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고 싶었는데.81회
한일전
제 5경기.
다른 경기와는 달리 양국 학생들이 조용히 관전 했다.
아무래도 스코어가 동점이다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이 한 경기로 한국이냐. 일본이냐.
승자가 나뉘가 되니까.
마치 나는 한일 축구 경기에서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온 느낌이었다.
‘꼭 일본이랑만 엮이면.’
한국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애국심이 넘치는 애국자가 되는 현상이 있었다.
나는 상대를 쳐다봤다.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여학생이었다.
류진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이름 역시 알고 있었다.
‘유우리.’
류진과 함께 일본 유망주 쌍벽이었다.
류진이 한설휘라면,
유우리는 일본의 정시아였다.
‘아, 이거 질 수도 없고.’
유우리는 자존심이 강한 여전사 캐릭터였다.
들고 있는 가느다란 검.
레이피어만 봐도 얼마나 최선을 다할 건지 보였다.
저건 유우리의 주무기였다.
앞 경기가 치러지는 동안 숙소 가서 챙겨온 모양이었다.
나는 난처한 얼굴로 유우리를 쳐다봤다.
여기서 유우리의 자존심을 뭉개자니 어린 새싹을 밟는 것 같고.
그렇다고 지자니 내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애들의 원망과 야유 소리가 하늘을 뚫을 것 같고.
“잘 부탁해.”
유우리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유우리의 몸집은 세리나나 박아름처럼 작았다.
하지만 그녀의 움직임과 능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이기면 이기는거고. 지면 지는거지.’
이게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문제라고.
레볼루션과 비교해보면 이러한 문제는 우주의 티끌만한 고민이었다.
“먼저 공격할게.”
정중하게 말하며 내게 사뿐하게 달려드는 유우리.
“소각.”
나는 손을 들어 한설휘의 능력을 사용했다.
내 손에서 뿜어져 나가는 화염포.
부드럽게 몸을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화염포를 피하는 유우리.
조금 더 움직임을 방해 할 생각으로 한 번 더 한설휘의 능력을 사용했다.
“불 소나기. 장작 태우기.”
경기장에 불 소나기가 굵은 방울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레이피어를 하늘을 향해 가볍게 몇 번 휘두르는 유우리.
그녀의 머리위로 얇고 투명한 막이 하나 생겼다.
‘검막(劍幕).’
그녀만의 방어 기술이었다.
내 지혜가 낮아서 그런지 불 소나기가 장작 태우기까지 시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검막에 막혀 갈 곳을 잃고 사방으로 튀었다.
이 시대에도 소드 마스터가 있다면,
유우리는 아마도 소드 마스터의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었다.
검술 천재.
그녀에게 붙어있는 수식어였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유우리.
“화염의 인도자.”
화염의 인도자는 상대 몸에 바로 몸을 지르는 능력이었다.
“장작 태우기.”
거기다가 화력을 더하면 아무리 유우리라고 해도 쉽게 대처할 수 없지 않을까?
몸에 붙은 불을 확인 한 유우리.
별 일 아니라는 듯,
팽이 돌듯이 몸을 회전시켰다.
단숨에 불이 진압됐다.
‘세상에는 참 사기 캐릭이 많단 말이지.’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했지만.
“메두사.”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약점은 있었다.
유우리는 다른 스텟에 비해 지혜 스텟이 다소 낮았다.
정시아의 능력에 순간 움직임이 멈춘 유우리.
나는 가까워진 거리만큼 다시 거리를 벌렸다.
다시 거리상으로 원점이 됐다.
나는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정시아를 슬쩍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정시아.
‘킹 코브라 사용한다?’
내 입모양을 읽은 정시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안 돼.’
“....”
망할 년.
내가 누구 때문에 지금 이러고 있는데.
정시아는 분명 금석과 최강자 선발전에서 싸울 당시 ‘킹 코브라’를 사용하긴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킹 코브라’가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극히 일부만 사용했으니까.
그래서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한설휘. 정시아. 금석의 능력을 차례차례 떠 올렸다.
이 중에 유우리에게 치명타까지는 아니더라도,
정타를 히트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당사자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 스텟은 비루했고,
그들이 가진 능력을 활용할 수 있다고는 하나 가진 힘이 현저히 떨어졌다.
내게 쇄도하는 유우리.
이번에는 쇄도하는 속도가 전보다 더 빨랐다.
“보이지 않는 공포.”
정시아의 능력을 시전함과 동시에 유우리가 사방으로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환각으로 보이는 뱀을 전부 죽이려는 건..’
유우리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맞네.’
환각으로 보이는 뱀을 모두 죽여 환각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을 줄이야.
내 앞에 선 유우리.
내 목 끝에 레이피어를 겨냥했다.
나는 양 손을 들었다.
“항복.”
“....”
조금 더 노력을 하면 대결 시간을 늘리기야 하겠지만,
그게 딱히 의미 있어 보이진 않았다.
나는 항복 선언하면 레이피어를 거둘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여자가 레이피어를 치울 생각을 안 했다.
“왜?”
의아함에 물었다.
“널 본 적이 있어.”
“나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야 유우리를 모니터로 본 적이 있다지만.
유우리와 만난 건 이번 생에 처음이었다.
“너튜브로.”
“....”
“너 달빛 계승자잖아.”
“..그래서?”
“왜 달빛 능력 사용 안 해?”
스텟이 낮아도 달빛력을 얻은 시점부터 달빛력만 충분하다면 달빛 초식을 사용 할 수야 있었다.
하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제대로 해. 너랑 한 번 겨뤄보고 싶었단 말이야.”
유우리가 레이피어를 치우며 약간의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말을 해도 ‘달의 축복’ 말고는 전부 무기가 있어야지 사용한 가능한 초식들이었다.
내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하는 유우리.
나는 변명이자면 변명을 한 마디 했다.
“무기가 없잖아.”
“아..”
그제야 내 양손을 쳐다보는 유우리.
“미안.”
사과를 하고 후다닥 자신의 진영으로 뛰어갔다.
검 한 자루를 구해온 유우리.
내게 내밀었다.
“이거 C등급이긴 한데 나름 쓸 만해. 그리고 내 무기도 C등급으로 바꿔왔어. 내가 너무 너랑 붙을 생각에 설레어 가지고.. 미안.”
“사과할 것까지야.”
“그럼 이제 제대로 하는 거지?”
“엉. 근데 이 검 부러져도 괜찮아?”
“아마..도? 친구 꺼라, 잘 모르겠지만 부러지면 내가 나중에 하나 사주면 돼. 됐지?”
“응.”
유우리가 후다닥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사람마다 행복이나 희열을 느끼는 포인트가 달랐다.
유우리의 행복은 훈련이었고,
희열은 강한 상대와의 대련이었다.
특히 검 대 검일 경우 유우리는 세상 제일 행복해했다.
“준비 됐어?”
유우리가 레이피어 대신 장검을 손에 들고 물었다.
“응.”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게 달려드는 유우리.
현재 내 달빛력은 ‘1000’이 넘었다.
모두 달 귀걸이 덕분이었다.
이 정도 달빛력이면 낮은 초식 몇 개는 사용할 수 있었다.
비록 스텟이 낮아 위력은 떨어지긴 하겠지만.
무리를 하면 위력을 끌어올릴 수야 있었다.
하지만 위급 상황이 아니면 굳이 무리를 할 생각이 없었다.
‘달빛 제 3초식. 달의 축복 1단계.’
나는 다가오는 유우리를 보며 우선 내 몸에 윤활유를 부었다.
내게 장검을 뻗는 유우리.
그녀의 검을 가볍게 쳐내며 가슴으로 검을 찔렀다.
몸을 살짝 옆으로 틀며 내 검을 위로 쳐 올렸다.
자연스럽게 내 상반신이 노출이 됐고,
유우리는 망설임 없이 검의 방향을 틀어 내 가슴팍을 노렸다.
뒤로 점프를 하며 그녀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달의 축복으로 스텟 보정이 됐다고는 하나,
유우리의 움직임을 전부 따라잡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시간이 지날수록 밀리기 시작했다.
챙! 챙!
몇 번 공방을 주고받은 후,
거리를 벌리는 유우리.
조금 더 밀어붙이면 그녀가 쉽게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몸도 푼 것 같은데 제대로 할까?”
“....”
몸을 풀었다니.
나는 지금 최선을 다 했는데.
그녀가 쥐고 있는 장검에서 하얀 검기가 덧 씌워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검기가 뻗어 나와 장검을 더 길게 만들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장검을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유우리.
하지만 장검이라는 특성에 능력을 더하자 무게감이 느껴졌는지,
양 손으로 고쳐 잡았다.
“뭐해?”
유우리가 물었다.
“뭐가?”
나는 되물었다.
“제대로 하자니까?”
“응. 근데?”
“아니..”
아무래도 자신과 달리 검을 아무렇게나 들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의아함을 느낀 것 같았다.
“제대로 안하면 다칠지도 몰라.”
“엉.”
“....”
참 훈훈한 대결이 아닐 수가 없었다.
훈훈함도 잠시.
유우리가 내게 달려들었다.
이동 속도 능력을 쓴 건지 순간적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놓칠 정도로 빨라져 있었다.
‘달빛 제 2초식. 월광쇄도(月光殺到).’
나 역시 속도를 높였다.
거기다 더해 정시아의 ‘뱀의 움직임’까지 사용했다.
마나와 달빛력이 줄줄 새어나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유우리의 검기를 검으로 받아내는 대신 회피를 하며 공격을 하려고 했다.
일반 검으로 검기를 받아냈다가는 그대로 검과 함께 내 몸이 썰리니까.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달빛 초식을 사용했다.
‘달빛 제 1초식. 달빛 가르기.’
사아악!!
까앙-!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너무나도 커,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승자는.
“어..어..”
“....”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달빛 가르기로 인해 유우리의 검기가 잘려나갔고,
유우리의 검기로 인해 내가 들고 있는 검이 반으로 댕강 났다.
유우리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이길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질 수도 없고.’
달빛 능력까지 사용 했는데, 져버리면 그간 떡상하던 내 이미지가 다시 하락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유우리의 진심에 응해주기로 했다.
‘달빛 제 7초식.’
처음 사용하는 초식이었다.
1초식은 공격 능력이었고,
2초식은 이동 능력이었다.
3초식은 버프 능력이었고,
4,5초식은 속박 관련 능력이었다.
6초식 달빛 소나기는 범위형 능력이었다.
7초식.
1초식과 마찬가지로 단일 대상을 타겟으로 한 공격형 스킬이었다.
1초식과 다른 점은 연타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또 한 가지.
“달의 광휘.”
반 잘려나간 검이 달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유우리가 사용한 검기와 비슷하게 무형의 달빛 검이 만들어졌다.
공격 플러스로 공격력 상승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고나 할까.
번쩍.
순간 내 몸에서 하얀 달빛이 터져 나왔다.
한 대.
내 검이 유우리의 검을 내리쳤다.
유우리의 검이 쿠키가 조각나듯 조각났다.
두 대.
칼날이 아닌 칼 등으로 유우리의 복부를 때렸다.
세 대.
다리로 유우리의 다리를 가격했다.
앞으로 고꾸라지려던 유우리의 몸이 뒤로 자빠졌다.
네 대.
는 치지 않았다.
움직임을 멈추고 무형의 달빛 검을 유우리의 목을 향해 겨눴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유우리.
‘아이고 삭신이야.’
온 몸이 짜릿짜릿했다.
그새 달빛력이 바닥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그래도 네 번 정도의 움직임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는 7초식을 해제했다.
검을 감싼 달빛 기운이 허공에 날리듯 사라졌다.
7초식 ‘달의 광휘’는 마치 상대에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효과를 줄 수 있는 능력이었다.
빛의 속도로 일방적으로 두드려 팰 수 있는 능력이라고나 할까?
이 능력은 아무리 스텟이 높아도 오래 시전 할 수는 없었다.
몸에 과부하가 심하게 오는 초식 중 하나였다.
그래도 딱 과부하 직전에 멈춰서 과부하가 심하게 걸리진 않았다.
“일어날 수 있겠어?”
들고 있는 검을 바닥에 버리며 유우리에게 손을 뻗었다.
얼이 나간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유우리.
“으..응..”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우리.
“와..”
그녀의 표정이 꼭 이성에게 반한 것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손 이제 놔도 될 것 같은데?”
손을 놓기는커녕 내 손을 양손으로 잡는 유우리.
“어떻게 한 거야? 응? 알려주라. 응응?”
“....”
유우리는 단순히 학구열에 불타는 거였다.
그래서 내 손을 잡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한 여자가 내 뒤에서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한설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