남은 상태에서 일상생활로 돌아간 그는, 종종 신경질적으로 변한 자신이 이상하다며 주변인에게 고통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울 증세와 자해를 막기 위해 쓴 약이 도리어 그에게 자학을 부추기게 된 것이다.

원승호는 바닥에 흩어진 약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손끝으로 안경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또 전처럼 날이면 날마다 자해를 시도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에도 자해를 하셨다 들었습니다만…….”

“전보다 가까이 사람을 배치해 뒀습니다. 예전보다야 신에게 더 마음을 열었으니 내가 한 사람인 것만 밝히지 않으면 이기현이 자해할 만한 일도 딱히 없을 겁니다.”

“늘 그런 줄 알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으셨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각인이 발동한 순간부터 이기현은 늘 예상외의 행동을 해 왔다. 내가 나뉜 것이 아니라 그가 나뉜 것처럼. 멀쩡한 모습을 보여 주다가 어느 순간 돌변해서 발작을 일으켰고 삶에 대한 애착을 보이다 갑자기 진짜 죽으려고도 들었다. 나를 좋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했다가도 다음 날 정사의 흔적이 가득한 침대 위에서 정신을 놓기도 했다.

“그러게 미리미리 치울 건 치우라고 조언해드리지 않았습니까. 설마 그 여자가 그날 일을 가지고 그분을 흔들 줄은……. 기현 님은 틀림없이 제일 먼저 그날부터 파 들어가실 겁니다. 그때 일을 제법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족들이 몇 명 남아 있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목숨이 아까운 줄 안다면 입을 열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겠지. 혀를 잘못 놀린 대가로 연미연이 어떤 벌을 받는지 일족들에게 새겨 줄 생각입니다.”

연미연 정도는 되는 지위였으니 그나마 멍청하게 그런 말을 기현에게 흘린 거지 사실 일족 중에 이기현을 흔들 만한 발언권을 가진 자는 흔하지 않았다. 그러니 십여 년 동안 어떤 짓을 저질러도 그가 모른 채로 넘어갈 수 있었던 거다.

“정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지팡이 끝을 문지르며 원승호는 몇 번이나 알겠다는 소리를 하며 생각에 잠겼다. 진한 정사 뒤라 나른해져 소파에 깊게 몸을 묻자 뱀 같은 눈으로 나를 지켜보더니 웃음기 감도는 목소리로 툭 던졌다.

“그나저나 이 할아비한테 언제쯤에나 좋은 소식을 들려주실 겁니까?”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정말 손자라도 바라보는 듯한 애정을 담뿍 담은 눈으로 바라본다. 나에게 복종하긴 하면서 종종 저렇게 집안의 어른 행세를 하려고 드는 게 불쾌하게 느껴졌다.

“후계 문제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당신은 그저 얌전히 내가 하라는 일만 하면 됩니다.”

“두 분께서 이렇게나 금슬이 좋으신데 아직 소식이 없는 게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노인네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하고 용서해 주십시오. 같은 침대를 쓰신 지 이제 햇수로 십 년을 채워 가는데 이제나저제나 기다려도 경사스러운 소식이 들려오질 않으니…….”

경사는 무슨, 후계가 있어야 당장 나나 기현이 죽어 나가도 목숨 줄을 연명할 수 있다 이거겠지.

속이 비틀렸다. 일족 중 순수하게 내 아이를 보고 축복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왜 이렇게 다들 내 자식에 관심이 지대하지? 아이가 원한다고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생길 것을.”

조소하며 묻자 그가 면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아무리 수태가 어렵다곤 해도 두 분 다 건강하시고 몸에 문제가 없는데 말입니다. 사료의 내용대로라면 충분히 두 분 사이에서 후계가 생산될 텐데 어째서인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침대 사정엔 더 이상 관여하지 마십시오. 조급할 필요 있나? 당신 말대로 우리 금슬이 나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조급할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남자도 제일 조급해하는 게 나라는 걸 알고 있다. 여우 종은 일 년에 겨우 단 삼 일 번식기를 맞는다. 심지어 그 때가 언젠지는 본인조차 몰랐다. 그의 몸이 언제 준비될지 모른 채로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해야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어찌 운이 좋게 번식기에 맞춰 사랑을 나눴다 해도 수정에 성공하는 건 극악의 확률이었고 더 최악인 건 그렇게 한들 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건강한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 몸 관리에 철저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운동을 하고, 담배나 술을 비롯한 해가 될 만한 것들 일체를 하지 않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몸을 가꿨지만 지금껏 내 정을 받은 기현의 몸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달에 한 번씩 꼭 검사를 진행해도 수태는커녕 도리어 그의 몸은 차츰차츰 젊어지고 있었다.

그의 몸이 내 시간에 종속되길 거부하고 있다. 내 시간에 들어온다는 것은 모래시계를 뉘어 놓는 것과 같아서 내 손에 의해 다시 시계를 제자리에 돌려놓지 않는 한 스스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기현의 시간은 모래시계를 뉘어 둔 것도 아니고 제자리로 돌려 둔 것도 아닌, 오히려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처럼 흐르고 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한 이후 나는 더 조급해졌다.

“……그럼 좋은 소식이 들리기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얼른 그분의 방황이 끝났으면 좋겠군요.”

가라앉은 내 분위기를 느끼고 원승호가 눈치껏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제 아랫것들에게 호되게 벌을 주셨다고요. 그것 때문에 오던 길이 아주 시끄럽던데요.”

“한 번씩 본인 위치를 자각하게 해 주지 않으면 기어오르니까. 몇 번이나 가르쳐도 고쳐지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알아들을 때까지 교육하는 수밖에.”

“잘하셨습니다. 백 번의 말보다 한 번의 회초리가 더 나은 법이죠. 이번 일로 다들 경각심을 가졌을 겁니다. 그나저나 들은 바로는 그 여자로 인해 생긴 해프닝이라던데 왕께서 아직도 그녀를 곁에 두고 계시는지 몰랐습니다. 앞으로도 그대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곁에 두었다…… 어제 이기현도 그렇게 표현했었지. 그녀를 내 곁에 두지 말아 달라고.

“죽이지 않기로 했으니 가축처럼 가둬 둘 수만은 없고, 약속한 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켰을 뿐인데 남들 눈엔 그게 퍽 예뻐해서 곁에 둔 것처럼 보였나 보군요.”

“설마 제가 그렇게 생각했겠습니까? 그저 저는 기현 님이 보시기라도 하면 어찌 행동하실지 예측할 수가 없으니 살리는 걸 반대했을 뿐입니다. 더더군다나 본가에 체류하게 만들면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 나도 그게 걱정이었다. 이기현이 그녀를 보고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그런데 생각했던 수백 개 경우의 수를 모두 비껴가고 어제 이기현이 보여 준 반응은 전혀 생각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였다.

질투한다고, 그것도 나를 질투한다는 것도 아니고 내 곁에 있는 그녀를 질투했다고. 동생의 곁에 그녀가 없길 바란다고 얼굴을 붉힌 채 차마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눈을 떨어뜨리며 애원했다.

처음엔 그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그가 당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말도 안 되는 사언을 내뱉는 거라고 생각해서 또 속아 주는 척을 해야 하나 갈등했다.

그런데 그의 눈과 표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막 첫사랑을 자각한 어린 소년처럼 온몸을 떨면서, 터질 것 같이 뛰는 심장을 숨기고 싶어 하며 더듬더듬 다듬어지지 않은 고백을 해 왔다. 비난당할까 봐 두려워하며 소맷자락을 붙잡는 그의 손가락을 보며 알 수 있었다. 그 고백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거절당할 걸 알고도 수천 번 사랑을 고백해 왔던 나였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신은 행복을 가져다줬고 확인은 천국을 보여 줬다. 지금 기분으로는 이기현을 그렇게 만들어 준 그녀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를 보고 연인이 그런 말을 해 주었다고, 네 덕분이라고.

그가 자신을 질투해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뭐 결과적으로는 참 잘되었으니 다행입니다. 그 여자도 쓸모가 있었군요. 전해 들었을 땐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말입니다.”

그녀를 떠올리니 슬슬 다시 이기현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내가 없으니 또 추위를 느끼고 몸을 뒤치고 있진 않을지 걱정됐다. 잠에 취한 상태니 곁에 다가가 칭얼거리면 옛 동생으로 오인하고 팔을 벌려 줄지도 모른다. 아직 새벽이니 동이 틀 때까지 끌어안고 체취를 맡으며 잠들고 싶었다.

내 표정을 본 남자가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눈치 없이 계속 귀한 시간을 빼앗았군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음번엔 이기현이 없을 때 오십시오. 혹여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지금 그녀의 모습이 당신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이기현이 얼굴을 아는 원승호가 본가에 출입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제처럼 쉽게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지금 그에게 잡고 있던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다.

말뜻을 이해한 그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근시일 내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다음엔 손자님과 통화한 얘기도 들려 드리지요. 그때까지 평안하시길.”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내 인사를 받고 원승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문 근처에 걸어가더니 아차, 깜박할 뻔했군요, 하며 다시 뒤를 돌았다.

“KNG그룹 강준형이 아직도 기현 님을 독자적으로 찾고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 계속 막고 있기는 합니다만……. 생각보다 그 남자 허수아비가 아니더군요? 경영권 다툼에 밀린 패배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말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기현 님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뭐?”

실컷 헛소리만 떠들다가 잊을 뻔했다는 게 본론이었다. 그 남자의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 남자가 왜 이기현을 찾는지는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고?”

“당신의 약점이라고 나와 있는 게 현재로선 이기현 님이 유일하니 저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그런 것치고는 동원하는 인력이나 액수가 상당한 게 불안하긴 합니다. 수지 안 맞는 장사는 안 하는 남자니 주의하셔야겠습니다. ……혹시 선일에서 배신한 게 아닙니까?”

이기현을 보던 그의 눈을 기억하고 있다. 나와는 다르지만 그의 눈이 담고 있는 감정이 내 감정과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 거라는 걸 알아보았다. 어차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처리할 생각이긴 했지만 쓸모가 있어 남겨 두었더니 어리석게도 자기 발로 죽음을 향해 착실히 발을 내딛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나와 주면 오히려 고맙다. 실낱같이 남아 있을 나의 인간성이 침묵할 수 있게 해 줘서.

“선일은 이쪽에서 알아볼 테니 당신은 내가 시킨 것부터 해결하면 됩니다.”

“그러다 강준형이 기현 님과 접촉이라도 하게 되면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쓸데없는 걸 궁금해하지 말고 내가 시킨 것을 하라고.」

흘러나온 진음이 살기를 담은 채로 원승호에게 꽂혀 들었다. 노련한 그조차도 휘청거리게 할 정도의 농도였지만 굳이 다시 거두진 않아 그는 수 초간 비틀거리며 기둥을 짚고 거칠게 몸을 떨었다. 진한 피를 타고난 덕분에 파드득 떨리는 동공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가 풀어지는 걸 반복하며 내 능력에 저항한다.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반항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다 발밑에 굴러온 약병을 주워 들었다. 비단 이기현에게뿐만 아니라 부리는 자들에게도 이 약은 효과 만점이었다. 내가 약병을 손안에 굴리는 동안 정신을 차린 원승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팡이를 짚고 자세를 가다듬은 뒤 다시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믿고 진행하겠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방 안이 고요해지자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목을 기댔다. 그리고 왼팔을 들어 새겨져 있는 문신을 들여다보았다. 반대편 손바닥으로 그것을 어루만지며 내가 자기와 똑같은 것을 새겼다는 걸 발견했을 때 이기현의 표정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를 떠올렸다. 후회와 고통과 절망과 체념. 그리고 피어오르는 안도감으로 뒤섞였던 얼굴을.

문득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며 낭송하듯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네가 나긋하게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구원받는 느낌이었지. 아름다운 것을 박제해서 곁에 두는 사냥꾼들의 잔학함이 이해됐다.

네가 내 형만 아니었어도. 조금만 내가 너를 덜 사랑했어도. 조금만 네가 나를 덜 사랑했어도 나 역시 기꺼이 사냥꾼들의 전철을 밟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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