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저 새를 잡아다가 한설휘가 보는 앞에서 저녁으로 먹기로.97회
기말고사
필기시험이 모두 끝났다.
총 12개의 과목.
모두 푸는데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박태산 교관의 ‘전술의 이해’ 과목 말고는 전부 만점을 예상했다.
‘전술의 이해’ 과목은 서술형이 많아, 성적이 나오기 전까지 결과를 콕 집어서 예상하기 어려웠다.
오늘은 실기시험 첫 날.
개인 능력 평가가 있는 날이었다.
실기시험은 중간고사 때와 마찬가지로 프로그램 훈련장에서 치러졌다.
“이진솔 학생. 준비 됐으면 입장하도록.”
“넵.”
호명 된 학생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눈앞에 보이는 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닫혀 있는 철문 앞으로 걸어가는 박태산 교관.
조작 센서를 몇 번 터치했다.
철문과 옆으로 길게 늘어 서 있던 철벽이 허물어지며 거대한 스크린으로 바뀌었다.
스크린에는 방금 철문으로 입장한 이진솔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뒤를 돈 박태산 교관.
“잘 보고 나눠준 피드백 종이에 이진솔 학생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적으면 된다. 일방적인 비방이나 욕설을 적을 시, 실기시험 결과 여부에 상관없이 0점 처리 할 테니 명심하도록 해라.”
“네.”“네!”
개인 역량 평가는 1명씩 실시 됐다.
나머지 인원은 박태산의 말처럼 관전을 하며 피드백 종이를 작성 했다.
피드백 종이를 작성함으로써, 관전하는 학생들은 타인의 능력에 대한 이해도와 관찰력을 높일 수가 있었다.
반대로 피드백을 당하는 학생은 타인의 입장에서 본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장단점을 알 수가 있었다.
여러모로 보는 사람이나 행하는 사람이나 윈윈이었다.
목적은 분명 실기시험이었지만,
그 안에서 훈련도 동반시 되는 유익한 시험 방식이었다.
나는 스크린을 쳐다봤다.
이진솔이 앞에 나타난 여러 마리의 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진솔은 평범한 격투가 타입의 능력자였다.
격투가 능력 중 ‘복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총 10마리의 오크를 쓰러뜨렸을 때, 오크가 휘두른 몽둥이에 머리를 맞고 말았다.
프로그램 설정에 따라 프로그램의 리얼리티를 조정할 수가 있었는데,
이번 시험의 리얼리티 설정은 ‘60%’였다.
맞으면 실제 고통의 60%가 느껴진다는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한 대를 맞고 정신을 못 차리기 시작하는 이진솔.
급기야 계속해서 리젠 되는 오크들에게 등을 보이고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쿵쿵!
문을 두드리는 이진솔.
스크린으로 보이는 이진솔의 표정은 다급해보였다.
저게 일반 학생의 표본이었다.
일반 학생들은 실전 경험이 전무 했다.
그러니 현실감처럼 다가오는 고통에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프로그램인 걸 알아도,
고통에서 수반 되는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는 어쩔 수가 없었다.
프로그램 센서를 조작하는 박태산 교관.
스크린이 사라지며 이전의 철문이 나타났다.
끼익.
철문이 저절로 열렸다.
“허억..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철문에서 나오는 이진솔.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멀쩡했다.
고통도 프로그램이 종료 되자 곧바로 사라졌는지 표정이 머쓱하게 변했다.
나는 피드백 종이에 몇 자를 적었다.
-격투가 타입이라고 꼭 무식하게 싸울 필요는 없음. 오크들에게 돌진하는 패기는 인정. 허나, 포지션 잡는 게 너무 오크들의 정중앙이었음. 그리고 평소에 훈련할 때 리얼리티 설정을 조금 높여서 훈련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함.
이진솔은 시험이라는 의식이 강했는지 너무 불나방처럼 오크들 사이에 뛰어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조금 더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었을 텐데.’
또 한 가지.
일반 학생들은 평소에 개인적으로 훈련할 때,
리얼리티 설정을 너무 낮게 잡는 경향이 있었다.
10~20%.
높아봐야 30%였다.
고통을 느끼기 싫은 탓도 있었고,
리얼리티 설정을 낮추면 다치거나 중상에 달하는 피해를 입더라도 슈퍼맨이 된 마냥 계속해서 싸울 수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고통에 대한 감각이 많이 무뎌졌다.
능력치 보다 더 강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낮은 리얼리티 설정의 폐해였다.
이진솔은 폐해를 잘 보여주는 예시였고.
이진솔을 시작으로 줄줄이 소시지처럼 학생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자진 포기를 했다.
그 때 등장한 한 여자.
“교관님. 리얼리티 설정 100%로 변경 해주세요.”
정시아였다.
당당한 표정으로 박태산 교관을 쳐다보는 그녀.
“60%에서 내리는 건 안 되지만 올리는 건 가능하잖아요.”
“그렇긴 한데 100%는 안 된다. 교칙 상, 100%는 시험이든 훈련이든 금지 돼 있다. 최대는 80%다. 80%로 변경 해주겠다.”
“에이~ 시시해.”
고개를 흔들며 철문 안으로 들어가는 정시아.
철문이 스크린으로 곧바로 변했다.
중간고사 때는 개인적인 아이템을 착용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말고사 때는 가능했다.
중간고사가 노템전이었다면,
기말고사는 아이템전이었다.
단, 아이템의 등급과 효과에 따라 페널티 점수가 주어졌다.
그래서 몇 몇 학생들은 일부로 노템전으로 시험을 치루기도 했다.
정시아가 토레스에게 받은 방어구 관통력 효과가 있는 단검을 묘기 부리듯이 손가락으로 휘휘 돌렸다.
그녀 앞으로 생성되기 시작하는 몬스터.
몬스터는 학생에 따라 종류가 다 제각각이었다.
중간고사 성적이 중요한 데이터베이스로 작용했다.
정시아에게 낙점 된 몬스터는 그녀처럼 몸놀림이 가벼운..
“와이번?”
앞에 말은 취소다.
날개가 생성 되길래 독수리 같은 건 줄 알았다.
와이번이라니.
“교관님! 와이번은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내 심경을 대변하는 질문을 누군가 했다.
“프로그램에 정시아의 능력치를 대입한 결과다. 프로그램은 충분히 정시아가 상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 것 같은데. 교관 역시 이건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와이번은 드래곤의 하위호환 같은 몬스터였다.
녀석의 0과1로 된 입자가 거대하게 형성이 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 센서에 입을 갖다 대는 박태산 교관.
“정시아. 상대를 바꿔주도록 하겠다.”
프로그램 센서를 조작하려고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했다.
“교관님! 잠시만요!!”
한 학생이 박태산 교관을 다급하게 불렀다.
고개를 돌려 학생을 쳐다보는 박태산 교관.
“시아가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학생의 말에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 스크린을 쳐다보는 박태산 교관.
정시아가 학생의 말처럼 양 손으로 X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 다음 동작으로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엄지를 들어보였다.
“....”
잠깐 갈등하는가 싶더니 뒤로 더 물러나는 박태산 교관.
정시아의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와이번과 정시아.
상성이 너무 안 좋았다.
정시아가 아무리 빠르다고는 했지만,
나처럼 플라이 능력이 없었다.
와이번이 공중에 뜨기라도 하면 끝이었다.
정시아 역시 알고 있었다.
와이번의 형체가 거의 완성 될 즈음, 와이번의 등에 올라타는 정시아.
끼에엑-!
와이번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울었다.
와이번의 형체가 완성 됐다.
그 즉시 와이번의 날개를 단검으로 빠른 속도로 찌르기 시작했다.
단검에서 초록색 물이 뚝뚝 떨어졌다.
키에에-!
양쪽 날개를 오가며 닭 날개를 발굴 하듯이 찔러대던 정시아.
와이번이 날개를 휘저으며 비상하려고 하자, 쿨하게 와이번의 등에서 내려왔다.
비상하는 와이번.
정시아가 아무리 단검으로 많이 찔렀다고는 해도 와이번 입장에서는 바늘로 찌른 것처럼 느꼈을 게 분명했다.
매끄럽게 하늘로 비상을 마친 와이번.
오시하듯, 흉흉한 눈동자를 빛내며 지상을 쳐다봤다.
지상에는 아무런 장애물 없이,
정시아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입을 벌리는 와이번.
녀석의 입에 붉은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이 하나의 구체를 이루었을 때,
돌연 정시아의 모습이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어? 뭐야? 어디 갔어?”
“분명 저기 있었는데?”
지켜보던 학생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스크린을 쳐다봤다.
“저거 그거 아니야? 만물상한테 받은 캐스퍼의 귀걸이 효과.”
“아, 맞다. 거기에 은신 기능 있었지?”
설명충들의 말에 학생들이 다시 잠잠해졌다.
푸하아악-!
지상을 향해 불을 뿜어대는 와이번.
정시아의 모습이 사라져서인지, 불길이 이리저리 갈팡질팡 했다.
몇 초간 불을 뿜어대던 와이번은 탄이 다 떨어진 박격포처럼 입을 닫았다.
와이번의 입가로 새어 나오는 연기.
지상에 정시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와이번의 불길을 전부 피했는지 멀쩡한 모습이었다.
와이번을 올려다보는 정시아.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빤히 와이번을 쳐다봤다.
키에에-!
정시아의 모습을 발견한 와이번이 지상으로 낙하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시아.
딱히 피할 생각이 없는지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낙하를 하는 와이번의 날개가 갑자기 고장 난 프로펠러처럼 삐거덕거렸다.
삐거덕거림은 점점 더 심해져 낙하가 아닌 추락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흡족한 미소를 짓는 정시아.
짧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치이익. 치익.
블랙맘바의 모습을 한 킹코브라가 정시아 앞에 등장했다.
길이가 30m가 넘는 초대형 코브라였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먹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와이번을 쳐다보는 블랙맘바.
와이번이 지척에 이르렀을 때 아가리를 째질 것처럼 벌렸다.
골인.
와이번은 정확히 블랙맘바의 입 속으로 빨려가듯이 먹혔다.
와이번을 먹은 블랙맘바의 몸통이 와이번의 모양새로 확장 됐다.
그것도 잠시.
소화를 다 했는지 몸통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치익. 치이익.
블랙맘바가 거대한 얼굴을 정시아에게 들이댔다.
잘했다는 듯이 블랙맘바의 머리를 쓰다듬는 정시아.
‘미친 년.’
좋은 의미로.
자주 얼굴을 부대껴서 종종 까먹었다.
정시아가 어떤 여자인지.
정시아 전략의 핵심은 초반에 와이번의 날개를 속된 말로 조져놓은 것에 있었다.
방어구 관통력 20%의 단검으로 두꺼운 와이번의 피부를 뚫고, 뚫은 피부에 ‘맹독’을 속된 말로 처발처발 했다.
그 결과 처음에는 아무 이상 없는 듯 보였지만,
맹독이 퍼지며 날개 기능을 상실하고야 말았다.
실제 와이번이 상대였다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었다.
프로그램이었기에, 손쉽게 와이번의 등을 선점할 수 있었다.
어쨌든 실제 와이번이 아닌, 프로그램 와이번이 상대였고 정시아의 전략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나는 피드백 종이에 한 단어를 휘갈겼다.
-지렸다.
진심 기저귀 사러 갈 뻔.
+ + +
정시아의 영향인지 아니면 본래 그렇게 하려고 했던 건지.
그녀의 후속주자인 한설휘 역시 리얼리티 설정을 80% 변경했다.
철문 안으로 입장한 한설휘.
평온한 얼굴로 끼고 있는 붉은 장갑을 가볍게 비볐다.
그녀의 상대는 물 속성 몬스터인 리자드맨.
숫자가 리자드맨 군단이라고 봐야 할 정도로 어마무시 했다.
수 천의 리자드맨이 가느다란 창을 들고 돌격 신호를 주고받듯이 발을 일제히 굴렀다.
그 중에는 중간 중간 ‘리자드 워리어’가 섞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일 후미에는 ‘리자드 메이지’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이건 정시아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았다.
리자드 종족의 일반 병사에 속하는 리자드맨들이 한설휘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화염 속성 스킬 북을 꺼내드는 한설휘.
전방을 향해 손을 들었다.
“파이어 익스플로전(fire explosion).”
대규모 불 폭발이 일어났다.
“장작 태우기.”
폭발은 리자드맨을 일제히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본래도 화력이 극강이었는데,
피닉스와 ‘불의 계약’을 맺은 후의 화력은 그야말로..
‘할 말이 없다.’
정시아도 그렇고 한설휘도 그렇고.
지금 당장 시중에 내놔도 순위권은 모르겠지만 세계 랭커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자드맨을 몰살하는 불의 화신 모습에 학생들은 넋을 놓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 + +
한설휘의 다음 타자는 금석이었다.
금석의 상대는 30마리 가량의 오우거였다.
오우거와 투닥투닥 거리던 금석.
마지막에 ‘고통의 희열’로 한 번에 오우거를 쓸었다.
한설휘와 정시아에 비해서는 분명히 임팩트가 떨어지긴 했지만,
홀로 오우거 30마리를 처치한 건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서진. 일어나라.”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박태산 교관 옆으로 걸어갔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박태산 교관.
한 마디 했다.
“리얼리티 설정 80%로 미리 바꿔 놨다.”
“....”
나는 전혀 바꿀 생각이 없는데.
이 양반이 지금 뭐라는 거야?
[작품후기]
허리를 삐끗했는데 앉아있는게 너무 힘드네요 ㅠㅠㅠㅠㅠㅠ
어떻게 한 편은 썼는데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