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부터 날로 먹게 생겼다.59회
예선전
예선 첫 날에 치른 두 경기는 낙승이었다.
첫 번째 경기 시간은 1분.
두 번째 경기 시간은 단 10초.
상대 두 명 다 100위 권 밖의 학생들이었다.
대진 운이 좋았다.
대진 운이 안 좋았어도 질 일은 없었겠지만.
예선 이튿날.
예선 참가 인원 120명 중 남은 인원은 반의 반 토막 난 30명.
나는 대기실에 앉아서 어제처럼 TV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추첨을 통해 대진이 정해졌다.
이기면 바로 본선 진출이었다.
지면 패자부활전 경기를 한 번 더 치러야 했다.
[1조. 박상수. 그리고 마동진.]
대진이 발표되고 있었다.
어제와는 달리 꽤 낯이 익은 이름들이 섞여 있었다.
그 중 가장 낯이 익은 두 이름이 발표 됐다.
[3조. 서진. 그리고 이수혁.]
‘이수혁이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1조에서 5조는 5분 후, 경기장으로 입장 해주시기 바랍니다.]
경기장으로 걸어갔다.
+ + +
경쟁 사회에는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관계가 하나 있었다.
‘라이벌’
기업이든 집단이든 개인이든.
내가 속해 있는 창조 그룹에도 라이벌 그룹이 하나 있었다.
‘제일 기업’
이수혁은 내가 창조 그룹의 장남이듯, 제일 기업의 장남이었다.
창조 그룹과 제일 기업은 앙숙이나 다름없었다.
세간에서는 두 사람을 이렇게도 표현했다.
‘재벌가의 망나니 쌍두마차.’
서진이 사고를 하나 터트리면 이수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사고를 하나 쳤다.
하지만 둘 사이의 접점이 있는 건 아니었다.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노는 구역이 달랐을 뿐.
노는 구역이 같았으면 호형호제를 맺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다가다 파티나 연회장에서 얼굴을 익힌 정도가 다인 사이.
말 한 번 안 섞어본 사이.
딱 그 정도가 다인 사이.
‘근데.. 왜 이 새끼는 눈을 이렇게 살벌하게 뜨고 있을까나?’
3조 경기장 위에 서 있을 때, 올백 머리에 노랗게 염색한 이수혁이 거만한 발걸음으로 등장했다.
등장하자마자 뱁새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서로 집안 사이가 안 좋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나는 시선을 들어 관중석을 쳐다봤다.
어제 보다는 관중이 늘어나 있었지만 여전히 텅텅 비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찰칵. 찰칵.
“이 쪽 한 번 봐주시죠!!”
“파이팅 포즈 한 번 취해주시죠!!”
아무래도 오늘 세기의 매치는 나와 이수혁인 모양이었다.
기자들이 우리와 제일 가까운 관중석에 우르르 몰려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승자와 패자에 따라 기사 제목이 이렇게 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들었다.
-재벌가의 기둥. 쓰러지다.-
혹은.
-재벌가의 장남들의 피 튀기는 혈전. 과연 기업에 영향을 줄까?-
워낙 과장되고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족속이 기자라는 직업인 걸 감안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으쓱 대지마. 병신아.”
“....”
기자들을 보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며 포즈를 취하고 있을 때, 이수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배를 많이 핀 것인지, 아니면 변성기인지 목소리가 걸걸했다.
나는 몸을 틀어 이수혁을 쳐다봤다.
“운이 좋아서 중간고사 1등 한 거 가지고 나대지 말라고. 토 나오니까.”
화 난 것 같은 게 아니라 이수혁은 실제로 화가나 있는 듯 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멀뚱멀뚱 쳐다보자, 한 걸음 내게 다가오는 이수혁.
표정이 급속도로 거만해지는 게, 내가 조용히 있는 이유가 쫄아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학교 와서 이미지 세탁 좀 빡세게 하려는 모양인데. 좆 까, 병신아. 너는 쓰레기니까 쓰레기처럼 굴어. 그게 어울리니까. 알겠어?”
자기소개 잘 들었고요.
나는 하품을 했다.
어제 예선전이 끝나고 밤늦게까지 뒷산에서 달빛력을 채우느라, 잠을 얼마 못 잤더니 피곤했다.
이런 내 행동이 도발이라고 여겼는지 갑자기 소리 지르는 이수혁.
“이 시발 놈이!!”
“....”
진짜 저 정도면 병원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개를 흔드는 내 행동이 2차 도발이라 생각을 했는지 이수혁이 내게 달려들려고 했다.
“이수혁 학생. 아직 경기 시작 안했습니다.”
링 밖에 있던 감독 교관의 말에 이수혁이 크게 숨을 들이쉬며 제 자리에서 멈춰 섰다.
“경기 시작하면 두고 봐라. 네가 어떤 새끼인지 내가 샅샅이 까발려줄 테니까.”
“야.”
“야? 내가 너보다 두 살이나 더 많아. 그러니까 형이라고 불..”
“형 새끼야. 쫌 닥쳐라.”
“이..이..”
부들부들 대는 꼬라지 하고는.
이수혁이 왜 내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쌍두마차로 같이 망나니 주가를 올릴 때는 잘못을 해도 나 때문에 커버가 됐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내 주가는 폭등하고 있었고,
이수혁의 주가는 폭락하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 초반 망나니짓을 일삼다가 요새는 잠잠해진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이수혁 집안에서 이런 말이 나오고 있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들었다.
‘서진이 철든 거 좀 봐라. 너는 도대체 언제 정신 차릴래?’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나는 이수혁의 몸을 스캔했다.
변변찮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두르고 있는 아이템은 죄다 B급 이상이었다.
최강자 선발전은 아이템도 능력의 일부분으로 치기 때문에 아이템 제한을 따로 두지 않았다.
이수혁은 본래라면 아이템 빨로 선발전 8강까지 오르는 전개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예선전에서 나를 만났다.
[자, 그럼 1조에서 5조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장외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수혁이 내게 달려들었다.
“느려져라!! 슬로우!!”
이수혁이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에서 미약하게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울부짖어라!! 흑염룡!!”
이수혁이 끼고 있던 장갑에서 검은 아우라고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는 나대지 못하게 만들어주마!!”
“네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게 있는데.”
나는 느려진 몸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나댄 적이 없어.”
“내가 형이라고 이 개객끼야!!”
주먹을 뻗는 이수혁.
‘뱀의 움직임.’
나는 이제 정시아의 능력을 100% 발휘 할 수 있었다.
능력을 사용하자 슬로우에 걸려 있었음에도 몸의 움직임이 민첩해졌다.
나는 옆으로 이수혁의 주먹을 가볍게 흘렸다.
“어..어?”
자신이 예상한 시나리오가 아닌지 당황하는 이수혁.
‘아이템이 좋으면 뭐해. 주인이 허접인데.’
“세상에서 널 지워주겠다!! 파이어 볼!!”
야구공만한 화염 구체가 내게 날아왔다.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은데.’
아이템 스킬을 사용 할 때 저런 시동어가 필요한 아이템은 몇 개 없었다.
그냥 멋있으라고 저런 말을 앞에 붙이는 것 같은데.
나는 화염 구체가 내 몸에 적중할 때까지 가만히 서서 지켜봤다.
퓨슈슈.
내 몸에 닿자마자 약간의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뜨겁긴 하네.’
가슴이 파이어 볼 때문에 뜨거웠다.
약간의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금석의 ‘자기 치유’ 능력이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속성 반지 효과. 괜춘괜춘하네.’
레인보우 새의 둥지에서 습득한, 다섯 속성에 대해 저항력이 30%가 있는 반지.
여태까지 성능을 실험해 볼 데가 없어서 묵혀두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실험을 해보니 30%가 확 와 닿았다.
‘속성 반지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데미지를 입었을 것 같은데.’
나는 가슴을 문지르면서 이수혁을 쳐다봤다.
공격을 성공했다는 생각에 통쾌하게 웃고 있었다.
“어떠냐!! 크하하!!”
“어떻기는.”
실험도 끝났으니까.
“보이지 않는 공포.”
후딱 끝내야지.
“리..리커버리!!”
‘호오.’
치유 능력 중 상급 능력이 있는 아이템도 가지고 있을 줄이야.
그래도 소용없었다.
내가 비록 지혜 스텟은 C급이었지만 사용하는 능력이 정시아표 능력이었다.
B급 아이템에 곧바로 풀릴 능력이 아니었다.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는 이수혁 앞으로 도약했고,
곧장 녀석의 멱살을 잡아 링 밖으로 집어 던졌다.
“이수혁 학생, 장외!!”
찰칵. 찰칵.
관중석에서 무수히 많은 후레쉬가 터지기 시작했다.
나는 카메라를 보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이 정도 액션을 취해주면 아버지가 카드 안 풀어주려나.’
중간고사 1등을 했을 때 은근히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돈이 없는 게 점점 불편해졌다.
‘이 장면을 기사로 보면 분명히 통쾌하게 생각할 게 분명한데 말이지.’
제일 그룹의 장남과 창조 그룹의 장남의 대결.
아무리 나에 대한 평가가 인색하다고는 해도 이건 무시하고 넘기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번 더 기대를 해보기로 했다.
+ + +
이수혁과의 대결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사가 줄줄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피식거리며 기사 제목을 읽었다.
“진짜 제목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짓네. 누가 보면 창조 그룹이 제일 그룹 인수한 줄 알겠네.”
“뭐가 그렇게 재밌느냐?”
“오늘 제일 그룹 장남이랑 경기한 거요. 그거 기사가 지금까지 100개가 넘게 났어요.”
나는 말을 하며 핸드폰에서 시선을 들어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첸을 쳐다봤다.
경기가 끝난 후, 첸의 권유에 학교 앞에 위치한 첸의 집에 밥을 먹으러 왔다.
“근데 어제까지 멀쩡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요?”
“그렇더구나. 아마도 능력 각성 시기가 다가오는 만큼 성장통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단다. 세나도 가끔 지금의 세리나처럼 갑자기 몸이 아팠던 걸 생각하면 맞지 싶다.”
“흐음..”
세나는 세리나의 엄마.
빛의 여왕 이름이었다.
나는 첸의 말에 수긍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국내에서 제일가는 치료 능력자가 치료를 못 할 이유가 없었다.
모니터로 이 세상을 볼 때 세리나가 픽. 픽. 하고 쓰러지는 걸 몇 번 목격하기도 했고.
“근데 생각보다 빨리 입양 하셨네요? 저는 꽤 밍기적하다 결단을 내리실 줄 알았는데.”
“어허. 어른한테 말버릇 하고는. 껄껄.”
“껄껄.”
“예끼! 따라하면 못 쓴다.”
“옙.”
된장찌개 냄새가 구수하게 주방을 맴돌았다.
거의 완성이 되가고 있는 모양.
턱을 괴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때 첸이 입을 열었다.
“세리나가 세나의 딸인 걸 알고 나니, 못 기다리겠더구나. 세나에게 갚을 빚이 워낙 많아야지, 껄껄.”
웃음소리가 너무 슬퍼보였다.
첸은 참으로 슬픈 캐릭터였다.
사랑하는 여인을 어떻게 보면 자신의 손으로..
크르릉!!
레이가 세리나의 방에서 튀어나왔다.
오는 길에 기숙사에 들려 레이를 데리고 왔었다.
동물들은 세리나를 좋아했고, 역시나 레이도 세리나를 좋아했다.
‘근데 왜 이렇게 자리에서 방방 뛰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레이가 내 바짓가랑이를 물고 세리나 방으로 이끌었다.
“어르신.”
나는 두부를 썰고 있는 첸을 부르며 세리나 방으로 달려갔다.
“엄마..엄마..”
“....”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워 있는 세리나가 눈을 감은 채, 손을 들고 엄마를 찾고 있었다.
아마도 잠꼬대인 것 같은데.
나는 세리나 옆으로 다가가 침대에 앉았다.
식은땀을 비 오듯이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세리나의 얼굴 옆에 있는 수건으로 세리나의 이마와 보이는 부위를 천천히 닦았다.
‘엄마라니.’
세리나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상상 속의 인물이었다.
상상 속에서도 아주 멀리 있는 허상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엄마라는 존재를 찾으며 잠꼬대를 하다니.
“설마..”
나는 고개를 돌려 문지방을 밟고 서 있는 첸을 쳐다봤다.
첸이 아무 말 없이 세리나를 숙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세리나를 엄마에게 데리고 간 겁니까?”
“....”
첸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와 손으로 가볍게 세리나의 이마를 만졌다.
그러자 세리나의 숨이 편안해지면서 잠꼬대를 멈췄다.
“세리나가 물어보더구나.”
“....”
“자신의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냐고.”
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서 한참을 세나에 대해 말해줬단다. 동화책을 읽듯이. 그러다 문득, 세리나가 엉엉 울기 시작하더구나.”
첸이 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를 닦았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
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식이 엄마 얼굴을 알아야하지 않겠느냐. 국 다 됐으니 밥이나 먹자꾸나.”
내 생각보다 이른 타이밍에 세나가 엄마의 존재를 알게 됐고, 이게 세리나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저.
이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