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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십니까.
다시는 연락할 일이 없을 줄 알고 다이어리 한편에 써 둔 채 방치해 두었던 해묵은 전화번호를 찾아내 전화를 걸자 몇 번의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낯익은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연결될 수 있는 절대적인 전화번호 한 개는 무조건 살아 있을 거라더니 정말이었다.
혹시라도 전화번호가 바뀌었으면 어쩌나 걱정하며 걸어 본 거였는데 다행이라 생각하며 짤막한 인사와 함께 도와 달라는 말을 건넸더니 상대방의 태도가 갑자기 반가워졌다. 역시 이쪽 일을 하는 사람이라 세월이 흘러도 의뢰인을 잊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게 얼마만입니까? 도련님. 5년? 6년 만인가요?
“그러게요. 오랜만입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목소리 들으니 여전하시네요.
“원승호 씨도요. 절 잊지 않으셨군요.”
―하하하!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가 도련님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원승호. 내가 연락하고 있었던 흥신소 중 한 곳의 사장이었고 유일하게 아버지인 이지헌을 알고 있는 남자여서 연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지헌이 죽기 전에 나에게 남겼던 유산을 보관해 줬던 남자이기도 했다. 내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내 얼굴을 보자마자 그는 이지헌이 내 앞으로 물려줬던 재산 일체와 남긴 유언장을 넘겨주었다.
여우 신의 복속은 죽어서도 풀리지 않는다더니 그자는 몇 안 남은 이지헌의 복속인이었다. 내가 동생을 피해 도망갈 것이라는 걸 아버지는 죽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는지 어떻게 도망가야 하는지, 어떤 루트를 타야 하고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지 계획을 세워 놓았었다. 물론, 죽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기하를 이길 순 없었기에 도망치기 직전 허무하게 붙들려 버렸지만.
―신께서는 안녕하십니까? 그분께서는 여전하시고요?
“여전……하죠.”
아버지가 제물을 어떻게 대했는지 곁에서 다 지켜봤을 터였다. 광기가 느껴지는 맹목적인 집착과 소유를 빙자한 폭력을 쏟아붓는 모습들을. 그래선지 원승호는 내가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을 복속인 중 유일하게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제게 먼저 연락을 주셨습니까? 오랜만에 안부를 물으시려고 연락하신 건 아닌 것 같고…….
“아, 다름이 아니라 저번과 같은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혹시 가능하실까요?”
―물론입니다. 저번과 같은 부탁이라면 설마 또…….
“여우 신에 대한 자료를 찾아야겠습니다.”
―몇 년간 찾았어도 소득이 없었습니다만……. 결국 국내에서는 전대께서 전소시킨 자료가 유일했던 거라고 결론 난 것 아니었습니까?
그랬었다. 산이란 산은, 사당이란 사당은, 날고 기는 무당이며 점술인이며 사찰이며 짝퉁 신이든 진짜 신이든 신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는 곳은 몇 년간 다 뒤졌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 빼돌리는 수고를 하는 대신 자료나 불태우지 않았으면 훨씬 쉬웠을 일을……. 나는 성장하는 내내 아버지를 계속해서 원망했다. 하다못해 사본이라도 유언장에 추가해 줬으면 되는 일 아닌가. 내가 도망칠 결심을 하고 흥신소를 찾아갔어야만 유산을 얻을 수 있도록 계획한 남자가 왜 나에게 가장 필요했을 자료는 스스로 없앤 건지.
“이번에는 좀 확실한 정보를 알게 돼서 도움을 요청하려고 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 기현 님이 명령하시는 거라면 그게 뭐든지 도와드려야죠. 저에겐 고개를 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엔 어디를 파면 됩니까?
“KNG그룹 내에 줄을 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룹 내에 자료가 있다고 하더군요.”
―KNG그룹이요?
역시 뜻밖이었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박물관이나 도서관, 경매장 같은 고서가 있을 법한 곳을 의뢰하다가 갑자기 대기업이라니.
“사실 저번 주에 KNG그룹 차남 강준형이 자료를 토대로 신과 접촉했습니다.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어떤 자료를 넘겨받는 걸로 일영과 계약서가 작성되었더군요.”
―자료 내용이나 종류는 알지 못하시고요?
“네. 하지만 동생이 직접 요구한 계약의 자료라고 했습니다.”
―흠. 그럼 뭐 볼 것도 없이 신에 관한 것임은 틀림없겠군요. 생각도 못 했는데요. 이미 저번 주에 신과 접촉한 상태라면 시간이 충분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일단 그럼 빨리 차남 측에 접근해서…….
“아니, 아닙니다. 강준형은.”
당황해서 말을 막아 놓고 그에게 강준형과 있었던 일을 말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말을 하기로 결심하면 그놈이 만나는 조건으로 계약서를 주기로 제안했다는 것과 나를 조금이나마 건드렸다는 사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텐데. 내 실패와 자존심 때문에 염치없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게 미안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강준형을 돈으로 매수해 보려 했는데 이미 실패했습니다. 아마 그 남자 쪽은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일단 그 계약서에 명시된 문서를 어느 선까지 열람 가능한지 먼저 알아봐야겠군요. 자료명도 모르는데 차남 쪽을 건드리지 않는 조건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시간은 정확한 자료만 얻을 수 있다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습니다. 물론 금액도요.”
―그냥 신께서 손에 넣으셨을 때 집안에서 빼돌리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본가에 아직 선대 가주님의 복속이 풀리지 않은 연락 가능한 자가 몇 명 남아 있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동생에게 또 내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요. 가솔들도 대부분 기하에게 복속된 상태일 텐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고요. 그리고…….”
―예.
“혹시라도 그 아이가 알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말을 흐리자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수긍한다. 한두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동생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원승호는 몇 년 전에 이미 호되게 겪은 바 있었다.
―해 보겠습니다. 일단 K그룹 쪽을 파 보고 무언가 건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감사합니다. 매번 신세를 지는군요.”
―신세라뇨. 이게 제가 할 일인걸요.
“그리고…… 죄송합니다. 고집 피워 일을 어렵게 만들어서.”
―아닙니다. 전대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저에겐 신경 쓰지 마시고 뭐든지 명령만 하시면 됩니다, 기현 님.
당신이 하고 싶으신 대로.
짧은 통화를 끝내고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휴대 전화를 한참 동안 귀에서 떼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원승호의 발언은 항상 전대로 시작해서 전대로 끝났다. 그와 처음 만났던 그날에도.
전화번호가 쓰여 있던 페이지에 꽂아 둔, 사용하지 못한 비행기 표를 만지작거렸다.
* * *
‘정말 괜찮겠습니까?’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처음 만난 사내는 은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비행기 표를 내려다보는 나에게 몇 번이나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이게 정말 당신이 원하는 건지 잘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탁, 탁, 사내가 들고 있는 지팡이가 의자 끝을 치는 소리에 흠칫 고개를 들었지만 내 시선은 사내의 얼굴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의 여우 무늬 금각에 머물렀다. 그조차도 반짝였기 때문에 시선을 빼앗았을 뿐이라 또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원승호 씨, 아버지가…….’
입을 열며 메말라 표면이 터져 버린 입술을 짓씹었더니 또다시 찢어졌는지 콧속에 희미하게 혈 향이 밀려왔다.
‘정말로 절 보내라고 하셨단 말입니까?’
목소리에 울분이 섞이지 않도록 애쓰며 말하자 사내가 철제 의자를 주욱 끌어당겨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흔들리는 시선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이경헌을 연상케 만드는 얼굴이었다. 짙은 눈썹에 포마드형으로 쓸어 올린 머리를 하고 있는 사내는 보석 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마치 내 눈을 들여다보는 듯한 이상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예. 도련님이 현실에 순응하고 살아간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에…… 만약에 참지 못하고 저를 찾아오게 된다면 준비한 대로 나라 밖으로 보내드리라고 했습니다.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말입니다.’
고작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은 몇 년밖에 안 되는데. 그마저도 유폐된 탓에 얼굴을 본 시간을 합치면 몇 개월이나 될지 모르는데도 아버지가 내 미래를 알고 준비해 뒀다는 게 기가 막혔다. 과연 여우 신이었다.
그리고 엊그제 가솔들은 갓 성인이 된 나에게 이제 아예 제물이 될 것을 요구했다. 인간으로 살던 생활을 전부 접고 아버지의 뱀처럼 신이 필요할 때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인형이 되라고.
예로부터 제물은 신을 미치게 만든다. 내가 있어서 그가 광인이 된다면 내가 스스로 죽든지, 떠나는 수밖에 없다. 전자는 이미 시도해봤고 그 결과 낙인 같은 문신만이 남았다. 아이가 나한테 미쳐 있다는 걸 그로써 훌륭하게 증명한 셈이었다. 그러니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떠나지 않을 순 없을까요?’
떠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요?
내 결정이 옳은지 물어볼 수 있는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집안 어른들에게는 죽어도 꺼낼 수 없는 말이었고 학교 선생님들 역시 집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을 붙잡고 내 얘기를 했다가는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게 틀림없었고.
나는 사회 속에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몰래 내 외투 속에 원승호의 연락처를 넣어 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용인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고민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색이 바래 썩어 들어갔을 것이다.
‘저같이 미천한 것의 말이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뿜던 원승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내 얼굴을 훑더니 곧장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고는 밖을 내다보았다.
‘전대 신께서 하시고자 했던 일은 언제나 옳았습니다. 당신은 떠나셔야 할 겁니다. 실제로 지금도 그분이 예견한 대로 저에게 오시지 않았습니까. 떠나게 되는 일도 필연적으로 안배되어 있는 미래겠지요.’
필연. 그리고 안배된 미래.
‘……그래요.’
지긋지긋했다. 어째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된 것을 그대로 밟아 가야 한단 말인가. 손바닥 위 꼭두각시처럼.
하지만 운명에 저항하기에는 나는 어릴 때부터 너무도 지쳐 있었고 항쟁할 의지는 진작에 잃은 상태였다. 그저 다 내려놓고 쉬고 싶었다.
‘……갈게요.’
손안의 여권을 꽉 움켜쥐었다. 기하의 얼굴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가겠습니다.’
* * *
‘왜 그러신 겁니까. 형님.’
겨우 보름.
‘왜 제게 또 이렇게 잔인한 일을 하신 겁니까?’
도망에 성공한 건 일 년도 아니고 하다못해 한 달도 아닌 겨우 보름뿐이었다.
‘왜 그랬어요. 이렇게 다 놔두고 도망을 가다니…… 제가 그렇게 무서웠습니까?’
‘…….’
‘끔찍했어요? 내가 준 것들은 더러워서 가지고 갈 필요도 없었습니까?’
삼 년 전의 악몽이 다시 재현되었다.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양쪽에서 남자들의 감시를 받으며 동생 앞으로 끌려갔다. 본당 마당에 집결한 수백 명의 혈족과 고용인들이 나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다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시선에 압살당하는 느낌이었다. 만약 내 앞에 동생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그러했을 것이다.
본당 바로 앞에 다다라 남자들이 내 뒤로 몸을 물리자 나에게 향했던 시선들이 전부 계단 위로 쏠렸다. 살기와 악의가 가득하던 공기의 흐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숙연하게 가라앉는다. 아니, 그건 눈가림일 뿐이고 오히려 그 모든 극렬했던 것들이 응축되어 한 점에서 매몰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 나의 동생에게로.
아무도 내 머리를 잡아 바닥에 짓누르고 있지 않은데도 나는 끔찍하고 혐오스러워 목을 떨군 채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준비한 도망이었는데, 어떤 마음을 먹고 집을 떠난 거였는데, 무의미하게 붙들려 버린 게 분하고 억울해서 눈을 들 수가 없었다.
보름 전.
내 도주는 성공하는 것 같았다. 일족들이 나를 기하의 인형으로 만들기 위해서 고맙게도 열흘의 유예 기간을 주었으니까. 그토록 발버둥 치고 저항하던 내가 결국 백기를 들고 신의 밑으로 기어들어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일족들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열흘 동안의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물론 열흘씩이나 필요치 않았다. 나는 다음 날 바로 탈출했으니까.
원승호의 조언대로 집안에서 나에게 주었던 모든 특혜를 전부 얌전히 벗어 두고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어제부터 기하의 얼굴은 보지 않은 상태였다. 기하는 나에게 역린이었다. 결심한 것이 무색하게 아이가 몇 마디 약한 소리를 흘린다면 틀림없이 흔들릴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은 봐야 했을 얼굴조차도 포기했다.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평소에 집안에서 붙여 줬던 감시인도 내 외출에 동행시켰다.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이 없다는 핑계였다. 그렇게 별다를 것 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원승호와 약속한 서점에 들어가 의도했던 대로 책을 고르는 척을 하며 감시인에게 원하는 책 이름이 쓰인 메모를 준 뒤 데스크에 가 위치를 물어봐 달라 부탁했다.
멀티플렉스 건물 안의 서점이라 사람이 많은데다가 데스크까지의 거리가 적어도 이십 미터는 넘었기 때문에 망설이는 기색이었지만 짐 때문에라도 어디 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결국 내 말을 따랐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데스크에 도착해 서점 직원에게 메모를 건네고 얼른 나를 돌아보았다. 책장을 들여다보는 척을 하고 있자 서점 직원이 죄송한 듯 고개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감시인을 부르는 게 보였다. ……지금이었다.
사실 남자에게 건네줬던 메모는 휘갈겨진 고어가 써져 있는 상태였다. 책 제목인 건 맞았으나 전문 서적인데다 흘려 써 놓은 고어를 아르바이트생으로 추정되는 직원이 쉽게 읽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예로부터 모든 고용인들이 고어를 익히게 만드는 우리 가문의 규율상 감시인은 글씨를 알아볼 수 있었다.
데스크로 걸어갔음에도 내가 도망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감시인은 빨리 내게 돌아오기 위해 직원을 붙들고 종이에 쓰인 고어를 한 자 한 자 읊어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며 뛰지 않고도 나는 서점을 몰래 나올 수 있었고 바로 서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원승호와 자연스럽게 합류한 뒤 외투를 바꿔 입고 순식간에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게 보름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지체해 봤자 붙들릴 확률만 높아진다고 생각했던 우리는 그날 바로 출국을 시도했지만 공교롭게도 가까운 공항에 내리기도 전에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입구마다 일족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감시하고 있었다. 어떤 출입구를 찾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리다 못해 공항 앞 입구마다 수상한 사람들이 있다는 제보 전화도 하면서 돌파할 구멍을 찾아봤지만 어떤 외압을 가했는지 공항 측에서는 전혀 문제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왜 전대께서 후대 신을 그토록 경계했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하고 중얼거리며 결국 원승호는 차를 돌렸다.
그 뒤로는 계속 똑같았다. 비행기, 배, 기차. 나라를 떠날 수 있는 그 어떤 수단도 내게는 뚫려 있지 않았다.
시도도 못 해 본 채 계속해서 도주를 저지당했고 우리는 아무것도 못 한 채로 발이 묶였다. 한번 또 한 번, 도주를 실패해서 다시 아지트에 틀어박힐수록 나는 심각하게 겁에 질리고 예민해졌으며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손톱을 물어뜯는다든지 입술을 짓씹는다든지 손목을 피가 날 때까지 긁는 등의 나쁜 습관은 전부 이때를 기점으로 발발한 거였다.
그리고 열흘간 방 안에 갇히다시피 머무르면서 기하의 계승식 날 일족들에게 붙잡혔던 끔찍한 악몽을 반복해서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는 매번 이경헌이 도망가는 내 팔을 잡아채었고 나는 울면서 저항하고 비명을 지르다가 강제로 일어났다. 숙면을 취하지 못해 눈가가 거뭇해지는 걸 본 원승호가 수면제를 권할 정도로 내 정신 상태는 그 며칠 만에 한계를 향해 급속도로 치닫고 있었다.
‘신이 거의 미쳤다고 하더군요.’
모든 음식물을 거부하고 있는 내 앞에 프랜차이즈의 죽 봉투를 내려놓으며 원승호가 흘러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힘없이 다시 떨어뜨렸다. 버리고 도망가 놓고 아이의 무사함을 바랐을 정도로 나는 뻔뻔하지 않았다.
‘집안이 열흘 만에 아주 쑥대밭이 된 모양입니다. 신이 무너지니 그분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복속인들이 혹여라도 재앙이 닥칠까 봐 아주 눈에 불을 켜고 도련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제물을 잡아 처벌을 내리기 위해서라도 죽지 않고 살겠지. 나를 따랐던 만큼 배신감이 클 테고 원망하고 증오하겠지만 광인이 되는 꼴을 보는 것보다는 그 증오감에 기대 살아 있기를 바라는 게 나을 것이다.
이기적이고 교만한 생각임을 알지만 그 당시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아둔하고 얕은 생각이었던지…….
「이지헌이 일생 동안 옷깃이라도 스쳤던 모든 사람들을 추적해라.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전부.」
이게 동생이 혈족을 포함한 가솔들을 모아 놓고 진음으로 내린 명령이었다. 평음이 아닌 진음으로 내려진 명령은 귀로 들어오는 명령이 아니라 뇌에 직접적으로 각인되는 명령이라 피지배자가 명령을 수행하여 해소되던지, 지배자가 해지하지 않는 한은 죽을 때까지 따르게 되어 있다.
그걸 수백 명의 일족들에게 모조리 내렸다고 했다. 직접 명령을 받은 중추 인원만 그 정도였으니 그들이 또 밑에 부리는 자들까지 포함한다면……. 보름 만에 붙잡힌 것은 나름 성공적인 도주였다고 봐야 될 정도였다.
원승호는 우리 가문 내에서는 이미 죽은 자였다. 사내가 아버지를 모시던 자 중 가장 내밀한 일을 맡아 했던지라, 그의 정체를 아무도 알 수 없도록 죽은 사람으로 위장시켜 가문 밖으로 빼돌렸다고 했는데도 용케 원승호에게 도달한 뒤 무섭게 추적해서 급습했다.
그건 전대인 아버지의 능력을 후대인 기하가 이미 상회했다는 뜻이었다.
* * *
기하가 나를 향해 본당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자 등 뒤에 서 있던 수백의 일족들이 전부 몸을 낮춰 부복하며 그를 맞이했다. 그의 몸에서 나는 짙은 알코올 냄새가 맡아질 정도로 우리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물러나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그를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잠깐…… 그런데 알코올 냄새라고?
뺨에 닿는 꺼칠한 질감에 그제야 제대로 고개를 들어 기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동생의 몸 절반 이상이 붕대로 감겨 있었다는 것을.
‘…….’
아픈 적 한 번 없던 동생이었다. 고귀한 신체였기에 흔한 생채기 하나 나지 않게 관리해 다친 모습을 볼 수 없던 동생이었다. 그런데 지금 목과 손목과 얼핏 보이는 가슴팍이 전부 붕대로 감겨 있다. 한마디로 보이는 곳이 죄다 다쳐 있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냐고 나도 모르게 이성을 잃고 물어볼 뻔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던 그 말을 용케 내뱉지 못하고 불덩이를 넘기듯 가까스로 삼켰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겠는가. 신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게 감히 나 말고 누가 있다고.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뻔뻔하게 걱정하는 말이라도 나올까 봐 입술만 짓씹었다. 겨우 단 한 번. 동생의 얼굴을 바라본 것뿐이었는데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역할 정도로 알코올 냄새가 강해지며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내가 뿌리치기라도 할까 겁먹은 눈을 하고도 물러서지 않고 신중하게 뺨을 쓸어내린다. 벌써 두 번이나 동생을 버리고 도망갔으니 이번에는 아무리 다감한 동생이라도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전보다 더 깨질까 조심스러워하는 태도였다. 붉은 눈에서는 흔한 원망 한 조각 읽히지 않았다.
차라리 공개적으로 때리고 핍박하고 억압했으면, 그러면 속이라도 후련할 텐데.
계속 바라볼 수가 없어 다시 고개를 떨구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이제 나보다 훌쩍 키가 커지기 시작한 동생의 담담한 음성이 들렸다.
‘카드라도 가져가지 그러셨습니까. 카드가 불안했다면 쓸 수 있는 만큼 인출해서 가져가셔도 됐을 텐데. 형님께서 전부 다 놓고 간 걸 알았을 때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도망가려면 돈이 필요할 텐데, 수중에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지내려고 다 놔두고 가셨어요.’
동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복한 혈족들의 불만스러운 탄식이 본당 앞을 메웠다. 감히 신을 모욕하고 도망간 나에게 천벌을 내리기를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그가 보여 주는 태도는 내가 생각해도 상식 밖이었다. 그동안은 다른 일족들이 아주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어도 신이 벌을 내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기에 더 그랬다. 내가 제물이라서, 아끼는 혈연관계라서 그렇다고 보기에는 선대는 오히려 일족들에게 관대했으며 제물을 핍박했고, 혈연관계에 있는 자가 잘못을 저지르는 걸 더 엄하게 다스렸다. 동생의 태도는 혈족들의 눈으로 봤을 때 부조리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어떻게 내 얼굴 한 번 보지도 않고 도망가실 수가 있습니까, 형님……. 마지막으로 절 보지 않으셔도 상관없으셨습니까? 보러 오셨어도 저는 바보라서 도망가는 중인지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가엾게도 이렇게 수척해지셔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동생의 말을 잘랐다. 내 건방짐에 주변에서 듣고 있던 일족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잡아 오라고 시킨 건 너잖아. ……그러니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해.’
나는 도망치려 했고 너는 잡으려 했다. 그리고 나는 패배했다. 그게 다였다. 지금처럼 마음에 와닿지도 않는 위로를 할 필요도, 회유하느라 구구절절 애쓸 필요도 없다. 우리는 보름 동안 적이었다. 패배한 내게 승리한 그가 벌을 내리면 그만이었다.
‘벌을…… 내려 줘. 내가 규율을 어기고 너를 기만했잖아.’
내가 딱딱하게 말하자 어깨를 쓰다듬고 있던 동생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맨 앞에 엎드려 있던 남자의 입에서 ‘벌을 내리십시오!’ 하는 외침이 흘러나오는 것을 시작으로 본당 내에 엎드려 있는 일족들에게서도 저주같이 똑같은 말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벌을 내리십시오! 벌을 내리십시오! 벌을 내리십시오! 벌을 내리십시오! 벌을 내리십시오!
귀가 터져나갈 것 같은 고함과 분노가 무력한 내 몸 위로 쏟아졌다. 아직도 꿈에서 깨지 않은 것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악몽 속을 헤매는 것 같다.
동생이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이때다 싶었는지 일족들의 성토가 드높아졌다. 이번에야말로 제물을 단단히 벌해야 합니다! 어디 감히 제물이 신을 버리고 떠난단 말입니까! 저 방자한 것의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저것을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틀림없이 우리 집안에 화를 불러올 겁니다!
귀가 아팠다. 시끄러웠다. 굳이 저렇게 상기시키지 않아도 나도 내가 불길한 존재임을 안다. 그래서 꺼져 주려고 한 거잖아.
수없이 쏟아지는 지탄과 모멸의 시선을 견디며 동생이 내릴 벌을 기다리자 묵묵히 내 눈을 들여다보던 그가 결국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벌을 내리겠습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능력을 펼친 것처럼 순식간에 본당의 모든 소리가 잦아들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의 입에서 떨어질 말을 기대하는데 기하가 굳혔던 표정을 천천히 풀면서 나를 보고 온화하게 웃었다. 아이의 눈에 하다못해 실망이라도 떠오르길 기다렸던 나는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불안했다.
동생은 아주 천천히, 아무도 못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하게 말했다.
‘일생 동안 내 곁에 있어요. 그게 내가 내리는 벌입니다.’
‘……신이시여!’
‘여우 신님…… 그게 무슨……!’
설마 그게 끝인가 싶어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정말 그게 다였다. 아이가 나에게 내리는 벌은 그게 전부.
납득하지 못하는 일족들이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가 왜인지 다들 더 이상 항의하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몸을 떨었다.
나도 처박고 싶었다. 미칠 것 같았다. 내가 바라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잔인하게 동생을 버린 만큼 그 역시 하다못해 내게 잔인한 짓을 해 주길 바랐다. 그래야 내 마음속에 들끓는 이 미칠 것 같은 분노와 혐오와 고통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악의를 잠재울 수 없다면 너도 나에게 그러길 바랐다.
‘그렇겐…… 못 해. 나는 또 도망갈 거야. 나는, 나는 이렇게는…… 못 살아.’
그러니까 다른 벌을 내려 줘. 제발.
비굴하게 다른 벌을 청하고 그를 상처 입히면서 눈시울이 붉어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 옆에 있고 싶다는 말을 하는 동생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도저히 똑같이 받아들일 수가 없어진 내가 너무 불쌍해서. 네가 너무 불쌍해서.
‘그러십시오.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거 아닙니까.’
다음번에 도망가실 땐 제가 드린 것도 다 챙겨 가시고, 제 얼굴도 보고 가시라고.
관대하게 말하며 아이는 화사하게 웃었다. 나는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기운도 없어 힘이 풀렸다. 무너지는 내 몸을 기다렸다는 듯 동생의 팔이 감아올렸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내 체취를 확인이라도 하듯 크게 들이켜 마시고는 만족했는지 나지막하게 웃는다. 내내 담담한 태도를 보였던 동생이 오늘 처음으로 내보인 승리자의 여유였다.
‘이제 아셨겠지만 저는 앞으로도 형님을 벌할 생각도 없고 놓아줄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해 보십시오. 도망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밀어내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그게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
그러지 마. 제발.
결국 견디지 못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백치라도 된 것처럼 수백의 일족들 앞에서 동생의 품에 안겨 울었다. 아무도 나를 달래 줄 생각을 하지 않는 자들 앞에서 계속해서.
그리고 유일하게 나를 달래 주는 남자가 다정하게 선언했다.
‘형님께서는 제게서 결코 도망가지 못하십니다.’
* * *
차를 타면 본가와 십 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 내 레지던스가 있었다. 연구소도 본가와 불과 삼십 분 거리도 되지 않았다. 여우 신이 거주하는 본가를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린다면 내 모든 행동반경은 다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큰 원 안을 우물이라고 본다면 나는 계속해서 우물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거였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와서 굳이 그 원 안에서 나갈 생각을 하진 않았다. 아주 가끔…… 아니 사실은 자주 충동적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품긴 하지만 도망쳤을 때마다 어떻게 됐었는지 알기에 그런 마음을 접은 지 오래되었다. 아예 모든 걸 버리고 국외로 가는 게 아닌 이상 국내에서는 딱히 동생에게 걱정을 끼쳐 가면서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정확히 말해선 ‘혼자’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일주일에 이틀, 아니면 삼 일 정도 본가에 체류하고 남은 날은 레지던스로 돌아와서 연구소에 출근한다. 그리고 다시 레지던스로 퇴근한다. 중간에 웬만해선 다른 곳에 들르지도 않았다. 이런 쳇바퀴를 도는 듯한 생활이 나도 이제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남들 다 하는 문화생활도 해 본 적 없다. 동생이 할 수 없는 건 나도 굳이 하지 않았다. 영화관에 가 신작 영화를 본다든지, 뮤지컬을 보러 간다든지, 여행을 떠난다든지 하는 사치는 고등학생 때 이후론 전부 중단했다. 하다못해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 본 경험도 거의 없었다. 필요한 건 전부 동생 편에서 고용인들이 해결해 줬고 갖고 싶은 것도 책 같은 걸 제외하곤 딱히 없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사회성이 떨어지고 타인과 벽이 생겨 지인이 생길 수가 없었다.
대학교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동기들의 평가도 음침하다거나 아웃사이더라는 게 대부분이었고.
레지던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건물 관리인에게 인사하며 키를 맡겼다. 남자 몇 명이 무장한 채로 나를 보며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무슨 일이 일어난 적도 없는데 일 년 열두 달 방탄조끼에 실탄일 게 분명한 총을 차고 있는 그들을 볼 때마다 실소가 나왔다. 어느 레지던스가 무장한 건물 관리인을 두냐고. 이거 법에 저촉되는 거 아냐?
“조금 늦으셨습니다.”
건물 홀에 들어가자 대기하던 조정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 왔다. 대학교 때부터 줄곧 나를 경호하던 남자여서 그나마 나와 제일 오래 알고 지낸 자였다. 그때 나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려줬던 남자이기도 했다.
“오다가 샀어요. 같이 나눠 드세요.”
점심을 못 먹은 태영에게 미안해져서 가게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그런 김에 관리인들 생각이 나서 그들 것도 샀고.
내가 내민 커다란 도넛 박스를 건네받자마자 뒤의 고용인에게 넘기며 남자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시간 쓰시지 마시고 아랫것들에게 시키십시오.”
항상 그런 식으로 대꾸하는 남자에게 지쳐서 이제 그가 그런 반응을 보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거주하고 있는 층을 눌렀다. 실질적으로 이 건물에서 주거 목적으로 살고 있는 건 나 하나일 거다. 평범한 입주인은 내가 이곳에 이사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대리석이 깔린 복도 앞에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이 인사해 온다. 그에게도 작은 박스를 건네주며 집 안에 들어섰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해서 고용인들은 항상 내가 오기 전에 청소 및 집안일을 다 해 두고 나갔다. 비쳐 보일 것처럼 반짝거리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구두를 벗어 두고 거실로 올라섰다.
기하가 대단히 깔끔한 편이라면 난 꽤 더러운 편에 속했다. 이렇게 인간미 없을 정도로 청결한 집 안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매일매일 양껏 어질렀고, 다음 날 출근했다 돌아와 보면 또 항상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실망하곤 했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열심히 영역 표시라도 하듯 더럽혔다.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 방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일랜드 식탁 위에 내일 태영에게 갖다줄 도넛 박스를 올려 두고 목을 감싸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빨래 바구니 쪽으로 던졌다. 양말도, 재킷도, 바지도, 속옷까지 마치 족적을 남기듯 욕실로 들어가는 길목에 벗어 던진 후 알몸으로 샤워 부스에 들어가 온수 버튼을 눌렀다.
물기 하나 없이 닦인 욕실도 실컷 어지럽히며 뜨거운 물로 한참 동안 샤워를 했다. 욕실은 다 좋은데 욕조가 없었다. 워낙 뜨거운 물을 좋아하는 내가 몇 번 온수에 몸을 담근 채로 쉬다가 정신을 잃었던 것을 전해 들은 기하가 각 욕실에 있는 욕조를 전부 뜯어내게 명령했다. 덕분에 본가에서도 기하가 쓰는 욕실에만 욕조가 남아 있었다.
샤워기 버튼을 내리고 대충 물을 닦은 뒤 알몸 위에 샤워 가운만 걸쳤다. 덜 닦인 몸에서 물이 뚝뚝 흘렀지만 신경 쓰지 않고 거실이고 방이고 열심히 쏘다녔다. 내가 밟고 지나가는 곳마다 물 발자국이 투명하게 남았다. 저녁 시간이 조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식탁에는 온기가 느껴지는 바로 먹을 수 있는 찌개와 반찬이 정갈하게 담겨서 보자기로 씌워져 있었다. 무시하며 찬장을 열고 라면을 꺼냈다. 물을 올리기도 귀찮아 그냥 뜯어 생라면째로 씹으며 아이스크림 통을 가슴에 안고 거실로 나왔다. 내가 집에 온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이제야 좀 사람이 사는 집 같았다. 족히 두 명 이상은 사는…….
소파에 털썩 앉아 리모컨으로 아무 채널이나 막 돌렸다. 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 영상이 나와서 고정한 뒤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감상했다. 볼륨을 최대치로 올리자 넓은 거실에 쩌렁쩌렁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문득 고양이를 키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고용인이 있는 건 싫지만 고양이가 마중 나오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녀석은 양껏 어지르기도 잘할 테고.
하지만 그 녀석도 일생의 절반 이상을 혼자 있겠구나.
혼자 있게 될 녀석이 안쓰러워 바로 생각을 접었다. 주말에는 본가에 같이 데려간다고 해도 직장에 데려갈 순 없으니 우리가 친해지기 전에 녀석은 기다림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강아지와는 달리 독립적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이 큰 집 안에 혼자 남겨지면 동물도 견디지 못하고 나처럼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이 되겠지.
씁쓸한 생각을 뒤로하고 아이스크림 통을 앞의 테이블에 내려 둔 채 팽개쳤던 가방을 가져왔다. 앞쪽에서 평소에 사용하는 휴대 전화를 꺼내고 특별할 때를 제외하고는 쓰지 않는 다른 휴대 전화도 꺼냈다. 원승호나 다른 흥신소와 연락했던 단말기였다. 꺼 뒀던 전원을 다시 켜면서 혹시나 메일이 온 게 없을까 기대했지만 전원이 들어오고 나서도 밀렸던 메일 알림이나 부재중 통화 알림이 오는 일은 없었다. 살짝 실망한 상태로 소파에 길게 늘어졌다.
다시 옆에 던져두고 이번에는 일반적인 연락을 받을 때 쓰는 휴대 전화를 켜 보았다. 이 전화기 역시 아무런 연락이 와 있지 않았다. 사적인 연락을 할 수 있는 상대는 겨우 두세 명뿐. 그마저도 내가 웬만해선 연락하지 말라고 단단히 을러 두어 중요한 일이 아니면 연락 오는 일이 없었다. 내가 기다리는 연락은…….
틀어 둔 예능 프로에서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숨이 넘어갈 듯 웃어 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계속해서 귀를 때렸다.
최대치로 볼륨을 키워 둔 덕분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지만 보고 싶은 기분도, 웃을 기분도 아니라 시선을 돌려 버렸다.
뭐가 저렇게 웃길까. 뭐가 저렇게 재미있을까. 왜 저 사람들은 저리도 행복해 보일까.
다른 손에 리모컨을 들고 계속해서 채널을 돌려 보았다. 여기도 예능 프로, 저기도 예능 프로, 아니면 뉴스, 영화, 또 뉴스, 미국 드라마, 케이블 채널, 홈 쇼핑 방송, 영화, 교양 방송.
가장 시끄럽고 큰 소리가 나는 건 역시 예능 프로였다. 결국 아까 전에 틀었던 채널로 다시 돌아간 뒤 전화를 손에 든 채로 소파 위에 길게 누워 숨을 골랐다. 깔깔거리는 TV 속 웃음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가 다시 휴대 전화 액정을 켜 보았다. 역시 아무런 연락도 와 있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연락처를 눌러 스크롤을 조금씩 내렸다. 내 나이 또래 성인 남자라면 연락처에 등록된 번호가 몇백은 족히 되겠지만 나는 웬만해선 연락처를 저장하지 않았고, 내 번호를 알려 주는 일도 극히 드물었기에 직장 동료 몇 명과 직장이나 본가의 직통 전화번호 몇 개 외엔 연락처가 비어 있었다. 그래서 원하는 번호를 찾는 데에는 검색을 할 필요도 없었다.
‘동생’이라고 등록되어 있는 번호가 뜨자 습관적으로 손가락이 멈췄다. 기하의 번호였다. 내가 휴대 전화를 사자마자 제일 먼저 등록한 번호이기도 했고…….
내가 유일하게 외우고 있는 번호이기도 했다.
―삐…….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몇천 번은 들었을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지금 거신…….
―삐――.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삐―――.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숨죽이고 몇 차례나 다시 번호를 눌러 안내 멘트를 들으며 고개를 떨궜다. 어리석고 무의미한 짓이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동생이 계승하고 변했던 그날 이후로 나는 새 동생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내 휴대 전화에 저장하고 있는 번호는 오직 동생의 옛날 번호뿐이었다. 그 아이가 아직 나에게 아이로 여겨졌을 때의 번호를.
내 이런 이상한 고집도 동생은 받아들여 주고 그 뒤로는 먼저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마음인진 모르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듯, 바뀐 번호로 연락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고 다시 자신의 예전 번호로 변경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껏 십 년이 지났음에도 이 번호는 공석이었다. 덕분에 내가 원하는 때 언제든 이 번호로 전화를 걸 수 있었다.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기다리는 답신은 결코 돌아오지 않겠지만.
―삐…….
―지금 거신…….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는 전화기를 가슴 위에 올려 두고 눈을 감았다. 눈가가 뜨거웠다. 심장이 달음박질쳤다. 이제 곧 조금만 참으면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도 있는데, 참을성 없는 마음이 몸을 뒤흔들고 있었다. 아직 그 원하던 것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담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문서에 불과한지 검증되지 않은 상태인데도 그랬다.
만약 거기에 정말 저주를 푸는 방법이 쓰여 있어서 내가 하려는 일이 전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그래서 동생이 저주를 벗고 제정신을 차리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 해도 막연하게 행복해지기만 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우리 가문은 여우 신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집안이었다. 선대 여우 신들이 스러져 갈 때마다 집안에 닥쳤던 액운을 생각한다면 내가 하려는 일이 멸문을 가지고 올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 문서들을 전부 태우고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내 안에 새파랗게 남아 있는 여우 신을 향한 극렬한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기하에게 솟아나는 애정은 어찌 보면 내 몸에도 흐르는 나쁜 피의 생존 본능에 비롯된 것일지도.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어차피 기하는 죽음을 향해 착실하게 걸음을 내딛고 있어 보였으니까.
아직도 거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예능 패널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늘어뜨리고 소파에 파고들었다. 드러난 살갗이 차가웠지만 이 집에는 날 안아 줄 사람이 없었다. 걱정해 줄 사람도.
가죽 소파의 차가운 표면에 뺨을 비비며 나는 천천히 잠이 들었다.
* * *
내가 없으면 망가지는 모습을 기대하며 길들였지만 남자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부서지고 있었다. 이젠 굳이 뒤흔들지 않아도 스스로 정신을 갉아먹으며 바닥에 가라앉는다. 다리가 꺾였다고 날지 못하는 건 아닐 텐데 남자는 등 뒤에 날개가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날개가 있다고 알려 줄 순 없었다. 날아가느니 차라리 꺾이는 게 낫다. 잃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부서지더라도 곁에 둬야 했다. 아니 오히려 나 때문에 부서지고 있는 게 기꺼웠다.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형님은 아름다울 거다. 그리고 난 얼마든지 형님을 고칠 자신이 있다.
모니터 패널 한가득 비치는 형의 몸 선 위를 손가락으로 덧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소파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모습은 묘하게 동정심과 가학심을 불러일으켰다. 스피커에서 귀가 아플 정도의 TV 소리가 울렸지만 오히려 볼륨을 더 크게 올리고 귀를 기울였다. 이기현이 얼마나 볼륨을 올려 뒀는지 패널들의 웃음소리에 묻혀 그의 숨소리가 간신히 들렸다. 끊길 듯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릴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부풀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끌어안고 싶어 안달 내는 몸을 달래며 그가 깊게 잠이 들 때까지 한참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몸을 혹사시켜야 잠드는 나쁜 버릇이 생겨 버려 나한테 안기지 않는 날엔 종종 저렇게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음 속에서 잠드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다. 으스러지도록 꽉 안아 주고 싶기도, 나를 찾으며 울부짖을 때까지 손 놓고 지켜보고도 싶다. 나에게 먼저 매달려 주기만 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안쓰러워서, 날 지키고 싶어서 남아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머저리도, 병신도 되어 줄 수 있어. 너를 묶을 수만 있다면 죄책감이든 동정심이든 뭐든 좋으니까. 도저히 두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불쌍하고 가여운 남자가 되어 줄게.
그가 몸을 몇 번 뒤치며 고개를 떨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하게 잠이 들어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TV 소리와 섞여 들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휴대 전화를 집어 들어 단축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가자마자 전화가 걸리며 대기하고 있던 상대방이 바로 입을 열었다.
-예. 가주님.
“조정구.”
-예. 말씀하십시오.
감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들렸다. 조정구는 어릴 때부터 나를 섬겼던 남자이자 내가 이기현에게 붙여 줬던 경호원이었다. 그를 선택해 경호를 맡긴 이유는 그가 감정이 거세된 체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기현이 무슨 소리를 하고 무슨 행동을 하든 그는 형님에게 매료될 리가 없었기에 믿고 이기현의 곁에 붙여 주었다.
“잠들었으니 침대에 눕혀.”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구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깨지 않도록 천천히 이기현의 곁에 다가가는 게 비쳐지자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언제나 지금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무방비한 기현의 곁에 누군가가 다가간다는 게, 불가피하게 신체 접촉을 허락해야 한다는 게 참을 수 없다. 내가 내릴 수 있는 명령 중에 가장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조정구가 기현의 맨살이 닿지 않도록 신중하게 팔로 안은 뒤 들어 올리는 장면을 빠짐없이 지켜보며 초조해지는 기분에 이를 악물었다. 본능적으로 뜨거운 체온을 기꺼워하는 기현이 조정구의 품에 얼굴을 파묻자 손등에 파랗게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의식 없이 하는 행동인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눈앞이 새빨갛게 변한다. 추악한 질투는 너무도 손쉽게 내 몸을 지배하며 마음을 뒤흔들었다. 기현이 그리워하며 상상하는 존재는 나일 게 뻔한데도 단지 내 명령으로 그를 안고 있는 조정구를 질투했다.
지금 당장 모든 걸 내려 두고 형에게 달려가 내 손으로, 내 팔로 안고 싶다. 추위에 약해 금세 차가워졌을 피부를 내 체온으로 달구고 싶다. 언제나 그랬듯 내 참을성과 인내심은 단 몇 분도 발휘되지 않을 정도로 알량한 것이었다.
내 이런 모습을 뻔히 알고 있는 조정구는 현명하게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이기현을 침대 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단 한 번의 헛손질도, 애정이 느껴지는 제스처도 존재하지 않는 동작이었다.
조정구가 방 안의 온도계를 맞추더니 취침 등을 제외한 나머지 등을 모두 끄고 카메라 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고 들어왔을 때처럼 인기척 없이 방문을 닫고 나간다.
남자가 사라지고 기현만 남아 있는 방 안을 몇 분이고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실내등만 켜져 있어 흐릿한 실루엣이었지만 내 눈에는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수천, 수만 번 넘게 들여다봤던 얼굴이라 불빛 하나 없이도 떠올릴 수 있다.
“…….”
아까와는 다르게 TV 소리가 들리지 않아 형이 내뱉는 단 한숨 소리가 소음 없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귀에 들릴 것 같이 폭발하듯 뛰던 내 심장도 어느샌가 평화로워져 있었다.
볼륨을 최대로 높이며 나도 취침 등을 제외한 모든 전등을 내리고 모니터 앞의 소파에 걸터앉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고요한 방 안에 그의 달콤한 숨소리만 채워져 눈을 감으며 그 소리에 안겼다. 이제 나도 쉴 시간이었다.
“……잘 자요. 형님.”
부디 좋은 꿈 꾸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