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회
달빛 늑대
나는 일부러 은빛 늑대 서식지에 레이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녀석이 다친 것도 있고, 은빛 늑대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이곳에서 일정이 지금처럼 길어질지 몰랐지만,
레이라면 첸의 거처에서 기다릴 줄 알았다.
“레이.”
기다림이 지루했던 걸까.
내 부름에 눈에 불을 켜고 있다가 나를 쳐다보는 레이.
살짝 원망이 담긴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은빛 늑대들의 등을 밟고 내게 뛰어왔다. 그 과정에서 은빛 늑대들은 충분히 레이를 막거나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순순히 길을 내주고, 등을 내주었다.
은빛 늑대들은 나와 레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레이가 다친 날, 나와 레이가 함께하는 걸 봤으니까.
크르르.
레이의 울음소리에 나는 자세를 낮추고 레이를 쳐다봤다.
크릉. 크르르.(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글쎄.”
나도 모른다.
조금만 더 도전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긴 할 건데, 그게 오늘은 아니었다.
레이가 신경질적으로 앞발을 들어 내 무릎을 툭툭 건드렸다.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아우울!!
아우우!!
우리를 지켜보던 은빛 늑대 단체로 샤우팅을 했다.
그간 지켜본 바에 따르면 은빛 늑대들은 나를 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신성시 대했다. 그런 나를 레이가 건드리고 있으니 자기네들 입장에서는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
나는 검지를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우울..
우울..
얌전해진 은빛 늑대들.
“같이 있어도 되지?”
나는 몸을 일으키며 은빛 늑대 무리의 제일 후미에 있는 대장 늑대를 향해 말했다. 내 말에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대장 늑대.
“가자.”
정상 쪽으로 몇 걸음 움직이다가 나는 뒤를 돌았다.
레이가 대장 늑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대장 늑대 역시 레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한 프레임 안에 레이와 은빛 늑대들을 보니,
확실히 레이의 존재감이 남다르긴 했다.
은빛 물결에 검은 점 하나가 찍혀 있는 느낌이랄까.
그것도 쥐방울만한 아주 작은 점.
백인들 사이에 키 작은 흑인이 한 명 끼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레이.”
나는 레이를 불렀다.
풍기는 기운이 당장이라도 대장 늑대를 향해 달려들 것 같은데, 그랬다가는 또 얻어터질 게 분명했다.
체급 차이도 차이겠거니, 대장 늑대와 한 번 붙어보니 녀석은 보통 늑대가 아니었다. 대장 늑대를 몬스터 등급으로 나누면 낮에는 A급. 밤에는 S급 몬스터나 다름없었다.
“레이.”
재차 부르자 쭈뼛거리며 내게 걸어오는 레이.
고개는 여전히 뒤를 향해 있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레이를 품에 안고 정상으로 올라갔다.
“얌전히 있어. 괜히 시비 걸고 다니지 말고.”
크르르!!
상당히 불만이 많아보였지만 땅에 내려놓자 아래가 아닌 정상의 끝자락에 위치한 다 쓰러져가는 나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문스라고 했나?’
레이가 과거 얘기를 하며 자주 거론 했던, 레이의 유일한 친구였던 늑대가 떠올랐다. 문스를 추억하기 위해 저곳으로 가는 것 같은데.
그 모습이 조금 짠했다.
하지만 내가 신도 아니고 죽은 문스라는 늑대를 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나무 옆에 자리를 잡고 엎드리는 레이를 쳐다보다가 달빛석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날이 저물고 있어서 그런지 달빛석에서 흘러나오는 달빛이 점점 선명해져갔다.
“내 그릇이 작은 건 알겠어.”
달빛석 앞에 주저앉으며 달빛석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나는 지금 꼭 너를 가지고 싶거든?”
대답이 돌아올 리가 만무했다.
그냥 답답해서 한 번 말해봤다.
달빛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1초. 2초. 3초. 4초. 5초.
“으음..”
약간의 신음과 함께 손을 회수했다.
진짜 이 방법까지는 안 쓰려고 했는데.
이러고 죽치고 앉아 있어봤자, 무의미한 시간만 흘러갈 뿐이었다.
나는 포인트 상점을 열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훈수 포인트는 3만여 포인트가 있었다.
방학 시작 후, 따로 누군가에게 훈수를 둔 적은 없었지만 방학 직전에 훈수 씨앗을 여기저기 뿌려놨더니 저절로 훈수 포인트가 쌓여갔다.
특히 금석이나 정시아, 한설휘. 그리고 서시우.
이 인물들은 내게 적금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흘려가며 한 말이라도 내가 안 보이는 곳에서 실행만 하면 훈수 포인트가 들어왔다. 녀석들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에게도 자잘하게 말을 흘렸으니.
방학 시작 할 때 훈수 포인트가 2만 포인트였던 걸 감안하면 1만 포인트나 오른 셈이었다.
새하얀 공간을 지나 ‘정보’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진짜 다른 방에 비해 제일 포인트가 아깝다고 느끼는 게 정보방인데,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몇 가지 키워드를 입력했다.
-달빛석 획득 방법. 혹은 조건.
입력하자마자 정보 획득에 필요한 요구 포인트가 화면에 떠올랐다.
-1만 포인트-
“.....”
어느 정도 포인트를 많이 요구할 거란 예상은 했다.
헌데 1만 포인트라니.
“1만 포인트면..”
능력 방이나 아이템 방에서 웬만한 B등급에서 A급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는 포인트였고, 스텟 방에서 사용한다 치면 스텟을 적어도 한 단계에서 많게는 두 단계까지 레벨 업 할 수 있었다.
“음..”
1만 포인트를 지불해서 ‘획득’이라면 당장 지불하겠지만, 내가 지불해서 얻는 건 획득 ‘방법’과 ‘조건’이었다.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포인트를 지불 했는데, 내가 현재 획득할 수 없는 방법과 조건이라면?
미래지향적으로 보면 투자라고 생각하면 속이 편하긴 하겠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이번이 아니면 학교 대항전이 끝나고,
여러 가지 사건들을 막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약간의 짬은 나긴 하겠지만..
의자를 까딱거리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머릿속으로 이상한 감각이.
이상한 감각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위험 신호를 보내는 것 같은 시그널이 느껴졌다.
‘뭐지?’
나는 정보 방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곳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외부 침입자가 있을 리가..
‘설마.’
나는 황급히 포인트 상점을 닫았다.
“..레이?”
레이가 달빛석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달빛석의 기운 때문인지 레이의 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레이!!”
위험 신호는 교감 능력이 내게 보낸 신호였다.
레이의 생명이 지금 위험하다는 신호.
나는 레이에게 손을 뻗었다.
“크윽..”
마치 달빛석을 만지는 것만 같았다.
레이가 달빛석과 동화가 된 것일까.
아니면 레이가 달빛석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한 것일까?
“왜 이렇게..”
아무리 손에 힘을 주어도.
아무리 다리에 힘을 주어도.
“안 떨어져!!”
잠깐 손을 땐 후, ‘달의 축복’ 2단계를 시전 했다.
그 외에도 ‘월광쇄도’와 정시아의 능력 중 하나인, ‘뱀의 움직임’도 시전 했다.
최대한 내가 나에게 걸 수 있는 모든 버프를 시전 했다.
다시금 레이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전과 비교했을 때 조금 나은 정도였지만,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조금 더 레이의 몸에 손을 더 오래대고 있을 수 있게 된 것 뿐이었다.
“레이..레이..”
레이의 검은 털이 하얀 털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달빛석에서 흘러나온 달빛이 레이를 새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레이의 모습이 달빛에 파묻히고 있었다.
이미 눈동자는 흰자를 드러낸지 오래였다.
크릉..(문..)
“레이?”
크르..(스..)
“....”
다행히 의식은 아직 남아있는지 웅얼거리듯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다 죽어가는 와중에 죽은 옛 친구 이름을 말하다니.
진짜 저승길이 보이고 있는 모양.
‘달의 축복.’
“3단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지금 내 스텟으로 달의 축복을 3단계까지 시전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도 이판사판이었다.
‘포기하면 레이가 죽는다.’
달의 축복 3단계를 시전하자마자 몸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피가 들끓는 느낌과 함께 온 몸에 힘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몸이 다소 팽창하는 느낌이 들었다.
몸에 맞지 않는 3단계를 시전하다 보니 오는 과부하 현상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과부하가 심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달이 뜬 밤에,
그것도 앞에 달빛석이라는 무지막지한 녀석 앞에서 시전해서 그런 것 같은데.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레이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손끝에서 약간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게 끝이었다.
“얌전히..있으라고 했잖아.”
평소에는 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 아닌,
진짜 죽을 것처럼 구는 녀석이.
하필 이럴 때.
“좋은 꿈 꿔라. 레이.”
나는 레이를 잡고 있는 손을 땔 생각이 없었다.
만약 이 상황에 놓인 게 레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그게 설사 나와 꽤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 해도 손을 놓았을지도 몰랐다.
내 목숨보다 중요한 건 세상에 없으니까.
하지만 레이는 달랐다.
아니, 특별했다.
레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 고통. 생각.
그런 것들이 크진 않지만 내게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주인.. 나 너무 무서워..’
‘주인..미안..’
이런 녀석의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나는 한 번 죽은 몸이었고,
사후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냥 운 좋게 얻은 인생 2회차가 빨리 막을 내린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 역시 레이처럼 죽는 다는 게,
무섭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전생의 서진처럼 방탕하게 여자 끼고 술이나 마시면서 놀 껄 그랬네. 그랬다가는 저승의 소녀가 곧바로 태클을 들어왔을 테지만..’
“끄윽..끅..”
이제 한계인 모양이다.
내 입에서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레이는 죽었는지,
아니면 아직 생사의 경계선 위에 서있는지 미동이 없었다.
“끅..”
머리가 아래로 쳐지려는 느낌에 나는 마지막 힘을 짜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상현달이 예쁘게 떠올라 있는 밤이었다.
“인생..끄윽..”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레이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빠졌다.
“끅..?”
바닥에 쓰러지며 정신 줄을 놓으려고 할 때,
빳빳한 털을 가진 생명체가 내 몸을 받쳤다.
기절하는 줄 알고,
이 고통에서 이제 해방이구나 하고 있었는데.
“뭐..냐? 끄윽.. 너?”
은빛 늑대 대장이 머리로 내 몸을 슬며시 원위치 시켰다.
“끄윽..끅..”
딸꾹질 같은 소리가 계속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장기가 파열 됐거나,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아니, 그거보다.
“너희들은..끄윽..또..뭐냐?”
대장 늑대뿐만 아니라 은빛 늑대들이 나와 레이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아니..끅..뭐하냐고?”
크르르!!
크르!!!
크아앙!!!
“미친..끄윽..놈들..”
달빛석에서 시작 된 달빛이 레이를 통해, 나를 통해 은빛 늑대들에게 퍼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번개탄을 뿌린 것처럼 제 자리에서 펄쩍 뛰는 놈이 있지를 않나,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드는 놈이 있지를 않나.
오직 대장 늑대만이 묵묵히 내 등을 받치고 서 있었다.
크르르..
이 녀석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체면 때문에,
낮게 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너희들..끄윽..그러다 다 죽..어. 떨어져라..끅..끅.”
내 말에도 은빛 늑대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요란하게 난리법석은 피고 있어도 달빛을 버티고 있었다.
“어..끄윽..휴.”
아우울!!
아우우우!!
“가는 길..끅..심심하지는..않겠네. 후..후..끅..”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는 거의 뇌정지가 온 머리를 빠르게 굴리려고 애썼다.
‘이러다 은빛 늑대는 멸족한다.’
설사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이 세계관을 위해서라면 은빛 늑대는 살아 있어야 했다.
달빛석.
이 아이템은 최소 SS급을 넘어서는 아이템이었다.
내가 죽더라도 이 아이템의 존재를.
이 아이템을 레볼루션이 아닌, 아군에게 넘겨 줄 존재가 필요했다.
변수.
달빛석은 기존 시나리오에 등장하지 않은 아이템이었다.
그래서 설사 내가 죽더라도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몰랐다.
아군의 손에 들어간다는 전제하에.
“내가..끄윽..희생하고 뭐 그런 캐릭터는..끅.. 아닌데 말이야.. 어차피 죽을 것 같으니까..끅..”
그간 이 세계.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정이 들긴 들었나보다.
가는 길에 선물이라도 남기고 싶은 거 보면.
“달의 축복..끅..4단..계..끅..”
달의 축복 단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스텟도 스텟이지만, 요구하는 달빛력이 대폭 늘어났다. 즉, 달빛력 소모가 엄청나다는 얘기였다.
내 몸을 달빛을 담는 통으로 쓴다면.
은빛 늑대 중 한 마리 정도는 살아남지 않을까?
“끅..끄윽!!”
3단계와는 차원이 다른 과부하가 내 몸을 덮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정신이 아득했는데.
“살아..남아라..끅..”
나는 4단계를 시전한 후,
몇 초 버티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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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내일부터 연참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