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47)

4

‘형아…….’

‘…….’

‘형아…… 일어나.’

귓가에 간질간질한 숨이 불어넣어졌다. 솜털이 서는 감각에 고개를 돌리자 작은 무언가가 내 가슴께를 톡톡 친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고 무시했더니 좌우로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몇 번이나 그게 반복되는 바람에 어렴풋이 정신이 들어 흐릿한 눈을 떠 보니 눈앞에서 작은 생명체가 열심히 움직이는 게 보인다.

아아, 기하구나.

내가 끄응 신음을 흘리고 뒤척이며 돌아눕자 아이는 다시 내 얼굴 쪽으로 다가와 속살거렸다.

‘형, 형 좀 일어나.’

‘……기하야. 왜 벌써 일어났어.’

형은 좀 더 잘게.

겨우겨우 어물거리며 말하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자 머리맡에 있던 아이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기색이 느껴졌다. 질리지도 않는지 눈을 감고도 느껴질 정도의 시선으로 열심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후다닥 침대 밑으로 내려간다.

갔구나 싶어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하는 데 괜히 신경이 쓰여 더 이상 잠이 오질 않았다. 한숨을 쉬며 슬쩍 안 떠지는 눈을 떠 보니 간 줄 알았던 아이가 눈앞에서 열심히 겉옷을 벗고 있는 게 보인다. 낑낑거리며 옷 매듭을 푸는 게 제법 귀엽다.

발치에 벗은 옷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툭툭 치며 제 딴엔 가지런히 정리한 뒤 아이는 다시 바동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또래보다 발육이 더딘 탓에 기하는 낮은 내 침대 위를 올라오는 것도 항상 버거워했다.

아이가 올라오기 쉽게 팔을 내밀어 주자 내 팔을 잡고는 기어 올라와 얼른 품으로 파고들었다. 바깥에 있었는지 비벼 오는 뺨이 제법 차갑다.

‘너…… 또 별채에 갔었구나.’

나는 아버지를 질색해서 유폐되어 있는 별채 근처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지만 나보다 어린 동생은 뭐가 좋은지 틈만 나면 그를 보러 갔다. 뱀이 득시글거리는 별채에서 혹여나 다칠까 봐 고용인들이 몇 번이나 말려도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금세 아버지에게 가 있곤 했다. 가서 따뜻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하는데도 아이는 그랬다.

‘왜 그랬어. 이 밤중에 가는 거 싫어하셨을 텐데.’

흐음.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코를 비비고 새벽의 찬 기운을 한껏 들이켜며 묻자 어물거린 동생이 품에 더 파고들었다.

‘내가 왔다고 소리 지르셨어.’

‘아버지는 맨날 그러잖아. 가지 말라니까.’

어린 아들이 안채와 별채 간의 긴 거리를 열심히 걸어서 자신을 보러 가도, 눈앞에서 꺼지라며 소리 지르는 아버지였다. 어느 날은 미친 아버지가 아이를 향해 목침을 던져 버리는 바람에 이마 부분이 크게 찢어진 적도 있었다. 피를 철철 흘리고 돌아온 날 이후 나는 아버지에게는 일말의 애정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고, 다시는 그를 보러 가지 않았다.

동생이야 아직 어려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니 그런 일을 겪고도 나와 고용인들의 눈을 피해 별채에 숨어들지만 여우 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 형제에게 부모의 도리를 하지 않는 남자의 자식에 대한 배척을 나는 납득할 수 없다.

‘아버지는 왜 나를 싫어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건 뱀뿐이잖아. 우리는 뱀이 아니고.’

‘아니야. 뱀도 싫댔어. 다 싫다고 했어. 다 사라져 버리라고 소리 질렀어.’

아버지가 면전에서 네가 싫다고 하는 말을 어린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실대로 말해 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돌려 설명해 줘야 하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괜히 울컥한 마음에 동생을 꽉 끌어안았다.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도 동생이 너무 어리고 순진해서 안타까웠다.

‘기하야, 이젠 아버지한테 가지 마. 형이 있잖아.’

‘형아…… 있지. 아버지가 형을 데려오라고 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나만은 가끔 따로 찾곤 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는 나를 싸고돌 정도로 예뻐하셨다고도 들었다. 기하가 태어나자마자 사람이 변한 것처럼 우리 형제를 외면하기 시작했지만.

손가락에 감겨드는 결 좋은 동생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안 가.’

‘정말로?’

동생이 반짝이는 눈을 하고 내 몸 위에서 고개를 들으며 물었다. 어둑한 시야에서도 예쁜 적안이 초롱초롱 빛난다.

‘형이 안 갔으면 좋겠어?’

‘응, 형이 나랑 있어 줬음 좋겠어.’

‘기하는 아버지랑 있는 걸 좋아하면서, 형은 안 갔으면 좋겠어?’

내가 웃자 동생이 우물쭈물하다가 다시 내 목덜미로 푹 파고들었다. 내 몸과 맞대고 있던 탓에 동생의 부드러운 살갗도 따끈따끈해져서 기분 좋았다. 내 귀에 대고 뺨을 비비던 동생은 기어들어 가는 듯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형은 가지 마. 형이 가는 건 싫어. 나랑만 있어 줘.’

아아― 귀엽다. 다른 거엔 조금의 집착도 하지 않으면서 유독 나에게 만큼은 집착을 보여 주는 동생이 너무 귀여웠다. 몸도 작고 보들보들한 게 꼭 병아리 같다. 내가 큭큭 웃자 동생이 자기 말을 안 들어줄 줄 알았는지 울상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가지 마아…… 형아.’

‘알았어. 형이 널 두고 어딜 가겠어.’

그제야 까르르 웃으며 다시 와락 안겨 온다. 으그그, 예쁜 것. 나는 흐뭇해져 동생의 등을 토닥거렸다.

‘같이 자자. 기하야. 아직 아침이 되려면 멀었어.’

내가 도닥이자 동생은 금세 몸에서 힘을 풀고 내 위에서 늘어졌다. 고사리 같은 손을 더듬더듬거리며 몸 위를 만지던 기하가 내 손에 살며시 깍지를 낀다. 내가 자다가 어딜 갈까 봐 종종 하는 동생의 버릇이었다. 깍지 낀 상태서는 내가 몰래 일어나려고 하거나 손을 빼려고 하는 걸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언제 잤냐는 듯 새빨간 눈을 떠 나를 바라보곤 했다.

‘형 어디 안 가. 그냥 자 기하야.’

잘 때 불편할까 봐 손을 빼려고 하자 아이가 도리질 쳤다.

‘손잡아 줘. 형 손잡고 잘래.’

떼를 쓰지 않는 성격이면서 이럴 때는 또 고집을 피웠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아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손잡느라고 너 자지도 않을 거잖아.’

‘그치만…… 손 안 잡으면 형이 가 버릴 것 같단 말이야.’

‘형은 너 두고 아무 데도 안 간다니깐.’

‘하지만 ‘여우 신’이 형을 불렀다구……. 신이 불렀단 말이야.’

아이가 무심코 던진 말에 노곤했던 기운이 순간 완전히 달아났다. 내가 말을 잃자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동생이 목에서 얼굴을 들고 또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동생의 콧잔등을 아프지 않게 탁 치며 혼냈다.

‘아버지를 ‘여우 신’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우리는 여우 신이라고 부르지 말쟀잖아. 기하야.’

‘아버지가 아니라 신이 나에게 말을 걸었어. 형을 데려오라구.’

‘기하야…….’

‘신이 형을 왜 부르는 거야? 형도, 형도 여우 신이 돼 버리는 거야?’

그래서, 형을 데려오라고 하는 거야? 응?

아직 혼내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동생은 울상을 지었다. 난감해져 입을 다물었다. 동생의 큰 눈은 어서 나에게 대답을 하라고 재촉하며 일렁거리고 있었다. 내가 여우 신이 된다고 하면 바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아니야. 형은 여우 신 안 돼. 여우 신 같은 거 안 할 거야.’

그런 끔찍한 걸, 누가 할까 보냐. 평생 집 바깥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뱀이나 끌어안으며 사는 짓 따위.

나는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동생과 이 집을 떠날 생각이다. 아버지처럼 저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아직은 나도 동생도 너무 어려서 우리끼리 나갈 수 없지만 다른 형들처럼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작은 집을 사서 동생과 강아지를 키우면서 단둘이 살아야지. 뱀 같은 건 얼씬도 못 하게, 찾아오지도 못하게 아주아주 멀리 가서 살 거다.

‘신이…… 억지로 형 보고 신이 되라고 하면 어떡해?’

누가 들을세라 숨죽이고 작게 속삭인다. 그러고는 차마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을 말해 버렸다는 듯 입을 막는다.

‘그러면 우리 같이 도망치자. 뱀 없는 데로 가서 같이 살면 되지.’

‘진짜야?’

동생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건 생각도 못 해 봤다는 반응이었다.

‘응. 진짜. 마당 있는 작은 집을 사서 강아지도 키우고 정원도 가꾸고 살자. 재밌겠지?’

‘정말, 정말로?’

오늘따라 동생이 집요하게 물어 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

‘정말로.’

‘약속해 형아.’

아이가 새끼손가락을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나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지장까지 쿡 찍었다.

‘약속.’

뭐가 그리 신기한지 아이는 약속을 건 자신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와아! 외치며 내 목에 매달렸다.

‘꼭이야. 꼭. 나랑 약속했어 형.’

나를 데려가기로.

* * *

알람을 맞춰 둔 것도 아닌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더니 뿌연 시야에 익숙한 무늬의 크림색 천장이 들어왔다. 뻔한 광경이었지만 한참 동안 멍하니 몸을 움직일 생각도 않고 끔벅거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삐삐삑 하는 자잘한 기계 소음이 귓가로 들어왔지만 눈을 돌려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무기력한 기분은 오랜만이다. 손끝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피곤하고 나른하다.

창문을 열어 뒀는지 꽃향기를 가득 품은 기분 좋은 바람이 뺨에 느껴졌다. 주변 시야가 환한 걸 보니 못해도 정오 근처는 되어 보였지만 몸을 일으킬 기분이 들지 않는다.

도로 자고 싶다. 아니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대로 이 포근한 침대 위에 녹아서 스며들어 버렸으면.

바로 귀 옆에서 인기척과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옆에 있는지 확인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아 멍하니 있는데 소리의 주인공이 내 옆에 서더니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박현진이었다. 멀뚱멀뚱하게 아무 말 없이 눈동자만 굴려 그녀를 쳐다보자 경악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는 재차 소리 지른다.

“자기! 일어났으면 인기척 좀 내지 그래! 시체가 눈 뜨고 있는 줄 알았잖아!”

“……죄송합니다. 놀라셨습니까.”

내 대답에 그녀가 인상을 쓰며 구시렁거렸다. 웬일로 의사 가운도 입지 않았고 맨날 걸고 있던 청진기도 걸지 않은 사복 상태였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안채 아닌가요?”

“오늘 아침에 와 달라고 호출당했어. 왔을 때 자기가 죽은 줄 알고 나 얼마나 놀랬다고.”

더 심한 것도 많이 봐 온 사람이 엄살이다. 나는 픽 웃었다.

“어제 힘들었지……? 고생 많았어. 정말로.”

“뭘요. 내 무덤 내가 판 건데. 제가 다 멍청해서 그렇죠.”

콜록거리자 지켜보고 있던 현진이 얼른 머리맡에 있던 물 잔에 생수를 따라서 내밀었다. 마침 목이 마르던 상태라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허리에 힘을 주는데 순간 눈앞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고통이 밀려왔다.

“……헉.”

누워 있을 때는 허리 밑으로는 감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 요망한 신경은 내가 움직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명을 질러 대며 고통을 남김없이 호소한다. 하반신 쪽은 그냥 집단 린치라도 당한 것 같았고 특히 밤새 억지로 벌어져 있었을 허벅지 부분과 차마 말 못 할 그 부분이 굉장했다. 거짓말 조금 더 보태서 교통사고 간접 체험 정도는 하는 것 같다.

“아침에 뵈었을 땐, 어제처럼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시더라. 뭐 나한테 직접 연락하셔서 안채에 들어오는 걸 허락한 게 그분이긴 했지만……. 솔직히 어제 자기랑 그렇게 돼서 좀 쫄았거든.”

“……그랬어요?”

“응, 이러다 내일 해 뜨는 거 못 보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니까.”

“설마요…….”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고 웃었다.

“그래도 어제 그런 힘도 난 처음 겪어 봤고 그렇게 화내시는 것도 처음 봤고……. 좀 놀랐어. 왜 안하무인인 아버지도 가주님 앞에선 그렇게 설설 기는지 알 것 같달까. 나와는 아예 다른 세계 사람이더라고.”

“그래서 이제 짝사랑은 그만두기로 한 겁니까?”

“어머 무슨 소리야? 원래 가질 수 없는 건 높이 있을수록 더 좋은 거라고.”

픽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아까 전까진 눈에 들어오지 않던 푸른 꽃으로 가득 장식된 침대 헤드가 보였다.

어제는 방 가득 장식하더니 오늘은 침대인가. 내 동생이지만 집념 하나는 굉장하다. 손가락을 힘겹게 움직여 꽃잎을 살며시 만져 보았다. 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꽃잎이 수분을 가득 머금어 통통하고 싱싱했다.

현진이 내 모습을 바라보다가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리 짓은 그렇게 흉악하게 해 놓고 꽃 선물은.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이건 그가 아니라 동생이 해 놓은 거니까요.”

“그래? 하여튼 볼 때마다 놀란다니까.”

“꽃이 새로 피면 이러던데 제가 좋아할 줄 아나 봐요. 사실 꽃은 꺾은 순간부터 죽어 가는 거라 이런 걸 즐기진 않는데.”

내 표정을 보던 현진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좋아하지? 그분이 이렇게 해 주는 거.”

대답하지 않고 나도 씁쓸하게 웃었다.

그 아이는 항상 과분할 정도로 나에게 선물을 안긴다. 내 온몸을 감싸는 모든 옷과 액세서리, 차와 집을 비롯한 생활을 구성하는 일체를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나에게 제공해 주고 있었다. 속옷 한 장부터 시작해서 커프스, 펜, 지갑, 카드 케이스, 키홀더, 하다못해 사용하는 텀블러 하나까지 전부 다 동생이 고른 것으로 주어졌다. 내 의지로 물건을 사기라도 하면 그것과 같은 종류의 물건이 다른 디자인으로 수십, 수백 개씩 내 앞에 배달되곤 했다. 결국 질려 버린 내가 동생이 준 것을 선택할 때까지.

동생과 저 문제로 몇 번이나 실랑이하다 지친 나는 결국 그렇게 원조를 받는 대신 내 월급의 반 이상을 매달 동생에게 보내는 걸로 합의했다. 이런 상황이니 동생이 나에게 베푸는 것에서 대가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한 호의는 꽃밖에 없던 거였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받았을 때 유일하게 고맙다고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고.

“자기는 정말 어려워.”

현진이 톡톡 내 콧잔등을 두들겼다.

“환경이 그렇게 만든다는 걸 알긴 하지만 그냥 편하게 생각해. 스트레스 지수가 굉장하다고 어제도 말했잖아?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라고. 쉬어야 할 때는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쉬는 데 집중하고.”

“전 오히려 쉬면 더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던걸요. 차라리 몸을 쓰면서 잡생각이 안 들도록 혹사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평일이 제일 기다려지네요. 지긋지긋한 본가를 떠나서 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고 일하러 갈 수 있으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와 습관처럼 미간을 꾹 눌렀다. 몸은 안 아픈 구석이 없고 이제 두통까지 추가됐다. 진통제가 이렇게 간절한 일이 없었다. 어제 남자가 쓰레기통에 통째로 버려 버렸던 두통약이라도 주워 먹으러 가고 싶은 심정이다.

머리를 꾹꾹 누르며 고통을 참아 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실례합니다. 기현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예.”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곧 문이 열리며 고용인들이 음식을 가득 실은 카트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냥 한눈에 훑어만 봐도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들이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걸 고려해선지 침대 위로 간이 트레이가 놓였다.

“오늘 무슨 날입니까? 이게 웬 음식들이에요?”

“아, 본가에 중요한 손님께서 오셨다고 하더라고. 우린 오늘 안채를 떠나지 말고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어. 유배도 아니고 주말에 이게 뭐람.”

“중요한 손님이라고요? ……대체 누가 온 건데요?”

“글쎄. 가주께서 직접 움직이시는 거 보면 뻔하지 않아? 우리 아버지가 왔거나, 아니면 K그룹 누군가가 왔겠지.”

현진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감흥 없이 침대 옆에 차려지는 음식들을 쳐다보았다. 중요한 손님이 찾아와서 오늘 아침부터 동생이 눈에 안 보였던 거구나. 엊그제부터 좀 분주한 느낌이더라니.

어제의 껄끄러운 사건 이후라서 어떻게 동생을 대해야 할지 걱정이었던 나로서는 대환영이다. 이대로 저녁까지 시간이 흘러서 내 레지던스로 복귀했으면 좋겠다.

“말씀드려도 되는진 모르겠지만…….”

식탁을 차리던 고용인 중 한 명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K그룹 차남께서 오신 거라고 들었습니다.”

“차남이요? 장남도 아니고 그 사람이 여기엔 무슨 볼일로 왔을까.”

“회장이 노쇠했으니 찾아온 것 아닐까요?”

“뭐 회장님의 건강을 부탁하러 올 정도로 효심이 깊어 보이지는 않던데…… 여우 신의 존재를 알 리도 없을 테고. 역시나 뒷배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하러 온 건가?”

딴 나라 얘기를 듣는 기분으로 현진과 고용인의 대화를 경청했다. 여우 신에게 복속되어 반영구에 가까운 수명을 가지게 된 고용인이라 그런지 말투에서 우월감이 느껴졌다. 그녀 역시 여우 신이 사라지면 누리던 모든 것들이 무너진다는 걸 알 텐데도. 아니 오히려 누렸기 때문에 무너지는 속도도 빠르고 좌절도 깊을 것인데……. 씁쓸함을 지우려 조용히 아이스크림을 퍼 입 안 가득 욱여넣었다.

* * *

식사 후 현진에게는 쉬라고 한 뒤 안채 앞 정자에 있는 흔들의자에 길게 누워서 책을 읽었다. 바람도 적절하고 정원 가득 꽃이 만개하고 있어서 휴식을 취하기는 안성맞춤이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흔들의자 특유의 삐걱대는 가냘픈 소리가 들리는 게 좋다. 숨이 끊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들리는 의자의 접합부 소리는 기묘하게 마음을 편히 만들었다. 부드러운 꽃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도,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만 맛볼 수 있는 따뜻한 바람도 좋았다.

이 정원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다 사랑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버지의 자살 이후 무너진 집안에서 유일하게 색이 바래지 않고 내가 숨을 틀 수 있는 곳이었으니.

한적하게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책에 심취해 있던 탓에 근처에 누군가가 다가왔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불쑥 나타난 커다란 손이 갑자기 내 눈 위를 덮었다. 비명만 안 질렀을 뿐이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덕분에 잊고 있던 몸의 통증마저 되살아났다.

“놀랐……잖아. 옆에 왔으면 기척이라도 냈어야지.”

곁눈질로 남자의 바짓단을 확인하고 타박했다. 등 뒤에서 바람이 스치는 듯한 웃음소리가 났다.

“중요한 손님은 벌써 가셨나 보네. 일이 잘 안 풀렸나 봐.”

내 물음에 아이는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꽤 수고한 모양인데 아쉽겠네, 마음에도 없는 위로를 하고 다시 책으로 눈을 내렸다. 내 나름의 축객령이었음에도 기하는 내 주변을 떠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세운 손가락 하나가 쿡, 내 뺨을 찔러 왔다. 무시했다. 그러자 손가락 끝으로 뺨을 살살 어루만진다.

“왜 이래? 어린애같이…… 밖에서 이러지 말라니까.”

한숨을 쉬며 동생의 손을 잡아 떼어 내려고 하자 별안간 손바닥으로 쇄골 위를 덮었다. 그러곤 붕대를 두른 피부 위를 느릿하게 쓸어내린다. 안채라 극히 제한된 수의 엄선된 고용인들만 드나든다고 해도 야외에서 이런 스킨십을 하는 걸 묵인한 적은 없어 결국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이러지 말랬잖아. 손 치워.”

매몰차게 뿌리칠 생각에 가슴팍으로 들어가는 손을 붙잡은 순간이었다.

“……!”

누구……, 기하가…… 아니야……?

잡은 것은 생전 처음 잡아 본 타인의 손이었다. 소름 끼쳐 반사적으로 온 힘을 다해 뿌리쳤다. 놀라서 말 그대로 심장이 발밑으로 뚝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별별 상황을 다 겪었다고 자신하는 나도 이렇게 제대로 놀란 건 오랜만이었다.

다급히 뒤를 돌아보자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낯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짙은 갈색 눈을 가진 삼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건실한 인상보다는 오만함이 느껴지는 차가운 얼굴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히 몸에 피트 되는 고급 정장을 입은 남자.

내 경악한 시선에 남자는 비밀을 나누는 듯이 내 쪽으로 몸을 깊게 숙이고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이런 식으로 남자 손을 탄 적이 많군요……?”

“…….”

말이 안 나와 얼어 버린 나를 보고 그가 즐거운 듯 웃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이 남자가 몸을 더듬을 때 헛소리를 하진 않았는지 맹렬히 기억을 뒤지기 시작했다.

만져질 때 동생의 이름을, 말했나? 대체 안채엔 어떻게 들어온 거지? 뭐라도 눈치챈 건가? 여우 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인가? 이곳엔 왜 온 거지? 내 몸은 왜 더듬은 거지?

안채에 동생 외의 성인 남자가 들어온 적은 거의 없기에 방심했다. 동생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겁 없이 나에게 스킨십을 해 올 성인 남자가 이 집안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동생일 줄 알았던 것이다.

노려보는 나를 보고 남자는 놀리듯 손끝으로 읽고 있던 책의 표지를 두드렸다.

“저도 이 작가 참 좋아합니다. 저랑 좋아하는 취향이 겹치길래 반가워서 그만……. 실례인 줄 알면서 장난 좀 쳤습니다. 이런. 그렇게 가엾게 놀라시니 제가 너무 죄송해지잖습니까.”

이런 개새끼가.

장난이라고? 처음 보는 남자 몸을 그런 식으로 만지는 게 고작 장난이란 말로 해결될 일이야?

“장난이 대단히 심하시군요. K그룹 분이십니까? 이곳은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아, 그랬나요? 아무도 막질 않길래 들어와도 되는 곳인 줄 알았습니다. 안내인이 아무도 없어서 헤매고 있었거든요.”

남자는 과장이 다 티가 나는 난감한 척을 하며 빙글거렸다. 어쩐지 당연히 남자의 뒤를 따라야 할 고용인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쫓아오길 바라며 문가를 쳐다보다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억지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측에서 실수가 있었나 보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제가 지금은 보시다시피 몸이 좀 불편해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이렇게라도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는 남자가 불쾌했지만 이를 악물며 이름을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기현입니다.”

남자는 내 이름을 듣더니 좀 전의 미소를 지우고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당신이 이기현이었습니까? 일영그룹 대표의 형이라는?”

“…….”

그럼 누군 줄 알았냐며 이마를 찌푸리자 남자가 너스레를 떨며 내 속을 긁었다.

“아니. 이기하 대표가 철옹성처럼 세워 둔 안채에 애인을 숨겨 두었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그래서 얼마나 예쁘길래 꽃놀이를 하고 계신가 구경이나 한번 해 볼까 해서 왔는데……. 설마 친형이었습니까?”

남자의 눈이 가늘게 휘어지며 품평하듯 흔들의자 위에 앉아 있는 내 몸을 죽 훑어 내렸다. 남자의 불쾌한 말과 태도에 기분이 추락했다. 그의 말이 미묘하게 사실이기도 해서 더 그랬다.

“저는 제 소개를 했습니다만.”

“아……, 실례.”

그는 차갑게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끈적거렸던 처음과는 다른 지극히 사무적인 동작이었다.

“KNG백화점 사장 강준형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기현 씨.”

남자의 거만한 태도로 미루어 보아 그럴 거 같더라니. 역시 현진이 말했던 그 귀한 손님이었다. 좀 전에는 뿌리쳤던 손을 이번에는 내 의지로 다시 맞잡는다. 그게 기묘한 느낌을 줘서 잠시 망설이다가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남자가 집요하게 뜯어보더니 붕대를 두른 목 부근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기하 대표가 브라콤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브라콤이라뇨.”

남자가 잡은 손에 슬쩍 힘을 주길래 얼른 비틀어 빼내며 쏘아붙이자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업계에 대단한 브라콤으로 소문이 나 있는 거 모르셨습니까? 형님의 몸이 약한 편이라 그렇게 이기하 대표가 싸고돌았나 보군요. 어쩐지 대표 본인도 집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온다 싶더라니……. 우애가 깊어 보여 부럽습니다. 내 형제들도 좀 본받아야 할 텐데.”

“죄송하지만 강준형 씨. 저는 몸이 약한 게 아닙니다. 제 동생도 브라콤이 아니고요. 저는 이곳에서 살고 있지도 않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말씀하고 다니시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강준형이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보며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피식 웃었다.

아 이 남자,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람을 짜증 나게 살살 긁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 틀림없이 불협화음이 일어날 징조가 보였다. 집안에 온 귀한 손님이라고 하니 성질대로 들이박을 수도 없고 내쫓을 수도 없으니 난감하다.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고 강준형이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 턱 하니 걸터앉더니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했다.

“저 나쁜 사람 아니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꽃구경 좀 하다 갈 테니 저는 공기라 생각하고 편하게 있으십시오.”

“저 역시 말씀드린 대로 여기는 외부인이 들어와선 안 되는 곳입니다. 나가시는 문은 저쪽입니다.”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신경을 건드렸는지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흠. 정말로 저 안에 이 대표 애인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래서 이렇게 경계해요?”

“사적인 영역을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시네요. 실례일 텐데요.”

“처음의 장난에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요? 그렇다면 다시 사과하지요.”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여긴 우리 집안의 내실입니다. 손님께서는 돌아가셔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남자는 거침없이 몸을 움직여 바싹 다가와 앉더니 팔짱을 낀 채 흔들의자 위의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싸움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마주 봤더니 싱긋 웃는다.

“뭐 때문에 기현 씨가 화가 단단히 났을까. 아, 혹시 브라콤이라고 해서? 아니면 애인이라고 해서 그런가?”

“강준형 씨.”

“브라콤이라느니 이런 얘기는 내가 지어낸 것도 아니고 이쪽 업계 사람들은 다 아는 얘깁니다. 안채 얘기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도는 가십이니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거 없어요. 이쪽 세계가 원래 다 그렇거든. 다른 그룹은 이미지다 뭐다 해서 가짜로라도 가십을 쏟아 내서 기업 홍보를 하는 반면 일영은 폐쇄적이라 들리는 정보가 없으니 별 얘기가 다 나오죠. 내가 말한 거보다 더한 소문도 도는데 겨우 이 정도로 반응 보이는 건 좋지 않아요.”

“충고는 감사합니다만 그들이 뒤에서 뭐라고 떠드는지 따위엔 흥미 없습니다.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로 뒷얘기 하는 일이야 진저리 칠 만큼 많이 겪어 봤으니까요. 중요한 건 제 앞에서의 태도죠. 본인들 앞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는 구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팔짱을 낀 채 내 말을 경청하던 강준형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는 짐짓 심각한 척하며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럼 제가 직접 보고 겪은 걸로 말하면 괜찮은가? 직접 보고 들은 정보는 말하고 다녀도 되겠습니까?”

남자의 손이 눈앞에 다시 다가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 바람에 잊고 있었던 통증이 되살아났다.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온 신음에 남자의 손이 공중에서 멈칫했다. 누가 보면 때리기라도 하려는 모양새인 손에 정신이 팔린 순간 그가 기습적으로 속삭였다.

“당신을 만졌던 남자가, 누굽니까?”

갑자기 던져진 질문의 의미에 굳어 버린 나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남자였군요?”

“……대단히 무례하시군요.”

가뜩이나 안 되는 표정 관리가 아예 무너졌다는 걸 스스로도 깨달을 수 있었다. 날 쳐다보는 남자의 표정이 확신으로 굳어졌으니까.

그는 뻗었던 손을 언제 그랬냐는 듯 거두어 다시 팔짱을 끼며 빙글빙글 웃었다.

“이런 경우엔 제가 아는 사실이니까 말하고 다녀도 됩니까?”

“그렇게까지 저열한 분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말에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깜짝 놀랄 정도로 유쾌하게 웃었다. 남자와 말을 섞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보는 가식이 안 씌워진 진짜 웃음이었다. 그가 대체 왜 웃고 있는지 이유를 짐작하지 못해 말없이 바라보는 동안 한참 웃던 남자는 실례, 하고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까지는 무례하다고 해 놓고 저열하진 않을 거다라……. 미묘한 이미지네요. 과연, 날 그리 생각 안 한다는데 저열한 짓은 못 하겠네. 그럼 이제 나하고 비밀 하나 공유하게 된 건가요?”

더 이상 상대하는 게 의미가 없다 판단하고 읽던 책을 펼쳤다.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이 정도 입씨름을 하다 보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내 태도에 질려서 손을 들고 피해 버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끝을 몰랐다. 내 쪽에서 먼저 질려서 피하고 싶어진 건 처음이었다. 그는 몇 번을 더 웃더니 한껏 친근한 태도로 내 곁에 바짝 다가앉았다.

“그나저나 어디가 불편하시기에 이곳에 혼자 계셨습니까? 붕대로 온몸을 감은 거치곤 활동에 지장은 없어 보이고, 목발도 안 보이는 거 보니 다리는 멀쩡한 거 같은데.”

“……그냥 계단에서 좀 굴렀을 뿐입니다. 아, 이런 것도 가십거리로 삼진 않으시겠죠? 일영의 첫째가 칠칠치 못하게 굴러다니는 성격이라든가…….”

비아냥에도 그는 뭐가 좋은지 계속 웃어 댔다.

“하하하, 아까는 농담이라니까. 제가 정말 그런 말을 떠들고 다닐 리가 없잖아요? ……근데 그거와는 별개로 칠칠치 못한 편은 아닐 거 같은데 질질 흘리고 다닐 성격 같긴 하네요.”

“지금 그 얘기도 농담입니까?”

“기현 씨가 화내고 있는 중이면 농담으로 하고, 아니면 진담으로 할까요?”

“…….”

“아 정말. 이렇게 놀리는 보람이 있어서야, 이기하 대표가 당신을 싸고도는 이유가 따로 있었군요. 어디 내놓으면 큰일 나겠어.”

“본인 앞에서는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 좀 구분해 주시죠. 제가 베이비시터도 아니고 하나하나 가르쳐 드릴 나이는 아니시지 않습니까?”

“당신 같은 베이비시터라면 언제든지 환영인데요. 365일 상주로 계약 어떻습니까? 전 아주 말을 안 듣는 학생이라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을 겁니다.”

나를 향해 한껏 몸을 숙인 강준형을 피해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죄송한데 저는 말 잘 듣는 모범생이 취향이라서요.”

“그 남자가 그런 타입인가 보죠?”

“……그 남자와 소개팅이라도 주선해 드려야 하나요? 관심이 지대하시군요.”

“내가 왜 이러는지 뻔히 눈치채 놓고도 끝까지 도발하는 그런 점이 제일 맘에 드네요.”

빙글빙글 웃으며 내려다보던 그는 내가 도망 못 가게 흔들의자의 팔걸이를 지그시 눌렀다.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입술도 겹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 위협을 느낀 몸이 긴장으로 굳는다. 팔걸이에 체중을 실은 남자 탓에 흔들의자가 가냘프게 울었다. 내가 좋아하던 그 소리가 처음으로 음험하게 들렸다. 진심으로 오늘 내 몸 상태를 이렇게 만들고 간 신이 원망스러워졌다.

내 눈의 동요를 읽은 강준형이 노골적으로 내 몸을 훑으며 천천히 입술을 핥았다.

“……어떻게 이렇게 무슨 생각하는지가 훤히 다 보이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의 손이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얼굴 위로 순식간에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몸이 의자에서 붕 뜨는 게 느껴졌다.

당한다.

어느 정도는 남자의 욕망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다리에 힘을 주며 반사적으로 급하게 입을 가렸다. 뜨거운 입술과 숨이 손바닥에 토해졌다. 제 딴엔 기습이라고 생각했는지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춘 남자가 놀랍다는 눈으로 내 눈을 주시하더니 다시 반달 모양으로 길게 휘며 웃었다.

“…….”

내 입을 가린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채 떼어 내며 재차 달려들려 해 차갑게 속삭였다.

“첫 번째는 그래도 손님이라서 손바닥으로 참았습니다.”

“그래서요?”

귀엽게 논다는 표정으로 남자가 싱글거렸다.

“두 번째는 주먹입니다. 이 정도는 K그룹 쪽에서도 정당방위를 인정해 주시겠죠.”

남자는 눈만 굴려 잡고 있지 않은 반대편에 정석대로 주먹을 쥔 손을 바라보더니 하, 하고 바람 빠진 듯한 신음 소리를 냈다.

“겨우 장난한 걸로 손님 얼굴을 치겠다고?”

이런 희롱도 장난으로 넘기려 했다니 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난봉꾼인지 기가 막혔다. 내가 진심이라는 걸 눈치챈 남자가 천천히 나에게 기울였던 몸을 떼어 냈다. 하지만 좀 전보다 훨씬 이채를 띤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애당초 이 남자를 자극한 게 잘못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다.

“이런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군요. 대응이 노련하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니까요.”

“하하하, 그거 내가 할 대산데. 포장까지 대신해 주다니 이렇게 상냥할 수가.”

얄밉게 웃으며 딱 변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강준형은 아까보다 더 농도 짙게 내 온몸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까는 말의 폭력이 쏟아졌다면 지금은 시선의 폭력이었다. 보통 주먹질을 하겠다고 달려들면 흥이 떨어져서 물러나던데 남자는 겁준다고 물러날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 불을 붙인 느낌이었다. 쉬운 줄 알았던 사냥감이 생각보다 난항을 겪게 했을 때 포식자가 뜻밖의 유흥을 달게 즐기는 느낌. 차라리 키스하게 놔둔 뒤 그걸 빌미로 제대로 한판 붙을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됐을 때였다.

안채의 입구에 인기척이 나더니 고용인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발소리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긴박해 보였다.

그녀는 안채를 휘둘러보다 나와 같이 있는 강준형의 얼굴을 보고는 사색이 되어 소리 질렀다.

“강…… 강준형 님!”

그녀의 새된 목소리와 경악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고용인이 바로 강준형을 담당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안내인이 아무도 붙지 않아서 이곳까지 헤매다 왔다는 그의 말이 전부 다 거짓이었다는 것도.

남자는 싸늘해진 내 얼굴을 돌아보며 히죽거렸다.

“이런, 아직 들키면 안 되는데. 한참 흥이 올랐는데 아쉽군요.”

가엾게도 한참 동안 강준형을 찾아다니느라 고생했는지 그녀의 얼굴은 땀으로 엉망이었다. 황급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온 고용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외쳤다.

“얼른, 얼른 나가셔야 합니다. 이곳에 있으시면 안 되십니다. 어쩌다 여기까지……! 빨리 나가십시오!”

고용인을 내려다보는 강준형의 얼굴이 웃고 있던 표정에서 쓰레기를 보는 것처럼 천천히 어그러진다. 고개를 돌리는데 안채의 입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제일 앞에 있는 남자는 동생이었다. 그는 멀리서도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입구의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돌린 고용인은 동생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그 자리서 엎드리더니 동생에게 소리 높여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제 잘못입니다! 그만 잠깐 자리를 비우신 걸 발견하지 못하고, 제가…… 실수를…….”

“…….”

“벌……, 제게 벌을…….”

왜 이래. 뭔데 이거?

고용인이 말도 잇지 못하고 공포에 질린 채 숨이 넘어가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강준형을 쳐다보았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는지 동생 쪽을 바라본 그 역시 좀 전까지의 여유 만만한 태도는 어디 가고 제법 당황한 눈치였다. 갑자기 고용인이 나타나 손님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질 않나, 집주인이 사람들을 대동하고 흉흉한 기세로 나타나질 않나, 집주인을 본 고용인이 두려워하며 무릎을 꿇질 않나, 아무리 이 남자라도 이런 광경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우리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동생은 서슬 퍼런 눈동자로 내 몸을 훑더니 분노한 걸 숨기지 않고 내뱉었다.

“형님에게서 당장 떨어지십시오. 강준형 씨.”

그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몰라서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멍청히 동생을 주시했다. 도착한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강준형은 내 옆에서 물러나며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 대표님. 설마 겨우 안채에 몰래 들어왔다고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당황스러운데요.”

“지정된 곳을 제외하곤 출입을 금한다고 이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몇 번이나 언질했을 텐데? 안내인을 따돌리고 이곳에 들어온 걸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무슨 의도로 내 공간에 함부로 들어왔느냔 말입니다.”

살얼음판 같은 동생의 분위기에 남자는 한발 양보해서 다소 부드러운 어조로 변명했다.

“제가 무슨 도둑이라도 된다는 태도군요. 이거 섭섭합니다……. 풍취가 기가 막히길래 그냥 구경을 하다 우연찮게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을 뿐입니다. 직접 보시면 알겠지만 이분과 처음 만나서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현 씨도 마침 혼자 계셔서 심심하신 거 같았고요. 그렇죠 기현 씨?”

미친놈이. 방금까지 날 그렇게 희롱해 놓고 나한테 변명을 넘겨?

그 뻔뻔함에 말문이 막혔다. 수십 개의 눈이 이번에는 일제히 나를, 아니 내 입을 쳐다본다. 내가 입을 열기 전까지 숨 막히는 정적이 시작되었다. 내 얼굴로 와 닿는 칼날 같은 시선들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대화만 한 건 사실입니다. 제가 몸이 안 좋아 안채를 떠날 수 없으니 여기서 통성명 중이었습니다.”

더듬더듬 말이 끝나자마자 나를 담은 동생의 눈이 타오르는 게 보였다. 광기보다도 분노보다도 더 큰 원망이 잠식했다. 감당할 수가 없어 시선을 피하는데 옆에 서 있던 강준형과 눈이 마주쳤다. 나에게 발언권을 넘기고 처분을 바란 건 남자일 텐데 그는 오히려 내가 감싸 준 것에 놀란 눈치였다. 적어도 자신이 희롱한 것에 대한 건 각오하고 있던 기색이라 내 발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찰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나를 주시하던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기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신음 같은 탄성을 질렀다. 그가 깨달은 게 무엇이던 간에 나는 그 작은 소리가 사형 선고를 내리는 듯했다.

“……아아. 그렇군. 그래서…….”

몇 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강준형은 이윽고 당황했던 기색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여유로운 표정을 다시 되찾은 뒤였다.

“제가 생각보다 큰 결례를 했군요. 죄송합니다. 어떻게 사과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무리의 뒤에 있던 K그룹 사람으로 추정되는 남자와 여자가 황급히 걸어 나오더니 기하에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일영에서 어떤 보상을 원하시던 말씀만 해 주시면 저희 측이 할 수 있는 한 전부 보상하겠습니다. 노여움을 그만 푸시지요.”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회장님도 유감스러워하실 겁니다. 사장님도 다른 뜻이 있어서 여기 오신 건 아니실 겁니다. 이번만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이 몇 번이고 용서를 청하자 기하가 화를 주체할 수 없는 눈으로 강준형을 노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지금 건드리고 싶은 걸 꾸역꾸역 간신히 참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힘을 가까스로 누르면서. 다른 그룹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 가문 사람들은 그의 힘을 알기에 그저 그가 노한 것이 풀리기만을 바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이 타인들의 앞에서 신의 힘이 발현되면 끝장이다. 건드리기에는 상대의 몸집이 너무 컸다. 그걸 동생도 알고 있을 터였다.

결국 분노를 억지로 다스린 동생이 잇새로 간신히 내뱉었다.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강준형 사장님.”

“처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대로 덮고 넘어가진 않겠다는 말이었지만 지금 동생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관대함을 베풀었다는 걸 알았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나만이 안도하지 못하고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강준형이 차갑게 웃으면서 쐐기를 박았다.

“이기하 대표님이 이런 면이 있었군요. 처음 만났을 땐 감정 표현을 잘 안 하길래 나이도 어린데 포커페이스에 능하다고 감탄했는데, 형에 관한 일에는 완전 다른 사람 같습니다. 깜짝 놀랐네요.”

“그만하죠.”

“거기서 편을 들어 줄 줄 몰랐는데 일을 키우기 싫어 그랬습니까? 아니면 나를 위해? 어느 쪽이든 간에 빚을 졌습니다. 형과 동생 두 분께 다 빚을 진 셈인가요? 저는 이래 봬도 은혜는 반드시 갚는 편이라서요. 내 보답을 기대하셔도 됩니다.”

남자가 귀 옆에서 뱀처럼 속살거렸다. 하지만 남자의 말 따위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곧이어 섬뜩할 정도로 서늘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므로.

“떨어지라고 말했을 텐데. 강준형 사장님도 학습 능력이 부족한 모양이군요. 아니면 내 화를 더 돋우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건가?”

옆으로 다가온 기하가 흔들의자 팔걸이를 꽉 잡았다. 의자는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지만 심장이 덜컥거리며 비정상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보호하듯 시선을 차단하고 내 앞에 선 동생을 보며 강준형이 미묘하게 조롱이 느껴지는 어투로 말했다.

“기현 씨가 무서워하지 않습니까? 저도 안 무서워하던 분이 신기하게 동생은 무서워하네요. 어째 두 분은 형보다 동생분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사실 대표님이 형 아닙니까?”

“충고하는데, 이쯤에서 참고 넘어가 줄 때 그만두는 게 현명할 겁니다. 강준형 씨. 그리고 내 형님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불쾌하니까.”

불쾌하다는 단어를 내뱉을 때의 말투는 흡사 욕을 하는 것 같았다. 손님에게 대하는 태도로는 결코 보이지 않을 적의였다. 강준형도 기하가 보이는 비정상적인 응대에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두 분 다 어지간히도 방어적이군요. 아니 이제 협력 관계가 되었는데 친한 척도 못 합니까?”

“나는 그쪽과 형님을 포함한 계약을 건 적 없습니다만……. 친한 척?”

기하가 손가락을 세워 툭툭, 흔들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왜 당신이 내 형님과 친한 척을 해야 하지? 응?”

“이제 한배에 탔으니 기현 씨와도 인사하고 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이리 민감하게 반응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저 나는 잘 지내보자는 얘길 하고 있는 겁니다만.”

“내가 당신을 투자할 가치가 없을 만큼 머리가 나빠서 이런다고 판단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내 말을 무시할 만큼 일영을 하수로 보고 있어 이런다고 판단하는 게 좋겠습니까? 강준형 씨.”

강준형은 얼어 있는 내 쪽을 쳐다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거칠 것 없이 굴던 그도 기하가 자기보다 더 막무가내로 나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한발 물러났다.

“집요했다면 미안합니다. 그게 이리 민감하게 굴 일인 줄 몰랐습니다. 이 대표도 이기현 씨도 아직 어려서 그런지 순진한 구석이 있어요. 그런 농담 하나에 이렇게 달려들고 그러면 앞으로 운영할 때 꽤나 곤욕을 치를 겁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기하는 침묵했다. 동생의 뒷모습만 보여서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진 볼 수 없었지만 기하를 바라보는 강준형의 표정이 순간 뻣뻣하게 얼어붙는 건 보였다.

기하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충고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농담에 너무 진지했군요.”

흉흉한 기운을 내뿜은 게 언제냐는 듯 끝을 흐리는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실려 있었다.

“그러니 잘 부탁합니다. 강준형 씨. 앞으로의 협력 말입니다.”

시선이 느껴져 위를 쳐다보니 여전히 원망을 지우지 않은 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기하야.”

이제야 겨우 너의 이름을 불러 볼 수 있었다. 일이 터질까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손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여기는 왜 나와 계셨던 겁니까. 제가 오늘은 안채서만 머무시라고 했을 텐데요.”

“정원 구경을 하고 싶었어. 안에만 있는 게 답답해서…….”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러잖아도 들어가고 싶었다. 죽도록 들어가고 싶었다. 여길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오늘 한정으로 뭐든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말이 반가워 일어나려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에 억지로 힘을 줬다가 다리가 휘청했다. 이런 몸 상태임을 들키고 싶지 않아 기하의 등 뒤를 힐끔거렸다. 우리를 지켜보던 가솔들과 다른 사람들은 곧 사태 수습과 보상에 대한 토론을 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강준형. 그 남자뿐이다.

그는 뒤늦게 분노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압살해 버릴 듯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시선에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어차피 그의 눈치라면 날 건드리는 남자가 다름 아닌 동생이라는 사실은 유추해 냈을 거다. 저렇게 숨기지도 않고 독점욕을 드러냈으니. 하지만 거기에 구체적인 정황까지 얹어 주고 싶진 않았다.

뒤를 보는 내 시선을 따라 기하도 고개를 돌려 강준형과 시선을 교환했다. 몇 초간 그와 서로 마주 보더니 동생은 갑자기 말 한 마디 없이 내 위로 깊게 몸을 숙였다.

“무슨……!”

외마디 신음을 지르며 몸을 뒤로 물리자 동생은 가뿐하게 내 등과 무릎 뒤에 팔을 꿰어 넣은 뒤 속삭였다.

“제 목에 팔을 두르십시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휙 공중 위로 띄워졌다. 상황을 인지하고 비명을 안 지른 스스로가 용했다. 몸이 붕 뜨며 긴장해 버리는 바람에 가뜩이나 뭉쳐 있는 온몸의 근육이 찢길 듯 아팠지만 그것보다 동생이 나를 사람들이 있는 데서 안아 올렸다는 사실에 콱 기절할 것 같았다.

아무리 동생의 체격이 크다고 해도 나도 평균 키를 웃도는 평범한 남자였다. 이런 자세로 안겨 갈 정도로 아담한 사이즈가 절대 아니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역시나 아닌지 얘기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돌아보고 경악하는 게 보였다.

“기하야……!”

“예.”

“너…… 미쳤어? 안 내려놔?”

“목을 안 감으시면 더 꽉 안아야 하는데요.”

거짓말이 아닌지 동생은 날 안은 상태에서도 가볍게 얼러서 고쳐 안기까지 했다. 그러는 바람에 더 바짝 동생의 품에 안겨 들었다.

“이기하. 너 대체 왜 이래……!”

“들어가서 얘기하죠.”

“내려놓으면 내가 알아서 걸어갈 테니까 지금 당장 내려놔!”

“이 허리로 기어갈 셈입니까?”

어차피 고용인의 손을 빌릴 거 아니었냐며 동생이 빈정거림이 섞인 말투로 속삭였다. 동생의 등 뒤로 우리를 바라보며 험악한 표정을 지은 강준형이 보였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웃고 있지 않았다. 아까만 해도 얄미워서 패 버리고 싶을 정도로 웃던 남자가 오늘 들어 제일 웃어야 할 포인트에서 웃질 않고 있었다.

확인 사살이다. 확인 사살을 해 버렸다. 나는 참담해져서 눈을 감았다.

* * *

안채로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현진과 고용인들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 나왔다. 아마 밖의 소란을 고스란히 다 들었기 때문일 터라 그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뒤를 따라오기만 했다. 특히나 나를 동생에게서 부탁받았을 현진의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안에서 쉬라고 한 말을 따랐을 뿐이기에 이 상황은 전부 다 내 탓인데.

날 안아 든 채로 복도에 멈춰선 기하는 뒤따르는 고용인들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일갈했다.

“일 똑바로 못 하나?”

“……죄송합니다.”

세상이 끝난 표정들을 하고 고용인들은 허리를 숙였다.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원인이 무언지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몇 개나 되는지라 안겨 있는 나는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무엇 때문에 화났냐고 물어보면 더 화를 돋울 테고.

우리가 침실 쪽으로 가는 걸 본 현진이 다급하게 뒤따라오더니 침실 문을 열기 직전에 기하의 등에 대고 간신히 토해 내듯 고했다.

“가주님……, 지금 기현 씨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품 안에서 고개를 들자 굳은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상처가 별로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냥 하루 이틀 근육통에 시달리는 정도라며. 상한데 없다며?

미안.

그녀가 또 눈으로 말했다. 현진의 표정을 보고서야 겨우 나한테 투여한 게 진통제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쩐지 강제로 몸은 기상했지만 정신은 계속 약이라도 한 것처럼 몽롱하고 안 움직여지더라니. 그녀가 유독 얌전하게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게 떠올랐다.

현진이 안타까운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 기색이 심상치 않자 동생이 고개를 돌려 현진과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형님의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압니다. 그렇게 걱정되면 아까 욕보일 때 곁에 있어 주지 그랬습니까?”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

“그만.”

몸이 떨렸다. 욕보일 때라니, 기하가 강준형과 있었던 일 때문에 화를 내고 있었던 거구나. 대체 어떻게 그걸 알았던 거지?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하늘에 눈이 달린 게 아닐 텐데.

침대 앞에 걸어가 나를 그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동생이 그대로 내 위로 올라왔다. 몸 위에 동생의 체중이 쏠리며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뜨거운 숨과 부드러운 머리칼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손등으로 입술을 막자 동생 역시도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내 손바닥에 혀를 내밀어 길게 핥기 시작했다. 뜨겁고 축축한 살덩어리가 손바닥을 헤집었다. 손가락 하나하나 이를 세워 깨물기 시작하는 걸 보고 눈을 감았더니 깨무는 강도가 한층 더 심해진다.

강준형의 스킨십을 따라 하듯 입을 가렸던 손을 잡아 끌어 내리며 동생의 입술이 재차 내려왔다. 나는 질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 하지 마.”

동생의 눈을 한 사내의 욕정에 본능적으로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치미는 혐오감에 차마 밀어 내지도 때리지도 못하고 내 손이 어정쩡하게 그의 가슴팍에 머물자 동생의 말투가 한층 신랄해졌다.

“내가 그 남자와 같은가 보죠?”

“……어떻게 네가 그걸 알고 있어?”

“이 집 안엔 제 눈이 많으니까요. 형님께서 무얼 하시든 제가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하물며 다른 새끼랑 붙어 있는 걸 모를 리가.”

태연하게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내가, 내가 네 여자라도 돼? 감시인이라도 붙였어? 그런 거 싫다고, 끔찍하다고 말했잖아. 숨 막힌다고.”

“그러셨죠. 언제 형님이 제가 해 드리는 걸 기꺼이 받아들인 적이나 있으셨나요? 형님을 걱정해서 하는 일도 다 진저리 치기만 하시죠. 이번에도 안 붙였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냥 당하실 생각이었나요?”

“네가 와서 오히려.”

그 남자가 우리 사이를 알아 버렸다. 우리 일족도 아닌 사내가, 내가 너와 그런 사이라는 사실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네가 안 왔어도 마침 그 사람은 가려고 했었…….”

“해결할 수 있어서 그렇게 태연히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그 남자한테 당할 뻔하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내 앞에서 그놈 편을 들더군요?”

“편을 들었다니, 내가 언―.”

“아, 둘이서 인사만 했다 하셨지요. 형님께선 그런 스킨십이 인사셨나 보군요.”

기하의 빈정거림에 말문이 막혔다. 사실 큰소리치긴 했지만 마지막에 사태 수습을 한 건 동생이었고 내가 한 건 결국 위증뿐이었다. 동생을 거짓말로 이겨 본 적도 없는데 늘 그의 눈을 속이려고 시도했다. 한두 번 겪어 본 것도 아닌데 학습 능력이 없는 건 바로 나다.

현진이 낮에 해 줬던 편하게 생각하고 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녀 말대로 나는 쉽게 갈 수도 있는 길을 항상 반대편의 악패를 꺼내 들곤 했다.

내 딴에는 잘하려고 그런 거야. 널 위해 그런 거야.

하지만 네가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그 남자가 날 만졌다는 말을 했을 때 보일 반응이 무서워 그랬다는 걸.

“내가 그 남자를 해칠까 봐 걱정이라도 됐습니까?”

조롱하는 어투였지만 그의 표정은 말투와는 반대로 상처받아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동생의 그런 표정에 한없이 약했다.

“기하야. 대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

“그런. 그 남자 따위를, 내가 걱정할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사실 그 남자를 제일 패고 싶었던 게 바로 나였는데. 고작 그딴 남자를 걱정해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 몇 년간 걸쳐서 학습된 훈련의 결과인지 동생이 이런 식으로 압박을 가하기만 하면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나는 버티지 않고 빠르게 패배를 인정했다.

“미안……하다. 넌 나에 관한 일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심한 결벽증을 보이니까 그 사람들 앞에서 그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어. 지금도 이러잖아. 나와 관련된 일이면 앞뒤 생각 안 하고 덤벼드는 거.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래. 네 손님이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당신을 건드렸는데?”

“들었다면 알 거 아냐.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앉아서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는 걸 알잖아.”

“당신 몸을 멋대로 주물렀는데도 별일이 아니라고? 내가 바본 줄 아십니까? 아니면 심각한 일이라는 자각이 없는 겁니까? 내가 당신 몸에 때가 타는 걸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숨기고 넘어가려고 했습니까?”

내 몸을 자기 것으로 취급하는 그의 말에 귀가 화끈해졌다. 네가, 네가 이런 반응을 보일까 봐 두려워서 거짓말한 거였다. 내가 너의 이런 비정상적인 반응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완력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인 걸 알자마자 소리라도 쳤어야지. 가만히 앉아서 당하진 않을 거라고? 그 남자가 진심으로 당신을 깔아 눕히려고 한 게 아닌 걸 모릅니까?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건드리며 간을 봤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 험한 생각을 하고 수작 부리는 걸 알았을 텐데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연락받고 달려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압니까?”

잡힌 턱이 뜨겁다. 평소의 다정하고 상냥했던 동생이 쏟아 내는 분노에 당황해 말을 잃어버렸다. 강준형이 말했듯이 다른 사람은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동생을 대할 때는 무서웠다. 공포의 존재여서가 아니라 내 모든 행동에 일희일비하면서 세상엔 오직 나 하나밖에 없다는 듯 굴기 때문에.

내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기하에겐 태풍과도 같은 영향력을 가진다. 그래서 동생이 나에게 집착하며 숨을 조여 올 때마다 내가 실수해서 아이를 망칠까 봐 덜컥덜컥 겁이 났다.

“오만 생각을 다하며 도착했더니 감히 내 앞에서 그 남자 편을 들어? 무슨 기분이었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그 자리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어. 내가 조금만 당신을 덜 사랑했어도 망설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도 그런 짓을 하면 당신이 괴물 보듯 볼 것이 걱정돼서 물러났습니다. 그 남자 말대로 당신이 날 무서워하고 있었으니까!”

“……기하야.”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숨이 막혔다. 널 수차례 버린 나 때문에 시작된 집착의 벌이 천근처럼 몸을 눌러 왔다. 저 아이를 이렇게 만든 건 내 탓이다. 이렇게 변하게 된 건 전부 내 탓. 너를 버리고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네가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내가 잘못했어. 생각이 짧았어. ……너에게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내 선에서 해결이 될 줄로만 알아서…… 미안해.”

“…….”

“내가 네게 걱정 끼치는 걸 싫어하는 거 알잖아.”

웅크린 머리 위로 기하의 품이 내려왔다. 귓가에 입술이 맴돌더니 화를 억누르는 듯 한층 더 낮아진 저음이 오싹하게 들려왔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어떤 사소한 거라도 당신 몸에 손을 대는 사람에 관한 건 절대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대신 다른 거짓말은 내가 다 참아 준댔잖아요. 무슨 거짓말을 해도 좋아. 다 받아 주잖아. 날 기만하는 것도 이용하는 것도 다 모른 척해 줄 수 있어. 그런데 당신한테 손대는 놈들에 대해 거짓말하는 건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진짜 어떻게 해도 용납이 안 돼.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들을 감싸면 미칠 것 같아.”

뜨끔하고 귓바퀴에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계속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강준형이 만졌던 귓불을 이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화끈하게 귀부터 시작된 열이 온몸에 서서히 독처럼 퍼진다.

“다시는 그런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잖습니까. 형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알고 있는 모든 지인을 통제해도 오늘처럼 처음 본 새끼까지 손을 대니…… 내가 미치지 않길 바라면 형님께서 솔직해지셔야 합니다.”

나에게로 향하는 끔찍한 소유욕과 집착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드러내며 명령한다. 동생은 자기가 집착하며 탐욕하는 대상이 피가 섞인 형제라는 게 정녕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어쩌다 내 동생이 이렇게 변한 걸까.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걸까. 아니 널 이렇게 변하게 만든 게 나란 존재인가. 내가 사람이라서 여우 신의 이성이 부서지지 않는 게 아니라 어차피 부서짐은 예견되어 있던 게 아닐까? 널 지키려고 했다면……. 너를 사랑한다면 애당초 내가 여우 신이 되었어야만 했다고.

너까지 미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너마저 잃어버리면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형님이 제 말만 잘 들어주시면 전 미치지 않아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 안다는 말투로 어르며 자신을 삭고 부패하게 만드는 걸 알면서도 내 몸을 칭칭 감으며 끊임없이 구애해 온다. 나 역시 나를 들이켤수록 기하의 눈이 더 광기에 물드는 걸 알면서도 입을 벌려 나를 내주었다.

당신이 나의 뱀이잖아요.

나만의 뱀.

내 제물.

고개를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턱을 움켜쥔 채 동생의 이빨이 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울고 싶었다. 거부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받아 주지도 못한 채로 그의 가슴에 안겨 몸을 떨었다. 숨이 막혔다. 숨이 막혔다.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다. 그렇지만…….

정작 나보다 더 숨 막히고 죽을 것 같은 건 신을 계승한 너겠지.

밀어내지 않는 걸 확인한 동생의 입술이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놓고 조심스럽게 겹쳐 왔다. 아릿한 통증이 일던 피부 위에 야릇한 감각이 씌워진다. 숨결을 토해 내며 예민한 피부가 입 안에서 맞물려 비벼졌다.

내 몸이 물러나려 하자 끌어당기는 힘이 강해졌다. 제발 조금만……. 자신도 독을 마시면서 나에게 애처롭게 독을 권했다. 그것이 나를 파괴할 걸 알면서도 동생이 권하기에 나도 입을 벌렸다. 밀어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알고 있지만.

“…….”

상냥하게 빨아들이는 애무에 절로 신음 소리가 새었다. 느끼고 있다는 게 명백한 반응에 스스로 당황해 숨을 들이켜자 목구멍으로 달콤한 타액이 흘러든다. 뱉어 내지도 못하고 흘러드는 대로 계속해서 마실 때마다 몸이 홧홧하게 뜨거워졌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은 상태인데도 취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나 네 숨과 타액은 달콤한 걸까.

처음부터 그랬다. 머리로는 너를 거부하지만 몸은 항상 너를 기꺼워했다. 네가 나를 만지고 파고들 때마다 몸이 행복해하는 걸 안다. 그렇게 몸이 동생을 원할수록 반대로 내 이성은 차가워졌다.

딱 한 번만이라도 눈을 감고 동생을 받아들이고자 하면 죽고 싶을 정도로 맹렬한 자기혐오가 밀려들었다. 어차피 신의 상태인 동생의 몸과는 수십, 수백 번은 우스울 정도로 몸을 섞었을 텐데도 그랬다. 내 이런 이상 증세에 그가 약도 쓰고 어떻게든 치료해 보려 하는 등 별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는 것도 알고 나 역시 차라리 그렇게라도 해서 편해졌으면 하고 바라지만…… 역시 안 된다. 내 대에서 광인을 보는 건 아버지로 족했다. 제물에게 빠질수록 걷잡을 수 없이 미쳐 갔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숨이 가빠져 헐떡이자 기하는 입술을 떼고 내 턱에 흘러내린 타액을 정중하게 핥아 올렸다. 동물들이 할 법한 친밀한 그루밍과 연인끼리 할 법한 애무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그게 우리의 거리였다.

한참을 그렇게 애정 어린 스킨십을 하던 동생은 비로소 만족한 듯 한숨을 토하며 내 뺨에 얼굴을 비볐다. 더 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고 애틋하다. 동생이 나에게 건네는 언어는 늘 그렇게 벅차오를 정도로 상냥하고 정애에 가득 차 있다.

내가 어긋나지 않고 그의 곁에 머물기만 해 준다면.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

“무서워하지 말아요.”

“……그러지 않았어.”

그가 참아 주는 다른 거짓말을 했다. 동생이 뻔히 알고 있는 선의의 거짓말을. 다행히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은 사그라졌는지 쓸쓸하게 미소 짓는다.

“그래요.”

동생은 입을 열다 말고 참아 왔던 숨을 토해 내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내 손을 들어 깍지를 낀 채로 입술로 가져갔다. 내가 빨아들여 평소보다 붉게 물든 입술이 내 손가락 마디와 끝 하나하나에 정중하게 입을 맞춘다. 그러다 다시 내 턱을 가볍게 붙잡았다.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이번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한 번의 입맞춤으로도 만족했는지 더 요구하지 않고 입술 대신 뺨에 키스가 내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