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보이는 S급들-113화 (113/196)

113회

달빛 늑대

“끄으응..”

정신이 돌아오면서 뱉은 첫 마디였다.

온 몸이 찌뿌듯하고,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눈을 뜨기도 쉽지가 않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살아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듯, 몸을 움직이려고 애 쓰던 나는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죽은 건가.’

그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아아.’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니라 난 죽은 게 아닐까?

죽기 전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녀석들은 살았으려나.’

그 순간에는 그 문제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느껴졌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죽었는데.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지옥에 가는 건가. 아니면 이미 지옥인 건가?’

나는 세상을 구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저승의 소녀가 말했던 것처럼,

세상을 구하지 못한 대가로..

“좆 됐네.”

꿈을 꾸는 것처럼 약간 몽롱하던 정신이 ‘지옥’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자마자 찬 물을 부은 것처럼 뚜렷해졌다.

지옥이라니.

지옥이라니!!

심하게 현타가 왔다.

얼마나 현타가 왔냐면 그냥 레이의 손을 놓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다.

레이의 손을 놓지 않은 건 잘한 일이다.

지옥에 가더라도 그 일은 분명..

“여긴 어디야?”

스스로 화제 돌리는 걸 선택했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생각을 해봤자,

내가 얻을 건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물을 엎질러버렸다.

“이 냄새. 어디서 많이 맡아본 것 같기도 한데.”

목이 많이 잠긴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 나왔다.

나는 등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을 뒤로 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눈에 딱풀을 바른 것처럼 눈곱이 잔뜩 껴 있었다.

한참동안 눈을 비볐다.

비비는 횟수만큼 눈이 서서히 떠지기 시작했다.

살짝 눈을 떴을 때는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완전히 눈을 떴을 때.

“여기..는..”

모니터가 잔뜩 있는 10평 남짓한 공간.

어떤 공간 보다 내게 친숙한 공간이었다.

저승의 모니터실.

그렇다는 얘기는.

“복..직?”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지옥보다는 모니터링 요원이 100배는 1000배는 더 나은 선택지였다.

나는 몸을 완전히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 시선이 자연스레 모니터를 향해 움직였다.

몇 개의 모니터를 확인하자,

모니터 속 세상은 내가 서진으로 있던 세계관이었다.

“한설휘.”

한라산에 있는 피닉스의 거처에서 피닉스와 조잘조잘 떠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시아.”

아프리카에서 훈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금석. 고생이..많네.”

박진에게 호되게 맞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근데 왜 신지수 선생님이 저기에..”

까지 생각했다가,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박태산을 보고 수긍했다. 바늘 가는데 실이 따라간 것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저건..”

시선을 옆으로 돌렸을 때.

설산처럼 새하얀 풍경이 뒤 덮고 있는 산 정상이 눈에 보였다.

“저 녀석들이 원래 저렇게 하얀 놈들이었나?”

눈이 내린 게 아니었다.

은빛 늑대들이 옹기종기 한데 모여 있었다.

그런데 털이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얗게 변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은빛 늑대의 중심에는 한 남자가 누워 있었는데.

“나네.”

죽은 사람치고는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몸도 어디 상한데 없이 멀쩡했다.

달의 축복 4단계를 시전해서,

몸이 다 터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 놈은 뭐지?”

모니터에 바짝 붙었다.

처음 보는 늑대 한 마리가 내 얼굴을 핥으며,

처량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은빛 늑대 치고는 몸집이 대형견처럼 작은 편이었지만, 털이 순백색이었다.

다른 은빛 늑대들도 털이 하얗지만, 그와도 비교될 정도로 털이 무척이나 천사가 키우는 늑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근데 레이는 어디 갔지?”

순백의 늑대를 관찰하다가,

화면 구석구석을 훑었다.

어디에도 레이가 보이지 않았다.

“....”

‘죽은 건가..’

살리기 위해, 노력했는데.

결국 이렇게 된 것인가.

“후우..”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뭘 그렇게 혼자 궁시렁궁시렁 돼?”

착잡한 마음을 느끼고 있을 때, 뒤에서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렇게 혼자 궁시렁 되냐고~”

“..버릇입니다.”

저승의 소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버릇?”

“네.”

모니터실에만 있으면 유독 혼잣말을 많이 하게 됐다.

혼잣말을 해야지만, 고독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정신도 죽어버릴 것 같았다. 홀로 몇 십 년을 한 장소에서 버티는 건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으니까.

“야.”

“..네.”

저승의 소녀가 모니터를 등지고 내 앞에 서서,

나를 쳐다봤다.

“솔직히 말해.”

“..뭐를..요?”

“너 만사가 다 귀찮지?”

“네?”

“그래서 콱 죽어서 지옥에 가고 싶지?”

“....”

“아니면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던지.”

이 여자가.

아니 이 소녀가 지금 내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

“1년도 안 됐어. 근데 네가 죽을 뻔 한 적이 몇 번이었는지 알기나 해?”

“....”

“그 몇 번을 다 네가 자처했어.”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처음 달빛 초식을 무턱대고 사용했을 때나,

지금이나.

소녀의 말이 옳았다.

“잘 좀 하자. 응?”

무슨 소리일까.

나는 죽었는데, 잘 좀 하자니.

“무슨 소리일까. 나는 죽었는데, 잘 좀 하자니. 이 지랄하고 있네. 너 내가 생각 읽을 수 있다는 거 알고 일부러 짱구 굴리고 있지?”

예리하네.

이 편이 말하는 것 보다..

퍽.

“크윽..”

소녀가 내 가슴팍을 때렸다.

“너 내가 관리하는 세계가 몇 개인지 알아?”

나야 모르지.

퍽!

“큭..”

“됐고, 너 안 죽었으니까 빨리 현실로 돌아가기나 해.”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문지르다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안 죽었다고.”

“....”

설마 이게 주인공 버프인가.

아니면 신의 총애를 받는 사나이라서..

“지랄~”

“그게 아니면 제가 어떻게 살아있는 겁니까?”

“안 죽었으니까, 살아있지.”

“아니, 그러니까..”

“착각 하지마. 내가 너 살린 거 아니니까. 굳이 죽겠다는 놈 살릴 생각도 없고.”

저승의 소녀가 내가 방금까지 보고 있던 모니터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것들이 지금 너한테 하는 짓 안 보이냐?”

방금까지만 해도 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보이던 장면이, 자세히 보니 특이점이 눈에 띄었다.

은빛 늑대들의 몸에서 연기 같은 게 흘러 나와, 내 몸으로 스멀스멀 날아가고 있었다.

특히 내 옆에 있는 순백의 늑대에게서는 다량의 연기 같은 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기는 허공에 모여 내 입과 코. 눈과 귀.

구멍이라는 구멍에 전부 들어가고 있었다.

“자기들 수명 깎아서 너 하나 살리겠다고, 저 난리치고 있는 거 안 보이냐고.”

“....”

“늑대 새끼들이 어떻게 저 방법을 알았는지. 역시 밤하늘 늑대의 자손이라 이건가.”

‘밤하늘 늑대?’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너 빨리 복귀 안 하면 쟤들 수명 전부 고갈 될지도 모른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런데 방법을 모른다.

“복귀! 얍!”

“....”

“서진으로 빙의! 얍얍!”

“..지랄.”

살아있다는 사실에 들 뜬 내 이마에 엄지와 검지를 갖다 대는 저승의 소녀.

“앞으로 잘 좀 하자. 응?”

나는 씨익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살아있다.

지옥에 안 가도 된다.

적어도 지금은.

그 사실이 착잡하고 가라앉은 내 마음에 불씨를 활활 태우기 시작했다.

나는 이승으로 가기 전, 무심코 모니터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음?’

내가 잘 아는 인물 한 명이 피떡이 된 채,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를 의자 삼아 앉아 있는 한 인물.

‘라이언? 라이언이 왜 박쥐 집에..아니 그 보다 어떻게 박쥐의 정체를..’

딱!

저승의 소녀가 내 이마를 때렸다.

그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에 나는 똑똑히 봤다.

라이언이 누군가에게 전화하는 걸.

‘채린.’

핸드폰에 분명 그렇게 찍혀 있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흐으읍!!”

물에 빠졌다가 기절한 사람처럼 숨을 한 번에 들이키며 정신을 차렸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느낌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몸에 이상이 느껴지질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왜 힘이 넘치는 것 같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떴을 때.

모니터로 봤던 순백의 늑대가 낑낑거리며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끼이잉..(주인..)

“주인?”

끼잉..낑..(무사해서..다행이야..)

“....”

처음 보는 늑대가 나를 주인이라며 걱정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어렵지 않게 한 늑대를 떠 올릴 수 있었다.

나를 주인이라고 부르는 늑대는 이 세상에 단 한 마리뿐이었으므로.

“레..이?”

크르릉.(응.)

레이라고 부르자,

순백의 늑대가 대답한다.

“너 레이 맞아?”

크릉.(응.)

맞다고 대답한다.

나는 바닥에 손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분명히 내가 아는 레이는..”

나는 양 손을 들어 축구공 사이즈로 만들었다.

“분명히 내가 아는 레이는 털이 검은..”

손으로 순백의 늑대의 털을 만졌다.

부들부들하고, 은은하게 달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

나는 레이의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레이

나이: 4살.

종족: 달빛 늑대.

체력: AA(10)

근력: A(92)

지혜: A(30)

민첩: S(30)

달빛력:15000

-능력

1.대장의 호령

설명: 은빛 늑대의 대장인 달빛 늑대. 일정량의 달빛력을 소모하면 은빛 늑대들을 불러올 수 있다.

2.대장의 위엄.

설명: 은빛 늑대들에게 달빛을 나눠줄 수 있다. 나눠줄 시, 은빛 늑대들은 잠시나마 달빛 늑대로 변할 수 있다.(변신 시간은 달빛 늑대의 달빛력에 비례한다.)

3.대장의 고독.

설명: 은빛 늑대 무리에서 이탈시, 모든 능력치와 스텟이 10%상승효과를 받는다.

4.령(靈)의 비호.

설명: 달빛 늑대는 수많은 은빛 늑대들의 혼을 흡수했다. 혼령의 비호 아래, 달빛 늑대의 회복력이 증가한다.(달이 떠 있을 때, 회복량 대폭 증가.)

5.대장의 하울링.

설명: 본디, 달빛 늑대는 하늘에 군림하던 천상의 늑대다. 달빛 늑대의 하울링은 상대를 겁에 질리게 하거나, 심하면 전의상실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종족 상관없음)

6. 교감.

설명: 달빛 늑대는 달빛 계승자인 ‘서진’에게 귀속 돼 있다. 교감 능력으로 달빛 늑대는 달빛 계승자의 능력을 따라하거나 흉내 낼 수 있다.

*달빛 계승자와 인접하면 인접할수록, 달빛 늑대의 능력치가 상승한다.(최대 20%)

*달빛 계승자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달빛 늑대의 능력치가 하락한다.(최대 20%)

'미..쳤네.‘

나는 고개를 돌려 달빛 늑대라는 칭호를 가지게 된, 레이를 쳐다봤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원래 레이를 쓰다듬으려면 내가 쪼그려 앉아야 했는데, 이제는 가만히 서서 손을 뻗는 것만으로도 쓰다듬는 게 가능했다.

이 녀석이 레이라니.

그 솜뭉치 같던 레이라니.

그것도 달빛 늑대로 각성을 한 레이라니!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각성을 한 레이의 스텟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각성 전 레이의 스텟은 B에서C등급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A등급도 모자라 민첩은 무려 S등급이다.

거기다가 각성 후, 생겨난 능력들까지.

세계적인 랭커와 1:1 싸움을 해도 비빌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아니다. 틀렸다.

‘대장의 호령’이라는 능력으로 은빛 늑대들을 불러온다면.

웬만한 길드 하나쯤은 박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가 일반 늑대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긁어보니 잭팟인 늑대였다니.

“이제 뚜뚜한테 안 맞고 살아도 되겠네.”

크르르!(내가 이겨!)

보라.

이 자신감 충만한 울음소리를!

보라.

그동안 뚜뚜에게 맞아왔던 서러움이 잔뜩 묻어나오는..

[미정산 메시지가 여러 개 존재합니다. 지금 들으시겠습니까?]

“....”

이건 또 무슨 소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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