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대답을 시작으로 대련이 시작 됐다.17회
널 이렇게 하면 가질 수 있을거라 생각했어.
나는 손에 감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흑염룡이 짜잔 하고 나온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내게는 흑염룡이 없었다.
일주일 전 박태산 교관과 대련하며 다친 손이었다.
지금은 거의 다 나은 상태였지만, 계속 두르고 있었다.
손에 가시가 박히거나 살짝 까졌을 때, 막 아프진 않은데 거슬리기는 세계 최고지 않은가.
그 이유였다.
상대를 쳐다봤다.
“납작하게 만들어버려!!”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놈!!”
“감히 우리 시아를 홀리다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보였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학생들의 응원 소리에 점점 기분이 흥분으로 고조되고 있는 게 보였다.
‘우리 시아를 홀려?’
마지막에 이상한 말이 섞여 있는 것 같은데.
“안와?”
내 말에 한껏 자신감이 고조 된 남학생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녀석이 나와의 대련에서 이기게 됐을 때 얻는 ‘서진을 이겼다’라는 타이틀.
이건 마치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는 애가 그나마 게임으로 이기고 ‘최후의 승자는 나다’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그래, 그럼.”
나는 남학생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다리를 살짝 벌리며 복싱 자세를 취했다.
“뭐해?”
면전 앞까지 다가가, 물었다.
“뭐..뭐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는데 안 때릴 거야?”
“아..”
싸움이라는 걸 평소에 해 본 적이 없는 놈이 분명했다.
내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주먹 쥔 손에 힘을 주는 게 보였다.
“다쳐도 책임 못져!!”
녀석의 주먹이 조금씩 풍선을 불어 넣는 것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핵펀치!!”
“....”
사람 머리통만 해진 주먹을 내게 날렸다.
나는 속으로 단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지랄 똥 싸고 있네.’
동작이 매우 컸고, 속도 역시 느렸다.
지금의 내 스텟을 가지고도 피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는 구태여 어제부로 사용 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했다.
‘뱀의 움직임.’
어딘가에서 정시아가 보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메두사는 사용 안 할 생각이었다.
단순히 뱀의 움직임만 사용한다면 아무리 능력 주인이라고 해도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뱀의 움직임처럼 이속 버프를 주는 능력은 꽤 흔한 능력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뱀의 움직임’은 왜 사용 하냐.
지금 대련을 보고 있을 많은 잔챙이들에게 경각심과 경계심을 심어주기 위해.
어설프게 이기면 지금 앞에 있는 놈과 같은 잔챙이들이 해볼만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 덤벼들 수가 있었다.
모기약을 조금 칠 필요가 있었다.
상체를 완전히 아래로 숙이며 남학생의 주먹을 피했다.
동시에 다리를 뻗어 녀석의 두 다리를 쓸어 넘겼다.
다리가 움직이는 원심력을 이용해 그대로 한 바퀴를 돌며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져 있는 녀석의 얼굴에 발을 올렸다.
뱀의 움직임은 은밀 기동과 이속 증가 능력이었지만, 몸을 민첩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생각 보다 훨씬 좋은데?’
체감이 확 될 정도로 몸의 움직임이 빨라진 느낌이 들었다.
“으..으..”
바닥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는 남학생의 소리가 들렸다.
내가 녀석의 얼굴 위에 올리고 있는 발을 내려찍으면 그대로 끝이었다.
나는 박태산 교관을 쳐다봤다.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승자는 서진 학생이다.”
그의 말에 나는 흡족해하며 다리를 옆으로 치웠다.
‘이제 대련 랭킹 꼴찌는 아니겠지.’
+ + +
“겨우?”
학교 수업이 전부 끝나고 대련 랭킹이 갱신 됐다.
갱신이라고 해 봤자 나. 그리고 나랑 대련 한 남학생.
이렇게 둘의 순위만 조정 된 게 전부였다.
대련 랭킹이 발표 되는 첫 날부터 사냥개처럼 싸우려는 학생은 없으니까.
나는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손 쉬웠다고는 해도 겨우 40등 올랐다.
‘260등’
그래도 190등을 잡았는데.
적어도 200대 초반까지는 기대했는데.
반면 나랑 대련했던 남학생은 220등으로 30계단 순위가 하락해 있었다.
“그 움직임. 분명히 능력을 사용한 게 맞단 말이지.”
오후 내내 탐정처럼 저 말을 하는 정시아.
“너 예언 능력 말고도 몇 개 더 있지? 그치?”
‘응. 있지. 네 능력. 네 능력 쩔더라.’
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는 현실.
나는 그저 정시아의 말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연출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어? 너 수상해!!”
“너 주말에 기숙사에 있을 거야?”
“..왜?”
“있으면 석이랑 놀아.”
금석은 점점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고 있었고, 점점 기초 상식과 지식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혼자 내버려두기에는 불안했다.
‘사고 칠 것 같단 말이지.’
“보고. 나 오늘은 먼저 간다! 주말 잘 보내! 황금 돌대가리 너도!”
웬일로 정시아가 먼저 갔다.
그동안 쭉 나와 금석이 사는 기숙사에 같이 갔었다.
“석아.”
금석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항상 저 상태였다.
아직 학기 초반이라 이론 수업이 많았고, 금석의 머리는 늘 과부하상태였다.
어디 아픈 강아지처럼 나를 쳐다보는 금석.
“너한테 1만 포인트 보냈으니까 주말에 고기 사먹..”
“우오오오!!”
금석이 기숙사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제 입학 첫 날 주문했던 고기를 다 먹었다.
그 많던 고기를.
세상 끝나는 얼굴로 나를 보던 금석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혼자네.”
그러고 보니 입학하고는 늘 금석과 정시아와 같이 있었다.
두 사람은 애초에 내 머릿속에 없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과 모르고 지냈으면 섭섭할 뻔 했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는 중이었다.
‘아직 정시아가 접근한 의도를 모르겠지만.’
나는 수업이 모두 끝나면 늘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 말고도 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다.
‘세리나.’
조금씩 그녀와 말을 트는 중이었다.
어제는 먼저 내게 인사를 했다.
‘안녕.’
이라고.
그 모습이 퍽 감동스러워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참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도서관에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를 기다리는 손님이 있었다.
“나한테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뒤를 돌았다.
건물 입구에 마네킹이라고 착각 할 정도로 인형 같이 생긴 여자가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한설휘.’
“할 말은 네가 있지 않아?”
지금 날씨는 3월 달이었다.
슬슬 겨울을 지나 봄으로 향하는 시기.
하지만 한설휘의 말을 듣는 순간 한 겨울이라도 된 것처럼 닭살이 돋을 뻔 했다.
수업이 늦게 끝난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데 가서 얘기 할까?”
“....”
내 말에 앞장서서 어디론가 걷기 시작하는 한설휘.
‘뭔데, 이 상황.’
난 잘못한 게 없는데 한설휘의 태도가 날 죄인으로 만들었다.
마치 화난 여자친구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한설휘의 뒤를 따라갔다.
+ + +
학교 단지 옆에 상업 단지가 작게 조성 돼 있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구석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
기품 있게 초코 라떼를 마시고 있는 한설휘를 쳐다봤다.
분위기만 봐서는 뉴욕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실 것 같지만, 한설휘의 입맛은 애기 입맛이었다.
나는 아이스티를 한 입 마셨다.
다시 한 모금.
다시 한 모금.
이번에는 두 모금.
그러다가 원 샷.
한 잔 다 마셨다.
‘뭐지?’
아무 말도 없었다.
마치 혼자 온 것처럼 시선을 고고하게 내리깔고 초코 라떼만 마시고 있었다.
슬쩍 보니 나처럼 다 마신지 쫌 된 것 같은데.
‘왜 잔 주둥이만 핥고, 아무 말도 안 해?’
10분. 20분.
나는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지..”
“적당히 해.”
“....”
‘뭐지?’
내가 입을 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한설휘.
드디어 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내가 먼저 말을 하기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굳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설휘가 팔짱을 꼈다.
“진짜 유치해서 더는 못 봐주겠어.”
뭐라는 거야?
“네가 그런다고 해서 내가 먼저 말 걸 줄 알았던 거야?”
먼저 말 건 거..는 나긴 한데 근데 그건 네가..
“사람이 참 다양하게 유치하다, 너.”
“....”
나는 속의 말을 전부 삼켰다.
“그것도 모자라 질투 유발까지 하더라?”
코웃음을 치는 한설휘.
“정혼 깨는 거 어른들한테 말씀 안 드렸으니까, 이제 적당히 좀 해. 근데.”
한설휘가 비어 있는 잔을 다시 마시는 척을 하며 흘려가듯이 말했다.
“너 쫌 멋있어졌다?”
후루룩.
공기 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했다.
평소 서진의 성격과 두 사람의 관계를 미루어 보았을 때.
‘정혼 깨자고 한 걸 욱해서 했다고 생각하나본데.’
나는 이참에 확실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랑 결혼 할 거야?”
“가..갑자기 무..무슨 소리야!!”
한설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결혼해서 나랑 애 낳고 살 거냐고.”
“어쩐지 얌전한 척 한다고 했어. 내가 너랑 왜 결혼해서 애를 낳아? 미쳤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정혼 깨자고.”
“....”
“어차피 어릴 때 부모님이 정해주신 거 너도 싫어했잖아. 싫어하고. 앞으로도 싫어 할 거고. 안 그래?”
내 말에 한설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전에 한 말. 진심이었어.”
한설휘의 몸이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에 조금씩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네..네가 어떻게..”
한설휘가 서진을 마냥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혼은 깨는 게 맞았다.
정혼을 유지하는 건 서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몇 달 후.
서진과 한설휘가 정혼한 사실이 기사화 되고 전국에 퍼진다.
그리고 전국에서 생성된 온갖 루머와 소문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두 사람에게 꽂힌다.
서진은 괜찮았지만, 한설휘는 루머와 소문들로 인해 대인기피증이 생기고 우울증을 겪게 된다.
이게 당장 몇 달 후의 시나리오였다.
뚝. 뚝.
한설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네 앞날에 걸림돌이 될 거야. 분명히. 물론 지금도 충분히 걸림돌이긴 하지만 미래에는 나라는 걸림돌을 네가 감당 못할 수도 있어.”
본래의 서진 얘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설휘를 달래는 멘트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휴지를 가져와 한설휘에게 내밀었다.
내 손에서 홱 낚아채서 눈가를 닦는 한설휘.
부족하다. 뭔가 부족했다.
한설휘와 남이 되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적이 되는 건 굉장히 불편했다.
한설휘를 조금 더 달랠 필요성이 있었다.
‘아..뭐라고 해야 하지.’
우는 여자를 달래본 적이 있어야지.
나는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널.. 음.. 포기 할 생각은 없어.”
한설휘가 고개를 들었다.
감정이 올라와서 그런지 백옥 같은 그녀의 피부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집안에서 정해준 정혼이 아니라.. 그러니까.. 내 스스로의 힘으로 널 쟁취..쟁취? 그래. 널 쟁취하고 싶어. 창조 그룹의 장남이라는 타이틀 딱 떼고. 남자 서진으로 널 쟁취해보겠어.”
병신 같이 많이 더듬거리긴 했다.
하지만 내 말이 꽤 효력이 있는지 한설휘의 입 꼬리가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기..기대 해도 좋아. 네가 날 좋아할 수 있도록 만들겠어!! 하핫.. 음하핫!!”
한설휘의 입 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정혼 깨기 더럽게 힘드네 진짜.’
나는 속으로 한 숨을 쉬었다.
+ + +
“쟁취..라고?”
카페에서 나가는 서진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수줍게 웃는 한설휘.
“진작 그렇게 말하지. 바보. 멍청이.”
한설휘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온갖 기분을 느끼다가 끝에는,
‘안도.’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한설휘.
“응. 할아버지. 나야, 설휘. 서진이랑 정혼 한 거 있잖아.”
방금 서진이 한 말을 신나서 옮기는 그녀였다.
+ + +
“어디 보자.”
포인트 상점을 열었다.
나는 곧장 ‘아이템 방’으로 들어갔다.
“룰루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모품’ 칸을 뒤적뒤적거렸다.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마침내 발견했다.
-곰돌이 푸우가 환장할 정도로 달콤한 꿀-
아이템 명은 길었지만 그냥 꿀이었다.
‘곰한테 아주 아주 효과적인 꿀이지.’
-600p-
“....”
괜찮았다.
내일 얻을 아이템에 비하면 이 정도 쯤이야.
나는 달콤한 꿀을 구매하고 포인트 상점을 닫았다.
나는 내일 곰 사냥에 나설 생각이었다.
[작품후기]
연차암 ~~~~ 이라고 댓글을 다셔서 연차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