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45회
점검
‘달이 뜨는 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역경의 돌’을 획득 한 후 2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내일은 드디어 중간고사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흠.”
책의 맨 앞 장을 펼쳤다.
2주 동안 10번은 넘게 완독했다.
하지만 여전히 뜬 구름을 잡는 것처럼 아리송했다.
첸이 말 한 책은 이 책이 맞았다.
책의 중반부에 ‘밤하늘이 보이는 곳에서 수련을 했다.’라는 대목이 나오는 걸 보면.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앞에 말한 것처럼 아리송했다.
달이 뜨는 밤.
이 책의 내용은 누군가가 자서전처럼 기록한 내용이었다.
아침에 일어나고 날씨가 어떻고 밥은 뭘 먹고.
이런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자서전이라고 하기에는 어린 아이가 썼을 법한 일기에 가까웠다.
아리송한 가운데 한 가지는 확신했다.
‘이 책은 달빛 계승자가 쓴 것이다.’
선조의 누군가가 기록한 책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굉장히 한량 같은 선조가 심심풀이로 기록한 책이 틀림없었다.
마치 수수께끼 책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면 추리 소설이나.
단순히 심심풀이로 썼다고 해석하기에는 의미심장한 단어나 문장이 곳곳에 존재했다.
가령 이런 문장이라던지.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숨 쉬는 것에 집중을 하면 잡념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모든 감각이 눈을 떠, 내게 말을 건다. 들 숨 한 번. 날 숨 한 번.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고로, 오늘은 삼계탕을 먹어야겠다.’
괜히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10번을 정독하고 완독한 결과 아무리 자서전이라고는 하지만 선조는 문맥을 중요시 여기는 게 보였다.
근데 방금과 같은 문장은 문맥의 흐름을 절단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문장이 몇 문장이 존재했다.
“내가 너무 의미를 부여하는 건가.”
나는 책의 후미 부분을 펼쳤다.
‘11. 12. 그리고 13. 나는 숫자가 세상에 10까지 밖에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셈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자, 세 개의 숫자가 더 있는 걸 깨달았다. 덧셈과 뺄셈으로는 세 개의 숫자에 도달 할 수가 없음을.’
나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했다.
내가 알고 있는 달빛 초식은 총 10초식 밖에 없었다.
허나, 11초식. 12초식. 13초식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과대 해석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의미 없는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서이란.”
책을 덮고 저자 이름을 쳐다봤다.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나중에 헌터 도서관이나 가봐야겠네.”
책을 옆에 던져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걸어갔다.
“....”
세 사람이 앉아서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두 여학생이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 바보야!!”
“어떻게 이것도 몰라! 내일이 시험인데!!”
한설휘와 정시아.
개별 훈련과 공부를 끝내고 어제부터 금석의 과외 선생님을 자처 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레이와 뚜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책 본다더니?”
정시아가 나를 흘깃 보고 말했다.
“다 봤어.”
“너 진짜 공부 다 한 거 맞아?”
한설휘가 의심스레 말했다.
“응.”
나는 레이와 뚜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금석을 쳐다봤다.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박태산 교관에게 시달려 집에서는 한설휘와 정시아에게 시달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짠하기는 했지만, 급속도로 성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다 흐뭇했다.
준 완성형에 가까운 한설휘와 정시아와는 달리 금석은 한창 성장 단계에 있는 녀석이었으니까.
나는 금석의 상태 창을 열었다.
-이름: 금석
나이: 17세.
체력: AAA(98)
근력: AAA(60)
지혜: D(80)
민첩: B(30)
스텟을 올리기 어려운 A 등급은 작지만 꽤나 유의미한 수치 변동이 있었다.
체력과 근력에 비해 턱 없이 낮았던 지혜 스텟은 대폭 상승해 있었다.
민첩 스텟 역시 BB에서 B로 한 계단 등급이 올라 있었다.
아주 고무적인 결과였다.
이대로만 간다면 금석은 분명 내게 있어 든든한 아군이 될 게 틀림없었다.
나는 내 스텟창을 열었다.
-이름: 서진
나이: 17세.
체력: CCC(50)
근력: CCC(20)
지혜: CCC(10)
민첩: CCC(80)
달빛력: 40
이주 동안 꾸준히 훈련을 한 결과 D라는 장벽을 허물고 C라는 등급에 입성했다.
‘전부 CCC이긴 했지만.’
달빛력은 생각보다 잘 오르지가 않았다.
하루에 많이 올라봐야 4정도가 올랐다.
“근데..”
나는 뚜뚜를 쳐다봤다.
가만히 내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덩치가 뭔가 많이 커진 것 같은데.”
솜털 같이 작던 아이가 이제는 품에 안으면 품이 꽉 찰 정도로 성장했다.
‘잘 먹어서 그런가?’
반면 레이는 여전히 솜털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훈수 리스트를 열었다.
금석과의 신뢰도 점수는 89점 이었고, 정시아와의 신뢰도 점수는 87점이었다.
둘 다 90점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훈수 포인트는 이 주 동안 차곡차곡 쌓아서 2500포인트가 있었다.
‘조금 더 모아야지. 근데..’
나는 한설휘를 쳐다봤다.
극성인 엄마처럼 금석의 손등을 펜으로 때리고 있었다.
‘슬슬 한설휘도 훈수 리스트에 추가 될 때가 됐는데.’
신뢰도 점수는 합격선을 진작 넘은 것 같고.
아직 훈수 포인트가 적정선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설휘를 훈수 리스트에 추가 할 수만 있다면.
‘공격력이 확 뻥튀기 될 텐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한설휘가 쳐다봤다.
“밖에서 훈련 좀 하다가 오려고.”
내 말에 금석이 쥐고 있던 펜을 놓으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너는 어디 가려고?”
“나도 훈련 좀 하러 가려고.”
“앉아.”
“....”
엉덩이를 들썩이던 금석이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나도 같이 가자.”
한설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훈련하는 거 봐서 뭐하게?”
“그냥 바람 좀 쐬고 싶어서. 왜? 극비 훈련이라도 해?”
“딱히.”
뚜뚜랑 레이도 데리고 한설휘와 집을 나섰다.
+ + +
기숙사 뒤편에 위치한 산 정상.
나는 목검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꽤나 폼이 엉성했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태가 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목검을 손에 쥔 그립감도 그렇고 움직임을 취할 때 어색한 부분도 많이 사라졌다.
오늘은 상현달이 뜬 날이었다.
상현달 아래에서 연무를 추듯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러다 한 번씩 달빛 초식의 예비 동작을 취해보기도 했다.
점점 땀이 흥건히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하아..하아..”
하루 중 나는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이렇게 달빛 아래에서 훈련을 하고 있으면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그야말로 무념무상.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자 들었던 손을 내리며 숨을 골랐다.
그러면서 옆을 쳐다봤다.
한설휘가 양 옆에 뚜뚜와 레이를 끼고 앉아서 가만히 날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보려고? 안 추워?”
4월 중순이라고는 하나, 산 속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쌀쌀한 날씨였다.
내 말에 한설휘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능력자인지 몰라?”
“아..”
어쩐지.
뚜뚜와 레이가 한설휘 옆에 꼭 붙어 있더라니.
“너 검술은 어디서 배웠어?”
“왜?”
“아니 그냥. 뭔가 형식적이면서 형식적이지 않아서. 쫌 말을 막하자면 꼴리는 대로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근데 막 엉성해 보이지는 않는 이상한.. 그런 거 있잖아. 막춤을 추는데 잘 춰.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모니터 세상을 보면서 고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움직임을 떠 올리면서 막 움직이는 것뿐인데.
나는 땀이 식기 전에 다시금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네 안부 물어보더라.”
멈칫하고 한설휘를 쳐다봤다.
달빛이 조명 역할을 해서 그런지 머리 넘기는 모습이 퍽 예뻤다.
‘피부가 하얘서 더 그런 것 같은데.’
“서진이 잘 지내냐고.”
“....”
“그래서 잘 지낸다고 했어. 말썽도 안 피우고.”
한태문.
서진을 한설휘와 마찬가지로 친손자처럼 생각하는 늙은이였다.
“할아버지가 우리 중간고사 끝나면 너희 부모님이랑 다 같이 밥 한 번 먹자고 하던데.”
“정혼은 말씀 드렸어?”
“응. 알겠다고 하시더라. 우리 할아버지 알잖아. 내 말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거.”
나는 목검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바닥에 잠시 앉았다.
다 같이 밥이라.
‘음.’
나는 학교에 입학 한 후 집에 연락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먼저 내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한 것 같았다.
나는 유배당한 몸이니까.
‘그래도 이실장 말로는 꽤.. 이미지가 좋게 바뀌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시기상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밥 먹자.”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양 길드의 수장, 한태문.
그를 직접 한 번 만나보고는 싶었다.
“너..진짜 달라졌구나.”
“뭐가?”
“아냐..아무것도.”
한설휘가 말하는 의중은 간단했다.
서시우가 능력을 개화한 후 서진은 서시우의 비교 대상이 됐다.
그 이후부터 서진은 집안끼리 식사하는 자리에는 절대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알겠다고 했다.
꽤나 그녀 입장에서는 놀랄 일이 아닐까?
“근데 레이는 강아지 맞아? 뭔가..”
“늑대야.”
“..응?”
“몰랐어?”
“..응..”
크르르.
레이가 기분이 나빴는지 내 옆으로 뛰어왔다.
“너 관찰 능력 있다고 했지?”
민망한지 뚜뚜를 과하게 쓰다듬으며 한설휘가 물었다.
“응.”
“나도.. 아..음.. 아니다.”
한설휘가 말하다가 말았다.
“정체 돼 있고, 진전이 없는 네 상태가 어떠냐고?”
“어..어떻게 알았어? 관찰 능력으로 그런 것도 보여?”
“자세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한설휘는 너무 이른 나이 때 급속도로 빠른 성장을 했다.
그래서 아직 그녀의 정확한 스텟은 알 수가 없었지만 전투력 수치가 90점은 찍지 않았을까 라는 예상이 들었다.
그녀의 생전 전투력은 92~93점.
잠재력 수치는 95점이었다.
즉 그녀는 성장 가능한 수치가 많이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정체기가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학생 때는 게임으로 따지면 저렙이라 레벨 업 경험치가 1000정도 필요한데, 한설휘는 고렙이라서 레벨 업 하기 위해서는 경험치가 최소 십만은 넘게 필요했다.
아무리 개인 훈련을 한다고는 하지만 저렙 사냥터에서 같이 사냥을 하고 있으니, 정체기가 찾아올 수밖에.
하지만 내가 함께 하기로 정한 이상 그녀는 성장을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한설휘의 잠재력 수치를 95점에서 더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조바심을 느낀다고 달라질 건 없어. 하던 대로 꾸준하게 훈련 해. 웅담 챙겨먹으면서.”
“으..응..”
무언갈 기대하고 있던 한설휘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근데.”
내 말에 한설휘가 눈을 깜빡였다.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진짜?!”
한설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탓에 한설휘의 무릎을 베고 있던 뚜뚜가 낑낑거리면서 앞발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응. 중간고사랑 최강자 선발전 끝나면 도와줄게.”
“응!!”
한설휘가 환하게 웃었다.
‘진짜 뒤지게 예쁘네.’
서진에게 빙의하기 전의 삶에서는 한설휘 같은 여자는 그저 TV에서나 보던 게 다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가까이서 얘기도 하고. 입도 맞춰보고.
‘출세했네.’
라고 하기에는 짊어진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나는 하늘을 쳐다봤다.
원래는 본래의 시나리오에만 집중하면 돼서 조금 긴장감이 없긴 했다.
하지만 첸의 집에서 저승의 소녀가 비스트 마스터에게 개입을 하고 난 후 나는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다녔다.
또 언제 비스트 마스터와 같은 본래 시나리오를 이탈하는 시나리오가 발생할지 몰랐다.
난이도가 노말에서 하드로 바뀐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과연 이 세상을 무사히 구해낼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도 가끔씩 들었다.
“서진아.”
“응?”
하늘을 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한설휘가 불렀다.
“네가 보기에 시아는 어때?”
“뭐가?”
“나보다.. 강해?”
“....”
“아니 그냥.. 중간고사 시즌이 되니까 쫌.. 궁금하더라고.”
뭐라고 해야 할까.
“강한 건 모르겠고, 너보다 약하진 않아.”
“..그래?”
“응. 이제 슬 내려갈까?”
“응.”
중간고사 전 모든 점검이 끝났다.
우리는 기숙사로 내려갔다.
[작품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