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아가 날 보고 서 있었다.19회
곰 왕 '하리부'
“설명해.”
“미행했어.”
“왜?”
“지금 그게 중요해?”
어제 나한테 내일 몇 시에 나가냐 뭐하냐고 물어보더니.
‘미행하려고 그랬군.’
나는 동굴 안쪽을 쳐다봤다.
정시아의 말처럼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치타가 죽으며 낸 단말마로 인해 레볼루션 피라미들이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상대는 총 세 명이야.”
그렇군.
“발걸음 소리를 보면 셋 다 남자야.”
그렇군.
“마음 같아서는 내가 세 명 다 죽여 버리고 싶지만, 너한테 두 명 양보할게. 이러면 불만 없지?”
뭐라고?
나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동굴 안쪽으로 걸어가는 정시아를 쳐다봤다.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내게 두 명을 맡으라니.
“야. 정시..”
참 혈기왕성도 하지.
상대의 그림자가 보이자마자 앞으로 뛰쳐나갔다.
여기에 가만히 있으면 정시아가 알아서 세 명 다 처치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시아의 랭크는 B 랭크였지만, 며칠 전 나의 훈수로 인해 지금은 거의 A 랭크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레볼루션의 피라미들 정도는 정시아 선에서 정리가 가능했다.
상대가 셋이라 조금은 고전하겠지만 지진 않을 것 같았다.
목석처럼 제 자리에 서서 행복회로를 풀가동을 했다.
애써 여유롭게 발을 까딱거렸다.
애써 아무 일도 아닌 척 입 꼬리를 올렸다.
“..시발.”
나는 욕을 내 뱉으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상대는 그냥 빌런이 아니라 레볼루션 소속 빌런이었다.
아무리 피라미라고는 해도 협공을 펼친다면 아무리 정시아라고 해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몸을 긴장시키며 안으로 조금 들어가자 가운데 모닥불이 있는 공간이 나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정시아가 두 명의 속공을 받아내며 소리쳤다.
‘한 명은..’
나는 바닥을 쓰윽 훑었다.
가슴팍에 단검이 꽂혀 있는 남자가 찡그린 표정으로 얌전히 누워 있었다.
‘뭐하는 애야?’
정시아는 보이는 수치보다 훨씬 대단한 여자가 분명했다.
그런 대단한 여자가 내 쪽으로 레볼루션 피라미 두 명을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정시아는 의도적으로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일부로 손 안 댔어!!”
정시아에게 원한 산 게 있나 잠시 생각해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정시아는 단순히 내가 저들을 간단히 이길 거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탁탁!
밀치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정시아가 내 뒤로 숨었다.
“휴. 오랜만에 땀 흘렸네.”
마치 저녁에 조깅이라도 한 것처럼 개운한 목소리가 내 고막을 울렸다.
앞에서 내게 달려드는 두 남자로 인해 내 동공이 진동했다.
“정시아. 고맙다.”
“에이, 뭘.”
‘덕분에 지옥에 가게 될 것 같아.’
나는 초연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두 남자를 맞이하기로 했다.
나는 맞설 무기도 없었다.
지옥행 열차가 내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얼른 타세요~ 고객님~’
“하하하!!!”
친절도 하셔라.
직접 문도 열어주시다니.
나는 지옥행 열차에 한 발자국 발을 내딛었다.
그 때 어디선가 들리는 괴성.
그오오오오!!!!
고막이 저릿할 정도였다.
그 소리가 마치 내게 이렇게 들렸다.
‘열차에서 발 떼!!’
정면을 쳐다보니 괴성에 레볼루션 피라미들의 움직임과 자세가 무너져 있었다.
나는 상상 속의 열차에서 발을 빼며 옆으로 한 바퀴 굴렀다.
피했다.
나는 자세를 바로하며 옆을 쳐다봤다.
모습이 흡사 코뿔소와 원숭이를 닮은 피라미들이 씩씩 거리며 나와 정시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네가 저 기생오라비 맡아. 내가 저 년 맡는다.”
“근데 방금 무슨 소리야?”
“알게 뭐야.”
알게 뭐야라니.
저건 그렇게 간단히 무시할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옆에서 피 묻은 단검을 죽은 시체에 슥슥 닦고 있는 정시아를 불렀다.
“정시아.”
“응?”
“도망쳐.”
“..응?”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갑자기..”
정시아가 말을 하다가 내 뒤 쪽을 보고 입을 닫았다.
그오..그오오.
내 뒤에서 스산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녀석의 숨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안 좋았다.
투둑. 투둑.
곰 왕, 하리부.
녀석이 깨어나는 소리였다.
뒤를 슬쩍 보니 벽면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허물어진 벽 안으로 하리부의 거대한 육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 없어. 빨리 가.”
“너는?”
“아직 할 일이 남았어.”
“밖으로 유인해서 잡으면 되잖아.”
정시아가 주춤거리고 있는 레볼루션 피라미들을 가리켰다.
내가 볼 일 있는 건 그 쪽이 아니라 내 뒤 쪽이었다.
“밖으로 유인 했다가 만약 놓치기라도 하면?”“그럴 일 없..”
“텔레포트 능력 있어. 저 놈들 중에 한 명.”
정시아의 말을 끊었다.
뻥이었지만 정시아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믿는 눈치였다.
“그럼 지금 바로 죽이..”
그오오오!!“
하리부의 상반신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용에 정시아가 입을 다물었다.
하리부는 몬스터 중 B급으로 분류 되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이곳이 녀석의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을 추가한다면 A급이라고 봐도 모자람이 없었다.
아무리 정시아라고 해도 이 정도 거물급 몬스터를 실제로 본 적이 없을 터였다.
키가 6m에 달하는 괴수.
온 몸에는 그간 녀석이 살아온 세월의 이력이 상처로 가득 새겨져 있었다.
“내가 여기서 처리할 테니까, 너는 동굴 입구 지키고 있어. 혹시 모르니까.”
“저 곰탱이는 어쩌고? 차라리 둘이서..”
“정시아!!”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곰이 어떤 곰인 줄 알잖아!!”
‘무척이나 꿀을 좋아하는 곰이라고!!’
“포악하고!!”
‘꿀에 아주!!’
“흉악하다고!!”
‘환장한다고!!’
“빨리 가!! 이제 진짜 시간 없어!!”
‘웅담은 나 혼자 먹을 거야!!’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하리부의 진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었다.
내 태도가 강경하자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는 정시아.
“조심해야 돼. 다치기라도 해 봐. 가만 안 둬.”
으름장을 놓고 뛰어가는 정시아.
그녀를 따라 레볼루션 피라미들이 달려가려고 했다.
“어딜 가려고. 칼흐 마 할.”
“크으윽..”
“으으윽..”
“상황이 달라졌어. 너희들. 내가 상대해도 괜찮을 것 같아.”
나는 코뿔소와 원숭이가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타 ‘포인트 상점’에서 구입하고 나두고 온 ‘달콤한 꿀’을 두 통 꺼내왔다.
몇 번 실험을 해 본 결과 ‘포인트 상점’은 창고로도 이용이 가능한 것 같았다.
“뭐..지? 안 아프잖아.”
“나돈..데?”
카멜레온이나 이 녀석들이나 똑같았다.
내가 아무리 ‘칼흐 마 할’을 말해봤자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단어가 주는 공포감이 녀석들에게 상상 속의 고통을 선사했다.
‘칼흐 마 할’은 십자가 인장. 혹은 복종의 인장이라도 불리는 인장이 불에 지지는 것처럼 타 들어가는 고통을 느끼게 하는 주문이었다.
나는 페트병에 담긴 금색의 진득한 액체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달콤한 꿀의 내음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너 뭐하는 새끼야!!”
코뿔소가 화나서 내게 달려들려고 했다.
쿠웅. 쿠웅.
때 마침 하리부가 완전히 벽을 허물고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오오!!
우렁찬 포효 소리.
“그래, 그래. 잠을 많이 자서 배고프지? 일단 맛보기로 두 통 먹어.”
나는 달콤한 꿀이 담겨 있는 페트병을 코뿔소와 원숭이에게 수류탄 던지듯이 던졌다.
“피..피해!!”
단순한 많이 달콤한 꿀인데 기겁을 하며 피하는 녀석들.
페트가 벽에 튕겨 열린 주둥이 사이로 꿀이 분사되듯이 사방으로 퍼졌다.
반경 안에는 코뿔소와 원숭이도 있었다.
그들의 몸에 살짝 튄 꿀.
“뭐..뭐야?”
“끈적거리는데?”
나는 나를 보며 주둥이를 벌리고 있는 하리부를 쳐다봤다.
하리부는 지능이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꽤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먼저 공격을 하지 않으면 대체로 먼저 공격하지 않는 편이었다.
공격력은 높았지만, 공격성은 낮았다.
하지만 녀석이 공격성이 극대화 될 때가 있었다.
겨울잠을 자고 일어났다거나.
아니면 꿀이 앞에 있다거나.
지금 하리부는 이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 된 상태였다.
그오오!!
나를 먹으려고 주둥이를 벌리던 하리부.
덩치에 맞지 않는 움직임으로 단 두 걸음 만에 내가 던진 페트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걸신들린 것처럼 페트병을 양 손에 잡고 흡입하기 시작했다.
“시..시발!!”
그런 녀석에게 공격을 해버리고 만 코뿔소와 원숭이.
하리부가 달려가는 폼이 꼭 공격하는 것 같기는 했다.
하리부가 페트병에 있는 꿀을 다 먹는데 2초도 안 걸렸다.
페트병을 버리며 코뿔소와 원숭이를 보는 하리부.
하리부를 공격한 게 실수였다.
그오오!!
괴성과 함께 코뿔소와 원숭이를 양 손에 잡고 박치기를 시켰다.
박 깨지는 소리가 나며 바로 즉사했다.
‘섬뜩..한데?’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흉흉한 눈빛을 빛내며 하리부가 내게 사족보행으로 걸어왔다.
나는 재빨리 포인트 상점에서 꿀을 한 통 더 가져왔다.
총 6통이 있었으니까, 이제 3통 남았다.
나는 얼른 뚜껑을 열었다.
“아..안녕. 하리부.”
그오오!!
녀석.
많이 흥분 했구나.
나는 꿀을 하리부에게 던졌다.
일단 녀석에게 꿀의 출처가 나라는 걸 알릴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냥 인간이 아니라 꿀 공급업자라고. 하리부.’
시원하게 꿀을 원샷 한 하리부가 날 쳐다봤다.
나는 다시 한 통을 꺼내왔다.
그오오?
고개를 갸웃하는 하리부.
‘잠깐 사라졌다 오니, 저 인간 손에 꿀이 있네?’
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널 공격할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진정해.”
내 말에 하리부가 큰 눈을 깜빡이며 열었던 주둥이를 서서히 닫았다.
‘휴..’
이제야 터질 것처럼 뛰던 심장이 조금 진정 됐다.
“꿀 맛있지? 널 위해서 특별히 제작한 거야.”
그오오?
“자, 여기.”
나는 두 발자국 하리부에게 다가가서 꿀을 내밀었다.
하리부가 앞발을 휘두르면 그대로 머리가 터지는 거리였다.
“먹어.”
나랑 꿀을 번갈아 쳐다보는 하리부.
엄지와 검지로 꿀이 담긴 페트를 조심스럽게 집어갔다.
“이 꿀은 세상에서 나 밖에 못 만들어.”
내 말에 젖병처럼 페트병을 입에 물고 있는 하리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능이 높긴 했지만 여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했다.
‘하리부랑 금석이랑 지능이 비슷할지도.’
라는 생각이 잠깐 스쳐갔다.
나는 다시 꿀을 한 통 꺼내왔다.
이제 포인트 상점에 남은 건 한 통이었다.
이걸로 하리부와 승부를 봐야했다.
“앞으로 계속 꿀을 너한테 줄게.”
하리부가 고개를 살짝 내 쪽으로 내밀었다.
아마도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양새 같았다.
“대신에 너는 나한테 웅담을 줄 수 있어?”
하리부는 한 달에 한 번씩 쓸개를 똥으로 배출했다.
그런데 그 쓸개가 말린 쓸개였다.
이른 바,
‘웅담’
황금 알을 낳는 거위처럼 하리부는 웅담을 낳았다. 아니, 쌌다.
한 달이 지나면 쓸개가 다시 재생 됐고, 그러면 하리부는 다시 웅담을 쌌다.
이 웅담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헬스 트레이너들이 보충제를 먹는 것처럼 웅담을 먹고 운동을 하면 스텟이 2~3배는 훨씬 잘 올랐다. 또, 웅담을 먹고 독서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웅담만 얻을 수 있다면 나 혼자 스텟 2~3배 이벤트를 할 수가 있었다.
“자.”
나는 손에 들고 있는 꿀을 하리부에게 내밀었다
내게서 꿀을 받아드는 하리부.
“앞으로 계속 먹고 싶지 않아?”
내 말에 하리부가 침을 흘렸다.
‘자, 어서 마셔. 그거 마시면 거래 성립이야.’
나는 여유로운 척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놈이 도통 마시질 않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망설이는 모습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다음에는 오늘 보다 2배 더 많이 들고 올게. 어때?”
2배면 훈수 포인트 ‘1200p’였다.
하지만 웅담을 포인트 상점에서 사려고 하니 가격이 무려 ‘12000p’였다.
10배가 넘는 장사였다.
이 사실을 하리부가 알면 꿀 대신 나를 먹겠지만, 녀석이 이 사실을 알 길은 전혀 없었다.
내 강수에 입을 쩌억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짓는 하리부.
손에 들고 있던 꿀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