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회
광여제(光女帝).
일반 능력자는 수련과 노력을 통해,
실력이 서서히 상승 그래프를 그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정시아나, 한설휘처럼 천재의 범주에 속해 있는 능력자 같은 경우는 반칙처럼 점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특이 케이스도 있었다.
능력 각성이 남들보다 느린 대신,
각성만 하면 시작부터 완전체의 능력을 가지게 되는 케이스.
내가 알기로 이런 특이 케이스는 딱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세나였고.
한 명은 지금 나와 눈이 마주치고 있는 세나의 딸.
‘세리나.’
이 세계관에서 능력 하나만 놓고 따졌을 때,
가장 고평가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각성 후의 모습으로.
앳되고 10대 중반 같은 겉모습이, 20대 초중반은 될 것처럼 바뀌어 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언뜻 거리감도 느껴질 만도 했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거리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그녀의 생일은 아직까지 한 달여가 남았다.
아직 각성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미 이 세상과 세계관은 나비효과처럼 내 행동과 말 하나 하나로 인해 점점 미래가 불특정하게 바뀌고는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세리나의 각성이 앞 당겨질 줄이야.
‘첸의 죽음 때문인가.’
추측할 뿐이었지만,
첸의 죽음이 각성제 역할을 톡톡히 한 것 같았다.
나는 걱정이 됐다.
산모가 조기 출산시, 미숙아를 낳을 확률이 높은 것처럼 세리나의 조기 각성이 그녀의 능력치에 영향을 주진 않았을까 하는 그런 걱정.
광휘의 검이 지금 설치고 있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기는 한데.
나는 플라이를 시전 해,
세리나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으아아!!”
그때,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던 이강석이 거친 기함을 토해내며 입고 있던 상의를 양 손으로 찢었다.
맨살이 드러난 이강석의 몸은 물고기처럼,
검은 비늘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악마가 점점 그의 몸을 잠식해가는 과정이었다.
“우습게 보지마라..우습게..보지 말라고!!”
평소 그가 가지고 있던 내재적인 열등감이 폭발했다. 그나마 그의 모습에서 사람적인 구석을 찾자면 눈에 보이는 흰자였는데, 그마저도 검게 물들었다.
이강석 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강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인은 밥 힘이라는 말이 있듯이,
악마의 힘은 ‘분노’였다.
이강석이 분노하면 할수록,
그는 인간의 탈이 벗겨지고 악마에 가까워졌다.
당장 눈과 점점 비대해지는 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빨리 처리 안 하면 위험하겠는데.’
만월검을 허리춤에서 빼내며,
이강석과 강찬을 향해 도약을 하려고 할 때 세리나가 먼저 움직였다.
세리나를 향해 날아간 광휘의 검.
양 손으로 광휘의 검을 쥔 세리나가 작게 중얼거리며 광휘의 검을 허공에 한 차례 휘둘렀다.
“빛의 심판.”
오래 전, 비스트 마스터가 출현 했을 당시 세리나가 무의식중에 쓴 기술 이름이었다.
어둑어둑 해진 하늘이 개벽하듯이, 갈라지며 한 줄기 섬광과도 같은 하얀 거대한 빛 무리가 이강석과 강찬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사정거리 밖에 있던 나이트 길드원들의 몸이 산화액을 들이부은 것처럼 녹아내렸다.
역시 ‘어둠 속성’ 최강 카운터 ‘빛 속성’ 다운 파괴력이었다.
나는 들었던 만월검을 내리며,
이강석과 강찬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빛이 맹수처럼 휩쓸고 간 자리.
풀썩.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의 강찬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모습은 흡사 스켈레톤 같았다.
그의 옆에 있던 이강석.
그는 그나마 양호한 모습이었다.
양 팔을 들어 세리나의 공격을 막았는지,
양 팔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멀쩡해 보였다.
“크크..크..”
입가가 녹아내려, 턱이 아래로 내려앉은 이강석이 미친 이처럼 낮게 웃었다. 그의 턱으로 침이 흘러내렸다.
로봇처럼 삐그덕거리는 고개를 들어,
세리나를 쳐다보는 이강석.
“주..기..ㄴ..다.”
그 순간 바닥이던 이강석의 마나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며, 세리나를 향해 뻗어나갔다.
“보름달 가두기.”
나는 지체 없이 세리나를 보호하기 위해 초식을 시전 했다.
세리나는 스텟과 능력은 월등했지만,
아직 실전 경험이 전무 했다.
그래서 그녀는 상황이 종료 됐다고 생각을 하고 내 쪽으로 오려는 움직임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강석은 디아블로의 꼭두각시.
아니, 도구에 불과하다는 걸.
마지막까지 디아블로는 이강석이라는 도구로 세리나를 노리려고 했지만, 보름달에 막혀 수포로 돌아갔다.
회광반조처럼, 디아블로의 도움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운 이강석의 신형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잠시 후,
이강석을 비롯해, 악마의 씨앗을 먹은 이들의 몸이 산화하듯 연기와 함께 증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형 아몬드처럼 생긴 악마의 씨앗이 나타났다. 나는 일일이 달빛 마나를 이용해서 전부 파괴했다.
그리고 알렸다.
“상황 종료.”
+ + +
사당 외곽에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바이란과 레인저 길드의 도움으로 길드 전원 중상을 입은 사신 길드원들을 빠르게 부산으로 후송할 수 있었다.
사당 앞에 남아있는 건 나.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는 세리나밖에 없었다.
치유사가 신지수밖에 없던 탓에,
신지수 역시 후송대를 따라갔다.
이강석이나 강찬을 제외한 나이트 길드원들에게 당한 인원들은 그나마 신지수의 치유 능력이 미약하게나마 효과를 발휘하는 탓이었다.
[크하하! 이 몸을 잡아 보거라!]
광휘의 검이 허공을 어지럽게 떠돌았다.
크르릉!!
그 뒤를 레이가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뒤 쫒았다.
꼭 술래잡기를 하는 모양새였다.
위엄 있고 지엄 있는 말투와 행세하는 걸 좋아하는 광휘의 검이었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린 아이가 왕 놀이를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힐끔 세리나를 쳐다봤다,
공허해 보이기도 하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눈동자의 초점이 어느 것도 보려 하지 않는 것처럼,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신지수에게 듣기로는 각성한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아직 못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
각성 전과 후의 동기화 과정으로 인해,
버퍼링이 생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루아침에 모든 게 달라졌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하지만 이렇게 태평하게 앉아 있을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아직 파괴해야 할 게이트가 5개나 남아 있는 까닭이었다. 나이트 길드가 맡았던 5번 게이트. 그리고 다른 게이트에 비해 난이도가 높은 7번 게이트와 8,9번 게이트. 마지막으로 난이도가 헬에 가까운 10번 게이트까지.
클리어 시간을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게이트에 인접한 환경이 마계화가 진행이 됐다. 그 여파로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의 스펙이 올라갔다.
현재 게이트 클리어 속도는 전생과 비교했을 때, 비교가 불가능 할 정도로 빠르긴 했다. 하지만 나이트 길드와 나이트 길드가 악마의 열매를 먹고 죽인 능력자들의 숫자를 생각한다면 앞으로 진행 될 게이트 클리어 속도는 전생과 비교했을 때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시우는 잘하고 있으려나.’
게이트가 열리기 전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가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면 이번에 발생한 변수도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할 것 같긴 한데.
“내가..”
옆에서 꼼지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쳐다보니, 여전히 시선은 허공에 머물러 있었지만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서로 다른 손의 손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람을 죽인 거..지? 그치, 서진아?”
각성 전과 다르게 성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정적이던 눈꺼풀과 눈동자에도 가느다란 떨림이 있었다.
“마인이었어.”
나는 짧게 대답을 하며,
천방지축 뛰어놀고 있는 레이를 불러 들였다. 내 생각을 읽은 레이가 몸을 애완견처럼 작게 만들며, 세리나 품에 파고들었다.
효과가 있는지 그녀의 떨림이 잦아들었고, 천천히 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뒷말을 잇지 못하는 세리나.
각성을 했다고 해도 그녀의 머릿속은 각성 전의 세리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연약하고 심약한 어린 소녀. 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소녀 말이다.
그런 심성이 아니더라도, 살아생전 처음으로(비록 마인이었다고는 하나) 살생을 한 사람의 정신이 건강할 리가 없었다.
멘탈을 수습하는 데,
꽤나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세리나.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여유를 가질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일단 나랑 같이 가자. 여기 혼자 있으면 위험하니까.”
바이란 길드와 레인저 길드가 세리나라는 존재에 대해 인식을 했고, 그녀가 가진 파괴력을 먼발치에서나마 느꼈다.
그래서 그들이 후송대로서의 역할을 끝내는 순간, 세리나에 대한 사실과 소문. 혹은 과장이 일파만파 커지고 퍼질 예정이었다.
그 중심에 들어간다면, 분명 많은 이들이 세리나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을 드러낼 게 분명했다. 상황도 상황인지라, 당장 빛 능력자인 세리나를 전장에 합류시키려는 세력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디아블로가 세리나를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보호할 이도 마땅치 않고.
현재 그녀의 안전이 가장 보장 되는 곳은,
현세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 있는 곳.
지휘통제실의 이무신 협회장 옆이었다.
이무신 협회장이라면 디아블로의 마수와, 길드 관계자들. 혹은 기자들처럼 군침을 흘리는 이들을 전부 물러서게 할 수 있었다.
‘이무신 협회장은 믿을 수 있는 인간이기도 하고.’
나는 세리나를 향해 뻗은 손을 유지한 채,
그녀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5분 정도가 흘렀을까?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세리나. 본래 내 가슴팍에 머리가 닿았는데, 지금은 어깨보다 조금 위에 머리가 머물렀다.
“레이야, 조금만 더 고생해줘.”
크르릉.
내 말에 알아서 몸집을 키우며, 세리나에게 타라는 듯이 몸을 낮췄다.
“아, 잠시.”
포인트 상점을 열어, 머리끈을 사와서 세리나에게 내밀었다. 내 뜻을 알아차렸는지, 허리까지 자라난 머리카락을 묶는 세리나.
달릴 때, 긴 머리카락이 거슬릴 수도 있으니까.
“근데 서진아.”
레이에게 타려다가,
나를 쳐다보는 세리나.
“응?”
“지금 내 모습..”
새하얀 볼이 살짝 붉어지며,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녀.
“이상하진 않아?”
“....”
이상하긴.
존나 예쁜데.
+ + +
지휘통제실 옆에 위치한 회의실.
현재 그곳에는 이무신 협회장을 비롯해, 몇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두 얼굴에 피로감이 묵은 때처럼 찌들어 있었고, 툭 치면 욕이라도 할 것처럼 눈에 과하게 힘을 주고 있었다.
게이트가 발생한 후,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수면 시간은 모두 합쳐봐야 10시간도 되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일이 하나 터졌다.
그것도 수면 시간을 아예 없애기에 충분한 사건이라고 불릴 만한 일이.
“5번 게이트에 투입 됐던 인원 전부 전멸했습니다. 길드로 따지면 10개 길드이며, 인원수로 따지면 200명가량의 인원입니다.”
쾅!
“나이트 길드..이 새끼들..”
협회장 옆에 있던 비서의 브리핑에,
누군가가 책상을 손으로 가격했다.
아무도 그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처럼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지만, 생기가 거의 바닥이라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동조를 했다.
“악마의 열매를 먹은 나이트 길드 역시 전멸했습니다. 이로써 공격 2조의 남은 인원은 0명입니다. 그렇다 하여, 새로운 공격 조를 다시 편성할 수도 없습니다. 즉, 남은 게이트는 한태문 길드장님이 대장으로 있는 공격 1조와 설민호 길드장님이 대장으로 있는 공격3조가 도맡아야합니다.”
살짝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세우는 비서.
좌중을 스윽 훑어보며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후방조로 편성 됐던 사신 길드가 전력에서 제외 됐습니다. 이유는 다들 들어서 아실 거라고 믿습니다.”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어디 또 있을까?
이만하면 됐다는 듯이, 비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이무신 협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뒤이어 들린 협회장의 말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과장해서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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