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녀석을 잘만 활용하면 최선의 수를 둘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36회
피의 군주
“피를 채집하러 왔다?”
“예!! 레드님의 지시사항입니다!”
“그래?”
“예!! 레드님이 채집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고 하셔서 4일 째 수색 중이었습니다!”
굳이 물어보지 않는 말도 술술 풀어놓았다.
대답이 시원찮을 때 마다 몇 번 주먹 찜질을 해준 결과였다.
박쥐는 지금 자판기나 다름없었다.
“채린한테는 왜 그런 소리 한 거야?”
“..예?”
“레드랑 둘이 만나지 말라는 둥, 와인 마시지 말라는 둥.”
“아..! 그건 라이언님 지시사항이었습니다! 레드님의 일을 방해하라고 하셨거든요. 하하!!”
웃으면서 박쥐가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았다.
어떻게 해서든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너 라인이 어디야?”
“라인..이요?”
“레드한테 붙은 거야 아니면 라이언한테 붙은 거야?”
“..어.. 그것이..”
박쥐가 좌우로 눈알을 굴렸다.
마치 내 질문이 이지선다로 들린 모양이었다.
띠링.
박쥐의 호주머니에서 문자 소리가 들려왔다.
박쥐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딴청을 피웠다.
“꺼내.”
“..옙.”
“누구야?”
“레..드님입니다.”
“뭐라고 왔어?”
“어허. 손가락 놀리지 말고 읽기만 해.”
“옙.. 내일 사신 길드 채린과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해운대 바닷가 근처의 양식당. 미리 가서 수상한 점이 있는지 없는지 체크하고 와라. 그런데 아직도 피 채집을 못 끝 낸 것이냐. 이 무능하고 천박한..”
“됐어. 그만 읽어도 돼.”
“예..”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박쥐.”
“예..옙!!”
발을 꼼지락 거리던 박지가 척추를 세우며 대답했다.
“너 얼굴 말고 목소리도 변장 가능해?”
“들어본 목소리면 가능합니다!! 변장에 관해서는 제가 카멜레온 보다 훨씬 낫습니다!! 카멜레온은 멍청해서 행동이나 습관은 따라하지 못하지만 저능 가능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 입니다!!”
“....”
내가 아무 말 없이 잠깐 있던 게 박쥐 입장에서는 도살을 기다리는 동물의 심정이었던 모양.
아까보다 말이 더 길어졌다.
“가령.. 레드로 변장도 가능 하겠네?”
“..가..가능하긴 한데.. 그랬다가는 혹시나..”
“지금 하라는 말 아니니까 긴장 풀어.”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생각 정리가 모두 끝났다.
나는 채린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 + +
“하이 하이!”
정시아가 하리부의 거처로 들어왔다.
문자로 간략하게 현 상황에 대해 정시아에게 설명을 한 상태였다.
“얘가 그 박쥐란 놈이야?”
“응.”
“안녕, 박쥐?”
“아..안녕하세요.”
“널 위한 선물을 가지고 왔지롱~”
정시아가 내가 부탁한 독충과 존재맹세 계약서를 꺼냈다.
“이게 뭡..니까?”
박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와 정시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방금 말했잖아. 널 위한 선.물 이라고.”
정시아가 음흉하게 웃었다.
나는 정시아의 손에 있는 존재맹세 계약서를 받아, 훑었다.
내가 말한 사항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자 시간 없으니까 빨리 독충 먹고 여기에 피로 지장 찍어.”
나는 박쥐에게 존재맹세 계약서를 내밀었다.
정시아는 독충을 내밀었다.
“저..저기 여러분..?”
박쥐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뒤로 가려고 했다.
박쥐의 어깨를 잡는 정시아.
“여기서 죽는 것 보다는 이편이 더 낫잖아. 안 그래?”
누가 악역인지 모를 정도로 사악하게 말을 한 정시아가 박쥐의 입에 억지로 독충을 우겨넣었다.
“커..컥.. 커억..”
“오케이~ 다음은..”
정시아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박쥐의 엄지를 살짝 그었다.
박쥐가 반항하려고 하자 정시아가 능력을 사용 했다.
“메두사.”
몸이 굳은 박쥐.
아무런 저항 없이 존재맹세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와.. 일 처리 보소.’
옆에서 보고 있는데 정시아와 한 편이라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행동에 망설임이 하나도 없었다.
“으..으..”
독충을 먹고 존재맹세 계약서에 지장까지 찍은 박쥐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우리를 쳐다봤다.
나는 확인 사살 차원에서 입을 열었다.
“허튼 짓 하면 독충을 펑~ 하고 터트릴 거야. 그리고 우리에 대한 정보를 아주 조금이라도 발설하잖아?”
존재맹세 계약서를 들어서 툭툭 쳤다.
“그래도 몸이 펑~하고 터져. 무슨 말인지 알지?”
“박쥐씨. 대답 하셔야지?”
“예..예..”
박쥐를 한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은 이 방법 밖에 없었다.
목숨을 손에 쥐고 있는 방법.
다른 방법을 썼다가는 이 녀석이 언제 뒤통수를 후릴지 몰랐다.
“근데 너 레볼루션 관련해서 정보 누설하면 죽는 거 아니었어? 이상하네.”
내 물음에 박쥐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말이죠.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적정선만 지키면 괜찮은 것 같더라고요. 하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랄까요. 하..하..”
“그래?”
“예. 레볼루션 내의 기밀 사항 같은 거 말이죠. 근데 제가 말단이라 그런 정보를 알 리가 없으니까. 하핫..”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볼루션의 간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십자가 인장이 몸에 박혀 있었다.
인장에는 여러 가지 주문이 걸려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레볼루션 관련 정보를 누설하면 인장이 폭발한다’ 였다.
하지만 박쥐의 말처럼 기밀 사항만 아니면 괜찮은 모양이었다.
“근데 박쥐야.”
“예.”
“우리는 그런 거 없다?”
“..예?”
“흘깃흘깃 존재맹세 계약서를 봐서 알겠지만 우리는 적정선 그런 거 없어.”
“....”
“우리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하거나 배신할 기미가 보이면 바로 끽.”
나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무슨 말인지 알지?”
“....”
박쥐의 표정은 딱 이랬다.
‘인생 망했다.’
나는 그런 박쥐를 심심찮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 하지마. 너는 오래오래 장수 할 팔자로 만들어줄 테니까. 그러려면 확실히 우리 편이 돼야겠지?”
“..그게 무슨..”
“너는 우리를 너어~무 신뢰하는 상태가 됐지만 우리는 너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거든.”
“....”
“레드한테 문자 보내.”
“뭐..뭐라고.”
“지금 내가 하는 말 그대로 치면 돼.”
+ + +
“라이언을 닮아 참으로 무능하군.”
창문 밖의 야경을 보며 레드가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애초에 박쥐에 대한 기대감이 1도 없었으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죽여야겠어. 그러면 라이언이 좋아하겠지. 후후.”
띠링.
손에 들고 있는 와인 잔을 돌리며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을 때 소파에 있는 핸드폰이 울렸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소파로 걸어간 레드.
“흐음..”
핸드폰을 확인했다.
박쥐에게서 온 문자였다.
-해운대에 도착 했습니다. 딱히 수상한 점은 발견 되지 않았습니다.
“수상한 점이 없다라..”
레드는 제일관에서 봤던 채린의 얼굴을 떠 올렸다.
“분명히 뭔가..”
십자가 인장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의 표정.
아주 미묘하게..
“날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는데 말이지.”
괜한 기우라고 넘기기에는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레드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 + +
“역시 예상대로네.”
일요일이 됐고, 채린과 레드가 만나는 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일정과 장소에 변동사항은 없었다.
하지만 약속 시간 10분 전.
레드는 갑작스레 약속 장소를 바꿨다.
‘그럴 줄 알았어.’
의심스러운 상황이 없다는 게 오히려 레드에게 의심을 샀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만큼 레드는 의심병 환자 수준이었으니까.
나는 핸드폰으로 채린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장소 변경. 변경 장소는..
‘사신 길드.’
“....”
장소 변경 리스트에 없던 장소였다.
그렇다고 해서 당황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채린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당장 길드원들 내보내요.
레드의 노림수는 혹시 모를 사태가 발생 시, 사신 길드원들을 뱀파이어로 감염시키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일반 시민이나 일반 헌터를 감염 시키는 것보다 채린이 상대하기가 껄끄러워 지니까.
‘그렇게는 안 되지.’
“박쥐. 사신 길드로 이동해.”
“..넵.”
내 말에 박쥐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우리 길드로 가는 거야?”
“응. 레드가 너희 길드에서 보자고 했대.”
“그래도 돼?”
“길드원들 피하라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아마도.
뒷좌석에 있던 정시아가 근심 가득한 얼굴을 했다.
차가 출발 했다.
+ + +
“차에 있어. 부르면 박쥐 데리고 나와.”
“응..”
정시아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괜찮아. 날 믿어.”
나는 정시아의 머리를 한 번 만지고 박쥐를 쳐다봤다.
“뻘 짓 하면 알지?”
“예..”
이 녀석도 이 녀석 나름대로 힘이 없었다.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어제까지만 해도 라이언과 레드 사이에서 썩은 동아줄과 그냥 동아줄을 고민 하던 중 나라는 동아줄을 강제로 쥐게 됐는데.
나는 차에서 내렸다.
사신 길드 건물로 걸어갔다.
일부로 5분 정도 거리에서 차를 세웠다.
혹시나 마주쳤다가 박쥐의 존재를 들키면 곤란했으니까.
사신 길드는 5층짜리 건물이었다.
5층과 옥상 중간에 ‘사신’이라는 길드 마크와 이름이 대문짝하게 박혀 있었다.
1층으로 들어갔다.
경비와 안내 임무를 맡고 있는 사신 길드 소속 헌터가 내 얼굴을 보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미리 채린이 언질을 해놨고, 나는 곧바로 지하로 향했다.
지하에는 사신 길드의 식당이 있었다.
이번 작전은 비밀리에 시행 되는 작전이었다.
그래서 소수 인원만 이번 작전에 개입 할 예정이었다.
소수 인원이라고는 해도 최정예 인원들만 선발했다.
채린 쪽 사람들로만.
그 이유는 머리수가 많아지면 괜히 잡음이 밖으로 세어나갈 우려가 있었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작전 사실을 외부로부터 숨겨야 했다.
어제 저녁 늦게 채린과 계획을 짰고, 내 계획을 들은 채린은 곧바로 수긍을 했다.
이번 계획의 주도자는 표면상 채린이었다.
그 편이 사람들을 모으기가 쉽고 설득력이 있었으니까.
나는 현재 그저 헌터 학교에 다니는 재벌가의 장남일 뿐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은 내 말을 양치기 소년이 하는 말처럼 들을 게 분명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채린과 레드가 마주보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곧장 그 곳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나는 레드를 보며 싱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본래라면 나는 이 계획에서 빠져야 했다.
채린에게 모든 계획과 변수를 일러주고 그녀에게 모든 걸 맡겨야 했다.
하지만 나는 혹시나 발생한 변수를 제어하고 싶었다.
“또 만나네.”
레드가 웃었다.
“네!! 형이랑 친해지고 싶어서요.”
“내가 실례라고 몇 번을 말해. 올라 가. 빨리.”
“아니 그래도..”
나는 채린의 말에 불쌍한 척 레드를 쳐다봤다.
“하하. 괜찮습니다. 밥은 여럿이서 먹는 게 맛있으니까요. 밥 먹었어?”
“잠시만요!”
나는 뛰어가서 식판에 밥을 퍼서 채린 옆에 착석했다.
“어린 친구가 참 싹싹하네요.”
레드의 말에 채린이 나를 째려봤다.
“싹싹하긴요. 버릇없는 거죠.”
“하하.”
달그락달그락.
나는 입에 밥과 반찬을 넣으며 귀를 쫑긋 세웠다.
“근데..”
레드가 주변을 살폈다.
“원래 길드가 이렇게 조용한 편인가요? 길드원들을 좀처럼 만나기 힘들군요.”
“지금 시간이 다 현장 나갈 시간이라서요. 요즘 게이트가 자주 열려서 골치아파 죽겠어요.”
“그래요?”
“네.”
달그락달그락.
“밥맛이 참 훌륭하군요.”
나는 힐끔 레드의 식판을 쳐다봤다.
거의 손도 안 댔다.
“제가 밥 힘으로 일하는 타입인지라. 근데 레드씨.”
“말씀하세요.”
“왜 장소를 갑자기 저희 길드 하우스로 바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음.. 말씀 드리면 저를 이상한 놈으로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욕만 안하시면 뭐..”
“하하. 욕이라니요. 저는 한 사람을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을 보는 편이거든요. 이곳은 전부 채린씨의 주변 사람들 아닙니까. 사람들이 몇 없긴 하지만.”
“아..”
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레드가 들고 있는 수저를 놓았다.
“채린씨에게는 동생이 없지 않나요?”
레드가 내 쪽을 쳐다봤다.
“아 그게.. 친동생은 아니고 친한 친구의 동생이거든요.”
“그래요? 창조 그룹의 장남 서진이 친한 친구의 동생이군요.”
“..네.”
“그럼 별로 슬퍼하지 않겠군요.”
“무슨 말씀..”
레드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죽여도.”
“....”
레드의 신형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작품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