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궁금해졌다.92회
박태산의 은밀한 취향
대련실은 널널했다.
학교 최강자 선발전이 끝난 탓에 대련의 열기가 식은 탓도 있었고,
곧 기말고사라 대련에 힘쓰는 학생들이 없는 탓도 있었다.
“아주버님!”
구석에서 서시우에게 쫑알쫑알 떠들어대던 박수향이 나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다소곳하게 인사를 하는 박수향.
그녀의 조선시대 화법에도 이제는 익숙해져서인지 별 다른 감흥이 없었다.
“응.”
“소녀 주말에도 이렇게 아주버님을 뵈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옵니다.”
참 한결같다.
나는 손으로 박수향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자리에 앉아 있는 서시우에게 다가갔다.
“왔어?”
“응.”
이제는 우리 사이에 어색함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돈독해지는 중이었다.
“바로 시작할까?”
내 말에 자리에서 일어서는 서시우.
나는 등에 메고 있는 검집에서 만월검을 꺼내려다가 멈칫했다.
“....”
대련실에는 인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몇 명 있기는 했다.
그 인원들이 나와 서시우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서시우. 뒷산에 가서 대련하자.”
내 시선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는 서시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대련실을 나섰다.
+ + +
뒷산에는 내 전용 훈련장이 있었다.
등산 루트에서 제법 벗어난 곳에.
해가 떠 있을 때 오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조금 낯선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만월검을 빼내들었다.
만월검과는 상반 된 칠흑 같은 어두운 검을 검집에서 빼내드는 서시우.
이번에 제작한 서시우의 전용 무기였다.
어둠 능력자 전용 검이라고 콕 집어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현재 서시우가 사용하기에는 딱 적당했다.
어둠 능력자 전용 검은 ‘마기’가 깃들어 있어서,
제어를 못 하는 상태에서 사용했다가는 마기에 잡아먹힐 수가 있었다.
“서시우 파이팅!! 아주버님도 파이팅!!”
유일한 관전자인 박수향이 나무 뒤에 숨어서 응원을 했다.
“준비 됐어?”
“준비는 아까 다 했어.”
내 말에 달빛 계승자로 살아갈 때처럼,
특유의 거만한 눈빛이 발동한 서시우.
진지하게 임할 때 나오는 눈빛이었다.
“간다.”
나는 말과 함께 지면을 박차며 서시우를 향해 도약했다.
챙!
우리의 검이 부딪혔다.
챙! 챙!
다시. 또 다시.
서시우는 스텟 면에서 한설휘나 정시아를 넘어섰다.
300캡슐과 달의 호흡을 체화하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이 서시우와 비등하게 대련하는 게 불가능 했을 게 분명했다.
엄밀히 말하면 비등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분명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시우의 움직임에는 여유가 느껴졌다.
‘민첩이랑 근력이 AA스텟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역시 한 번 괴물은 중간에 능력을 갈아탄다고 해도 괴물이었다.
슬슬 봐주는 걸 그만하기로 했는지 서시우의 움직임이 점점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챙!
서시우의 검을 밀어내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제대로 간다.”
‘달빛 제 2초식. 월광쇄도(月光殺到).’
금석이나 한설휘, 정시아의 능력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시우와의 대련에서만큼은 온전히 내 능력만 사용하기로 했다.
서시우를 이기는 목적으로 대련하는 게 아니니까.
월광쇄도는 이동 능력 중 1티어를 넘어 0티어에 속하는 이동기라고 봐도 될 정도로 발군의 속도를 자랑했다.
이 사실을 서시우 역시 알았다.
빌런의 습격 때, 박수향을 구하기 위해 월광쇄도를 한 번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월광쇄도를 사용하자마자 서시우 역시 어둠 능력을 사용했다.
“다크 섀도우(Dark Shadows).”
서시우의 몸이 어둠에 둘러싸였다.
녀석의 앞에 도착을 한 순간 서시우를 향해 가볍게 만월검을 휘둘렀다.
사아악!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시우를 감싼 어둠의 장막이 바닥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선취점.”
뒤를 돌려고 했을 때 서늘한 감촉이 목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들리는 서시우의 목소리.
나는 만월검을 내리며 뒤를 돌았다.
서시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쫌 하네?”
내 말에 가볍게 미소를 짓는 서시우.
서시우의 ‘다크 섀도우’
월광새도처럼 서시우의 이동기였다.
그림자만 있다면 제법 먼 거리도 단숨에 이동 가능한 능력이었다.
“1:0.”
나는 스코어를 말하며 거리를 벌렸다.
“다시 간다.”
‘달빛 제 3초식. 달의 축복. 1단계.’
이번에는 월광쇄도와 더불어 버프를 시전 했다.
이 속도라면 서시우가 그림자에 몸을 감추기 전 녀석을 목덜미를 잡을 수 있었다.
내 몸에 투명한 막을 씌운 것처럼 달의 축복이 내려앉았다.
서시우를 향해 도약했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서시우의 앞에 당도했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어둠이 서시우의 반 정도를 덮은 상태였다.
만월검을 노출 된 서시우의 상체를 향해 휘둘렀다.
“다크니스(darkness)”
그 한 마디에 갑자기 시야가 어두컴컴하게 변했다.
완전한 암전 상태.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서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야밖에 차단을 못해.”
“....”
그게 얼마나 큰 건데.
아쉬운 소리 하듯이 말하고 있네.
“조금 더 능력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가면 후각이나 청각도 차단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암전 된 시야에 점점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각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내 목을 겨누고 있는 서시우의 검.
“2:0. 맞지?”
“....”
서시우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설렁설렁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실전이었으면 꽤나 위협적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크 섀도우’는 그렇다 쳐도, 시야를 차단하는 ‘다크니스’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하지만 서시우는 누구의 편이던가.
누구의 동생이던가.
“두 가지 능력을 빼면, 나머지 능력들은 형이랑 연계해야지 시너지가 좋은 능력들이라.”
서시우가 말을 하며 검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나는 서시우의 손을 잡았다.
“왜? 연계 능력은 나중에 합 맞춰보기로 했잖아.”
나를 쳐다보는 서시우.
분명히 그랬지.
근데 서시우가 능력 사용하는 걸 보니 지금 합을 맞춰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맞춰볼까?”
내 말에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서시우.
“형이 분명히 그랬잖아. 형이랑 내 능력을 연계해서 사용하면 너무 파괴적이라서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
“아무리 뒷산이라도 대낮이야, 형.”
이걸 내 말을 잘 듣는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현실적이구나.”
말을 하며 만월검을 집어넣었다.
“수향아.”
“네~ 아주버님!”
내 부름에 쪼르르 달려오는 박수향.
“셋이서 밥이나 먹으러 갈까?”
“어머?! 진짜요? 완전 좋죠!”
한 번 박수향과 함께 얘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그녀로 달래기로 했다.
+ + +
이제는 단골집이라고 불러도 위화감이 전혀 없는 제일관.
“아주버님. 이것도 드셔보세요.”
며느리처럼 박수향이 양 손으로 내 접시에 깐풍기를 살포시 내려놨다.
“너 먹어. 제발.”
“에이~ 저는 아주버님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걸요.”
나는 구원의 손길로 서시우를 쳐다봤다.
이미 서시우의 접시에는 테이블에 있는 음식의 상당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녀석은 묵묵히 박수향이 조달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입에 안 맞으세요? 다른 거를..”
벨을 누르려는 박수향의 손을 잡았다.
“배불러. 이제 얘기나 좀 하자.”
“좋죠. 좋죠!”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는 박수향.
“그 태도는 내가 하는 얘기를 일방적으로 듣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맞습니닷!”
충성하는 자세를 취하는 박수향.
‘이~상하게 피곤한 캐릭터네.’
“기말고사 준비는 잘 돼가?”
말을 하며 서시우와 박수향을 번갈아 쳐다봤다.
“딱히 준비할 게 없어.”
“저도요, 아주버님!”
2학년 전교 1등과 2등이니.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그냥 대화의 화두를 던지기 위해 한 말이었다.
“슬슬 너희 실습 할 길드 정해야 하지 않아?”
헌터 학교는 3학년이 되면 대한민국에 정식 등록 돼 있는 길드로 실습을 나갔다.
실습이라는 특성상 웬만하면 길드 차원에서 지원하는 학생들을 모두 받아주는 게 관례였다.
관례이긴 하나, 그렇게 되면 문제가 발생했다.
많은 학생들이 인서울의 대학교를 희망하는 것처럼 많은 학생들이 이름 있는 길드를 선호했다.
그래서 생긴 게 ‘실습 정원’이었다.
각 길드마다 ‘실습 정원’이 있었고, 그 수를 채우면 더 이상 실습 인원을 받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 수시를 넣는 것과 비슷했다.
다량의 학생들이 몰렸을 경우, 학생들의 성적을 보고 길드에서 선택을 하니까.
예외의 경우도 있었다.
‘성적우수자.‘
혹은 능력이 탐난다던지.
이럴 경우에는 길드에서 학생 측에 먼저 오퍼를 넣었다.
‘실습 우리 길드로 와주십쇼~’하고.
1년여 시간 동안 실습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학생들이 실습한 길드 소속이 되는 경우가 거의 80%에 육박했다.
실습을 하는 순간 회사의 인턴이 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안 그런 경우도 있었다.
실습 해보니 영 별로더라. 라고 학생이 느꼈다던지.
실습을 시켜보니 영 별로더라. 라고 길드 측에서 느꼈다던지.
이러한 전반적인 과정은 모두 2학년에서 3학년 넘어가는 겨울방학 때 이루어졌다.
하지만 드물게.
아주 드문 케이스로 2학년 2학기부터 실습을 나가는 학생들이 있었다.
2학년 2학기를 패스해도 될 만큼,
월반을 해도 될 만큼 아주 뛰어나고 유능한 인재가 이에 해당 했다.
그런 인재 두 명이 현재 내 앞에 앉아있었다.
“너희라면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길드에서 오퍼 왔을 거 같은데. 아니야?”
내 말에 별 대답 없는 서시우.
표정을 보니 내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모든 길드는 아니고 95군데에서 오퍼가 왔습니다, 아주버님.”
“....”
그게 그거였다.
대한민국에 길드 숫자가 100군데 남짓인 걸 감안하면 거의 모든 곳에서 오퍼가 왔다고 해도 무방했다.
“어디로 갈지 정했어?”
내 말에 박수향이 뚱한 얼굴로 서시우를 쳐다봤다.
“시우가 어디로 실습 갈지 말을 안 해줘서요. 아직 못 정했어요.”
“..실습 할 길드는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 길드까지 따라 올 필요는 없어.”
“바늘 가는데 실이 안 가는 거 봤어?”
“....”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전생을 떠 올렸다.
‘전생에 서시우가 실습한 길드가..’
태양 길드였다.
한설휘의 할아버지가 수장으로 있는.
아무래도 창조 그룹과 커넥션이 짙은 길드다보니 부모님의 등쌀에 태양 길드로 실습 갔을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그게 아니라면 올해도 역시 태양 길드를 갈 테고.
“시우.”
나를 쳐다보는 서시우.
“나한테만 살짝 말해주면 안 돼?”
“아주버님!! 치사해!!”
나는 서시우 옆으로 걸어가,
귀를 내밀었다.
“비밀이야.”
내 귀에 속삭이는 서시우.
“....”
나는 귀를 문지르며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이건 말해줄게. 3대 길드에는 안 갈 거야.”
“진짜로?!”
서시우의 말에 토끼 눈을 뜨는 박수향.
대한민국의 3대 길드에는 태양 길드와 사신 길드가 포함 돼 있었다.
서시우의 말을 듣자 살짝 냄새가 나는 길드가 있긴 했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내 영향인가보네.’
내가 서진에게 빙의함으로써 가장 미래가 격변하다시피 바뀌고 있는 건 바로 서시우였다.
아직까지는 바뀐 미래가 녀석에게 긍정적으로 작용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내심 뿌듯하기는 했다.
단지.
서시우의 미래를 예측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게 옥의 티긴 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향아. 너는 뭔가 사신 길드가 어울리는 것 같은데.”
“저 그런 벌레. 곤충 능력자가 많은 길드는 싫은걸요.”
“....”
논지에서 벗어나 박수향과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뜬금없이 메시지가 떴다.
[훈수 두기에 성공 하셨습니다.]
[훈수 포인트 1이 적립 됩니다.]
‘뭐지?’
딱히 이 자리에서 훈수 둔 적이 없었다.
‘오류? 버그?’
띠링.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자가 왔다.
-야!! 고맙다!!
신지수에게서 온 문자였다.
“....”
아무래도 내가 추천한 영화가 먹힌 모양이었다.
‘그녀의 은밀한 사생활.’
박태산이 이런 영화 취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남자네. 남자야.
[작품후기]
코멘트 감사합니다. 추천도 한 번씩 부탁 드립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