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회
만물상의 합류
"오빠, 몸은 괜찮아요?“
“내 스텟 중 유일한 A등급이 체력이야.”
만물상은 눈에 보이는 곳에만 해도 붕대를 여러 군데 칭칭 감고 있었다.
채린의 걱정에 만물상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말과는 달리 만물상의 미간은 아까부터 쭉 찡그린 채였다.
식은땀도 흘리고 있었다.
“더워서 그래, 더워서.”
아무리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약한 모습 보여주기 싫다고는 해도 만물상은 지금 굉장히 앉아있는 게 불편할 정도로 아파보였다.
채린이 위험하다는 내 문자에 병원에서 버선발로 뛰쳐나왔으니.
“오빠 근데 회의실에서 한 얘기. 무슨 말이에요?”
“응?”
“오빠가 아이템을 들고튀었느니, 빌런의 표적이 오빠라느니 하는 얘기 말이에요. 그리고. 어떻게 그 말이 진실일 수가 있어요?”
모든 전말은 내 머릿속에 나왔다.
레볼루션에 대한 정보를 숨기기 위해.
“전자는 저 꼬맹이한테 물어보고. 후자 같은 경우에는.”
품에서 피노키오 목각 인형을 꺼내는 만물상.
“이 아이템 덕분이지. 거짓말에 거짓말은 뭐다? 진실이다~ 이게 보기에는 이래보여도 무려 SS급 아이템이라고.”
만물상이 턱을 치켜세우며 허세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SS급 아이템은 세계적으로 100개도 존재하지 않았다.
만물상이 허세를 부릴 만도 했다.
“만물상 형이 안 나섰으면 그 회의는 안 끝났을 겁니다.”
아니면 레볼루션의 소행이라고 밝혀야 했거나.
“아니, 그래도..”
만물상을 쳐다보는 채린.
그녀의 심정이 복잡해 보였다.
“강제 추방이라니..오빠 저 때문에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정 미안하면 나중에 사우나나 같이 가던지.”
“..네?”
“사바나. 말이 헛 나왔네. 사바나 가자는 말이었어. 사우나는 무슨. 더워 죽겠구만.”
“사바나가 더 더울 것 같은데요, 오빠?”
“아, 뜨뜨.”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 갑자기 혀가 데인 것처럼 연기를 하는 만물상.
혓바닥을 낼름거리면서 나와 채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정산해야지.”
“네?”
“예?”
“정산. 정산 뜻 몰라? 내가 너희들 맨 입으로 도와준 줄 알아? 이 사람들 보게.”
채린이 얼빠진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채린을 좋아하는 마음.
그 마음 때문에 도와준 줄 알았다.
하지만 만물상은 만물상이었다.
“내가 아무리 세계 각국을 돌아다닌다고는 해도 한동안 한국에 못 오는 건 타격이 크다고. 그리고 만약에 그 놈이 영영 안 잡히기라도 하면 나는 ‘영구 추방’인 셈인데. 허허~”
만물상이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 줘봐.”
채린에게 손을 내미는 만물상.
순순히 만물상에게 손을 내미는 채린.
채린의 손을 잡은 만물상이 가만히 눈을 감고 몇 초 동안 있었다.
“오빠, 뭐해요?”
“가만히 있어. 할인 행사 중이니까.”
“....”
나는 아이스티를 마시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손잡고 있는 모습을 보니,
썩 그림이 나쁘지 않았다.
“오케이.”
눈을 뜬 만물상.
아쉬운 얼굴로 채린의 손을 놓았다.
“뭐..한 거예요?
“방금 말했잖아? 할인 행사 했다고. 원래 여러 개 물어볼 예정이었는데, 딱 한 개만 물어볼게. 이 정도면 할인 엄청 된 건 줄 알아.”
별 얘기 아니라는 듯 자신의 커피를 쪽쪽 빠는 만물상.
툭 던지는 말했다.
“나 끼워줄 거야 말거야.”
“....”
“....”
“내 생각에는 이제 어느 정도 한 배를 탄 것 같은데. 내 착각인 건가? 방금 회의실에서 노 좀 빡세게 저었는데, 부족해?”
만물상이 나와 같은 편에 서서,
조력자가 된다?
이미 충분히 조력자 같은 느낌이 나기는 하지만 대놓고 합류하는 건 얘기가 달랐다.
한 번도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지만, 만물상이 만약 합류 한다고 치면 아이템 걱정은 이제 아예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물상의 합류는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채린은 아닌 모양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돼요.”
단호하게 말하는 채린.
“왜?”
“오빠 죽을 뻔 한 거 벌써 잊었어요?”
“헌터 일이 원래 목숨 내놓고 하는 일이잖아. 서진아, 안 그러냐?”
내 표정이 긍정적이어서 그런지 내게 동조를 구하는 만물상.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채린의 표정을 보고, 레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딴청을 부렸다.
“좋아, 그럼 들어보고 결정할게. 말해봐. 어제 그 놈은 도대체 뭐고 너희가 탄 배는 어딜 향해 가는지.”
팔짱을 끼며 나를 쳐다보는 만물상.
고개를 미세하게 옆으로 흔들며 나를 쳐다보는 채린.
“형. 입 무거워요?”
“읍..읍..”
내 말에 입을 닫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만물상.
“서진씨.”
채린이 하지 말라는 듯이 나를 불렀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괜히 만물상을 사지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을까봐 걱정이 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만물상이 만약 합류를 하게 되면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의 생존 가능성이 대폭은 아니더라도 눈에 보일만큼 상승할 게 분명했다.
만물상의 아이템은 충분히 우리를 더 강하게.
그리고 더 안전하게 만들어줄 게 분명했다.
스스로 우리와 함께하고 싶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되도록 외부에 세어나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신용하면 나 만물상이지.”
“그럼.”
나는 천천히 레볼루션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딱 채린과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정도까지.
모든 얘기를 들은 만물상이 기가 찬 얼굴로 말을 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어제 그 놈 같이 무지막지한 놈이 더 있다고? 그것도 더 센 놈들이?”
“예.”
“어제 그놈만 해도 세계 랭커 10위 안에는 거뜬히 들 것 같더만. 허허.”
커피 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기는 만물상.
“포기해.”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는 만물상.
“너희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놈들을 대적하냐? 차라리 세계 헌터 연맹에 말하고 힘을 보태달라고 해.”
“....”
만물상의 말은 제 3자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말이었다.
“근데 그 꼬장꼬장한 사람들이 오케이하고 바로 힘을 보태줄 것 같지는 않고.”
머리를 긁적이는 만물상.
힐끗 채린을 쳐다봤다.
채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커피 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 너희 배가 무슨 해적이라도 잡는 줄 알았지. 근데 해적 섬 하나를 통째로 잡으려고 할 줄이야.”
만물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보세요. 무리라고요. 무리. 절대 무리.”
지금은 그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면 달라질 가능성이 있었고, 내가 기필코 달라질 가능성의 확률을 올릴 계획이었다.
“표정들이 왜 그래? 왜 쓸데없이 비장해? 어디 전쟁 나가?”
채린과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만물상이 코끝은 찡그렸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이마를 닦는 만물상.
내 아이스티를 가져가,
입에 왈칵 쏟아 넣었다.
아그작. 아그작.
얼음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대단히 불만스럽게 들렸다.
“된장은 딱 보면 된장인거야. 근데 굳이 왜 먹어보려고 안달이냐고!”
쾅!
얼음을 꿀떡 삼킨 만물상이 테이블을 양 손으로 가격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뭐라고 말 좀 해봐. 내 말이 틀려? 내 귀에는 너희들이 못 죽어서 안달인 것처럼 들리는데. 아니야?”
만물상은 지금 감정이 과잉 상태였다.
그는 대체로 감정 컨트롤을 잘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과잉 상태라니.
이건 아무래도 채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스스로 위험을 자처하겠다는데, 어떻게 마음이 평온할 수 있을까.
“채리나가 죽는 순간 제 길은 정해졌어요, 오빠.”
채린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어금니를 깨물며 나를 쳐다보는 만물상.
“저 역시 채린씨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자식들이..”
굳이 계산기를 두드려보지 않아도 만물상은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우리한테 합류한다는 건 적자 중에 적자라는 사실을.
적자 수준이 아니라 기부. 혹은 퍼주는 격이었다.
“아..아..”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다리를 떨기 시작하는 만물상.
갑자기 반색하며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그걸 안 물어봤네! 그 정도의 결의와 결심이면 같이 하는 녀석들은 꽤 머릿수가 많거나 대단한 녀석들이겠지?”
동료를 물어보는 것 같은데.
만물상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것 같았다.
“제 친구들 몇 명 정도요.”
내 대답에 만물상이 눈으로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크게 떴다.
“저는 딱히.. 저희 길드를 레볼루션 일에 끌어들이는 건 싫어서..”
만물상이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할 말이 없다.”
자리에서 일어난 만물상이 뒤를 돌았다.
“나 간다.”
단출한 인사를 남기고 카페를 나가는 만물상.
나를 쳐다보는 채린.
“원래 다른 사람 일에 신경을 안 쓰는 사람인데. 왜 저렇게 뿔이 났을까요?
“....”
이 여자 둔한 건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가.
“다행이에요. 혹시나 만물상 오빠가 같이 하자고 했으면 마음이 되게 불편했을 텐데..”
“어제 만물상 형이 다쳐서 더 신경 쓰이는 거죠?”
“..네. 아무래도 저 때문에 다쳤으..오빠?”
언제 다시 들어왔는지 우리 옆에 나타난 만물상.
씩씩거리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내가 진짜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 안한다는 마인드인데.”
깊게 숨을 들이 쉰 만물상.
“같이 하자, 같이 해. 대신 위험하면 나는 발을 바로 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진짜 간다. 아오~”
다시 카페를 나가는 만물상.
“....”
“....”
채린과 나는 눈빛을 교환했다.
나는 쾌재를 불렀고,
채린은 복잡한 얼굴을 내비쳤다.
+ + +
“호오.”
첸이 흥미로운 얼굴로 레이를 쳐다봤다.
레이와 장난치고 있는 세리나.
나는 현재 첸의 집에 와 있었다.
잠깐 얼굴이나 보려고 들렀는데,
얼떨결에 앉아서 저녁을 같이 먹고 있는 중이었다.
“산 정상에 은빛 늑대 서식지가 있었을 줄이야. 껄껄.”
오랜만에 듣는 첸의 웃음소리.
“간지러워!”
오랜만에 듣는 세리나의 목소리.
고작 한 달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았지만,
뭔가 체감 상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밥 먹다 말고 레이와 장난치고 있는 세리나를 쳐다봤다.
여전히 작고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는, 내가 알고 있는 그녀였다.
‘저 모습도 이제 조만간..’
“근데 달빛 늑대라고 하지 않았느냐? 근데 몸집이 어째..”
“레이.”
첸의 의문에 나는 레이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부르자마자 작은 크기에서 몸집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레이.
“어..어..?”
갑자기 커진 레이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세리나.
“저 상태로 데리고 다니니까 사람들 시선이 곱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크기 변환 아이템 하나 샀죠.”
“그랬더냐, 껄껄.”
작은 레이도 마음에 들었지만,
커진 레이도 마음에 드는지 의자에서 일어나서 레이의 목을 끌어안는 세리나.
크르르.
장난치듯 목을 좌우로 가볍게 흔드는 레이.
“레이. 세리나 데리고 잠깐 밖에 산책 하고 와.”
크릉?(그래도 돼?)
“응. 여기 뒤에 바로 산이라서 시내로만 안 나가면 괜찮을거야.”
크르릉.(알겠어.)
“세리나 갔다 와.”
“응!”
세리나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고,
등에 태운 레이.
마치 사람처럼 현관으로 걸어가더니 앞발로 자연스레 문을 열었다.
사람이 늑대 가면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레이는 자연스럽게 세리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나는 현관이 닫히는 걸 보며 고개를 돌려 첸을 쳐다봤다.
“어르신.”
“왜 그러느냐?”
왜 그러기는.
아까부터 계속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으면서.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가 말하기 편하게 가볍게 화두를 던졌다.
“무슨 일은. 껄껄.”
“....”
‘내 착각이었나?’
나는 된장찌개를 떠서 입에 넣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첸은 요리를 잘했다.
“요즘 리나가 도통 기운이 없었거든. 밖에 나가려고도 하질 않고. 오랜만에 보는구나. 저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껄껄.”
“그렇습니까?”
“그렇단다. 요즘 들어 일주일에 한 번씩 성장통이 계속 되고 있는 모양이야. 악몽도 자주 꾸고.”
“....”
어쩐지.
동글동글하던 세리나의 얼굴이 수척해진 것 같더라니.
나는 말없이 된장찌개를 한 수저 다시 입에 넣었다.
“서진아.”
“예.”
나를 부르는 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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