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1편.....37회
피의 군주
식당에 들어와 레드와 채린의 앞에 섰을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레드가 달려들기를.
금석의 능력 ‘야수의 본능’으로 감각을 극대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눈에는 보였다.
레드의 손톱에 점처럼 아주 작은 선혈의 흔적을.
레드는 결벽증이 있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미세한 부분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선혈이 묻은 게 최근이라는 소리였다.
대상은 아마도 채린.
피를 다루는 능력자답게 레드는 아주 소량의 피만으로도 상대방의 데이터나 기억을 엿보는 게 가능했다.
채린의 피가 제공한 정보에서 나라는 인물을 캐치한 모양인데.
바로 옆에서 사라진 레드의 신형이 나타났다.
슥.
그 순간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고 레드의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났다.
“고맙습니다.”
상당히 무심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가 나를 쳐다보며 한 마디 했다.
“가라.”
사신 길드의 부 길드 마스터.
‘홍련.’
그녀가 내 앞을 지키듯이 가로막고 섰다.
그녀는 채린 보다 전투력 점수가 높은 여자였다.
점수는 96점.
S랭크 초입에 해당하는 실력자였다.
국내에 존재하는 30명의 랭커 중 한 명.
89점이라는 B급 실력으로 채린이 당당히 사신 길드의 마스터 자리를 유지하며, 다른 길드 위에 설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홍련이라는 이 여자였다.
“크하하!! 천한 것들이.. 이럴 줄 알았지. 크흐..크하하하!!”
레드가 머리를 부여잡고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나는 식당에서 빠져나가려다 채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입술을 움직였다.
‘맡겨줘요.’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실이 있는 2층으로 뛰어갔다.
+ + +
“왔느냐. 껄껄.”
첸이 상황실에서 팝콘을 먹으며 나를 반겼다.
“예.”
나는 첸의 옆에 가서 앉아서 식당 CCTV로 보이는 화면을 쳐다봤다.
어제 나는 채린에게 이 작전에 필요한 인물들 리스트를 말해줬고, 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 외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다.
“오랜만에 제자들 실력 좀 보겠구나.”
식당에 박태산과 신지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사신 길드의 간부들까지.
단순히 전투력만 따졌을 때는 화면에 보이는 저들은 레드를 이길 수가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레드를 잡기 위해서는 다량의 랭커와 A급 능력자들이 필요 했으니까.
하지만 서로의 시너지가, 부족한 부분을 상쇄시켰다.
그리고 이곳은 채린을 포함 사신 길드원들의 홈그라운드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사신 길드의 능력자들은 전원 곤충. 혹은 벌레 능력자들이었다.
정시아의 뱀 능력 같이 파충류 능력자도 몇 명 섞여 있긴 했지만, 대체로 그러했다.
곤충과 벌레에게 홈그라운드는 그야말로 B급 실력을 A급으로 둔갑할 수 있는 장소나 다름없었다.
화면에 채린과 홍련.
그리고 사신 길드의 간부들이 레드를 중심으로 지그재그로 에워쌌다.
오직 사신 길드에만 존재하는 특유의 ‘진법’.
“호오. 지주진(蜘蛛陣)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지주진.
쉽게 말해 거미 능력자를 중심으로 진을 펼치는 진법이었다.
다른 말로는 ‘거미줄 치기’라고도 했다.
거미 능력자이자 지주진의 중심인 채린이 손을 들었다.
드디어 시작 됐다.
모기를 잡기 위한 사투가.
+ + +
“간격 좁혀!!”
채린이 소리쳤다.
그녀의 말에 홍련과 간부들이 서로의 간격을 10m에서 조금 더 좁혀 들어갔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유일하게 채린의 눈에만 지주진의 형태가 보였다.
그녀는 거미.
지주진을 형성하는 거미줄의 근원지였다.
채린은 레드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거미줄에 포박 당해 있는 레드의 모습이.
뿐만 아니라 간부들이 있는 위치까지 거미줄이 뻗어나가 있었다.
지주진에서 간부들의 역할은 거미줄의 기둥 역할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거미줄을 통해 간부들의 마나가 채린에게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거미줄의 굵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지주진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로지 지주진을 형성한 이들과 지주진의 지주.
채린이 허락한 이들만 가능했다.
“지주진이라는 것인가.”
레드가 남 일 말하듯이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밧줄에 포박당한 것처럼 손가락을 꼼지락 거린 게 다였다.
지주진에 포박당하면 상황 종료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채린은 서진의 말을 떠 올렸다.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절대 피를 흘려서는 안 됩니다. 절대. 만약 다치게 되면 바로 신지수 교관을 통해 치료를 하셔야 합니다.’
“박태산.”
채린의 말에 지주진 안에 들어와 있던 박태산이 채린을 쳐다봤다.
“아직 네 강철 딴딴하지?”
“그래.”
“좋아.”
“신지수.”
지주진 밖에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신지수가 채린을 쳐다봤다.
“오키.”
신지수가 사신 길드의 부 길드 마스터 홍련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아직까지 레드는 별 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아니, 못 움직이고 있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레드의 얼굴이 평온한 게 꼭 움직일 수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럴 리가 없다.’
채린은 단언할 수 있었다.
지주진으로 잡은 빌런만 100명이 넘어갔다.
그 중 S급 빌런도 다수 포함 돼 있었다.
채린은 홍련에게 ‘사랑의 불주사’를 놓고 있는 신지수를 쳐다봤다.
‘사랑의 불주사’는 타임 어택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괜찮았다.
홍련은 사신 길드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벌 능력자.
5분이면 레드를 제압하고 남을 거라고 채린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고, 모든 게 완벽했다.
오히려 이러한 계획이 오바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자꾸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도대체 왜?’
서진의 말 때문에?
아니면 레드의 평온한 표정 때문에?
단순한 기우다.
단순한 걱정이다.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을 덮어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을 때 홍련과 눈이 마주쳤다.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존재.
친동생이 죽고 난 후 채린에게 더 특별하고 각별해진 존재.
채린은 홍련을 믿었다.
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련이 주무기인 쌍 단검을 허리춤에서 꺼내며 레드에게 달려들었다.
레드 지척에 이르렀을 때 홍련의 모습이 순간 사라졌다.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였다.
레드의 머리 위에서 나타난 홍련.
한 마리의 벌처럼 양 손에 든 단검을 교차로 레드의 목덜미를 향해 찔러 넣으려고 했다.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뒤로 젖힌 레드.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호..홍련아!! 물러서!!”
아무리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자연의 섭리와 같은 일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작용, 반작용. 중력. 탄성.
홍련 역시 레드가 입술을 깨무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순간 가속이 너무나도 빨랐고, 내지른 손을 회수하기에는 늦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저 자 보다 자신의 단검이 더 빠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레드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피가 이상하게 더 빨랐다.
홍련은 뭔가 잘못 됐음을 느꼈다.
그 때 누군가 자신의 옆구리를 강하게 밀쳤다.
쿵!!
“박태산 나이스!!”
박태산의 신체가 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박태산의 능력 중 하나인 ‘강철화’였다.
박태산은 자신의 팔에 묻은 레드의 피를 힐끔 쳐다봤다.
그냥 피였다.
새빨간.
“역시 천한 것들은 눈물 겹단 말이지.”
레드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흐아압!!”
박태산이 기합과 함께 주먹을 뻗었다.
그런데 레드가 사라졌다.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헛손질을 한 박태산이 주먹을 회수하려고 할 때 팔등에 묻어있던 레드의 피에서 불쑥 레드의 머리가 튀어 나왔다.
“킬킬킬. 서프라이즈~”
머리에 이어 다른 신체부위가 튕기듯 박태산의 팔등에서 튀어나왔다.
“진형 유지해!!”
레드에게 걸었던 지주진이 풀렸다.
레드가 원래 있던 자리에 허물을 벗은 것처럼 거미줄이 엉켜 있었다.
채린은 다시 지주진을 펼치려고 했다.
진형이 무너지지 않았고, 몇 초의 시간이 있으면 다시 레드를 거미줄로 옮아 맬 수 있었다.
“홍련!!”
채린이 다급하게 홍련을 불렀다.
홍련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이 자유로워진 레드에게 달려들었다.
레드는 목을 스트레칭하며 손으로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는 자신의 입술을 닦았다.
“혈폭(血爆).”
홍련을 향해 피가 묻은 손을 내밀며 말을 하는 레드.
피가 난사하듯 홍련을 향해 분사 됐다.
펑! 펑! 펑! 펑!
레드의 피에 맞은 식당의 벽면이 폭탄이 터진 것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홍련은 유연한 움직임을 가져가며 한 발도 맞지 않고 레드의 코앞까지 접근했다.
“지금이다!! 만근추!”
뒤에서 레드의 몸을 끌어안는 박태산.
그가 딛고 있는 바닥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박태산이 적을 포박할 때 주로 사용하는 능력이었다.
포박 당한 적은 무게의 짓눌림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저런, 저런. 학습능력이 없어도 너무 없군요.”
하지만 단 한 부위.
레드의 머리는 자유로웠다.
다시금 피를 뱉으려고 할 때 홍련이 레드의 입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닥쳐.”
홍련이 손에 남은 단검 하나로 레드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 + +
“끝이 난 것 같구나. 껄껄.”
“....”
나는 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표정이 왜 그렇게 심각하느냐?”
“어르신.”
“그래.”
“채린씨가 위급 상황이라고 꼭 어르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래서 오신 거죠?”
“그렇지 그렇지. 이 늙은이가 정이 많아서. 껄껄.”
“20년 전.”
나는 첸을 쳐다봤다.
“인체 실험의 생존자입니다. 저기 레드라는 놈.”
“지..지금 뭐라고..”
첸의 얼굴에 단숨에 붉어졌다.
“0-188번 실험체. 어르신께서 담당하신..”
“그..그럴 리가 없다!!”
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니터에 바짝 다가가는 첸.
“그 아이는.. 분명.. 분명..”
“죽었죠.”
“....”
첸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네..네가 어찌 아는 것이냐.. 네가 어찌..”
“그 얘긴 나중에 하시죠.”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은 0-188번 실험체를 살린 건 제로입니다. 녀석의 권능으로 말이죠.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제로의 권능은 실험 단계였습니다. 그래서 0-188번. 레드는 살아났지만 죽은 시체와 다름없는 상태로 눈을 뜨게 됐습니다. 살아있는 시체가 된 거죠. 피를 먹어야만 생명을 연장 할 수 있는.”
“....”
“각설하고. 어르신.”
나는 첸 앞으로 걸어갔다.
“어르신들의 제자가 지금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꽤 상황이 심각해졌거든요. 제게 ‘모순의 축복’ 능력을 사용해주시죠.”
첸에게도 신지수의 ‘사랑의 불주사’와 비슷한 버프 능력이 있었다.
사랑의 불주사가 신체 스텟을 5분 동안 대폭 상승 시켜주고, 1시간 동안 디버프라면 첸의 ‘모순의 축복’은 단 1분짜리 버프였다.
1분이라고 해도 단순한 1분이 아니었다.
1분 동안 능력치 D급인 내가 A급에 준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사기급 능력이었다.
단지, 대가로 노화가 가속화 될 뿐.
내가 알기로 1분에 1년 정도 노화가 진행 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게 디버프의 끝이었다.
“네가 어떻게 ‘모순의 축복’ 능력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된다.”
첸은 자체적으로 ‘모순의 축복’ 사용을 금했다.
첸은 ‘모순의 축복’을 저주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자기의 신념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르신 제자 다 죽어요.”
나는 턱으로 모니터 화면을 가리켰다.
넝마가 된 레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끓듯이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안 된다.”
단호하네.
“그래요 그럼. 다 죽게 내버려두..”
“네 이놈!!”
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나한테 승질을 낼까.’
이 상황을 내가 전부 계획하기는 했다.
첸의 ‘모순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한 번 받으면 1년의 노화가 진행 되는데 그러면 나는 17살에 신체는 18살의 신체를 가질 수가 있었다.
18살.
이 세계에서는 성장 전성기라고 부르는 나이였다.
나는 남들보다 한 발 먼저 성장 전성기를 맞이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사실 여기까지 상황이 흐르지 않고 채린 선에서 일이 마무리 됐으면 했다.
내 본 능력을 감추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 상황까지 흘러온 거.
“어르신은 제가 달빛 계승자라는 거 아시잖아요.”
“....”
“그래서 저한테 밤하늘이 보이는데서 훈련하라고 그런 거 아닙니까?”
나는 상황실 구석에 있는 장검 한 자루를 가지러 걸어가며 계속 말했다.
“저를 치료하실 때 느끼신 거죠?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기운. 시간 없습니다. 진짜로 제자 다 죽일 겁니까?”
레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이제는 용암이 끓듯 끓고 있었다.
“..그래도.. 안 된다.”
“그래요 그럼. 저만 죽죠, 뭐.”
나는 상황실에 있는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지금 당장 전원 식당에서 빠져나가세요. 거기 있다가 다 죽어요. 죽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서있던가요.”
마이크를 옆으로 던지며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떨어져요.”
나는 장검을 바닥 쪽으로 겨눴다.
건물 구조 상 상황실의 아래가 바로 식당이었다.
“달빛 제 1초식.”
여기까지 말 했을 때 몸에서 갑자기 힘이 넘치기 시작했다.
슬쩍 첸을 쳐다봤다.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써줄 거면서.
‘그럴 줄 알았어, 영감탱이.’
“달빛 제 1초식. 달빛 가르기.”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
사아아.
내 주변으로 약한 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2연참.”
바람이 돌풍으로 변했다.
[작품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