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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벌써 일곱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두 시쯤 나와서 돌아가려던 계획이었는데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일정이 틀어져 버렸다. 가지 말라고 매달리는 기하가 오늘따라 좀 더 집요했던 것도 한몫했다. 언제쯤이 되어야 두고 나오는 것에 익숙해지려나. 한번 본가에 들렀다가 나올 때마다 진이 다 빠진다.
피곤함이 몰려와 신호를 기다리며 미간을 꾸욱 눌렀다. 밤새 시달린 몸이 무겁다. 몸 안쪽에 남아 있는 둔중한 통증이 거슬려 배 위를 쓸었다. 약을 먹었어야 했던 것 같은데, 현진에게 들릴 시간이 없어 그냥 나온 걸 후회하고 있을 때 신호가 돌아왔는지 뒤에 서 있던 차의 경적 소리에 다시 액셀을 밟았다.
레지던스로 돌아가기 전 슬슬 주문해 두었던 책이 도착했을 것 같아 자주 가는 서점 쪽으로 차를 돌렸다. 멀티플렉스가 문을 닫기까지 세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빨리 책을 찾고 좀 훑어보다가 나오면 딱 시간이 맞아떨어질 것 같았다.
서점은 마침 딱 저녁 시간이라 다들 빠져나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방해받지 않고 책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 카운터를 보고 있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주문한 책 찾으러 왔는데요.”
“예. 영수증 좀 주시겠어요?”
지갑 사이에 끼워 둔 종이를 건네자 내가 건넨 영수증을 주의 깊게 읽더니 힐끔 내 얼굴을 쳐다봤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두르고 있어 의심스러운 건가 싶어 눈을 내리깔았더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 얘기하고 뒤로 사라졌다.
그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며 카운터 옆에 서서 신간이 진열된 책들을 쓸어 보다 유리창 너머 들려오는 소음에 눈길을 돌렸다. 밖은 저녁을 먹으러 몰려든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이제 퇴근해서 한껏 풀어진 분위기로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는 직장인들, 유모차를 몰고 돌아다니는 가족 단위 손님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팔짱 끼고 큰 소리로 웃으며 지나가는 여고생들, 모임을 하러 들어오는 듯 보이는 한껏 멋을 부린 아가씨 무리부터 피곤에 절어 한 손에 커피를 들고 터덜터덜 돌아다니는 아저씨들까지.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구경하던 중 막 엘리베이터를 내려 서점 쪽으로 걸어오는 어린 남학생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
왜 이렇게 눈에 확 들어오나 했더니 나와 기하가 다녔던 사립 학교의 교복이었다. 사립 학교를 다닐 때 우리는 같은 차로 등교했었고 하교 역시 서로가 끝나는 시간을 맞춰 함께했다. 기하에게 학생으로서 주어진 시간은 겨우 이 년뿐이었지만.
이제 막 변성기가 오고 있을 어린 태가 나는 남학생들은 참고 서적이라도 사러 왔는지 시끄럽게 떠들면서 유리문을 밀며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무리 중 목소리 큰 녀석이 소리를 높이자 옆에 있던 작은 남자애가 짜증 내며 조용히 하라고 혼내는 게 보였다. 덩치가 훨씬 더 큰 아이인데도 작은 아이의 구박에 얌전해지는 게 웃겨서 나도 모르게 픽 미소가 지어졌다. 작은 애가 입고 있는 춘추복을 보니 기하가 중학생일 때가 생각난다.
그 애들에게서 눈을 못 떼는 동안 카운터를 비웠던 직원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고객님. 여기 주문하신 책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상자를 건네받으려 손을 뻗었는데 직원의 눈이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내 양 손목에 머물렀다. 푹 눌러쓴 캡 모자에, 검은 마스크에, 손과 목에 감겨 있는 붕대의 조합과 어딘지 불편한 움직임. 내가 봐도 일반적이지 않긴 했지만 역시나 직원의 수상쩍어하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신분증 좀 보여 주시겠어요?”
“예? 신분증이요?”
내 손에 상자를 얹어 주기 전에 결국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왔다. 자주 오는 서점이라 얼굴이 익숙한 아르바이트생도 있었지만 하필 오늘 처음 만나는 직원이라 그런지 까탈스럽다.
“네. 죄송합니다. 예약하신 분이 맞는지 확인 한 번만 더 하려고요.”
너도 참 융통성이 없구나. 한숨을 쉬며 별말 없이 지갑 안에서 신분증을 꺼내서 내밀자 받아 들고 영수증과 함께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음……? 이게…….”
“…….”
“저기 신분증이…….”
“어머? 안녕하세요. 오셨네요.”
그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무얼 말하려고 했을 때 직원의 등 뒤에서 자주 봤던 다른 여자 직원이 나타나더니 나를 알아보고 생긋 웃었다. 남자 직원의 손에서 영수증과 신분증을 가져가서 쓱 훑어보고는 도로 돌려준다.
“흠. 얘가 이게 워낙 비싼 책들이라 혹시 몰라 확인했나 보네요. 저분 자주 예약하러 오는 분이셔. 귀찮게 이런 걸 뭐 하러 하니.”
그러더니 비어 있는 책상을 가리키며 저쪽에 놔 드리라고 말하고는 내가 감사 인사를 하기도 전에 또 훌쩍 사라진다. 남자 직원은 의심한 걸 멋쩍어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연신 허리를 숙이더니 비어 있는 책상 위로 상자를 날라 주었다.
고서를 몇 개 추가했더니 무게가 제법 나가는 상자를 뜯고 완충제로 둘둘 말린 책을 하나씩 꺼내며 확인했다. 대부분 해외에서 수입한 책들이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각 나라에서 신에 관련된 자료는 전부 긁어모으고 있었다. 아주 간단하게는 신화부터 시작해서 수호신을 모셨다는 가문들에 대한 기록과 여우에 관한 모든 자료도.
처음에는 기성 책들로 시작했지만 이게 점차 범위를 넓혀가다 보니 각 나라마다 신에 관한 사료가 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젠 거의 취미처럼 신에 관련된 것은 모조리 수집하기에 이르렀다.
인터넷으로 신에 관한 것을 끊임없이 서치하고 뭔가 의문스러운 내용이 들어 있는 것 같으면 책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그중엔 대리인을 내세워 경매를 해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고서도 있었다.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수호신에 관한 기록이라기에 기대를 걸고 돈을 쏟아부어 얻어 보았지만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설화에 불과한 책도 있었고…….
하긴 허무맹랑한 걸로 따지면 우리 가문만 한 얘기도 없겠지만.
이렇게 끝을 정하지 않고 파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 가문에 걸린 저주와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모든 독에는 반드시 해독제가 존재하듯이 저주에도 분명 파훼법이 있을 것이다. 내 동생이 저 안에서 썩어 들어가기 전에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리가 없다. 아주 예전에는 명문가마다 신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니까. 신들에 관한 기록을 파다 보면 한국에서 신이 사라진 이유라도 알 수 있겠지.
고서를 감싸고 있는 봉인을 뜯어내고 표지를 재빨리 넘겼다. 내가 필요한 부분이 어디 있는지 집중해서 읽어 내려갔다. 저주―, 수호신―, 후계자―. 제물―. 원하는 단어가 나오는 페이지가 있으면 그 페이지를 포함한 챕터 전체를 자른 뒤 스캔해서 데이터화시켜 보관했다.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몰라도 나 혼자 그 많은 책들을 빠른 시간 내에 읽고 필요한 것만 뽑아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택한 방법이었다.
그 비싼 책을 함부로 뜯으면서 확인하는 걸 보고 옆에 지나가던 남자 직원이 정말 이상하단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턱까지 내려갔던 마스크를 다시 당겨 올려 쓰고는 시선을 피했다. 아까부터 쳐다보는 시선이 대단히 불쾌했다. 내가 뭐라도 훔쳐 갈 거 같아 감시라도 하는 것 같다. 아니면 책을 험하게 다뤄서 기분이 나빴던지.
어느새 9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오늘 내로 전부 다 훑어보고 버릴 책은 버리고 가고 싶었는데 체력이 고갈되어선지 속도가 나지 않는다. 책보다 딴생각들이 더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책장을 의미 없이 팔랑팔랑 넘기며 며칠 전 보았던 그를 떠올렸다. 교만하고 차가운, 재수 없던 남자. 왜 신에게 복속도 되지 않은 그가 유례없이 우리 집안에 초대되었을까.
“…….”
생각난 김에 인터넷 창을 켜 KNG그룹을 검색해 보았다. 그룹이 어느 정도 규모이고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정보를 수집했다.
한국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나라처럼 가문 내에 내려오는 고서나 사료를 공개하는 일이 드물다. 국내에서 유통할 수 있는 수호신에 관한 사료를 찾아도 옛것을 보존해 놓은 가문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뜻하지 않게 전소했거나 세대가 바뀌면서 함부로 처분했거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일 그 집안의 신이 우리 가문처럼 음습하고 어두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윗세대에서 더 은폐하고 없애려 들었을 테고.
하지만 KNG그룹의 강 씨 가문은 태초부터 명문가였으니 다른 집안보다 사료를 여유롭게 관리할 수 있었을 거다. 만약 정말 그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사료가 남아 있다면 그중 신에 관한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현진 누님이 강준형의 전화번호를 알아 와 주기만 한다면……. 일단 기하가 일영과의 거래에서 무얼 요구했는지를 알아내고…… 그다음 정말 그게 사료인 걸 알아내면……. 그다음 어떻게 그걸 빼내지? 내가 그 뱀 같은 남자를 구슬려 사료의 사본이라도 빼낼 수 있을까?
기하가 내가 이걸 찾는 걸 알지 못하게 강준형을 어떻게 설득하지?
아니 설득할 생각하지 말자. 겨우 말 한 번 섞어 봤지만 내가 설득할 수 있는 작자가 아니었다. 그저 일단 기하가 강준형에게 요구한 게 무엇인지만 확인하면 된다. 내가 찾고 있는 걸 그가 정말 가지고 있는지도 아직 모르지 않은가.
오늘 뜯어냈던 정보들을 스캐너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데이터로 복사되어 빠져나오는 페이지마다 차곡차곡 책상 밑의 분쇄기로 집어넣었다.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레지던스에 상주하는 우리 가문 고용인들이 내가 신에 관한 정보를 찾고 다닌다는 걸 알아내서는 안 되기에 원형 그대로의 책들을 떡하니 집 안에 보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신에게 굴복했다고 생각해서 바깥의 생활을 허락해 준 원로들이, 아직도 제물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알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내게 목줄을 채우려 하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평소같이 어둡고 음울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우기 전에 얼른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곧 터져나갈 듯 시끄러운 메탈 음악이 귀를 울린다. 신기하게도 음악이 격렬하게 머릿속을 뒤집을수록 마음속은 더 없이 평화로워졌다.
* * *
‘왜 그렇게 너는 참는 법을 모를까.’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내게 꼭 그런 말을 한 번쯤은 하곤 했다. 어감과 말투는 달랐지만 의미는 다 똑같은 말들을.
‘기현아, 참는 법을 배워야 해.’
‘참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사람은 없단다.’
‘기현 님만 참아 주신다면…….’
정작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볼 땐 단 하나도 참고 사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오직 어린 내게만 희생과 포기를 강요했다. 숭고와 헌신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를 갖다 붙이면서.
‘너는 정말 빌어먹게 고집이 세구나.’
이건 어머니가 나를 만날 때마다 했던 말이다.
‘너만 참으면 되잖니.’
그런 어머니 역시 저주받은 우리 형제를 본인 손으로 키우기 싫다고 고집 피우며 양육을 포기하셨지.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과 행복을 느끼며 자라야 할 어린 나이에 나는 제일 먼저 그것을 터득했다. 내게 달콤한 말을 해 주는 사람들은 내가 그들에게 달콤한 일을 해 주길 바랐다.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면 나는 그들의 몸을 좋게 만들어 줘야 했다.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들은 내가 그 호의를 두 배, 세 배의 후의로 돌려줄 것을 기대하고 베풀어 주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아무런 대가 없이 나를 도와줄 어른은 아무도 없다고,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내 어린 동생을 지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었다.
그러니 세상에서 유일한 내 편이라 생각했던 동생이, 내가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을 베풀었던 동생마저 나를 자신의 진창으로 끌어내렸을 때 내가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사랑해서…… 너무나도 아껴서…… 내 몸의 반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떨어져 나간 반쪽은 다시 완전해지고 싶다고 말하며,
나를 지독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 * *
연구소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차창에 비치는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특히 목과 손목 부분을 꼼꼼하게. 섹스할 때 목덜미나 손목을 물어뜯는 습관이 있는 남자 때문에 나는 여름에도 얇은 터틀넥이나 목까지 다 잠그는 셔츠를 선호했다. 아니면 하다못해 지금처럼 스카프라도 둘러야 했다.
“어머, 기현 씨! 차 새로 뽑았어요?”
옆자리에 누군가가 주차한다 싶더라니 문경아였다. 하이힐 소리를 경쾌하게 내며 곁으로 다가온 그녀는 감탄하며 내가 타고 온 차를 훑어보았다. 기분 탓인지 그녀의 뺨이 조금 상기돼 보였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경아 씨.”
그녀는 내 인사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내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연신 차에만 시선을 돌렸다.
“정말 매번 좋은 차만 타고 다니네. 이 차 벤틀리 아니에요?”
“아……. 제 차 아니에요. 동생이 안 쓴다고 타고 다니래서.”
바꿔 타고 다니라며 동생이 키가 여러 개 놓인 상자를 내밀어 대수롭잖게 골랐더니 이 차였다. 얼마 전에 이경헌과 다투면서 새끼손톱이 부러져 버리는 바람에 대충 둘러댔던 거짓말을 순진한 동생이 그대로 받아들였던 거다. 차마 이경헌 때문에 거짓말한 거라고 고백하지 못한 나는, 타고 다니던 멀쩡한 차가 폐차장으로 향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동생이요? 동생이 무슨 일을 하길래 벌써 이런 차를 타고 그래요? 부럽네.”
“그러게요. 참, 이거.”
그녀가 동생에게 더 관심을 보이기 전에 얼른 들고 있던 도넛 상자를 내밀었다.
“뭐예요 이게?”
한창 SNS에서 핫하다는 가게의 로고를 보고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요새 자주 자리를 비워서 죄송해서요. 제 일까지 맡아 하느라 고생하셨죠.”
“아니 뭐 그런 걸 가지고…….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녀는 눈에 띄게 좋아했다. 유명한 집이라기에 특별히 주문해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그녀와 함께 어제 일이 어쨌다느니 소장이 괴롭혔다느니 조잘조잘 떠들며 게이트에 출입증을 찍었을 때였다.
“기현!”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아무리 봐도 박사보다는 호스트 쪽이 어울릴 것 같은 화려한 차림새의 김태영이었다. 분홍색 줄무늬 셔츠에 회색 양복을 입고 밝은 갈색으로 탈색한 머리를 쓸어 올려 잔뜩 멋을 낸 것 같은 그를 보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우리 연구소가 복장에 관한 규율이 없다 해도 그는 너무 튀었다. 왜 굳이 고리타분한 직업을 선택해서 고생인지 모르겠다. 연예계 쪽 일이 훨씬 적성에 맞을 것 같은데.
“머리 꼴이 그게 뭐야? 정신 사납게.”
“너같이 칙칙한 녀석한테 지적받고 싶지 않거든?”
“태영 씨 머리 새로 했네요. 잘 어울려요.”
출입증을 목에 걸면서 문경아가 생글거렸다. 옆에 그녀가 있는 줄 몰랐는지 뒤늦게 얼굴이 새빨개진 태영을 뒤로하고 그녀의 옆에 서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나저나 경아 씨 손에 든 건 뭐예요?”
태영이 바라보는 건 내가 줬던 도넛 박스였다.
“아 이거 애들 봐줬다고 기현 씨가 줬어요.”
“……내 거는. 나도 봐줬는데 내 건 왜 없냐.”
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태영이 도끼눈을 떴다.
“차별주의자…….”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차별하는 건 너뿐인데.”
“와 이제 얼굴색도 안 변하고 구박하네. 제길. 괜히 걱정했어. 너한테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전전긍긍했던 내 시간 물어내.”
“그렇게 걱정했다는 분께서 연락 한 통 먼저 안 하시던데요.”
“네가 먼저 본가에 있을 땐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엄포를 놨잖아. 그러는 자기도 연락 한 통 안 해서 사람을 그렇게 걱정시켜 놓고. 안 오면 안 온다고 나한텐 얘기할 수 있잖아.”
어제 걱정을 많이 한 건 사실이었는지 태영의 억울해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하긴 내가 안 왔다고 이렇게 걱정할 만한 동료가…… 태영 말곤 없겠지. 문경아만 해도 병가 냈다는 내 앞에서 새 차를 보고 감탄했을 뿐 몸은 이제 괜찮아졌냐고 한 마디도 묻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난 문자 보냈는데 연락 한 통 안 했다니. 전화라도 해 주길 기다린 거야? 본가에 가면 전화 못 한다는 거 알잖아.”
우리가 근무하는 층에 엘리베이터가 섰다. 문경아가 나가길 기다린 뒤 뒤따르며 태영이 뭔 소리냐고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문자 안 왔는데. 전에 그렇게 언질했으니 차마 내가 먼저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 서열에 본가에 전화할 수도 없잖아? 아버지께 여쭤봐도 별다른 일 들은 바 없다고 하셨고.”
“뭐? 내가 분명 고용인 편에…….”
“기현 씨 본가도 따로 있어요? 어쩐지 씀씀이가 남다르다 하더라니. 대체 집안이 무슨 일을 하길래 그렇게 부자예요? 태영 씨네 집이랑도 아는 사이였어요?”
앞서가던 문경아가 급관심을 표하며 얘기에 끼어들기에 떠드는 걸 멈췄다. 이제껏 내게 관심을 표한 적 없었으면서 저번부터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아주 우수해 드물게 마음에 드는 직원이라 가능하다면 오래 곁에 두고 싶었는데.
“그냥 먼 친척 관계예요. 제 어머니가 이 씨 집안사람이거든요.”
내 분위기를 눈치챈 김태영이 얼른 입을 열었다.
“둘이 친척이었어요? 어쩐지 안 어울리는 조합인데 친하더라. 몰랐는데 기현 씨 집이 되게 잘사나 봐요. 근데 왜 연구소에서 그렇게 굴려 대는데 참고 다녀요? 나라면 진작 때려치우고 다른 데로 이직했겠다.”
“여기가 집에서 가까워서요.”
“나는 또 너무 사람을 굴리기만 하길래 밉보였는데도 참고 견디는 줄 알았지. 맨날 시도 때도 없이 소장님이 불러내시잖아요. 소장님만 뵙고 오면 출장 보내고…….”
대답할 게 없어서 그저 웃기만 했다.
“친척이면 태영 씨는 기현 씨 동생 본 적 있겠네요?”
동생.
그녀가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게 기하 때문이었나…….
내 눈치를 슬쩍 보며 태영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아 네 뭐……. 보기야 많이 봤죠.”
“기현 씨 닮았으면 동생도 미남이겠어요. 사진 보고 싶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음 그냥…… 사업해요. 저도 안 친해서 잘 몰라요.”
“와 어린데 벌써 사업을요? 대단하네. 나이가 어떻게 돼요?”
김태영과 시선이 부딪쳤다. 꼬리를 무는 질문에 계속 대답을 해 줘야 하는지 난처한 얼굴. 어째 나보다 더 마음 쓰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기하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걸 알아챈 순간 내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것을 보았을 수도 있고.
기다리는 그녀에게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김태영 대신 질문을 끌어왔다.
“제 동생한테 관심이 많으시네요. 두 살 터울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하며 문 앞에 출입증을 찍었다. 투명한 문이 열리자 순차적으로 하얀 돔형의 연구실이 천천히 밝아졌다.
이제 좀 그녀의 궁금증에서 해방되나 싶었지만 문경아는 짐을 내려놓고 실내화로 갈아 신자마자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동생에 대한 관심을 끊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기현 씨보다 두 살 어리면 진짜 젊네요? 나중에 사진이라도 한 번 보여 주세요. 궁금해요.”
“그럴게요.”
웃으며 응대하는 내 얼굴을 들여다본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올랐다. 선물해 줬던 도넛을 아침 대용으로 먹자며 그녀가 박스를 들고 탕비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불만스러운지 옆에서 김태영이 팔짱을 낀 채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말 안 했어?”
“뭐를.”
“저 여자 저러다가 동생이랑 소개팅이라도 해 달랄 기센데. 말해야 하지 않아?”
“그러니까 뭐를.”
그러니까―라며 도돌이표로 되풀이하던 태영이 내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짐을 내려 두고 탈의실로 향했다. 그는 계속 불만스러운 태도로 내 뒤를 따라왔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는 옷걸이에 아무렇게나 걸어 둔 흰 연구소 가운을 걸치고 이어폰을 꺼내 귀에 꼈다.
“그런 표정 할 것 없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이런 일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고.”
소지품을 캐비닛에 집어넣고 문을 닫는 걸 지켜보던 태영이 도리어 울분 섞인 말을 토해 냈다.
“하지만……. 적어도 동생한텐 상대가 있다든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소릴 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일이나 하지?”
“그렇게 말해 놓고도 정작 신께 다른 상대가 생기면 눈에 불을 켜고 쫓아낼 거면서.”
“잘 아네.”
내 반응에 태영의 미간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아마도 또 그런 소리를 한 걸 후회하고 있겠지. 김태영은 내 주변 일족 중엔 특이할 정도로 마음이 약한 편이니까.
“나 정말 괜찮아. 그리고 솔직히 이렇게 신경 쓰는 게 더 이상하다고. 너 내가 ‘무엇’인지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결국 녀석을 자제시키기 위해 그런 말까지 해 버렸다. 그는 자신이 더 시무룩해진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솔직하지 못한 마음을 숨기고 태영의 어깨를 탁탁 두들겼다. 타이밍 좋게 문경아가 잔과 도넛이 담긴 쟁반을 가지고 우리 자리로 돌아왔다. 아침은 구실이었고 그녀는 기하에 대해서 좀 더 꼬치꼬치 캐물었다. 대부분 탐색이었다. 결혼 적령기의 남녀가 상대를 물색하기 위한 것들의. 성실하게 그녀의 물음에 답해 주면서 도넛을 깨물었다.
유명하다던 도넛에서는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 * *
‘기현 님, 지금 바로 본가로 가셔야겠습니다.’
쨍쨍했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갑자기 비가 쏟아졌던 날이었다. 한참 생물학 강의 수업을 듣고 있던 도중 나를 감시하기 위해 본가에서 붙여 줬던 경호원들이 연락도 없이 대학 강의실로 들이닥쳤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대여섯 명의 정장 차림을 한 남자들이 쏟아져 들어온 걸 발견했을 때 나는 그들이 왜 들어왔는가 놀라기보다는 불쾌감과 체념을 먼저 느꼈다.
동생이 여우 신을 계승했을 때부터 내 주변의 모든 것은 드라마틱하게 변화했고 가장 두드러진 변화를 보인 것이 나를 구성하는 외적인 모든 것이었다.
내가 남들의 눈에 띄길 바라지 않았던 동생은 나를 치장하는 것은 비교적 소박하게 구성해 주었지만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붙여 준 감시인들에 대한 지원만은 결코 아끼지 않았다. 한번 보면 잊히지 않을 강인한 인상의 사내들이 항상 서너 명은 기본으로 내 주변을 맴돌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하교 시간에 맞춰서 교문 앞엔 언제나 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평범한 고등학생이 누려야 했던 방과 후 활동 같은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 대학 생활을 하면 감시가 좀 덜해질 줄 알았건만 동생은 점점 더 병적이다 싶을 만큼 내 스케줄을 관리해 왔다. 강의 시간, 공강 시간, 나도 잘 모르는 학과 일정까지 꿰차고는 최소한의 여유 시간만을 할애했다.
덕분에 대학교 생활도 고등학교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사람을 사귈 틈이 없던 난 언제나 아웃사이더였다. 내 성격이 폐쇄적이라 그나마 이 생활을 견딘 거지 외향적이었으면 삐뚤어져도 단단히 삐뚤어졌을 것이다.
허락도 없이 강의실을 들어온 자들이 내 앞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는 타인들의 눈빛이 묘해졌다. 이전에도 탐색하는 듯한 시선은 많이 받았지만 지금처럼 드러내 놓고 별종을 보는 듯한 시선은 아니었다.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입니까. 지금 강의 중인 거 안보여요? 당신네들은 예의란 것도 없습니까?’
그는 허리 숙여 한번 인사하고는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기현 님. 명령을 받고 온 것이라 이해해 주십시오.’
‘무슨 명령을요. 강의가 끝난 다음에 오면 안 됐습니까? 이런 것 내가 질색한다고 말했을 텐데요. 하다못해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요.’
내가 화를 내는데도 남자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화를 내든 말든 지극히 평이한 어조로 남자는 내뱉었다.
‘본가 사모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본가 사모님이…… 뭐라고요?’
돌아가셔? 어딜 돌아가셔? 이해를 못 해 되묻는 내게 남자는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는 재차 말했다.
‘장현주 사모님께서 삼십 분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유감입니다. 이기현 님.’
‘…….’
‘한 시간 내로 본가로 복귀하시라는 명령입니다. 모시겠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귀를 의심했다. 그의 기계적인 태도에 남자가 한 말이 정말 그 뜻인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됐다.
‘잠깐,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돌아가시다니? 내 어머님이?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요?’
‘자세한 건 모시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남자들은 내 소지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필기구와 전공 책, 휴대 전화 등을 쓸어 담기 시작한다. 어이없어 하는 동안 주변을 정리해 가방마저 집어 든 뒤 내가 일어나길 기다리며 내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동생의 명령으로 내가 도망치지 않는 한은 남자들은 내 몸에 강제로 손을 대지 못했다. 스스로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게 갑자기 웬 봉변이지. 아침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어머니가 왜 세상을 떠났다는 거며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남자들의 이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태도라니.
……사실 가장 당황스러운 건 비보에 황망함은 들면서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느끼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이었지만…….
무언의 압박에 못 이겨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자들이 양옆으로 나를 호위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흡사 내가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라도 돼서 연행해 가는 모양새였다.
학과 건물을 나와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는 세단에 오르자 비보를 전했던 남자도 따라 자리에 올랐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데도 평소와 똑같아서 이 모든 것이 질 나쁜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나를 본가로 귀환시키기 위해 꾸며 낸 해프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가신 것이 확실한 겁니까? 주치의한테 확인은 해 봤습니까?’
‘예. 확실합니다. 가문 직속 의사 세 명 모두 사망 진단을 내렸습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어머니께 붙인 고용인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겁니까! 어떻게 돌아가신 겁니까?’
‘자세한 건 모르지만 사망 원인은 교사입니다. 별채에서 목을 매셨다고 들었습니다.’
‘……뭐라고요? 교사요?’
교사……. 여우 신인 아버지 역시 외별채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런데 이어서 어머니까지 별채에서 자살을 하다니.
왜 하필 그곳에서. 왜 하필이면 그런 방식으로…….
여우비인 줄 알았던 빗줄기는 어느새 더 굵게 변해 있었다. 습한 기운이 기분 나쁘게 옷깃을 파고들어 팔을 움켜쥔 뒤 몸을 떨었다. 이제 곧 여름일 텐데도 오한이 든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억수로 쏟아지는 비, 유리창을 때리는 소음, 계절과는 맞지 않던 차가운 날씨,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지던 옷소매, 말 없는 창백한 얼굴, 검은색 상복……. 왠지 대단히 익숙한 무언가가 연상된다 하더라니, 아버지의 장례식도 이런 날이었다. 이미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눈앞에 생생하게 다시 재구성되는 듯했다.
‘……어머니께서 자살하셨다는 말입니까?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저희같이 아랫것들이 윗분들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다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목숨을 끊은 아버지를 보고 저주받았다며 나와 기하를 버릴 정도로 비정한 어머니였다. 낳은 자식조차 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찾아간 여자가 자살을 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녀에겐 신을 생산한 자로서 성모로 추앙받는 삶만이 남아 있을 터였다. 어쩌다 일족의 모임에서 한두 번 얼굴을 보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듯 해 보였는데…….
문득 여우 신인 아버지가 자살을 했을 때 내 품에 안겨 그날 내내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서럽게 울던 동생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것보다 그 작은 아이가 하루 종일 펑펑 눈물을 쏟아 내는 모습에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작은 몸이 전부 눈물로 이뤄진 것처럼 울고 또 울었었지…….
그런 걸 보면 난 정말 감정이 메마른 인간이었다. 눈물은커녕 부모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동요조차 일지 않았다. 심지어 그냥 사망한 것도 아니고 부모가 둘 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이라면 느꼈을 절망감이나 애통함, 원망 한 자락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느끼고 있는 것은…….
‘……기하는요. 그 아이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가주께서는 바로 상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 걸 물은 게 아니라…….’
‘예?’
말을 흐리자 무슨 말씀을 하셨냐며 남자가 재차 물어 왔다. 그가 알 리가 없던 것을 물었던 나는 그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얼른 가 주십시오.’
그 아이는 지금, 울고 있습니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서럽게.
* * *
본가 정문 앞 주차장을 가득 메운 검은색 차들에 질려 버렸다.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일족들이 다 도착해 있는 듯했다.
차 문을 열고 받쳐 준 우산 밑으로 발을 디뎠다. 눈앞에 커다란 대문과 집을 빽빽이 둘러싼 조등이 보인다. 마치 그녀가 오늘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준비라도 한 것처럼 흠 하나 잡을 수 없이 완벽한 초상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 동생이 신을 계승한 이후로는 자살 같은 피치 못할 사인을 제외하고는 상을 겪는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솨아아아…….
언제나 죽음의 냄새가 나는 집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섬뜩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쿠릉거리며 하늘이 우는 소리와 귓속을 파고드는 빗소리에 이명이 일었다. 휘청이며 발을 잘못 디디자 물웅덩이에 신발 끝이 젖어 든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탁한 흙냄새와 물비린내가 기어 올라온다. 꽃향기가 그리워졌다. 이 날씨라면 기하가 정성스럽게 가꿨을 정원의 꽃들이 다 떨어지고 있겠지. 계절을 잘못 맞아 피어난 꽃들이 죽어 가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리는 듯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안색이…….’ 하며 말을 흐리는 남자의 앞에 새카만 정장을 갖춰 입은 고용인이 나타나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역시나 흠 하나 잡을 수 없는 완벽한 모양새였다. 여자는 나와 남자를 한번 훑어보더니 인형 같은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현 님. 가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주는 어디 있습니까?’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여자는 곁으로 다가서며 내 머리 위에 새 우산을 씌웠다. 흘깃 뒤를 돌아보니 지금껏 나를 인도했던 남자가 비를 맞는 상태로 허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가 날 수행하는 역할은 집 밖까지였다. 그를 바라보며 걸음을 지체하자 먼저 한 걸음 더 내디뎠던 여자가 송구하다며 얼른 손수건을 꺼내어 내 어깨에 몇 방울 떨어진 빗방울을 털어 냈다.
‘……괜찮습니다. 가주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까 남자에게 했던 똑같은 질문을 여자에게도 던져 봤다.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살짝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가주께서는 상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 사람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기계적인 말투와 분위기. 사람이 죽었다는데 전혀 곡소리가 들리지 않는 대궐 같은 집 안. 나는 지긋지긋해졌다. 그리고 그들과 다름없이 평정심을 잃고 있지 않은 자신에게 환멸이 일었다.
‘상중인데 왜 이렇게 조용한 겁니까? 집 밖에 빈소를 차렸습니까?’
그렇게 많은 차가 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데도 평소보다 오히려 더 적막한 집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내 물음에 여자는 몇 초간 침묵을 하더니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아무래도 집안의 큰 어른이 불미스럽게 돌아가신 일이다 보니…… 가주께서 곡소리를 금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나 인기척이 없는 게 이상한데요. 무슨 일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자식인 나부터도 울지 않고 있는 마당에, 다른 일족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의문을 품는 게 어처구니없다 생각하며 여자를 따라서 본당 쪽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
발을 옮기니 무언가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위화감이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 위화감의 정체는 본당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기이한 광경― 물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나는 빗줄기 속에서 수백 명의 일족들이 움직임 하나 없이 본당 마당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두 사람은 몸을 일으키거나 움직일 법도 하건만, 마치 정지 버튼을 누른 듯 무릎 꿇고 머리를 바닥에 댄 자세 그대로.
나무마다 걸려 있는 새빨간 조등, 빈소 위에서 흘러나오는 향의 연기, 어둑한 마당에 수백 명의 사람이 꿇어앉아 있는 본당 앞 풍경은 괴기하다 못해 이계를 연상시켰다.
아니, 귀계나 타계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릴까.
그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기에 정문에서부터 본당까지 걸어오는 동안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거였다. 이렇게 정적이고 끔찍한 분위기의 빈소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살아오면서 장례식을 많이 겪었지만 이렇게 괴이한 광경은 처음이다. 대체 왜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는 것이며 다들 죽은 사람처럼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는 걸까.
생명력이, 활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곳에 오직 단 한 사람만 무릎을 꿇지 않고 두 다리를 뻗고 서서 빈소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래위로 새카만 정장을 입은, 이제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인력을 가진 존재.
‘……기하야.’
억수같이 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들렸을 리 없을 텐데도 그가 내 부름에 응답하듯 천천히 몸을 돌렸다.
‘…….’
그곳에서 우산을 쓰고 있는 것은 내 옆의 고용인과 나뿐. 기하 역시도 그 장대 같은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시선이 정면에서 부딪쳤다. 기하의 뺨이 젖어 있어서 그가 울고 있었는지, 아니면 내리는 비에 젖은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기 없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심장이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하야……!’
머리가 판단하기 전에 발이 먼저 움직였다. 나를 멍하니 응시하는 붉은 눈을 보자 그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겁이 났다. 우산을 받쳐 주던 고용인이 작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철퍽철퍽, 발아래 물구덩이에 발이 빠져든다. 고용인이 뛰어서 우산을 씌워 주는 속도보다 더 빨리 기하의 앞에 당도해 숨을 몰아쉬며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오셨군요. 형님.’
기하가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인사했다. 그 표정에 심장이 조여들어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대체 언제부터 빗속에 서 있었는지, 고용인들은 아이가 이러고 있는데 왜 아무도 우산을 씌워 주질 않은 건지, 그의 몸은 만진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열이 올라 있었다.
‘기하야, 너 몸이 지금…….’
황급히 비를 맞고 있는 창백한 피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자 기하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천천히 얼굴을 기대 왔다.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마치 내가 이곳에 서 있는 걸 확인이라도 하듯이 계속해서 내 손을 놓지 않고 뺨을 비볐다.
부서질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젖은 동생의 얼굴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머니의 제사상을 앞에 두고 해선 안 될 배덕한 생각이었지만 그때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생각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내 몸을 꽉 끌어안고 그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님.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알고 있어.’
‘이제 저에게 남은 건 형님뿐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쭉 제게 남은 건 오직 형님뿐이에요.
나 때문에 베였던 왼팔이 내 몸을 감아 들다 힘없이 떨어졌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힘을 쓰지 못하는 그의 팔을 알기에 그 대신 내가 동생의 가슴에 매달렸다. 동생과 강제로 그런 사이가 된 후로는 이런 자잘한 스킨십마저도 스스로 해 본 적이 없기에 내 의지로 안고 있는 감각이 낯설었다.
‘……이러고 있으면 감기 들 거야. 어머니도 네가 아픈 건 바라지 않으실 거다. 일단 안에 들어가자. 응? 너마저 쓰러지면 안 되잖아.’
내 품에 와 닿는 젖은 동생의 가슴이 뜨겁다. 아무리 신을 담은 그릇이라 해도 동생은 인간이다. 건강과 수명을 좌지우지한다는 여우 신이라 하더라도 아프지 않는 건 아닐 테고 신체의 고통은 고스란히 신을 담은 동생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물기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가 떨리며 귓가에 부서졌다. 또다시 심장이 덜컥거렸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들어가자.’
내가 달래자 동생이 간신히 웃었다. 내 말에 안심한 표정이었지만 그 애가 뱉어 내는 숨결이 뜨거워 걱정으로 목이 죄어들었다.
‘형님께서…… 제 곁에 있어 주셔서 다행입니다. 부디 형님은 절 두고 가지 마세요.’
‘내가, 내가 널 두고 갈 리가 없잖아. 나에게도 이젠 너밖에 안 남았는데.’
아아 역시, 아버지의 자살 때처럼 어머니의 죽음이 동생에겐 큰 상흔을 입혔나 보다. 그것도 하필 또 같은 지붕 아래 살다 생긴 사고였으니 마음 약한 동생이 받은 상처의 크기가 오죽할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죽는 그날까지 우리 형제들에게 부모다운 일을 하고 떠나지 않았다.
아이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만히 대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리는 빗줄기는 차가웠지만 맞닿은 이마와 내 뺨을 감싸 쥔 동생의 손바닥은 이질적이다 싶을 정도로 뜨거워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어도 나는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렇죠……. 우리는 한 쌍이니까. ……당신이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뜨겁고 말캉한 것이 입술 위를 가만히 누르고는 그대로 내 목덜미에 얌전히 기댔다. 목에 닿은 머리가 열로 펄펄 끓었다. 기하를 안은 채 다급하게 고용인을 불렀다.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고용인들이 우산을 들고 서둘러 곁으로 다가왔다.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송장을 두 구나 치울 셈입니까?’
소리를 지르자 고용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들이 돕겠다고 내미는 손을 거칠게 쳐 내고 등 뒤에 동생을 업었다. 완전히 맞닿은 동생의 몸은 불덩이같이 달아올라 있어 황급히 본당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
나는, 그대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눈, 일족들의 눈.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섬뜩하게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들.
좀 전까지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던 수백 명의 눈동자가 어느새 나와 동생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무슨…….’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시선에 압살당할 것만 같다. 업혀 있는 동생만 아니었어도 바로 뒤돌아 도망쳤을 것이다. 살해당하기 전에 살인자와 조우한 듯한 끔찍한 공포가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니, 칼을 들지 않았을 뿐이지 시선들을 두려워하는 내게는 그보다 더한 공포감이었다.
그제야 동생이 몇백 명을 제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끼쳤다. 동생이 정신을 잃자마자 일족을 억압하고 있던 통제가 풀렸던 것이다.
‘보…… 보지 마요.’
공포를 이겨 내려 신음 같은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 냈다. 내 말에도 맨 앞에 엎드려 있던 일족들이 눈을 또록또록 굴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다. 일족이 나를 바라보는 동공이 정상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비릿하게 느껴지는 혼탁한 눈을 한 채로 나를 주시하며 다가왔다. 동생이 깨어 있을 때는 내 눈동자조차 함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남자들이.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동생을 업은 채 뒷걸음질을 치는 내게 어느새 근처에 다가온 일족이 손을 뻗었다. 손바닥 하나 정도의 사이를 두고 필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왜 이래요? 하지 마요!’
고함을 질러도 무언가에 씐 듯이 혈족들은 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들의 손가락이 내 멱살에 닿았다……!
‘하지 마!’
* * *
“헉――――!”
반사적으로 몸이 튕겨 올라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소름 끼치는 꿈이다. 수없이 꾸는 악몽 중 하필 제일 질이 나쁜 악몽을 꾸었다. 매번 딱 저 장면에서 더 이상 견디지도 못하고 깨어나는 주제에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어머니의 장례식 날을.
몇 분이나 헐떡거리며 조금 전까지 시달린 악몽을 떨쳐 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안간힘을 썼다.
괜찮아. 진정해. 진정해라. 그건 꿈이었어. 현실이 아니야.
고요한 방 안에서 한참을 그렇게 되뇌며 숨을 되돌렸다. 얼굴을 감싼 손가락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든다. 언제쯤이어야 이런 것들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덕분에 잠은 완전히 깨 버렸다.
일어나기 위해 몸을 돌리다 또 깜짝 놀랐다. 동생이 옆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직 어둑한데다 몸에서 풍기는 샤워 코롱의 향기로 미루어 보아 그가 잠든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보였다. 정사 후에 뒤처리하고 나가는 것만 보았었는데 의외로 함께 잤던 적도 있던 모양이다.
“…….”
조금 전 끔찍한 옛 기억에 시달려서인지 옆에 누워 있는 동생의 편안한 얼굴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차마 동생이 깰까 봐 움직이지도 못한 채 몰래 동생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꿈속 동생의 앳된 얼굴이 지워지지 않은 상태로 마주하는, 성장해서 완연하게 개화한 동생의 얼굴은 기이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좀 전까지는 아파서 창백했던 얼굴이 지금 내 옆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건강한 혈색을 띠고 있다.
눈가에 흘러내린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 머리칼을 만져 보고픈 충동에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얼굴 위로 생기는 그림자에 멈췄다가 그가 단 한숨을 내뱉는 것을 보고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직도 젖어 있는 머리카락 끝을 조금 어루만지고는 살짝 찌푸린 양미간으로 손가락을 이동했다.
나를 닮았지만 신기할 정도로 다른 얼굴. 전체적으로 고운 선에 짙은 눈썹과 콧날 때문인지 잘생겼다는 말보다는 수려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는데 나와는 어떻게 이렇게 다를까.
동생이 깰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동안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못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동생을 만질 때는 가슴이 견딜 수 없이 죄어들었다.
‘네가 너무 예뻐.’
어릴 때 안겨 들던 아이에게 수없이 해 줬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너무 예쁘다고. 사랑스럽다고. 내가 그런 말을 속삭일 때마다 아이의 뺨이 장밋빛으로 물들었었다. 그때는 그저 그 귀여운 동생이 나를 따르는 것에 도취되어 내 말이 네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모르고 무분별한 애정의 단어를 쏟았었다.
예나 지금이나 너는 완벽한 내 이상형이었다.
그래. 그래서 문제였다. 여우에게 홀려 가듯 네 옆에 있으면 속수무책으로 빨려들어 갔다. 내가 미래의 이름 모를 연인에게 기대하는 모든 것을 너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보여 주며 마음을 뒤흔들었지. 여기 있는 내가 바로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듯이.
기하가 느끼지 못하게 조심스레 콧날을 훑어 내려갔다. 깨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살며시 뺨도 쓸어 보았다. 비단결 같이 매끈한 피부가 달콤하게 손등에 감겨들었다. 차가운 내 피부와는 달리 따뜻하게 열이 오르고 있는 피부결이 기분 좋았다.
만져지길 기다렸다는 듯 달라붙어 오는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분을 머금은 살결이 보드랍다. 관리 안 되어 거친 내 피부와는 완전히 다른 질감이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입술 끝을 매만졌다. 내가 밤새 빨고 물어뜯어 부어오른 입술 촉감이 손가락 끝을 스쳤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반사적으로 그 애에게서 손을 뗐다.
“…….”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 잠깐의 악몽을 꾸었다고 동생에게 위로를 받으려 하다니.
악몽에 시달렸을 때보다 더 크게 쿵쾅거리는 가슴을 내리눌렀다. 내 맥박 소리에 그가 깰 리 없을 텐데도 그가 내 두근거림을 들을까 봐 아주 조금씩 기하에게서 멀어졌다. 일어나기 위해 천천히 침대 밑에 다리를 내리고 힘을 줘 디뎠다.
“헉…….”
허리가 밑으로 쑥 빠져들었다. 아픔을 못 느꼈던 것이 아예 감각이 없어서였다니 기가 막혔다. 허리를 들어 올려 봐도 내 몸은 침대에 붙박은 듯 움직이질 않는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침대 밑에 내려갈 수가 없어 당황해 시선을 돌리는데 협탁 위에 놓인 의료 키트 안의 투명한 약병과 물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박현진이 말했던 그―국내에서 생산되는 라인이 아닌 거 같다고 말한―약이 생각났다.
‘내가 주는 약을 제외하고는 먹지 마.’
손을 뻗어 약병을 집었다. 뒤로 돌려 라벨을 살펴보니 알아볼 수 없는 용어가 쓰여 있다. 약을 먹지 말라고 말했던 현진의 말이 떠올라 뭐 알지도 못하지만 한참을 약병 안을 쳐다보았다. 이 약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먹고 난 후에 통증이 좀 수그러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한 번 정도야 달라질 거 없겠지, 안일한 생각을 하며 캡슐 약 두 개를 꺼냈다.
“한 알만 드시면 됩니다.”
깜짝 놀라기도 전에 내 손바닥에서 약 한 개가 사라졌다. 멍하니 고개를 돌리자 언제 일어났는지 동생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형님.”
“…….”
“좋은 아침입니다.”
그의 태연함에 무의식중에 잘 잤냐는 인사를 할 뻔했다. 같은 침대에서 아침을 맞은 적도 없으면서 놀라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놀라셨습니까?”
“…….”
“어제 저도 꽤 피곤했나 봅니다. 형님께서 일어나시기 전에 나갔어야 했는데…….”
화난 것으로 착각했는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사실은 일어나려고 했습니다만 형님께서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아서…….”
“…….”
“불편하시더라도 진정되실 때까지는 곁에 있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 화끈하게 열이 올랐다.
“너 그럼 언제부터…… 깨어…….”
오늘 처음으로 내뱉은 목소리에 놀라 목을 움켜쥐었다. 어제 얼마나 신음을 질렀는지 성대가 심각하게 쉬어 있었다.
동생도 내 목소리를 듣고 놀란 얼굴을 했다.
“오늘은 정말 푹 쉬셔야겠는데요. 목소리가…… 고용인들에게 웬만해선 말을 시키지 말라고 전해 두겠습니다.”
악몽 얘기를 하는 걸 보니 처음부터 깨어 있었구나. 창피함에 속수무책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한참 동안 자기 얼굴을 만지는 형을 보고 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두려웠다.
“왜…… 왜 일어났다고 말을 하지 않았어?”
침대에서 일어나 옷걸이로 향하는 기하의 등에 대고 물었다. 왜 뻔히 깨어 놓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느냐 원망할 셈이었지만 그는 내 물음에 가벼운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자는 척을 하고 있으면 악몽을 꾼 형님께서 안겨 드실 줄 알았죠.”
“…….”
“유감스럽게도…… 그러진 않으시더군요.”
그러진 않고 대신 너를 만졌지. 그가 나를 생각해서 더 이상 하지 않은 말을 스스로 삼키고는 민망함에 얼굴을 쓸었다.
기하는 방을 가로질러 걸어가더니 가운을 빼서 몸에 걸치고는 가볍게 허리끈을 맸다. 그러곤 옆에 걸려 있는 다른 가운을 빼서 돌아오더니 내 손에 아직 남아 있는 약을 쳐다보았다.
“약을 아직 안 드셨네요.”
“이거 무……슨 약이야?”
“그냥 진통제입니다. 자주 드셨던 약인데 기억 안 나십니까?”
의심스러워하는 나를 보고 기하는 아까 내 손에서 빼앗은 다른 한 알을 보란 듯이 자신의 입에 털어 넣더니 내 손에 있는 물병을 가져가 마셨다. 그의 목울대가 울리는 것을 보며 따라서 약을 입에 집어넣었다. 동생이 내미는 물병을 잡아 물을 들이켜자 순식간에 약이 목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약을 먹는 순간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기하는 손에 쥐고 있던 가운을 펼쳐 내게 입혀 주었다. 몸이 안 좋은 걸 알고 있다는 듯 배려하는 행동에 또 귀에 열이 올랐다. 내 허리에 끈을 둘러 가운을 고정한 뒤 그가 숙였던 허리를 펴고 조심스레 내 뺨을 쥐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좀 더 주무시지요.”
“……됐어. 이제 일어나야지.”
“저는 오후부터야 시간을 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전까지는 쉬고 계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목 상태도 안 좋으신데요.”
“내가 알아서 할게.”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내가 들어도 꽤나 퉁명스러웠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괜히 눈치 보며 덧붙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잖아.”
정답이었는지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뭐 다른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저번 주말은 저녁 외엔 제대로 함께 있지 못했지 않습니까. 손님도 오셨고 제가 많이 바빴고요. 오늘은 방해받지 않고 내내 같이 보냈으면 좋겠군요.”
손님……, 그러고 보니 그 일도 해결해야 했지.
표정 관리가 안 될까 봐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비교적 신에 비해 나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 동생도 최근에 내가 저지른 몇 가지 사건 덕분에 어려워져서 같이 있는 게 괜히 거북했다. 지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또다시 스킨십을 시도하는 것도 불편한 이유 중 하나였다.
* * *
“자기 목소리는 또 왜 그래? 반항하는 거야?”
날이 밝기도 전에 불려 오게 된 박현진은 내 상태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잔소리를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자꾸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불러 대면 자기가 본가 오는 날에 맞춰 나도 병가 낸다? 목소리는 내가 어떻게 고쳐 줄 수가 없어. 아이고 성대가 엄청 부었네. 그러게 왜 쓸데없이 입은 열고 그래.”
“말을 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라…….”
“아― 하자. 아―.”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입을 크게 벌리자 목구멍 안으로 무언가 이상야릇한 액체를 집어넣었다. 씁쓸한 맛이 나는 걸 억지로 삼키며 쿨럭거리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더니 고개를 젓는다.
“언제까지 몸을 이렇게 혹사시킬 건지. 신께 좀 유하게 굴어. 자기가 천년만년 쌩쌩할 줄 착각하면 오산이야. 신체 나이는 젊음을 유지한다 쳐도 기력이 달릴걸?”
“이거……, 윽, 엄청 쓰네요.”
“하루에 세 번 넣으면 돼. 목소리 나아질 때까지 잊지 마. 또 무식하게 한 번에 다 마셔 버리지 말고.”
그녀가 진저리 치는 내 손바닥에 관이 달린 작은 약병을 올려 주었다. 오늘은 저번처럼 집사와 동행이 아니라 남자 간호사와 함께 방에 들어온 게 다행이었다. 피가 묻은 거즈를 수거하는 그를 돌아보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누님. 혹시 제가 부탁드린 건…… 구하셨습니까?”
현진이 어깨까지 들썩이도록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근처에서 시중을 들던 간호사를 부른다.
“저기, 미안한데. 잠깐 좀.”
“예? 선생님. 뭐 필요하신가요?”
“내 자리 가면 두 번째 서랍에 있는 파란색 파일이랑 조제처 가 보면 내가 처방한 약 있을 거예요. 두 개 좀 지금 챙겨 올래요?”
“그럼 고용인을 보낼까요?”
“아니 자기가 좀 가져와요. 다른 고용인들은 말해 줘도 어디 있는 건지 모를 거야.”
간호사는 자기가 도울 일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선다. 간호사를 대신해 다른 고용인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박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며 도와주는 게 과연 맞는 건지 모르겠네.”
“감사합니다. 구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힘들진 않았어. 동생한테 물어보니 바로 알려 주더라고. 그래서 번호를 알아내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랑 그 남자가 연관되면 안 될 것 같아. 비단 신께서 노여워하실 걸 제쳐 두고서라도 그 남자가 자기를……. 원래 좀 난봉꾼 기질이 있는 남자라고 유명하긴 했어도 그렇게 초면에 덜컥 아무한테나 손을 대는 남자는 아니었거든. 그래서 혹시 그 남자가 뭘 알고서 자기한테 손을 댄 건가 싶어서. 만약 그렇다면 절대로 엮이지 않아야 하잖아.”
“제가 신의 약점이라서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미안한 표정으로 ‘응…….’ 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솔직하게 나오니까 그녀가 내뱉은 말이 상처가 되진 않았다.
“신께서 자기에게 얼마나 집착하고 계신지 나도 잘 아니까……. 그 남자가 험한 생각을 하고 자기한테 접근했다는 걸 알면 못해도 피바람은 기본으로 불겠지. 신을 흔들기 위해서 자기를 건드렸어도 문제, 제물인 걸 모르는 상태서 엄한 마음을 품고 접근했어도 문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와 그 남자가 엮여서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진 않아. 예감이 아주 안 좋다고.”
“저도 압니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것만 확인하고 바로 끊을 겁니다. 누님께서 걱정하실 일 없게 할게요.”
“신을 위하는 일이라고 했기에 도와주는 거야. 알고 있겠지? 자기가 그분을 반하는 행동을 하면 아무리 내가 자기 편이라도 어쩔 수 없이 곧바로 신께 알려 드릴 거라고.”
그녀가 내가 신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는 것을 이해해서 다행이었다. 내 동생을 사랑하고 있는 누님이었기 때문에. 기하를 이 집안에서 해방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말에 흔들렸다. 나를 건드려 놓고 무사히 돌아간 강준형이라면 기하와의 거래에서 신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기하를 해방시키기 위해. 기하는 나를 막기 위해 같은 자료를 찾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아버지가 자신의 몸과 함께 전부 다 전소시키고 가 버린 신의 사료를.
“자기가 하고 있는 생각이 전부 억측인 건 알고 있지?”
박현진은 결국 휴대 전화를 꺼내 패널을 조작해서 나에게 내밀었다. 건네받으려 손을 뻗자 손을 물리더니 갈등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꼭 이 방법밖에 없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고 싶어요. 그 아이를 위해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와 기하에게 약한 여자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약속해. 딱 한 통화만이야. 전화번호는 외우지 말고. 지금 내가 보는 앞에서 통화하고 만약 일이 어떻게 풀리든 간에 이 통화를 마지막으로 생각해.”
“네.”
“나는…… 말렸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나도 이 남자와 오늘 아니면 말 섞을 일 없을 겁니다. 십 분 정도면 끝날 겁니다. 약속할게요.”
기왕 칼 뽑은 김에 고용인이 들이닥치기 전에 해결을 보고자 전화하기엔 비교적 이른 시간이지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옆에서 지켜보는 박현진은 자신이 걸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얼굴을 굳히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휴대 전화를 귀에 대고 강준형이 받기를 기다리는데 계속 통화 연결음만 들릴 뿐 받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안 받아?”
안 받았으면 좋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묻는 현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무래도 너무 이른 시간에 전화를 한 건가 싶다. 현진은 단 한 번의 기회라고 말했다. 그녀와의 약속으로는 이게 연결되지 않으면 끝이었다.
사십 초가 넘어가 받지 않는가 싶어 혀를 차며 그냥 끊어 버리려고 휴대 전화를 귀에서 뗐을 때였다.
달칵.
“……어.”
체념한 상태서 들리는 연결음에 나도 모르게 당황해 휴대 전화를 든 채로 말을 잃었다.
수화기 너머로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보세요.
아직 잠에 취해 보이는 나른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
“받았어? 젠장!”
굳은 표정을 본 현진이 절망해서 테이블 위에 길게 늘어졌다. 날 희롱하던 남자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기분 나쁜 기억을 불러일으켜서 선뜻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망설이자 참을성 없는 남자의 어조가 곧바로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누구십니까.
남자의 퉁명스러운 말을 듣고 그제야 그가 두 마디를 말하는 동안 내가 인사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실례지만 강준형 씨 맞습니까?”
맞겠지. 몇 분 말을 섞어 보지도 않았는데 이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귀에 들어오는 거슬리는 억양은. 잘못 건 전화가 아님을 알자 남자가 좀 더 누그러진 말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이기현입니다. 저번 주에 잠깐 뵈었었죠.”
―……누구라고?
내 목소리가 평소와 많이 다르긴 하지. 특색이 없는 목소리였을 텐데 지금은 쉬어서 장난 아니게 꽉 잠긴 탁한 목소리였다. 나는 흠흠,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이기현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잠깐 통화 가능하십니까?”
―……이기현? 이기현이라…….
내 이름을 몇 번 되뇌는 걸 보니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닐 테고. 겨우 한 시간 남짓 만난 사이라 내가 기억이 안 나는 건지 남자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한 부가 설명이라도 시작해야 하나 고민했을 때였다. 앞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차갑고 거친 어조로 남자가 불쑥 내뱉었다.
―이봐, 당신 기자야? 어디서 냄새를 맡고 전화했는진 모르겠지만 가만두지 않겠어. 아침부터 짜증 나는군. 혼나기 싫으면 두 번 다시 걸지 마.
반길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남자의 이런 반응은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주먹도 오갈 뻔했던 사이였는데 그새 못 알아보다니 섭섭하네요. 강준형 씨.”
내 말이 끝나자 몇 초간 침묵이 흐르더니 강준형이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이기현 씨……? 일영의 이기현?
“……예. 맞습니다.”
―설마 정말로 이기현 씨였습니까? 허…….
수화기 너머로 남자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좀 더 잠이 깨서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제야 겨우 믿어 주나 보다.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당신 목소리가 대체 왜 그럽니까? 이 날씨에 감기라도 걸렸어요?
목소리가 그렇게 이상했나. 남자의 놀라는 어조에 기침을 몇 번하며 목을 다시 가다듬고 있자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더군다나 당신이 내게 먼저 전화를 걸 줄은 생각지도 못해서 누가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알았지. 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전화한 겁니까?
“아침부터 전화 걸어서 죄송합니다. 뭘 여쭤보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 시간에 전화했습니다. 지금 통화 괜찮으십니까?”
―하하…… 그럼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먼저 연락한 겁니까?
“일영과 맺으셨던 계약 관련해서 문의 좀 드리고 싶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수화기서 실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일 얘기였습니까? 재미없게……. 대리인을 안 통하고 직접 전화했기에 기대했더니만. 당신이 계약 쪽으로 무슨 문의할 것이 있어서요?
“계약서의 내용 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대리인을 통하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요.”
―그야 귀찮긴 하겠지. 근데 그게 절차라서.
일 얘기인 줄 알자마자 느슨했던 강준형의 반응이 날카로워진다. 이제 저번처럼 미친 듯이 내 약점을 파고들려고 할 거다. 긴장하며 허리를 당기자 잊었던 둔통이 느껴졌다.
―계약의 주체가 당신이 아닌데 계약서는 갑자기 왜 보려고 합니까? 저번에 이 대표가 하는 소리 못 들었어요? 뭐라더라. 자기는 당신을 포함한 계약을 한 적 없다고 했던가? 대표가 그렇게까지 얘기했는데 당신이 이렇게 뒤에서 보려고 나와도 되는 건가?
“그래서 당신께 이렇게 직접 부탁드리고 있는 거 아닙니까. 물론 그냥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요?
“계약서를 제게 공유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영이 강준형 씨 측에 약속한 금액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내 제안이 퍽 뜻밖이었는지 빙글거리던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며 손익 계산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제안을 했는지 저울질을 하고 있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에게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물음이 되돌아왔다.
―이 계약이 대체 뭐길래 그럴 가치가 있습니까? 겨우 계약서 하나 보겠다고 그 정도 돈을 지불하겠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 봅니다. 이거 너무 밑지는 딜을 해 오니까 무서운데.
“저라면 상대가 순진한 구석이 있구나 싶어서 덥석 그러겠노라고 하겠습니다. 당신은 손해 보는 것 없지 않습니까.”
저번에 그가 했던 말을 들먹이자 뭐가 즐거운지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인상을 찌푸릴 만큼 한참을 큭큭거리며 웃던 강준형은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더군다나 당신 같은 타입이 이렇게 나오는 건 더 위험하지. 덥석 삼켰다가는 탈 날 걸 뻔히 아는데…….
“…….”
―뭐 어지간히 달콤한 제안이긴 하네요. 일순간 흔들릴 정도로.
아 이런. 오판이었나. 침묵하는 내게 그가 느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기현 씨. 나 같은 타입은 어떻게든 속여서 이겨 먹으려 하지 말고 살살 예쁘게 구슬리면 잘 넘어갑니다. 머리보다 가슴에 약하거든. 재력으로 찍어 넘기려 하지 말고 편하게 얘기해요. 당신, 그 계약서가 왜 필요한 건데?
은근슬쩍 반말을 섞는 말투도 말투지만 애초에 나와 대등한 거래를 진행할 마음 따윈 없는 태도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현진이 내 반응에 불안한 표정으로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쳐다본다. 이렇게 씨름할 시간이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솔직하게 왜 필요한지 얘기하며 애원하면 뭐…… 당신 부탁 하나 못 들어줄 것 없다는 소립니다. 지금처럼 딱딱하게 굴면서 계약금이니 뭐니 하지 말고요.
“그쪽은 다른 계약할 때도 이렇게 막무가내식으로 합니까?”
―당신 말에 답이 나와 있네. 다른 계약할 때는 이런 식으로 안 하지. 지금 나는 계약을 하고 있는 게 아니고.
“그럼 지금 나랑 너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데요?”
하하하, 내 비아냥에 휴대 전화를 통해 들리는 남자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글쎄…… 당신이랑 뭘 하면 좋을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 이 말을 빼먹었네. 직접 만나서 말입니다. 일단 얼굴 보고 마주 앉아서 왜 계약서가 필요한지 한번 설득해 봐요.
저번에도 느꼈지만 이 남자는 대화할 때 계속 이런 식이었다. 집안사람들과 상대하며 나름대로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 같은 변화구는 처음이었다.
내 얘기는 들어 줄 생각을 하지 않으며 자기의 페이스대로 억지로 끌고 들어간다. 실제 만나는 것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고 스스로 못 박아 두었던 터라 그의 요구에 머리 한편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내 제안은 완전히 무시하는데 그쪽과 더 대화할 가치가 있습니까?”
―아니지. 당신 제안에 내 요구 사항을 첨언했을 뿐이지. 좀 더 부드럽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당신은 돈 안 잃어 좋고 나는 원하는 걸 얻어 좋고. 서로 윈윈 아닙니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걸 보니 거래할 마음이 없는 걸로 알고 이만 끊겠습니다.”
욕이 튀어 나갈 뻔한 걸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겨우 참아 냈다. 참을 인을 새기라면 바위에라도 새길 수 있을 것 같다. 강준형이 다급하게 잠깐만 기다리라며 한숨을 쉬었다.
―진짜 고집이 세네……. 알았습니다. 하아……. 내가 막무가내가 아니라 지금 기현 씨가 막무가내예요. 누가 이런 제안을 이렇게 개인 통화로만 합니까? 생각할 시간도 안 주고.
“겨우 계약서 공유 정도의 가벼운 일에 계약금 절반을 건다는데 꼭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그쪽 판단력이 나쁠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제 실수네요.”
―설사 지금 내가 기현 씨의 제안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애초에 정말 그런 방식은 쓰지 않습니다. 모든 거래는 직접 만나서 하는 게 제 철칙이라서요. 전화로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바로 만나시죠. 낮부터 문을 여는 조용하고 좋은 술집을 알고 있습니다.
“만나는 게 당신 철칙이라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게 제 철칙입니다. 굳이 만날 필요 없는데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화를 듣던 현진이 당황한 눈을 했다.
“그 남자가 만나자고 그래……? 절대 안 돼.”
안 만납니다.
입 모양으로 말하자 그녀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입매를 일그러뜨린다. 약속했던 십 분이 이제 슬슬 지나고 있었고 현진이 더 이상 봐줄 수 없다고 휴대 전화를 뺏어 가도 할 말 없었다. 어떻게 자연스레 얘기를 꺼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 동안 나를 설득하기 위해 조급해진 남자가 뜻하지 않은 말을 흘렸다.
―왜, 이기하 대표를 벗어나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까?
“―…!”
전화를 실패했을 경우 다른 루트를 생각해 보고 있던 나는 남자의 말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단 한 번의 헛손질도 없이 핵심을 찌를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이 남자의 눈치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지. 날 한 번 더듬어 본 것으로 내 상대가 남자인 것도, 동생과 부적절한 관계인 것도 꿰뚫어 봤었다.
―저번에 보니까 당신, 동생을 굉장히 무서워하더군요. 이기하 대표는 당신을 아주 발라먹을 것처럼 구는데 보통 관계는 아닌 거 같았고……. 대표가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거 같긴 했으니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대단히…… 무례한 억측입니다. 그쪽이 저지른 무례의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리 오만하게 굽니까?”
―좀 솔직해져요. 그때 당신네 누가 봐도 그런 사이였어. 같이 봤던 우리 그룹 사람들 입막음하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압니까? 감사하진 못할망정 너무하네.
“…….”
―당신이 남한테 둘 사이를 들키고 싶지 않다면 내 입이 아니라 이 대표나 관리해야 할 겁니다. 그 남자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니까. 아니 오히려 들키길 바라며 소유욕을 드러내던데?
“그 얘기를 지금 왜 하는지 모르겠군요. 비난하고 싶었습니까? 그래서 지금껏 내 얘기를 무시했던 겁니까?”
―내가 그런 걸로 왜 비난을 합니까? 하…… 어쩌다 이기현 씨한테 내 이미지가 그렇게 쓰레기로 굳어졌나……. 자격지심 때문에 지금까지 그리 날카롭게 굴었어요? 그런 걸로 비난하기는 더 충격적인 걸 많이 봐 와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동생과 배덕한 일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십여 년을 시달려 오던 나는 강준형의 그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뜬금없이 위로받은 것만 같아 당황스러웠다. 남자의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하는 성격상 선의로 꾸민 말도 아닐 터라 더 그랬다.
―동생한테 보여 달라면 간단할 계약서를 남인 내게 돈을 퍼부으며 요청하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당신이 그 남자에게서 등을 돌리려는 건지 누구라도 알아챌 겁니다. 그런 의미로 차라리 나에게 다 털어놓고 같은 배를 타는 건 어떻습니까? 기왕 등을 지기로 했으면 갈아타기엔 나만 한 인물이 없을 것 같은데.
“동생과 일에 관한 얘기는 애당초 하지 않습니다. 우린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주는 편이니까요.”
―그래서 뒤에서 몰래 나한테 계약서를 보여 달라고 하고? 무슨 놈의 존중이 그럽니까?
“내 존중은 그럽니다. 딱히 이번 KNG와의 계약뿐만 아니라 다른 곳과 계약을 맺을 때도 마찬가지로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건 강준형 씨가 처음이고요.”
―허…… 다른 곳과도 이런 거래를 해 왔다고? 여태껏?
“굳이 일선에서 활동할 필요 없이 계약서 하나만 봐도 그룹 일 전반에 대한 건 파악할 수 있으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해하실 줄 알았는데요.”
내 말이 뜻밖이었는지 쉼 없이 떠들던 남자의 입이 멈췄다.
―그럼 앞에선 모르는 척 순진하게 굴면서 뒤에서는 계약서를 쥐고 동생이 뭘 하고 있는지 다 감시하고 있다고? 하하…… 당신네 진짜 대단하네요. 어떻게 형제가 그렇게 똑같지? 하여튼 정말 재밌다니까.
“…….”
―뭐 그렇다고 치고 이번 건은 안됐군요. 비싼 돈 치러가며 계약서를 본다 한들 이기하 대표가 무슨 생각으로 나와 계약을 맺은 건지 당사자인 내가 파악이 안 되는데 당신이 본다고 알려나? 재미있어 보이니 도와주고 싶은데 기현 씨가 나를 너무 미워하니…….
“동생이 계약에 특이 조항을 넣는 거야 늘 해 오던 일입니다. 미술품이나 골동품이나…… 고서 같은 것을 수집하니까요.”
―그랬나요? 추가로 공개한 적 없는 문서를 요구하기에 무슨 꿍꿍이인지 싶더라니……. 본가도 옛 건축 양식을 그대로 고수하던데 그게 이 대표 취향인가 보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장이 덜컥하고 멈췄다. 남자가 무슨 다른 말을 했지만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기하의 요구 사항에 틀림없이 고서가 있었다.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그래 네가 찾는 거라면 그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만일 너라고 한다면 나 역시 그랬을 테니까.
이제 계약서 따위를 볼 필요도 없어졌다. 이제 해야 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하와 똑같은 것을 내 손에 쥐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가 아닌 사본이라도. 기하보다 늦어도 좋으니 그 아이가 다 없애 버리기 전에.
―이기현 씨? 내 말 듣고 있습니까?
내가 한동안 침묵하자 혼자서 떠들던 남자가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나를 불렀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왜 말이 없어요. 대답이 없어 놀랐잖아요.
“잠시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럼 어쨌든 제 제안은 거절하시는 거군요.”
―왜 그렇게 나를 만나는 걸 싫어합니까? 내가 뭐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만나면 운 좋게 계약 조항에 있다던 문서의 사본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애당초 내가 위험을 감수하고 남자와 말을 섞고 있는 게 동생을 위해서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이 남자를 만나는 걸 기하가 결코 모를 리가 없을 거다. 내가 좋은 뜻으로 만났든 나쁜 뜻으로 만났든 용납해 줄 리가 없었다.
강준형이라면 내가 자기를 만나러 나갔다는 걸 빌미 삼아 기하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할지도 모르지. 아니 이 남자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돈으로 매수가 되지 않는다는 건 본인이 증명했고 흥미 본위로 움직인다고 말했으니까.
나는 결국 빠르게 협상을 포기했다. 남자를 통해 사본을 뜯어낸다는 생각도 일찌감치 접었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그럼 제 용건은 끝났으니 이만 끊겠습니다.”
―네? 갑자기…….
“전화 받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기현 씨? 무슨…….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전원을 눌러 버린 후 현진에게 휴대 전화를 내밀자 그녀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그런 식으로 막 끊어도 돼?”
“이런 식으로 끊어야 빈정 상해서라도 연락을 안 할 겁니다. 나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어 하는 남자니 다시 전화 거는 어리석은 짓 역시 안 할 거고요.”
짜증 섞인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고 있던 휴대 전화가 다시 지이잉 하고 울었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우리는 동시에 침묵했다.
“…….”
“…….”
“……음. 빈정 상했다고 연락 안 하는 타입은 아닌가 본데?”
“……아무튼 저는 정말로 이제 더 이상 용건이 없습니다. 원하던 정보는 알아냈으니 됐습니다.”
“알아냈다고? 정말로 사료가 있었어?”
“신에 관한 것인 줄은 몰라도 기하가 요구했던 것 중에 문서가 있었답니다.”
“그래? 전화가 의미 없는 일은 아니었네.”
의미 없지 않았다고 말은 하면서 현진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내가 이제 그 자료를 빼내겠노라고 벌일 일들을 미리 두려워하는 듯했다.
“자기가 계약서를 요구할 줄은 몰랐어. 그냥 애초에 사료가 있었느냐고 묻지 그랬어?”
“그렇게 물으면 저 남자가 잘도 곱게 알려 주겠네요. 그 많은 돈을 준대도 끝까지 만나야 보여 주겠다는 남잔데.”
“어디서 그런 돈이 나서 계약하려고 그랬어? 깜짝 놀랐잖아. 계약서 공유로 계약금 절반이라니.”
“줄 생각 없었어요.”
“뭐?”
계속 울리고 있는 휴대 전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통화 연결이 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양심이 찔렸다.
“처음부터 돈을 크게 불러서 자존심 상하게 만들려고 했거든요. 나를 아랫것으로 깔보고 있는 게 뻔한데 자길 돈으로 매수하려 들면 자존심 세우다 계약서의 내용을 흘릴 줄 알았죠……. 근데 설마 만나면 그냥 보여 주겠다는 소리를 할 줄은 몰랐네요.”
남자가 만남을 전제로 선심을 썼을 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야 특수한 상황이니 그렇지만 강준형 입장에서는 만나 주는 것만으로 적어도 몇십억을 세이브할 수 있는데 고집 피우는 내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그 남자와 쓸데없는 공방을 벌이는 데 몇 분이나 허비했다. 중간에 고용인이나 누가 들어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일 뿐이다.
“말이나 잘 통하면 어떻게 구슬려서 사본도 노려봤을 텐데. 아마 내가 노리는 게 그 자료라는 걸 알게 되면 손에 넣기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그 남자 측에 있는 걸 알았으니 구하려 들 거 아냐.”
“생각해 봐야죠……. 자료를 구할 때도 누님께서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슬쩍 던져 보자 다시는 너랑 엮이지 않을 거라고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흔든다. 아무튼 이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걸 생각해 보자. 강준형이 가진 자료가 과연 그 혼자만 가진 자료일지 KNG그룹 일가가 다 열람이 가능한 정보인지부터 파 보는 게 좋겠지.
현진은 부재중이 찍힐 때까지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다가 끊기는 걸 보고 안도했다. 그러나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하자 결국 알코올이 담겨 있는 유리컵 안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얇은 유리잔을 몇 차례 진동시키며 시끄럽게 울던 기기는 이윽고 고장이 났는지 작은 기포만을 남기고 조용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