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회
최후의 결전
“....”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제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나를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나와 제로.
우리는 서로에게 악역이었다.
그리고 서로를 이 자리에 있게끔 한 악연이었다.
산 자는 주인공이 될 테고,
죽은 자는 악당이 되어버리는 싸움.
미안하게도.
‘포인트 상점.’
나는 응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제로와 싸울 생각이 없기 때문에.
“형.”
포인트 상점을 열자마자,
서시우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준비됐어?”
내 말에 잠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서시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진짜 혼자 올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서시우를 데리고 왔다.
제로를 넘어, 아들에게 닿기 위해서는 서시우의 도움이 필요 할 테니.
내가 어찌어찌해서 제로를 이긴다고 쳐도, 아들의 존재를 어찌하지 못한다면 결국 인류는 멸망의 수순을 밟게 돼 있었다.
웨스트 월드를 떠나기 직전, 나는 ‘정보 방’에 남은 포인트를 모두 소진 해 한 가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인류는 아들을 죽일 수 있는가.’
그에 대한 ‘정보 방’의 답은,
무척이나 간결했다.
[불가능.]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방법.
모른다.
하지만 비슷한 편법 정도는 시도해 볼만 했다. 시도하지 않으면 어차피 인류는 멸망하니까.
“몸에 무슨 이상은 없어?”
나는 서시우를 데리고 포인트 상점을 나가기 전, 서시우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포인트 상점에 레이를 한 번씩 데리고 온 적은 있었는데,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었는데.
“응. 딱히?”
그런 건 없는 것 같았다.
“탈출 해보려고도 했어?”
“응. 근데 전혀 감이 안 잡혀. 다른 세계 같아, 여기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시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능력을 시전하고 나면, 레이랑 함께 바로 이곳에서 벗어나. 레이라면 제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
“뒷일은 협회장님이 알아서 하실 거야. 아, 그리고 이거.”
나는 포인트 상점의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신의 물방울’을 잡아다가 서시우의 품에 안겼다.
“협회장님 주고 온다는 게, 깜빡했네. 나 대신 전해줘.”
“....형.”
“왜?”
“아..니야.”
나는 어깨에서 손을 올려,
서시우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서시우.”
“왜?”
“시향이랑 사귄다며?”
“....누구한테 들었어?”
“그냥 넘겨짚어 봤는데. 진짜 사겨?”
“....”
얼굴이 살짝 빨개진 서시우가 내 시선을 외면했다.
피식.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서시우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나중에 시향이랑 밥 한 번 먹자. 아주버님~ 하는 소리가 그립네. 자, 그럼. 서시우. 밖으로 나간다.”
“....혀,형? 자,잠시만!!”
나는 서시우의 몸에 여전히 신체를 접촉한 채로, 포인트 상점을 닫았다.
동생으로서,
형의 안위가 걱정이 되겠지.
그 마음은 충분히 얼굴 표정으로 내게 전해졌다.
그거면 충분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만월검을 치켜들었다.
포인트 상점을 닫을 때,
이미 달의 축복은 5단계를 시전한 상태였다.
제로의 기습에 대응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제로는 여전히 의자 앞에 서서,
내가 있는 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녹턴.”
내 옆에 나타난 서시우가 낮게 중얼거렸다.
적색 빛의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태풍이라도 몰아칠 것 같은 거센 구름의 유동이었다.
“어둠의 안식.”
집결한 구름 아래로,
어둠이 그림자처럼 깔리기 시작했다.
“흑야(黑夜).”
어둠이 짙어지고, 안개처럼 산개하며 구름 아래의 공간을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였다.
“형....”
나를 부르는 서시우의 목소리.
크르릉!!
레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빠르게 귓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형!! 꼭 살아서....”
마지막으로 점멸되듯,
사라져간 서시우의 목소리였다.
나는 서시우의 능력 때문에 어둡게 변한 전방을 쳐다봤다.
레이와 서시우를 따라가는 움직임은 없었다.
제로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달빛 제 11초식.’
처음이었다.
서시우와 연계 능력을 사용하는 건.
서시우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능력의 효력이 빠르게 감소할 터였지만 충분했다.
“떠오르는 달.”
시동어를 말하자마자, 내 몸에서 하얀 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신체 능력이 대폭 상승하며, ‘달의 축복’과 중첩이 됩니다. 또한, 어둠이 지속 되는 동안 ‘투영’ 능력을 일시적으로 획득하며, 떠오르는 달의 능력이 유지되는 동안 ‘절대자’라는 칭호를 부여받게 됩니다. ‘절대자’에게 대적하는 적은 모든 속성 저항력과 능력치가 20% 하락합니다.]
어둠에 떠오른 단 하나의 달.
하늘에서 지상을 굽어보는,
거만한 ‘절대자’였다.
나는 투영 능력으로 대낮처럼 시야가 훤히 보였다.
제로 역시 마찬가지인 듯,
내가 있는 위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간다.
나는 입모양으로 선전포고를 하며,
제로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달빛 제 12초식.’
“유성우(流星雨).”
또 다른 연계 능력을 사용했다.
6초식인 달빛 소나기와 유사한 능력이었지만,
소나기와 유성은 결이 완전히 달랐다.
2배. 아니 10배는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라고나 할까.
먹구름에서 열매처럼 맺힌 유성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유성이 지상에 닿기 전.
제로가 드디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달의 광휘.”
제로의 손을 감싸고 있는 검은 붕대 사이로 흘러나오는 검은 기류를 빠르게 쳐냈다. 묵직한 강철이라도 쳐낸 것처럼,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무거웠다.
S급 스탯에,
이런저런 버프를 칭칭 두르고 있는데도.
하물며 디버프까지 걸었는데.
‘역시, 괴물이네.’
“천벌(天罰).”
세리나의 빛 능력을 사용하자마자,
제로의 머리 위로 벼락과도 같은 섬광이 내리꽂혔다.
다른 사람의 능력도 아닌,
세리나의 능력이었다.
그런데도 제로는 파리를 쫓듯,
머리 위로 손을 한 번 휘이 젓는 것으로 천벌을 상쇄시켰다.
쿵!쿵!
쿠우웅!!
몇 합을 겨루지 않은 찰나의 시간이 흘렀고, 드디어 유성우가 지상에 굉음과 함께 내리 꽂히기 시작했다.
이번 역시 제로는 천벌처럼,
유성을 없애려다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챘는지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어디 가려고?”
지금의 나는 제로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었다.
‘10초식, 제 2형. 블루문.’
새하얀 만월검이 푸르게 물들었다.
제 1형인 레드문은 공격력 극대화였고,
제 2형인 블루문은 방어력 극대화였다.
나는 제로의 움직임에 태클을 걸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짓이냐?”
스산하고도 섬뜩한 제로의 목소리.
제로의 고개는 살짝 들려있었는데,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닌 내 뒤쪽을 보고 있었다.
아들이 있는 캡슐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성우가 집중포화를 하고 있는 캡슐을.
“너무 오냐오냐하면 버릇 나빠져. 언제까지 재워두려고? 이제 일어날 때도 됐잖아. 안 그래?”
“....”
샌드백처럼 유성우에 두드려 맞고 있는 캡슐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캡슐 주변으로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가 점점 옅어져갔다.
그에 반해,
제로의 기세는 빠르게 치솟고 있었다.
스으으!!
양 손을 들어 올린 제로의 붕대 틈에서 검은 기류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기류를 블루문으로 변한 만월검으로, 미친 듯이 쳐냈다.
그 과정에서 땅이 울렁이고,
허공이 진동을 했다.
불꽃이 사방에 피어났고,
폭포수 같은 물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넝쿨이 바닥에서 올라왔고,
역한 냄새가 지독하게 나기 시작했다.
제로.
녀석은 최초의 인체실험의 실험체로서,
온갖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나는 검은 기류와 사투를 벌이며,
정시아. 한설휘. 금석. 박아름. 강소라.
뿐만 아니라,
채린. 신지수. 박태산. 세리나. 소피아.
훈수 리스트에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제로에게 맞서고 있었다.
비등비등했다.
처음 양상은.
하지만 점점 서시우가 시전하고 간 어둠 능력이 약화되면서, 점점 내 몸에 상처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의 영역 안에서 있어서 그런지 달빛력이 전혀 차오르지가 않네.’
하지만 조급하지 않았다.
내 목적은 제로를 이기는 게 아니었으니까.
내 목적은.
쩌적-!
드디어 깨졌다.
아들을 품고 있던 캡슐이.
양수 같은 물이 캡슐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아들은 물속에 있는 것처럼, 허공에 둥둥 떠서 눈을 감고 있었다.
“커헉....”
나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블루문을 뚫어 낸 검은 기류가 내 복부를 강타한 까닭이었다.
“저,정색하기는.”
나는 검은 기류를 쳐내며,
제로를 쳐다봤다.
직감적으로 느낌이 왔다. 제로는 지금 나를 한 번의 공격으로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게. 진심을 다해서.
그럴 만도 했다.
잘 자고 있는 아들 녀석의 침대라고 볼 수 있는 캡슐을 아작 내버렸으니.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하나.
내 목적은 아들의 취침 방해가 아니라.
“달빛 제 13초식. 개기일식(皆旣日蝕),”
납치하는 건데.
[5초간 지정한 ‘태양’을 가립니다. ‘태양’을 가리는 동안 ‘태양’에게서 무적이 됩니다. ‘태양’을 지정하시겠습니까?]
“저기 복면 쓰고 있는 못생긴 놈.”
[개기일식(皆旣日蝕)이 활성화 되셨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5초입니다.]
5초.
이 시간이면 납치범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나는 제로에게서 등을 돌려,
곧장 아들을 향해 달려갔다.
마지막 남은 달빛력을 불태우며.
그리고 아들의 몸에 손을 대자마자,
제로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포인트 상점.”
죽일 수 없으면.
편법을 쓰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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