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며 일행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28회
의술사 '첸'
“나쁘진 않군.”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남자가 와인 잔에 레드 와인처럼 붉게 일렁이는 액체를 한 모금 마시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와인 잔을 가볍게 돌리며 창가로 걸어갔다.
남자가 있는 곳은 고층이었고, 창가로 지상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여전히 교양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도시군.”
도시를 밝히고 있는 네온사인과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의 라이트가 남자의 눈에는 어수선하고 하찮은 개미의 움직임처럼 보잘 것 없어 보였다.
당장이라도 발을 뻗어 밟아죽이고 싶은 욕구가 순간 치밀었다.
그 대신에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는 남자.
“흐음..”
남자는 소파에 앉으며 옆에 있는 신문을 들었다.
헤드라인 기사가 꽤나 인상이 깊었다.
-십자가 인장.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이번에 ‘곰 왕국’에서 십자가 인장을 몸에 새긴 흉악한 수배범 세 명을 검거했다. 그들의 반항이 워낙 거세, 어쩔 수 없이 현장 사살 조취가 취해졌다.”
국어책 읽듯이 기사를 읽던 남자는 한 대목에서 신문이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살 조취를 명령 및 실행에 옮긴 건 사신 길드의 길드 마스터 ‘채린’이다. 채린은 이번뿐만 아니라 얼마 전 번잇문에 출현한 ‘변장술의 달인’을 처치한 바 있다. ‘변장술의 달인’ 역시 몸에 십자가 인장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여기까지 읽은 남자는 신문을 옆에 가볍게 던졌다.
“나쁘진 않게 생겼네.”
신문의 오른쪽 편에 채린의 사진이 작게 실려 있었다.
“무슨 맛일까. 꽤..달콤할 것 같기도..”
남자가 와인 잔을 혀로 핥았다.
띵동.
그 때 누군가 초인종을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
가운을 여미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인터폰을 확인하니 아는 사람이었다.
현관문을 여는 버튼을 누른 남자는 다시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미천한 제가 감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남자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들라.”
그제야 신발 벗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엇..”
방문객이 현관에 있는 물체에 발이 걸려서 넘어질 뻔 했다.
방문객은 물체를 확인하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얼굴이 창백한 여자 시신이 눈을 뜬 채, 죽어 있었다.
마치 몸에 수분이 모두 증발한 것처럼 비쩍 마른 채로.
“레드님을 뵙습니다.”
방문객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에 레드는 다리를 꼬며, 방문객을 쳐다봤다.
단지 쳐다볼 뿐인데 방문객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제..제가 드린 신문은 혹시.. 읽어 보셨습니까?”
“그렇다.”
방문객의 말이 퍽 조심스러웠다.
“저희에 관해 알고 있는 유력한 용의자가 바로.. 사신 길드의 채린이라는 여자입니다.”
말을 하며 레드의 눈치를 살피는 방문객.
“저희?”
레드가 되 물었다.
그러자 황급히 수습하는 방문객.
“아..아닙니다. 저희라니요. 제가 감히 무례를 범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를..”
“좋다. 내가 아량이 넓은 걸 감사하게 여기거라. 격이 떨어지는 라이언이었으면 넌 지금 죽었을지도 모른다. 후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자, 물고 온 정보를 풀어 보거라.”
“예.”
방문객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표정에서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말실수하면 죽는다.’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하면서 입을 여는 방문객.
“그게 그러니까.. 채린을 만났습니다.”
“만나? 채린을?”
“예. 그리고 약속을 잡았습니다.”
“약속을 잡았다라..”
“예.. 미천한 제가 감히 판단을 하는 것 보다 고귀하신 레드님이 직접 한 번 만나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키지 않으시면 바로 약속을 취소하겠습니다.”
방문객은 죽을죄를 지은 대역죄인 같은 얼굴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흐음..”
말없이 와인 잔을 돌리는 레드.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방문객은 초조해졌다.
방문객의 땀으로 바닥이 흥건해지고 있을 무렵 레드가 입을 열었다.
“좋다.”
“..예.”
방문객은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근데 말이다.”
“..예?”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잘 납득이 가질 않는단 말이지.”
“어..어떤 게 말입니까?”
“박쥐.”
“예.”
박쥐라고 불린 방문객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너는 분명 라이언의 오른팔이 아니더냐.”
“..예.”
“흐음..”
박쥐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레드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죽는다.’
라는 감각이 박쥐의 온 몸을 휘감았다.
단지 시선일 뿐인데, 레드의 위압감은 가히 대단하다고 박쥐는 생각했다.
“너는 네 주인처럼 멍청이는 아닌 게로구나.”
“....”
“멍청한 주인을 섬기는 똥개는 참으로 안타까운 법이지.”
박쥐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입술이 말라서 터질 것 같았다.
“좋다. 네 말대로 이번 일이 잘 풀린다면 널 거두어주겠다. 라이언에게서도 널 지켜주겠다.”
“가..감사합니다!!”
박쥐가 절을 했다.
“단.”
엎드린 자세로 그대로 굳은 박쥐.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행동을 한다면 널 산 채로 까마귀의 먹이로 주겠다.”
“..예.”
“가보거라.”
“예.”
자리에서 일어난 박쥐.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박쥐.”
‘시발..’
박쥐는 속으로 욕을 했다.
하지만 주인의 부름을 받는 순종적인 강아지처럼 레드를 쳐다봤다.
“저녁으로 짜장면을 먹었더냐?”
“예..”
“다음부터 날 만나러 올 때는 양치질과 가글을 꼭 하고 오거라. 냄새가 거북하니.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현관을 나선 박쥐.
현관문이 완전히 닫혔을 때야 비로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발 새끼.. 라이언님 보다 더한 새끼가 있을 줄이야.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박쥐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라이언님.”
+ + +
차창 밖으로 벚꽃이 아름답게 피어난 모습이 보였다.
나는 창에 딱 달라붙어 실시간으로 사라졌다 나타나는 벚꽃의 어여쁜 자태를 감상했다.
“애들이랑 벚꽃이나 보러가지 그랬어?”
운전을 하던 신지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바로 했다.
“그래도 직접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요.”
“그 생각은 참 기특하긴 한데.”
신지수가 시선을 살짝 돌려 나를 쳐다봤다.
“너 어제 퇴원 했어.”
“....”
“비록 몸이 괜찮아 보여도, 당분간은 집에서 절대적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나는 멀쩡했다.
온 몸에 자질구레하게 흉터가 생긴 것을 제외하면.
흉터도 신지수와 그녀의 스승인 첸의 능력 덕분에 자세히 안 보면 티가 안 날 정도였다.
“너 그러다 탈나면 난 모른다. 말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내가 동승한 게 나쁘진 않은 모양인지 앞을 보는 신지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우리는 지금 벚꽃이 만연한 도로를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목적지는 신지수의 스승이 있는 곳이었다.
‘첸.’
그는 이 시기에 죽게 되는 인물이었다.
날짜를 확인해보니 공교롭게도 바로 내일이었다.
미래에 본격적으로 레볼루션과 싸우게 되면, 많은 헌터들이 죽어 나간다.
그 중 안 죽고 살았다면 큰 힘이 됐을 인물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만약 첸이 살아 있었더라면 살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첸은 미래를 위한 포석 중 죽어서는 안 될 돌이었다.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지금이어서는 안 됐다.
“근데 서진아.”
“예.”
“쟤는 왜 데리고 온 거니?”
“....”
뒷자석에 어린아이처럼 창문에 매달려 있는 애가 한 명 있었다.
‘세리나.’
“어.. 친구끼리 같이 바람 쐬면 좋잖아요.”
“그런 놈이 석이랑, 시아, 설휘를 냅두고 왔다?”
“..하하.”
나는 멋쩍게 웃었다.
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신지수가 언급 한 애들도 같이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만류했다.
‘놀러 가는 게 아니거든.’
내 목숨을 구해줘서 감사 인사를 전하러가는 목적이긴 했지만 그건 부수적인 목적이었다.
“아~ 아~”
뒤에서 세리나가 창을 열고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냈다.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 때문에 진동했다.
“춥지도 않나봐.”
신지수가 엑셀을 밟았다.
+ + +
촌에 빨간 경차 한 대가 들어섰다.
온통 논밭이었고, 가구는 사이사이에 한 가구씩 들어서 있었다.
이곳이 첸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세상과 사람에 치이던 첸은 스스로 귀향살이를 선택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하는 것 같지만.’
첸의 집은 촌에서 조금 더 들어간 으슥한 산 속에 위치하고 있었다.
“내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돼.”
신지수의 말에 나랑 세리나가 차에서 먼저 내렸다.
“와.. 나 처음 와봐.”
도시 아이들에게는 촌 풍경이 다소 생소할 수도 있었다.
세리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아!”
‘마음에든 것 같아서 다행이네.’
세리나는 원래 안 오려고 했었다.
그런데 내가 억지로 끌고 왔다.
‘도움이 돼야 할 텐데.’
확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왠지 이곳은 세리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 가볼까!”
차를 쳐 박아두다시피 주차를 한 신지수가 스트레칭 하듯 팔을 돌리며 기운차게 말했다.
나는 식물도감이라도 채울 기세의 세리나를 이끌고 신지수를 따라갔다.
신지수가 가는 길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탓에 길인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따라 오솔길 같이 나 있는 곳을 걷고 있을 때 하늘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주변으로 나무가 빼곡하게 있었지만 하늘을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 새끼들아!! 내가 한 번만 더 나 올 때 하늘 가리면 다 튀겨서 먹어버린다고 했지!!”
신지수가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하늘이 다시 맑아졌다.
“별 거 아니야. 스승님의 문지기라고나 할까?”
신지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늘을 덮었던 새 떼가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앉아서 우리를 쳐다봤다.
“아..안녕?”
세리나가 손을 들어서 인사했다.
짹! 째에엑!!
몇 마리가 날아와 세리나의 머리와 손에 앉았다.
“신기하네.”
그 광경을 본 신지수가 말했다.
“처음 본 사람은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서진아. 너 쟤 능력 알아?”
나는 모른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새 관련 능력이 있으려나?”
다시 걷기 시작하는 신지수.
오답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능력이긴 했다.
‘빛.’
새는 따사로운 햇빛을 좋아하니까.
“나는 금석의 교감 능력 있는데 그럼 나도..”
나는 손을 들었다.
새 한 마리가 내 손을 물어뜯고 갔다.
“....”
아무래도 정시아의 능력도 가지고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다 왔다!”
5분쯤 걸었을까.
신지수의 말처럼 넓은 마당이 나왔다.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긴 마루가 인상적인 촌가였다.
“할배~”
신지수가 첸을 불렀다.
사석에서는 칭호를 편하게 부르는 모양이었다.
“할배~ 어디 있어~ 예쁘니 제자 왔다네~”
신지수가 마당을 가로질러 눈에 보이는 문을 다짜고짜 벌컥벌컥 열어젖혔다.
‘동물 진짜 많네.’
신지수가 첸을 찾고 있을 때 나는 마당을 둘러봤다.
여기저기서 동물의 시선이 느껴졌다.
개. 돼지. 소. 새. 고양이. 말.
‘저건 꼭 호랑이처럼 생겼네.’
크어엉!!
“....”
나는 시선을 돌렸다.
진짜 호랑이였다.
“꺄하하! 간지러워!!”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다람쥐 무리가 세리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슬금슬금 다른 동물들도 세리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할배!!”
그 광경을 보고 있을 때 신지수가 소리를 질렀다.
촌가의 문이 다 열려 있었다.
“어디 간 거야? 여기서 기다려. 찾아보고 올게.”
신지수가 성큼성큼 촌가의 뒤뜰로 걸어갔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세리나를 쳐다봤다.
아직 능력을 개화하지도 않았는데 동물들은 그녀의 능력을 알아보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세리나의 생일은 반 년 정도였다.’
그 전에 어떻게 해서든 세리나의 유약한 성심과 성격을 어떻게..
“꺄아악!!”
신지수가 비명을 지르며 뒤뜰에서 뛰어왔다.
크르릉!!
그녀의 뒤로 보이는 멧돼지 한 마리.
눈 한 쪽에 붕대를 감싸고 있었다.
“녀석!! 게 서라!!”
멧돼지의 뒤로 백발의 60대 할아버지가 뜀박질을 하며 등장했다.
“살려줘!!”
신지수의 외침에 60대 할아버지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높이 도약을 했다.
“이 노오옴!!”
단숨에 맷돼지와 거리를 좁힌 할아버지.
손에 들고 있는 부채로 멧돼지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꾸에엑.
고꾸라지는 멧돼지.
“후.”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드는 할아버지.
그는 자신이 내일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까?
“안녕하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한국의 슈바이처.
첸을 만났다.
[작품후기]
앞으로 연재 시간을 자정 12시에서 12시 10분사이로 고정을 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