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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뜬 건 꼬박 반나절이 지나서였다. 잠을 자 봤자 늘 악몽을 꿨던 내가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편하게 반나절이나 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눈을 떴을 때 눈앞이 캄캄하기에 아직도 밤인 건가 하고 깜짝 놀랐으나 계속 눈이 가려져 있었던 걸 알고 가리개를 풀었다.
“…….”
왜 아무런 소음이 들리지 않는데도 저절로 잠이 깼는지 알 수 있었다. 꽃향기 덕분에 깼던 것이다. 작지 않은 방 안은 온통 꽃고비로 장식되어 마치 정원에 누워 있는 것 같다. 어제 정원에 가득 피어 있던 꽃을 그대로 방 안에 옮겨 놓은 듯 수백 개의 꽃송이들이 내 주변을 파랗게 감싸 안고 있었다.
로맨틱하다면 로맨틱한 광경이었기에 한참 동안 주변을 바라보고 앉아 시간을 보냈다. 동생이 이렇게 해 두고 간 건가. 그러고 보니 어제 정원 칭찬을 한 마디도 안 한 게 생각났다.
내가 좋아할 만한 일을 하면 꼭 칭찬을 듣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있다. 다른 건 모두 무시해도 정원에 관한 일만은 지나가는 어투여도 칭찬을 해 줬기에 동생은 이번에도 역시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두통에 꾹꾹 이마를 짚는데 순간 손에 쥐고 있던 눈가리개가 눈에 들어왔다.
손안에 부드럽게 감기는 건 비단으로 된 고급 넥타이였다. 그것도 어제 이경헌의 목에 선심 쓰듯 걸어 주었던, 동생이 생일 선물로 직접 디자인해서 제작해 준 넥타이. 쓸모가 없어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제 발로 다시 돌아왔다니. 언제 되찾아 와 둘러 주었는지 모르겠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어제 얌전히 넘어간다 싶었는데 역시 아니었나 보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은 자라 해도 집안 어른이 나 때문에 벌을 받는 건 내키지 않는데.
화를 내고 패악을 떠는 것은 차라리 직접 하는 것이 나았다. 내가 보호가 필요한 어린애도 아니고 동생이 나를 대신해서 혈족들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보기 좋을 리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이경헌과 실랑이하다 부러진 새끼손톱이 생각나 손을 들여다보았다.
“……?”
대수롭잖게 손을 들었다가 눈을 의심하며 혹시 착각한 건가 싶어 반대편 손도 들어 살펴보았다. 통증이 어느 순간부터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싶더니 반쯤 부러져 피가 맺혔던 손톱은 어느새 완벽하게 재생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다친 적이 없었다는 것처럼. 분명 손톱의 반이 떨어졌었는데……. 당황한 눈으로 연신 양쪽 손을 살피는 와중 방 밖에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이 고하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기현 님, 일어나셨습니까?”
“아…… 네.”
“좋은 아침입니다. 안채에 상을 차려 두고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가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일이 있으셔서 잠깐 본가 쪽으로 이동하셨습니다만 기현 님이 일어나신걸 아시면 곧 오실 겁니다.”
두통이 심해졌다. 다리의 떨림을 진정시키며 이마를 꾹 짚었다. 아직도 꿈속인 듯 현실 감각이 없었다. 내가 말이 없자 고용인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제가 들어가서 시중을 들까요?”
“아니, 아닙니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내 기색을 살핀 고용인이 이윽고 조심스럽게 물러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한 번 보여 주기 위한 용도로는 과할 정도로 방 안을 장식한 꽃고비와 내가 누웠다 일어난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넥타이.
푸른 꽃물결 사이에 놓인 검은 비단 넥타이는 꽃무리 안에 도사린 채 숨어 있는 뱀을 연상시켰다. 꽃 같은 내 동생과…… 뱀 같은 제물인 나를.
넥타이를 검지와 엄지만으로 들어 올리고는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한번 버렸던 물건을 다시 주워 갈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경헌의 목에 걸어 주었던 것이었다면 더더욱.
선반 안의 면도칼을 찾아내 넥타이를 잘게 잘게 뜯어 변기 속으로 떨어뜨렸다. 부드러운 비단 천은 곧 물에 젖어 가라앉았다. 가라앉은 넥타이 뒤에 금박으로 수놓아져 있던 내 이름 이니셜이 보였다. ……그리고 그 이니셜은 동생의 이니셜이기도 했다. 망설이지 않고 변기 레버를 눌렀다. 곧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변기 안에서 검은 천 조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 손에는 이제 면도칼만이 남아 있었다. 이것 역시 변기 안으로 떨어뜨려 버리려다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날카롭게 잘 벼려진 면도날은 방금 넥타이를 가볍게 잘라 내 버린 것처럼 한 번의 손짓으로 무엇이든 깨끗하게 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을 채우는 어두운 감정마저 잘라 줄 수 있을까.
안채 건물의 외형과 구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것들이 완전히 신식 형태의 인테리어를 하고 있고 특히나 욕실은 완벽하게 개조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면도칼만은 구형의 납작한 접이식 면도칼이었다. 애초에 나는 체모가 옅고 거의 없는 편이었다. 나에게 면도칼은 쓸모가 없는데도 내 공간에 들어와 있는 물품이었다.
바짝 날이 서 있는 그것을 검은 색 팔찌를 낀 것 같은 형태로 새긴 손목 문신 위로 가늠하듯 가져다 댔다. 그것은 처음부터 제자리였다는 듯 문신과 완벽하게 맞아 들었다.
이 두꺼운 손목의 힘으로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의 멱살을 잡아 올리고 나보다 젊고 강한 자들도 때려눕힐 수 있지만 이 얇은 것은 그럴 필요 없이 한 번에 나를 잠재울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내 몸은 딱 한 번이었지만 이 물건의 도움을 빌린 적이 있었다.
* * *
‘네가 나를 선택한 것에 대한 대가야.’
‘너 때문에 죽는 거라고, 내 죽음은 다 네 탓이라고.’
처음으로 동생에게 강간을 당했던 다음 날, 나는 가솔들이 잠든 새벽에 몰래 동생의 침실로 숨어들었다. 동생은 곧바로 내 기척을 눈치채고 반가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지만 나는 나를 바라보는 동생의 눈앞에서 왼쪽 손목에 면도칼을 들이대고 잔인한 말을 미친 듯이 쏟아 내었다.
‘더러운 짐승 새끼, 악마, 죽어, 절대로 용서 못 해, 역겨운 새끼, 지옥에나 떨어져.’
동생은 내 어떠한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 애가 주시하는 건 단지 손목에 드리운 칼뿐이었다. 숨도 안 쉬고 얼어붙은 표정으로 동생은 말 한 마디 없이 내가 쏟아 내는 폭언을 감내하며 칼만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분노를 고스란히 동생에게 쏟아 낸 뒤 ‘내가 죽는 건 다 너 때문이야.’ 하고 비소하며 잘 벼려진 칼날을 왼쪽 손목에 대고 확 그었다. 신기하리만치 고통은 없었다. 한순간 화끈하기만 하고 그었다는 감각조차 없었지만 비현실적으로 붉은 피가 줄줄 쏟아지기 시작해 왜인지 모르게 유쾌해졌다. 썩어 문드러진 고름을 터트린 것처럼, 비로소 해방되는 기분이었다. 이제 그 빌어먹을 제물도, 여우 신 따위도 안녕이라며 만족해서 동생을 쳐다봤다. 그런데.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나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던 동생은 쏟아지는 피를 보자 천천히 몸을 일으켜 놀랄 만큼 침착하게 나에게로 걸어왔다. 그 아이가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길 바랐던 나는 상상했던 반응이 아니자 순간 당황했다.
그 아이의 태도는 그래, 마치 왜 이제야 죽으러 왔냐고 말하는 듯했다.
‘…….’
적어도 하지 말라거나, 내가 잘못했다거나, 용서해 달라거나 하는 동생의 목소리는 듣고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태도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동생이 동생 같지 않은 존재로 느껴졌다. 광채 잃은 그의 눈은 타들어 가고 있었고 내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보다도 동생의 두 눈이 더 붉었다.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건 내 앞까지 걸어온 동생이 허리를 숙여 떨어뜨린 면도칼을 집어 들 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지만 동생이 칼을 주워 드는 데서는 본능적인 공포가 샘솟았다. 망연한 눈으로 동생의 행동을 바라만 보고 있자 그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여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죽겠다고?’
음습한 그 아이의 말투는 내가 기대한 그 어떠한 말투와도 닮아 있지 않았다.
‘죽겠다라…….’
‘…….’
‘형님. 사람은 그 정도로 죽지 않아요.’
동생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러곤 보란 듯 자신의 왼쪽 팔목에 면도칼을 들이댔다.
‘잠……!’
말릴 새도 없었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망설임 한 조각 없이 아이는 고기에 칼질을 하듯 가볍게 손목을 스걱 베어 냈다. 겨우 한 번 얕게 베고 지나간 내 손목의 상처를 비웃기라도 하듯, 내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동생의 흰 손목은 금세 왈칵왈칵 붉은 피를 뿜어 대기 시작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부서지는 내 표정을 바라보며 면도칼을 더 깊숙이 박아 넣었다. 아이가 너무 평화로운 얼굴로 칼을 놀려서 실제 손목이 아닌 모형에 칼질을 한 것 같을 정도였다.
현실성 없는 눈앞의 광경에 시야가 아득해졌다. 애초에 이런 웃기지도 않은 촌극을 시작한 건 나였는데, 내가 주연 배우가 아니었다.
나는 순식간에 무대 위에서 강제로 밀려났다. 동생은 내 나약함을 비웃으며 내 위에 우뚝 서 버렸다. 칼자루를 빼앗기고 넘어진 내 손에 남아 있는 건 더럽고 나쁜 피뿐이었다. 죽음을 입에 올리며 빠져나가려는 나를 보고 아이는 친절하게 몸소 죽음의 문을 닫아 주었다. 대신, 자신이 그 문 앞에 섰다. 덜덜 떨면서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아무리 쥐어짜도 소리가,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동생은 그렇게 목을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나를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쳐다보았다. 이제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통쾌해했던 건 나였는데 그런 나에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삽시간에 무너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바닥을 기며 구차하게 동생의 다리에 매달리는 일 밖에 없었다.
‘기……기하야, 뭐 하는 거야……?’
‘어때요?’
‘무슨 짓…….’
‘이제 만족해요?’
‘그만…… 잠깐! 하지 마……!’
눈앞에 재차 후드득, 하고 붉은 피가 떨어졌다. 비라도 내리는 것 같았다. 코가 아릴 정도로 비릿하고 생생하게 뜨거운 비가.
‘안 돼……! 그만해!’
‘형님이…… 후, 날 버리고 죽는댔잖아요.’
‘잠깐…… 아니야! 아니야 기하야……!’
‘왜? 나도 죽어 버리라면서. 내가 끔찍해서 형도 죽는 거라며. 그럼 같이 지옥에 가요. 혼자 보내지 않을게.’
내가 그런 소리를 했어? 내가 너에게 그런 말까지 했어? 아냐. 내가 그럴 리가. 난 그런 적 없어. 난 그저…….
‘잘못했어. 미안해! 안 그럴게. 형이 잘못했어!’
내가 왜 그랬을까. 난 왜 동생의 눈앞에서 죽으려고 한 걸까. 나에게 뭐가 씌어 있었던 걸까. 내 죽음 따위를 기릴 게 뭐가 있다고 굳이 동생의 눈앞에서.
나는 울면서 동생의 발밑에 엎드렸다. 엎드린 내 몸 위로 동생의 피가 쏟아졌다.
‘그러지 마! 잘못했어…… 기하야.’
천한 것이 숭고한 것을 받들 듯 흘러내린 피로 젖어 드는 그의 발등에 얼굴을 비비며 정신없이 애원했다. 애걸하고 빌었다. 그가 신을 승계한 이후 단 한 번도 무릎을 꿇어 본 적 없는 나였는데 이 순간 내 무릎은 무엇보다도 가벼웠다.
‘안 그럴게! 그러지 않을게!’
내 실수였어. 항상 그렇듯이 모자라고 멍청한 내가 저지른 실수. 한두 번 잘못했던 게 아니었잖아. 너는 그때마다 나를 봐줬잖아.
‘다시는, 목숨으로 협박하지 않을게. 제발, 제발 기하야.’
이번만,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줘. 제발 이제 다시는 반항하지 않을 테니까. 날 좀 봐줘.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동생은 용서를 빌며 울부짖는 나를 보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시는?’
그 웃음소리가 구원같이 들려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행동을 그가 보지 못할까 봐 온 힘을 다해서 소리를 쥐어짜 냈다.
‘다시는, 절대로! 영원히 그러지 않을게! 맹세할게!’
내가 맹세한다고 매달렸을 때, 동생은 비로소 자애롭게 나에게 피 흘리는 손목을 내밀었다. 눈앞에 드리운 피가 쏟아지는 손목을 보며 나는 내가 오늘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를 잊었다. 피에 젖어 붉은 그 아이의 손은 흡사 선악과를 내미는 독사 같았다. 나는 타락하는 것을 알면서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 손은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으니 내 타락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나는 울면서 피에 젖은 손끝을 핥았다. 왕에게 키스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손에 입술을 대며 복종을 약속했다.
‘그래. 당신이 내게 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협박이었어. 죽겠다고? 어디 한번 죽어 봐. 네가 죽는 게 빠를지 내가 죽는 게 빠를지.’
죽어서 벗어나겠다고? 내가 그렇게 놔둘 거 같아?
광기에 희번덕거리는 붉은 눈이 내 턱을 잡아 올린다. 나는 필사적으로 매달려 깊숙이 베여 흡사 뼈가 드러날 것 같은 아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는 베이지 않은 오른손으로 내 목을 끌어당겼다. 곧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나는 울며 동생의 혀를 받아들였다. 혀에서조차, 타액에서조차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하지만 거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달았다. 움켜쥐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동생의 뜨거운 피가 흘러내리는 데도 정신없이 자유로운 한 손으로 서로를 미친 듯이 끌어안으며 혀를 섞었다. 미쳐 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래 그때부터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로의 피로 젖어 들어가는 바닥 위에 누우며 동생은 내 다리를 벌렸다. 나는 반항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동생의 손목에서 더 이상 피가 빠지지 못하도록 움켜쥐는 일뿐이었다. 피가 빠져나가는 만큼 동생의 생명이 빠져나간다는 그 생각만이 나를 지배했다.
동생의 것이 두 번째로 내 몸을 벌리며 들어왔다. 나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동생의 허리에 다리를 감으며 몸을 최대한 열려고 노력했다. 처음 동생이 나를 안았을 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몸에 꽂혀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내 몸은 동생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몸이 쿵쿵 흔들렸다. 내 머릿속도 미친 듯이 흔들렸다. 마치 이미 죽어서 지옥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이곳이 지옥이었다.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장님이고 싶었다.
나는 손목을 자르는 게 아니라 눈을 찔렀어야 했다. 하지만 나에겐 이제 그 기회마저도 없을 것이다.
내 안에 한껏 씨를 쏟아 내고 동생은 절망하는 나를 보며 나지막이 웃었다. 내 몸 위에서 도사리고 실컷 배를 채운 포식자처럼 만족스러워했다.
‘이제 네가 누구 것인지 알겠어?’
나는 눈을 감고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는 듯 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착하네……. 내 형.’
예뻐. 형이 너무 예뻐서 그래. 너무 예뻐서 나를 미치게 만들었어. 그러니까 이건 다 형 탓이야.
그가 중얼거리는 모든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빨리 날이 밝아서 고용인들이 일어나기를, 눈치채기를 바랐다. 동생의 팔목을 움켜쥔 손은 감각이 하나도 없었지만 더는 아이의 피가 흐르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했다.
감은 내 눈 위를 핥으며 동생은 연거푸 예쁘다고 속삭였다. 나는 동생이 흘린 피의 웅덩이에 잠긴 채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동생이 뱀의 혀로 유혹했다.
나는 형으로 인해 뱀이 되기도, 개가 되기도, 꽃이 되기도 해.
자, 말해 봐. 내가 무엇이 되었으면 좋을지.
나는 대답했다.
‘신이, 신이 되어 줘.’
나를 안을 때만큼은 신이 되어 줘.
제발 이런 날 동생이 보지 못하도록 해 줘, 날 안는 게 동생이 아니게 해 줘.
동생은 자비롭게 선언했다.
‘원하는 대로.’
그리고 나 때문에 동생은 두 사람이 되었다.
* * *
따끔하게 손이 베이는 감각에 놀라 쥐고 있던 면도칼을 놓쳤다. 그리고 뒤이어 대리석 바닥에 떨어진 면도칼이 내는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날 내가 면도칼을 떨어뜨리지만 않았어도 나는 자기 의지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동생…… 아니 이제 신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그 남자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손목의 부상 때문에 일족에 의해 안채의 의료 기계에 몇 주일이나 누워 있었던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선 표정과 목소리로 나타나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내 얼굴을 쓰다듬고는 낯선 호칭으로 나를 불렀다.
‘이기현. 네가 원하던 나야.’
나를 형이 아닌 이기현이라고 불렀다. 동생이 승계를 했던 그날 이후로 또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내 동생의 체온을 가지고 내 동생의 얼굴을 하고는 짐승의 눈을 박은 남자가.
내가 원했던 일이었지만 나는 절망하며 무너졌다. 남자의 몸 안 어디에도 동생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서. 기어코 내가 그날 동생을 죽여 버렸구나 하며 비통해했다. 하지만 남자는 웃으며 나에게 동생을 보여 주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 동생은 여우 신의 인질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내가 했던 경솔하고 이기적인 부탁이 그나마 남아 있던 동생의 자리마저 빼앗았다는 것을.
나는 그날부터 여우 신에게 속박되었고 그의 앞에 무릎 꿇고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독한 절망을 이미 목격했고 지금보다 얼마든지 더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하는 말 하나하나에 여우 신은 교묘하게 덫을 놓았고 내가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이미 어릴 때 보여 줬기에 항쟁의 의지를 잃어버렸다.
애초에 한낱 인간일 뿐인 내가 어떻게 여우 신을 이기겠어. 가당치도 않다.
숨을 몰아쉬며 일시에 또 밀려오는 현기증에 저항하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드러난 왼쪽 손목에 새겨져 있는 문신이 보였다.
손목을 두르고 있는 얇은 문신은 검은 실뱀을 두른 듯했다. 방금 넥타이를 잘라 버린 것처럼 손목의 문신도 잘라 내 버리고 싶었다. 가끔 이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해져서 통제가 안 될 때가 있다. 동생이 신이 되고 내가 제물이 된 이후에 생긴 고질병 같은 거였다. 아득하게 스스로를 좀먹는 새카만 생각들이 내 온몸의 구멍에서 기어 나온다.
어지러워 천천히 세면대에 팔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어제부터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긴 했는데 역시나 어젯밤의 강압적인 행위가 무리를 줬던 모양이었다.
“약……. 약이…….”
진정하려 노력하며 힘겹게 손을 뻗어 세면대 물을 틀었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하지만 숫자를 세도 진정되기는커녕 울렁거림만 심해지는 느낌이라 가슴팍을 부여잡고 헐떡거렸다. 아까 시중을 들겠다고 한 고용인을 보낸 게 뒤늦게 후회된다.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약이라도 가져다 달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찬장이라도 뒤지면 약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비틀거리며 세면대에서 물러나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무언가를 잘못 밟았는지 발바닥에서 날카롭고 화끈한 통증이 올라왔다.
“…….”
아픔이 느껴지는 발을 끌며 찬장에 다가가 문을 열었다. 흐릿한 눈으로 들여다봐도 어느 것이 약통인지 알 수가 없어 휘저었더니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던 목욕 용품들이 바닥으로 요란하게 쏟아졌다. 내려다본 바닥이 붉었다. 내가 걸어왔던 곳마다 섬뜩한 붉은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칼날을 접지 않은 채로 떨어뜨렸던 면도칼을 밟은 것이다.
현기증이 일어 천장을 바라보고 한참을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면대에 틀어 놓은 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바닥에 물이 떨어져 고인다. 고이기 시작하더니 흐른다. 그리고 그 물은 내 피가 묻은 발자국을 흐릿하게 흩뜨리며 내 쪽으로 기어왔다. 붉은 실뱀처럼.
“흐…… 읏…….”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몸을 둥글게 말고 무릎을 끌어안으며 욕실 벽에 기대 미끄러졌다. 젖어 가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가쁘게 숨을 헐떡거렸다.
한동안 이런 적이 없었는데, 몇 개월은 잘 참았는데, 습관대로 왼쪽 팔목의 문신을 긁기 시작했다. 약한 피부는 몇 번 긁지도 않았는데 금세 붉은 줄이 생기며 부어올랐다. 멈출 수가 없었다. 벌레가 기어가기라도 한 듯 간지러웠다. 손목을 긁어낼수록 더 심해졌다. 숨결이 거칠어졌다. 힘겹게 참아 내며 양손을 깍지 껴 봤지만 곧 얼마 못 가 다시 문신 위에 손톱을 세웠다.
내가, 무서운 줄 모르고 감히 신에게 목숨을 가지고 협박해서, 스스로 족쇄를 채운 손.
까만 줄의 문신을 벗겨 내려 하듯 미친 듯이 긁어 댔다. 아픈 줄도 몰랐다.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었다. 긁어내서 까만 줄의 주변이 붉게 변하는 모습이 기꺼웠다.
그렇게 얼마나 정신없이 문신을 긁고 있었을까.
똑, 똑.
“형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완전히 정신을 빼놓고 있던 상태였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숨을 죽이고 움직임을 멈췄다.
“형님. 접니다.”
문 바깥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응답한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한다.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 목소리는 그 남자가 아니다. 신이 아니었다. 동생이었다. 기하의 목소리였다. 신이 고압적이고 낮은 목소리를 낸다면 동생일 때는 부드럽고 나긋한 저음이었다. 그리고 동생만이 한결같이 나에게 하대가 아닌 존댓말을 썼다.
동생은 욕실 문손잡이를 몇 번 더 열려고 시도하더니 조금 더 강하게 노크를 했다.
“거기 계신 거 압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나는 무심코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손목에서 올라오는 강한 아픔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려다보니 처참하게 헤집어진 손목이 보였다. 바닥에 심하게 쓸린 것처럼 얇은 겉 피부가 온통 벗겨져 피가 맺힌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전에 했던 것보다는 상태가 온화한 편이라는 거였다. 내가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건 변하지 않겠지만.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밀려와 말을 하지 못하고 있자 동생이 조금 더 위협적으로 손잡이를 흔들었다. 손잡이가 부서질 듯 흔들리는 걸 보며 혼날 게 걱정되어 움츠러들었다.
“샤워…… 샤워하고 있었어. 금방 나갈게.”
어물어물 말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던 동생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뭘 하고 계셨는지 압니다. 지금 당장 문을 여세요.”
뭘 알아……? 어떻게 알아? 소리를 내고 있지도 않았는데.
“아무 일도 없어. 옷 갈아입고 있었어.”
“……갈아입으시라 놔둔 옷은 욕실 밖에 있는데 옷을 갈아입고 계신다고요.”
“…….”
“형님. 문을 열어 주세요.”
“내가 알아서 나갈 테니깐 신경 쓰지 마. 금방…… 나간다니까.”
허세를 떨며 말했지만 내가 들어도 내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동생은 한참 말이 없다가 천천히 주먹으로 문을 툭, 툭, 내리쳤다. 폐쇄된 화장실 안에서는 그 울림이 커다랗게 들려서 나는 더 움츠러들었다.
“……부술 수 있어요. 하지만 형님께서 열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헛소리는 그만두라는 말이었다. 그가 화를 참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화가 나겠지. 형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멍청한 모습을 보이는데. 저런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는 건 그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왔다는 소리였기에 다시 내 목소리는 바닥으로 기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있다가, 내가 알아서…… 알아서 나갈 테니까 그만…….”
“이기현.”
동생은 내 말 뿌리를 자르며 내뱉었다가 숨을 한번 고르고 다시 다정하게 말했다.
“문을 열어 주세요. 화내지 않을 테니까.”
“…….”
“아무것도 묻지 않겠습니다. 그냥 인사를 하며 나오시면 됩니다.”
그는 그 말 이후로 입을 다물었다. 한참 동안 기다려도 인기척은 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문 밖에 서서 내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내가 나가기 전까지 그는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다. 버티는 건 소용이 없다. 몇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기다릴 아이니까.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문손잡이를 돌렸다.
끼익, 문이 열리며 어두운 곳에 있었던 내 눈에 밝은 빛이 들이닥친다. 이 혼탁하고 좁고 어두운 공간은 마치 나 같았고, 넓고 밝은 바깥은 동생 같았다. 동생은 자신의 공간으로 날 데려가기 위해 문 바로 앞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같은 남자에게 두 번째 인사를 했다.
안녕……, 내 동생.
기하는 내 얼굴을 쳐다보고, 내 몸을 쳐다보고, 마지막으로 내 손목과 발을 쳐다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팔을 뻗어 나를 끌어당겼다. 어제의 그처럼 멱살을 쥐어 올려 강제로 안는 게 아니라 상냥한 포옹이었다. 그의 품에서는 어제와 똑같은 바닐라 향이 났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따뜻한 품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손길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화를 내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고 말했던 걸 지켜 주었다. 왜 그랬냐는 물음 대신 인사를 건네주었다. 나는 대답을 뒤로하고 그의 품에서 눈을 감아 버렸다.
동생의 품에 안길 땐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유리 조각 한 개를 넣은 포근한 신발을 신은 것 같다. 너무 부드럽게 감싸 안아 줘 걸을 때는 행복하지만 베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신발.
포근함에 취해 함께 걷다 보면 내 발은 만신창이가 될 테고 내가 흘린 피에 의해 신발도 피투성이가 되어 버릴 것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
“우리 형님 얼굴 보기가 이리 힘이 들어서야……. 제게 인사도 아직 안 해 주셨어요.”
“아침부터…… 이런 꼴 보여서 미안해.”
“아닙니다. 제가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깨셨을 때 함께 있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곁을 지켜 드려야 했는데요.”
깼을 때 너와 함께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함께 있었다면 나는 동생에게 패악을 부렸을 게 뻔했다. 신에게 당한 화풀이를 애꿎은 너에게 풀었겠지.
“잠깐……. 숨 막혀.”
동생의 옷에 피가 묻을 거 같아 그를 밀어 냈다. 의외로 기하는 선선하게 팔을 풀더니 대신 다친 손목 위를 조심스럽게 끌었다. 약속한 게 있으니 내색은 못 했겠지만 동생의 온 신경이 내 다친 곳에 가 있을 걸 알고 있어 거부하지 않았다.
동생의 눈이 문신 위로 파여진 상처를 집요하게 훑어보았다. 어느 정도의 상태인지 가늠하더니 아직도 피가 배어들고 있는 바닥을 바라보고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다.
“안 되겠습니다. 제가……. 제가 아파서 안 되겠어요.”
동생이 끝내 견디지 못하고 중얼거리며 바짝 다가서더니 내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가볍게 내 몸을 들어 올려 어깨에 얹혔다. 뭐 하는 짓이냐고 항의할 새도 없이 나는 근처의 소파 위에 앉혀졌다. 소파 위에도 온통 꽃송이가 장식되어 있어서 몸 아래 눌린 꽃이 상할까 봐 거기에 온 신경이 쏠린 틈에 동생이 내 앞에 꿇어 앉아 다친 손목을 잡았다.
“너 이게…….”
기하가 지금도 피가 떨어지고 있는 손목에 얼굴을 가져다댔다. 다칠 때마다 이런 행동을 해 왔기에 새삼스러울 건 없었지만 두툴두툴 보기 싫게 까져 피가 맺혀 있는 피부를 핥는 걸 보는 건 고역이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 마.”
신이고 동생이고 내가 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적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거부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당연하게 내 말을 무시한 입술이 손목 위에 닿았다. 뿌리칠 자격이 없어서 그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며 몸을 떨었다.
따뜻하고 습한 숨결과 함께 혀가 아프지 않게 상처 위를 몇 차례고 살뜰하게 핥고 지나간다. 타액으로 촉촉이 적신 뜨거운 살덩어리가 눕혀져 약을 바르듯이 넓게 상처를 쓸어내렸다. 더럽지도 않은지 피에 젖었던 손목이 대신 타액으로 흠뻑 젖을 만큼 계속 핥으며 붉은 자국을 닦아 나간다. 혀를 뾰족하게 세워 상처를 아프지 않게 헤집다가 입술로까지 부드럽게 물고 늘어지자 나도 모르게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뿌리치고 싶은 걸 참은 내게 잘했다는 듯 동생의 손가락이 가볍게 팔뚝을 쓸었다. 그 감촉에 몸서리를 치는데 동생이 허리를 숙이고 발목을 쥐었다. 설마…….
“그건 안 돼.”
“…….”
“절대로, 안 돼.”
손목이야 손톱으로 헤집어 놓은 부분이라 상처 부위가 넓긴 해도 기껏해야 찰과상 정도의 피가 흐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발바닥은 면도칼로 한 번에 깊게 베여서 지금도 바닥에 고일 정도로 피가 흘러내리는 중이다.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라 바닥에 닿은 동생의 바지는 이미 피에 젖어 들고 있었다. 더럽기도 더러울 테지만 발을 핥는 꼴을 볼 수는 없어서 아까보다 훨씬 강경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 마.”
“죄송합니다.”
“나는 하지 말라고 했어.”
발목에 힘을 줘서 내 쪽으로 당기자 발목을 잡고 있는 동생의 몸도 따라 끌려왔다. 하지 말라고……! 당황해 거칠게 발을 빼내는 통에 발끝이 동생의 턱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실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신의 얼굴을 발로 찬 거나 마찬가지라 깜짝 놀란 나와 달리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시 내 발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크게 벌어져 있는 발바닥에 혀를 대기 시작했다.
“읏……!”
손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감각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리를 뒤틀었다. 온몸의 신경이 다 발로 쏠렸다. 상처 위를 길게 핥아 내릴 때마다 옆구리에 야릇한 느낌이 올라온다. 이게 무슨 감각인지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만두라니까……!”
또 발로 차게 될까 봐 힘은 주지 못한 채로 위협하며 으르렁거렸다. 내가 윽박을 지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그는 계속 내 상처를 핥는데 열중했다. 견디다 못해 욕이 입 바로 앞까지 튀어나왔을 때였다.
문 밖에 인기척이 났다. 깜짝 놀라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무슨 일인지 고용인은 문 바로 앞에서 안의 동태를 살필 뿐이지 고하지는 않고 있었다.
참다못해 부르려고 했을 때 겨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주님. 잠깐 괜찮으십니까?”
동생을 부르는 소리였지만 그는 못 들은 척 무시하고 계속 상처를 핥고 있었다. 이 꼴을 고용인에게 보였다가는 큰일이었다. 가뜩이나 제물이 방자하다며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수뇌부의 혈족들이 신을 꿇어앉히고 발을 핥게 놔뒀다는 걸 알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발목을 비틀어 빼내려 애쓰며 목소리를 낮춰 다급하게 말했다.
“그만해……! 너를 부르고 있잖아……!”
“괜찮습니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미쳤어? 이 모습을 보여 줄 셈이야?”
“이 모습이 어떻길래 그러십니까?”
“너 그걸 말이라고……!”
“……정말 송구합니다. 가주님. 급한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심상찮은 소리에 고용인이 한층 더 면구스럽다는 듯 목소리를 낮춰서 고했으나, 좀 전까지 온화했던 동생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나는 기하 대신 얼른 고용인에게 호통쳤다.
“무슨 일입니까?”
“이경헌 어른께서 찾고 계십니다. 귀한 손님이 기다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되도록 모셔 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경헌 이 멍청한 작자. 타이밍을 맞춰도 꼭.
하필 어제의 일이 있고 난 직후라 괜히 식은땀이 흘렀다. 아침에 면도칼로 화풀이했던 넥타이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신보다는 훨씬 온화하다 해도 동생 역시 여우 신이다. 내 몸뚱이에 과도한 집착을 하고 있는 동생이 어제 새끼손톱이 부러진 게 이경헌과 다투다가 그랬다는 사실을 안다면 오늘 아침에 내가 한 멍청한 짓까지 가중해서 그에게 벌을 내릴 것이 분명했다. 이경헌이 벌을 받는다는 사실은 상관없지만 괜한 화풀이 대상이 되는 건 원치 않았다.
넥타이. 넥타이는 일단 알고 있을 테고. 새끼손톱이 왜 부러졌던 건지도 알고 있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형님.”
생각에 잠겨 있느라 발목을 문지르던 동생의 손이 어느새 종아리 안쪽의 여린 살을 은근히 어루만지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흠칫 놀라 또 발로 찰 뻔했다.
내가 크게 당황하여 입을 뻐금뻐금 벌리자 동생이 씩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그렇게 골똘히…… 눈앞에 있는 제 생각은 아니실 테고.”
“손님께서 오셨다잖아. 이제 제발 그만해.”
“그러게요. 흥이 깨졌군요. 모처럼 형님과 있는 시간이었는데.”
“…….”
“함께 있으면 정말 시간이 빠른 것 같습니다. 뵙지 못하는 주중에는 그렇게 더디게 흐르더니 말입니다.”
나는 주말이 되면 도살장에라도 끌려온 것처럼 일분일초를 끔찍이 여기는데, 동생은 반대라고 말한다. 어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무슨 소리를 해도 애틋한 소리를 하는 동생에게 어울릴 만한 대꾸를 해 주지 못할 것 같았다.
치료를 끝낸 동생은 천천히 내 다친 손목과 발에 비단 천을 감아 주기 시작했다.
“방으로 식사를 보낼 테니 드신 후 본가 의료 시설에 가서 검사를 받으십시오.”
또 머릿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하듯 긴 손가락으로 톡톡 내 상처를 동여맨 부분을 가볍게 두드려 상기시킨다.
“정기 검진 날입니다.”
“……또? 왜 그렇게 자주 검사를 받아야 하지?”
내 불평에 동생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이렇게라도 따로 검사받게 하지 않으면 형님께선 몸을 전혀 돌보지 않으시니까요.”
돌볼 필요 따위 없는 몸이라고, 자조하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기하는 몸을 일으키며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저녁 때 뵙겠습니다.”
아쉬운 듯 손을 한 번 꽉 잡더니 천천히 놓았다. 그가 내게서 등을 돌리자 시야에 이제 엉망이 되어 흐트러져 있는 꽃들이 들어왔다.
비로소 오늘 단 한 번도 살가운 소리를 해 주지 않았던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기억났다.
“기하야.”
방을 나가다 말고 기하가 내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자해해서 손목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멍청하게 칼을 밟아 몸에 상처를 내며 욕실을 엉망으로 만든 모자란 형에게 그는 단 한 번도 한심한 눈을 하거나 나무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꼭 해 줘야 하는 말이었다.
“그…….”
“예. 형님.”
“꽃…… 예뻤어. 가꾸느라 고생 많았겠구나.”
담담하게 동생의 붉은 눈을 바라보며 말했지만 귓가가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동생은 놀랍다는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뒤 입을 가리고 기쁜 듯이 눈을 휘며 웃었다.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동생다운 웃음이어서 귀에 열이 올랐다.
“이따 제가 돌아왔을 때 다시 한번 말해 주십시오.”
* * *
점심을 간단히 먹은 뒤 나는 곧바로 본가에 있는 의료 시설에 보내졌다. 본가 대문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여우 신을 위해 본가에선 웬만한 중소 병원 정도의 의료 시설을 갖춰 놓고 있었다. 사실 기하를 위해 만들어 놓은 시설이라곤 해도 정작 가장 많이 활용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래서 의료 시설에 항상 상주하고 있는 가문 직속 의사와 가장 친한 것도 나였다.
“오랜만이야. 자기.”
저번보다 짧은 머리를 한 박현진이 차트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왔다. 의료 시설 안에서 유일하게 일족이 아닌 자였다. 그래서 난 그녀에게만큼은 친절하게 굴었다.
“안녕하세요.”
“얼굴 더 좋아졌네. 나는 이 흰 상자에서 쪼그라들고 있는데 자기는 예쁜이랑 노니깐 얼굴이 피네.”
투덜투덜거리며 내 옆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요새 자주 못 보니 섭섭해. 아, 맨날 다치란 소리는 아니고. 알지?”
박현진은 선일그룹의 장녀였다. 딸의 이상 취향을 눈치챈 회장 일가가 그룹 이미지 실추를 염려해 치워 버리려 전전긍긍하고 있던 상황에 이해가 맞물려 우리 가문의 전용의가 되었다. 가문끼리의 결속을 돈독하게 하면서 동시에 눈엣가시 같은 장녀도 처리하겠다는 계산이 들어간 거래였다. 그녀는 알고라그니아(algolagnia : 통증 성애)여서 그 당시 날이면 날마다 다쳤던 나에게는 아주 안성맞춤인 전용의였다.
동생과 내가 사이좋게 면도칼로 손목을 끊었을 때 전담으로 수술을 맡았던 의사도 그녀였다. 덕분에 어릴 때부터 알게 된지라 그나마 가문에서 내가 마음을 놓고 얘기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혈족이 아닌 그녀에게만큼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녀는 동생이 스스로 손목을 끊고 실려 갔을 때 온몸이 피로 젖어 있는 처연한 모습을 보고 한순간에 반해 버렸다고 한다. 비록 동생이 박현진보다 열 살 이상 어렸지만 그녀는 여우 신에게 완벽하게 매료되어 버렸다.
“워낙 얌전해서 이러다 정기 검진 받느라 올 때만 얼굴 보게 생겼네? 이러다가 일거리 없다고 잘리는 건 아닌가 몰라.”
“현진 씨와는 아―주 오래갈 인연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계속 일거리 만들어 드릴 것 같네요.”
그녀의 눈앞에서 왼쪽 가운 소매를 걷고 까만 비단 끈이 감긴 손목을 흔들었다. 차트를 팔락거리며 넘기던 그녀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손목을 잡아 살펴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 요새 둘 사이 괜찮았잖아. 이제 좀 순응하나 싶었는데.”
“아무 생각이 없으면 괜찮을 텐데. 제가 자꾸 쓸데없는 생각을 하네요.”
“한동안 잠잠하더라니. 왜 한 거야?”
“……자해가 뭐 하고 싶어서 하게 되는 거던가요. 제정신이 아니니까 하는 거지.”
“아이고, 자기야…….”
왜 그렇게 인생 힘들게 살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면 편할 텐데, 끈을 풀며 박현진이 중얼거렸다.
“마음에 병이 있는 건 알지만 자기는 너무 생각이 많아. 쓸데없이 스스로를 좀먹는 상상을 너무 많이 한다고.”
맞는 말이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당해 왔던 습관 때문인지 남들보다 의심이 많고 까칠하며 예민하다. 하지 않아도 될 상상을 하고 스스로 괴로워하며 자학하는 게 흔한 일이었다. 나에게 대가 없이 퍼부어지는 호감은 전부 이유가 있는 것이라 곡해하며 스스로 외톨이를 자청했다.
내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대단히 얄팍한 것들뿐이었다. 툭, 하고 손만 대도 바로 바스스 부스러져 버릴 무가치한 것들.
그때 현진이 생각에 잠긴 내게 말을 걸었다.
“으음……? 자기. 이미 거의 다 아물었는걸.”
현진의 말에 붙잡혀 있는 왼쪽 손목을 바라보았다. 손톱에 의해 헤집어져 겉 피부가 뜯겨 나갔던 왼 손목은 이미 연분홍빛 새살이 차오른 상태였다. 상처를 내고 불과 두 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말없이 팔을 돌려 가며 상처를 확인하자 그녀가 웃었다.
“뭐야. 잘 나은 거 자랑하려고 그랬어?”
“……아니요. 분명 아침에…….”
“연고만 좀 발라서 다시 싸매면 내일이나 모레쯤엔 완전히 낫겠네. 그럼 다른 데 또 다친 덴 없고?”
이번에는 그녀에게 맡기지 않고 발을 의자 위에 올려놓은 뒤 둘러놓은 비단 천을 끌러 직접 확인해 보았다. 역시 아물어 있다. 깊게 베여 벌어진 채 피를 줄줄 쏟던 상처 부위는 분홍색 실선이 하나 그려져 있을 뿐 아침에 바닥을 붉게 물들인 이유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비정상적인 재생력이었다.
아침에 싫다고 거부하는데도 동생이 집요하게 상처 부위를 핥아 주고 갔던 게 생각났다.
기대에 찬 눈빛을 빛내며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아쉬워하는 게 느껴졌다.
“좋다가 말았잖아. 요샌 다쳐서 오는 사람이 적어서 참 재미없어. 예전엔 정신없을 정도로 피 바람이 몰아치더니. 내가 여기 취직한 보람이 사라진달까.”
다쳐서 오는 사람이 적다라……. 나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이경헌은, 들른 적 없나요?”
“이경헌 씨? 최근엔 온 적이 없는 거 같은데. 고용인은 몇 번 다쳐서 오긴 했는데. 일족 중 다친 분은 최근엔 없는 거 같아. 그래서 나는 자기도 안 오길래 둘의 사이가 아주 호전된 줄 알았지.”
그래도 어제 손톱에 관한 일은 들키지 않았나 보다. 어제 나와 이경헌이 싸우는 모습을 목격한 고용인 중 분명 동생 쪽 사람이 있었을 텐데. 어찌어찌 잘 넘어간 건가.
“그럼 이제 지체하지 말고 검진 시작할까? 오늘 내에 해야 하는 검사가 제법 있어서.”
그녀는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목에 걸며 말했다. 방 밖에서 대기하던 간호사 몇 명이 기구를 옮기며 들어왔다.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것치곤 과할 정도의 검사들이었지만 어차피 나에게 선택권은 없다. 얌전히 현진이 내미는 환자 가운을 받아 들었다.
* * *
-――,――――.
“그래. 알았다. 수고하도록.”
-―――.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탁자 위로 내던지며 이경헌은 참담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이번에도 역시 실패라고 한다. 쓸모없는 것.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욕설을 내뱉자 옆에 서 있던 고용인이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인다.
“신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지?”
“별채에 계십니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신께 악보를 전해 드리러 가야 할 시간이다. 그나마 오늘 제물이 본가에 계속 머물러 있는 날이라 신의 기분이 최고조에 이르러 다행이었다.
안채를 둘러싼 구조인 본가는 양쪽으로 갈라져 외별채가 두 군데 존재하고 있었다. 한쪽은 의료 시설을 비롯해 가주가 집에서 거주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부대시설이 위치하고 또 다른 한쪽은 가주를 포함해 본가의 수뇌부나 선별된 고용인만이 드나들 수 있는 폐쇄된 곳이 있다.
외별채로 안내받으며 이경헌은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손수건으로 문질러 닦았다. 가주를 뵈러 가기 전엔 언제나 이처럼 극도의 긴장 상태가 된다. 부디 도착하기 전까지 계속 기분이 좋으셔야 할 텐데.
몇 개의 문을 지나 도착한 뒤 마루에 올라 긴 복도를 지나서 맨 끝 방 앞에 다다랐다. 본채의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만은 예전 방식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대대로 가주들이 스스로 유폐되어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곳보다 어둡고 정적이며 음습한 느낌을 준다. 전대 가주인 이지헌이 살아 있었을 때는 이 별채 안이든 밖이든 뱀 굴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온통 뱀이 가득 차 있었기에 이경헌은 아직도 이곳에 오면 그때의 광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해 섬뜩해졌다.
문 앞에 다가서자 고용인이 나지막하게 고했다.
“신이시여. 이경헌 어른이 도착했습니다.”
잠시의 침묵 후 한기가 도는 고압적이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와.”
드르륵,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습한 공기와 향의 냄새가 제일 먼저 느껴졌다. 바깥보다 어두운 실내는 피아 식별이 몇 초간 힘들었지만 한가운데에 서 있는 신의 모습만은 확실하게 보였다.
이기하는 붉은 눈동자만 굴려 이경헌이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가운을 걸치고 무기물같이 서있는 신은 공포스럽기도 하고 무척이나 관능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경헌은 마른침을 삼키며 얼른 무릎을 꿇었다.
“신을 뵈옵니다. 이경헌입니다.”
고개를 조아린 그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며 신의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선대 가주의 발밑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던 뱀들을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며 곁눈질로 확인하자…… 그것은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들이었다. 신의 발밑에 종잇조각처럼 쓰러져 꿈틀거리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가쁜 숨을 내쉬며 몸을 비틀고 있었다.
“…….”
어제 기현의 시중을 들었던 자들이었다. 이경헌은 그들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어서 식은땀을 흘렸다. 극상의 쾌락을 내려 줌과 동시에 뇌수를 진탕으로 만들고 있는 거였다. 이기하가 가끔씩 기분이 좋을 때만 내리는 형벌이었다. 쾌락 없이 뇌수만을 쥐어흔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들은 아주 운이 좋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연락은 왔나?”
뱀 같은 눈이 이경헌을 빤히 응시했다. 형형하게 안광을 밝히는 붉은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어지러웠다.
“예……. 이번에도 실패라고 합니다.”
조아리며 고한 것에 발밑의 자들이 이번엔 고통에 찬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바닥을 온통 손톱으로 긁어 대고서야 이기하는 그들에게 내린 압력을 그만두었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이경헌을 쳐다본 그가 픽 웃으며 말했다.
“아, 이 아이들. 어제 형님을 제대로 모시질 않았더군.”
“…….”
“그래. 너도.”
공정한 어조였지만 올 것이 왔구나 하며 얼른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내 연인을 건드렸더구나.”
“죄송……합니다.”
신이 이경헌이 엎드린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몸이 정처 없이 떨렸다. 발밑에 쓰러져 있던 자들 중 한 명이 가쁘게 숨을 내쉬며 지나가는 그의 발목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더 고급스럽고 문양이 들어간 붉은 옷이었다. 본채가 아닌 서열 높은 안채의 고용인이었다.
“신이시여……. 부디 용서를…….”
“내가 형님과 있을 땐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벌레라도 털어 내는 듯한 움직임으로 이기하는 여자의 손을 뿌리쳤다. 아까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고하러 왔던 죄 없던 여자는 곧 다시 자지러지며 바닥을 기었다. 기현과 있을 때는 조금도 보이지 않던 잔혹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들도 그렇고 너도, 학습 능력이 없어.”
곧바로 왼쪽 발에 알 수 없는 압력이 전해지며 꺾여 드는 게 느껴졌다. 뚜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새끼발가락이 난도질당하듯 부러진다. 이경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서 힘없이 쓰러졌다. 왼쪽 다리 전체에 몇 톤이나 되는 중력이 가해지는 것 같았다. 죄어드는 격통에 바닥에 얼굴을 대고 비비며 헐떡였다. 눈물이 고여 뿌옇게 변한 시야 속으로 가까워지는 신의 맨발이 들어왔다.
신께서 내게 오고 계신다, 아픈 와중에도 이경헌은 그의 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것만이 고통을 해갈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되는 양 필사적으로 신이 걸음을 옮기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런 충심에 답이라도 내리듯이 그가 바로 근처까지 왔을 때 온몸에 가해지던 압력이 일순간 사라지고 끝없을 것 같은 쾌락이 밀려왔다.
“으……, 흐……!”
눈앞에 섬광같이 흰 빛이 터졌다. 모든 세포가 일제히 깨어나는 듯, 말초 신경이 곤두서는 극강의 쾌감이었다.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이경헌은 바닥을 기었다. 고통으로 펄떡거리던 세포들은 온몸을 간질거리는 쾌감 앞에서 더 빠르게 굴복했다. 신 앞에서는 나이도, 체면도 중요하지 않았다.
완벽한 신! 완전무결한 신이여! 저항할 수 없는 고통 직후에 가해지는 쾌락은 어느 누구든 굴종하게 길들인다.
이경헌은 속으로 미친 듯이 기하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나의 신! 나의 지배자! 우리의 구원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가가 가늘게 휘어진다 싶었을 때 일순간 몸에 가해지던 모든 쾌락도 사라졌다. 온갖 사랑스러운 것들이 속살거리며 온몸을 기어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그저 자신은 바닥에 누워 흉하게 헐떡이고 있었을 뿐이다.
“…….”
누군가가 일시 정지라도 누른 것처럼 방 안이 고요했다. 좀 전까지 쾌락에 미친 듯이 허덕였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차분한 분위기였다. 몇 번이나 이런 일을 겪었기에 이경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하의 발밑에 쓰러져 있던 고용인들도 옷매무새를 고치며 다시 일어났다. 달라진 것은 방 한가운데에 서 있던 이기하가 어느새 방 끝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이경헌과 고용인들이 모두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에 서는 데는 불과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기하가 의자 팔걸이를 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명했다.
“모두 물러가라. 아버지는 남으십시오.”
노련한 고용인들은 무릎을 꿇어 신께 예를 차린 뒤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이경헌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넥타이를 바로 고친 뒤 다시 허리를 숙였다.
“가주님을 뵈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인사를 올렸다.
제물인 이기현이 했던 것처럼.
* * *
“자기?”
“…….”
“자기. 일어나.”
“으음…….”
“아니 얼마나 잠을 못 잤으면 검사받다가 자니.”
몸을 흔드는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리니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어디…….”
“어디긴. 검사실이지. 다 끝났어.”
끝났다는 말에 비몽사몽 몸을 일으키다 머리 위의 기구와 요란하게 부딪혔다.
“윽……!”
“아이구, 미안. 미안. 치워 놓는다는 게 그만.”
잠이 달아날 정도로 아파서 옆으로 웅크려 이마를 붙잡고 끙끙거렸다. 현진은 얄밉게 낄낄거리며 그제야 내 몸 위를 덮고 있던 기구를 밀어 치웠다.
“정신이 확 들었겠는데? 괜찮아? 빨리 일어나서 옷 갈아입어. 곧 본채에서 사람이 올 거야.”
“……지금 몇 십니까?”
“어디 보자. 여섯 시 반 막 지나고 있네. 나도 이제 슬슬 퇴근해야지.”
그녀가 건네주는 물 잔을 받았다. 현진은 빨개진 내 이마를 보고 잘못함 혼나겠다며 웃었다. 물을 들이켜며 검사실을 훅 훑어보았다. 이미 대부분의 고용인들은 퇴근해서 썰렁했다. 열심히 뭔가를 작성하는 그녀를 보다가 문득 물었다.
“무슨 검사를 한 겁니까?”
“응?”
“검사 말입니다. 이번에 한 거요.”
“뭐, 피 뽑고, 혈압 재고, 영양 상태 체크하고. 늘 하는 거.”
이것저것 다 하는 거지. 그녀는 답지 않게 어물어물 말하며 뭔가를 열심히 써 내려갔다. 왠지 석연치 않았지만 언제 본채 사람들이 뭘 하는 거에 대해서 나에게 얘기해 준 적이 있었나 싶어 납득했다.
“그래서 제 상태는요?”
“자기 상태는 이미 가주께 전달해 드렸어.”
“왜 나한텐 얘기를 안 하고 항상 가주한테만 보고가 올라가는 거죠?”
그녀는 왜 이제야 묻는 건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야 애초에 오더가 그렇게 내려왔는걸. 그런데 안 좋은 데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전달을 안 했던 거야.”
“제 상태가 정상이란 건가요?”
“음― 잠시만.”
책상으로 가더니 맨 위에 놓여 있던 노란색 서류철을 집어 들어 몇 장 뒤적뒤적하면서 파일을 빼내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확인해 봐. 신경 써야 할 것이 있다면 스트레스 쪽이 좀 많이 심하다는 거 외엔 나머진 정상이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서류에 적혀져 있는 건 대부분 정상. 이렇게 정상만 박혀 있을 거면 굳이 왜 한 달에 한 번씩 귀찮은 짓을 하는지 이해는 안 됐지만. 대충 넘기며 보던 서류를 도로 돌려주곤 지나가는 어투로 말했다.
“최근에 부쩍 현기증이 자주 나는데, 두통약 좀 처방해 주시면 안 되나요?”
“현기증이 난다고?”
“네. 요새 잠도 잘 못 자는 거 같고 머리도 좀 아프고.”
“어느 부분이 어떻게 아픈 건데?”
바짝 나에게 다시 다가와 앉으며 그녀는 심각하게 물었다. 그냥 단순한 두통약이 필요했던 거라 현진의 반응이 낯설었다.
“그냥 두통이요. 평범한 두통.”
그녀가 손을 내밀어 앞머리 쪽을 꾸욱 눌러 보았다.
“이 부분?”
“아뇨. 그냥 전체적으로 아파요. 특정 부분이 아픈 건 아니고. 그냥 현기증이 좀 심하게 일 때가 종종 있고 지끈거리는 정도예요.”
“뭐지? 피 수치는 그럭저럭 정상이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차트를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니야? 지금 자기 체지방보다 근육량이 월등히 높아서 운동을 좀 줄여도 될 거 같은데. 좀 잘 먹고 다니고.”
곧 뭔가를 작성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한 걸로 처방해 줄게. 여기서 기다려.”
그녀가 나가 버리자 졸지에 혼자 남겨져 할 일이 없게 되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딴짓하며 시간을 보내다 그마저도 흥미가 떨어져 새삼스럽게 검사실을 훑어봤다.
검사실은 병원을 작게 축소해 옮긴 듯 각종 기계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는데 사용하는 사람이 고작 일족 몇 명에 불과해서 전부 새 기계였다. 연두색의 커튼으로 파티션을 나눠 놓은 곳에 비치는 그림자와 사람 손이 거의 타지 않은 하얀 기계들을 보자니 어쩐지 을씨년스러워 팔을 쓸었다.
엑스레이 기계와 뇌파 검사기를 훑어보는 시야에 박현진의 데스크가 들어왔다. 아까 그녀가 서류를 보여 주기 위해 펼쳐 놓고 갔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내 관심을 끈 것은 서류가 아니라…… 무언가 첨부되어 있는 사진 같은 거였다.
엑스레이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데스크 쪽으로 걸어갔을 때였다.
쾅!
“윽!”
순간 무릎이 무언가에 찍혔는지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동시에 부딪친 카트가 큰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파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아프…….”
오늘 왜 이렇게 자주 부딪치는 건지. 끙끙거리면서 무릎을 열심히 문질렀다. 말도 못 하게 얼얼했다. 정통으로 박아선지 카트 한쪽 면도 왠지 찌그러져 보였다. 카트에 들어가 있던 물건들도 산산이 바닥으로 흩어져 있었다. 떨어지면 망가지는 물건이 없어 보이는 게 다행이었다.
한참 쭈그리고 앉아 바닥의 물건을 주워 올리며 이게 뭔 개고생이냐고 중얼거리는 사이 손끝에 부드러운 끈이 잡혔다. 별생각 없이 올려 두려는데 촉감이 좀 이상했다.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쓸 법한 촉감이 아니다. 왠지 눈앞에 금색 글씨도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이 감촉을. 이렇게 손에 휘감기는 감촉을 아침에 느낀 적이 있었는데.
천천히 끈을 쥐고 있는 손가락을 펼쳤다. 고급 재질에 완벽한 마감이 되어 있는,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비단 끈이 눈에 들어왔다.
숨을 들이켜며 낯익은 비단 끈을 뒤집었다. 넥타이 뒤에는 금박으로 수놓아져 있던 내 이름의 이니셜이 보였다. ……그리고 그 이니셜은 동생의 이니셜이기도 했다.
“……!”
기겁하며 온 힘을 다해 넥타이를 집어 던졌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저것은 아침에 내가 찢어 버린 뒤 변기에 흘려보낸 넥타이가 틀림없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다. 넥타이가 날아간 쪽은 쳐다볼 수도 없었다. 뒷걸음질 치며 나는 문가까지 다가갔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기?”
“……!”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붙잡은 사람의 손을 뿌리치자, 박현진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기? 왜 그래……? 얼굴 표정이?”
“아, 현진 씨…….”
“약 타 왔어. 그런데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피 흘리는 상처에는 흥분하는 주제에 귀신은 무서워한다며 여자는 엄살을 부렸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고작 넥타이 하나일 뿐인데. 두 번이나 나에게 버려지고 두 번이나 다시 돌아온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내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는지 그녀의 표정 역시 굳어졌다.
“저기 있는 게 넥타이가 맞아요?”
내가 손을 뻗은 장소에 다가간 그녀는 손쉽게 바닥에 떨어진 넥타이를 주워 들었다. 달랑달랑 들려진 넥타이는 다시 봐도 아침의 그것이 맞았다.
“응. 어두운 데 떨어져 있으니 뱀같이 보이네. 그래서 놀랐던 거였어?”
“……아니요.”
“이거 아까, 자기가 손목에 감고 왔던 거잖아. 왜 새삼스럽게 놀라?”
“네? 제가요?”
“아까, 그 다친 팔목에.”
그녀가 내 왼 손목을 가리켜서 붕대를 감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감고 왔잖아. 다친 데를 비단 넥타이로 감싸고 오다니 로맨틱하다고 생각했지.”
“…….”
“자기 정말 예민하네. 오늘은 약 먹고 푹 좀 쉬어. 너무 곤두서 있는 거 같아.”
혼란스럽다. 나에게 천을 감아 주었던 건 동생이었는데. 나는 이미 그때 넥타이를 찢어 버린 상태가 아니었나? 분명 넥타이를 면도칼로…….
현진은 내 표정이 이상하자 고개를 갸웃하며 넥타이를 요리조리 들여다보았다.
“이거 자기 거 맞아. 이니셜이 자기 이니셜인데?”
“……맞을 겁니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넥타이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넥타이를 잡으려고 했다. 그때 뒤에 다가선 누군가가 나를 끌어당기며 박현진의 손 위에 있는 넥타이를 부드럽게 잡아챘다.
“…….”
누군지 뻔했기에 뒤돌아 얼굴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박현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등 뒤에 단단한 가슴이 느껴졌다. 뜨거운 존재감도.
“가주님…….”
“…….”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너무 늦어지길래 모시러 왔지.”
여우 신이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