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회
학교 대항전
이제 3주차에 마지막 한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어쩌면 결승전 보다 더한 관심이 쏠려있는 3,4위전.
한설휘와 정시아.
정시아 대 한설휘.
두 사람은 혼자이나,
혼자가 아니었다.
사신 길드와 태양 길드.
배후에는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길드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경기를 보며 두 사람이 속해 있는 길드의 미래를 점칠지도 몰랐다.
아직 너무나도 섣부르고, 그 날이 오려면 너무나도 멀었지만 항간에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차기 길드장끼리의 대결이라고.
나도 그 부분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했다.
내가 아는 미래에는 두 사람이 그 위치까지 올라갔으니까. 지금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잘은 모르겠다.
어쨌든.
나 역시 흥미롭게 경기장 위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한설휘와 정시아를 쳐다봤다. 학교 대항전에서 두 사람이 보여준 퍼포먼스와 가진 능력을 생각 했을 때, 나는 한설휘의 우세를 점쳤다.
뿐만 아니라,
나는 두 사람의 스텟을 볼 수가 있었다.
스텟상으로도 한설휘가 정시아보다 조금이지만 우위에 서 있었다.
‘하지만 정시아라면..’
혹시 모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군으로 따지면 암살자와 마법사의 싸움.
그것도 제한 된 경기장에서.
정시아가 잘만 파고들면,
그녀에게도 이길 여지가 충분하지 않을까?
만약, 한설휘가 류진과 경기를 할 때처럼 대놓고 불의 장막을 세워버리고 접근을 차단해버리면 승산이 거의 없어질 것 같기는 했다.
“제발 두 사람 다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름아, 우리 같이 기도하자.”
강소라가 박아름의 손을 잡고 눈을 꼭 감았다.
강소라는 중립 기어를 박았고.
박아름은 딱히 누가 이기든 개의치 않는 것 같고.
나는 금석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찔렀다.
찌릿.
방금 나와 경기를 끝낸터라,
나를 보는 시선이 상당히 날카로웠다.
보통 결승전 보다, 3,4위전을 먼저 치르는 게 일반적인 경기 순서였지만 어제 정시아가 한 발언 때문에 경기 순서가 바뀌었다.
‘기권이요.‘
정시아는 몸이 성치 않다는 이유로 B조 결승전을 포기했다. 거짓말이기는 했지만, 주최 측은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래서 나와 금석의 동의하에,
경기 순서를 바꿨다.
오늘도 정시아가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기권을 하면 곤란 했으니까. 최대한 편의를 봐준 셈이다.
“누가 이길 것 같아?”
“할멈.”
내 물음에 시크하게 대답을 하고 경기장을 쳐다보는 금석. 금석이 말하는 할멈은 한설휘였다.
“이유는?”
“뱀이 불을 어떻게 이기냐? 안 타 죽으면 다행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알렸다.
과연 뱀은 타 죽을까,
아니면 불을 삼켜 버릴까?
타타탓-!
경기 시작과 함께 정시아가 한설휘를 향해 달렸다. 정시아가 한설휘 보다 우위에 있는 건 기동력이었다.
‘뱀의 움직임.’
원거리 싸움 보다는 근거리 싸움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걸 잘 인지를 하고 있는 정시아였고, 빠르게 접근을 시도하던 정시아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졌다.
아이템 박람회에서 만물상에게 받은 ‘캐스퍼의 귀걸이’ 효과였다.
은신.
하지만 내가 가진 절대 은신 능력이 아닌,
일반적인 은신 기술이었다.
모습은 사라졌지만,
한설휘 정도의 마나 탐지력을 가지고 있으면 마나로 정시아의 위치를 알 수가 있었다.
화아악!
역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화염구를 날리기 시작한 한설휘. 화염구 위치가 점점 자신과 가까운 쪽으로 변해갔다.
화르륵!
염옥을 시전한 한설휘.
그녀의 주변으로 불의 장막이 보호하듯 에워쌌다.
정시아에게 떨어진 첫 번째 퀘스트였다.
-한설휘의 ‘염옥’을 뚫어라.
결국 염옥을 뚫지 못하면 접근을 했다고 해도, 공격할 길이 없었다.
사아아!
갑자기 경기장 내부에 강한 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바람은 한설휘의 염옥도 휘청이게 할 만큼 강했다.
“저게 저렇게 좋은 아이템이었나..?”
경기를 지켜보던 강소라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야?”
혼잣말을 캐치한 내가 물었다.
“아, 그게.. 어제 밤에 시아가 나한테 아이템 좀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줬거든. 바람 계열 아이템인데..보시다시피 바람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는 아이템이야. 근데 내가 사용했을 때는 저렇게 효과가 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이템이 지혜 스텟에 영향 받는 거 아니야?”
“아..”
나한테서 뼈를 얻어맞은 강소라가,
빨개진 얼굴로 경기장을 쳐다봤다.
정시아의 지혜 스텟은 한설휘에 미치진 못했지만, 한설휘와 근접한 스텟을 보유하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 염옥을 한 꺼풀 벗겨냈고,
한설휘의 모습이 찰나적으로 드러났다.
정시아에게 두 번째 퀘스트가 도착했다.
-한설휘의 본체를 공격해, 치명상을 입혀라.
정시아는 뱀 능력자였고,
뱀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뱀이 입을 벌리듯,
단검을 치켜든 정시아.
염옥 사이로 드러난 한설휘를 향해,
단검을 찔러 넣었다.
“소각.”
한설휘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대포.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몸을 낮추는 정시아.
이대로라면 퀘스트 성공이었다.
“화염의 인도자. 장작 태우기.”
손으로 정시아의 손을 옆으로 밀치며,
능력을 시전하는 한설휘.
아쉽게 공격을 실패한 정시아가 거리를 벌리며,
몸에 붙은 불을 자신의 마나로 밀어냈다.
한설휘의 근력 스텟과 민첩 스텟이 조금만 낮았어도, 한설휘는 지금쯤 피를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을지도 몰랐다.
한설휘의 스텟은 예쁜 육각형을 그리고 있는 능력자였고, 다른 속성 계열 능력자처럼 지혜 스텟에 스텟이 몰빵 돼 있지 않았다.
만약 한설휘가 아닌 다른 속성 능력자였으면,
100% 당해도 무방했다.
‘시도는 좋았는데.’
수포로 돌아갔다.
암살자 계열은 한 번 한 번의 공격이 되게 중요했고, 지금처럼 실패하게 되면 리턴 값이 너무 컸다.
일격필살의 느낌이 강했다.
암살자는.
실제로 정시아는 가지고 있던 패를 거의 다 오픈 했다.
은신. 바람 아이템.
허를 찌를 만한 패가 모두 사라졌다.
나는 정시아의 표정을 살폈다.
별 다른 동요가 없었다.
‘다른 수가 있는 건가?’
아니면 없는데 있는 척을 하는 건가.
정시아의 한 번의 노림수 이후,
공방의 우위가 확실히 한설휘 쪽으로 넘어갔다.
한설휘 공격.
정시아 방어.
중간 중간 정시아가 한설휘의 빈틈을 노리고 몇 번 공격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별 다른 소득이 없었다.
“끝났네.”
“저런 불의 화신 같은 여자를 손쉽게 제압한 서진은 대체..”
“동감. 서진은 도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S급 아니야?”
“에이. 그래도 아직 학생인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이 양반아.”
경기의 논지와는 다른 말들이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경기를 지켜봤다.
끝났다라고 생각하기에는,
정시아의 표정에 아직 여유가 있었다.
‘소모전을 하는 건가?’
상대적으로 기동력이 빠르니, 기동력을 통해 상대방의 마나를 계속해서 소모시키는 것도 방법이었다.
정시아가 하고 있는 모든 방법은,
일반 마법사들을 상대할 때는 모두 먹히는 방법이었다.
마나가 없는 마법사는 그야말로 기름 없는 자동차와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한설휘는 무한 연료에 가까운 피닉스가 있지 않은가?
오히려 소모전은 정시아에게 불리했다.
“킹 코브라.”
짧게 중얼거리는 정시아.
사방에 역병처럼 퍼져 있는 불구덩이를 뚫고 킹 코브라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는 대략 건물 3층 높이 정도.
폴짝.
제 자리 점프를 한 정시아.
킹 코브라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입을 닫은 킹 코브라.
세우고 있던 상체를 바닥에 눕히고,
한설휘를 향해 미끄러지듯이 이동했다.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불세례를 선사하는 한설휘. 킹 코브라의 표피와 가죽이 빠르게 녹아내렸다.
제 기능을 잃을 때쯤,
새로운 킹 코브라를 소환해,
갈아타는 정시아.
5마리 정도가 불에 녹아 없어졌을 때,
킹 코브라는 한설휘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뱀의 공격 수단에는 몇 가지가 있었다.
아가리. 혹은 긴 몸통으로 조인다던지, 아니면 꼬리로 공격한다던지.
한설휘를 몸으로 조일 생각인지 한설휘를 중심으로 똬리를 틀기 시작한 킹 코브라. 이번에도 한설휘는 킹 코브라를 녹여 없애려고 했다.
헌데, 이게 웬걸?
이전과는 달리 킹 코브라가 화염에 전혀 끄떡이 없었다.
내성이라도 생긴 걸까?
살짝 당황한 한설휘.
우선적으로 정시아가 있을 킹 코브라의 입 쪽으로 화염구를 날렸다. 그러면서 몸을 이동하려고 했는데.
푸하악!
입이 아닌,
킹 코브라의 몸통을 찢고 나온 정시아.
“체크 메이트.”
한설휘의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대며 씨익 웃었다.
‘대단한 년.’
좋은 의미로.
정시아는 유우리와 싸울 때부터, 계속 광고를 했다. 킹 코브라의 맷집은 형편없다고. 하지만 그녀는 말했다.
미끼라고.
한설휘가 방심을 하기는 했지만,
정시아는 월척을 낚고야 말았다.
+ + +
본 게임은 모두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건 4주차의 이벤트 경기들 뿐.
사실상 경기라고 하기 보다는 4주차는 축제였고, 행사에 가까웠다.
학교 대항전에 참가한 선수뿐만 아니라,
일반 능력자나 일반인들도 참여를 할 수 있었다.
학교 대항전 점수가 걸린 몇 몇 종목이 있기는 했지만, 크지 않았다. 대부분 종목이 개별적인 상금이나 상품을 걸고 치러졌다.
공기 소총으로 풍선을 많이 터트리면 인형을 선물로 주는 것처럼.
총 50개가 넘는 종목이 있었고, 각 팀은 최소한 10개 이상의 종목만 참가를 하면 페널티가 없었다.
우리 팀 같이 1위를 확정 지은 팀이 혹시나 아무 종목도 참가를 안 할까봐 생긴 룰이었다.
“이거 재밌겠다!”
“이것도!”
“이거 1등하면 민첩 스텟 올려주는 머리핀 주는데?!”
남자 방에 모여,
다 같이 팜플렛을 보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한창 신이 나 있었지만, 반대로 나나 금석은 시큰둥하게 여자애들의 반응을 쳐다봤다.
금석은 귀찮은 게 분명하고,
나는 딱히 탐나는 상품이 없었다.
상품의 대다수가 아이템이었는데,
등급이 높아봐야 B급이 최대였다.
그 정도 선은 아버지의 카드를 이용해서 셀 수도 없이 구매가 가능했다.
“너희들은 어떤 거 나갈 거야?”
조잘조잘 떠들고 있던 강소라가 우리 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자연스레 다른 여자애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귀찮다.”
고개를 돌린 금석.
“나도 딱히 끌리는 게 없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쳐다봤다.
“흐으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그러게.”
눈빛을 교환하는 여자 애들.
“우리가 정해주자.”
“그래!”
“아무래도 금석은 ‘격파’ 종목이 괜찮지 않을까? 아, 그리고 ‘많이 먹기 대회’도 괜찮을 것 같은데?”
“서진은..헐. 얘들아, 이거 봤어?”
“뭐?”
“‘S급 얼굴 대회’라고 있는데?”
“미스코리아 대회랑 다른 거야?”
“응. 이거는 남자만 참가 가능이라 적혀있어.”
불길하다, 불길해.
“나 레이 산책 좀 시키고 올게.”
“나도 뚜뚜 산책좀.”
나와 금석은 빠르게 장소를 이탈했다.
+ + +
“야, 석아.”
“왜?”
해가 내려앉은 학교 내의 공원.
본 경기가 모두 끝이 나서인지, 많은 학생들이 긴장이 풀린 얼굴로 산책을 하거나 여유롭게 여름날의 밤을 만끽하고 있었다.
“잠깐, 앉았다가 가자.”
“....”
나는 앞에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뚜뚜와 레이는 공원을 뛰어 놀고 있었는데, 소형화 크기라서 사람들이 귀여워만 할 뿐 위협은 전혀 느끼질 않았다.
뚜뚜는 강아지라 그런지 손을 내미는 사람들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레이는 늑대라 그런지 새침하게 요리조리 손길을 피해 다녔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평화로운 풍경이 눈을 간지럽혔다.
“대회 끝나면 갈 거야?”
“어딜?”
“울릉도로.”
“....”
금석의 표정이 손으로 쥔 종이처럼,
단박에 와락 구겨졌다.
그러다 서서히 종이를 정성스럽게 피는 중인지, 인상을 푸는 금석. 하지만 한 번 구겨진 종이는 펴봤자, 구김이 남아 있었다.
“지옥이다. 그 곳은.”
대충 듣기는 했다.
잠들기 전에 간간히.
울릉도의 생활이 어땠는지.
하지만 그 보다 더한 악몽이 앞날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금석은 지금 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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