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9/47)

2

데스크에 머리를 박고 노래를 흥얼거리다 유리문이 열리는 게 보여 눈을 들었다. 서류를 잔뜩 들고 막 문 안으로 들어서던 문경아가 나를 보고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습관적으로 나도 인사를 따라 하려다 한눈에 봐도 혼자 들기엔 많은 짐에 나눠 들어 주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뭐라 뭐라 입을 벙긋거리더니 턱짓으로 내 주머니를 가리켰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이어폰을 빼자 시끄러운 소리가 주머니에서 울리고 있었다.

“기현 씨 아까부터 전화 온다니까요. 전화 받으라고 말한 건데.”

“아.”

다급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 전화를 꺼냈다. 언제부터 울리고 있었는지 마침 울리던 전화가 끝나고 부재중이 다섯 개째라는 메시지가 떴다. 이 정도면 이 고요한 연구실 안에 한동안은 쩌렁쩌렁 울렸을 거다. 민망함에 목을 긁었다.

“죄송합니다.”

“저번부터 계속 멍하네. 정말 어디 안 좋아요? 병원이라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네. 무리하지 말고 이상하다 싶음 얼른 병가부터 내요.”

그러면서 힘든 기색도 없이 그 많은 서류 다발을 들고 자기 구역 쪽으로 사라진다. 도와주긴커녕 도리어 걱정만 끼쳐 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머쓱해하다 손안을 들여다보았다.

요새 계속해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기다리는 원승호의 전화도, 열람 허가가 떨어졌다는 전화도 아니고 장난 전화인지 번호가 다른 전화가 아침, 저녁 가릴 것 없이 걸려 왔다. 하도 짜증 나서 대체 누구냐고 욕이라도 하려고 받아 봤지만 수화기 너머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꺼림칙하고 찝찝해져 그다음부터는 아는 번호가 아니면 일절 받지 않았다. 누가 내 번호를 어디에 장난 전화용으로 써 놓기라도 한 건가.

“모르는 번호?”

헤드기어를 벗고 태영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물었다. 강아지들이 물에 젖으면 하는 것처럼 요란하게 땀에 젖은 갈색 머리칼을 흔든다. 사방에 땀방울이 튀어 잽싸게 몸을 뒤로 물렀더니 와락 달려들어 반사적으로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그는 얼른 백 스텝해서 피하고는 의기양양하게 씩 웃었다.

“선생이 좋아선지 금방금방 배운다니까.”

“학생의 자질이 뛰어난 거지.”

“얼마 전만 해도 멍청하게 뻗는 대로 다 맞더니?”

낄낄거리더니 툭툭 글러브를 벗어 던지고 로프 사이를 벌려 잽싸게 링 위를 벗어난다.

연구소 한 층에 헬스장과 복싱장, 수영장이 설치되어 있어 시간이 날 때마다 오늘처럼 태영과 함께 운동을 하곤 했다. 마침 태영이 각종 격투기를 익혔던 경험이 있어서 틈만 나면 합을 맞춰 대련을 했다. 그는 생각보다 훌륭한 스파링 파트너였다. 지구력이 좀 없는 게 문제였지만.

“더 안 해?”

겨우 몸이 풀리나 싶었는데 김이 새서 묻자 태영이 백기를 흔들 듯 손을 좌우로 휘저었다. 두 번 정도 스파링을 해 흘러내린 땀이 눈에 들어갔는지 따가워서 헤드기어와 글러브를 벗고 얼굴을 닦았다.

“누구 쥐어패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왜 이렇게 격해. 오늘은 그만하자 형아 힘들다.”

“벌써 나이 들었어? 금방 지치네. 재미없게…….”

마시던 이온 음료병이 날아와 냉큼 받았다.

“시간 내서 놀아 줬더니 저저 말하는 것 좀 봐라. 그나저나 아까 하던 얘기나 다시 해 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고?”

“별거 아냐. 장난 전환 거 같아. 받아 봐도 아무 말도 안 하더라.”

“받은 적이 있다고……?”

생각에 잠기더니 묻는다.

“번호가 뭔데? 몇 번이나 왔는데.”

“뭘 그렇게 캐물어. 너도 본가 사람 아니랄까 봐 본업에 아주 충실하네.”

주변에 널브러진 옷가지며 소지품을 챙겨 들고 샤워장 쪽으로 걸어가자 태영이 묻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로도 용케 입을 다물고 따라온다. 탈의실 문을 잡고 뒤따르던 태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씻는다.”

“먼저 나와도 기다리고 있어. 저번처럼 혼자 가지 말고.”

“알았어.”

연구소에 있는 탈의실과 샤워실은 일인용이라 씻으러 들어갈 때 일행과 떨어져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대충 티와 면바지만 걸친 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탈의실을 나오자 역시나 김태영이 먼저 나와서 앞의 벤치에 길게 누워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왔냐?”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화면을 두드리는 태영을 향해 맹렬하게 머리를 털자 ‘앗, 차거!’ 하고 소리를 지른다.

“야 인마! 머리는 왜 다 안 말렸어? 또 감기 걸려서 누굴 고생시키려고. 옷은 또 그게 뭐야. 목덜미 다 보인다. 단추 안 잠그냐?”

이미 아무런 흔적도 안 남아 있는 걸 확인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짜증 나서 태영이 앉은 의자를 퍽퍽 걷어찼다.

“위에 재킷 걸치라니까? 설마 그렇게 반팔 티 한 장 꼴랑 걸치고선 식당에 가겠다는 건 아니지? 너 이 연구소에 우리 집안 남자들이 몇이나 있는지 알아? 야! 왜 무시해! 거기 안 서냐?”

“아 시끄러워. 대충 좀 하고 가.”

“네가 오래 걸려서 나도 기다리다가 죽는 줄 알았거든. 뜨거운 물은 그렇게 좋아하는 놈이 춥지도 않나 감기 걸리려고 머리는 왜 다 안 말려? 너 작년에도 이러다가 앓았던 거 기억 안 나?”

뒤에서 구시렁대면서 쫓아오는 소리를 들으며 엘리베이터 앞에 가 버튼을 눌렀다.

“이제 여름이거든? 고만 좀 잔소리해라. 귀 따가워 죽겠다. 네가 내 형이냐?”

“형 맞거든? 너 진짜 자꾸 나 무시하는데 내가 너보다 한 살 많다는 사실을 까먹지 마라.”

“네네. 6개월 차이요. 6개월. 7개월도 아니고 6개월. 고거 일찍 안 태어났음 억울해서 어쩔 뻔했어.”

6개월에 강세를 둬서 발음하자 셀 수도 없이 많이 당해 놓고서도 태영은 또 부들부들 떨면서 이를 갈았다.

“내가 널 만나 했던 일 중 제일 후회하는 게 주민 등록증을 보여 줬다는 거다. 네 꼬드김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웃기시네. 만나자마자 형이랍시고 들이대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았는데 생일 챙겨 달라고 주민 등록증 보여 준 건 네 쪽이거든?”

“그건 네가 거짓말하지 말라며 합법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해서 그런 거잖아!”

“난 농담한 거였거든.”

“뭐? 그게 농담이었다고?”

앵앵거리는 소리가 커지기 전에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다가 탑승하고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타세요. 기현 님.”

하필이면. 저번의 저녁 식사 이후 오랜만에 보는 연미연이었다.

머리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틀어 올린 헤어스타일에 척 봐도 몇 천만 원은 호가할 명품 가방과 맞춤형 리넨 재킷을 걸친 여자는, 완벽하게 치장한 외형만큼이나 고고한 자세로 우아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분위기에 태영이 눈치껏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숙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머 조카님도 있었네요. 기현 님 모시고 어서 타세요. 함께 내려가죠.”

“아니요. 전 좀 있다가 내려가겠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저는 기현 님과 같은 엘리베이터도 못 타는 건가요? 설마 제가 내리길 원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나를 지켜보는 연구원들의 눈총을 받으며 버텼다가는 우스운 꼴이 될 것 같아 억지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대체 이곳엔 무슨 일인가 싶었다. 연구소장이 이경헌의 직속이라 사모님 행세라도 하려고 온 건가. 그녀의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그녀를 비롯한 고용인들이나 직장 동료들도 말 한 마디 꺼내지 않아 가뜩이나 작은 공간에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식당 층에 도착했다. 적당히 목례하고 뒤도는 나를 그녀가 붙들었다.

“기현 님. 잠시만요. 오늘 점심은 저와 함께하시지 않겠어요?”

아예 작정을 했는지 엘리베이터를 내려보내고 권유를 해 왔다. 일족들이 아닌 연구원들이 식당 쪽으로 이동한 걸 확인하고 나도 태도를 바꿨다.

“죄송하지만 저는 식사만큼은 마음 편하게 해야 한다는 주의라서.”

“근처에 괜찮은 한식당이 있답니다. 잠시만 시간 내주세요.”

“우리가 일부러 겸상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서로 얹힐 일 만들지 말죠. 지금 신께서도 안 계신데.”

내가 솔직하게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대응하자 가뜩이나 냉랭했던 분위기가 아예 얼어붙어 버렸다. 아무리 집안 내의 내 서열이 연미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해도 그녀는 표면적으로는 숙모이자 나보다 어른이어서 내 대응은 대단히 건방진 것이었다.

“숙모로서 일하느라 수고하시는 조카님 점심 한 번 산다는 건데 꼭 그렇게 말씀하셔야 하나요?”

“하하. 일하느라 수고한다라……. 내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달 땐 언제고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본업에나 충실 하라며 억지로 침실에 집어넣던 게 누구 내외시더라? 지금 주변에 일족들밖에 없는데 하던 대로 해요. 적응 안 되니까.”

“기현 님.”

“아니면 내게 뭐 부탁할 거라도 있으십니까? 어차피 들어드릴 생각 없으니까 시간 낭비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경헌과 쌍벽으로, 아니 어찌 보면 이경헌보다 더 나를 괴롭힌 게 이 여자였다. 지금이야 내가 머리가 커져서 대거리를 하는 거지 어릴 땐 이 여자가 던지는 악의와 힐난에 죽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지만 조카의 입을 막고 손을 묶은 뒤 억지로 방 안에 들여보내는 친지들이라니.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내 말투의 가시가 내려올 생각을 안 하자 연미연이 예쁘게 잘 칠한 입술을 기어이 꾹 물었다. 여자의 평소 성격상 바로 반격이 들어올 텐데 오늘은 웬일로 열심히 참아 내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기에 또 무슨 꿍꿍인가 싶은 찰나 대답이 돌아왔다.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아쉽군요. 기현 님께도 나쁜 말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이 할 말이야 뻔한 거 아닙니까? 집어치우고 집에 들어와라. 제물 주제에 바깥 생활이 웬 말이냐. 주제를 알아라 등등? 뭐 말씀 안 하셔도 다 알고 있으니 굳이 또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지금 남들 눈도 있는데 그렇게 젖은 채로 흐트러진 옷차림이며……. 조금만 더 단정하게 입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당신이 그러니까 흘리고 다닌다는 말을 듣는 거 아니겠어요?”

아, 앞에 한 말 취소.

저 여자가 참긴 뭘 참는다고.

“누가 들으면 제가 다 벗고 젖은 채로 활보하는 줄 알겠습니다. 꼬투리 잡을 게 다 떨어졌나 봐요? 남들 다 입고 다니는 이런 옷까지 물고 늘어지는 거 보니.”

“남들이 뭘 입든 말든 뭔 상관입니까. 신을 모실 수 있는 건 오직 기현 님 한 분뿐인데요. 하찮은 인간들과 당신을 같이 생각하시면 안 되죠. 신께만 보여야 하는 그런 귀한 몸을 남세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고 다니시는데 말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하 진짜……. 지금 대체…… 무슨 헛소릴 하고 있는 겁니까? 하다 하다 이젠 별…….”

“당신이라는 존재가 주변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도 모르시고……. 신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모시는 일이 얼마나 중한 임무인 줄도 모르고 언제까지 철없이 밖으로 도실 생각입니까? 평범한 사람처럼 사회생활을 하고 싶다고요? 지금의 신께서 자애로우셔서 허락해 주신 거지 예전 같았으면 크게 벌을 내려도 몇 번은 내려서 버릇을 고쳐 놨을 겁니다. 어디 감히 제물이 신의 곁을 떠나서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숙모님.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태영이 발끈해서 앞에 나섰다. 저런 말에 일일이 상처받았던 것도 다 옛날 일이었다. 이젠 마음이 하도 곪고 터지고 반복하다 무뎌져 저 정도 발언이야 개가 짖네 수준으로 넘길 수 있었다.

“역시나 안 들어도 되는 뻔한 얘기를 또 반복하시네요. 입 안 아프십니까? 아……! 다음번에는 녹음기라도 들고 와서 녹음해야겠습니다. 조카가 되어서 숙모님 입 아프시게 똑같은 말 반복하실 동안 아무것도 못 했네요. 녹음해드릴 테니 그냥 저 볼 때마다 틀어 주세요. 아니, 그냥 제가 녹음해서 가지고 다니다가 숙모님과 마주치면 알아서 재생하는 편이 낫겠네요.”

“왜 신께서 당신에게 그렇게 너그러우신지 이해를 못 하겠군요. 당신같이 방자한 제물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다른 제물들처럼 신의 그림자로 사는 걸론 만족할 수 없습니까? 왜 하필 완벽한 그분께 당신 같은 제물이 선택돼서……!”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그게 이해가 안 돼요. 그분도 물릴 수만 있다면 물리고 싶을 겁니다. 가서 그분께 얼른 제물 바꾸는 법 좀 알아보라고 해 주세요. 나같이 말 안 통하는 놈 붙잡고 개소리나 늘어놓는 것보다 그게 좀 더 건설적일 겁니다.”

결국 그렇게 하지도 못할 거면 그냥 닥치고 좀 있으라는 뜻으로 대꾸하자 그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내가 방자하든 말든 내 한 몸 불살라 집안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내가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면 저쪽은 할 말이 없어진다. 그녀 역시 그런 걸 알기에 시간 낭비인 걸 알면서도 제 딴엔 날 계몽시키겠다고 굳이 헛소리를 퍼부으러 오는 걸 테고.

“……마음대로 하십시오. 당신께 좋은 마음으로 충고해드려도 이런 식으로 대응하시니 할 말이 없군요. 지금이야 신의 영향권 안에 계시니까 어떤 짓을 하고 다녀도 무사하신 겁니다. 신의 총애가 과연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습니까? 아무리 당신이 하나뿐인 제물이라 하더라도 선대 가주께서 제물을 핍박했던 걸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방자하게 구시다가 신의 사랑도 잃고 어릴 때처럼 크게 욕볼 뻔하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후회하지 마시고요.”

“숙모님!”

“어릴 때요? 내가 어릴 때 욕을 볼 뻔했다니 그게 무슨.”

무심결에 되물은 것에 연미연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실수했다― 라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 찰나의 얼굴을 보고 의아해하자 연미연은 아까 전만 해도 그렇게 꼿꼿하게 힘을 주던 목을 떨구고 내 시선을 회피했다.

“어릴 때 크게 욕볼 뻔했다니요. 대체 언제? 나는 기억이 없는데.”

“제가 착각했습니다. 그 말은 그만 잊어 주세요.”

지금 그녀 역시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렇게 잘하던 포커페이스조차도 못하고 있었다. 잠시 예전 기억을 떠올려 봤지만 정말 욕을 볼 뻔했던 기억은 없었다. 껄끄러운 사건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다 사소한 일들이었고. 대학교 동기가 억지로 스킨십을 하려다가 도리어 얻어맞고 간 일이라든지 직장 동료가 고백한답시고 과격한 행동을 했던 일이라든지……. 그래 봤자 집안사람들이 알 정도로 큰 이슈도 아니었고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겪을 법한 경험들에 불과했었다.

연미연이 저런 반응을 보일 만큼 강렬한 경험이라면 결코 잊을 리가 없는데. 그리고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장례식 날이 떠올랐다. 두고두고 나를 소스라치게 만들던, 잊을 만하면 악몽으로 재현되는 그날의 기억. 그런데…….

그 시선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

어라, 정말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지?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역시 그 뒤의 기억이 없다. 기하를 등에 업은 날 친척들이 일제히 바라보던 것은 기억나는데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부분만 탈색이라도 된 듯 하얗게 비워져 있다. 신의 영향권 안에 있기에 그동안 무사했던 거라고 비꼬았던 그녀의 말에 미루어 보면, 그날은 기하가 정신을 잃은 상태였으니 영향력이 풀렸다고 봐야 하는 걸까. 그녀가 언급한 게 이 날을 의미하는 걸까.

“어머님 장례식 때 말입니까?”

반쯤 확신하고 툭 던져 보자 걸려들었는지 그녀의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이 새파랗게 죽었다. 쉽게 알아낸 것을 기뻐하기도 잠시, 대체 왜 그 뒤의 기억이 통째로 잘렸는지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날 나한테 무슨 욕보일 뻔한 일이 있었다는 겁니까?”

“기현아.”

“설마 친척들이 내 몸에 무슨 짓을 하려 했습니까?”

“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숙모님도 오늘 지나치셨습니다. 책임은 지실 생각으로 저지르신 거겠죠?”

앞에 나서며 김태영이 엄하게 일렀다.

“아……. 나는…… 그저 신을 위해서……. 아시잖아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댁으로 돌아가십시오. 처분은 본가에서 알아서 할 겁니다.”

김태영이 보인 적 없는 차가운 태도를 고수하며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정말이지 뭔가 있구나.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들이 이러나 맹렬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연미연이 돌변해 나에게 허리를 깊게 숙였다.

“기현 님. 제가 드리는 쓴소리는 전부 충심에서 나오는 소리였습니다. 두 분의 미래를 위해서……!”

“나한테 그래 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고 정말로 나에게 매달려 봤자 소용이 없을 거다. 내가 신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건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 자신이 아니던가. 그리고 두 분의 미래는 무슨 얼어 죽을. 동생에게 새 여자를 붙여 주겠다고 그 난리를 친 걸 벌써 잊은 건가.

연미연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 명의 남자는 사실 감시하기 위한 자들이었는지 그녀가 태도를 바꾸자마자 강제로 그녀를 제지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기현 님. 노여움을 푸십시오. 연미연 님도 악의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닐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전 화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궁금증만 생겼는데요.”

수행원 중 리더 격으로 보이는 사내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기현 님께서 그것을 궁금해하시기 시작하시면 신께서 정말 크게 노하실 겁니다. 연미연 님은 오늘 일로 반드시 대가를 치를 테니 화를 푸시고 그냥 그 말은 못 들은 척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참 이상하네요, 당신들은. 내게 못 들은 척해 달라 부탁할 게 아니라 연미연 씨가 벌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궁금증을 막는 일보다 모시는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는 게 당신들이 해야 할 일 아니었습니까?”

“제가 모시는 분은 연미연 님이 아니라 가주님입니다. 저는 그분께 누가 될 일을 막을 뿐입니다.”

신의 명령을 받은 자들이었나. 그래서 그런가 연미연은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남자들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나에게 말 한 마디 잘못해도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면서 말실수한 건 그녀의 잘못이지만 묘하게 협박하는 듯한 남자의 말이 거슬렸다.

“이번 일이 신의 귀에 들어가긴 할 거란 소리군요. 그럼 저도 굳이 뒤에서 알아내려고 하지 않고 신께 직접 여쭙겠습니다. 내가 못 들은 척한다고 해서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왜 내 궁금증을 참아야 합니까.”

“정 기현 님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럼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곧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말없이 서 있는 내 어깨를 태영이 툭툭 치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그러게 숙모님은 쓸데없이 너한테 또 시비를 걸어서…….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이러다 점심시간 끝나 버리겠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스레를 떨며 앞장서는 태영이었지만 나는 웃으면서 그와 함께 갈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내내 태영의 태도가 거슬리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의 뒤에 대고 말했다.

“김태영. 그날 너도 있었잖아. 왜 모르는 척해?”

억수같이 쏟아지던 빗줄기 속에 엎드려 있던 수십 명의 일족 중 김태영도 분명히 있었을 거다. 외가 쪽 친척이라 가문 내 서열이 낮긴 해도 김태영은 분명 본가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일족이었고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묘하게 자신은 외부인처럼 구는 거지 왜?

“너도 그 자리에 있었잖아.”

내 말이 끝나자 걷던 그 자리에 멈춰선 태영은 등을 보이고 선 그대로 몇 초간 침묵을 유지하더니 이윽고 크게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여튼……. 좀 넘어가지 진짜.”

김태영이 천천히 뒤를 돌아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평소에 보이던 장난스러운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진지한 표정을 한 김태영이 서 있었다. 평소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저런 얼굴을 할 때만은 눈을 피하지 않는다. 이렇게 태도를 바꿀 때는 김태영 역시 여우 신의 일족이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우리 왕자님은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으실까.”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연미연이 대체 왜 저런 말을 했는지 말해 봐.”

“신께 여쭈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왜 굳이 나한테도 묻는 건데?”

그걸 말로 해야 아냐며 눈썹을 찌푸리는 날 보고 태영이 멋쩍게 웃었다.

“내가 하는 말은 도움이 안 될걸. 지금 널 더 혼란스럽게 만들 테고.”

“그런 판단은 내가 해. 그래서 네가 그때 본 게 뭐였는데?”

“미리 말하지만 연미연이 말한 헛소리 같은 건 난 본 적 없어. 네게 욕보일 뻔했다는 말을 하다니 저 여자가 제정신이 아니지.”

“헛소리라고? 헛소리를 하는 것치곤 제법 확신에 차 있던데?”

“신께서 건재하신데 누가 감히 네 몸을 건드릴 수 있겠어. 이겨 먹으려고 튀어나온 질 나쁜 막말이지.”

“좋아. 헛소리라고 쳐. 그럼 장례식 얘기가 끝나자마자 나온 네 반응은 뭔데. 네 말대로 그녀의 말이 헛소리이기만 했다면 너도, 아까 그 남자들도, 연미연도 삽시간에 저리 태도를 바꾸진 않았겠지. 장례식 날 대체 뭘 봐서 그런 반응이지?”

내 명령조의 어투에 태영의 색이 옅은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는 그날을 기억하기라도 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좁히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네 말대로 그날 내가 본가에 있긴 했었지……. 하지만 난 그날 널 본 적이 없어.”

“뭐?”

“나의 신께서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명령을 내렸거든.”

그날의 일을 완벽히 기억해 냈는지 그의 눈동자가 이번에는 크게 흔들렸다. 물었던 내가 한순간 괜히 물었나 동요할 만큼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가 순식간에 감정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맥락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보지 못했어. 아무것도.”

“…….”

“보지 못했어. 아니 안 봤어. 봐선 안 될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봐 지금도. 내가 그때 그걸 봐버렸으면 지금 네 앞에 이렇게 서 있을 수 있었을까?”

“……뭐?”

“너는 몰라. 나의 신이…….”

주절주절 말을 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제야 인식한 사람처럼 태영은 흠칫 몸을 굳히고 억지로 꾸민 게 분명한 미소를 띠었다.

“나는 널 보지 못했어. 이건 진짜야.”

“……그래서 결국 너는 나를 포함해서 아무것도 못 봤다?”

“그런 표정하지 마. 말했잖아. 내가 도움이 안 될 거라고.”

“너 지금 하는 말이 굉장히 의뭉스러운 거 알아? 전부 거짓말만 하는 거 같다고.”

“내가 너한텐 거짓말 잘 못하잖아. 어차피 신께 여쭤보러 가겠다고 하지 않았어? 가서 물어보라고. 내내 부복만 하고 있던 나보다야 그분은 똑똑히 기억하실 테니까 말이야.”

“그날 기하는 펄펄 끓어서 쓰러졌는데 무슨. 그 아이는 내가 그때 업어 준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걸.”

“과연 그럴까?”

* * *

♬♫♪♬.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내비게이션의 경쾌한 알림음이 흘러나왔지만 나는 한참을 내리지 못하고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안전벨트조차 풀지 않고 멍하니 제자리에 앉아 태영의 말을 곱씹었다.

‘과연 그럴까라니? 무슨 뜻이야 그게.’

‘신께 직접 여쭤보라고.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야.’

사실 나도 궁금하거든.

초조하게 핸들을 두드리다가 손톱 끝을 물어뜯었다. 대체 내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 확신이 서질 않아 혼란스럽다. 태영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그날 기하가 쓰러졌다가 다시 깨어났다는 건데……. 대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야. 아니면 태영이 잘 알지도 못하는데 슬쩍 말을 흘린 건가. 단순히 내가 욕볼 뻔한 일이 무언지 알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정문 앞에 걸어가 잠시 머뭇거리다 정문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려 하자 스피커를 통해 고용인의 놀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기현 님? 기현 님이…….

내가 입을 떼서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인터폰으로 내 얼굴을 확인한 고용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차가운 기계음과 함께 커다란 정문의 잠금장치가 풀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서자 정문 옆에 있는 제어실과 멀찍이 본채에서 대여섯 명의 고용인들이 나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기현 님! 이 시간엔 어쩐 일로…… 연락도 주시지 않고.”

“내가 내 집에 연락하고 와야 합니까?”

“그런 뜻이 아니오라 저희는 너무 기뻐서.”

“가주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기하는 어디 있습니까?”

“오전 내내 안채에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계신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얼른 고개를 조아리고 앞장선다. 평일이라 그런지 간간이 지나가면서 목례하는 고용인들은 보여도 일족들은 보이지 않았다. 새삼 이곳이 여우 신의 감옥이라는 게 실감 나 입맛이 쓰다. 휴일이나 주말에야 여우 신을 뵙고 싶어 하는 복속인이나 추종자들이 본채 가득 머물러서 사람 사는 곳 같지만, 평일의 본가는 생기를 잃고 죽은 소도시 같다. 마음이 또 무거워졌다. 동생을 이런 곳에 몰아넣고 나만 바깥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희미한 죄악감이 고개를 든다.

안채에 들어서서 반겨 주는 꽃고비의 무리를 뒤로하고 조용히 대청마루로 올라섰다. 언제나 안채는 정적인 분위기였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조용해서 바람결에 딸랑거리는 처마 밑 풍경의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리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물고기 장식을 건드리며 고요함을 흐트러뜨렸다.

“이쪽으로.”

평소의 침실 방향이 아닌 반대편 복도로 안내했다. 연락을 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왔으니 기하가 일을 다 볼 때까지 기다릴 생각으로 저번에 보다가 말았던 애장품이나 마저 구경하러 그녀와는 반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를 안내하던 고용인들은 내가 다른 방향으로 향하자 당황하며 내 뒤를 따랐다.

“기현 님. 이쪽으로 모시라는 명령은…….”

“가주님께서는 저쪽에 계십니다.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일 다 보고 오라고 전해 주십시오. 알아서 놀고 있을 테니까요.”

매번 신을 배알할 때마다 안내하는 곳인데도 방향을 바꾸는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한다. 감히 내 앞을 제지하진 못하고 자기들끼리 다급하게 속닥거렸다.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좀 이상했다.

안쪽에 도착해 중간 미닫이문을 통해 후원으로 빠져나가려 기하의 침실 문을 열었다. 커다란 침대 옆 걸어 둔 발에 기다란 그림자가 서 있었다. 내가 그것을 인지하고 걸음을 멈추는 것과 동시에 그림자의 주인도 인기척을 느끼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기하인가 싶어 일순간 미소를 지었지만…… 나타난 작은 인영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였다. 고용인들과는 다른 복식의 감색 철릭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기다리던 사람인 줄 알았는지 상기된 얼굴로 나타났다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허리를 숙였다. 그 잠시 잠깐 보였던 얼굴로도 시선을 빼앗겼을 정도로 상당한 미인이라 내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여기는 기하만이 쓰는 침실이었고 내가 주말마다 신과 뒹구는 장소였다. 내 결벽 때문에 청소하는 고용인마저 내 눈에 띄지 않게 관리하는.

그런 곳에 낯선 여자가 방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용인들이 나를 막았던 건 이 여자 때문이었는지 침실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그녀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 덕분에 이 여자가 보통의 고용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더했다. 손님이라기엔 이렇게 내밀한 곳에 머물게 했을 리가 없고 고용인이라면 감히 이곳에 와 있을 수도 없다. 여자가 누군지 확인하려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때 뒤에서부터 뻗어 나온 커다란 손바닥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아.”

반사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나 뒤의 인영을 확인했다. 역시나 동생이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란 나와는 달리 평소와 똑같은 얼굴이다.

“형님.”

“…….”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평일에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오신다는 말씀도 안 하시고 와 주시다니…….”

기하는 다감하게 속삭이며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손을 뻗더니 살며시 내 뺨을 쥐었다. 그 아이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다 다시 방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나를 발견한 순간부터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까이서 얼굴을 한번 확인하고 싶었는데 내가 고개를 들라 명령하면 고개를 들까?

“형님?”

기하는 내 시선을 쫓아 그녀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방문을 닫아 버렸다. 그제야 돌아본 내게 반길 때 냈던 목소리보다 한층 서운한 기색으로 입을 연다.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

“말하지 않고 와서 미안해. 내가 방해했나 보네.”

“무슨 그런 말씀을. 형님이라면 언제든지 어느 때고 연락 없이 오셔도 됩니다. 이곳은 우리 집이잖습니까?”

그의 말에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깐 뭐 좀 물어보려고 들렀어.”

방 안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그녀가 자꾸 의식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바싹 마르고 있는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거스러미가 일어나면 그걸 뽑아내고 싶어 온 신경이 다 그쪽으로 쏠리는 것처럼, 방문 안쪽에 있을 여자의 존재가 거슬렸다. 처음 보는 여자이기도 했고 다른 고용인들과 복장부터 다른데다가 기하의 침실에 있었던 게 신경 쓰여 미칠 것 같다.

저 사람은 누군지, 왜 네 침실에 있었는지, 누굴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나는 왜 지금 기분이 나쁜 건지 오늘 네게 물으러 왔던 다른 질문들을 누르고 차마 입 밖에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그런 질문들만 입 안을 맴돌았다.

* * *

책장을 성의 없이 팔랑팔랑 넘겼다. 활자가 눈에 하나도 들어오고 있지 않았다. 바람이 일도록 거칠게 젖혀 가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덮어 버렸다. 기분이 한없이 저조해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갈아입은 동생이 고용인 몇 명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왔다. 카트를 밀고 들어온 그녀들은 탁자 위에 간단한 다과와 죽 종류의 음식을 내려 두고 잰걸음으로 응접실을 나갔다. 아까 동생과 있던 미인을 찾아 고용인들의 얼굴을 확인하다가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씁쓸하게 앞에 놓인 다과 접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결국 점심을 안 먹었지. 하지만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았다. 동생이 내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여 귓가와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너는 점심 먹었어?”

“원래 점심은 간단하게 먹어서요.”

그의 손이 정갈하게 차를 내렸다. 곧 예쁜 다기에 향긋한 차가 담겨 내 앞에 놓여졌다. 내가 입을 다물고만 있자 기하가 분위기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 환기시키듯 말을 텄다.

“아까 형님께서 물어볼 게 있어서 오셨다고 하셨지요.”

“…….”

“그래서, 무얼 물어보시려 평일 이 시간에 본가에 들르신 겁니까?”

“어머니 장례식 날. 기억해?”

돌려 물어보면 오늘이 지나도 원하는 답을 해 주지 않을 게 뻔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동생이 마시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동요하는 기색이 있나 살펴봤지만 아까와 같이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그걸 어떻게 잊겠습니까.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날인데요.”

“어머님의 장례식 날에 네가 비를 많이 맞아서 쓰러졌을 때 말이야. 그날 내가 욕볼 뻔했다던데.”

일부러 별말 아닌 것처럼 물어놓고 곁눈질을 했다.

차받침을 톡톡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기하가 불쑥 되물었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습니까?”

“나도 지나가다가 들은 얘기야.”

“지나가다가 쓸데없는 소리를 들으셨군요. 제가 있는데 감히 형님께 누가 험한 일을 할 수 있다고.”

“그날 너도 아파서 쓰러졌었잖아. 너도 기억 못 하는 새에 일어났을 수도 있지.”

아…… 처음으로 동생의 표정이 달라졌다. 온화하기만 했던 표정에서 서서히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비웃는 듯한 웃음이 만들어졌다.

“그 여자가 그렇게 말하고 갔습니까?”

“…….”

상냥한 목소리였지만 말에 뼈가 있었다.

“우리 형님은 순진해서 아무렇게나 하는 소리도 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시고. 그 여자가 하는 소리가 진짜일 리 없잖아요.”

“……벌써 들었구나.”

“좀 전에 이동하면서 형님께서 연미연과 접촉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여자가 대체 무슨 얘기로 우리 형님을 흔들어 놨길래 오셨을까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더 악질적인 얘기를 늘어놓고 갔네요. 또 다른 얘기는 없었습니까?”

“어차피 내가 말해 봤자 그녀한테 직접 묻기도 할 거잖아.”

내가 한숨을 쉬며 말하자 동생이 기분 좋게 웃음을 흘렸다.

“물론 직접 물어봐야죠. 그래야 다음번에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버릇을 고쳐 놓지. 어떻게 헛소리를 해도 저리 저열한 걸로 골라서 하고 갔을까……. 그래도 덕분에 평일에도 형님 얼굴을 뵙게 됐네요.”

“그래서 네 얘기는…… 숙모가 그냥 한 소리라는 거야?”

“물론입니다. 말할 가치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내 기억이 없어진 건 대체 뭔데.”

“형님의 기억 문제는 시일이 많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잊힌 거겠죠. 워낙 옛날 일이잖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일이 있었지 하는 단편적인 조각이라도 떠오를 텐데 그냥 그 부분은 뚝 잘려 나간 것처럼 기억이 없다고. 이상하잖아.”

“저도 가끔 그러는 걸요. 딱히 좋은 기억도 아닌 것을 계속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원래도 자주 잊어버리시는 분이, 뭐 그렇게 쓸데없는 걸 기억 못 했다고 마음 쓰십니까.”

내 말을 그저 쉽게 휘둘려 버린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생각을 재고해 보려고도 않는 그의 단호한 태도에 실망한 눈을 감추지 못하고 내리깔았다.

그래. 말해 줄 생각이 없구나. 너는 내게 그날의 일을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거야.

그렇다는 건 그의 말과 반대로 그날 무슨 일이 틀림없이 있었다는 소리고, 연미연이 했던 얘기가 헛소리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다. 내가 욕볼 뻔했다는데 내가 아는 너라면 이렇게 이성적으로 고고한 반응만을 보이고 있을 아이가 아니었다. 당장 연미연을 잡아다 캐묻겠다고 하겠지. 이렇게 웃음으로 얼버무리려고 하는 너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다.

“그날 너는 아무런 기억이 없어?”

“형님께서 빗속을 뚫고 제게 달려오시던 건 기억납니다. 그날 이후로 형님께서 다시 절 쳐다봐 주시기 시작하셨죠.”

“…….”

“어린 마음에 그렇게 크게 앓으면 예전처럼 예뻐해 주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바보 같은 소릴.”

“그 이후론 기억이 없고 깨어났을 땐 형님께서 걱정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계셨고요. 제가 며칠을 누워 있었다고 했었지요?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그게 다야? 뭐…… 다른 건 생각나는 게 전혀 없고?”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다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는 생각하는 척 찻잔 주변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끌어 올리더니 대답했다.

“네. 없습니다.”

내가 아는 기억도 그와 같다. 하지만 김태영이 한 말은 달랐다. 태영은 네가 중간에 일어났을 것이라 말했다. 기하와 연미연과 김태영은 각자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중요한 건 셋 다 내게 거짓말을 섞어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계속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자 기하가 한숨을 쉬었다.

“형님을 짜증 나게 만드는 게 목표인 그 여자의 헛소리에 너무 진지하게 반응하시네요.”

“…….”

“제 말보다 그녀의 말을 믿으시나요?”

연미연의 말을 믿느냐고? 그럴 리가.

“……아니.”

“그럼 얘기 끝났네요. 그렇죠?”

동생은 은근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깍지를 더 단단히 끼며 속삭였다. 그렇다고 지금 너의 말을 믿는다는 건 아니다.

동생의 페이스에 말려든 걸 알았지만 저리 단호하게 나오는데 또 물을 순 없어 차가워지는 머릿속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수긍에 만족한 기하가 목덜미에 부드럽게 머리를 비볐다. 밀어 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거짓말쟁이.

혀끝까지 밀려 올라온 그 말을 꾹꾹 삼키면서.

* * *

긴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기하가 내 곁을 떠난 뒤 대신 내 앞에 앉은 집사는 끊임없이 테이블 위에 온갖 종류의 다과를 차려 두는 중이었다. 식욕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집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얼른 드시라 종용했다. 아까부터 내가 자발적으로 본가에 온 것에 지금껏 보인 적 없는 호의를 아낌없이 발산 중이었다.

“오늘 기현 님께서 이렇게 와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다른 가솔들도 모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평일에 동생 스케줄이 어떻게 됩니까? 보니까 점심도 거의 안 먹는 거 같던데.”

넌지시 운을 띄우자 내가 동생에게 관심을 가진 것에 기뻐하며 일정을 읊어 주기 시작했다.

“통상 아침부터 점심까지 그룹 일을 보시고 남은 오후 시간은 전부 제왕학이나 경영학이나 교양을 배우십니다. 아주 수준 높은 집단만 엄선해서 모시고 있답니다. 오늘 오신 교수님도 스승 중 한 분이고요. 저녁 시간엔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매일 경영진 분들과 회의를 하십니다. 금요일 오후를 제외하고는 평일은 웬만해선 이 스케줄에서 벗어나지 않으세요.”

생각했던 것보다 동생의 일정이 더 빡빡했다. 지긋지긋하다며 내가 본가를 벗어날 생각밖에 안 할 때 동생은 장자인 내가 놓아 버린 의무도 전부 짊어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금요일과 주말에 나와 보내기 위한 시간을 빼려고 그렇게 더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하는 게 뻔했다.

“힘들겠네요. 아직 어린데.”

“완벽한 주인님이시죠. 이번 대의 신님을 모실 수 있게 되어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그렇겠지요. 인정합니다.

내가 얼마나 휘저었는지 아이스크림이 반쯤 녹아 통 안에 고이고 있었다. 머릿속도 녹아 버린 것처럼 늘어지며 방 안의 공기가 숨 막히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명치끝을 쿡쿡 찌르는 것 같다. 그러게 아이스크림 좀 적당히 먹을 것을. 매번 소화도 못 시키면서.

테이블 위에 통을 올려 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에 있던 고용인들의 시선이 짠 듯이 일제히 나에게 와 닿는다.

“일들 보세요. 기하가 올 때까지 정원이나 구경하고 있을 테니까.”

얼른 따라나서려는 여자를 저지하며 딱 잘라 말하자 고용인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가주께서……. 저번에 한번 큰일이 있을 뻔하셨다고 엄하게 단속하셔서.”

우물쭈물하며 눈치만 보는 그녀들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기하에게 얘기 못 들었습니까? 저번부터 날 감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텐데요. 못 들었으면 한번 확인해 보든지.”

그들은 내가 화낼 것이 두려웠는지 마지못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녀들의 눈길을 뒤로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다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손끝에 끈적이는 게 느껴졌다. 아이스크림을 먹다 묻은 모양이라 닦고 가려 다시 방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나올 때 제대로 닫지 않았는지 조금 열린 문틈으로 집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전 나에게 하던 상냥한 목소리가 아니라 마치 딴 사람 같은 섬뜩한 목소리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제물께서 보시면 안 되는 건 다 치웠겠지?”

“예. 방금 작업을 다 끝냈습니다.”

“연미연은?”

“광으로 옮겼습니다. 흔적을 치우고 있답니다.”

“상황실에서는 뭐 하는 거야. 제물님 동선은 파악했어야 할 거 아냐. 이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너희 둘!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따라붙어.”

“예.”

저게 다 무슨 소리지. 연미연? 흔적을 치웠다고?

방문 쪽으로 급히 걸어 나오는 인기척에 황급히 문에서 떨어졌다. 겨우 두세 마디 정도였지만 내가 들어선 안 되는 걸 들었다는 건 확실했다. 안절부절못하다가 그녀들이 방문을 열기 직전에 바깥으로 통하는 복도가 아니라 반대편 복도 쪽으로 얼른 몸을 숨겼다.

찰나의 차이로 복도에 방 안의 빛이 쏟아지고 그녀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들킬까 봐 불안한 마음이 반, 어차피 내가 정원에 가지 않았다는 걸 나가자마자 눈치챌 텐데 그냥 차라리 숨지 말고 무슨 소리냐며 물어볼 걸 그랬나 하는 마음이 반으로 나뉘어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이미 본능적으로 숨어 버린 걸 어쩌겠는가. 시간을 돌릴 수도 없고.

“…….”

이따 할 말 없기 전에 지금 돌아갈까? 하는 마음으로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가 숨이 멈췄다. 뛰는 듯 빠른 걸음으로 복도 끝을 향하는 그녀들에게서는 그 어떤 발자국 소리도 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무로 된 바닥이라 저렇게 걸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안 날 리가 없을 텐데도. 그럼 평소에 발자국 소리가 안 나서 안심했을 때조차 내 곁에는…….

아까 태영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던 말이 생각났다. 공포감을 느꼈다던.

조용히 뒷걸음질해 정원이 아닌 반대쪽 복도로 들어섰다. 일단 그들이 발견하기 전까지 변명거리라도 찾아야 했다. 화장실을 찾다가 헤맸다든지 하는 종류의 뻔한 레퍼토리라도.

“집사님……. 집사님……!”

멀리서 고용인 한 명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렸다. 벌써 들킨 모양이라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웬 소란이냐며 방문을 열고 나온 집사가 타박하는 소리가 들리자 속이 울렁거린다. 속삭이며 대화하는지 더 이상 그들의 대화 소리는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으나 일순간 공기가 달라졌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큰일 났……. ……안 계시……. ……아무래도…….”

“……제물님…… ……빨리…… 상황실로…….”

제대로 들리지 않는 소리 중에서도 제물과 상황실이라는 단어는 또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내가 다른 길로 샜다는 건 이미 눈치챘다는 소리고 상황실이라는 곳에 가겠다는 건가? 대체 상황실이 뭔데? 우리 집에 그런 데도 있었나?

곧바로 내가 있는 쪽 복도로 오려는지 복도 불빛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다시 돌아오는 그림자를 보고 얼른 발끝을 세워 다른 쪽으로 걸었다. 무게를 최대한 싣지 않았는데도 내가 나무 바닥을 밟을 때마다 바닥이 가냘프게 울었다. 금방이라도 뒤에서 쫓아온 고용인들이 목덜미를 잡아챌 것만 같았다.

“……이쪽도…….”

등 뒤에서 고용인들의 다급한 속살거림이 들렸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인원이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이대로라면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뒤를 돌아보며 복도의 끝에서 코너를 돌았다. 순간 코에 분향이 희미하게 스치며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 입을 확 틀어막고 강한 힘으로 쭉 잡아끌었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힘껏 몸을 굽혀 주먹을 내질렀다. 둔탁한 소리가 울리고 나를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

얼른 뒤를 돌아 나를 붙잡은 자를 확인하고 당황했다. 남자가 아니라 긴 머리를 늘어뜨린 작은 체구의 여자였던 것이다. 반사적으로 쳤던 거라 힘 조절을 못 한 주먹을 고스란히 팔에 맞은 여자는 역시나 충격이 컸는지 크게 휘청거렸다.

“미…… 미안합니…….”

여자인 걸 알았으면 때리진 않았을 텐데 너무 놀라서 경황이 없었다. 미안해서 부축하려하자 그녀가 고개를 젓더니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어…….

복도의 등에 비친 얼굴은 대단히 아름다워 붙잡은 그대로 수 초간 멍하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까 동생의 침실에 있던 여자.

그 멀리서도 미인이라고 느꼈던 그 여자가 창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가까이서 본 얼굴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앳되어 기하 또래 정도로 보였다. 고용인들 대부분은 선대 때부터 함께 해 온 사람들이라 어려 봤자 삼사십 대의 외모였기에 여자는 본가에 상주하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어린 것이었다. 이지헌 대에 들어온 고용인이 아니라 기하 대에 새로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내 눈에 띄었을 수밖에.

하필 붙잡혀도 이 여자에게 붙잡히다니…… 운도 없지.

“저…… 때린 것 미안합니다. 괜찮습니까?”

머뭇머뭇 사과를 건네는 날 보는 여자의 눈초리가 기이해졌다. 왜 날 붙잡았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아주 주의 깊게 내 얼굴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등 뒤의 인기척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어차피 실수긴 했어도 여자를 때려 놓고 도망갈 생각은 없어서 체념하는데 갑자기 그녀가 내 팔을 움켜쥐더니 인기척의 반대편으로 잡아끌었다.

“자…… 잠깐…….”

아직 팔이 심하게 아플 텐데……. 그러고 보니 힘 조절을 못 한 주먹을 맞고도 여자는 흔한 신음 소리조차 흘리지 않았다. 잠깐 기다리라며 다급하게 속삭였지만 그녀는 말없이 내 팔을 끌어당기며 다른 쪽 복도로 들어갔다. 여자가 왜 이러는지 알 수도 없고 차마 내가 다치게 만든 팔을 또 뿌리치지도 못할 노릇이라 이끄는 대로 속수무책 따라갔다.

“……어딜 가는 겁니까?”

“…….”

“……잠깐만요. ……저기요?”

이상한 발걸음으로 복도 벽에 붙어서 나를 끌고 가며 몇 번이나 말을 걸어도 무시한 채 걸음만 재촉한다.

정말 이상한 여자였다. 거리낌 없이 내 손을 잡는 것도 그렇고 고용인에게 넘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를 도와주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다고 내게 호의적으로 느껴지는 건 또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에게 잡혀가는 상황이 의심스러워 견디다 못해 그만 멈추라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눈앞에 있는 방문을 열더니 말도 없이 나를 그 안에 힘껏 떠밀었다.

“뭐 하는…….”

불 하나 없는 어두운 방 안에 밀려 들어가 황급히 손을 뻗었으나 여자는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져 얼른 뒤로 물러났다. 거의 간발의 차이로 고용인들이 근처에 다가온 모양이었다. 이러다 들키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몇 초간 방 근처에서 못해도 서너 명은 되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물에 잠긴 것처럼 흐릿하게 들렸다. 그 여자가 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가 싶어 불안해지던 중 날이 선 목소리가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당신이 왜 아직도 여기 있습니까?”

카랑카랑 울리는 목소리는 지금껏 들어 본 바 없었지만 틀림없이 집사의 것이었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기 있는 걸 알면 경을 치실 겁니다. 얼마나 또 혼나시려고…… 얼른 방으로 돌아가세요.”

“……. …….”

왜인지 상대편인 여자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또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집사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는 당신이 알 거 없습니다. 오늘은 더 이상 방 밖에 나오지 마시라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녀를 대하는 집사의 태도가 의아했다. 경어는 쓰지만 고압적이었다. 저 여자가 대체 누구기에 집사가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걸까.

“그러다 또 제물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당신이 책임질 수나 있겠어요? 이렇게 답답하게 구시니 원……. 당신 목숨이 한 개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멍청하게들 서서 뭐 하고 있어! 아가씨를 얼른 방으로 모시지 않고!”

집사의 날카로운 명령이 끝나고 몇 차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서서히 인기척이 옅어졌다. 나는 밖의 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집사가 했던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조용히 벽에 기대었다. 내가 저런 소리까지 듣게 될 줄은 몰라서 혼란스러웠다.

내 눈에 띄면 안 되는 여자. 집사가 아가씨라고 말하는 여자.

짐작이야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평범한 고용인은 아니었다는 걸 확인 사살 받자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다. 내가 보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숨기는 여자가 무슨 의미겠는가. 애써 다른 의미를 찾으려 해도 침대 옆에서 기하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의 얼굴만이 눈앞에 떠오른다.

나는 여자는커녕 단추 몇 개 풀어 입었다고 남세스럽다느니 신께만 몸을 보여야 한다느니 별 수치스러운 말을 다 듣게 만들더니 정작 동생의 곁에는 저런 미인이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상대를 고용인들이 나에게 숨기려고 든다. 희극도 이런 저질 희극이 없을 거다.

한기가 돌아 얼어붙은 손을 꾹 부여잡았다. 예전에 이런 주제로 대화를 했을 때 나 이외의 특정 상대를 만들지 말라고 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때 내가 말한 대상은 단지 신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동생이 누굴 만나는지에 대한 것까지 질투하며 관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

절대 아니다.

언감생심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 없다. 아예 그런 인식 자체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게 맞을 거다.

……그런데 지금 이 복잡한 감정은 대체 뭘까. 왜 이렇게 쓸데없이 시기심이 일며 숨이 막힐까.

저주를 풀기만 하면 기하가 보통 사람들처럼 훌륭하고 완벽한 여성을 만나서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사랑을 하다 아이를 낳고, 나는 조카를 내 동생을 돌보듯…… 내 자식을 돌보듯 예뻐해 주며 옆에서 축복해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내가 동생에게 되찾아 줘야 하는 미래이자 내 미래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했다는 주제가 내 동생에게 다른 상대가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이렇게 천박한 마음을 품다니.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어 가자 오래지 않아 손끝에 스위치 같은 게 만져졌다. 불이 켜진 방 안은 화장실이었다. 세면대에 다가가니 창백한 안색의 남자가 거울에 비쳤다. 표정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질시했을 때의 나는 이런 얼굴이었다. 표정 관리는 불가능하다. 늘 그랬듯이.

물을 틀어 얼굴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끼얹었다.

“기현…… 기현 님?”

밖이 웅성거리더니 문이 벌컥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화장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를 확인한 집사의 목소리가 더없이 안도하는 기색으로 변했다.

“세상에…… 여기 계셨군요! 저희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지? 노크도 없이 문을 열다니.”

“송구합니다. 저희는 단지…….”

아무리 그녀들이라도 내가 도망쳤을까 봐 사방팔방 감시하며 쫓아다녔다고는 말을 못 하겠는지 우물쭈물하다 곧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물러가 있겠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그러다 웃음이 나와 바닥에 천천히 무너졌다. 밖에 대기하는 사람들이 들을까 봐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틈새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마저 막진 못했다.

“하하하…… 정말…… 미친…….”

미쳤다. 이기현. 동생이 미칠까 봐 전전긍긍했던 주제에 스스로가 미쳐 버렸구나.

역시 나는 제물 그 자체였다. 신을 위해서 태어났으며 신을 타락시키기 위해 태어난다는 더럽고 나쁜 피를 가진 제물. 제물로서 안겨야 하는 품은 오직 신의 품뿐인데 어느샌가 동생의 품도 차지하려고 들었던 것인가.

이제는 희미해져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붉은 입술을 열고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그것 보라는 듯 한껏 비웃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미쳤구나!’

‘당장 그 끔찍한 것에서 손 떼지 못해?!’

아버지는 기하를 끌어안은 나를 볼 때마다 미쳤다며 삿대질과 함께 욕을 하셨다. 어째서 그러는지 이유를 말해 주지도 않고 나에겐 통한의 저주를 쏟아 내고 기하에겐 열화 같은 분노를 토해 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의 시작이었는진 죽는 순간까지 말해 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이렇게 되리라는 걸.

더 이상 이곳에 있는 게 참을 수가 없어져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내가 나타나자 대기하고 있던 족히 열 명은 넘어 보이는 고용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도망친 지 불과 몇십 분 되지도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안채에만 이 정도 인원이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이 끔찍한 집구석에 대체 몇 명이나 숨죽이고 있는 것인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나를 주시하는 눈이 몇 개인지.

“얼굴을 닦으시지요. 기현 님.”

뒤에서는 제물이라고 잘도 부르더니 내가 앞에 있을 때만 꼬박꼬박 기현 님이라고 존칭하는 그들의 기만에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 얼굴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나를 끌고 왔었던 그 여자는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내 눈에 뜨이면 안 된다고 했으니 어딘가로 치운 것 같다. 내가 보면 정말 머리채라도 잡을까 봐 걱정이라도 됐던 모양이지.

수건을 집사에게 다시 던진 뒤 그들 사이를 헤쳐서 밖으로 향하는 복도로 걸어가자 그 인원이 한꺼번에 졸졸 뒤를 따랐다. 대청마루에 도착하고야 내가 집을 떠나려고 한다는 걸 깨달은 집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기현 님? 지금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집에 갑니다.”

“집이요……? 그게 무슨…… 여기가 기현 님의 집이지 않습니까.”

낮에만 해도 그렇게 대꾸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이곳을 집이라고 여기고 싶지가 않았다. 기하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 오늘 충동적으로 여기 온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 돌아가겠습니다.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말 좀 전해 주십시오.”

신고 왔던 갈색 로퍼를 찾았지만 내가 놓아둔 자리에도, 그 어디에 눈을 돌려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고용인에게 말했다.

“신발 어디 있습니까? 가져오십시오.”

“기현 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혹시 저희가 실수라도 했나요?”

내가 떠나려는 게 진심인 걸 알자 집사의 목소리에 떨림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나를 강제로 잡진 못하고 그저 허리를 숙였다.

“그럴 리가요. 집사님. 잘 먹고 잘 쉬다가 갑니다. 급한 볼일이 생겨 가는 것뿐입니다.”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넘어올 것 같았지만 억지로 웃었다. 늘 내 앞에서는 포커페이스를 보여 줬던 그녀가 완전히 무너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더니 내가 한 번 더 신발을 가져오라고 호통치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현 님께서 지금 이대로 가 버리시면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고 저희들은 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그런 걸 신경 쓴 적이나 있었나요?”

명령해도 가만히 서서 그저 내가 발을 돌리기만 바라는 꼴을 보니 날이 저물어도 신발은 못 찾겠구나 싶었다. 그냥 흙바닥에 맨발을 디디는 나를 보고 그들은 탄식하며 무릎을 꿇었다.

“제발…… 기현 님 이러지 마십시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내 앞으로 무릎을 꿇으며 길을 방해하는 이들을 피해 흙발로 걸을 때마다 그들의 애원이 커졌다. 누가 들으면 사람이라도 죽은 줄 알겠다.

“저기요. 진짜 짜증 나니까 그만들 좀 하시죠. 뭐 하는 짓들입니까 이게? 볼일이 생각나서 나간다는 게 뭐 이렇게 할 일이라고 이 난리들입니까?”

“그럼 신께서 오실 때까지 만이라도 계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형님께서 오셔서 기뻐하셨는데 말도 없이 그냥 가신 걸 알면 크게 상심하실 겁니다.”

결국 자신들이 혼날까 봐 나보고 해결하라는 거잖아. 곧 죽어도 신은 책임져 놓고 가라 이거지.

그런데 어쩌지. 지금 동생을 보면 더 도망쳐 버리고 싶을 것 같은데.

“동생은 지금 바쁘잖습니까. 괜히 평일에 와서 방해만 하고 돌아간다고 미안하다 했다며 예쁘게 포장해서 전해 주십시오. 당신네들 그런 거 잘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형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겠습니까? 아아…… 제발 멈춰 주십시오. 어떻게 귀한 발에 흙을……. 이러다 정말 큰일 납니다 기현 님……!”

“제발 발을 멈춰 주세요. 기현 님……. 그러다 고운 피부라도 상하시면…….”

내 직업이 직업인지라 매일매일 흙을 만지는 게 일인데 무슨. 유난도 정도껏 해야지 들어먹을 텐데 기분이 점점 진창으로 빠져들었다. 내 몸에는 손끝 하나, 털끝 하나 대지 못하는 그들이었지만 끝에서부터 기분 나쁜 무언가가 칭칭 휘감으며 옥죄이는 느낌이다. 그들이 내뿜는 압박감에 숨이 조여들었다.

내가, 내가 애원하고 싶었다.

이러다 진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으니 그만들 좀 하라고.

“발에 흙이 묻는 게 싫으면 얌전히 신발을 내놓으면 되는 일 아닌가? 내가 하는 말은 통 들어먹지를 않으니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돌아가질 못하는 걸 어쩌라고?”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해 안채의 문 근처까지 다다랐다.

“아아…….”

등 뒤로 나를 붙잡으러 다가왔던 집사가 절망스러운 탄식을 내뱉었다. 앞의 문을 확인한 나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다섯 명 정도의 무리가 안채의 문 안으로 걸음을 디뎌 들어오고 있었다.

* * *

왜 벌써.

네가…… 아니 당신이.

무리 제일 앞에는 신으로 화한 그가 있었다. 일을 모두 끝마쳤는지 아까처럼 셔츠에 면바지가 아닌 제대로 된 여우 신의 정복 차림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제멋대로 덜컥거렸다. 아직 그를 어떻게 대하고 보아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신 역시 뜻밖이었는지 얼어붙어 있는 우리들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했더니. 여기서 뭣들 하고 있는 거야.”

“…….”

“왜 그대가 여기에 나와 있는 거지?”

차마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깐 나 대신 얼어 있는 고용인들의 표정을 탐색하듯 차례차례 훑어보기 시작했다. 아무도 신의 물음에 나서서 답을 하질 못하자 그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나에게 눈을 돌렸다.

섬뜩하게 예리한 붉은 눈이 얼굴에서부터 천천히 기어가듯 핥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흙투성이가 된 내 발까지 고개를 내린 남자의 눈이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농도 짙게 고요한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봤다.

큰일 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후회하며 고개를 떨구자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이 조용히 안채 마당을 덮었다.

“너희들이…… 미쳤구나.”

섬뜩한 기운이 내 몸을 관통해서 지나가고 등 뒤에서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퍼졌다. 나를 뒤따르던 십여 명의 고용인들이 휘청거리다가 차례차례 바닥에 주저앉는다. 무슨 힘을 썼는지는 몰라도 끔찍한 고통이 가해졌다는 건 그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좀 전까지는 그렇게 흠 하나 찾아볼 수 없이 완벽한 차림새와 자세를 고수하던 그들이 한순간에 지렁이처럼 몰락해서 흙바닥을 기며 손톱으로 목을 긁어 대었다.

“시…… 신…….”

입 밖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는지 전력을 다해 쥐어짜 낸 목소리로도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집사는 허리를 꺾으며 쓰러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말리지도 못하고 나는 멍청하게 모두가 쓰러진 사이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내가 저번에 당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압력이 주어지는지 그들은 계속해서 땅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머리를 땅바닥에 비비고 고통에 찬 신음 소리만을 뱉으며 사지를 펄떡거렸다. 그러다 목을 부여잡고 컥컥거리며 뜨거운 선혈을 한 움큼씩 바닥에 쏟아 냈다. 저러다 정말 누구 하나 죽을 것 같았다.

“그…… 그만하세요.”

“내 반려를 어떻게 모시라고 했지?”

“……큭……. 흐윽…… 목숨을 ……다해서 모시라고…….”

“그래. 그런데 감히 흙바닥을 맨발로 걷게 만들어? 내 말이 우스웠나 보지?”

피를 토하고 흙바닥을 구르면서도 용케 대답한 집사에게 남자는 더 차갑게 응수했다. 그들의 신음 소리가 더 높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벌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나는 아직도 앞에 벌어지는 일이 믿겨지지 않아 눈을 의심했다.

내가 흙바닥을 디딘 게 그렇게 큰일이었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칠 정도로? 겨우 내가 한 사소한 행동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해?

“용……, 용서를…….”

“그들은 말렸습니다……! 제가 급해서…… 급해서 그랬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쥐어짠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진 채로 흘러나왔다. 다행히 멍청한 발음을 알아들은 그가 고용인들을 쳐다보던 눈을 거두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서늘한 저온의 눈은 아니었지만 나를 보는 붉은 눈도 섬뜩하기는 매한가지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왜. 무엇이 급해서? 날 보자마자 뒷걸음질 쳤던 걸 보면 내가 보고 싶어서 맨발로 뛰쳐나온 건 아닐 테고.”

“…….”

“다치면 어쩌려고 겁도 없이 흙바닥을 맨발로 걸어. 어딜 가려고 신발도 없이 급하게 내려온 거야? 응?”

아직도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고용인들이 있었지만 남자는 그들을 아예 없는 취급하며 고작 내 발에 묻은 흙만을 걱정했다. 다른 자들이 온몸으로 바닥을 구르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지금만큼은 남들이 죽든 살든 신경 쓰지 않는 나라도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앞에 다가오던 남자의 얼굴이 일순간 딱딱해졌다. 그래도 내겐 웃어 주던 눈매에 한기가 감돌았다.

“왜 물러나는 거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내가 그의 손을 피해 뒷걸음질 쳤다는 걸 깨달았다. 내 몸이 피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불가항력이었다.

지금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남자의 기분이 좋아질 수도, 끝도 없이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걸 머리는 알지만 굳어 버린 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그를 보고 싶지 않아 떠나려고 맨발로 걸었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전부 끝장이었다. 아니, 사실 남자의 눈치라면 벌써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분명 지금 내 표정은 어떻게든 도망가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일 테니까.

내가 손을 피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지 그는 한참이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크게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치밀어 오른 화를 가까스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리 와.”

남자가 재차 손을 내밀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닌데도 멍한 머리로 어떻게 이 난관을 빠져나가야 하나 어떻게 위기를 모면해야 하나 계산하며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내가 곧바로 걸음을 떼지 않고 망설이자 남자의 인내심이 기어코 끊어졌는지 이를 갈며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주춤거리느라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포기한 뒤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지도 못한 채, 나는 또 그렇게 멍청하게 주도권을 빼앗겨 버렸다.

팔뚝이 우악스럽게 잡아채여 거칠게 품에 끌어안겼다. 콧속으로 새 옷감의 냄새로도 감추지 못한 동생의 체 향이 밀려들어 오자 기다렸다는 듯 심장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하기 시작한다. 무서워선지 아니면 좋아선지 이제 더는 구분할 수 없었다.

남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욕설을 몇 번 토해 내더니 세게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압사할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의 무시무시한 완력이었다. 내 머리칼을 헤집으며 한참을 거칠게 숨을 내쉬던 그가 한층 억눌린 저음으로 입을 열었다. 위협을 하는 건지 애걸을 하는 건지 분간할 수 없게끔 서러움이 섞인 어조였다.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기현아. 내가 무서워?”

“…….”

“무서워서 그래? 또 왜 이러는 건데. 말해 봐. 갑자기 왜 이러는지.”

뭐라고 말해야 하나. 늘 그랬듯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사언을 해 왔던 입술이 내뱉을 단어를 찾지 못하고 그대로 닫혔다. 뭐라고 말해야 해.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해야 여길 빠져나갈 수 있지.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어?

“이 자리서 미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말해. 내가 좀 심했어? 실수였어.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 나서 그랬다고.”

“…….”

“아까 왜 날 보고 피한 거야. 왜 얼굴을 보자마자 물러섰어? 응? 말 좀 해 봐. 지금도 왜 이렇게 떠는 건데? ……말을 해 줘야 내가 고치든 할 거 아냐. 네가 이러면 내가― 최악의 상상을 하게 된다고 했잖아.”

그는 초조해하며 나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다가 금세 태도를 바꾸고 애원하며 매달렸다. 흉흉하게 일어선 기운이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치솟다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게…… 기분 나빠서 그녀들에게 화풀이를 좀……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노하실 줄은 몰랐어요. 정말 별일 아니어서…….”

간신히 열린 입은 결국 얄팍하고 비겁한 진실을 택했다.

“그들이 절 기만하는 게 거슬려서 일부러 벌을 받게끔 맨발로 땅을 디뎠습니다. 제가 유치한 짓을 했어요. 죄송합니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왜 화가 났냐고. 왜 네가 화가 나서 맨발로 뛰쳐나왔고 왜 나를 보자마자 물러났는지 그 이유를 말하라고. 그대가 아랫것들에게 화풀이를 했든 죽이든 상관없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게…… 그러니까 그…….”

“신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횡설수설하며 어떻게든 거짓말을 이어 가자 집사가 비틀비틀 기어와 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압력이 사라지지 않아 휘청거리면서도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완벽했던 차림새는 흙투성이에 머리는 반쯤 산발이 되고 입가엔 미처 다 닦지 못한 핏줄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눈만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다. 집사는 신의 발밑에 부복하고 흙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고했다.

“저희 잘못입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저희가 기현 님을 소홀하게 모셨습니다.”

“……소홀하게 모셨다?”

“신……께서 떠나신 후 계속 기현 님 곁에 머물렀어야 하는데 반 시진 정도 모시질…… 못했습니다.”

남자는 입술을 끌어 올리더니 손가락으로 내가 문질러 빨갛게 물든 뺨 위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관찰하는 눈이 내 얼굴 곳곳을 오가더니 붉은 눈 위로 푸른 한기가 치솟는다.

“여길 멀쩡히 걸어 나가고 싶다면 날 설득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보고 내가 들어선 안 되는 말을 들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것이라는 걸 깨닫자 아찔해졌다. 광……. 연미연…… 상황실. 그리고 그 여자. 어느 것을 내보이고 어느 것을 숨겨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원에 가신다고 하셔서 곧바로…… 모셨어야 하는데 그사이에 다른 길로 가셨던 모양입니다. 정원 쪽이 아닌 안채의 화장실 안에서 발견되셨……습니다.”

“그래서.”

“사실 제가 기현 님을 따라가기 전에 아랫것들에게…….”

“제가, 급히 동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집사의 말을 끊으며 다급하게 남자의 소매를 붙들고 말하자 다행히 남자는 품 안의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계속해 봐.”

“…….”

“계속해.”

집사의 얘기를 들었다는 것을 숨기려 저질러 놓고 또 말문이 막혔다. 나는 뭘 고백할 셈으로 저 여자의 입을 막아섰지? 무슨 말을 해야 이 남자를 설득할 수 있을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머리를 굴리는 걸 본 남자가 다그쳤다.

“어차피 네가 입을 닫아 봤자 내 눈과 귀가 되어 줄 것들은 얼마든지 있어. 날 더 화나게 만들기 싫다면 네 입으로 말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냐며 나를 올려다보는 집사의 눈이 겁에 질렸다. 내 세 치 혀 때문에 이들은 정말 목숨이 오간다는 걸 실감하고 나자 입을 여는 게 더 조심스러웠다. 자칫 말을 잘못 고르기라도 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 거다. 아까부터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던 유일한 방법이 머릿속을 울렸다. 너를 피하기 위해 이 사달이 벌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달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너를 원했다는 솔직한 고백일 터였다.

하지만…….

내가 이걸 말할 수 있을까. 말해도 되는 걸까.

썩길 바라며 묻었던 단어들이 싹을 틔워 버렸다고. 이제 나도 당신과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아니 말해서 뭘 어쩌려고. 충실한 제물이 되겠노라고 고백이라도 할 셈인가?

아니 바보 같은, 의미 없는 고민이다. 더 이상 상황을 망가뜨려선 안 돼. 이들은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내 고집과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제정신으로 이런 말을 이리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앞에서 하게 될 줄은 몰라서 참담한 심정으로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기억나십니까? 당신이 다른 상대를 만들면 더 이상 제물을 하지 않겠다고 했던 말…….”

“그래. 그랬었지. 그게 어때서?”

“……당신만이 아니라 기하도…… 아니 동생도 그러길 바랐어요.”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키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고 토해 내듯 내뱉었다.

“……내가 제물을 그만둘 때까지만 동생도 다른 상대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동생밖에 없는 것처럼 동생도 그랬으면 합니다.”

간신히 입을 열고 나니 수치스러워 입술이 말랐다. 입 밖으로 구현된 말은 생각한 것보다 더 구차하고 한심하고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게다가 지금껏 내가 지켜 오던 도덕적 잣대를 스스로 훼손하는 주장이었다. 동생의 애정을 외면하며 밀어낼 때는 언제고 바라보는 건 자신만 바라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다. 저번처럼 이기적이라 욕을 먹어도 할 말 없었다.

역시나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는지 남자는 전에 없이 바로 대답을 내리지 못하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사형 선고라도 기다리듯 남자의 목소리를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이야. 당연히 그러고 있어. 나 역시 너뿐이고 그 역시 너밖에 없어. 항상 얘기했잖아.”

멍청한 내 요구를 질책하지 않는 남자의 다정함에 순간 안도했지만 한번 터진 입은 제멋대로 다음 말도 내뱉고 있었다.

“그럼 그 여자분은 누굽니까?”

“여자라니?”

“방에 있었던 여자…… 말입니다.”

남자는 내가 누굴 지칭하는지 금방 알아채지 못하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기현아. 누구를 말하는 건지.”

“…….”

“혹시, 침실에 있던 여자를 말하는 건가?”

내가 그녀를 언급할 줄은 몰랐는지 그가 놀란 어조로 물었다.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자 남자는 한참을 내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아예 나를 품에서 떼어 놓고 손으로 입가를 가린 뒤 몇 차례 마른세수를 했다. 그가 그렇게 소년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기에 나는 고개도 못 들고 계속해서 애꿎은 입술만 짓씹었다.

“설마하니 그럴 리가 없겠지만.”

내가 주저했던 것과 똑같이 입 안의 단어를 몇 번이고 굴리던 그는 큰 손으로 열이 오르기 시작한 내 뺨을 감싸 쥐며 입을 열었다.

“지금 그 말은 네가 그 여자에게 질투라도 했다는 걸로 들리는데.”

“…….”

“그래?”

질투했다는 것을 저리 다정하게도 말할 수 있었구나. 내 머릿속의 질투는 추악하고 저급한 감정의 부산물이었다면 남자의 목소리에서 울리는 질투란 단어는 애정의 또 다른 이름같이 느껴졌다. 그의 입에서 구현된 질투와 내가 하고 있는 질투는 아예 다른 뿌리를 가진 단어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수 없이 명백한 기대를 갖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견디지 못하고 다시 푹 고개를 꺾었다.

그냥 이대로 녹아서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내가 제정신으로 이런 말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앞으로 대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이기적인 말을 하는 건지.

이제라도 멈춰야 한다고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들렸다. 멈추라고. 미쳤냐고. 기어이 다 망쳐 버릴 생각이냐고. 너마저 이래 버리면 이제 기하를 어떻게 밀어낼 셈이냐고.

하지만…….

그 여자가 당신 곁에 있는 것을 상상하면 속이 뒤집힐 것 같았고, 동생 곁에 있는 것을 상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네. 그랬습니다.”

“…….”

“질투했습니다. 질투했어요. 그 여자와 동생이 무슨 사이인지 궁금했고 그 여자가 당신이 쓰는 침대 옆에 있는 걸 보고 온갖 상상을 했습니다. 지금도…….”

눈가가 뜨거웠다. 귓가에도. 남자의 열기가 옮겨 붙은 것처럼 온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동생과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게 싫습니다. 나 이외의 사람을 곁에 두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그 순간 그가 보여 준 표정은…….

미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감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내보이더니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눈을 맞춰 왔다.

“정말……이라고?”

그가 정말이냐며 몇 차례나 물었다. 정말로 질투를 한 게 맞느냐고,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냐고.

그의 기대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걸론 부족해서 대답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가 꽃봉오리가 개화하듯 아주 서서히…… 아주 서서히 웃었다.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너무도 찬란해서, 한순간 내가 저지른 죄악의 중함도 잊고 넋을 잃었다. 그는 내가 이제껏 봤던 어떤 때보다도 행복해하고 있었다. 겨우 제물이 질투를 했다는 말 한마디에, 더없이 환희한다.

결국 이렇게 돼 버릴 것을.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일이었다. 수천 번을 거절해도 수만 번째 자신을 버리며 구애하는 남자를 내가 무슨 수로 이길 수 있겠는가. 그의 말대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의 것이었는데.

“평생…… 나를 상대로는 그런 걸 해 주지 않을 줄 알았어. 죽을 때까지 그냥 내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평생 원망을 듣는다 해도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

“그렇게 생각하고 너를 붙들고 있었는데…….”

목에서부터 날갯죽지까지 어루만지는 손이 뜨겁다. 내 이기적인 고백 하나에 이토록 좋아하는 남자를 안고 있으니 가슴이 옥죄어 왔다. 고백조차도 계산 끝에 하는, 즉물적인 나와는 달리 순수하기 그지없는 네가 사랑스럽고 가엾다.

“이미 알겠지만 그 여자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런 식으로 너를 상처 입힐 만한 일은 결코 하지 않아. 그냥 단지 일족의 부탁에 의해 집에 있는 걸 용인해 줬을 뿐이지 곁에 둔 적은 없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지?”

“…….”

“내가 어떻게 그대를 놔두고 다른 곳을 볼 수 있겠어.”

나도 그래.

나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바라보는 건 한 곳뿐이었어.

차마 더럽힐까 봐 곁에 두고도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소중했던.

내가 숨기고 묻고 가두고 버렸던 모든 감정들의 주인은…….

“기현아.”

남자는 버릇대로 귓바퀴에, 머리칼에, 이마에 연속으로 몇 번이고 입술을 누르며 끊임없이 내 이름을 되뇌었다. 안고 있는 게 나라는 걸 새기려는 것처럼. 숨이 막히도록 내 얼굴을 자신의 품에 가두며 계속해서,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다. 그의 입에서 발음되어 나오는 내 이름 석 자에 견딜 수 없게 녹아내렸을 때 그는 애절하게 속삭였다.

“나를 사랑하지?”

“…….”

“그렇지……?”

“…….”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어.”

이기적이고 겁쟁이라 결코 입을 열지 못할 나는. 지금의 그에게는 하지 못하고 입 속에서 흩어져 버릴 말을 끝내 목구멍 안으로 삼켜 버렸다.

그런 나를 아는 기하는 충분하다는 듯 정애를 담고 가만히 이마를 맞대며 고요하고 나직하게, 영원처럼 웃었다.

“그래. 말하지 않아도 돼.”

“…….”

“이번에는 들렸어.”

네 대답이.

착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내 귀에 들려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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