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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았던 낮이 거짓말인 것처럼 주변이 어둑해지더니 얼마 안 되어 곧바로 소나기가 쏟아졌다. 차를 마시고 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이 가까이 있어서 조금의 비에도 순식간에 풀 냄새와 꽃 냄새가 피어오르며 분위기가 젖어 들었다.
“……여우비야? 일기 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는데.”
찻잔을 내려놓으며 현진이 휴대 전화를 집어 들자 집사가 일어나 전등 불 세기를 조절했다. 그는 창가에 다가가는 나를 보고 상냥하게 덧붙였다.
“기현 님. 창에 가까이 서 계시면 젖으십니다. 아직은 바람이 차갑답니다.”
파란 기가 가시지 않은 하늘이 찢어진 것처럼 비를 쏟아 내고 있었다. 곧 우르릉! 하고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는 소나기는 아닌 모양이다. 집사의 말대로 창문 안에 빗방울이 툭툭 튀어 들어와 소매를 적시기 시작했다. 창밖의 정원엔 벌써 자욱하게 물안개가 끼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손을 뻗으니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손목까지 척척하게 젖어 들었다.
“기하는 아직도 본채에 있습니까?”
“예. 일이 끝나시면 안채로 오신다 하셨습니다.”
“비 오면 손목 쓰는 걸 불편해할 텐데…… 시중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그래? 대체 왜 비만 오면 그럴까. 근력은 다 회복되었을 텐데 정밀 검사 한번 해 봐야겠네.”
내가 손목을 자해했던 날 내 눈앞에서 동생은 더 깊게 손목을 베었고, 그날 제시간에 치료를 받지 못한 탓에 평소엔 완력이 대단하지만 비 올 때만큼은 왼쪽 손목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덕분에 비가 오는 날만 되면 죄책감에 기분이 저조해진다. 서둘러 다가온 집사가 부드러운 천으로 비에 젖은 손과 소매를 닦아 주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이미 모시고 있을 겁니다. 가주께서 기현 님이 걱정한 걸 들으시면 기뻐하시겠군요.”
“이런 사소한 것까지 말 옮기지 마십시오. 유난스럽네요.”
“두 분께서 사이가 좋으신 것이 저희의 기쁨인걸요.”
“서 있지 말고 앉아. 몸도 안 좋은 게 기운도 좋다니까.”
거동이 불편해도 뛰거나 험한 운동이 아닌 이상은 움직이는 데 제약이 없는데도 그녀는 아침부터 내 몸을 지나치게 걱정했다. 문득 몇 시간 전 동생의 품에 안겨 들어왔을 때 현진이 보여 줬던 의미를 알 수 없던 표정이 생각났다. 미안하다―고 했었지.
“…….”
현진이 차를 따르다 말고 시선을 느끼고는 내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자기?”
“누님. 아까 하셨던 말씀이 무슨 뜻이었어요? 제 몸이 좋지 않다고요?”
“…….”
난데없이 그런 걸 물을 줄은 몰랐는지 나를 주시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흔들리더니 앗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소음이 들렸다. 티스푼이 차받침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 이런. 미안한데 닦을 것 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 앞에서 대기하던 고용인이 천을 들고 다가왔다. 집사가 흘러넘친 그녀의 잔을 가져가고 새것이 놓일 때까지 박현진은 어색하게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긴 하는데 말을 하진 않는다.
곧 할 일을 마친 집사가 돌아와 현진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평범한 행동이었지만 조금 전 현진의 반응 덕분에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내가 눈치 없게 집사 앞에서 화제를 꺼냈던 거였다. 현진이 말리지 않았다면 별생각 없이 주절주절 떠들었을 뻔했다.
“…….”
왜 현진과 집사가 함께 행동을 하는가 했는데.
입을 다물고 굳은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찻잔만 들여다보았다. 집사가 옆에 있기 때문에 말을 못 한다면 내가 한 물음이 뭐 문제가 있는 거였나? ……그저 왜 몸이 안 좋은지 궁금했을 뿐인데…….
……아니다. 내가 현진에게 한 물음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나에게 전할 말이 중요했던 거다.
저들이 현진의 입을 봉하고 있다……. 아침만 해도 현진이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내가 기하와 있었던 짧은 시간 동안에 알 수 없는 무슨 압력이라도 받았던 걸까. 오늘 내 방에 와서 시중을 들고 있는 집사는 고용인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해당하는 자였다. 평소엔 기하에게 붙어 있을 텐데 내 시중을 들고 있는 게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날 전담하던 다른 고용인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안겨 들어오기 전 현진과 함께 있던…… 기하에게 혼나던 이들.
저녁 식사를 들고 왔던 고용인들도 대부분 처음 보는 분들이었기에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침에 있던 고용인들은 어디 갔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낮에 누님과 같이 왔던 분들 말입니다. 그…… 강준형에 대해서 말해 줬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현진이 눈에 띌 정도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녀도 나처럼 표정 관리가 기가 막히게 안 되는 타입이었다.
“아랫것들에게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기현 님.”
늘 느끼지만 본인들 스스로를 아랫것들이라고 칭하면서 내 머리 위에 서려고 하는 게 불쾌하다. 대부분 고용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이런 식이었다. 복종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구슬려서 회유하려는 것.
“어디 갔냐고 물었습니다.”
“본채에 손이 필요해서 그쪽으로 보냈습니다. 손님들께서 몇 분 더 오셨거든요.”
준비해 둔 답을 내어놓듯 태연한 말투에 오히려 의문만 늘었다. 집 안에 상주하는 고용인들만 못해도 몇십 명일 텐데 안채의 인원을 보내야 했다니?
쾅!
멀리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지축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더 센 물줄기가 쏟아졌다. 시원한 소리가 지붕을 때리며 장마도 아닌데 하늘이 계속해서 우릉우릉 울었다. 좀 전에 전등의 밝기를 조절했는데도 방 안은 또다시 어둑해지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바깥과 방 안은 아예 다른 세상 같다. 밖은 저렇게도 생동감이 넘치고 젖어 들어가는데 안은 고요하게 침잠한다. 빗줄기가 거센데도 소란스럽게 뛰어가는 사람 한 명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안채에만 투명 벽을 세워 뒀다고 느껴질 정도로 기이한 이질감과 정적이었다.
“여기 왜 이렇게 조용하죠?”
“고요한 게 싫으시면 음악을 좀 틀어 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아니면 책이라도 읽으시겠습니까? 혹시 찾으실까 봐 좋아하시는 작가님 신작을 구해 뒀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읽던 책이나 마저 읽어야겠네요. 정원에 두고 왔을 텐데.”
내가 슬쩍 떠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늉을 하자 문가에 서 있던 고용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고 계십시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린 사이로 문 앞에서 대기 중인 고용인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마치 나를 가둬 두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다. 누가 나를 찾아오는 것도 막고, 내가 나가는 것도 막아 놓듯이.
그리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 한 가지 경우만이 떠오른다.
“……그 남자가.”
무심코 흘린 말을 들은 방 안의 사람들이 동시에 내 입술을 쳐다보았다.
“강준형이 아직도 본채에 머물러 있군요?”
내 물음에 처음으로 집사의 완벽한 미소에 설핏 금이 가는 게 보였다. 내 입에서 그 남자의 이름이 나온 게 불쾌한 건지, 아니면 그 남자의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진 판단할 순 없었다.
“그런 무뢰한의 이름은 잊어버리세요 기현 님. 당신같이 귀하신 분 입에 오르내릴 이름이 아닙니다. 기억에서 지워 버리십시오. 앞으로 마주칠 일도 없을 테니까요.”
일단 전자는 맞나 보다. 그런데 아무리 낮의 일 때문이라 해도 완벽을 기하던 고용인의 태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악의는 기묘한 이질감이 느껴지게 했다.
“기하가 그들이 본채에 있는 걸 용납했습니까? 아니, 여기 오지 않는 걸 보면 허락을 한 게 기하로군요?”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참았죠? 당장 계약이고 뭐고 엎을 거 같더니.”
“가주께서도 취소하고 싶으셨을 테지만 어쩔 수 없으셨을 겁니다.”
아무래도 이런 일로 쉽게 무르기엔 중한 계약이었으니까요, 그녀가 비워진 내 잔에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오늘 그 난리가 났었는데 용케도 계약을 체결하네요. 나 때문에 다 망친 줄 알았는데.”
“KNG그룹에도, 우리 측에도 상당히 메리트 있는 거래였습니다. 해서 이례적으로 그룹 분들이 저희 집에 직접 초대되지 않았습니까. ……저렇게 예의 없는 작자들일 줄 알았다면 애초에 가주께서 결코 응하지 않으셨을 테지만요.”
“심지어 기하가 응한 거래였다고요? 대체 무슨 거래였길래 대리인도 아니고 가주가 직접 나선 겁니까? 원래 안 그러잖아요.”
“죄송합니다. 기현 님. 저도 그렇게 내밀한 사정은 알지 못한답니다.”
강준형의 안부를 묻지 않길 바라선지 평소보다 질문에 성의껏 답해 준 집사가 내 기색을 살폈다.
나를 만진 걸 알고도 그 남자를 본채에 그대로 놔뒀다고? 심지어 손님들을 모시기 위해 인원을 충원하고 안채를 폐쇄하면서까지? 평소라면 계약이고 뭐고 날 건드렸으니 무슨 이유를 들어서라도 해쳤을 게 분명한 아이인데.
대체 그 대단한 메리트가 뭐였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기하에게 있어서 나보다 더 중한 게 절대로 있을 턱이 없는데.
아니 깊이 고민할 필요가, 돌려 생각할 필요가 뭐 있겠어. 단순하잖아. 나보다 중한 사안이 없다면 기하의 그 메리트라는 게 바로 나에 관한 것이겠지. 적어도 어떤 부분이든 KNG와의 계약은 나와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기하가 강준형의 교만을 참아 준 거다.
거기까지 사고가 진행되자 쿵…… 쿵……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내 동생이 강준형과의 거래에서 무엇을 요구했는지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 * *
“강준형의 전화번호 좀 알아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붕대를 갈기 위해 잠시 집사를 물리고 커튼을 치는 현진에게 속삭였다. 앞뒤 말을 자르고 뜬금없이 던진 부탁에 현진은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한동안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누님? 하고 불러 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목소리를 낮춘 채 급하게 소곤거렸다.
“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기어이 돌았어? 신이 아시면…….”
“그래서 누님께 부탁드리는 거잖습니까. 그나마 누님이 외부자이자 동생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뒷배를 가지고 있으시니까요.”
이런 일로 부탁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현재로서는 박현진의 능력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십여 년 동안 집안일에 일부러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니 죄다 내 눈을 가릴 생각밖에 안 하는 인간들뿐이라 그녀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전화번호는 대체 왜? 아까 열받은 거 안 풀렸니? 전화해서 오늘 왜 그랬냐고 욕이라도 할 셈이야?”
현진의 조수가 트레이를 들고 커튼을 젖히며 들어왔다. 현진은 당황한 표정으로 조수에게서 약을 건네받았다.
“옷, 지금 옷 벗길 거니까 잠시 옆에서 대기하고 있어요.”
내가 현진을 제외하고는 남에게 다친 부분을 보여 주지 않는 버릇이 있던 게 다행이었다. 조수는 별 의심 없이 뒤로 물러나 다시 커튼을 치더니 침대 앞에 섰다. 커튼에 지는 그림자를 보고 현진이 다시 내 위로 고개를 숙여 목의 붕대를 끌러 내며 속삭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못 들은 걸로 할 거야.”
“누님께서 안 알려 주셔도 알아낼 방법은 있습니다. 꼭 필요해서 그래요.”
내 애원에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부탁을 들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더니 내 가운을 움켜쥐며 빠르게 속삭였다.
“나까지 자기한테 이런 말 하긴 싫지만 신을 거스르지 않는 게 좋아. 아까 말도 못 하게 노하셨어. 차마 옆에 사람이 있어서 말을 못 했지만 나와 낮에 함께 있던 고용인들은…… 화풀이를 당했어.”
“…….”
“자기를 제대로 못 모셨다고. 자기가 내 얼굴을 기억하니 망정이지 나도 똑같은 꼴을 당할 뻔했지.”
“……그 남자는요?”
“강준형? 그 남자야 자기 그룹 사람들이랑 멀쩡하게 본채로 돌아갔지. 난 자기가 그 남자한테 신경 껐으면 좋겠다. 자기 입에서 그 남자 이름 나올 때마다 아까 일 생각나서 깜짝깜짝 놀란다고.”
방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점차 더 가까워지자 그녀가 더 내 소맷자락을 바짝 붙들었다. 시간이 없었다. 내 목소리도 다급해졌다.
“아까 말했던 제 몸 얘기는 뭡니까?”
“그건 내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사실 어제 신께서 약에 민감하시기에 오늘 아침에 자기한테 정기적으로 투여되는 약들을 살펴봤는데 이상해. 내가 처방한 약들이 아니야. 하나같이 처음 보는 약이었어. 국내에서 유통되는 게 아니더라.”
“…….”
“선생님? 도와드려야 하나요?”
“아……. 아니요. 잠시만요.”
현진이 재빨리 가운을 끌러 내더니 허벅지에 둘러져 있던 붕대를 빠른 속도로 벗겨 냈다.
그녀가 능숙하게 약을 발라 붕대를 감는 걸 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는 박현진이 전부 제조해 주는 줄 알았는데 약은 다른 데서 공수해 오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확실히 말해 주기 전까지는 내가 주는 약을 제외하고는 먹지 마.”
“약보다 일단은 강준형의 전화번호부터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체 왜 그게 필요한 건데.”
“그건 알려 주시면 말씀드릴게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도 도와줄 수 없어.”
그녀가 심각한 표정을 했다. 거실에 앉아 있던 집사가 우리가 늦어지니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는지 현진의 이름을 부르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초조하게 박현진을 올려다보았다. 길게 얘기해야 겨우 설득될까 말까 할 텐데.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 * *
빗소리에 섞여 저 멀리서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주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냘픈, 바닥으로 꺼질 듯 슬픈 울음소리가.
……현아, 기현아.
뱀에 휘감겨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 꿈에서도 지긋지긋하게 불리는 내 이름이었다.
기현아, 기현아, 기현아, 내 아들. 내 아들아. 내가 잘못했다, 아버지가 잘못했다, 내가 다 잘못했어. 서러워서, 서러워서, 원통해하는 목소리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그 바닥을 다 메운 원한의 바다는 나약해진 아버지를 집어삼켰다.
눈을 감은 그대로 조용히 양손을 올렸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귀를 막았다.
현아. 나를 용서해다오. 용서해 줘. 용서해. 아무도 듣지 않고 해 줄 리 없는 용서를 쏟아 내던 아버지는 한참 뒤 분을 이기지 못해 숨을 헐떡이며 저주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네 잘못이잖아. 네 탓이잖아. 다 네 탓. 너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하는 나를 네가 왜 혐오해. 내가 그렇게, 징그러워?
그러고 있으면 한참 뒤 저주를 중얼거리던 말들이 점차 비명 소리로 바뀐다. 그때부터는 귀를 막아도 들렸다. 그 비명은 또다시 악쓰는 소리로 바뀌었다. 잘못되었다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발악하는 소리. 나를 데려오라고 울부짖는 소리. 유폐된 별채 안에서 방문을 주먹으로 미친 듯이 두드리며 아버지는 내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내가 아버지를 그리 만든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모든 원망과 슬픔과 분노를 내 이름과 함께 엮었다. 내 이름이 고통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내 이름이 속죄로 만들어진 것처럼, 이기현이라는 이름이 모든 단어들의 원인인 것처럼. 내가 자라나고 아버지가 점차 더 미쳐 갈수록 그 빈도가 늘어났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누울 때마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그가 문을 잡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가여운 아버지.
아버지. 그 문은 잠겨 있지 않아요.
별채 문은 아무도 잠그지 않았는데도 아버지는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질 못했다.
*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기척을 내도 모르시더군요.”
따뜻하고 단단한 팔뚝이 뒤에서부터 천천히 몸을 감았다. 뜨거운 체온과 맞닿아서야 겨우 내가 비가 들이치는 창문 앞에서 찬 바람과 튀어 오르는 빗방울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젖었어요.”
“…….”
“안아도 되겠습니까?”
뒤늦은 허락을 구하며 기하가 머리를 기댔다. 나는 멍하니 동생이 내 겉 가운을 벗겨 내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소매 부분이 젖어서 무거워진 겉 가운이 철퍽하고 방바닥에 구겨져 떨어졌다. 얇은 속 가운만 남게 되자 기하는 가뿐하게 나를 들어 올려 바짝 끌어안았다.
일이 끝나자마자 씻고 바로 왔는지 동생의 몸에서 진한 샤워 코롱 향기가 풍긴다. 평소에 짙게 풍기는 단 내음이 아니었다.
“비 냄새가 나질 않네.”
“씻고 왔습니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네 원래 체 향이 더 좋아. 이건…… 낯설어.”
머리 위에서 동생이 기분 좋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 날아갈 겁니다. 형님 옆에 있으면 저절로 풍기기 시작할 테니까요.”
과연. 목덜미에 코를 묻고 있으니 금세 관능적으로 느껴지는 백단 향이 올라왔다. 신기해서 그의 목선을 손가락으로 덧그리자 간지러운지 목을 울린다.
“원래 이런 거였나……. 그래서 항상 나한텐 그렇게 향이 강한 느낌이었나.”
“지금껏 모르셨나요? 다른 사람은 못 맡을 겁니다.”
“왜?”
“그야 당연히 제가 형님만을…….”
기하는 말을 잇다 말고 무엇에 울컥했는지 아닙니다,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대충 예상해서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럼 나도 그런 향기가 있어? 너 같은.”
동생은 내 물음에 잠시 침묵하더니 내 정수리에 코를 묻고 한껏 숨을 들이켰다. 그의 평을 기대하며 올려다보자 난감한 표정으로 웃는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동생의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오래도록 냄새를 맡기만 하다 내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넘기며 전혀 딴판의 말을 건넸다.
“집사가 형님께서 저에게 물어보실 것이 있을 거라 전해 주더군요.”
“…….”
기하가 먼저 저 화제를 꺼낼 줄 모르고 있던 터라 당황했다. 그 여자가 그새 동생의 귀에 흘렸을 줄은 몰랐다. 역시 아까 현진이 내 입을 일부나마 막았던 것이 현명했던 처사였다.
“궁금한 게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고용인에게 물으실 것 없이 저에게 물어보십시오.”
정말로 무엇이든 물어보면 진실만을 말할 것 같은 신실한 태도였지만 물어본 것에 대한 리스크는 고스란히 내가 떠안게 될 터였다.
무엇을 물어볼까. 강준형과 무엇을 거래했냐고? 왜 그를 해치지 않았냐고? 혹시 네가 찾던 것은 내가 찾던 것과 같은 게 아니냐고?
“저녁에…… 안채를 폐쇄했던데.”
허리를 감고 있던 동생의 팔을 천천히 풀어냈다. 기하는 내가 무엇을 긁어내기 위해 저런 걸 묻는지 관찰하는 눈으로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낮에도 날 감시한다고 사람을 붙이고.”
“그 얘기는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이 집은 네가 주인이긴 하지만 나는 네 소유물이 아니야.”
기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저녁에 레지던스로 돌아간다고 했더니 고용인들이 네 허락을 받으라고 했어. 네가 허가하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고.”
“…….”
“그래서 네 허락을 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형님.”
“고용인들이 감히 네 이름을 빌려 말을 지어내진 않았을 테니 네가 그리 명령한 게 맞겠지?”
“……예. 그랬습니다.”
내가 그걸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허를 찔린 표정으로 그가 말을 흐렸다. 집사의 얘기를 듣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걸러 내려 했을 것이다. 아마도 현진의 입을 봉한 얘기나 강준형에 대해서.
“앞으로 내게 감시인을 붙이지 마. 밖에 나가는 것도 제한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 이건 네가 먼저 약속해 줬잖아.”
“오늘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낮의 일도 그렇고 저렇게 비도 많이 오잖습니까. 오늘 밤은 여기서 묵으시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나한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제가 계속 본채에 머물러 상의드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형님께 먼저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겠습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고용인들에게도, 날 감시하는 걸 그만두라고 명령해. 지금처럼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너한테 말을 옮기는 것도 하지 말라고 하고.”
과연 저 말이 얼마나 갈까. 믿어지진 않았지만 내 요청에 기하가 한숨을 쉬더니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하체가 단단히 맞닿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가슴과 둔부로 내려가기 직전의 옆구리를 쓸어내린다. 손가락이 매듭지어 놓은 가운 끈 사이를 천천히 문질렀다. 동생이 매듭을 풀어 버릴까 봐 몸이 딱딱하게 긴장했다. 가운 안에는 드로어즈 한 장만을 입은 상태였다.
“일은 다…… 해결되었어?”
내 긴장을 풀고 그를 긴장시킬 셈으로 던진 질문이었지만 기하는 내가 그룹 일을 입에 올려도 별 반응 없이 그저 내 몸을 쓰다듬는 데 집중했다.
“예. 잘하고 돌아왔습니다.”
“나 때문에 엎어지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평소엔 관심이 없으시더니……. 역시 신경 쓰였나요?”
그 남자가.
기하의 말에 잘린 주어를 못 알아들은 척하고 이번에는 내가 선수를 쳤다.
“……혹시 그 여자애 기억나?”
“무슨 여자애 말씀이십니까?”
“내가 처음으로 사귀었던 여자애. 고등학생 때 말이야.”
예상대로 이건 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내 말에 동생은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형님이 누굴 사귄 적이 있으셨나요? 전 처음 듣는데요.”
정말로 처음 듣는다는 듯한 순진한 목소리로 태연히 대꾸하는 것을 보며 기가 막혔다. 모르긴 해도 여자애에 대한 처분의 결정은 기하의 입김이 닿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너는 아예 내가 다른 누군가를 사귀었던 사실조차도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렸구나.
반항심이 기어오르는 것을 꾹꾹 누르며 동생의 말에 호응했다.
“……그러게. 그렇지. 내가 너에게 말한 적은 없었지.”
“그 여자분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름? 당연한 듯이 그 애의 이름을 말하려던 입이 멈췄다. 그러고 보니 빨개진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 고백하던 그녀의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고작 보름뿐인 연애였지만 생애 첫 여자 친구이자 마지막 여자 친구인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그녀가 췄던 춤도 기억나고 웃음소리도, 팔에 매달리던 온기도, 체온도,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도 기억나는데 어째서 그녀의 이름을 잊어버렸지? 누군가가 지우개로 지워 버린 것처럼 그녀의 이름만이 기억에서 거칠게 뜯겨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예뻤던 얼굴도.
몇 번을 떠올리려 애쓰다 결국 기억해 내지 못하는 나를 보고 기하가 놀리는 어조로 말했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그 여자분이 안됐군요.”
“……그래. 정말로 안됐어.”
내 손등 위로 손을 겹치며 손바닥에 입술을 지그시 눌러 왔다. 잘 관리받아 부드러운 피부가 연신 손바닥에 비벼졌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 따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잊어버리십시오. 이제껏 기억도 못 했지 않습니까.”
입술이 내려오는 걸 지켜보며 그 아이가 만족하도록 말을 번복했다.
“이젠…… 잊었어.”
“……착하네요.”
낮에 했던 것처럼 뜨거운 숨이 입술 위를 덮기 전 얼굴을 돌렸다. 지금도 의식을 놔 버리면 순식간에 마지막 단계까지 뛰어넘겠지. 내 죄의식과 배덕함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숴 버릴 거다.
언제나 행해 왔던 거부에 익숙한 그가 입술 대신 뺨에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촉촉한 입술 표면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기만 하는 가벼운 버드 키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얻어맞는 것처럼 심장이 떨렸다. 동생은 가슴을 밀어 내는 내 손목을 움켜쥐더니 대신 자신의 목에 두르게 만들었다. 손을 풀고 도망가는 것을 잡아채고는 주박 같은 주문을 속삭인다.
“안아 주십시오.”
허공에 머문 시야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제가 어릴 때는 자주 안아 주셨잖아요.”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이 기어이 불협화음을 내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두른 손이 허공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다 힘없이 내려갔다.
거부할 수 없다. 내겐 동생의 애원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으로 동생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 몸을 놓아야만 나와 네가 살 텐데. 하지만 내 목줄을 쥐고 있는 동생이 줄을 풀어주지 않는 한 나는 영원히 이 목에 매달려 있어야 할 것이다.
허리를 감쌌던 동생의 손바닥이 천천히 어깻죽지로 기어올랐다. 기하의 입술이 내 머리카락부터 귓가에 차례대로 쏟아졌다.
따뜻하고 습한 기운이 귓바퀴를 조심스레 물었다가 놓고 부드러운 살덩이가 귀 뒤를 핥았다. 차가웠던 몸을 데우는 숨결에 피부가 부르르 떨렸다. 나긋하기만 했던 입술의 움직임이 피부에 머무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스킨십이 점차 진해졌다.
숨을 참으며 동생의 목을 더 바싹 끌어안았다. 이기하, 그의 이름을 불러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좀 더 필사적으로 동생에게 매달렸다.
곧이어 밖에서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공기가 요동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더 굵은 빗줄기가 몰아쳤다. 열어 둔 창문의 틈새로 바람에 실린 빗방울이 들이치며 바닥을 타닥타닥 적시는 소리와 함께 동생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내 목덜미에 키스하며 기하가 겉 가운을 벗어 어깨에서 떨어뜨렸다. 고급 비단 천은 바닥에 구겨져 떨어지는데도 조금의 소음도 내지 않았다. 동생의 발밑에 깃털이 앉는 듯 한번 사락 하고 내려앉았을 뿐이다. 바닥으로 옷이 한 겹 한 겹 떨어지는 것과 함께, 반대로 드러나고 있는 기하의 몸에는 푸르스름한 능력이 감돌았다.
동생이 신으로 변하는 과정은 아름다움을 더 높이기 위해 화장을 입히는 것과 흡사하다. 인간이었던 몸 위에 신이라는 투명막이 씌워지는 것처럼, 화장의 마지막 단계에 향수를 뿌려 몸을 덮듯이 관능적이고 고혹적인 분위기가 씌워진다.
인간이 아닌 존재로 탈바꿈되며 내가 아는 동생이 아닌 다른 것이 되어 가는 과정. 그게 너를 거부할 때마다 내가 죄책감에 죄어드는 이유였다. 나는 너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밖에 달리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니까.
남자가 마지막 옷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것과 동시에 목을 감고 있던 내 팔을 억지로 떼어 냈다. 눈을 꽉 감자 아프게 턱이 잡혔다. 아까와 똑같이 뜨거운 숨이 입술을 덮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하거나 밀어낼 수 없었다.
* * *
동생일 땐 거부했던 입을 열자마자 얼얼할 정도로 격렬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강제로 벌려진 입술 사이로 따라가지 못한 호흡이 흐른다. 이빨이 아프게 입술을 긁더니 뜨끔하고 표면이 뜯기는 느낌이 들었다.
“…….”
상체를 벗은 그의 몸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체 향이 뿜어져 나와 눈앞이 아찔해졌다. 남자의 페로몬이 몸보다도 먼저 내 위를 덮어 와 입술을 머금을 뿐인데도 온몸이 삼켜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커다란 손바닥이 뒷머리를 감싸 받치며 얼굴을 더 끌어당겼다. 입술과 혀가 진득하게 비벼졌다. 숨을 헐떡이며 팔에 매달리니 그는 입술을 헤집는 걸 그만두고 핏방울을 핥으며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광포한 눈동자가 명백한 욕망을 담고 내 기색을 살핀다. 공포가 들어차 있을 눈을 애써 다른 쪽으로 돌렸다. 남자는 가운을 여미고 있는 내 손 위를 억세게 움켜쥐고는 속삭였다.
“반가워해야지. 네가 기다리던 사람이잖아.”
말의 빈정거림과 달리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다. 내가 원망하는 눈으로 쏘아보자 냉했던 표정에 미소가 걸리더니 다시 얼굴을 끌어당긴다. 좀 전보다는 부드럽게 입술이 겹쳤다. 따뜻하고 촉촉한 촉감만을 느끼라는 듯 매끄러운 입술이 내 찢어진 입술 표면을 나긋하게 쓸어 올렸다. 내부의 불을 지피기에 충분한 상냥함이었다.
벌써 부어오르기 시작한 아랫입술을 열어젖히며 그가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내 허리를 쥐고 있던 손바닥을 더듬어 내리더니 묶여 있던 매듭을 풀었다.
사르륵, 비단 끈의 매듭이 풀리며 몸이 드러나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거칠게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듯 시작된 입맞춤은 곧 다시 섹스의 전희처럼 변질되었다. 더운 숨을 내 위로 쏟아 내며 그는 능숙하게 나를 침대 위로 이끌었다. 열려 있는 창문에서 들어오는 찬 바람에 뜨거운 남자의 품 안으로 파고들자 그가 만족하며 내 몸 위로 올라와 입술을 핥는다.
“매달려 오니까 좋네. 진작 창문을 열고 할 것을.”
맞는 말이었다. 나보다 체온이 월등히 높은 남자의 몸이 이렇게 달갑게 느껴질 수가 없다. 뜨거운 손바닥이 부드럽게 경직된 몸을 쓸어내릴 때마다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내 피부를 천천히 달궈 가며 남자는 그런 내 반응을 모조리 눈에 담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얼굴을 한 남자가, 동생의 눈이 아닌 짐승의 눈을 한 채로.
눈가에 열이 올라 차가운 손가락으로 눈 주위를 꾹 눌렀다.
“눈을 좀…… 먼저 가려 주십시오.”
남자의 중심이 힘을 받아 뜨겁게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는 끝까지 발기하면 그 순간부터는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고 오직 욕망에 충실하게 움직였다. 그나마 남자에게 요구하려면 지금 밖에는 기회가 없었다.
“잠시만. 눈 먼저…….”
“예쁜 말만 할 거 아니면 오늘은 입을 막고 할까?”
안대를 요구할 때마다 그는 항상 불쾌해했지만 오늘은 가뜩이나 심사가 비틀렸는지 대꾸가 모질었다. 신은 화가 나면 잠자리에서 더 심하게 찍어 누르는 타입이었고 오늘 내 몸의 상태는 며칠간 계속된 정사로 오래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쾌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 심하게 다뤄 달라는 것과 몸이 다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전혀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다치지도 않으며 신의 욕망을 풀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 몸이 기계도 아니고 그럴 수 있을 턱이 없겠지.
내 표정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확실한지 그는 결국 서늘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옆의 협탁 서랍을 열고 새카만 안대를 꺼내더니 품에 안고 씌워 준다. 시야가 암전되자 그제야 나는 몸을 휘감고 있던 모멸과 혐오감에서 벗어나 숨을 틀 수 있었다.
그는 까만 시야에 적응하려 웅크린 내 팔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부드러운 뺨을 비벼 왔다. 동생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안심이 된다. 그가 화를 내고 있는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아니면…… 아까처럼 동생의 눈을 하고 있는지…… 보지 않는 편이 참을 수 있다.
날 만지는 이 사람은 동생이 아니야. 기하가 아니다.
기하는 이제 잠들어 있다.
늘 하던 대로 머릿속을 지배하던 동생의 얼굴을 지우고 다른 남자를 상상했다. 얼굴 부분이 뭉개져 흐릿하기만 한 다른 남자를.
몇 차례고 그리 되뇌며 몸을 맡기고 있자 현진이 몇 시간 전 새로 갈아 주었던 붕대가 풀리는 느낌이 났다. 드러난 살갗에 숨결이 닿고 촉촉한 입술이 손목 위를 나긋이 눌러 와 긴장이 풀렸을 때였다.
“읏……!”
문신을 새긴 쪽에 날붙이라도 댄 것 같이 화끈한 통증이 지나갔다. 내가 눈을 가린 것의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내 몸에 화를 풀 때 거부하면 남자는 더 난폭해지곤 했기에 따끔한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내 손목을 양껏 물어뜯은 후 남자는 잘 참았다는 듯 살뜰하게 상처 부위를 핥아 주었다. 그 이중성에 소름이 돋았다.
“다리 들어.”
명령한 대로 들어 올린 다리에 손목에 했던 스킨십이 다시 행해졌다. 발가락과 발등을 이어 발목까지. 간신히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준으로 깨물렸다. 내가 고통에 파드득 몸을 떨면 또다시 상냥하게 핥는 행위가 이어졌다. 몸 곳곳에 그런 식으로 몇 차례나 고문 같은 애무가 쏟아졌다.
차라리 시원하게 때리는 게 나을 것 같다. 그의 혀가 물고 빨고 지나가는 모든 자리에 묘한 간지러움이 피어나서 허리를 뒤틀며 시트를 쥐어뜯었다. 복숭아뼈를 깨물고 발가락 사이사이를 핥을 때마다 손이 곱아들고 예민해지면서 미친 듯이 성감이 치솟았다. 무장 해제라도 되듯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억누르고 있던 불이 붙고 있었다.
“그만…….”
“…….”
“……그만……하세요.”
“왜?”
보이지 않는 허공에 대고 애원을 흘리자 웃음기가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머리를 흔들며 나를 지배하려 드는 쾌감을 떨쳐 내고자 애썼다.
“못 참겠……습니다. 그냥 하시면…….”
“네가 못 참겠으면 나는 어떻겠어. 이렇게 홀리려고 환장을 하며 야하게 구는데.”
그는 내뱉는 말보다 더 야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하며 내 가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까끌한 혀가 넓게 가슴을 핥더니 유두를 휘감고 빨아들인다. 허리를 비틀며 남자의 머리를 얼싸안았다. 어차피 할 거면 그냥 빨리하고 끝내고 싶은데, 그는 아프지 않게 이로 깨물고, 핥고 굴리며 흥분을 부추겼다. 남자는 쓸데없이 내 몸에서 쾌락을 이끌어 내려고 하고 있었다.
“아…… 읏…….”
츕츕 소리를 내며 아이가 젖을 빨듯 유륜까지 한꺼번에 흡착하기도 하고 잇자국이 나도록 물었다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면 다시 부드럽게 핥아 주었다. 오랜 기간 길들여져 보통의 남자보다 살짝 큰 유두는 남자의 입 안에서 굴려지며 딱딱해졌다. 반쯤 부풀어 있던 내 것은 남자가 다른 쪽 유두를 입에 문 채 타액에 번들거리는 정점을 꽉 비틀자 순식간에 최대치로 발기했다.
“흐윽……!”
가슴의 애무만으로 발기한 성기를 보고 그는 내 다른 쪽 유두를 핥으며 나른하게 웃었다.
“섰어.”
“아…….”
“이렇게 좋아하면서 그만하긴.”
사고가 안 되는 머리로도 내가 보이는 반응에 남자가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유두를 잘근잘근 씹은 남자가 내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뜨거운 손바닥이 음모를 쓸어내리며 발기해서 움찔거리는 성기와 고환을 한꺼번에 주물렀다. 내 몸을 너무 잘 아는 손길이라 몇 번 손가락 사이에 끼워 주무르는 것만으로도 금방 호흡이 흐트러졌다.
“됐으니까. 이런 건…….”
그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며 쾌감을 참아 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회음부를 지그시 누르는 손길에 결국 성기가 울컥하고 진액을 조금 토해 냈다. 그가 거친 숨을 귓가에 쏟아 내며 선단에 매달린 액체를 손에 훔쳐 바르고는 그대로 손가락을 내려 뻑뻑하게 다물린 비부에 쑤셔 넣었다.
“읏……!”
어젯밤 내내 쉴 새 없이 마찰됐던 내벽은 아직도 홧홧하게 열을 품은 채 부어 있었다. 선액을 조금 펴 바른 손가락 하나가 들어갔을 뿐인데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뒤치자 다른 손으로 달래듯 내 성기를 재차 움켜잡고는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렇게 비부에 두 번째 손가락까지 쑤셔 넣고는 부챗살을 펼치듯 벌려 길을 내기 시작했다.
몸 안에 들어온 손가락들이 펼쳐지다 오므려지기도 하고, 안을 쿡쿡 찌르며 내벽을 강제로 밀어젖힌다. 고통과 쾌감의 미묘한 경계선에 있는 자극에 정신을 못 차리고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입구가 얼얼할 만큼 손가락을 휘둘러 내벽을 넓힌 후 쑥하고 손가락을 빼내고는 내 위로 올라왔다.
하체에 와 닿는 그의 바지 앞섶은 흘러내린 쿠퍼액으로 이미 젖어 있는 상태였다. 그는 목을 거칠게 울리며 바지를 내리고 불뚝하게 솟은 성기를 꺼내어 구멍에 대고 비비기 시작했다. 귀두에서 뚝뚝 흐르는 쿠퍼액으로 음모가 처덕처덕해졌을 때 다리가 벌어졌다.
신음을 삼키는 내게 남자가 다정하고 탐욕스럽게 속삭였다.
“아직 회복되지 않아 이 자세는 힘들겠지? 뒤돌아 엎드려.”
내가 멈칫하자 강제로 몸을 뒤집고는 목을 내리눌러 굴종하게 만들었다. 흉흉하게 열기가 느껴지는 성기가 구멍 위를 사납게 치댔다. 앞으로 닥쳐올 고통을 알기에 내 몸은 내 의지를 배반하고 자꾸만 앞으로 도망가려 들썩거렸다.
“참아. 한 번에 넣어야 덜 아플 거다.”
흥분을 감추지 않은 저음이 빗소리에 섞여 나직하게 울린다 싶었을 때 남자의 성기가 망설임 없이 한 번에 푸욱 하고 파고들었다.
“―아……!”
단단한 말뚝 같은 게 관통하고 극심한 고통이 몸을 직격했다. 버티고 있던 팔이 와들와들 무너지고 나도 모르게 남자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적셨다곤 하나 가뜩이나 부어 좁아진 길을 억지로 욱여넣으며 뚫고 들어오는 터라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다. ……정말이지 끔찍하게 아팠다.
배 안이 가득 차 다 들어온 줄 알고 하체의 긴장을 푸는 순간, 맞닿은 그의 허벅지에 불끈하고 힘이 들어가더니 지금껏 밀고 들어온 길이만큼 억세게 내벽을 긁으며 성기의 남은 부분마저 퍽하고 처박혔다.
“하…… 아흑……!”
고통에 눈물이 차오른다. 시작도 안 했는데 무너지는 허리를 남자가 억지로 들어 올리더니 작살에 꿴 것처럼 고정시켰다. 거부감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성기를 받아들일 때의 미칠 듯한 이질감은 몇 년이나 몸을 섞어도 적응되지가 않는다. 아마, 평생 적응되지 않을 것 같다.
“후…… 너무 좁은데. 생각보다 많이 부었네.”
“흐윽……, 읏…….”
“힘 좀…… 빼. 이러면 안이 상해.”
연결부가 얼마나 꽉 맞물려 있는지 남자의 몸이 호흡하는 것에 맞춰 내 몸도 들썩거렸다. 진짜 한 몸이 된 것처럼. 그가 억지로 움직일까 봐 두려워 등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얼른…… 움직일 수 있게 해 줘. 못 참겠어.”
날갯죽지에 남자의 뜨거운 숨이 토해지더니 흥분에 절어 버린 듯한 목소리가 욕을 짓씹었다.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힘을 빼며 성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허리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반쯤 몸을 뒤로 빼며 기둥을 잡아 뽑더니 그대로 다시 푸욱 꽂았다. 동생의 성기는 휘어지지 않고 곧은 형태라 안에 처박을 때마다 내벽이 다져지는 것 같다.
“흐읏…… 아프……, 아……!”
“하…….”
허리를 유연하게 앞뒤로 움직여 피스톤질을 하면서 내 팔을 끌어당겨 턱을 붙잡고 입을 맞춰 왔다. 덜덜 떨며 입을 열고 남자가 주는 대로 타액을 받아 마시자 몸 안에서 성기가 꿈틀하고 부피를 더 늘리는 게 느껴졌다.
단단하게 올라붙은 남자의 고환이 천천히 내 밑에 부딪치다가 점차 철썩철썩 때리며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견딜 수가 없어 키스하며 목 안으로 신음을 흘리며 울었더니 남자가 만족하며 그제야 입술을 놔주었다. 해방된 목구멍으로 허겁지겁 숨을 들이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성기를 귀두까지 빼내었다가 거세게 들이박는다.
“아……, 큭……아, 아앗……!”
내장이 밀어 올려지는 느낌에 참았던 비명이 터졌다. 뿌리 끝까지 처박혀 압박감에 목구멍이 죄어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앞으로 기어가는 내 팔을 움켜잡고는 각도를 바꿔 전립선을 날카롭게 긁으며 삽입했다.
“―…흐, 아!”
고통보다 한 단계 상위의 쾌감이 직격하며 몸이 번개라도 맞은 듯 경련했다. 안대를 써서 새카맣던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가 뚝하고 떨어진다.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도망가려고 했던 걸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몇 차례나 억지로 전립선을 콱콱 긁어 대며 찔렀다. 왈칵하고 접합부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주룩 흐르는 게 느껴졌다.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접합부를 더듬더듬 만지니 매끈거리는 무언가가 묻어났다. 성기에 와 닿는 내 손길을 느끼고 남자가 거친 숨을 들이켜며 웃었다.
“아아, 이거…… 네가 젖은 거야. 이 정도론 안 찢어져. 내가 네 몸을 길들이느라 그동안 얼마나 공들였는데.”
귀두까지 뽑아냈다가 재차 콱 전립선을 찍어 올린다. 아아아! 교성이 터져 나오며 또다시 접합부에서 주르륵하고 애액이 뿜어 나왔다.
“봐, 이렇게 잔뜩 느껴서 젖고 있잖아. 예쁘게.”
“아…… 아냐…….”
내가 이렇게까지 느낄 리가.
고개를 젓자 남자의 손이 내 가랑이 사이를 움켜쥐었다. 몇 번이고 질질 흘려 댄 프리컴을 훑은 뒤 내 입 안에 강제로 쑤셔 넣었다.
“흐읏…….”
“앞도 뒤도 질질 흘리고 있다고. 이렇게 좋아하면서 왜 그렇게 싫다고만 해. 속상하게.”
몸이 기뻐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니 남자가 주던 고통은 모조리 쾌감이 됐다. 절망해 몸을 떼어 내려는 내 머리칼을 그가 우악스럽게 휘어잡아 베개 위로 처박았다. 호흡기가 푹신한 베개에 막힌 채 나는 얼굴을 비비며 울었다. 좋은 향기가 나던 베개는 순식간에 내 눈물과 타액과 땀으로 젖어 들었다.
퍽! 퍽! 질척하게 젖은 동생의 고환이 주먹질을 하듯 밑을 때릴 때마다 애액이 사방으로 왈칵거리며 튀었다. 줄줄 새는 것 같았다. 아직 남자가 사정하기 전이라 정액도 아닐 텐데 내 것으로 밑이 흠뻑 젖어 들어간다.
내 몸이 이상했다. 약이라도 한 것처럼 몸이 달아오른다. 더 이상의 자극은 견딜 수 없어 비명을 질렀지만 배 속은 더 큰 자극을 원하며 좆을 쭉쭉 빨아들였다. 이렇게까지 절제 없이 극도의 쾌락만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내 몸이,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렇게, 이렇게 느끼면 안 되는데.
내가 교성을 지르며 진저리 칠수록 허리를 흔드는 움직임이 점점 거세지며 남자의 신음 소리에 욕설이 섞여 들었다.
“씨발, 진짜 미치겠군. 어떻게 이렇게 쥐어짜지?”
“잠깐……만……요, 아아……. 이런 건……. 아!”
자비 없이 연거푸 전립선만을, 아니면 전립선 바로 근처만 물어뜯듯 잔인하게 콱콱 내리찍으며 짐승 같은 신음을 내지르던 남자가 내 허리를 꽉 움켜쥐었다. 틀림없이 다음 날이면 새파랗게 멍이 들 그 아픔마저도 쾌감으로 치환한 몸이 환희에 떨며 내벽을 바짝 조이자, 남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내 몸 안에 더 깊숙이 성기를 묻고 힘껏 끌어안았다. 등에 완벽하게 밀착한 그의 가슴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쿵쿵 미친 듯이 울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며 입을 맞춰 왔다. 혀를 섞으며 단 타액을 정신없이 빨아 마시는데 뿌리까지 박아 넣고 움직이지 않던 남근이 한차례 꿈틀거리며 내벽을 벌리고는 그 상태 그대로 몸 안에 토정하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남자의 타액을 마시면서 밑으로는 남자의 정액을 받고 있는 상태로 나 역시도 절정을 맞았다. 머리 꼭대기까지 끔찍할 정도의 쾌감이 관통한다. 안이 젖어 가자 내 성기가 남자의 손안에 사정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가느다랗게 신음하며 그의 밑에서 떨었다.
“으흑…… 읏…….”
“……기현 ……기현아, 아―, 젠장. 이기현…….”
기현아, 기현아, 기현아.
남자는 짐승처럼 헐떡이며 오래도록 내 안에 정액을 쏟아 내었다. 오래 참은 만큼 배가 부푸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나긴 사정이었다. 울컥거리며 몸 안쪽에 계속해서 정액이 쏘아지는 감각에 내가 울며 도리질치자 그는 다시 턱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남자는 숨 쉬기가 괴롭도록 집요하게 입 안을 헤집으며 허리를 흔들었다. 눈시울이 뿌옇게 흐려지고 현기증이 일었을 때야 겨우 남자는 내 턱을 놔주었다.
“하― 하악, 으욱…….”
베개 위로 쓰러지며 허겁지겁 산소를 빨아들였다. 극심한 오르가슴 탓에 벌벌 떠는 몸 위로 오랜 사정을 마친 남자가 삽입한 채 몸을 포개 왔다. 그는 나보다도 더 헐떡이고 있었다. 서늘했던 등에 뜨겁게 젖은 남자의 가슴과 복근이 마찰했다. 조금이라도 편해지고 싶어 벗어나려는 내 위로 체중을 실어 누르며 손에 단단히 깍지를 낀다.
“……아.”
남자의 입술이 몇 번이고 물어뜯은 목덜미와 어깨에 내려 왔다. 쪽, 쪽 하고 연달아 버드 키스와 땀방울을 핥는 상냥한 후희를 해 온다. 전희와 삽입을 할 때는 잔인하고 난폭하게 치르면서 후희는 더없이 다정하고 부드럽게 녹여 와서 이 간극이 내 머릿속을 진탕으로 만들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흉포하기만 했으면 미워하기도 쉬울 테고 밀어내기도 쉬울 테고.
……동생을 연상하지 않아도 될 텐데.
땀에 젖은 머리칼이 내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의 숨결엔 아직도 흥분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기현아 ……기현아―, 아아…… ―이기현…….”
…….
저렇게 내 이름만을 부르는 사이사이에 입 밖으로 토해 내지 못한 ‘사랑해’라는 단어가 숨어 있다는 걸 안다.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며 드러난 어깨와 짓씹어 놓은 목덜미를 후회하듯이 핥아 주는 모습도 다 내가 응하지 못하는 감정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남자가 행위에선 잔인하고 집요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다 그 때문이라는 걸 안다.
알아서 나는 오늘도 장님처럼, 귀머거리처럼, 그런 남자를 모른 척했다. 내 속에 몸을 묻은 채 들리지 않을 고백을 한참 동안 등 뒤에서 쏟아 내던 남자 역시 그런 나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머리칼에 끊이지 않고 키스를 퍼부으며 땀이 흠뻑 배어 나온 내 피부의 체취를 한껏 들이켜 숨을 가다듬던 남자는 핥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이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의 성기 역시 어느새 꿈틀거리며 몸 안에서 다시 단단하게 용적을 늘려 갔다. 비교적 산뜻하게 느껴졌던 상냥한 후희가 점차 끈적거리는 전희로 변모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기현.”
신의 부름에 힘겹게 고개를 돌렸더니 그가 혀를 내밀어 땀과 눈물로 얼룩진 뺨을 길게 핥아 올리고는 달아, 하고 중얼거린다. 혀끝으로 안대를 들어 올려 몸을 굳히자 구멍에 가득 찬 정액이 울컥 비어져 나오며 남자의 체취가 한층 더 심해졌다.
쾅!
지축을 한 번 흔드는 천둥소리가 울리고 몸이 저절로 움찔 튀었다. 그제야 행위 내내 비가 그치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이렇게 비 내리는 소음조차 못 느낄 정도로 열중해 있었다니.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에 정신이 팔린 동안 빈틈없이 들어찬 남자의 하반신이 완전해진 크기로 안을 쿡쿡 누른다.
“할 땐 힘들어 죽을 것처럼 굴며 맘 약하게 만들더니, 끝나자마자 딴생각이라…….”
또 너한테 속아 넘어갔네.
달콤한 저음이 귓가에 속삭여졌다. 다시 손바닥이 허벅지를 쓸어 올리는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계속 더 받을 수 있지?”
내 허락은 애초에 구하지도 않는 물음이었다. 체념하고 다시 몰아칠 고통을 기다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짙어졌다.
* * *
“……, …….”
내 거친 숨소리 때문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작은 소리로 기현이 신음했다. 정신을 잃어서 내는 본능적인 신음 같기도 하고, 새끼 고양이가 그르렁거리며 앓는 소리 같기도 했다.
뭐 아무렴 어때, 상관없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이 늘어져 흡사 마네킹을 안고 있는 듯했지만 저항 없이 안겨 오는 게 좋아서 만족스럽다. 평소엔 조금만 안아 보려고 손을 뻗어도 흠칫 놀라서 물러서거나 등을 빳빳하게 굳히며 경계하는 주제에, 이렇게 내 몸 밑에 깔려 있을 때는 온전히 몸을 맡겨 오는 게 참을 수 없다.
그렇게 날을 세우고 경계하던 남자가 내 밑에선 거리낌 없이 흐트러지는데 그걸 보고 누가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현의 몸 위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거칠어진 숨을 찬찬히 골랐다. 폐 속까지 들어찼던 습한 정사의 내음 대신 비교적 신선한 공기를 들이켜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눈에 새벽녘의 푸른빛이 스며든다.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오랜만에 폭주했다. 내가 휘몰아치는 대로 거부하지 않고 전부 받아 준 덕분에 모처럼 달고 만족스러운 잠자리였다.
내가 남긴 순흔과 잇자국으로 빼곡한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발목을 잡아 올리자 더 심각한 상태의 사타구니가 눈앞에 드러났다. 하얀 다리 사이는 잇자국으로 짓이겨져 엉망이었지만 체모가 옅고 적은 편이라 붉은 흔적이 아주 잘 어울리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다리 사이의 흔적을 쓸자 왈칵하고 비부에서 애액과 정액, 피가 섞여 꾸덕하게 흘러내렸다. 안에서 진탕을 만든 탓에 흡사 분홍색 액체 같아 보이기도 하는 그것이 다리 사이에 고이는 걸 보는 순간 또 눈앞이 하얗게 날아간다. 쉬게 해 주려 했던 생각이 불과 몇 초 전이건만 또 한계치까지 성기가 빳빳하게 일어나 버렸다.
“……미쳤군.”
내 고간의 상태도 저릿저릿했지만 또 당장이라도 몸 안을 뚫고 들어가고 싶다고 꺼덕거리며 요도구에서 투명한 점성을 가진 액체가 비어져 나온다. 손가락으로 끈적한 액체를 훔쳐 문지르며 나는 발정 난 개새끼가 된 기분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봐도 나는 미친놈이었다. 이러니 형님이 나를 질색할 만도 했다.
“……형님.”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은 채 다정하게 속살거리며 입술을 핥고 다시 형의 다리를 붙잡아 어깨 위로 올렸다.
“들어가겠습니다. 괜찮죠?”
말했잖아요. 당신이 너무 예쁜 탓이라고. 다 당신 탓이라고.
“이번엔 아프지 않게 하겠습니다.”
콧잔등에서 떨어지는 땀을 훔치며 벌리는 대로 활짝 벌어지는 다리를 최대치로 밀어젖히고 번들거리는 성기를 다시 구멍 입구에 댄 채 꾹 힘을 줘 쑤셔 넣었다. 내 것도 구멍 안도 흠뻑 젖어 있어서 몇 번의 허리 짓만으로 구멍은 내 성기를 끝까지 삼켜 버렸다. 내벽을 밀어젖히며 삽입되는 그 순간은 언제 경험해도 저절로 탄성이 나와 눈을 감고 허리를 떨었다.
하복부에 바짝 힘을 줘 척척하게 젖은 음모가 구멍 바깥에 비벼질 정도로 깊게 삽입하고 안을 크게 휘저었다. 평소라면 질색하며 경련하고 밀어 낼 텐데 그는 이젠 앓는 소리조차도 내지 못했다. 매번 성기를 뜯어 버릴 것처럼 죄였던 내벽이 느슨하게 내 성기를 감싸 안으며 오물거렸다.
만족스러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저항 하나 없이 부드럽게 몸을 섞을 수 있는 건 기현이 기절할 때뿐이었다. 이런 감각으로 안고 싶다면 한계치까지 몰아붙여야 했고 가뜩이나 정신력과 체력이 강한 편인 그가 기절하지 않고 버틸 때도 많아서 오늘은 나름 희귀한 상황이라고 봐야 했다. 그러니 즐겨야지.
형의 몸 안에 꽂아 넣은 성기를 천천히 돌리며 여유롭게 따뜻한 내벽이 주는 감각을 만끽했다. 이미 몇 차례나 안에 사출한 정액 덕분에 황홀할 정도로 몸 안은 부드럽다.
“하…….”
평소에도 이렇게 좀 몸이 나긋나긋하면 참 좋을 텐데. 물론 저항하는 걸 꺾는 것도 즐겁지만.
머리끝으로 치솟는 흥분을 억누르며 성기를 귀두까지 뽑았다가 다시 천천히 깊게 밀어 넣는 행동을 반복했다. 접합부에서 철퍽철퍽하는 음란한 소리가 들리며 기현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프지 않도록 상냥하게 내벽을 깊게 긁으며 성기를 왕복시켰다. 그의 몸이 침입한 성기를 환영하며 흡착해 빨아들일 때마다 또 눈앞이 날아갈 것 같았지만 온전하게 그가 쾌감을 느끼길 바라며 참아 냈다.
그가 깨어 있을 때는 최대한 거칠게, 아프게 해 주길 바라기 때문에 쾌락과 통증을 비등하게 선사해 줄 수밖에 없지만 잠들어 있는 동안만이라도 오직 쾌락만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땀에 흠뻑 젖어 있는 형의 몸을 끌어안으며 허리 짓을 했다. 배에 와 닿는 기현의 성기도 내 복근에 비벼져 슬슬 자극받아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의 성기 역시 오늘 밤만 몇 번 사출한지 모를 정도로 혹사당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내벽을 긁어 대며 전립선 근처를 은근히 문지르자 기현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를 리가 없는데도 나는 기대하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형님…… 내가 배 속에 있는 게 느껴지십니까?”
그의 아랫배를 지그시 눌렀다. 형의 몸 안을 내 것이 채우고 있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성기가 다시 무섭게 부피를 늘렸다. 탐욕은 끝도 한계도 없었다.
이를 세워 피가 맺힐 때까지 물어뜯고 싶다. 흰 피부에 핏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고 싶다. 온몸에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남기고 싶다……. 애써 욕구를 참으며 대신 내 흔적이 가득한 형의 목에 손을 둘러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형의 맥박이 전해져 온다. 평소처럼 생동감이 넘치는 펄떡임이 아닌 미약하고 가느다란 맥동.
손에 힘을 조금만 줘도 쉽게 부서질 호흡. 형이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나를 아슬아슬한 한계까지 내몬다.
아아, 얼른 완전히 내 것이 되었으면. 부서져도 좋으니 내 옆에 주저앉아 줬으면.
형의 눈을 두른 안대를 천천히 끌러 냈다. 창백한 얼굴에 눈가만 빨갛게 물든 형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를 닮았지만 훨씬 앳되어 보이는, 소년의 얼굴과 청년의 얼굴이 공존하는, 고아하고 순진무구한.
나를 언제나 미친놈으로 만드는 저 얼굴.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참을 수 없어져 형의 몸 안에 깊게 성기를 처박고 헐떡이며 파정을 시작했다. 시선은 얼굴에 고정한 채로, 극도의 오르가즘으로 인해 잇새로 쾌락에 젖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뇌수가 지글지글 끓는 느낌이었다.
“네 위에 있는 게 누구인지 봐. 이기현―.”
눈을 떠서 네 몸 안에 씨를 뿌리고 있는 게 누구인지를 좀 봐.
너한테 미쳐 있는 가여운 나를 한 번만 봐 줘.
이미 배 속에 가득 차 출렁이던 정액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빈틈없이 맞물린 접합부 밖에 억지로 비어 나오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정액 줄기를 내벽에 쏘아 올리며 나는 힘껏 형의 몸을 끌어안았다. 흥분으로 인해 떨리는 몸뚱이를 그대로 형의 몸에 비볐다. 이어져 있는데도 이 기갈은 채워지지가 않았다. 아마 그가 눈을 뜨지 않는 한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허기일 것이다.
사정이 끝나 물렁해진 심으로 돌아갔어도 성기를 잡아 뽑지 않고 한참이나 형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조용한 숨소리를 들으며 내 안에서 날뛰는 야수를 달랬다.
이 예쁜 것이 지금 내 것이라고 몇 번이나 세뇌하며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그러니 상처 입히면 안 된다고, 오늘은 충분하다고.
형은 나를 사랑하는 마음과 나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싸우고 있지만, 나는 사랑하는 마음과 끔찍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싸우고 있다.
형은 자신 안의 두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다며 자책하고 있지만, 실상 컨트롤하지 못하는 건 내 쪽이다.
형은 내가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안기지만, 사실 내 이성은 진작에 박살 났다.
형은 내가 두 사람인 줄 믿고 있지만, 나는 애초에 나뉘어졌던 적이 없다.
나는 한 사람이다.
“…….”
숨을 죽이고 형의 왼 손목을 들어 올려 이젠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한 손목 문신 위에 입술을 대었다.
살갗에서 내 냄새가 났다. 나로 인해 온몸이 젖어 들어가 내 존재로 그를 온통 덮은 것이 만족스럽다.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모처럼 더없이 충족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