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회
만물상의 순애보
그에게서 오늘도 답장이 없다.
방학이 시작되고 그에게 종종 연락을 했지만,
일이 많이 바쁜지 읽고 씹는 게 다반사였다.
어제 보낸 문자도 읽고 씹었다.
“....”
사신 길드의 길드장, 채린.
그녀는 의자에 몸을 깊숙하게 파묻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
이상하리만큼 드는 위화감.
이유가 뭘까.
그가 연락이 안돼서?
아니면 박쥐가 연락이 안돼서?
둘 다다.
레볼루션에 밀접한 두 사람이 연락두절 상태.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 별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 별 일이 안 일어날지도 모른다.
‘내가 예민할 거일 수도.’
채린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이 자리까지 올라오며 채린의 목숨을 여러 번 살렸던 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감이 틀릴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감이었으니까.
채린은 예언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감이 강력하게 경고할 때는 대체로 맞는 편이었다.
‘곧, 학교 대항전이 시작하니까..’
서진이 돌아온다.
조금만 기다리면 서진이..
끼익.
“이 새끼, 지금 나랑 밀당하는 거 맞지?”
오라는 서진은 안 오고, 일주일 전부터 사신 길드에서 무전취식을 하고 있는 남자가 상당히 화가 나 있는 얼굴로 길드장실에 들어왔다.
목적은 달랐지만,
저 남자와 채린이 기다리는 남자는 동일인물 이었다.
세계 랭킹 25위, 만물상.
신경질적인 발걸음으로 길드장실을 돌아다니며 누군가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이것 봐라. 거래의 생명은 ‘약속’인 걸 모르나본데. 만나기만 하면 내가 단단히 버릇을 고쳐줘야겠어.”
“오빠.”
“응?”
“편한 호텔 나두고 왜 자꾸 저희 길드에 계시는 거예요?”
“....”
채린은 진짜 그 이유가 궁금했다.
‘돈도 세계적으로 많은 인간이.’
도대체 왜.
자신의 길드에서 밥을 축내고 있는 걸까.
“진짜 몰라서 물어?”
만물상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물어보지도 않았다.
채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만물상.
입술에 침을 바르고 오물오물거리는 것처럼 달싹이다가 이내, 씨익 웃었다.
“여기 밥 맛있잖아.”
“....”
채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 저녁을 같이 먹을 때까지만 해도 이게 반찬이냐며 주방 이모랑 대판 싸우려는 걸 겨우 말렸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그리고 너도 있고.”
또 저 소리.
채린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놓았던 펜을 잡았다.
업무를 계속 보려다가 힐끔 시선을 들어 만물상을 쳐다보는 채린.
“오빠.”
“응?”
“저 진짜 좋아해요? 진심? 장난이 아니라?”
“....”
만날 때마다 좋아한다는 말을 반복하니까,
처음에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생각이 점점 헷갈렸다.
‘진심인가?’
만약 진심이라면 채린이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
상대가 만물상이라서가 아니라, 채린은 길드가 세계 길드 5위 안에 들어갈 때까지 다른데 한 눈 팔 생각이 없었다.
하나 뿐인 채린의 동생, 채리나.
비록 그녀는 카멜레온에게 죽었지만 그녀가 남긴 소망은 채린이 잘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 길드가 언젠가는 세계적인 길드가 됐으면 좋겠어.’
채리나의 꿈을 채린은 이뤄주고 싶었다.
그게 지금 채린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왜 말이 없어요, 오빠?”
만물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한 번도 뭔가를 말할 때 망설인 적이 없던 사람인데.
“그게..음..”
망설이고 있었다.
그것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로.
“오..”
말을 하려다가 채린은 뒤쪽에 있는 커텐을 살짝 옆으로 젖히며, 창밖을 쳐다봤다.
낯선 남자가 길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단순히 서 있기만 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입을 째질 정도로 벌리고 있었다.
벌린 입에서 스멀스멀 흉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아직은 미세한 양이라,
채린도 겨우 눈치를 챘다.
‘빌런?’
새벽 시간이라 정확한 인상착의가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실루엣은 보였다.
‘처음 보는 것 같은데.’
2m가 넘는 키에 보디빌더처럼 몸이 우락부락 해 보였다.
이 근방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체격이었다.
또한 ‘수배범’ 중에서도 저 정도의 체격은 한 명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길드 건물은 방어 시스템이 잘 구비 돼 있었다.
하물며 사신 길드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길드였다.
제 아무리 날고 긴다는 능력자도 단신으로 길드 건물을 파괴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 했다.
그래서 채린은 안일하게 남자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퍼뜩 서진이 했던 말이 재생되듯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레볼루션 간부 중에 라이언이라는 놈이 있습니다. 그 녀석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냐면..’
2m가 넘는 키.
터질 듯한 근육.
마나에서 풍기는 야수의 기운.
‘무엇보다 개 무식한 놈입니다. 그러니까 혹시나 마주치면 절대로. 네버. 정면에서 싸워주지 마세요.’
“.....”
그간 채린을 불안하게 했던 퍼즐 조각이 떠올랐다.
박쥐의 연락두절.
서진의 연락두절.
라이언으로 추정 되는 남자의 등장.
이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설마..’
고개를 세차게 젓는 채린.
서진이 당했을 리가 없었다.
채린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채린은 자세를 바로하며 곧바로 책상 밑에 있는 비상벨을 누르며 만물상을 쳐다봤다.
“오빠, 일이 좀 생긴 것 같..”
만물상은 분명 소파를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순식간에 다가와 자신의 몸을 뒤에서 껴안았다.
“가만히 있어.”
어찌나 자신을 세게 안고 있던지,
벗어나려고 해도 채린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다 죽여 버리겠다!!”
밖에서 들리는 고함소리.
그 소리는 마치 사자후를 연상케 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울렸고,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사물과 공기가 격하게 진동을 했다.
쩌적. 쩌적.
쨍그랑!!
소리의 파동으로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창문이 깨지기 시작했다.
단지 소리 하나로 이 정도의 임팩트라니.
“이게 대체..”
채린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행히 사람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는 능력인 것 같..
“큭..”
“오..빠?”
뒤에서 들리는 만물상의 신음에,
고개를 옆으로 틀어 만물상을 쳐다본 채린.
“오빠..”
인상을 잔뜩 구긴 만물상의 귀에서 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반대로 채린은 멀쩡했다.
채린을 품에서 놓아준 만물상.
귀에 들어간 물을 빼내는 것처럼 고개를 까딱거리며 피를 털어냈다.
“도망쳐.”
피를 털어낸 만물상이 간결하게 한 마디 했다.
“저 자식. 괴물이다.”
만물상은 기본적인 피지컬이 다른 세계적인 랭커에 비해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아이템 하나만큼은 그 누구보다 좋은 남자였다.
그런 그의 아이템이 뚫렸다.
그런 그가 도망치라고 경고를 했다.
“....”
채린은 지금 머릿속으로 길드 건물에 있는 길드원이 몇 명인지 헤아리고 있었다. 만물상의 아이템을 뚫을 정도의 파괴력이면 높은 확률로 중상. 혹은 죽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행히 새벽이라서, 그리고 외근을 나간 탓에 몇 명 없어.’
그 생각을 한 순간 채린은 이빨로 자신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다행이라고?’
자신의 길드원이 몇 명일지라도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다니.
“오빠 먼저 도망쳐요.”
혹시 살아 있는 길드원이 있을지도 몰랐다.
채린은 황급히 길드장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채린의 손목을 낚아채는 만물상.
“냉정하게 생각해.”
“놔요, 이거.”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새벽이기는 해도 저렇게 고함을 질러댔으니까, 헌터 협회나 다른 길드도 저 괴물 자식의 존재를 알아 차렸을 거야. 그러니까..”
“오빠.”
“뭐야 그 표정? 그런 표정 이 상황에서 되게 별로인 표정이야, 그거.”
채린의 표정은 비장했다.
“제 동생이 죽고 나서 결심한 게 하나 있어요.”
“결심, 좋지. 근데 이런 상황에서는 결심 같은 거 내다버려도..”
“다시는.”
“....”
“다시는 허무하게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아요.”
만물상은 생각했다.
‘야단났네.’
만물상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는 채린.
만물상은 마음 같아서는 채린을 기절시켜서라도 데리고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근데 그러자니, 후에 채린을 영영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볼을 긁적이며 뒤를 돈 만물상.
창밖을 쳐다봤다.
만물상은 그동안 ‘괴물’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봤다. 그리고 실제로 ‘괴물’인 S급 몬스터도 몇 마리 보기도 했고.
그런데 창밖의 남자는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몬스터 같군.’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풍기는 기운은 흡사 몬스터였다.
그것도 S급은 가뿐히 뛰어넘는 대재앙급의 몬스터.
‘저런 놈이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이 새벽에,
사신 길드를 공격하다니.
그런데 실력은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아니고.
만물상은 한동안 공격할 생각이 없는지,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의 전신을 스캔했다.
“..와우.”
스캔을 끝내자마자, 감탄사를 내 뱉는 만물상.
남자의 아이템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특수 빌런 감옥에 가면 많이 보이는 아이템을 온 몸에 착용하고 있었다.
신체 스텟을 과도하게 떨어뜨리고 억제하는 아이템들.
저 남자가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만 해도 5개가 넘었다.
그 아이템들이 전부 본인에게 디버프나 다름없는 아이템이었다.
‘그런데도 방금과 같은 파괴력이라니.’
채린을 기절시켜서라도 빠져나가야했다 라는 후회가 들었다.
저런 놈은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상대할 수가 없었다.
고작해야 시간을 버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탈옥했나?’
처음 보는 얼굴에,
디버프 아이템을 치장을 했다.
탈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만물상은 생각했다.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니 저런 놈이 탈옥했는데,
너무 주변이 잠잠하긴 했다.
보통 저런 놈이 탈옥하면 국가나 교도소에서 재난 문자 비스무리한 걸..
“내려 와라.”
“....”
만물상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남자.
“에피타이저로 일단 너를 죽여야겠다.”
꿈틀.
만물상의 이마에 혈관이 한가닥 돋아났다.
‘저 새끼가 도랏나. 내가 누군지 알고.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는 것 같긴 한데.’
만물상은 1초만에 자신의 보따리에서 아이템 몇 개를 꺼내고, 순순히 남자의 말대로 창밖으로 점프를 했다.
“어이.”
한 손에 새빨간 천을 흔들며 남자를 부르는 만물상.
“넌 이제부터 소 새끼가 되는 거고, 나는 투우사가 되는 거야. 무슨 말인 줄 알겠어?”
인상을 찡그리는 남자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하는 만물상.
“들이박으라고, 이 새끼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만물상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투우사의 붉은 천’
무려 SS급 아이템이었지만 발을 구르며 시동을 걸고 있는 저 남자를 막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서진 이 새끼, 만나기만 해라.’
진즉에 만났으면 아이템을 받고 한국을 떴을 텐데.
‘어휴.’
사서 고생하는 건 만물상의 타입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덜 예뻤어도.’
괜히 예뻐 가지고.
왜 예뻐 가지고.
“시발..”
부모님이 여자 조심하라고 했는데.
‘이제야 그 말이 와 닿네.’
일단 후회는 나중에 하고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집중해도 벅찬 상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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