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보이는 S급들-34화 (34/196)

‘레드..이 새끼가 왜 여기에?’34회

박쥐의 고민

아이템 수집가라는 직업은 전 세계적으로 각광 받는 직업 중 하나였다.

그들 중 몇 명의 수집가는 다량의 S~A급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대체로 그들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질 않았다.

도둑 헌터들의 표적이 되니까.

그래서 가끔 대놓고 아이템을 수집하는 수집가들은 잘나가는 길드들과 손을 잡았다.

아이템 수집가는 수집하는 아이템 중 일부를 길드에게 주고, 길드는 아이템 수집가를 지켜주고.

말 그대로 서로 윈윈 하는 협력 관계를 맺는 셈이었다.

하교를 하고 제일관에서 채린을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채린은 내게 아이템 수집가의 비서가 조금 수상하다고 했다.

아니, 수상한 말을 했다고 했다.

절대 아이템 수집가와 둘이서 만나지 말라는 둥, 와인을 마시지 말라는 둥.

결정적으로 그녀가 이상하다고 느낀 말은 이거였다고 했다.

‘절대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 더.

‘절대 십자가 인장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 혹여나 물어보더라도 모른다고 대답해라.’

이 대목에서 내가 채린에게 물었다.

혹시 먼저 그런 쪽의 화두를 던졌냐고.

채린은 아니라고 했다.

대뜸 비서라는 작자가 그렇게 말을 했다고 했다.

이러한 사유가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였다.

채린의 의심은 합리적이었고,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앉을까요?”

레드의 말에 나는 일부러 웃었다.

채린이 내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일부러 여기서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티를 냈다가 채린이 오해를 사 섣부른 행동을 할 수도 있었다.

내가 웃자,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웃으며 자리에 앉는 채린.

“아이템 수집가를 여럿 만나봤지만 가장 젊고 잘생기셨네요.”

“그런가요. 하하.”

채린의 립 서비스에 레드가 웃었다.

“아, 여기는 제 동생인데 아이템 수집가를 동경하고 선망해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자리에 같이 있어도..”

“물론.”

레드가 인자한 미소로 화답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잠시 후, 음식이 차례차례 나오기 시작했고 평범한 얘기들이 채린과 레드 사이에서 오고갔다.

그 동안 나는 머리를 풀가동해 생각을 하고 또 했다.

한국에 레볼루션 간부가 얼굴을 비추는 건 1년 후였다.

그것도 레드가 아니라 라이언이었다.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건 분명히 레드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분명 전생에 비해 이른 타이밍에 레볼루션 피라미들을 처치하기는 했다.

그에 대한 나비효과인가.

“얼마 전에 동생 분을 잃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사건이더군요.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애도를 표합니다.”

레드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레드가 고개를 들었다.

미소를 짓는 레드.

“복수심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십자가 인장에 대한.”

그 멘트를 듣고 나는 어느 정도 확신했다.

‘나비 효과.’

그리고 레드가 왜 채린에게 접근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최근 레볼루션 피라미들을 죽인 건 대외적으로 모두 채린으로 돼 있었다.

접근한 이유가.. 설마..

‘채린을 죽이기 위해?’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였다.

“네.”

나는 고개를 홱 돌려 채린을 쳐다봤다.

순순히 인정을 한다고?

레드 정도의 실력이면 굳이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도 채린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아직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지금처럼 순순히 인정을 해 버리면..

“그랬었죠. 그런데 이제 복수할 상대가 다 죽어버렸으니, 뭐.”

채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복수할 상대가 다 죽었다?”

“네. 더 없는 것 같아요. 헌터 협회에서도 수사 종결하라는 문서도 내려왔고. 그래서 손 떼려고요. 슬슬 이제 서로 배도 찬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 어때요?”

“그러죠.”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잘 넘어갔다.

계속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는 레드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믿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후식으로 나온 차를 마시며, 두 사람이 나누는 아이템 관련 대화를 들었다.

“아 정말요? 와.. 드워프가 제작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이건 채린씨에게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레드가 나를 보며 윙크를 했다.

‘눈에 손가락을 찔러버리고 싶네. 확 그냥.‘

하지만 나는 어린 애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알고 지내는 드워프가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좋아요! 완전 좋아요!”

“귀여운 면이 있군요.”

“..네?”

“아..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죄송합니다.”

레드의 멘트에 채린의 얼굴이 살짝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레드가 어떤 놈인지 알고 있어서 그런지 녀석의 멘트가 소름 돋게 들렸다.

“자리를 옮겨서 한 잔 어떻습니까?”

레드가 제안 했다.

의식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레드의 말에 곧바로 채린이 내 쪽을 쳐다봤다.

자연스레 레드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누나 오늘 밤에 나랑 데이트하기로 했잖아.”

나는 최대한 친누나에게 말하는 것처럼 장난치듯 말했다.

“아..그..렇지? 아 이걸 어떡하죠?”

채린이 레드를 쳐다보며 양 손을 모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동생이랑 한 달 전부터 약속했던 거라. 한 달 전부터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얼마나 찡찡 대던지. 그 영화가 오늘 까지 상영하고 극장에서 내린다며?”

“응응.”

“제목이 뭐더라?”

“내 눈에만 보이는 S급들?”

“그래, 그래. 그거 완전 재밌다고 길드 내에 소문 쫙 퍼졌어.”

“그럼 추천 좀 하라고 말 좀 해줘.”

“..응?”

“아냐. 아무것도.”

우리의 즉흥 연기에 레드가 속아 넘어간 것 같았다.

“사이가 좋은 남매군요. 오늘은 제가 동생 분에게 졌습니다.”

레드가 손을 들어 항복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드르륵.

직원이 디저트를 들고 들어왔다.

“다 먹은 접시는 치워드리겠습니다.”

접시를 치우던 직원이 실수로 앞 접시 하나를 레드가 있는 쪽으로 떨어뜨렸다.

“죄..죄송합니다.”

직원이 죽을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여서 사죄했다.

접시를 집어 들어 직원에게 내미는 레드.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늘 입고 세탁하려고 했거든요. 하하.”

“물티슈라도 가져다..”

“괜찮습니다. 가서 일 보세요.”

“그..그래도..”

순간적으로 레드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나가보세요.”

레드가 정중하게 웃으며 말했다.

직원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괜찮으세요?”

채린이 물었다.

“실수로 그런 건데요, 뭘.”

레드가 대수롭지 않게 휴지로 와이셔츠에 튄 음식물 자국을 닦았다.

“저 잠시만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채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드와 독대를 하게 됐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디저트를 집어 먹으며 한 번씩 레드를 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17세가 지을 법한 소년의 미소를 한 방씩 날렸다.

“이상하군.”

움찔.

나는 레드의 말에 그를 쳐다봤다.

“아이템 수집가를 동경하고 선망하면 묻고 싶은 게 많을 텐데.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봐도 괜찮아.”

‘후우...’

오늘 속으로 몇 번 안도의 한 숨을 내쉬는지 몰랐다.

나는 학구열과 호기심에 충만한 코스프레를 하기로 했다.

“저.. 아까 드워프 아이템이 있다고 하셨는데, 진짜에요?”

“그럼~ 진짜지.”

“우와아!! 그럼 드워프 친구가 있다는 것도..”

“그럼, 진짜지.”

이 세상에는 인간 종족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서유럽 쪽에 드워프, 엘프.오크와 같은 이종족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과 교류를 일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외벽을 높이 올려 자신들만의 세상을 구축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모든 관계가 단절 됐고, 인간들 역시 서유럽 쪽은 지구에 없는 땅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세계 안의 또 다른 세계.

사람들은 그곳을 ‘웨스트 월드.’라고 불렀다.

레볼루션은 현재 웨스트 월드에 발을 내딛기 위해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드가 드워프 친구가 있다고 해도 내 입장에서는 전혀 놀라운 얘기가 아니었다.

미리 알고 있기도 했고.

하지만 리액션을 하지 않으면 연기하는 게 티가 날 것 같아서 최대한 자연스레 행동하려고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이거 한 입 먹어볼래?”

레드가 호주머니에서 빨간 초콜릿을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초콜릿이에요?”

“수제 초콜릿이야. 한 번 먹으면 빠져나올 수가 없을 정도로 달콤하지.”

빨간 초콜릿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 마디만큼 작은 초콜릿이었다.

“뭔가.. 체리 맛이 날 것 같아요.”

내 말에 레드가 말없이 먹으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입에 넣고 오물오물 거렸다.

레드가 흡족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아, 죄송합니다. 통화가 길어져서.”

채린이 들어왔다.

“누나 나 화장실 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퉤.”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입에 넣었던 초콜릿을 뱉었다.

입에 넣었던 상태 그대로였다.

씹는 척 연기를 했다.

“아 망할 새끼. 설마 설마 했다.”

나는 변기 물을 내렸다.

빨간 초콜릿의 성분은 레드의 피였다.

먹으면 레드의 종이 된다.

나는 변기 물을 내리자마자 채린과 레드가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혹시 내가 없는 사이 레드가 채린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 + +

“저 그럼 시간 되실 때 연락주세요.”

제일관을 나서며 채린이 싱긋 웃으며 레드를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레드가 대답하며 목례를 살짝 했다.

“동생과 데이트 잘 하시길.”

레드가 퇴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려고 했다.

“괜찮아요? 안색이..”

“괜찮아졌어요.”

“식사를 잘 못 하시던데, 혹시 음식이 입에 안 맞았어요?”

“....”

“아니면..”

채린이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봤다.

“누나. 저희 데이트하러 가기로 했잖아요.”

나는 채린에게 팔짱을 끼며 걷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최대한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 + +

레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서 성큼성큼 ‘제일관’으로 들어갔다.

“뭐 좀 두고 와서요.”

복도를 지나던 레드.

지나가던 직원의 목을 손톱으로 찔렀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른 속도였다.

“찾으셨어요?”

“네.”

제일관을 나서는 레드.

가볍게 자신의 옷을 털었다.

“어디서 천한 것이 감히..”

그의 뒤로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119 불러 119!!”

레드는 그 소리를 들으며 채린과 서진이 사라진 곳을 쳐다봤다.

“맛보고 싶군.”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레드는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 +

“아니 도대체 한 달 전에 죽은 녀석들 피를 어떻게 채집해 오라는 거야.”

곰 왕국에 들어서며 박쥐가 궁시렁궁시렁 거렸다.

“다 말랐거나, 지워졌겠지. 안 그래? 안 그러냐고.”

다가오는 곰 한 마리를 보며 말을 하는 박쥐.

“네가 뭘 알겠냐. 네가 뭘 아냐고오!!”

달려드는 곰의 머리에 스트레이트로 주먹을 뻗는 박쥐.

곰의 머리가 뒤로 꺾이며 즉사했다.

“진짜 난제다, 난제야.”

시간대가 밤이라 어두컴컴했지만 박쥐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두 마리의 미친놈이 있어. 그럼 누구를 선택해야 될까?”

다가오는 곰에게 다시 말을 거는 박쥐.

“한 마리는 성격이 개지랄 같지만 비위만 맞춰주면 오케이고.”

쿠오오!!

“한 마리는 성격이 개지랄 같은데 비위를 맞춰도 개지랄 같아. 어라?”

곰의 머리에 주먹을 날리며 깨달음을 얻는 표정을 짓는 박쥐.

“답이 나왔잖아. 역시 레드가 더 지랄 맞은 놈이었어. 그게 아니면 죽은지 한 참 된 녀석들의 피를 가져오라고 할 리가 없지. 좋다! 나 박쥐. 오늘부로 노선 확실히 정해쓰!”

걸어가던 박쥐.

제자리에 서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가만 생각해보면 라이언 이 새끼도 만만찮은데.”

다시 걸었다.

“그래도 레드보다는..”

다시 멈췄다.

“아닌가?”

띠링.

라이언에게서 문자가 왔다.

따르릉~

레드에게서 전화가 왔다.

박쥐는 눈을 깜빡이며 핸드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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