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정혼 깹시다.
“허어억!!”
심해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공기란 걸 마주한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흐으읍..”
한번 더.
그렇게 몇 번이나 숨을 들이쉬고 내 쉬는 것에 집중했다.
점점 안정되는 호흡.
그리고 조여 오는 긴장감과 불안감.
소녀가 한 말이 머릿속을 떠다니다 못해 해일을 몰고 다녔다.
‘무슨 말이었을까?’
세상을 구하면 큰 보상과 실패하면 지옥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
“여긴 어디야?”
짱구를 굴리며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협소한 사각형의 공간.
그리고 코를 자극하는 꾸릿꾸릿한 냄새.
옆에서 들리는 물 내려가는 소리.
주춤거리며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내가 앉아 있는 곳을 쳐다봤다.
‘대변기.’
내가 있는 곳은 화장실이었다.
“뭐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다리가 저릿저릿했다.
도로 변기에 주저앉아 다리를 주무르고 있을 때 밖에서 남자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존나 대박 뉴스.”
“지랄.”
“아니 이번에는 진짜야. 너 서진이랑 한설휘 알지?”
“알지. 대한민국에서 서진이랑 한설휘 모르는 사람도 있냐?”
“그치. 그러니까 대박이라는 거야.”
“빨리 본론부터 말해. 오줌 안 나오잖아.”
“그게 그러니까.. 여기 매니저랑 내가 친하잖아. 아까 나한테 살짝 귀띔해줬는데. 귀 대 봐.”
“아이, 병신아. 오줌 싸는데 귀를 어떻게.. 아..야!!”
‘서진? 한설휘?’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내가 익히 아는 인물들의 이름이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오줌 소리와 함께 속삭이는 남자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러니까, 매니저 말로는 서진이랑 한설휘가 같이 밥 먹고 있대.”
“여기서?”
“어. 존나 대박이지?”
“진짜 정혼한 사이 아니야?”
“에이~ 설마 한설휘가 서진 같은 망나니랑? 두 집안이 워낙 친하니까 같이 밥 한 끼 먹는 거겠지. 아.. 우리 설휘 공주님. 가까이서 얼굴 한 번 보고 싶다, 진짜.”
“알겠으니까 이제 어깨 좀 놔.”
남자들의 대화로 나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그리며 한 가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모니터 속 세상에 와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직까지 많은 것이 아리송한 상태.
일단 변소에서 나가기로 했다.
‘냄새 때문에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단 말이지.’
끼익.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소변기 앞에서 떠들던 두 남자가 세면대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서진과 한설휘, 두 사람을 가지고 열띤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야 근데 서진 그 새끼는 진짜 전생에 나라 구한 거 아니냐?”
“또 뭔 소리 하려고?”
“아니, 맞잖아. 태어나보니 금수저에 태어나보니 정혼자가 한설휘에. 그리고 지 꼴리는 데로 막 살고. 그 정도면..”
“야..야.”
“왜? 내 말이 틀려? 그 새끼는 진짜..”
“야..입 좀..”
“아니 왜 그러는..음..”
남자들 옆을 지나 화장실을 나가려다가 무심히 세면대 거울을 쳐다봤다.
사극에나 나올법한 기생오라비가 검정색 라이더 자켓을 입고 온 몸에 삐까뻔쩍한 장신구로 치장을 한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그랬더니 거울 속의 기생오라비가 똑같이 고개를 옆으로 움직였다.
볼을 긁었다.
거울 속의 녀석이 똑같이 볼을 긁었다.
‘저 친구 참 잘 따라하는군!’
이번에는 기괴하게 입을 벌리며 웃었다.
이것 역시 따라하는 녀석.
“하하. 하핫!!”
나는 눈을 부릅뜬 채로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뚝 웃음을 멈추고 소리 질렀다.
“시발!!!”
서진.
녀석이 거울 속에서 나랑 똑같은 입 모양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서진에 빙의한 모양이다.
+ + +
이름은 서진.
나이는 17세. 키는 183에 훤칠한 키에 몸무게는 65kg.
또한 집안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기업인 창조 그룹.
그 그룹의 장남이 바로 서진이라는 놈인데.
“죄..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서진과 한설휘를 주제로 열심히 뜯고 맛보고 즐기던 두 남자가 손을 싹싹 빌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잘 자란 티가 나고, 딱 봐도 입고 있는 정장이 고급 브랜드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한 마디로 꽤 사는 집안의 자제라는 소리였다.
그런 그들이 뒷담화나 쫌 깐 거 가지고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울상을 짓고 용서를 빌고 있었다.
이게 바로 서진이라는 놈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였다.
‘개차반. 쓰레기. 성격파탄자.’
집안을 등에 업고 아주 망나니 같은 행보를 이어가는 인물이 바로 서진이었고, 나는 하필 그런 놈에게 빙의했다.
‘만약 지금 서진이었다면, 분명 몇 대 먼저 쥐어박고 욕을 실컷 했을 테지.‘
하지만 지금 나는 오리지널 서진이 아니라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고.
나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몇 번 휘휘 저었다.
“..예?”
“가라고.”
“아..예! 감사합니다!!”
그들이 꼬리 밟힌 강아지처럼 화장실을 나가고 홀로 남자, 나는 조금 더 거울에 가까이 다가갔다.
“하..진짜.. 골 때리네.”
손을 들어 찰흙을 만지듯 얼굴을 요리조리 만졌다.
“잘생기긴 했네. 큼.. 이게 아니지.”
내가 왜 서진에 빙의했는지 내가 왜 모니터 속 세상에 들어왔는지.
나는 호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에 ‘이실장’이라는 이름으로 전화가 와 있었지만, 바로 끊고 날짜를 확인했다.
‘2020년.’
날짜를 확인하자 앞서 들었던 의문이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날짜로 따지면 내가 모니터 속 세상을 보며 관찰일지를 작성한 시기는 2000년부터 2040년까지였다.
나는 지금 내가 봐왔던 시기의 딱 중간 시기에 와 있었다.
즉, 멸망하기 20년 전.
멸망까지 앞으로 20년이 남은 시기.
지금 상황은 소녀가 내게 던져준 미션.
혹은 시련이 확실했다.
머리를 과부하 될 정도로 회전시키고 나서,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나는 화장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소리 질렀다.
“서진이 돼서 이 세상을 구하라고?!”
대답이 들려올리 없었지만 나는 몇 번이고 소리를 질렀다.
“왜 하필 서진이야!! 많고 많은 캐릭터 중에!!”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왜!! 하필!! 이 새끼냐고!!!”
서진.
만약 내게 이 세상 인물 중 선택 할 기회가 있다면 340번째로 골랐을 인물.
그 정도로 서진은 집안을 빼면 쓰레기 캐릭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잠재력 면에서는 집안의 후광을 뛰어넘고도 남을 정도였다.
문제는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포텐을 터트리기까지 시간이 무척이나 오래 걸린다는 점이었다.
캐릭터에는 여러 가지 특징, 특성이 있다.
그 중 서진은 전형적인 극후반 캐리형 캐릭터.
실제로 내가 모니터로 관찰 할 때 서진은 멸망하기 2년 전에 특성이 개화한 캐릭터였다.
물론 녀석이 노력도 안하고 망나니처럼 살아간 탓이지만.
어쨌든 현실적으로 봤을 때 노력한다고 해도 서진이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한 건 변함없었다.
이 세계관에서는 초반 캐리형 캐릭터나 성능이 초중반 할 것 없이 준수한 캐릭터가 많았다.
‘차라리 그런 캐릭터에 빙의했다면..그래도..’
장점이 꽤 있는 캐릭터니까.
특히 집안.
특히 재력.
돈 하나는 마를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크나큰 장점이었다.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울을 쳐다봤다.
현실을 수긍하며 받아들이고 있을 때, 누군가가 화장실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40대 초반 쯤 돼 보이는 남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를 쳐다봤다.
“여기..후우.. 계셨습니까? 한참을 찾았지 뭡니까.”
‘누구더라..’
관찰 일지를 40년 동안 작성을 하며 내 머릿속에는 많은 데이터가 입력 돼 있었다.
실제로 심심하면 인물들을 분류해서 주연급, 조연급, 엑스트라급. 혹은 S랭크, A랭크 이런 식으로 나누기도 했었다.
‘아.’
기억났다.
어린 시절부터 서진을 보살피며 서진에게는 제 2의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 이실장.
서진이 세상이 멸망하기 2년 전에라도 각성할 수 있었던 이유.
이실장의 죽음.
그 정도로 서진에게 이실장은 특별한 존재였다.
‘하지만 뭐.. 평소에 하는 행동은 싸가지가 1도 없었지.’
“왜 전화 안 받으십니까?”
이실장이 매고 있는 넥타이를 단정하게 고쳐 매며, 정중하게 물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뭐 좀 하느라고.”
“흐음..”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나를 찬찬히 훑어보는 이실장.
“가시죠. 아가씨께서 기다리십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실장을 따라갔다.
‘한설휘라..’
그녀를 실제로 볼 생각을 하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와..’
나는 한설휘를 보자마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옛 풍의 가구로 인테리어가 된 공간에 한설휘가 단정한 원피스 차림으로 사뿐하게 앉아 있었다.
한 폭의 그림이요, 한 장의 사진이나 다름없는 풍경에 나는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봤다.
드르륵.
뒤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의 맞은편으로 걸어가 앉았다.
내가 들어오든, 맞은편에 앉든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한설휘.
백옥 같은 손으로 우아하게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심심해서 한 번은 모니터 속 인물들로 나 홀로 이상형 월드컵을 한 적이 있었다.
한설휘는 언제나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경국지색. 절세미인이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은 여자였다.
백인 보다 더 하얀 피부에 새하얀 원피스.
거기에 전혀 안 어울린 것 같지만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을 단정하게 옆으로 묶은 머리카락이 너무도 요염하게 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수정을 눈에 옮겨 놓은 듯한..
탁.
한설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치켜들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이라도 들어 인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시 시선을 내리깔고 찻잔을 들여다보는 한설휘.
‘뒤지게 예쁘네 진짜. 근데 뭔 냄새가 이렇게 달콤해?’
코를 킁킁거리며 테이블을 보니 먹음직스럽게 생긴 음식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감탄사를 내 뱉었다.
옆에 있는 젓가락을 들어 가까이 있는 불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
저승에 있을 때는 몰랐다.
하지만 가끔 정신적으로 허기가 지긴 했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데 막상 무언가를 실제로 섭취를 하자 봉인 된 식욕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젓가락을 놀렸고, 쉴 새 없이 숟가락을 놀렸다.
이 음식, 저 음식 가리지 않고 입에 때려 박았다.
‘달다, 짜다, 고소하다, 매콤하다!!’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한설휘를 잊고 말았다.
“크흠.”
미친 듯이 먹고 있을 때, 앞에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꽤 포식을 한 터라,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무안한 표정으로 집고 있던 양념게장을 내려놓으며 젓가락을 한차례 빨며 내려놓았다.
한설휘를 쳐다보자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톡톡 건드렸다.
고개를 갸웃하자 한심하다는 투로 말 했다.
“닦아. 추잡해 보이니까.”
“아..”
나는 옆에 있는 티슈를 집어 들어 입가를 닦았다.
내가 방금 먹은 것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진짜 한심하다. 시간에 대한 예의도, 식사 예절도. 너는 예(禮)라는 게 눈꼽만치도 없어. 알아? 아니다. 너한테 이렇게 얘기해서 뭐하겠니. 금붕어한테 얘기하는 게 더 빠르지. 어휴.”
한설휘의 말을 한 귀로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본래 서진과 한설휘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캐릭터라 저렇게 말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나는 아직 못 먹어본 음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거 봐. 사람이 말하는데. 야.”
“네?”
“네에? 지금 비꼬는 거지?”
“아뇨?”
“맞네, 맞아. 아.. 진짜 내가 이래서 안 나오려고 했다니까. 이실장님 부탁만 아니었어도.”
콧김을 뿜으며 말하던 한설휘가 눈을 감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나 역시 숨을 깊게 들이 마시며 생각 했다.
‘일단 집에 가서 머릿속 좀 정리해봐야겠어.’
배도 적당히 부르고.
앞으로 먹을 기회도 많을 테고.
지금은 식탐을 조금 참기로 했다.
우선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했다.
“야.”
“네?”
“네?? 아.. 됐고. 정혼 좀 깨자. 아니, 깨주라. 제발. 내가 우리 부모님이랑 니네 부모님 다 설득할 테니까..”
“네.”
“네? 너 분명히 네라고 했다!! 응..? 네..라고?”
“넵. 정혼 깹시다.”
우선 첫 번째로 할 일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