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보이는 S급들-181화 (181/196)

181회

성녀의 결단

“....”

거짓말이다.

오늘도.

박아름이 나간 소회의실에 홀로 남아,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지고 있는 성녀.

진실의 거울은 오늘도 역시나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괜찮아요.

라는 박아름의 말이 거짓이라는 대답.

마계 침공이 시작 된 후,

성녀는 매일 같이 박아름에게 묻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진실의 거울’이라는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인간의 이기적인 민낯이라고나 할까.

내심 성녀는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박아름이 진정으로 모든 걸 이해하고,

진실이라 대답하는 그 순간을.

그렇다면 죄책감이 조금은 옅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자기 자신이 받아들인 거니까.

그런 거니까.

“하아....”

성녀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오래 전 암흑기를 겪은 후, 치유협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해 대비하고자 했다. 제 2의 암흑기가 도래할 지도 모르니, 그에 대한 대비를 갖추고자 했다.

대비는 치유협의 장로들이 주관했고,

은밀하게 진행 됐다.

대비의 결과는 훌륭했다.

인간이라면 가지지 못할 신수의 양을 한 어린 아이 몸에 저장하는데 성공했으니까.

어쩌면 오늘과 같은 재앙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박아름은 또래 아이들처럼 살아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발생해버렸다. 암흑기를 초래했던 마계 침공이.

장로들의 대비는,

가히 훌륭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헌데,

그렇다면,

박아름은?

그녀는 하나의 인격체이자,

한 명의 목숨이었다.

희생시킬 권리가 가당키나 한 걸까?

사실을 알게 된 박아름은 알겠다고는 하는데, 진실의 거울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박아름은 살고 싶다고. 살고 싶어 한다고.

“아아....”

가능하다면 본인이 희생하고 싶었다.

가능만 하다면..

“....음?”

얼굴에 이어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있던 성녀의 눈이 창가 쪽을 향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건물의 상층부.

30층은 더 되는 높이였다.

그런데 한 남자가 지상에 서 있는 것처럼,

웃으면서 창가 너머에서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하품을 하고 있는 하얀 늑대 한 마리.

성녀는 저 남자와 저 늑대를 익히 알고 있었다.

“서진..씨?”

저 남자가 여긴 무슨 일로?

+ + +

이겼지만, 졌다.

승리했지만, 패배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8,9번 게이트를 클리어 하고 게이트 밖으로 나왔을 때. 아무도 클리어 했다는 기쁨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슬퍼보였다.

왜냐하면 사상자가 반절을 넘었으니까.

내가 조금만 일찍 도착했거나, 9번 게이트가 아닌 8번 게이트에 예정대로 입성을 했다면 사상자가 훨씬 줄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게 원래는 정상이었으니까. 그동안 내가 제공한 정보들로 어렵지 않게 클리어 해서 그랬지, 전생에는 게이트 하나 클리어 할 때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노출이 됐다.

전생에서는 지금처럼 사상자가 발생해도,

게이트 하나 클리어 할 때마다 기뻐하던데.

전례가 너무 성공적이라,

이 사람들이 눈이 너무 높아졌다.

“고생했다, 서진아.”

“고생하셨습니다, 서진씨.”

조원들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린 한태문과 설민호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지시를 받은 조원들은 전부 한 방향으로 향했다.

치유소가 있는 곳이었다.

멀쩡한 인간은 나 하나가 유일했다. 곁에 다가온 한태문과 설민호도 만신창이었다. 그나마 조원들에 비해 멀쩡해 보일 뿐.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나보다 연장자인 두 사람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고생은 무슨. 나자빠져 있는 게 무슨 고생이라고. 안 그런가, 설민호 길드장?”

“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알기로 두 사람은 이번 작전 전까지 별다른 안면이 없었던 걸로 아는데, 이번에 생과 사를 넘나들면서 전우애가 두텁게 쌓인 모양이었다.

꽤나 친근한 모습으로 팔꿈치로 서로를 툭툭 건드리던 두 사람의 시선이 천천히 같은 곳을 향했다.

이번 재앙의 마지막 게이트가 있는 곳.

디아블로가 있는 10번 게이트.

사람들이 직업병, 직업병 하는데 직책병도 있었다. 대장이라는 직책이 가진 직책병.

두 사람은 막 게이트를 클리어 하고 나왔으면서, 다음 게이트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좋은 자세였지만, 지금은 쉬는 게 우선이었다.

“두 분 다, 쉬러 가시죠. 게이트에 대한 정보와 공략 방법은 제가 따로 폰으로 전송해드릴 테니까.”

“예언 능력이라는 게 참으로 대단하구나. 안 그런가, 길드장?”

“예. 서진씨의 예언 능력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지금 초반부 게이트에서도 허덕이고 있었을 겁니다.”

“동감이네. 헛헛!”

맞는 말이기는 한데,

도대체 언제 갈 생각인 거지?

나는 팔짱을 끼며,

두 사람을 쳐다봤다.

내가 9번 게이트에서 8번 게이트로 넘어 갔을 때, 한태문은 나를 악마라고 착각을 했었단다. 그래서 나를 노려본 거고.

내가 9번 게이트에 혼자 아이템 독식하러 가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난 후, 나는 편하게 한태문을 대하고 있었다.

설민호는 원래 불편한 사람은 아니었고.

내가 팔짱에 이어 발을 까딱까딱 거리자,

“크흠..우리도 슬슬..가 볼까나, 길드장? 허리가 이것 참 말도 안 되게 쑤시는구만.”

“그..러시죠.”

그제야 갈 마음이 생긴 것 같았다.

“서진씨?”

몇 발자국 가던 설민호가 갈 마음만 생긴 건지, 뒤를 돌아 나를 불렀다. 내 그럴 줄 알고 그들의 뒷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차였다.

“예.”

“10번 게이트 공략은 언제 쯤 할 생각이십니까?”

설민호와 함께 등을 돌린 한태문이 나를 쳐다봤다.

“일단 공격조가 제 기능을 해야 하니까, 공격조가 회복하는 거 봐서요?”

“그렇군요. 최대한 빨리 회복하도록 하겠습니다.”

동감한다는 듯이 옆에서 한태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분명 지휘권한도 없었고,

결정권자도 아닌데.

어째서 저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해를 하고 다시 등을 돌리고 가버리는 것인가?

설민호야 내가 일부러 앉혀놓은 바지대장이라 그렇다 쳐도, 한태문까지 저럴 줄은 몰랐다. 게이트를 클리어 하고 나오는 내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달고 있기는 했는데.

크르릉.(배고파.)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소형견 크기로 변한 레이가, 내 정강이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응, 우리도 가자.”

한태문과 내 관계는 내가 빙의하기 전까지만 해도, 탐탁지 않지만 한설휘 때문에 서진을 참고 봐준다는 느낌의 관계였다.

그런데 내가 여태까지 만들어놓은 이미지와 과정이 나쁘지는 않은지, 한 번의 기회로 그가 서진에게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모두 좋게 만들어 놓는데 성공했다.

얼핏 아까 설민호한테 듣기로는,

오늘 이전에도 꽤나 좋았던 모양이지만.

나는 레이와 함께 오피스텔로 가기 전,

10번 게이트를 힐끔 쳐다봤다.

서시우와 매니지먼트는 잘 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서진!!”

“으어억?!”

멧돼지 같은 게 돌진해 왔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맹렬한 스피드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만월검에 손을 올리며,

멧돼지를 쳐다봤다.

멧돼지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영도의 왕이자,

박아름의 아버지인 박대식.

그가 급제동을 밟는 내 코앞에서 멈추고, 덥썩 내 손을 붙잡았다.

“도와주게!!”

“....”

갑자기 나타나서는,

밑도 끝도 없이 도와달라니.

내가 이 사람을 도와줄 정도로 우리의 연이 깊나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연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얼굴 표정이 상당히 급박해 보였기 때문에 일단 자초지종을 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모든 자초지종을 간략하게나마 들었을 때.

“아하.”

그동안 가졌던 의문보다는 궁금증에 가까웠던 물음표가 지워졌다.

예전 박대식과 박아름의 관계.

두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와 딸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였다. 헌데, 박아름이 진짜 딸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성녀가 박아름을 보러 온 것 같은 장면들.

무엇보다도 나는 이번 재앙이 시작 된 이후로,

줄곧 궁금했었다.

게이트를 전부 닫는다고 해도,

‘정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정화’를 누가 했던 것일까.

모니터로 관전을 할 때,

나는 이 부분을 유심히 보지 않았다.

전투씬이 모두 끝나고,

뒷수습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라는 생각에 다른 흥미로운 장면에 시선을 돌렸으니까.

‘어쩐지 전혀 생소한 얼굴이라고 했어.’

박아름.

내가 그녀를 몰랐던 이유는 확실했다.

‘정화’ 작업에 필요한 단발성 키포인트.

그 정도의 캐릭터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를 이번에 소모시키지 않는다면.

‘시우한테 《포식의 악마》와 계약하라고 하길 잘했네.’

박아름.

신지수가 치유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단순히 나중에 쓸만하겠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신수의 그릇이라는 뜻은,

신수 능력자라는 뜻.

‘권능’에 대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능력자 중 한 명이었다.

“아니, 근데.”

나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고 있는 박대식을 쳐다봤다.

“하고 많은 사람 중, 왜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자네라면.. 자네..라면..”

나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번지수를 아주 잘 찾아왔다.

“근데 진짜 딸도 아니라면서, 이렇게까지 무릎을 꿇을 일..”

박대식의 눈을 본 순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박아름이 대머리 신사와 결혼할 뻔 했을 때부터 느꼈지만, 눈이 꼭 아버지의 그것이었다.

부성애(父性愛)라고나 할까?

굳건하다 못해, 결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눈빛에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 내게 전해질 정도였다.

그러니.

“바지 좀 놓으세요. 아름이 구하러 가야하니까.”

이거 좀 놓아줬으면 좋겠는데.

+ + +

성녀를 만난 나는 내 계획을 설명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성녀가 망설이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내 계획은 치유협의 장로 위치에 있는 인간들을 단체로 물 먹이고 엿을 먹이는 계획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좋게 좋게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치유협의 장로들은 꼭 옷을 벗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언젠가 한 번 그럴 생각이었는데, 마침 계기도 딱 좋았다.

치유협의 장로들은 암세포들이었고,

장차 암 덩어리로 번져가는 인물들이 태반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후반부에 선동과 날조를 밥 먹듯이 하다가, 인류에 도움은커녕 레볼루션에 가담했다.

그러니 지금 한 번, 암세포를 박멸하는 게 시기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그런 것도 있고.

“그들은 언젠가 아름이를 이용하려고 할 겁니다.”

이게 제일 중요한 이유였다.

장로들은 언젠가 반드시,

박아름에게 해를 가하게 되어 있었다.

당연하게 박아름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인간들은 분명 박아름을 자기네들의 ‘소유물’로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나도 박아름을 이용하려는 입장에서, 조금 찔리긴 했지만 나는 이용 보다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뭐 그런.. 한설휘나 금석이나 정시아처럼 같이 간다는 느낌이랄까?

"선이라는 게 별 거 있나요.“

나는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내가 옳다고 느끼는 진실이나 믿음. 그게 선이죠. 성녀님이 천사도 아닌데 어떻게 ‘절대선’일 수가 있겠어요? 안 그래요? 제 말은 성녀님도 성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니까 성녀님만의 선을 행하라 이 말입니다. 사람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성녀님이 악을 선이라고 부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요.”

나는 오랜만에 이실장에게 문자를 보내기 위해 자판을 두드렸다. 오랜만에 연락이었지만 나는 바로 본론을 작성했다.

-치유협 장로회 뒷조사 좀. 사생활도 탈탈 털어주면 좋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곧바로 답장이 왔다.

-도련님..무사 하십니까?

-ㅇㅇ 이번 일 끝나면 집에 한 번 들릴게.

-도련님....ㅠㅠ 너무 무리 하지 마십시오. 사장님과 사모님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대견하다고는 말씀하시는데.. 그래도 장차 창조 그룹을 이끌 몸으로써..중략.. 말씀하신 내용은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양반.

20줄이 넘어가는 장문을 치는데 10초도 안 걸렸다. 기기 관련 능력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스피드였다.

“저는..”

고뇌와 번민의 굴레에 갇혀 있던 성녀의 표정이 결연하게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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