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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탁……, 탁……, 탁…….
간간히 삐익 하는 기계음만이 들리는 커다란 방 안에 일정한 간격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굳히고 있었다. 차라리 비명 소리가,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풍스러운 한옥의 구조물과는 대조적이게 사방이 새하얀 대리석으로 둘러진 룸 안은 살풍경하게 최신식 기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과 벽, 바닥까지 수십 개의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어 마치 전산실을 연상케 할 정도로 섬뜩하다. 모니터들은 각각 본가의 방 하나하나와 복도, 침실과 식당, 정원을 포함한 일체와 연구실과 데스크 위, 혹은 자동차 안의 모습 등을 담은 채 커다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 역력한, 아니 더 나아가 아예 사생활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빈틈없이 빽빽한 폐쇄회로 화면들이 주시하고 있는 광경은 전부 단 한 사람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바라보는 붉은 눈의 남자는 비스듬히 기대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리는 긴 손가락을 제외하고는 미동 하나 없이 중앙의 큰 화면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것 같은 기계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남자에게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그 붉은 눈뿐이었다. 수십 개의 감정을 담은 일렁이는 눈동자가 화면들의 주인을 핥듯이 바라본다.
마침 화면 속에는 이기현이 창백한 얼굴로 강준형에게 통보를 내리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그럼 제 용건은 끝났으니 이만 끊겠습니다. 전화 받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이기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리기가 무섭게 방 안의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지옥문 바로 앞까지 걸어 들어갔다가 막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기 전에 구출된 사람들처럼 격렬한 안도감이 방 안을 훑고 지나간다. 흡사 이기현의 목소리가 감로수 한 방울이라도 되었던 듯 질식할 것 같던 방 안에 아슬아슬하게 호흡을 돌려주었다.
혹시라도 이기현이 강준형을 만나겠다고 대답했다면 그대로 이 방 안에 지옥도가 펼쳐졌을 거라는 데 동의 못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순진한 제물은 오늘 자신이 모르는 사이 본인의 목을 포함한 여러 사람의 목을 한계까지 졸랐다가 해방해 주었다는 걸 알기나 할까.
「당장.」
안도한 사람들의 등 뒤를 칼날 같은 목소리가 덮었다.
「이기현이 소유한 모든 계좌 추적해. 그 정도 금액을 소유하고 있다는데 어째서 아무도 모르고 있었는지 알아내.」
아까와는 다른 신음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평어가 아닌 굳이 뇌의 안쪽, 끝의 근원까지 두들기는 진음으로 내린 명령에 기계 앞에 앉은 사람들이 한순간 몸을 휘청거렸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면 속 이기현이 다시 손에 든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는 모습이 비쳤다. 고용인들은 한 번 더 숨을 멈췄으나 다행히도 이기현은 강준형과의 전화 통화에 질려 버린 기색이어서 두 번 다시 받지 않고 옆에 있는 박현진에게 휴대 전화를 넘겼다.
만족스럽지 못한 전화 때문인지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화면을 통해 보이는 그는 좀 더 창백하고 위태해 보여서 애처로운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실제의 그는 장신에 마른 근육이 빈틈없이 온몸을 덮고 있어 웬만한 성인 남자들보다 장골인데도 보는 사람마다 그를 유약하게 여기곤 했다. 드러난 목이나 손목 등에 붕대를 감고 밤새 울어 발갛게 된 눈가를 하고는 수십 개의 폐쇄 회로 화면들에 둘러싸여 있는 터라 더 그런 아찔한 인상을 주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변덕스러운 제물의 혀에 의해 몇 번이나 생사의 기로에 섰던 사람들도 그를 미워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가주님. 알아냈습니다.”
이기하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하는 고용인의 목소리에 진음으로 인해 짐승처럼 오그라들었던 사람들의 동공이 연쇄적으로 풀렸다. 떨리는 몸을 최대한 바닥에 바짝 엎드리며 그가 입을 열었다.
“기현 님 소유로 개설된 계좌가 아니라 그동안 걸러지지 못한 모양입니다. ……선대 가주님의 성함으로 된 차명 계좌가 있었습니다. 9년 전 딱 한 번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사용됐었고 그 이후 쭉 휴면 상태입니다.”
고용인이 나직하게 고하는 소리에 무표정했던 남자의 표정에 처음으로 실금이 갔다.
“……이지헌의?”
“…….”
“어떻게 그걸 지금껏 몰랐지?”
“……죄송합니다.”
“그 일을 처리했던 자들을 전부 불러들여.”
남자에게서 살의가 섞인 명령과는 대비되는,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남자의 웃음이 진짜 웃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은 또 목을 뻣뻣하게 굳혀야 했다. 몇 번이나 이지헌의 이름을 되뇌며 턱 끝을 만지며 웃던 남자가 뒤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하하……. 이지헌이 죽어서도 내 뒤통수를 치는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버지.”
“……죄송합니다.”
뒤에 서 있던 이경헌이 그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며칠 사이에 눈 밑이 거뭇해지고 마음고생이라도 한 듯 낯빛이 좋지 않았다. 강준형을 마크하던 고용인의 직속이 이경헌이었고 부하의 잘못으로 연좌제를 당했다는 걸 상황실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고용인들의 목에도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나마 이경헌은 가벼운 벌을 당했지만 강준형을 담당하던 그녀는 신의 천벌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9년 전이라면 도망가려다 잡혔던 그땐가 보군. 어쩐지 현금이며 카드며 전부 내려놓고 맨몸으로 도망갔다 싶더라니 믿는 구석이 있었어.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죽어서도 날 이렇게 몇 번이나 괴롭히다니…… 뭐라도 말 좀 해 보시죠. 이지헌이 대체 어디까지 꾸며 놓고 죽은 겁니까?”
“…….”
“당신 때문이니 말 좀 해 봐요.”
이기하의 입에서 나온 한탄 어린 비아냥에 이경헌의 낯이 새카맣게 변했다.
죽은 선대 가주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이경헌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마치 속죄하지 못한 오물덩어리를 끌어안고 있는 듯 부패해 갔고 그럴수록 더 절절히 이기하에게 매달렸다. 그를 섬겨야지만 자신의 죄가 삭감된다는 것처럼, 이기하의 옆에 있어야지만 호흡할 수 있는 사람처럼 집착했다.
“형님한테 쓸데없는 이미지를 몇 겹이나 쌓아 각인시키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나를 밀어내게 만들지를 않나, 한술 더 떠서 나 몰래 형님 앞에 차명 계좌까지 만들어 놔? ……진짜 곱게 죽게 놔둔 것이 후회되는군.”
제물에 대한 극렬한 혐오감―, 선대가 이기현에게 심은 각인의 씨앗은 이기하가 계승을 하자마자 발아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동생인 ‘이기하’에 대한 혐오가 없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이기현은 제물인 자신을 혐오하는 마음, 동생인 이기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장하면서 정신 상태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약을 쓰고 세뇌를 해도 제물에 대한 궁극적인 혐오를 지울 수는 없었다. 자신이 제물이 된 것을 원망하다 못해 하루가 멀다 하고 자학과 자해를 일삼으며 스스로를 좀먹었다.
스스로를 증오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날 미워하는 게 낫겠지.
이기현의 긍지가 올곧았기에, 고결했기에 차라리 망가지는 걸 기다리다 지친 이기하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가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 주고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대상도 만들어 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기현은 스스로 좀먹던 걸 멈추고 동생과 신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는 정상적인 생활도 사고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선대가 오판을 했듯 이기하 역시 커다란 오판을 했다. 사랑하라 만들어 준 동생의 캐릭터를 이기현은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해 버리고 대신 신에게 사랑도 증오도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동생의 상태일 때는 작은 스킨십마저 두려워할 정도로 제물에 대한 혐오와 근친에 대한 방어 기제를 동시에 내보였다.
‘기하야. 너는…… 안 돼.’
‘나는 더러워.’
형이라 부르며 손을 뻗으면 그는 곧바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살얼음같이 구성된 그의 정신 상태에 또다시 금이 갈까 봐 이기하는 그가 원하는 대로 연기해 주었다.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 괜찮을 거라 믿었던 세월이 이기하를 무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시험에 들게 했다. 산사람이 죽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딱 그 짝이었다.
“당신네가 배신하지만 않았더라도 일이 이렇게 귀찮아지진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이지헌에게 고발한 것 때문에 내가 언제까지 고통받아야 합니까?”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제가…… 제가 그때 여우 신에 미쳐 있었습니다. 진정한 주인을 몰라보고 있었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있는 이경헌을 내려다보았다. 이 물건이 아직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품평하며 무자비한 붉은 눈이 몇 번이나 이경헌의 머리 위에 머문다. 자신과 같은 자이기에, 형제를 탐하는 짐승이었기에 자비를 베푼 것이 슬슬 후회가 될 참이었다. 하지만 반면교사로써는 꽤나 훌륭했다.
저 남자와는 달리 나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훈련된 새는 철창문을 열어 두고 발을 묶지 않아도 날아가지 않는 법이다. 어쩌다 날아갔어도 결국 스스로 다시 갇히기 위해 제 발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렇게 이기현을 이십 년 이상 조용히 길들였다. 자신도 모르게 젖어 들어 서서히 침식당하도록.
십 년 전에는 강제로 몸을 열었다고 죽겠다 했던 소년이 이제는 내 손길이 닿기만 해도 흥분해 귓가를 발갛게 물들이고 다리를 벌렸다. 내 밑에서 이젠 너무 느껴서 죽을 것 같다고 신음한다. 나 이외엔 그 몸을 만질 수도 없게 결벽을 가르쳤고 굴종을 학습시켰다.
아버지가 형의 머리에 심어 놓은 각인 따위는 힘을 잃을 것이다. 내가 형의 몸 안에 더 강한 각인을 심으면 되니까. 내가 완전히 미친놈인 걸 깨달을 때쯤이면 절대로 날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을 것이다.
아랫도리가 뻐근해질 정도로 농밀한 상념에 빠졌던 귓가에 이기현이 감사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복속이긴 하지만 저번부터 과도하게 기현과 친해 보이는 그녀가 거슬리기 시작해 이기하의 미간에 주름이 패었다.
어릴 때부터 이기현의 주변을 관리해 왔던 탓인지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주변 인물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마음을 여는 순간 그 지인의 존재가 자신의 발목을 잡을 약점이 되어 버릴 것이라는 걸 몇 번의 경험 끝에 깨닫고는 속마음을 털어놓는 상대를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박현진의 방자함을 참아 주었다. 그녀는 경계심 많은 이기현의 속마음까지 내비치게 만들어 주는 인물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런 사실마저도 자신의 인내심을 점점 갉아먹는 걸 멈출 순 없었다. 저번에도 버젓이 둘의 친분을 과시하며 속닥거리는 모습에 이성을 잃고 해칠 뻔하지 않았는가.
“고용인들을 들여보내.”
“예.”
곧이어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놀란 이기현이 아무렇지 않은 척 얼굴을 가다듬는 게 비쳤다.
제 딴엔 표정 관리를 하는 걸 텐데 다 티가 나서 이기하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참으로 사랑스러운 생물체였다. 저렇게 순진해서 표정 하나 못 숨기는 주제에 누가 누굴 구하겠다고 저러는 건지.
“……이제 기현 님을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겁에 질렸던 이경헌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서야 이기하는 자신이 웃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거짓말하는 모습도 저리 예뻐 보이니 어떡합니까. 내가 져 줘야지. 나를 구하겠다고 저리 기특하게 구는데 등을 밀어 버릴 순 없잖습니까. 어차피 이제 저럴 기회도 없을 텐데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봐줄 생각입니다.”
얌전하게 있으라고 경고한 지 며칠이 되었다고 또다시 일을 벌이는 듯한 이기현을 보고 조마조마했건만, 오늘의 신은 그가 강준형을 단호한 태도로 자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모양이었다. 역시 제물에 한정해서 기가 막히게 약한 남자였다.
“그럼 이대로 그냥 보고 계실 겁니까?”
“스스로 흠을 내려 드는데 두고 볼 수만은 없지. 포기하는 법을 가르쳐야지.”
남자의 말을 이해한 이경헌이 어깨를 떨며 더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처럼 제물에게 아무리 네가 노력해도 돌파구가 없다는 것을 학습시키란 소리였다.
“그럼 그리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스피커에서 가주께서 어디 계시냐고 고용인에게 묻는 이기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리석고 순진하게도 세상에서 제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남자를 걱정하며 안부를 묻는다. 상황실의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볼 때마다 기가 막히는 심정이었다.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자신이 구하려고 발버둥 치는 동생이 자신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사실을. 빠져나갈 수 없는 촘촘한 새장을 발이 닿는 곳마다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이기현이 자료를 얻기 위해 접촉할 만한 모든 사람들을 먼저 확보해. 저번에 연결했었던 흥신소에 연락을 돌리고 사람을 심도록. 내 귀에 강준형과 내 연인이 다시 연락을 취했다는 소리가 다신 안 들려야 할 거다.”
* * *
박현진과 고용인들이 나가고 비로소 나는 혼자가 되었다. 몸이 나른했다. 뜨거운 물속에 한동안 푹 담그고 쉬면 이 피로가 한 방에 날아갈 것 같은데. 내 몸에서 정사의 흔적이 지워질 날이 없었으니 남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야 하는 온천 여행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사치였다. 뭐, 애초에 타인이 바글거리는 그런 곳에 간다고 하면 허락할 동생도 아니었지만.
발목에 붕대를 둘러놓는 바람에 양말을 신지 못한 맨발바닥이 제법 차가웠다. 스케줄 관리나 할까 싶어 소파에 길게 누워 휴대 전화 액정을 켰다. 요 며칠 일어났던 사건과 내가 앞으로 해결해야 될 일들을 시간대별로 떠올렸다.
최근에 구입했던 책도 다 보지 못했으니 그것도 도로 보러 가야 할 테고, 고서 열람 신청을 해 뒀던 도서관도 허가가 났는지 확인해 보러 가야 했다. 하지만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신세를 졌었던 흥신소부터 차례대로 연락을 돌리는 것이다.
KNG그룹에 조금이라도 줄을 댈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겠지. 그쪽 일가에서 내가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 설마 전부 다 강준형같이 빌어먹을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가문에 내려오는 고서에 접근 가능할 수준이면 비서실장이나 집사 정도의 권한을 가진 자를 만나면 될 것이고 어차피 강준형에게 제시했던 금액을 쓴다면 사본을 얻어 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울지도…….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자 갑자기 또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눌렀다.
왜 이러지. 아침만 해도 맑은 정신으로 깨었다고 좋아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초점을 맞추려 하자 도리어 지진이라도 난 듯이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이런 증상이 몰려들면 환각을 볼 확률이 높아져 떨리는 눈으로 휴대 전화의 화면만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써져 있지 않은 새하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검지로 천천히 액정을 두드렸다. 액정 화면에 ‘전화’, ‘강준형’이라는 단어 두 개만 써 둔 채 몇 분이나 끙끙거리며 기억을 다잡으려 애썼다. 오히려 떠올리려 노력하다 보니 더 머릿속에 혼탁하게 안개가 끼는 느낌이 들어 애초에 선명하게 기억하던 것들조차도 잡히지 않고 흩어지는 느낌이다.
하얀색 화면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꽃이 피는 것처럼 붉은색, 파란색, 초록색으로 시시각각 변했다. 경박하게 깜빡이는 속도에 맞춰 색이 변하는 속도도 빨라진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금이 가듯 화면에 커다랗게 검은 대각선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더 증세가 심해지는 걸 알고 있기에 흔들리는 시야를 못 본 척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리고 들어오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감색 셔츠와 검은 면바지를 입은 동생이었다. 그동안 흔들리고 있던 시야가 거짓말처럼 밝아지고 기하의 모습이 선명하게 동공에 맺혔다. 내 표정이 험악하기라도 했는지 나를 반갑게 바라보던 동생의 눈이 놀란 빛을 띠더니 더 들어오지 못하고 멈춰 섰다.
“……허락 없이 들어와 죄송합니다. 형님. 일하시는 데 방해가 되었나요?”
“아니. 아니야.”
고개를 크게 흔들어 방금 눈앞에 보이던 잔상을 흩트렸다. 천만다행으로 잔상은 물에 쓸려 가듯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그라졌다.
“어서 와. 일은 다 끝내고 돌아왔어?”
“예. 지금 막 다 끝냈습니다. 곁에 가도 되겠습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하의 표정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얼굴이 창백하신데요. 어디 불편하신가요?”
차마 환각을 봤다고 말할 순 없어서 그냥 웃고 말자 추워서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동생의 시선이 창문께로 향했다. 아직 바람이 차가워서 창문은 이미 닫아 놓은 상태였다. 내 몸을 한번 훑어보고는 신발장에 있는 실내화를 집어 들고 내가 앉아 있는 소파 근처로 걸어온다.
“여름이 코앞인데 아직도 날씨가 쌀쌀하죠? 형님은 추위를 많이 타시는데 걱정입니다.”
다가온 동생이 무릎을 꿇는 걸 멍하니 지켜보다가 시선이 아래로 향해서야 겨우 내가 멍청하게 계속 휴대 전화 화면을 켜 둔 채라는 걸 깨달았다.
하필 가독성도 짱짱하게 하얀 메모장에 까만 볼드체로 단 두 마디 쓰인 전화와 강준형이라는 단어. 눈썰미 좋은 동생이 못 봤을 리가 없지만 뒤늦게 허둥대며 전원을 껐다.
“…….”
못 본 건지 못 본 척을 하는 건지 동생의 표정은 아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지만 이런 식의 임기응변에 약했던 터라 사정없이 떨렸다. 생각해 보면 고작 그 두 단어를 써 놓았다고 해서 동생이 화를 낼 리가 없는데도 괜히 앞에 강준형과 전화했던 사실이 떠올라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중이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느라 정신 팔려 있는 동안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가지런히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신으라고 갖다준 줄 알고 신발을 꿰기 위해 발을 움직이자 그가 부드럽게 내 발목을 잡아 왔다.
“기하야.”
깜짝 놀라 튀는 내 발을 큰 손으로 덮어 온도를 확인하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어쩐지. 발이 차갑네요.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조심하시지 않고.”
“그러게. 그러니까 신발 좀.”
“일단 녹이고요. 발가락이 얼음 같습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차가운 발가락 위를 가만히 쥐어 들었다. 그의 체온이 뜨거운 편이긴 했지만 어지간히도 발이 얼어 있었는지 놀랄 만큼 따스한 온기가 감싸 왔다.
“바닥 밟아서 더러워. 그냥 탕에라도 들어갔다 올 테니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빼내려고 하니 좀 더 엄한 어조로 가만있으라고 어르고는 내 발 전체를 움켜쥐고 마사지를 시작했다. 덕분에 강준형에 대해 걱정하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내 머릿속에는 동생밖에 남지 않았다.
뜨거운 체온을 가진 커다란 손이 차가운 발 위를 완전히 덮고 은근하게 문질러 기분 좋은 느낌이 올라왔다. 몇 번 손길이 오가지 않았는데도 딱딱했던 몸이 삽시간에 풀어진다.
내가 금방 긴장을 풀고 동생의 손길에 몸을 늘어뜨리자 좋아하는 게 느껴졌는지 동생이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따뜻한 걸 좋아하시네요.”
“그럼. 좋아하지.”
좋아한다는 말에 주무르던 손길이 잠시 멈칫하더니 좀 전보다 더 강하게 문지르기 시작한다. 고개를 푹 숙인 동생의 귀가 조금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님을 뻔히 알 텐데도 듣고픈 대로 해석해서 들었을 마음이 느껴져 가슴 한구석이 쓰라렸다. 한동안 발목과 복숭아뼈를 쓸어내리며 부드럽게 마사지하더니 지나가는 말투로 속삭였다.
“일 년 내내 겨울이었으면 좋겠군요. 그런데 하필 곧 여름이라니.”
의미 없이 던졌던 시선을 내려 기하의 머리꼭지를 바라보았다.
“네가 겨울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겨울이 돼야 추워지니까요.”
“난 여름에도 밤공기는 춥던데.”
“……그럼 언제나 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기하가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너한테는 무슨 소릴 못 하겠네.”
내가 픽 웃자 고개를 들고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왜 이렇게 동생의 행동이 간질간질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손끝의 간질거림 때문에 나는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야 했다. 괜히 이상한 생각이 들기 전에 그만두라고 말해야 했지만 기분 좋은 느낌과 간만의 평화로움에 동생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디를 만져 줘야 내가 좋아하는지 뻔히 다 알고 있는 듯 뜨겁고 긴 손가락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훑고 오목하게 파인 부분을 아프지 않게 꾹 누르고 비빈다. 기하의 손끝이 닿는 부분마다 얼었던 피부가 달구어져서 나른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뜨거운 물속에 푹 잠기는 것처럼 의식이 떨어지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어젯밤에는 눈을 가린 채로 신에 의해 몇 번이나 이를 세워 물어뜯긴 부분을 오늘은 동생이 상냥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다는 게 야릇한 감각을 불러왔다. 같은 몸으로 한 사람은 고통을, 다른 한 사람은 열락을 주다니.
“그만. 이제 충분해.”
따뜻해진 발을 힘을 줘 빼내자 이번에는 막는 대신 내 다리를 끌어안고 무릎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기대 왔다. 그러고는 실크 바지의 표면에 얼굴을 묻고 느릿하게 얼굴을 비빈다. 윤기가 도는 새카만 머리칼을 보고 있자니 매끈하게 잘빠진 맹수가 발밑에서 애교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된다고 자각하기도 전에 내 손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 중이었다.
내 손길에 기하가 달콤하게 한숨을 내쉬며 허벅지에 뺨을 비볐다.
“어릴 때는 이렇게 자주 만져 주셨었는데.”
“요새도 그러잖아.”
“요새는 제가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한번 손대는 것도 조심스러워하시죠. 예전엔 그토록 귀여워해 주셨으면서.”
쓴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지. 아직 어린, 개화시켜서는 안 되는 꽃봉오리를 강제로 뜯어 속살을 드러내게 만들었다는 듯 너는 왜 자기를 건드렸냐고 탓하고 있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너라고, 책임을 지라고 강요하고 있다.
“형님 손바닥은 차갑고 촉촉해서…… 만져 주실 때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좋다는 그 말에 쓰다듬던 것을 멈췄다. 기하가 무릎에 파묻고 있던 머리를 들고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편하게 협박을 해 놓고는 세상 다시없을 숭배하는 눈을 하고 있다. 비에 씻겨 내려가 깨끗한 공기에 투과된 햇빛이 비치고 있는 얼굴이 눈부셨다. 눈이 부셔서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마 저 얼굴로 웃으면서 내 배에 칼을 꽂아 넣는다 해도, 나는 네가 다 이유가 있어서 해치는 거라고 받아들이리라. 아니면 내가 칼을 맞을 짓을 했다고. 다 내가 잘못한 걸 거라고.
“여우들은 순진하지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본 듯이 기하가 관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겹친 손가락 끝을 할짝 핥더니 손목 부근에 코를 대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무엇에 영향받았는지 햇빛이 닿아 부서지는 기하의 속눈썹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사람들은 여우가 사람을 홀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여우들이야말로 사람에 홀려서 내려온 것을요.”
기하의 말은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고서의 내용들을 상기시켰다.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수백 권에 이를 문서들에 포함되어 있던 여우들의 설화들도.
거의 모든 이야기 속의 여우들은 사악한 존재였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 이야기의 여우들은 선한 존재일지 몰라도 사람들이 악인이었다. 여우가 나오는 이야기에서 여우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것은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오래오래. 내지는 영원히.
이렇게 끝맺어진 이야기 속의 여우는 어떤 방식으로든 불행해졌다.
여우가 주인공인 내 이야기는 행복한 끝맺음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 여우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느새 무릎에서 눈앞까지 몸을 일으킨 동생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형님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눈을 감았다. 얼굴 위로 동생의 머리카락이 쏟아지고 뜨거운 숨이 내려앉는다.
촉촉한 입술이 내 입술에 가볍게 맞물렸다. 한번 입술 위를 훑고 지나간 입술이 한 번 더 겹쳐지기 전에 기하의 가슴을 밀어 냈다.
“…….”
밀고 있는 손바닥에 전해지는 동생의 심장 박동이…… 터질 것처럼 느껴졌다. 완력으로는 내가 밀고 있는 중인데도 기하의 맥박들이 내 거부를 밀어내며 손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진다.
아아, 이 아이는, 이 아이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좋아한다. 그동안 네게 수많은 모진 말을 하며 거부했는데도 불구하고.
거부를 하는 것은 항상 내 쪽이었는데도 나는 항상 네게 거절당하는 사람처럼 두려워하며 거부를 입에 올렸다. 고백을 해 오는 너보다도 내가 언제나 약자였다.
“우리 이러는 거…….”
“…….”
“이러는 거 이상……한 일이야.”
동생은 물끄러미 가슴을 밀어 내는 손을 쳐다보더니 천천히 내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 냈다.
“……난 하나도 안 이상해요.”
너무 자연스러워.
그의 속삭임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우리는 틈만 나면 한 침대서 같이 자고 미간과 양 뺨과 귓가에 서로 키스를 퍼부으며 자랐던 형제였다. 형제끼린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는 집안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사춘기에 들어서 기하의 꿈을 꾸고 처음으로 속옷을 적셨던 날 이후 이게 무언가 크게 잘못된 거라고 스스로 깨달아 제동을 걸기 전까지.
내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던 수치를 저절로 학습했다면, 기하는 내 침대에서 껴안고 함께 잠이 들던 그때에서 멈춘 채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 ……아니, 비정상적으로 애정만을 성장시켰다.
적어도 우리 중 한 명이 여자가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떼어 낸 손이 다시 자신을 밀어 내지 못하도록 기하가 깍지를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눈가에 그의 그림자가 지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더니 동생의 혀가 부드럽게 입술을 두드리며 애달프게 핥아 왔다. 오기 전에 차를 마셔 단맛이 느껴지는 혀가 파고들어 입 안 전체를 쓸어내렸다. 입 안에 침이 고이자 남김없이 핥아 간다. 긴 손가락이 뒷머리를 파고들며 더 단단하게 입술을 물었다. 혀가 서로 얽히고 척추에 흐르던 오싹한 기운이 심해지며 몸 안쪽이 욱신거렸다.
고개를 더 깊게 숙여 입술을 교차하면서 부드럽게 입 안을 핥고 혀를 섞었다. 호흡이 부족해 헐떡거리면 동생은 입술을 떼고 턱에 흘러내린 타액을 핥다가 내 숨결이 다듬어지는 걸 기다려 또 입술을 머금었다. 기하의 혀가 질척하게 내 혀를 문지를 때마다 몸 안에서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뻥 하고 터질 것같이 아찔해지고 뜨겁고 저릿한 감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밀어 내기 위해 들어 올렸던 손은 어느새 동생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서로의 숨결을 계속해서 마셨다. 마치…… 생명력을 공유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야릇한 감각은 처음이었다.
젖은 입술을 마주 비비며 동생이 새빨간 눈을 떴다. 숨이 막혔다. 보석 안이라 불리는 내 눈보다도 보석 같은 눈을 한 남자가 처연한 표정으로 내 콧날을 마주 비벼 왔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가 두렵지 않은 게 두려웠다. 순식간에 내 상식을 파괴하는 남자가 무서웠고 그를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나도 무서웠다.
“……형님.”
“…….”
동생이 상냥하게 속삭였다. 행복한 충만감에 목소리에서 꿀이 떨어지는 듯했다.
“행복합니다. 형님과 이리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서…….”
“…….”
“이렇게만 있을 수 있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 화를 닮기도 하고 슬픔을 닮기도 한 그 감정이 입 밖으로 토해져 기하를 아프게 하기 전에 꾹 다물었다. 지금 이 순간이 평범하고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할까 봐 겁이 난다.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에 가려진 진짜 모습을 알고 있잖아.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렸던 아버지의 비명 소리와 발끝을 스치던 뱀들의 비늘 감촉을.
기하야.
기하야. 내 사랑.
이건 해피 엔딩이 아니야.
행복해하지 마. 네가 지금 안고 있는 나는 너를 망치는 뱀이야.
* * *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은 그렇지 않은 순간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가지고 스쳐 지나간다. 사실 그런 찬연한 순간을 영위하는 당사자는 그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임을 알아채지 못하고 경망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뒤로, 벌어진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한번 움켜쥐어 보기라도 했을 텐데. 한번 눈물이 맺힐 때까지 깜빡임을 참아보는 건데.
왜 사람들은 뒤늦게 흘려보낸 다음에야 깨닫는 걸까 기하야.
안타까운 일이지.
밤하늘에 가득 담긴 별들은 마치 유영하는 흰고래들 같았다. 막 식사를 끝마치고 배부른 배를 두드리며 천천히 하얀 지느러미를 펼치는 듯한 광경. 친척들의 장례식 행렬을 따라나선 밤 산책의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검은 바다 같아 고개를 들면 내 위로 검푸른 물줄기가 쏟아질 것 같았다.
조금 전 하늘로 올라간 영혼들이 투명한 비늘을 빛내며 무리 속에 섞여 드는 것을 보면서 나는 탄식을 흘렸다.
사람의 수명이 닳는 순간은 이토록 찬란하면서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일족이 죽었을 때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관에 누운 이를 부러워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곳에 몸을 뉘일 수 있다니…… 언젠가는 나도 올라가 봤으면.
친지들의 죽음에 조금도 서러워하지 않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나를 보고 어떤 이는 인간 같지 않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괴물이라며 두려워했다. 아직 여우 신의 계승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가솔들은 내가 여우 신이 될 것이라 수군거리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내 성격에 질려 하며 저주받은 아이라고 우리를 떠났다.
하지만 슬프지 않은데, 다신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은 쓸쓸하고 외로울지언정 괴롭지 않은데 눈물이 나올 리가 없잖아. 남들의 눈물을 딛고서야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방식대로 기리면 되는 거잖아. 일족이 지휘하는 장송곡을 들으며 내가 읊조리는 찬미가를 타고 올라가기를.
넋을 잃고 밤바다를 올려다보는 내 등 뒤로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담아 가요.’
‘…….’
‘이제 다시 보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니까.’
내가 뒤따르던 동생을 물끄러미 돌아보자 아직 덜 성숙해 말간 얼굴을 한 기하가 열없이 웃어 보였다. 몸에 비해 헐렁한 흰색 반팔 교복을 걸친 기하의 몸이 검은 별무리 사이에 묻혀 아스러질 것 같아 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감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떠 기하가 말한 대로 바로 앞에 다가온 아이의 모습을 눈에 넘치도록 담았다.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감기 기운이 조금 있어 눈 밑에 열을 달고서도 밤길을 헤쳐 따라온 기하가 안쓰러워 타박하는 말이 튀어 나갔다. 아이의 안색이 창백해서 가뜩이나 여려 보이는 분위기가 한층 더 아슬아슬했다. 어둠으로도 가리지 못한 새하얀 피부를 하고 선이 고왔던 기하는 내가 가지 못할 하늘바다에 당장이라도 뛰어들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어 보였다. 저곳에 내 자리는 없을지 몰라도 가장 높고 아름다운 곳에 동생의 자리는 안배되어 있을 거다.
이 밤의 풍경에 가장 잘 어울리기도 하는 동시에 가장 이질적인 존재가 불쑥 입을 열었다.
‘떠날까 봐.’
희미하게 비치는 장례식의 불빛과 하늘에서 내리는 별빛의 폭포수 사이에 선 동생이 읊조렸다.
‘떠나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무엇이?’
무엇이 널…… 떠난다는 소리야?
하지만 입을 다문 동생에게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동생이 왜 그리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느냐고 물으면 나 역시 이해시킬 대답을 내놓지 못하듯이 동생의 대답도 그러할 것 같아서. 대답을 듣는 대신 등을 돌려 목표했던 길을 따라 꽃 사이를 헤쳐 나갔다.
등 뒤로 자박자박 기하가 뒤따르는 소리를 들으며 아이가 어렵지 않게 따라올 수 있도록 장례식의 불빛 대신 달의 영향권 안으로 발을 디뎠다.
풀벌레가 날아오르는 소리와 함께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찬 바람이 반팔 소매를 흔들고 지나갔지만 동생이 등 뒤에 있어선지 하나도 외롭지 않고 춥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기분 좋은 고양감이 발목을 훑으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가슴이 들뜨며 벅차올랐다.
친척들의 장례식 날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 보니 내가 정말 이상한 건 맞나 보다. 누군가의 말처럼 미치고 있는 건지도. 친지의 죽음을 밟으면서 이토록 설레고 날아갈 것처럼 흥분되는 감정이라니.
숲 특유의 선선한 냄새와 조용히 공기를 울리는 숨소리, 풀을 밟으며 내려앉는 발소리가 좋았다. 이 크고 넓은 숲속에서 동생과 단둘이만 존재하는 느낌에 괜스레 가슴이 울렁였다. 너도 이렇게 느끼고 있을까. 조금이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미 익숙하게 와 봤던 숲길을 걸어서 시야를 가리던 나무의 숲을 헤치고 들어서자 눈앞 가득 상사화의 분홍색 꽃무리가 펼쳐졌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흰색의 부유물과 무릎까지 간질이는 꽃들의 무리. 몇 번이고 담으러 왔어도 언제나 넋을 잃게 만드는 광경에 벅차올라 말을 잃은 등 뒤로 동생의 기척이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기하를 마주 보았다. 그가 희미하게 웃고 있어서 나 역시 마음 놓고 미소를 지었다. 손을 내밀자 망설임 없이 깍지를 끼더니 어깨에 살며시 고개를 기대 온다.
아아, 고양감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벅차오르는 감정의 주인은 바로…….
목덜미에 부드럽게 감겨드는 동생의 체온을 느끼며 한동안 그렇게 둘 다 말없이 검은 바다에 흐르는 꽃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꽃무리를 휘감으며 달리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우리 사이엔 한참이나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이곳에 그냥 동화되어 녹아 있는 것처럼.
‘……상사화의 꽃말이 뭔지 아세요?’
침묵을 깨고 동생이 반쯤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왠지 모르게 의미를 담은 듯한 어조였다. 기분 탓인지 깍지 낀 손가락에 힘이 조금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상사……. 서로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네. 그래서 이룰 수 없는 사랑.’
‘…….’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한다고 해서 상사화라더군요. 서로를 보고 싶어도 한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잎이 먼저 피고 다 져 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꽃이 피어나는 꽃. 애처롭지 않나요? 전 지금까지 이렇게 가여운 꽃을 본 적이 없어요.’
눈앞의 절경은 잎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거였던가. 달빛에 새하얗게 반사되는 연분홍색의 꽃잎들을 정작 한 몸이었을 잎들은 보지 못한다니.
‘……안타깝네. 서로가 서로를 보려고 태어나도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꽃이라니. 잎은 꽃에게 실망하고 꽃은 잎에게 실망하려나.’
내 말이 끝나자마자 움찔하고 목덜미에 닿아 있던 동생의 몸이 굳더니 내 몸에서 고개를 떼어 냈다. 인공적인 불빛 하나 없이 달빛에만 의존해 있어 확실하지 않지만 동생의 눈가가 젖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착각이었나. 동생의 목소리는 물기가 어려 있기는커녕 약간의 서늘함과 당혹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그야…… 보고 싶어서 몸을 찢으며 태어났을 텐데, 눈앞에는 상대방이 없을 테니까 실망하지 않을까? 상대방도 나를 그리워하다가 졌을 줄은 모를 테니까.’
기하가 해 준 얘기를 듣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어 생각 없이 했던 말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며 피어나고 지는 몇 번의 세월을 반복하면서 실망과 좌절을 하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내뱉은 말.
‘형님처럼 그렇게…… 해석하실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저는 만약 상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로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해서 했던 행동을 실망으로 변질해서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절망스럽겠어요.’
‘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저 꽃말일 뿐이잖아.’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나는 실없이 웃어 보이고자 했다.
‘그저 꽃말…….’
하지만 아이의 서늘한 목소리에는 뜻 모를 원망이 섞여 있어 그 기묘한 낯섦에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기하가 멀어져 보였고 그만큼 나와 달라 보였다. 깍지를 풀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는데도 좀 전까지 우리가 기대어 나누던 훈훈한 체온 대신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저 꽃말인가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던 동생이 고개를 기울여 상사화 꽃무리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에 비치는 꽃들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직한 음성이 내 귓전에 내려앉았다.
‘내 선택을 보고 나의 꽃은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꽃.
왜 동생이 그런 말을 한 걸까.
왜 하필 그런 말을 내 앞에서 하고 있는 걸까. 언젠가 너의 꽃이 될 그 여자애가 실망하든 말든 그런 염려를 지금 이 순간에 듣고 싶지 않았는데.
흙을 밟고 동생과 산기슭을 오르며 들떴던 기분이 바닥으로 뚝 추락하는 게 느껴졌다. 나 혼자만 지금 이 순간을 특별하게 여기고 설레며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이 현실로 다가와서, 결코 이루지 못할 꿈을 한순간이나마 품었던 것이 한심해서.
네 눈동자에 비칠 친애의 대상이 될 미래의 여자애를 생각하며 나는 속에 품고만 있었던 유구한 단어를 발밑에 소리 없이 파묻었다.
싹이 트지 않게 물을 주지 말아야지. 할 수 없는 말은 온기를 잃고 사라지게. 잘못된 곳에 뿌리내려 꽃을 틔우지 않도록.
여름이 끝나는 듯한 쌀쌀한 상풍이 몸을 휘감자 지금까지 내 몸을 달구던 사춘기의 미열이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이제 끝이다. 아직 자라지 않아서, 아직은 세상을 몰라서, 어려서 그랬다고 변명할 수 있는 열의 계절은 지나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날도 이젠 끝이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또 말없이 눈앞의 꽃무리를 지켜보았다.
오랫동안 간직하기만 하고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말을 내려놓고 조금 자유로워진 기분에 편하게 기하를 돌아보자, 언제부턴지 그런 나를 똑바로 주시하던 동생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이는 편해진 나와 반대로 혼곤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꽃이 아닌 나를 보고 있는 걸까.
‘내려갈까? 이제 슬슬 사람들이 찾겠는데.’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줘 잡아끌었지만 기하는 끌려오지 않고 머뭇거리며 오히려 내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왜 그래……?’
‘형님…….’
붉은 입술이 몇 번이나 달싹이며 망설이더니 아까의 확고한 목소리가 아닌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속삭이는 음성을 흘렸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 뭔데.’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동생의 목소리는 더 작고 희미해졌다. 내 허락이 떨어졌는데도 선뜻 말을 못 하고 계속 고개를 떨구기만 했다. 말을 할 때는 항상 신중하고 다정다감한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한 적은 없어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나 덜컥 걱정이 됐다.
‘무슨 말인데 그래?’
손을 뻗어 뺨을 쓸어내리려 하자 기하의 몸이 움찔하며 굳는 게 느껴졌다. 내가 해 주는 스킨십을 피하려 한 적은 없어서 나도 내린 손 그대로 얼어붙었다. 설마…… 눈치가 빠른 동생이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실체를 알 리가 없는 묻어 버린 그 말을.
그러나 떨구는 내 손을 붙잡아 동생이 스스로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 와 닿는 물기를 느끼고서야 아까 본 젖은 듯한 눈가가 착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왜 그러니? 어디 아파?’
당황해서 다른 손으로 동생의 옷깃을 잡아끌었지만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기하는 내 손을 더 꽉 움켜잡았다.
‘아니요…….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담아 가기엔 벅차네요. 도저히…… 다 새길 수가 없어서.’
‘…….’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기하야.
그래서 이 장면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놓고 가야 하는 게 아까워서요.’
이제 막 하늘로 올라간 흰고래들이 자리를 찾아 유영하는 모습과 지상의 바다로 추락하는 비늘 조각들, 바닥을 흐르며 밝히는 상사화의 꽃무리, 그리고…… 내 옆에 서 있는 아직 앳된 모습의 너.
이제 나에게 어떤 장례식의 밤이 돌아오더라도 이 장면이 평생 오버랩되겠지. 죽은 사람을 기리는 게 아니라 이 순간을 기리게 될 거다. 어린 몸을 벗고 어른이 되어도 앞으로 있을 수많은 무덤 위엔 별과 꽃과 네 모습이 함께 할 테니, 나는 장례식을 기다릴 거고 결코 울지 않을 것이며 미쳤단 소리를 더 듣게 될 거고 계속해서 새로 생길 수많은 단어를 묻으러 오게 되겠지.
‘……또 오자. 다음에도 같이 올라오자. 아직 우리가 봐야 할 장례식이 많이 남았잖아.’
내 말이 끝나자 동생이 씁쓸하게 웃었다. 몇 방울 흘러내려 턱을 적신 물기를 닦지도 않고 그대로 고개를 들어 상사화 무리를 눈에 담더니 마지막인 양 엄숙하게 속삭였다.
‘함께 돌아가요. 손잡고 걷고 싶어요.’
손을 잡고 우리는 그곳을 뒤로한 채 말없이 올라왔었던 길 그대로 되짚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올라올 때와는 달리 몸을 맞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처럼 기묘한 고양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뒤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설레었었는데, 숲이 우리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깍지를 낀 채로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걷는데도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이번에도 역시 동생이 이유였던 걸까? 알 수 없다.
‘올라가던 길은 영원 같았는데 내려오는 길은 찰나 같네요.’
우리 이름을 외치며 찾고 있는 가솔들이 든 조등의 불빛을 보며 기하가 조용히 읊조렸다. 불빛이 가까워지자 우리를 감히 혼낼 사람이 없을 텐데도 나쁜 일을 하다 와 야단을 맞을 것처럼 괜히 초조해져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건 무의식적으로 내 몸이 느끼던 위험 신호였을지도.
‘……이제 조만간 형님께서 열여덟이 되시겠군요.’
옆에 선 동생을 내려다보니 붉은 눈이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혼곤함을 담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리 축하드려요.’
‘고마워……?’
그 순간 왜 그렇게 동생이 어른스럽게 느껴졌을까. 언제 이렇게 자란 걸까. 어딜 가든 함께하자며 병아리처럼 졸졸 따르던 작은 아이는 어디 가고 기하는 나를 두고서 혼자서만 훌쩍 자란 것같이 낯설었다. 분명히 내려올 때 손을 잡은 채로 한 번도 놓지 않고 같이 걸음을 맞춰 돌아왔는데…….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중간에 내가 알던 동생은 바꿔치기 당한 채 낯선 이의 손을 잡고 내려온 것 같은 이질감이 들었다.
‘기하야……?’
‘형님께서 제일 바라시던 선물을 해 드릴게요.’
‘…….’
‘그러니 내 꽃은…….’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나이 열일곱 살.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들어서는 그 밤의 산책 이후 기하는 여우 신의 가죽을 뒤집어썼다.
그 숨 막히는 절정 끝에서 눈을 떠 보니 모든 빛나는 것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렸고 남아 있는 건 네 그림자뿐이었다. 나를 감싸고 있는 암흑 속에선 그 그림자마저도 보이지 않아 절망했다. 새카만 손을 적셔 가며 한참을 들여다봐도 내 손에 있는 게 진짜 네 그림자인지도 알 수 없어 더 많이 손을 적셔야 했다.
하늘을 수놓던 흰고래들도 까만 바다를 흐르던 꽃무리도 내 손을 밝혀 주지는 못했다.
그날 이후 장례식이 열려도 동생과 그 산을 함께 오르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
나는 여전히 장례식 때 울지 않지만 더 이상 아무도 나에게 미쳤다고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내가 마음속에 키우던 단어들은 자취를 감췄고 남아 있는 것들은 끝부분부터 썩어 들어가 내 안에서 악취를 뿜었다. 더럽혀진 몸이 무섭고 무거워 혼자선 그 산을 오르지도 못했다.
어차피 혼자서 산을 오른다 해도 별과 꽃들은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네가 말했던 이제 오랜 시간 동안 볼 수 없을 거라던 광경은 이거였구나. 내가 갇히지 않는다면 네가 갇히게 되는 우리.
잎이 지고 나면 꽃이 나오듯이 네가 졌기 때문에 내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거겠지.
나는 네가 대신 져 주는 걸 바란 적 없어. 널 밟고 내가 나오는 건 더더욱 더.
내 열병의 계절은 동생의 계승과 함께 종료되었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실망하는 날이, 너는 나에게 실망하는 날이 이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