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장래 희망이 뭐니?’
‘꿈이 무엇이니?’
사람들은 아이에게 꿈을 먼저 묻는다. 아직 꿈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묻는다. 그럼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반강제적으로 주입당한 장래 희망을 외친다. 선생님, 과학자, 공무원, 의사, 연예인. ……더 되바라지고 더 포부가 큰 아이들은 대통령까지도.
정작 자기가 말하는 장래 희망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건지 알고서 꿈을 말하는 아이는 흔치 않다. 나는 그런 흔치 않던 아이 중 한 명이었다.
되고 싶은 것? 나는 어릴 때부터 되고 싶은 것 따위는 없었다. 되고 싶은 것을 바라기 이전에 되기 싫은 것을 먼저 알아 버렸으므로. 이것만 되지 않는다면 다른 건 어떤 것이 되어도 좋았다.
내 꿈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여우 신이 되지 않게 해 주세요.’
정통의 이(李)가 핏줄을 이은 직계 아들 중 한 명에게 내려온다는 여우 신. 집안은 여우 신이 내려오면 무서운 속도로 번성했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솔들은 변치 않는 젊음과 건강을 유지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처럼, 돈의 꽃이 피는 나무처럼 불어나는 재물을 손에 쥐고 시간이 멈춘 듯 노화하지 않는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전부 신의 힘이었다.
덕분에 여우 신은 일족에게 존경받고 추앙받으며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가주로 떠받들어졌다.
……물론 표면적으로만.
그 추앙의 이면에는 추악한 인간들의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인간의 욕심이 문제였다. 하늘의 귀속인 신이 땅 위에서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했지만 강제로 제물이라는 사슬을 만들어 신의 발을 묶어 날개를 꺾고 눈을 가렸다.
제물은 새도 될 수 있었고 개도 될 수 있었고 뱀도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짝으로 맺어진 제물을 품에 안고 여우 신을 승계한 후계자는 인간으로서의 자유권은 박탈당하고 집 안에 유폐당한 채 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제물에 집착하다가 높은 확률로 자살한다.
그리고 신을 그렇게 만든 가문에 천벌이라도 내리듯이 신의 죽음과 동시에 번영하던 집안도 급속도로 파멸의 길을 걸었다. 그들의 신이 떠난 빈자리에는 대신 사신이 내려온 듯했다.
전대 가주이자 나의 친아버지인 이지헌은 뱀을 사랑한 여우 신이었다. 덕분에 그 시기엔 온 집 안에 뱀이 넘쳐났다.
뱀의 서늘한 피부가 발목에 감기는 촉감에 놀라며 잠을 깨는 일이 허다했고 가주가 거주하고 있는 본가의 안채엔 가끔씩 제정신이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명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결국 자신이 뱀을 사랑하는 것을, 미쳐 가는 것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친아버지인 선대 가주의 자살 이후 마찬가지로 집안의 가세는 언제 위풍당당했느냐는 듯 기울었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온 집안이 가난에 허덕이게 되었으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유전병으로 멀쩡한 가솔이 죽어 나가는 일이 허다했다.
이쯤 되면 여우 신이 과연 복을 부르는 존재인지 해를 부르는 존재인지 의심해 볼 만도 하건만 가솔들은 그저 한마음으로 우리 형제에게 빨리 여우 신이 깃들기만을 바랐다. 여우 신이 깃들기 시작한 존재는 이성을 잃고 점점 광기와 잔혹함에 물들어 가다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될 걸 알면서도 우리가 여우 신을 계승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머니는 멀쩡했던 아버지가 뱀에게 미쳐 가는 걸 목격한 뒤 저주받은 집안이라며 우리 형제를 키우는 걸 포기했다. 이게 내가 아홉 살 때 일이었다.
나는 내 반만 한 동생을 끌어안고 울었고, 영문을 알지 못하는 동생은 마냥 내 품에 안겨 웃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여우 신의 후계자인 우리 형제에겐 가세가 기울었어도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대우가 따라왔다는 것이다. 덕분에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우리 형제는 항상 사랑과 관심에 굶주렸다.
친척이 조그마한 관심을 보여도 금세 애정을 퍼부으며 답삭답삭 안기려 들었지만 상냥했던 친척도 우리가 다가가려 하면 고개를 조아리며 멀어졌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건 후대 여우 신일뿐임을 깨닫고 나서는 친척에게 향하던 애정을 모두 거두었다.
대신 같은 피인 서로에게 미친 듯이 매달렸다. 나는 동생의 아버지가, 어머니가, 형이 되어 주고 동생은 대신 끊임없는 사랑을 퍼부어 줬다. 또래보다 훨씬 작은 동생은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지만 영특하고 사랑스러웠다.
잠을 잘 때도 꼭 손을 마주 잡고 서로의 숨소리를 들어야만 잠들 만큼 우리 형제는 서로에게 절박했고 애틋했다. 품 안에 파고드는 뜨거운 동생의 체온을 느끼고서야 비로소 이 세상에 나 하나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한 몸이나 다름없었기에 어렸던 나는 내가 여우 신이 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동생도 여우 신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그 어린 동생이 여우 신을 계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끌어안고 있던 동생을 빼앗아 억지로 끌고 간 가솔들이 아이의 발 앞에 엎드리며 한목소리로 신을 부르짖는 모습을 보고 어찌 된 일인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여우 신이 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때 동생도 여우 신이 되지 않게 해 주세요. 하고 빌었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네 손가락이 날 향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 품을 벗어난 동생은 어딘가 매우 낯설었다. 늘 내 뒤에 숨어 있기만 했던 어린아이가 낯선 표정으로 가솔들을 내려다보던 그 광경이란.
지독한 이질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다가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동생은 나에게 다가오는 대신 검지를 뻗어 나를 가리켰다.
아직 덜 여문 가는 손가락이 나를 지목했을 때 일제히 따라붙던 친척들의 시선이 섬뜩해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챘다.
‘이기현.’
‘이기현.’
‘이기현, 이기현, 이기현.’
한 번도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른 적 없는 동생이 또렷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되뇌었다.
‘이기현!’
동생의 작은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고, 동생의 앳된 변성기 전 목소리는 칼을 긁듯이 소름끼치게 내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이름만을 불렀다. 알고 있는 단어는 오직 내 이름뿐이라는 듯이.
그러자 친척들은 불길이 이는 듯한 눈으로 내게 손을 뻗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맞은편에 동생을 남겨 둔 채 뒷걸음질 쳤다. 그래선 안 됐지만 도망쳐야만 했다. 날 바라보던 동생의 눈이 어느 순간 그것과 같아져서.
그래. 나를 바라보는 동생의 눈이, 뱀이 가득 찬 본가 사당 안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찢어진 동공 같았기에.
동생은 여우 신이 되어 버린 거겠지. 이제 동생은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닌 거다.
그 순간 왜 나는 동생이 여우 신이 되었다는 비통한 사실보다 나를 제물로 지목한 것이 더 원망스러웠던 걸까.
‘여우 신이 되지 않게 해 주세요.’
‘여우 신이 되지 않게 해 주세요.’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뱀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원망을 삼키며 달리던 끝에 드디어 본가의 대문이 보였다. 전력 질주한 탓에 성장통을 앓고 있는 무릎이 삐걱거렸다. 헐떡거리며 손을 뻗어 대문을 붙잡았을 때 갑자기 거친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타나 팔을 확 잡아채었다.
‘기현 님!’
억지로 붙잡힌 몸 전체가 휘청거렸다. 나를 붙잡은 남자는 그나마 우리 형제들을 돌봐 주던 작은아버지 이경헌이었다. 그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흥분을 감추지 않은 채 소리 질렀다. 도망친 나에 대한 분노보다는 새로 태어난 여우 신에 대한 환희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여우 신이 부르십니다! 신이 부르고 계십니다!’
‘아버지? ……이거 놔요! 놓으라고요!’
‘신이 처음으로 요구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은 신의 소유입니다! 다음 신이 태어나셨습니다!’
‘미쳤어요? 나는 뱀이 아니에요! 아버지!’
‘그럼요. 당신은 뱀이 아니지. 뱀 따위에게 비할 수 없지요.’
얼굴에 만연히 드러난 작은아버지의 광기에 끔찍해져 온 힘을 다해 붙잡힌 팔을 털었으나 억센 손아귀의 힘이 더 세질 뿐이었다. 그는 행복해 미치겠다는 듯, 내가 듣고 있는 것엔 개의치 않고 정신없이 말을 이었다.
‘기현 님, 기뻐하십시오. 이제 우리는 축복받았어요. 이제 당신만 바치면 됩니다. 신이 사랑해 주실 겁니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온몸으로 사랑해 주실 겁니다. 이제 아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새도, 개도, 고양이도, 그 빌어먹을 뱀도 아니고! 당신을 요구했습니다. 신이 세상에, 사람을 요구했어요. 예? 자비로운 새 계승자께서, 사람을 요구했다고요. 당신만 있으면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동물 따위가 아니라 당신을, 이게 무얼 의미하는 건지 아시겠습니까?’
‘…….’
아무도 말을 해 준 적은 없지만 아버지가 왜 자살을 했는지 성장하며 자연스레 짐작했던 나는 이경헌의 말에 대문을 붙잡은 채 주저앉았다. 왜 선대 가주들이 죄다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스스로 생을 이별해야 했는지…… 그건 자유권이 박탈된 삶도, 감금되어 버린 고통 때문도 아니었다.
제정신을 유지하면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것은…….
곧 뒤따라 쫓아오던 다른 가솔들이 나타나 도망치지 못하게 내 주위를 에워쌌지만 그들이 손을 뻗어 올 때까지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내 귓속에 이경헌의 흥분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동물 따위가 아닌 사람을 취하는 여우 신이라니……! 이번 신은 죽지 않을 거야.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하실 거라고!’
그들이 자살한 이유는, 자기 의지가 거세된 수간 때문이었다.
* * *
“……사님.”
“…….”
“박사님!”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계속 작동되고 있던 급수구가 방향을 잃고 구두 위와 바짓단을 적시고 허공 위로 신나게 물을 흩뿌린다. 허둥거리며 미끄러지는 호스를 잡으려 몇 번을 헛손질하고 있자 옆에 서 있던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기에 그리 놀라세요.”
“아…….”
사방팔방 날뛰는 급수구를 간신히 중지시키고 식은땀을 흘리며 옆을 돌아보니 커다란 화분을 든 포니테일의 조수가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다가 그녀의 손에서 화분을 건네받았다.
“이게 뭐예요?”
“이거 누락됐나 봐요. 한 박사님이 가져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진작부터 연락하셨다는데 아직도 안 가져간다고 화내셔서 그냥 제가 들고 왔어요.”
“……잠시만요. 미안합니다. 제가 잊어버렸나 봐요. 음…….”
그렇게 말을 흐리며 슬쩍 포니테일 조수의 목에 걸려 있는 명함을 보았다.
“기혜 씨. 갖고 오느라 고생했어요.”
이름이 불린 그녀가 아까보다 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박사님은 바쁘시니까요. 이런 건 언제든지 제게 맡겨 주세요. 오늘도 출장이시던데.”
“……그러게요.”
“또 혼자 가시는 거예요? 조수는 필요하지 않으세요?”
대답하고 싶지 않아 웃으며 거절의 의사를 비쳤다. 그러나 그녀는 그걸 긍정적인 반응으로 해석했는지 한층 더 가깝게 몸을 붙였다.
“제가 들어 온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박사님 논문도 읽어 보고 하시는 일도 좀 배웠거든요. 어딜 가셔도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어요.”
“그렇습니까?”
“네, 제가 이래 봬도 학부 장학생이었어요. 여기도 교수 추천으로 들어왔고요.”
상냥하게 처진 눈꼬리가 예쁘게 접혔다. 무딘 나조차 지금 이 아가씨가 나에게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미소였다. 난처해하며 옆의 동료를 쳐다보자 이미 하던 일도 내려놓고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내저으며 곁으로 다가온다.
“기혜 씨. 바쁘지 않으면 저쪽 샘플 좀 확인해 줄래요? 보고서가 글쎄, 오늘까지가 마감이라네?”
큰일 났다고 너스레를 떠는 그의 요청에 그녀가 아쉽다는 듯 내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싹싹하게 대답하며 샘플 쪽으로 이동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뒤쫓자 옆에 다가온 동료가 어깨를 툭 쳤다.
“기현. 이름 못 봤어?”
“……봤어.”
“그런데 그런 표정이야? 집안 것일 텐데?”
김태영. 이가의 가까운 외친척으로 나와는 같은 연구소 층에 근무하는 동료였다. 그리고…… 지켜 준다는 명목으로 감시자를 맡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예전부터 나는 사람을 홀리고 다닌다는 말도 안 되는 억측을 들어 왔는데, 억울하게도 나와 아주 조금이라도 엮이는 여자나 남자가 있다면 저런 오해와 함께 다른 곳으로 전근이 보내지곤 했다. 개중에는 정말로 나에게 흑심이 있는 상대방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냥 편한 직장 동료 정도로 선을 그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나서부터 스스로 알아서 거리를 두는 법을 터득했지만 아직도 종종 본가에서 주의가 들어왔다.
지금 저 새로 온 조수 아가씨 역시 본가에서 직접 뽑은 사람이 틀림없었다. 혹은 먼 친척이거나. 내 주변을 전부 본가 것들로 채우려는 집착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살고 있기 때문에 캐도 나올 것이 없을 것이다. 내 인생에 딱 한 번 연애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일을 한 건 이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애와의 보름이 전부였다. 그리고 나와 보름 연애한 대가로 무용을 전공하던 그 여자애는 내 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사고가 났다고 하던가.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던가.
고3 봄. 내가 아직 동생의 것이 아니고 동생 역시 아직 두 사람이 아니었을 때. 우리의 손목에 아직 저주 같은 문신이 새겨지기 전의 일이다.
‘오늘도 안 나와 줄 줄 알았어. 내내 편지를 보냈었는데, 한 번도 나와 주지 않아서.’
매일 내 사물함에 편지를 넣었다는 그녀의 말과는 달리 내가 편지를 발견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나를 만난 게 정말 행복하다는 듯이 얼굴을 예쁘게 붉힌 채 웃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럼 우리 만날까? 하고 물었고,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곧바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말했다.
그날 나는 나를 찾으러 온 가솔들의 눈을 피해 그녀의 손을 잡고 무용실에 숨어 들어가 그녀의 이름을 듣고, 밤이 늦도록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발각되어 강제로 집에 끌려가야 했다.
그래도 멍청하게 그땐 괜찮은 줄 알았다. 인생 처음으로 시작한 연애 때문에 철없이 들떠 버렸는지 평소 같았음 기민하게 눈치챘을 법한 것까지 놓쳐 버리고 말았다. 동생과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남들 같은 정상적인 연애를 한다는 데서 흥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내 시야를 어둡게 만들어 버렸다.
그 당시엔 동생의 진득한 집착이 어느 수준인지 모르기에 안일하고 멍청하게 단지 그녀가 나와 동생의 일그러진 관계에 대해 알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만 하고 있었다.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집 밖을 나오지 못하는 동생이 이 일을 알아 봤자 어쩌겠느냐는 이기적인 생각까지 했다.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다.
그래서 몰랐다. 동생이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여자 친구가 생겼냐는 동생의 질문에도 태연자약하게 부정했다.
동생이 나를 시험하고 싶어서 깔아 두었던 함정을 나는 자근자근 밟고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거짓말의 대가를 받았다. 진실을 얘기하지 않은 보답으로 여우 신은 정말로 내 입에서 토해진 말을 진실로 만들어 주었다.
내 보름간의 여자 친구였던 여자애는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내가 동생에게 ‘여자 친구가 없다’고 말한 것을 동생은 정말 현실로 만들어 준 것이다.
나는 겁쟁이였기 때문에 그녀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신이 그 일로 더 이상 노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 갔었지.
“이기현, 야 왜 그래? 아까부터?”
저조해지는 기분을 숨기지 않고 있으니 걱정됐는지 김태영이 조심스럽게 옷깃을 흔들었다.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쓸데없는 기억을 상기시켜서인지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계속 멍하니 있질 않나. 너 얼굴이 창백하다고.”
“두통약 있으면 좀 줘 봐.”
얼른 자리로 돌아가더니 알약 통 하나를 꺼내 온다. 내놓으라며 손을 뻗자 주는 대신 눈치를 살폈다. 기다리지 못하고 손을 흔들었다.
“뭐야? 빨리 달라니까.”
“내가 볼 땐 너 두통약이 아니라 빈혈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태영은 신중하게 통에 쓰인 주의 사항을 한 번 읽어 보더니 알약 두 개를 꺼내어 내 손 위에 올려 주었다. 아무리 날 감시하고 보호하란 소리를 들었다곤 하지만 과민 반응이다. 알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들이켜는 것까지 열심히 주시하고 있는 그에게 결국 나는 짜증을 더했다.
“왜 그래. 약 먹는 거 개수 세서 보고라도 올리랬냐?”
“아니, 그냥. 뭔가 이상해서.”
“뭐가?”
“아니 그냥, 별건 아닌데. 네 얼굴이.”
“얼굴이 뭐.”
그는 멋쩍게 웃으며 다시 별건 아닌데― 하며 운을 띄웠다.
“새삼 참 어려 보인다 싶어서. 예전에 기혜 씨가 네 나이를 물어봤었거든. 나랑 동갑이라니까 안 믿더라.”
“그건 내 얼굴 탓이 아니라 네 놈을 신뢰하지 못하는 탓이겠지.”
“무슨 소리야. 내 신뢰가 어디가 어때서. 뭐…… 아무튼 맨날 같이 있으니 잘 못 느꼈는데 네 예전 사진 보니까 진짜 하나도 안 변해 있더라고. 이제 누가 널 내 또래로 보겠어.”
“내 예전 사진?”
“그래. 연구소 오기 전에 보고서에 있던 건데 내가 슬쩍했었거든.”
“줘 봐.”
내민 내 손을 보면서 김태영이 눈만 데룩데룩 굴렸다.
“그걸 설마 가지고 다니겠냐. 집에 숨겨 뒀지. 넌 네 옛날 사진 없어?”
“알잖아. 난 내 얼굴 싫어해. 잘난 신께서 내 얼굴을 찍는 것도 금지하셨고.”
“음…… 그랬지. 그래서 내가 파기 명령을 어기고 사진을 갖고 있는 게 들키면 끝장이야.”
비밀이다? 태영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남이 네 얼굴을 소유한 것도 싫으신 거겠지. 대단하다니까. 그분은.”
“…….”
대화의 주제가 그 아이로 넘어가면 나는 버릇처럼 입을 다물었다. 태영 역시 그런 나를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은 그 얘기를 하지 않고 애써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기혜 씨가 뭐라고 한 거야? 너한테 한번 말 붙여 보려고 별 노력을 다하던데 오늘 드디어 소원을 이뤘네.”
“한 박사가 누락 샘플을 보냈나 봐. 그 자식도 웃긴 게 자기가 들고 오면 될 거 아냐. 꼭 우리 파트 애들 못 부려 먹어서 안달이더라고. 아니 바빠 죽겠는데 이거 하나 받겠다고 사람을 오라 가라 하냐.”
“네가 소장한테 예쁨받으니까 배알 꼴려서 그러는 거지 뭐. 원래 그러잖아.”
“왜 예쁨받는지 이유도 모르는 자식이 지랄은.”
내가 이를 갈자 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래도 괜히 가서 시비 붙이진 마. 이제 불려 가서 한 소리 듣는 것도 지겹다고.”
“태영 씨! 세상에! 지금 일 안 하고 또 뭐 하고 있어요? 할 일이 산더민데.”
옆으로 지나가던 문경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얘도 노는데! 뒤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물론 그녀도 무시한 채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도 출장이시죠? 가기 전에 정리만 해 주고 가세요.”
“아, 네.”
그녀의 손에서 두툼한 파일을 건네받았다. 다른 박사들에 비해 출장이 열 배는 넘게 잡혀 있는 내 스케줄이었지만 이제 내 주변에 남은 박사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내가 왜 출장이 잦은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기현 씨. 진짜 얼굴색이 너무 안 좋아요.”
그녀는 웃으며 내 책상 위에 비타민을 올려놓았다.
“연구소에서 이렇게 심하게 굴리는 건 처음 봐요. 웬 단독 출장이 이렇게 많아요? 혼자만 보내지 말고 다른 사람도 좀 같이 보내지. 같이 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은데.”
흘깃 그녀가 아까 전 나에게 관심을 표했던 이기혜가 간 곳을 돌아보았다. 문경아는 내 출장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이제까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내 출장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 그래야 이 연구소에서 살아남을 텐데.
나는 그녀가 준 비타민을 손으로 굴리며 초조하게 감사합니다, 하고 내뱉었다. 그녀는 샐쭉 웃으며 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웃음을 지웠다.
내 곁에 다가온 태영의 얼굴에도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괜찮아?”
그 말에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별로 남지 않았다. 어리광을 부릴 수 있을 때 부리고 싶었다.
“아니, 안 괜찮아.”
그리고 나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을 일부러 더 걱정시켜서 곤란하게 만드는 버릇. 태영의 눈에 동정심과 죄책감이 들어차는 것을 주시하며 나는 묘한 가학심을 느꼈다.
* * *
엘리베이터 홀에 나와서 상층 버튼을 눌렀다. 구두코를 세워 바닥을 툭툭 치면서 기다리고 있자 옆의 유리 복도 쪽을 지나가던 한 무리의 연구원들이 멀리서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 들고 있던 파일철을 흔들어 답했다.
소장실이 있는 최상층을 누르고 문이 열리는 것에 맞춰 귀에 꽂아 두었던 이어폰을 잡아당겼다. 앞의 데스크에 앉아 있던 비서가 반가운 표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기현 님.”
그녀가 바쁜 걸음으로 내 앞에 서서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책상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소장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현 님. 음 우리 점심 약속이지 않았나요……?”
그가 힐끔 시계를 올려다보는 동안 소파에 주저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 그런 모습을 익히 봐 왔던 비서는 내 앞에 준비했던 잔과 다과들을 착착 내려놓았다. 찻잔에 각설탕을 쏟아붓고 열심히 휘저은 다음 입에 댔다. 소장은 제 사무실인 것처럼 이용하는 내게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웃으며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일개 직원인 내가 이렇게 제멋대로 굴 수 있는 건 최상층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과 임원진들이 다 우리 집안에 복속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소장 역시 그들 중 한 명이다. 신의 은혜를 입은 자.
그는 본가로 불려 가는 날만 되면 심기가 불편해지는 내 패턴을 잘 알기에 손바닥을 비비며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요새 근무하시기 어떻습니까? 그렇게 바쁜가요?”
“네. 가뜩이나 있던 직원들이 잘려 대서 그런지 죽을 만큼 바쁘네요.”
“죄송합니다. 근무 태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라 규정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새 직원이 충원되는 대로 기현 님 파트로 배정해드릴 테니 조금만 참아 주시면…….”
“그냥 쓸데없는 이유 붙여 가면서 자르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뭔 얼굴을 익힐 만하면 내보내고, 이름 좀 외우겠다 싶으면 내보내고. 그런 주제에 나보고 바쁘냐고 물어보면 어쩌란 겁니까. 게다가 외근은 왜 이렇게 빨리 잡습니까? 점심 먹기 전에 나가라고? 그럼 그냥 오늘 출근을 하질 말라고 하던지.”
“그게 제가 잡은 일정이 아니라…….”
내가 시비 걸기 시작하자 소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비서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대신 기현 님 팀에 예산을 제일 많이 잡아드리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도 그러고 싶진 않은데 자꾸 본가 측에서 요청을 해 오니 어쩔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기현 님께서 집안사람들로 직원을 채우는 건 원치 않으시고…….”
“내가 필요한 건 감시하는 놈이 아니라 일하는 놈이니까요. 그리고 바빠 죽겠는데 맨날 일정에도 없던 외근이 생기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잖습니까. 딱히 결과물도 가져오지 않는 세미나 같은 건 왜 갖다 붙입니까? 그러다 보니 나한테 호기심을 갖는 거고, 그러다 보면 나한테 관심 가진다고 자르고. 같은 파트 동료끼리 그런 것도 못 물어봅니까?”
“글쎄요……. 저도 기현 님 말씀이 백번 옳으시다 생각하긴 하는데 말입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선지 내 말엔 무조건 긍정을 하면서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나도 매번 시비를 걸긴 하지만 그가 집안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나는 만만한 자를 골라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뿐이다.
달아서 혀끝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커피를 다 마시고 머그잔을 내려놓자 몇 번이고 시간을 확인하던 소장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 말하고 자기 데스크로 돌아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과자 표면을 눌러 부수고 있는 내 앞에 작은 상자 두 개를 내민다.
“……뭡니까?”
“아, 별건 아닙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고급스러운 포장지로 싸여 있는 상자 위의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어 보았다. 안에 들어 있던 것은 펄이 들어간 보라색의 날렵한 몸체를 가진 고급 만년필이었다. 모양이나 디자인이 아주 예뻤다.
길게 떨어진 몸체의 곡선도 아름다웠고 은은한 펄이 들어간 색감도, 장식도 독특했다. 바디를 감싸고 휘감겨 있는 금선이 펜촉으로 떨어지는 부분에는 세련되게 세공된 보라색 보석도 박혀 있었다. 한눈에도 매우 공을 들인 물건임을 알 수 있다.
반대편 상자에서는 검붉은 몸체만 다를 뿐이지 디자인은 똑같은 만년필이 나왔다. 쌍으로 제작된 물건이었다. 심드렁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내 표정을 살피며 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뭐, 예쁘네요.”
“다행이네요. 기현 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갑자기 선물이라뇨?”
의심스러워하는 내게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워낙 신세를 많이 져서 드리는 겁니다. 요새 가뜩이나 바빠서 고생하신다니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도 없고…….”
“왠지 앞으로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로 들리네요.”
“하하, 그럴 리가요.”
“겨우 그런 걸로 받기는 좀, 그렇군요.”
척 보기에 내 월급 몇 달치를 꼴아박아도 못 살 거 같은 만년필을 그냥 받을 순 없어 도로 상자에 담아 내밀었다. 그는 내 거절에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제가 우수 연구원 상이라도 받으면 상장에 껴서 주시든지. 난 뇌물은 안 받습니다. 잘 아시는 분이.”
“보면 아시겠지만 기현 님께 드리기 위해 눈 색을 맞춰 특별히 주문 제작된 물건입니다. 부디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 주십시오. 다른 뜻은 없습니다.”
날 위해 주문 제작했다고? 그러고 보니 몸체가 보라색이었지. 내 눈 색과 맞춰서 제작했다는 게 좀 황당하게 들렸다. 그런데 그럼 옆의 붉은색은?
내가 붉은색의 만년필이 든 상자를 흔들며 눈으로 묻자 소장은 잠시 망설이더니 어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붉은색은 기현 님이 가주님께 드리는 선물이라 직접 준비했다며 전해 주시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른 뜻은 없다고?
문을 향해 걸어가는 내 뒤에서 소장이 급하게 소리 지르는 게 들렸다.
“기현 님!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 넘었…….”
쾅!
세게 닫는 문소리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들이 깜짝 놀랐다가 내 표정을 확인하고 얼른 못 본 척 고개들을 돌린다. 화가 나 표정 관리가 안 됐다.
내가 준비한 척을 하고 다른 사람이 준비한 선물을 대신 전해 주라고? 내 옷을 벗기려 드는 동생에게 내가 선물을 준비했다고 내밀라고?
가뜩이나 본가에 가야 하는 날이라 예민하게 날이 서 있던 신경이 이제는 숫제 긁기만 하면 터져 버릴 것처럼 곤두섰다. 그들이 나를 동생의 정부 취급하는 것에 구역질이 올라온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사이가 좋아질지 고민하며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집안사람들을 보는 것도, 이런 짓까지 시키면서 기하의 비위를 맞추려는 고용인들을 보는 것도 미친 듯 짜증난다.
하지만…….
제일 짜증 나고 미칠 것 같은 건 이 모든 것에 지독한 환멸을 느끼면서도 신이 부른다면 어쩔 수 없이 그 앞에 가야만 하는 내 상황이었다.
* * *
“기현 님. 늦으셨군요.”
아 정말, 일진이 사나운 날이다.
본가에 도착해 고용인들에게 겉옷을 건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경헌이 나타났다. 여우 신의 가장 광적인 신봉자로서 신임을 받아 현재 여우 신을 제외하곤 가장 큰 세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오랜만입니다. 이경헌 씨.”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었는데도 그는 아버지가 아닌 본명으로 부르며 하대했을 때 상처 입은 태도를 보이곤 했다.
“신께서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도망치지 않고 왔으면 된 거 아닌가요. 신은 그 정도 참을성도 없답니까?”
“기왕이면 그분께 다정하게 대해 주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제 다정함은 진작에 품절돼서요.”
이경헌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제물로 바쳐지고 나서 처음으로 동생이 몸을 요구했을 때 나는 울며불며 도저히 그것만은 할 수 없다고 저 남자에게 무릎을 꿇으며 빌었었다.
처음 억지로 동생의 품에 안기던 날을 기억한다.
아니 정정한다.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날은 그냥…… 내 안에 평생 지워지지 않게 새겨져 있다.
여우 신이 탐욕이 없다며, 하지만 지금까지의 그 어떤 여우 신보다 강력하다며 가솔들은 행복해했다.
동생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딱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동생에게 계승된 여우 신은 분명 얌전했다. 하지만 그게 폭풍 전야라는 건 나만 느낄 수 있었다. 그 아이는 계승된 직후부터 날 탐하고 싶어 했고, 내가 그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욕망을 억지로 찍어 누르고 있었다.
내 손을 핥으며 발정하고, 피 같은 색의 두 눈은 처음부터 내 온몸을 시간(視姦)했다. 동생의 시선에 유린당하며 떠는 나에게 그 아이가 손을 뻗기 시작한 건 불과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자신의 것을 내 눈앞에 꺼내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던 동생은 날 깔아뭉갠 채 내 위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자위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하나를 허락하면 다음 날엔 두 개를 허락하길 바랐고 내가 두 개를 간신히 참아 내면 세 개, 네 개를 요구하며 나를 조금씩 뜯어 먹었다. 처음엔 끌어안고 자는 걸로도 족하던 신은 뱀 같은 혀로 동생 흉내를 내며 동정심을 뒤흔들었다. 신을 모시기 위해 강제로 안채에 밀어 넣어지는 게 지옥이 된 건 한순간이었다. 그곳에 내 의지란 없었다.
나는 매번 온몸이 씻긴 채 끈만 당기면 벗겨지는 단순한 가운이 입혀져 동생의 침실로 던져졌다. 동생의 얼굴을 하고 동생의 눈을 한 남자가 내 온몸을 핥았다. 억지로 발기하게끔 끈질기게 흥분을 유도했다. 동생의 입 안에 사정하며 자괴감에 떨어야 했지만 최후에 동생이 구멍을 벌리는 것에 비하면, 미칠 것 같아도 참을 수는 있었다.
어떻게 내 안에 들어올 생각을 하냐고 윽박지르고, 죽겠다고 협박하고 회유했다. 동생은 처음엔 납득해 주었지만 그 참을성이 오래가지 않을 거란 건 알 수 있었다.
결국……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 친척 네 사람이 탄 차가 교통사고를 당해 즉사하는 사고를 시작으로 일족들이 하나둘씩 차례차례로 알 수 없는 변을 당하자 가솔들은 그동안 내가 몸을 바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는 끔찍한 기억뿐이다. 나는 반항하지 못하게 입에 마스크가 씌워진 채 손목이 묶여 동생의 침실에 밀어 넣어졌고 내 눈을 바라본 동생은 그날 처음으로 옆에 다가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아무 일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된 가솔들은 수면제를 먹이고 안대를 채운 뒤 다시 나를 동생에게 보냈다. 그리고 동생은 결국 내 몸을 뚫었다.
참았던 만큼 욕망을 풀던 동생 덕분에 수면제 효과가 다 떨어졌을 때에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눈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몸속을 들락거리는 살덩이를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라 깬 나는 비명을 질렀고, 그때 동생은 내 몸 안 깊숙이 파정했다.
몸속을 채우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며 나는 그때 죽을 결심을 했다.
고용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몸을 씻을 준비를 하는 나를 바라보던 이경헌은 할 말이 있다는 듯 주변을 맴돌다 기어코 입을 열었다.
“신께…… 잘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기현 님께서 마음만 돌리시면 우리 가문은 지금보다 훨씬 번성할 겁니다.”
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저 작자가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고용인들이 내 몸에서 손을 떼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경헌은 언제부턴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내 눈이 불길한 보석 안이라며 애초에 가솔들은 나와 함부로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지금도 아주 충분히, 넘치도록 잘해 드리고 있는데요. 다리까지 벌려 드리고 있는데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잘해야 한다는 겁니까?”
“육욕의 만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제껏 다른 제물들은 모두 신의 사랑을 받는 것에 행복해하며 평생 그분들의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역사상 안채에 혼자 머무시는 신은 이번 대의 여우 신께서 최초입니다.”
“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한 건 그쪽이었습니다만.”
“당신께서 워낙 강경하게 그걸 원하셨으니까요. 안채에만 머물러야 한다고 했을 때 불을 지르며 난리를 피우시지 않으셨습니까.”
“대들보라도 태웠어야 하는데 그때 너무 착하게 부엌에만 놓은 게 한입니다. 왜요, 한 번 더 보여 드려요?”
가시 돋친 말투에 이경헌이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귀찮게 할 게 아니라 신을 끔찍이 여기는 그쪽이 제물이 되면 되겠네요. 아버지 핏줄이라면 환장하는데 누가 압니까? 당신도 좋다고 할지.”
“어떻게 그런…… 그런 말을……. 신의 사랑을 그리 모욕하다니…….”
이번 말은 그냥 듣고 넘어갈 수 없었는지 아버지를 닮아 신실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신의 사랑은 무슨 얼어 죽을. 그저 제물한테 미친놈일 뿐인데.”
“말조심하십시오……! 그분이 당신이 존재하는 이유임을 잊었습니까?”
또 저 지긋지긋한 소리를. 염증을 느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신에게 바쳐지기 위해 태어난 몸뚱이라느니, 선택받은 제물이라느니, 언제부터인가 나를 칭하는 ‘이기현’이라는 이름은 지워지고 이 집안에서 나는 ‘제물’로만 존재했다. 그게 아니라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는 것으로.
그래서, 살고 싶지 않았는데.
“제물로 태어나신 분이, 어째서 도리에 순종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사람이란 맞는 위치가 있는 겁니다. 이 정도 방황했으면 그만 참을 줄도 아셔야지요. 당신의 고집 때문에 신께서 홀로 지내신 게 대체 몇 년째인지…….”
“헛소리는 그만하죠.”
정말 질린다는 얼굴로 노려봤지만 그는 그만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당신이란 사람은…… 당신은 모릅니다. 그분이 당신을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계신지, 그걸 알면 이럴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오직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 크윽!”
기어코 얄팍하던 참을성이 끊어졌다. 이경헌의 멱살을 잡아 우악스럽게 벽에 밀어붙이자 고용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목이 졸린 이경헌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서 컥컥거렸다.
“이보세요. 이경헌 씨.”
갑자기 기습을 당한 이경헌이 버둥거리며 본능적으로 목을 붙잡은 내 손을 콱 움켜잡았다. 특별한 명 없이는 내 몸에 손을 대선 안 된다는 것을 순간 잊은 듯했다. 떼어 내지 못하게 더 힘으로 옥죄며 말했다.
“내가 이 따위 취급받으면서도 참고 살 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기……. 큭……!”
“당신이고 다른 놈들이고 다 죽여 버리고 싶은데, 그러려면 내 동생 먼저 죽여야 돼서 안 건드리는 겁니다.”
“윽……!”
“나 혼자 죽을 수 있는 거면 벌써 너 죽고 나 죽고 했어요. 십 년 전에 저 보셔 놓고도 긁으십니까. 내가 여전히 당신 말에 꼼짝 못 하는 어린애로 보여요?”
“크윽…….”
“아직도 아버지 행세를 하면 어떡합니까……. 버러지 따위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이경헌은 산소가 부족한지 목을 부여잡고 계속 컥컥거렸다. 그 조금 멱살 잡았다고 헐떡이며 바닥을 기는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목에 손톱자국이 심하게 난 것을 보고 매고 있던 타이를 풀었다.
내가 다가가자 또 멱살이라도 잡힐까 흠칫 놀란다. 손톱자국 위에 붕대 대용으로 넥타이를 둘둘 둘렀다. 동생이 생일이라며 선물했던 검은 비단에 금박이 씌워져 있는 넥타이였다. 문득 아릿한 통증이 느껴져 왼손을 쳐다보니 그가 멱살을 떼어 내려 발버둥 치던 중 뒤집혔는지 새끼손톱이 반쯤 덜렁거리며 붙어 있었다.
“아 저런. 저 상처 났는데요. 신께서 보심 노발대발하시겠는데.”
이경헌은 내가 다쳤다는 소리에 멱살이 잡혔을 때보다 더 사색이 되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디를 다쳤느냐고 묻는 그의 눈앞에, 차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손톱의 상처를 확인한 이경헌의 눈동자에 극도의 공포가 서렸다. 내게 멱살이 잡힌 것 정도와는 비교가 안 될 ‘벌’을 예상하고 새파랗게 질려 간다.
“제물한테 감히 손을 댄 게 어디의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난 어떻게 대답해야 하죠?”
“기……현 님…….”
그는 아직도 숨을 격하게 몰아쉬면서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주제를 모르고…… 제물님께…….”
내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이런 남자에게 나 역시 무릎을 꿇고 빈 적이 있다. 비는 것에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같잖고 우스웠다. 어릴 때 나를 무너뜨린 남자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오늘은 저도 작은아버지께 무례가 심했으니, 이건 적당히 제가 잘 둘러대겠습니다.”
내 말에 그는 수모를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도 바닥에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다시는 저한테 신의 사랑이니 뭐니 지껄이지 마십시오.”
“…….”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게 너무 웃기잖아.”
조카를 판 주제에.
방 밖에서 눈치를 보던 고용인들은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된 듯하니 조용히 다시 다가왔다. 이제 정말로 지체할 시간이 없는지 두려운 기색으로도 시중을 들려 하는 그녀들을 보고 난폭한 기분을 억눌렀다.
* * *
샤워를 마치고 나와 앞장서는 고용인들의 뒤를 따라 안채를 향해 걸었다. 어릴 때 동생과 함께 생활하던 안채는 몇 번이나 재증축되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본가의 건물은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웠으나 건축 구조를 보면 안채를 중심으로 첩첩이 벽을 두르는 느낌으로 지어져 있어 사방팔방으로 감금당한 느낌에 숨이 막히기도 했다.
본가 정문을 시작으로 두 개의 문을 지나야 본채와 안채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을 따라 담을 타고 올라가야 겨우 안채로 향하는 세 개의 문 중 첫 번째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왜 굳이 이런 구조를 택해서 증축하게 지시한 걸까.
안채에 가까워질수록 수많은 꽃들이 심어져 있어 절경이었다. 섬세한 측량으로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게 이번 꽃이 지고 나면 다음 꽃이, 그 꽃이 지고 나면 또 다른 꽃을 볼 수 있게끔 설계되었다. 어릴 때부터 꽃을 좋아했던 우리 형제들 덕분에 정원은 항상 가꾸어졌는데 그것을 잊지 않았다는 듯 동생이 가주의 자리에 오른 뒤 제일 먼저 한 것이 안채의 정원 관리였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게 식물밖에 없던 내가 식물학에 뜻을 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물이 어떻게 바깥 생활을 하느냐며 가솔들이 하나같이 반대할 때 유일하게 허락해 준 것이 바로 동생이었다. 내 모든 것을 말살하고 뜯어내어 신에게 바치려고만 하는 무리에서 그들의 신만이 내 존재를 살라 먹으면서도 지켜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가 가꾸는 정원만은 받아들이고 아낄 수밖에 없었다.
문 안에 들어가기 전 회양목과 꽃고비의 푸른 물결이 눈앞에 펼쳐지자 순간 넋을 잃었다. 안채 정원 가득 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아 심장이 떨렸다.
내가 말없이 꽃무리를 바라보고 있자 등 뒤로 고용인이 다가섰다.
“아름답지요. 형님께서 오실 때 보여 드리고 싶다고 신께서 직접 손질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기현 님께서 좋아하신 걸 들으면 기뻐하실 겁니다.”
“…….”
걸음이 멈춘 것을 보고 있던 다른 고용인이 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기현 님. 즐기시는 와중에 죄송스럽지만…… 이미 너무 지체했습니다. 신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늦으시면 더 큰 벌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고용인이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내 눈치를 살펴 와 돋던 흥이 깨져 버렸다.
하긴 어차피 이곳에 꽃 따윌 보러 오는 게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그들도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다. 지체해 봤자 결국 손해 보는 건 내 쪽이었다. 그것들을 뒤로하고 천천히 마지막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채에 올라서서 마루에 앉아 신을 벗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온 팔에 의해 가운의 목 부분이 잡혀 끌려 올라갔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놀랍지도 않았다. 이렇게 우악스럽게 붙잡힌 게 한두 번도 아니었으므로.
억센 팔은 내 무게 정도는 가뿐히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얼굴에 바짝 와 닿는 그의 살갗에서는 달콤한 바닐라 같은 향기가 났다. 아니, 은은한 백단 향 냄새 같기도 했다. 체온이 뜨거워서 체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열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소름이 돋는 걸 참아 내며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내 목덜미에서 머리를 떼어 내고는 고개를 들었다.
빛을 전부 흡수한 흑단같이 새카만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장인이 혼신의 힘을 다해 빚어낸 듯 흠 하나 없이 깔끔한 선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이목구비. 짙은 눈썹 아래로 섬세하게 짜인 눈매 안에서 불덩이를 가져다 심은 듯한 붉은 눈이 갈고리처럼 내 시선을 붙잡고 물어뜯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무감각한 줄 알았던 심장이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발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입술 대신 마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안녕. 내…… 동생.
들끓는 피 같은 눈이 내 젖은 머리를 한번 훑어보더니 나른하게 찢어졌다.
“씻는 거라면 이곳에서 하면 되었을 텐데.”
“…….”
“기현아.”
그의 입이 열리고 달콤한 저음의 목소리가 울리자 위협이라도 당한 듯 몸이 멋대로 움질거렸다. 나를 기현이라 부르며 하대하는 그의 말투에 실망하는 눈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연구소에서도 그러더니 지금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 어딘가가 안 좋은 탓일 거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내 뺨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애완동물을 다루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기다리느라 힘들었어. 그대는 늘 나를 기다리게 하는군.”
늦긴 늦었다. 가뜩이나 늦은 상태에서 이경헌과 한바탕하느라 더 늦은 상태였다.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억지웃음을 쥐어짜 냈다.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 좀 늦었습니다.”
“새끼손톱에 일이 생겼나 보지? 반쪽이 안 보이는데.”
“…….”
그 짧은 시간에 부러진 손톱을 보았던 건가. 아니면 누가 그새 언질이라도 준 건가. 아무렇지 않은 척 새끼손가락을 들어 흔들었다.
“차 문에 끼어서요. 저번에도 한번 그러더니.”
“바꿔 줘야겠군. 내 것에 흠집을 내다니.”
“…….”
“카탈로그를 보낼 테니 골라. 원하는 걸로.”
그는 새끼손톱을 아프지 않게 핥더니 뚫어져라 나를 응시한 채로 교태를 부리며 웃었다. 이렇게 선선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는 놀랄 만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니, 내가 찾아오는 날은 무조건 기분이 좋았다. 내가 왔어야 하는 날 오지 않았을 때만 그는 폭발했다. 그래서 일족은 그가 기분이 좋지 않다면 일차적으로 나에게 책임을 물었다.
오늘은 무엇이든 안전하게 넘어가겠구나. 안심하며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놔두었다. 다친 손톱 위에 키스하고, 손목에 새겨져 있는 문신까지 핥은 그는 품 안에서 나를 떼어 내었다.
“신발 벗고, 방 안으로 들어와.”
뒤돌아 그가 사라지자마자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마룻바닥에 신발이 끌려 묻은 흙을 털어 내고 신을 가지런히 놓은 뒤 그가 들어간 방 안을 돌아보았다. 안채 정원뿐만 아니라 방 안까지 항상 신선한 꽃들로 채워져 있어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폐부 깊숙이 꽃향기가 들어차 질식할 것만 같다. 하지만 이 강한 꽃향기마저 동생의 품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특유의 체향 이외엔 아무것도 맡을 수 없게 된다. 그의 체액에 젖기 시작하면 더더욱.
“왜 아직 밖에 서있지? 보여 줄게 있으니 어서 들어오라고.”
안쪽에서 웃음기를 머금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하대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금의 그는 동생이 아니다. 나에게 존댓말만을 쓰는 동생은 지금 그의 안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자리에 서서 바닥을 내려다보다 심호흡하며 가운의 중앙에 묶은 검은 끈을 풀어 손에 감았다. 바람이 스치며 아무것도 입지 않은 가운의 앞섶이 벌어지고 드러난 살갗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대로 그가 있는 방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커다란 방 안 저 멀찍이 서 있는 남자의 등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등을 돌리고 있는 그가 응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꽃잎이 완전히 개화한 커다란 연꽃이었다. 연못에서만 자랄 고고한 수초가 꺾인 채 제법 큰 수조에 장식되어 있었다. 미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뿌리는 깨끗하게 잘린 채였다.
아름다운 잎과 꽃만을 꺾어 담아 둔 것이 그다웠다. 새하얀 연꽃은 과연 아름답고 청초했지만 이제 저 연꽃은 서서히 말라 죽어 갈 것이다. 뿌리를 잃은 채로.
“올해 첫 백련이라는군. 그대가 좋아할 것 같아서.”
인기척을 느낀 그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을 잃고 나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음습한 정욕과 함께 반쯤 헐벗은 것과 다름없는 나를 담으며 일렁거린다. 꽃의 시체 따위. 속으로 조소하며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늘 이 시간이 되면 상처 입으러 온 것은 나일 텐데, 이상하게 내 쪽이 가해자가 되어 동생을 상처 입히러 온 듯한 착각이 인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가여운 여우 신을 보며 목소리에 애정을 담지 않으려 애썼다.
“신을, 모시러 왔습니다.”
* * *
미친 듯이 피치를 올리던 남자가 허벅지를 굳혔다. 곧 안에 깊숙이 박힌 것이 울컥울컥하며 내벽에 정액을 쏘아 올리는 게 느껴졌다. 무심코 밀쳐 내지 않기 위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언제 느껴도 소름끼치는 감각이다.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부푸는 감각. 그는 항상 고환마저 집어넣을 기세로 한계까지 성기를 삽입한 채 사정을 했다.
처음엔 울면서 안에는 제발 하지 말라고 빌었지만 그것만큼은 양보하지 않아 매번 진득한 정액이 내벽을 타고 흐르다 입구에 줄줄 새는 걸 그대로 느껴야 했다.
동생의 씨인 것이 고통인 건지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범해지는 게 고통인 건지. 죄악의 구분을 하기도 전에 사고가 텅 비어 버릴 정도로 재차 다시 꿰뚫렸다.
몇 번 왕복 끝에 마지막 남은 몇 방울마저 몸 안에 쏟아 낸 뒤 그가 연결된 채로 내 온몸을 끌어안았다.
“좋아……. 너무…… 좋아. 기현아.”
귓가에 수없이 입 맞추며 그는 너무 좋다고 몇 번이나 속삭였다. 포악하게 나를 짓이기고 해체해 놓고서는 세상 다시없을 만큼 다정한 고백을 퍼붓는다.
눈가리개를 해 눈앞이 보이지 않는 채로 그가 퍼붓는 후희의 거부감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상태라 땀이 맺힌 동생의 콧날이 스칠 때마다, 뜨겁고 깔깔한 혓바닥이 턱과 목을 핥아 내려가며 유두를 머금고 핥아 줄 때마다 아랫도리에 다시 힘이 바짝바짝 들어간다. 연결 부위 사이로 체액이 줄줄 흘러내리는 느낌에 손톱을 세워 동생의 몸을 밀어 냈다.
“그만 빼…… 빼 주십시오.”
정사의 여운을 즐기며 간질간질하던 분위기는 내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냉랭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내가 거부할 때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화가 나진 않았을지 두려웠지만 격렬한 행위 이후 다정한 후희를 해 줄 때마다 미친 듯이 밀려드는 자괴감에 어쩔 수 없다. 대체 무슨 표정으로 내 몸을 쓰다듬고 있는지, 대체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내 쪽에서 먼저 몸을 물렸다. 자극하지 않으려 애써 노력하며 허리를 움직여 그의 것을 몸에서 뽑아냈더니 가득 고여 있던 정액이 덩어리째 툭툭 떨어졌다.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자 곧 다정한 손길이 입술을 어루만진다. 그 손길이 동생을 연상하게 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게 쳐 냈다가 금방 후회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신을 해쳤다. 신을 상처 입혔다. 신을 거부한다. 제물로서 나는 제멋대로고 언제 처분당해도 할 말 없을 만큼 방자하지만 그는 매번 나에게 관대했다. 아랫것들이 조금만 눈 밖에 나도 가차 없이 벌을 내리는 잔혹한 남자가 나에게만큼은 아량을 베풀었다. 그게 그의 몸속에 있는 동생의 존재 때문인 듯해서 나는 그가 상냥해질 때 오히려 더 상처 입었다.
내가 고개를 숙인 걸 지켜보던 그는 한참 침묵하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이만 씻고 쉬어.”
고집스레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자 바로 옆에서 느껴지던 생생하고 뜨거운 존재감이 자리에서 일어나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소리로 구분하고 있는 나를 의식해서인지 과장되어 좀 더 크게 울리는 발걸음이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비로소 오늘의 행위가 끝난 것이다.
좀 전까지 진한 정사를 나눈 탓에 방 안은 습하고 남자의 체취로 가득했다. 금방 몽롱해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참았던 신음을 토해 냈다. 보통은 남자가 뒤처리도 다 해 주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내 거부에 그도 단단히 마음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비참해할 때 옆을 떠나 줘서 고마웠다.
끈적거리는 몸을 씻기 위해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원해서였지만 억지로 다뤄진 몸은 급격하게 고통을 호소하며 나를 질책한다. 한계까지 벌어졌던 허벅지는 쓸려서 새빨갛게 부어 있을게 뻔했다. 구멍은…… 말할 것도 없겠지.
다행인 건 오늘은 내가 평소보다 많이 사정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유치한 발상이지만 잠자리에서 만족하지 않으면 않은 만큼 나의 죄의식은 가벼워졌다. 반대로 동생의 몸을 한 그와의 정사에서 느끼면 느낄수록 지독한 모멸감에 시달리곤 했다. 그와 동생은 다른 사람이라며 스스로 세뇌해도 정사 장면을 아들에게 들켜 버린 부모가 된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씻는 걸 포기하고 눈가리개를 풀지 않은 상태 그대로 침상 속을 파고들었다. 어차피 내일은 휴일이라 아무렴 어떠랴 싶다. 레지던스로 돌아가 봤자 내일 아침에 다시 호출될 것이 뻔한데. 돌아가지도 못할 텐데.
땀과 정액과 타액으로 얼룩진 시트는 축축했지만 그의 체취가 밴 좋은 향기가 나서 괜히 서러워졌다.
부드러운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나는 자책하며 헐떡거렸다. 방금까지 함께 누워 있던 남자를 지워 버리려 애쓰고 참고 참으며 속으로만 불렀던 이름을 조심스럽게 입 밖에 꺼냈다.
“……기하야.”
기하야.
기하야. 내 동생.
눈가리개가 젖어 들었다. 오전부터 쓸데없이 예전 일이 생각나더니 결국엔 이렇게 감정적이 되어 버린다. 신이 선택한 동생과 그 동생이 선택한 내가 불쌍하고 가여워졌다. 아무도 저주받은 우리 형제를 위로하지 않아서 더더욱.
소리 내지 않은 채로 나는 눈물을 흘렸다. 통곡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더 불쌍한지 그가 더 불쌍한지 이제는 알지 못했다. 단지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를 원망하며 버티는 수밖에 없다. 나보다 불쌍할지 모르는 동생을 가해자로 만들어 증오하지 않으면 단 하루도 이 생활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아이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나는 살 가치 하나 없는 버러지 같아서. 남자의 몸을 하고, 같은 피가 흐르는 몸으로 동생인 신을 모시는 제물의 굴레를 씌우고 사는 내가 너무도 혐오스러워서.
얼마나 그렇게 자책하고 헐떡였을까. 벗고 있는 몸에 선선한 바람이 스쳤다. 문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느껴지는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가리개를 풀어내려고 손을 들었다.
“누, 누구십니까?”
부드러운 손길이 눈가리개를 풀려는 손을 잡아 내리며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어느 정도 식어 있던 몸은 등 뒤에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과 익숙하기 그지없는 나른한 체향에 멋대로 반가워하며 늘어졌다.
“신께서, 언제부터.”
아까 방을 나간 건 누구였지? 아니 애초에 눈이 보이지 않는데 나갔다는 걸 확신할 수 있나. 그때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나는 대체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
당황하여 온몸을 굳히는 나를 그가 뒤에서부터 단단히 끌어안고 쓰다듬었다. 익숙한 손길에 몸은 다시 풀어지기 시작했으나 반대로 정신은 또렷해졌다. 내 등 뒤에 있는 남자가 그가 아니면 어쩌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붙잡힌 양손에 다시 힘을 줬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점점 더 겁에 질렸다.
귓가에 짤막한 키스를 퍼부으며 그는 이미 꼿꼿하게 발기되어 있는 유두와 예민한 옆구리를 부드럽게 훑더니 허벅지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능숙하게 다리를 벌렸다.
“으읏……, 잠깐…….”
커다란 손이 내 성기를 덮고 누구의 정액으론지 이미 처덕처덕 젖어 있는 음모를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찌걱찌걱하는 마찰음이 울려 퍼지자 수치스러워 허리를 뒤틀며 반항했다. 큰 손으로 성기 전체를 애무하고 고환까지 주무르던 남자의 손가락이 내 몸을 더듬어 내려가 이미 정액을 가득 담고 있는 구멍 안에 푹 꽂아 넣었다.
“아……!”
후드득, 몸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남자의 손으로 흘러내렸다. 그의 숨소리가 한층 더 격해지며 손가락을 하나 더 쑤셔 넣고 내벽을 세게 긁어냈다. 나는 아픔과 쾌감에 의해 새된 신음을 흘리며 남자의 품 안에서 몸을 뒤틀었다.
“시…… 신. 잠깐…….”
쥐어짜 내듯 내 성기를 물고 쥐며 능숙하게 온몸을 자신에게 기대게 하더니 이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끈적거리는 귀두를 내 구멍 입구에 문지르며 적셨다. 좀 전까지도 시달렸던 구멍은 이미 부어 있어서 몇 번의 마찰에도 따끔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다 그가 당장에라도 몸을 뚫을 것 같아 허벅지가 바르르 떨렸다.
“말을, 말을 해 주세요.”
제발.
체 향도, 뒤에서 빈틈없이 끌어 안겨져 느껴지는 탄탄한 가슴팍도, 수없이 안겨 봐서 날 만지는 능숙한 손길도, 전부 다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두려웠다.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해 달라고 빌었지만 그는 귓가에 흥분된 숨소리만 들려줄 뿐이었다. 낯선 그 모습에 두려움이 느껴져 도망치려고 몸을 비틀어도 내 허리를 단단히 잡고 귀두를 구멍에 문지르며 쿠퍼액을 펴 바르기만 했다.
놀란 몸이 왈칵하고 머금고 있던 정액을 쏟아 내 밑에 문지르고 있던 성기가 젖자, 귓가에 들리던 숨소리가 한순간에 흉포해졌다. 억지로 구멍에 쑤셔 넣으려는 통에 내 몸이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보였다.
“아, 안, 안 돼.”
눅진눅진 젖어 풀어져 있는 구멍인데도 귀두까지밖에 쑤셔 넣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몇 번 허리 짓을 하다가 내 성기를 움켜잡고 위아래로 훑으며 강제로 흥분을 유도하려고 했다.
“싫습니다, 싫어요. 더 이상은 안.”
말로는 싫다고 하지만 고통에 익숙해진 몸은 우악스러운 강제 수음에 곧장 반응하며 곧추서기 시작했다. 반질반질하게 쿠퍼액이 새어 나오는 귀두 끝을 문지르며 남자는 구멍 안으로 꾹꾹 자신의 것을 밀어 넣었다. 삽입을 견디지 못한 몸이 자꾸 그의 성기를 뱉어 내려 몸부림쳤다. 온몸에 식은땀이 배어 나와 끌어 안겨진 몸이 자꾸 미끄러지는 바람에 진입을 계속 실패하자 그는 결국 거칠게 신음을 내뱉었다.
“……이기현. 몸을 열어.”
지독하게 욕망에 절어 있는 목소리가 귓가에 쏟아져 나는 안도함과 동시에 한계까지 버티던 몸의 긴장을 풀어 버렸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것이 내벽을 강제로 벌리며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아, ―아!”
“읏……!”
쥐어짜듯 조여 대는 구멍 덕에 그가 아찔해하며 사정의 욕구를 참아 내려 어깨에 이를 박았다. 이미 완벽하게 젖어 있던 내벽이 살아서 꿈틀거리며 남자의 좆을 빨아 먹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내 몸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걸 느끼고 그는 더 포악하게 안을 파헤쳤다. 아까의 정사로 몸 안은 이미 그의 모양을 기억하고 있는데도 처음 들어오는 것처럼 사정없이 휘저었다.
“그러…… 그러지 마세요.”
“…….”
“제발…… 그만……. 아…….”
“하…….”
몸 안의 성기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애원하자 남자는 내 뺨에 흐르는 눈물과 땀을 핥으며 숨을 가다듬더니 내 허벅지를 쥐어 잡고 올려 성기를 주욱 반쯤 뽑았다가 다시 콱 주저앉혔다.
“……!”
거대한 살덩이가 내 전립선과 내벽을 자비 없이 짓이기고 들이박혔다. 그 순간 눈앞에 섬광이 터지며 나는 내가 교성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경련이 일며 곧바로 일어선 성기에서 왈칵왈칵 정액이 사방으로 뿜어졌다.
내가 사정하면서 그곳 역시 미친 듯이 조여 들었는지 몸 위의 그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사출하기 직전에 성기를 확 잡아 뽑았다가 다시 콱 박아 넣었다. 또다시 예민한 부분에 직격을 맞은 나는 교성조차 내지 못하고 자지러지며 침상 위로 쓰러졌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쑤셔 박히다 보면 정말로 미칠지 몰랐다. 느끼면 안 됐다. 느끼면 안 되는데……. 이 남자는 내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일부러 잔인하게 느끼는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후벼 팠다. 내 예민한 곳을 모조리 꿰고 있는 남자의 품 안에서 순식간에 억지로 쾌감이 극상까지 끌어올려졌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로도 나는 등 뒤의 남자를 떼어 내며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앞으로 기었다. 침상 밖에 팔을 뻗을 정도로 기어갔을 때 그는 혀를 차며 손쉽게 내 발목을 붙잡고 주욱 끌어당겼다.
“날 모시러 왔다며.”
“아……!”
바르작거리는 나를 찍어 누르며 남자가 협박조로 으르렁거렸다.
“그럼 날 기쁘게 해 줘야지. 응……? 기현아.”
그의 손이 억지로 다리를 벌리고 사이에 무릎을 넣어 오므리지 못하게 고정한 채 하체를 들이밀었다. 몇 번이고 몸속을 들락거렸던 성기는 흠뻑 젖어 입구에 귀두만 꽂았는데도 매끄럽게 몸 안으로 진입했다. 꾹꾹 눌린 성기가 뿌리까지 완전하게 몸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철벅거리며 미친 듯이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머리가 쾅쾅 울린다.
“으……읏, 하……! 앗……! 아, 아…….”
“좋지? 몸 안…… 젠장, 엄청 뜨거워…….”
“아! 앗! 흐으……! 응……!”
“좋아하잖아. 내 거. 이렇게 좋아하면서.”
이거 봐. 이렇게 예쁘게 구멍이 벌어져서, 머리를 대기만 해도 빨아들이며 좋아하는데.
고양감에 취해 남자가 속살거렸다. 나는 정신이 나가기 시작해 그저 덜덜 떨면서 퍼부어 주는 애무와 쾌감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반항하려 할 때마다 남자는 기민하게 눈치채고 난폭하게 전립선을 찔렀다. 그는 가슴을 미는 작은 행동조차도 용납하지 못했다. 퉁퉁 부어 예민해진 안을 불덩이 같은 것이 멋대로 휘저었다. 나는 백치처럼 잘못했다고, 살려 달라고 빌며 신음했다. 남자의 유연한 등 근육이 꿈틀거리며 내 몸 위로 떨어질 때마다 구멍에서 왈칵왈칵 애액과 쿠퍼액인지 정액인지 모를 꾸덕하고 질척한 액체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가 길게 신음을 흘리며 움직일 수 없도록 허리와 허벅지를 움켜잡은 채 성기를 뽑아냈다가 뿌리까지 거세게 몸 안에 퍽퍽 처박았다. 눈앞에 섬광이 터졌다가 지옥에 끌려가는 것처럼 뚝, 하고 떨어진다. 신경 가닥이 타닥타닥 타들어 갔다.
“흐아……, 앗……!”
“하…….”
내 성기가 그가 처박는 움직임에 맞춰서 두 번짼지 세 번짼지 모를 사정을 하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성기가 울컥거리며 내벽에 대고 파정을 시작했다. 내 안에 싸면서도 피스톤질을 멈추지 않아 전신의 감도가 미친 듯이 올라간다.
죽을 것 같다. 몰아치는 쾌감에 그만하라고 울부짖으며 그의 팔을 피가 날 정도로 긁어내는 데도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내 안 가득 정액을 쏘아 올렸다. 마지막에 고환까지 집어넣을 기세로 쑤셔 박은 채 남은 한 방울마저 몸 안에 털어 냈다. 섹스가 아니라 폭력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무력하게 그의 밑에 깔린 채로 비참하고 짧은 파정을 끝마친 나와 달리 그의 것은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었다. 이미 메워질 곳도 없는 구멍 안을 더 채웠다.
그는 긴 절정을 끝내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연결한 채 내 위로 체중을 실어 길게 누웠다. 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그의 몸을 받아들였다. 가쁜 숨소리를 내며 남자는 교태를 부리듯 내 귓가에 얼굴을 문지르며 눈을 가린 내 얼굴 곳곳에 입술을 눌렀다.
“……기현아.”
흘러내린 땀과 눈물로 엉망이 된 눈가와 뺨이 더럽지도 않은지 모조리 핥으면서 그가 혼자만의 후희를 즐겼다. 흥분이 가시지 못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계속 내 몸에 비비며 짐승처럼 헐떡거렸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그의 입술이 닿을수록 싸늘하게 식어 갔다. 그가 좋았다고 속삭이며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면 부를수록 머리도 몸도 더 식어만 갔다.
나의 변화를 눈치챈 남자가 키스를 그만두고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꽉 안았다. 뒤늦게 잔학하게 군것에 대한 가증스러운 후회라도 하는지 한참 그렇게 내 목에 고개를 떨구고 뺨을 비비던 그는 불면 꺼질 듯, 귀 기울여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대를, 사랑해.”
사랑해서 그랬어. 언제나 그렇듯이.
불덩이 같은 그의 몸에 끌어 안겨 있는데도 오한이 들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제발.”
남자의 정액으로 온몸이 젖어 놓고도 나는 남자의 애정만큼은 원하지 않았다. 이건 내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길바닥을 걷다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뺨을 맞았다 하더라도 이보다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아프다고 말했다. 싫다고 말했다. 그만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 어떤 말도 들어주지 않았다. 애초에 이 집안에서 내 인권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남자는 나에게 저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사랑한다는 소리를 하면서 내 몸을 이렇게 유린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차라리 나를 육축으로 부르며 하찮게 대하는 것이 나았다.
내가 진저리를 치자 남자도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의 품에 말없이 끌어 안겨 있었다. 지독히도 뜨겁게 정사를 나눠 놓고도 우리의 거리는 타인보다 못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도닥거렸다. 거리를 메우려는 그의 노력이 피곤했다. 평소보다 시달린 몸은 뜨거운 남자의 체온으로 금세 나른해져 서서히 밀려드는 잠에 몸을 맡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