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회
필멸자의 영혼
게이트를 지키는 문지기가 중간 보스라가 한다면,
코어를 지키는 지배자는 최종보스였다.
RPG 게임을 해 본 사람은,
알만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최종보스 근처에는,
중간 보스급의 몬스터가 즐비하다는 걸.
혹은 그 이상의 몬스터도 여럿 있다는 걸.
비단 게임뿐만 아니라,
현실도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하자.”
나는 질린다는 얼굴로 기둥 모양의 마정석 뒤로 등장하는 몬스터와 악마를 쳐다봤다.
게이트 밖에서 처리했던 문지기 급.
혹은 그 이상의 악마들.
‘저 놈은 상급 악마네.’
나는 견주처럼 언데드 몬스터에 목줄을 채우고, 잡고 있는 상급 악마를 쳐다봤다. 머리에 달린 세 개의 뿔이 녀석의 급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뿔의 크기가 작은 걸 보니.’
서열이 높은 악마 같지는 않았다.
‘상급 악마가 등장했다는 건, 리치 왕에게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뜻 같은데.’
나는 만월검을 고쳐 잡았다.
스테이지를 클리어 해가듯이,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건 좋지 않았다.
저 녀석들은 어차피 리치왕이 만들어낸,
시체들.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났다.
그나마 내가 달빛 속성이라 재생력이 더뎌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나는 시체들의 무덤에 초로 장식 될 운명이었다.
‘달빛 제 3초식. 달의 축복 2단계.’
여기까지 오기 위해 나는 이미 달의 축복 1단계를 시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템포를 더 끌어올리기로 했다.
“속전속결로 간다.”
주변은 신경 쓰지 않고,
경주마처럼 앞만 보기로 했다.
타앗!
지면을 발차며,
앞으로 달렸다.
‘달빛 제 1초식. 보름달 가르기.’
가로로 만월검을 한 차례 휘둘렀다.
쿠쿠쿵!
절단기처럼 악마와 몬스터의 몸을 가르며,
바닥에 박히는 반달.
폭이 30m정도는 돼 보일 정도로 광범히 하고 선명했다.
“제법..”
상급 악마라 그런지 멀쩡하진 않았지만,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상급 악마의 입에 만월검을 쑤셔 박았다. 허리의 반쯤이 잘려 나가고, 입에 관통 됐음에도 눈을 버젓이 뜨고 있는 상급 악마.
서걱.
수작을 부리기 전에,
머리통을 날렸다.
타타탓.
나는 빠르게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갔다.
+ + +
총 3만의 달빛력 중,
정확하게 절반을 소모했을 때.
“휴. 빡세네.”
도착했다.
리치왕의 알현실에.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알현실을 둘러봤다.
알현실 치고는, 축구를 해도 될 정도로 넓은 공간에 시야에 보이는 게 딱히 없었다.
“쫄따구는 더 없어? 너 혼자야?”
나는 만월검을 들어,
해골 의자에 앉아 있는 리치왕을 가리키며 말했다.
앉은키가 최소 4m는 돼 보이는 리치왕.
전체적인 인상착의는 붉은색 로브를 입고 있는 해골에 가까웠다. 해골 치고, 풍채가 대단하기는 했지만 해골은 해골이었다.
내 등장에도,
별 다른 움직임 없이 오시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리치왕.
오싹.
“....”
역시, 보스 몹이라 이건가.
눈만 마주쳤는데도 몸의 털이 도망가자고 아우성하는 느낌이 들었다.
대악마.
리치왕은 계급상으로 악마의 정점에 있는 악마였다.
리치왕 보다 더 강한 대악마도 꽤 존재했지만,
리치왕도 약한 편은 아니었다.
S급 헌터도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의 실력.
전생에서 리치왕을 사냥하기 위해,
S급 능력자 10명에 A급 능력자 30명 정도가 레이드에 나섰다.
결과는 인간의 승리긴 했지만,
생존자는 S급 능력자 단 세 명이 전부였다.
리치왕까지 도달할 때까지, 리치왕의 수하들에게 힘을 소진한 탓도 있었지만 리치왕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또한 전혀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리치왕이 전하는 위압감을 무시하며,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그거 나한테 넘길 생각 없어?”
나는 손가락으로 리치왕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가리켰다. 한 눈에 보기에는 나무로 만든 지팡이 같아 보였지만, 일반 지팡이가 아니었다.
지팡이의 머리 부분에 있는 투명한 수정.
저 안에 ‘필멸자의 영혼’이 들어 있었다.
내가 첫 타겟으로 1번 게이트를 삼은 이유였다.
“그것만 주면 얌전히..”
나는 씨익 웃었다.
“죽여줄 수 있는데.”
“....”
“과묵한 녀석이로세. 그래, 그럼. 한 판 붙던지.”
“..악마 보다 더 오만한 인간이로구나.”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인데?”
탕!
내가 깐죽거리는 걸 더는 들어줄 생각이 없는지, 지팡이로 땅을 한 번 찍는 리치왕.
스스스.
스으으.
알현실의 바닥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렇게는 안 되지.”
리치왕은 마법사과였고,
거기서 더 세분화 하면 네크로맨서였다.
녀석이 마음만 먹으면 망령들로 내게 접근조차 허락을 안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는 얘기는.
‘망령이 소환되기 전에 먼저 친다.’
아주 간단한 공략 방법이었다.
‘달의 축복 3단계. 월광쇄도.’
나는 버프를 끌어올리며,
앞으로 대시를 했다.
거리가 40m정도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 거리는 내게 코앞이나 다름없었다.
검은 연기를 돌파하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여기까지가 1차 공략이었고,
나는 2차 공략을 실행했다.
‘달의 축복. 4단계.’
리치왕은 내게 오만하다고 했다.
하지만, 진짜로 오만 한 건 내가 아니었다.
리치왕은 내가 이곳까지 당도 했다고는 하나,
인간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함은.
‘인간=약하다.’
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대시할 때 달의 축복을 3단계로 시전을 했다. 얕보이기 위해서.
코앞에 이르렀을 때.
바로 그 찰나의 순간에 힘과 속도에 가속을 붙이면.
제 아무리 리치왕이라고 해도 반응하기가 힘들지 않을까?
나는 몸이 부서질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주체할 수 없는 힘이 넘치는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아직 4단계를 감당하기에는 내 그릇이 작았지만, 잠깐 힘을 담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달빛 제 7초식. 달의 광휘.’
1:1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파괴적인 능력인 달의 광휘.
나는 빛이 휘몰아치는 속도로,
만월검을 휘둘렀다.
깡. 깡. 깡!!
단, 세 번 만에 리치왕이 급하게 시전한 배리어를 부쉈다.
다음으로 내가 부술 건,
리치왕의 거대한 해골 머리였다.
탁!
첫 시도는 리치왕이 팔을 들어 막아서,
막혔다.
하지만 괜찮았다.
리치왕의 오른팔이 강냉이가 쏟아지듯,
뼛조각이 분해되며 바닥에 떨어졌으니까.
탁!
두 번째 시도는 성공이었다.
만월검은 정확히 리치왕의 머리에 닿았고,
해골 머리가 터지듯 뼛조각이 사방에 휘날렸다.
목적은 달성했으나,
목표는 실패였다.
‘빠르네.’
리치왕에게는 심장이 하나 있었다. 리치왕을 죽이기 위해서는 심장을 없애야하는데, 내 기억 상으로 리치왕은 머리에 심장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머리를 노린 건데.
심장은 머리에 없었다.
찰나의 순간에 다른 곳으로 옮긴 것 같았다.
‘온 몸을 두들기면 심장이 드러나겠지.’
나는 재빨리 만월검으로 리치왕의 다른 신체 부위를 공격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스으윽.
검은 연기에 감싸이는 리치왕.
“인간의 수준이 아니군.”
연기와 함께 사라진 리치왕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뒤로 돌았다.
20m정도 거리에 한쪽 팔과, 머리가 없는 리치왕이 서 있었다.
‘텔레포트를 한 건가. 귀찮게, 됐네.’
첫 페이즈가 실패로 돌아갔고,
두 번째 페이즈가 시작되게 생겼다.
‘이러면 난이도가 급격하게 상승하는데.’
나는 일단,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뼛조각을 달빛으로 없앴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뼛조각이 리치왕에게 돌아갈 테니까.
아무리 신체가 껍데기라고는 해도, 양 팔 보다는 외팔이 상대하는 입장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양호했다.
그리고,
머리 없는 모습이 보기 좋기도 하고.
“너 같은 인간이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리치왕의 몸이 좌우로 미세하게 움직였다.
머리가 있었다면 고개를 갸웃했지 않을까?
“내 하수인이 돼라. 그럼 영원한 안식을 선사해주도록 하지. 너 정도로 강한 인간이라니.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겠어.”
“죽어서 실험체가 되라는 소리를 왜 그렇게 길게 해?”
“특별히 내 측근으로 배치시켜 주겠다.”
“저기요.”
“인간 따위가, 나. 리치왕의 하수인이 된다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지. 그렇고말고.”
“이봐요.”
“그래, 늑대 새끼도 데리고 있는 모양인데 내 특별히 그 녀석까지 하수인으로 만들어 주겠다. 늑대 새끼는 문지기로 쓰면 되겠군.”
“..남의 말 더럽게 안 듣는 스타일이네.”
“어서 대답해라. 난 인자한 리치왕. 5초의 시간을 주겠다.”
인자한데,
5초라.
악마와 인간의 갭 차이가 상당히 크지 않을 수 없었다.
“5초도 길어. 1초로 해.”
나는 리치왕에게 달려들었다.
“신선한 상태로 하수인을 만들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군. 어느 정도의 훼손은 감수해야겠어.”
“개소리 좀 작작해라. 해골 새끼야!”
나는 만월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 + +
“시..발..”
나는 욕을 내 뱉으며,
마나 포션과 체력 포션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 옆으로,
빈 병 수 십 개가 뒹굴어 다녔다.
“후..”
나는 포인트 상점에 대자로 누웠다.
옆에는 레이가 아직까지 곤히 잠들어 있었다.
포인트 상점이라는 휴식처가 없었으면,
나는 진즉 리치왕에게 영혼을 적출 당했을지도 몰랐다.
2페이즈였던 시나리오가,
15페이즈까지 넘어갔다.
거의 리치왕의 공격 수단과 방법이 최종단계까지 진행 됐다는 뜻이었다. 초장에 끝내야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장기전을 하고 있으니.
“존나 흥분 했던데.”
5페이즈부터 점점 흥분하던 리치왕.
10페이즈 들어서면서부터 이성을 잃어갔다.
15페이즈에 이르러서는 거의 나를 부모의 원수로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달빛력은 왜 이렇게 안 차는 거야?”
마나 포션을 비싼 걸로 드링킹 했는데,
효과가 미비했다.
현재 내가 가진 달빛력은,
기존치보다 3분의 2가 적은 1만.
달의 축복 4단계를 시전하고,
몇 번 능력을 사용하면 전부 고갈이 될 양이었다.
“딱 5천만 더 채우고 나가야겠네.”
내가 회복 하는 시간을 가지면,
리치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껏 체력과 마나를 빼 놨는데,
전부 회복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레이를 쳐다봤다.
“잘 자네.”
깨울까도 여러 번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든데,
만약 레이가 위험해지면 도와줄 수가 없었다.
“딱 한 번만, 더 해보고 깨우던가 해야겠다.”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15페이즈.
전생에서 리치왕을 잡기 위한 레이드 파티가 레이드 성공한 페이즈였다.
만약 다음 페이즈가 있다면?
만약 다음 페이즈로 넘어가게 된다면?
내게는 정보가 없었다.
15페이즈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정보의 전부였다.
지금도 잡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데,
16페이즈로 넘어가면 게임 오버였다.
“사활을 걸어야겠네, 이번에.”
정 안되면, ‘필멸자의 영혼’을 포기하고 게이트 코어를 파괴하는 쪽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게이트의 지배자를 처리하지 않아도 됐다.
코어만 파괴하면 미션 클리어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지배자를 무시하고 코어를 깨는 게 미션임파셔블이라 그렇지, 가능하다면 코어만 깨고 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10일 정도 지났던데.’
나는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아까 현재 밖의 시간을 확인했더니 내가 게이트에 들어 온지 10일이 지나 있었다.
일주일 정도 생각했는데,
시간이 꽤 오바가 됐다.
‘다른 조는 잘 하고 있으려나.’
정보 방에서 검색을 해보려다가,
관뒀다.
알아봤자 내가 도움을 주거나, 받을 수도 없는 입장이라 괜히 포인트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예상치 못한 포션값 지출에 아까워 죽겠는데.
“후우우..”
크게 숨을 들이 마시고 뱉었다.
내가 웬만해서는 비장의 무기는 안 꺼내려고 했는데.
써야할 때인 것 같았다.
‘10초식’
독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내 마지막 초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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