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354화 (242/356)

< 낭만필드 - 354 >

[IN - 33. 아쉬 키그부 / OUT - 3. 주성배]

대기심이 선수 교체 사인을 보냈다.

그라운드 위에서 언제나처럼 열심히 뛰어다니던 성배는 교체 사인을 발견하고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순간, 전광판의 시계가 멈췄다.

“아, 교체 사인이 나왔습니다. 비에이라 감독, 키그부를 투입하고 주를 빼줍니다.”

고작 선수 교체일 뿐인데, 전광판의 시계가 멈췄다.

선수 교체로 시간을 끄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전광판 시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주의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경기가 이렇게 끝났네요. 맨체스터 시티의 한 시대가 저물었어요. 이 시대를 상징하던 ‘MR. City’, 주가 무대에서 내려갑니다.”

전광판 시계가 멈추었고,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를 떠났다.

맨체스터 시티의 골문을 11년째 지키고 있는 조 하트까지도 골문을 버리고 걸어왔고, 나머지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배와 함께 맨체스터 시티의 첫 번째 왕조를 열었던 주축 선수들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주, 그동안 정말 수고했어. 항상 그 고마움은 잊지 못할 거야. 내가 여기까지 올라온 건 다 네 덕분이야.”

“네가 잘한 거지, 내가 뭘 한 게 있겠어. 내가 해준 건 네가 능력을 보여줄 자리를 만들어준 것뿐이야.”

팀의 부 주장직을 수행 중인 보아텡이 가장 먼저 성배를 포옹했다.

성배 덕분에 센터백 자리를 차지하며 월드클래스 반열에 올라 서른세 살이 된 지금도 여전히 세계 최고의 센터백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보아텡이었다.

그에게 성배는 거의 은인과도 같았다.

성배가 무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팀의 주장으로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맨시티의 주장완장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독일 국가대표팀에서는 벌써 5년째 주장으로 활약 중이었다.

“너라면 어딜 가든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삶을 살 거라고 확신하니까, 걱정은 안 할게. 잘 가라. 수고했어.”

“고마워, 이반. 너는 오래오래 해먹어라. 이제 너도 주인공 한 번 해봐야지.”

다음은 크로아티아 국가대표팀의 주장, 중앙 미드필더 이반 라키티치의 차례였다.

유로 2012가 끝나고 바로 다음 시즌부터 배리를 밀어내며 주전 자리를 차지한 라키티치는 이후 10년 가까이 맨체스터 시티 부동의 중원 사령관으로 활약 중이었다.

비록 화려한 동료들 사이에서 언제나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최고였다.

“그래. 이반의 말처럼 너는 어디서든 최고의 삶을 살겠지. 나도 곧 가야 할 것 같은데, 내 자리 하나만 만들어 달라고.”

“네가 온다면 언제든 환영이지. 삐까뻔쩍하는 자리 하나 만들어놓고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와. 너무 빨리 올 생각 하지 말고. 너도 한 3년은 더 해먹을 수 있을 거야.”

성배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상대하는 팀들에게 공포로 군림했던 다비드 실바 역시 성배에게 인사를 건넸다.

실바와 성배의 왼쪽 측면은 맨체스터 시티 최고의 공격 옵션으로 십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위력을 떨쳤다.

어느새 축구선수로서 황혼기에 접어든 실바는 주전 자리를 후배들에게 내주고 로테이션으로 활약 중이었지만, 그의 번뜩이는 센스와 창조성은 여전했다.

“저 친구, 믿어도 되겠어? 한 몇 년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벌써 은퇴하고 그래?”

“하하. 이제 나도 다음 인생을 준비해야지. 제롬도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동안 나 때문에 너무 오래 부주장으로 있었지. 독일 국가대표팀에서도 주장으로 있는 친구인데.”

여전히 위력적인 스트라이커로 맨체스터 시티의 최전방을 맡아주는 세르히오 아게로는 성배와의 이별을 달갑지 않아 했다.

비록, 마지막까지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진 못했지만, 아게로는 팀을 이끄는 주장으로서, 중심축으로서의 성배를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성배 역시 팀의 골게터이자 에이스로서의 아게로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뭐, 이렇게 팀은 떠나지만, 앞으로 못 보는 건 아니니까. 언젠가는 돌아올 거지? 나는 은퇴해도 맨체스터 시티를 떠나지 않을 거야. 너도 언젠가 돌아오라고.”

“글쎄. 불러준다면, 기회가 되고 상황이 허락한다면 언제든 올 생각이야. 너나 잘해. 괜히 밀려나지 말고.”

잦은 음주와 몸 관리 소홀로 지적받았던 조 하트는 성배의 관리 아래 다시 태어나 벌써 11년째 거뜬히 맨체스터 시티의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골키퍼 잔혹사는 조 하트의 등장으로 끊겼고, 하트가 오랫동안 버텨주면서 그의 후계자들 역시 슬슬 등장하는 중이었다.

“다비드 자리만 마련해주지 말고, 내 자리도 마련해줘. 나도 다음 인생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가레스. 너는 아직 멀었어. 아직도 한창 전성기인데, 다음 인생은 무슨. 천천히 와. 자리는 언제든 마련해줄 테니까. 그런데 자꾸 나한테 무슨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거야?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2012/13시즌부터 맨체스터 시티에서 활약한 가레스 베일은 여전히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메시와 호날두의 시대가 조금씩 저물어갈 때, 빈집을 노려 한 번의 발롱도르 트로피를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성배를 추종하는 세력의 리더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하아, 주... 조금만 더 뛰어주지...”

“왜 울고 그래? 로멜루, 이제는 네가 나보다 훨씬 위에 있다고. 내가 그 꼴을 더 봐야겠어? 하하.”

어느새 로멜루 루카쿠도 20대 후반이 되었다.

선수로서 한창 전성기를 달리는 중인 그는 지난 시즌 벨기에 선수로서는 역사상 두 번째로 발롱도르 트로피를 차지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맨체스터 시티와 벨기에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성배에게 깍듯한 태도를 잃지 않았고, 성배의 에티하드 스타디움 마지막 경기에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 자리에 뱅상이 꼭 있었어야 했는데...”

“뱅상도 TV로 지켜보고 있겠지. 뭐, 어차피 이제 곧 둘 다 시간 많아질 텐데, 따로 보면 돼. 부를 테니까 오던가.”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빠르게도 흘렀다.

성배와 함께 맨체스터 시티 왕조를 열었던 선수들은 점차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듦에 따라 기량이 떨어져 팀을 떠났고, 남은 선수는 이 여섯 명이 전부였다.

세계 최고의 센터백이었지만, 잦은 부상으로 기량을 유지하지 못한 콤파니는 2년 전 팀을 떠나 지금은 미국에서 활약 중이었다.

다른 선수들 역시 나이가 들고 기량이 떨어지면서 새로운 영입생들에게 밀려 팀을 떠났다.

맨체스터 시티는 기량이 떨어진 선수의 대체자로 또 다른 월드클래스 선수를 충분히 영입할 수 있는 클럽이었다.

알렉시스 산체스는 3년 전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더 늦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다 말했고, 맨체스터 시티와 성배는 그런 산체스를 배려해 좋은 조건으로 보내주었다.

“거기 저도 가도 되죠? 저도 충분히 자격이 있는 것 같은데. 하하.”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뱅상한테는 아직 배울 게 많아서.”

“저도요, 저도! 저도 갈래요!”

“얼마든지. 다들 와. 연락할 테니까 시간만 비우고. 요즘 잘나간다고 나 무시하지 말고. 내가 아무리 끝물이라지만, 그래도 아직 안 죽었어.”

떠나는 사람들이 있으면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는 법.

그들이 떠난 자리는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젊은 선수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에는 성배가 있었고, 성배는 많은 어린 선수들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특히, 벨기에에서 그랬다.

성배와 10년 넘게 국가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어 거의 동시대 선수나 다름없는 케빈 데 브라위너는 7년 전 맨체스터 시티에 합류했고, 벨기에가 2014년 월드컵에서 우승할 때, 벨기에 최고의 유망주라 불리던 중앙 미드필더 유리 틸레망스와 센터백 제이슨 데나이어도 맨체스터 시티에서 뛰고 있었다.

루카쿠를 필두로 데 브라위너, 틸레망스, 데나이어는 벨기에 커넥션을 이루어 성배와 다른 베테랑 선수들을 도와 맨체스터 시티의 왕조를 이끌었다.

이제 성배가 떠나게 되면서 첫 번째 왕조가 끝을 고했고, 성배와 함께 팀을 이끈 베테랑들 역시 선수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두 번째 왕조를 새롭게 이룩하는 역할은 이들의 몫이 되었다.

“드디어 가는구나. 지긋지긋했다고. 지금이라도 떠나줘서 정말 감사한다. 그동안 수고했어. 이건 진심이야. 내가 지긋지긋해 할 정도로 당신은 최고였다고.”

2020/21시즌, 맨체스터 시티의 리그 마지막 경기이자, 성배의 마지막 경기인 38라운드 상대는 맨체스터 시티의 영원한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퍼거슨 감독의 은퇴 이후 바닥까지 떨어졌던 맨유는 조제 무리뉴 감독에 이어 라이언 긱스, 마누엘 페예그리니 등을 감독으로 선임하며 다시 우승후보로 올라섰다.

다만, 맨체스터 시티의 독주를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 고맙다. 그런데 내가 떠나도 맨유가 시티를 압도하진 못할 거야. 남은 친구들은 더 대단하거든.”

지겹게 맞붙었던 맨유의 주장, 필 존스가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성배가 맨시티에 합류한 이후, 열한 번의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31번의 맞대결을 가진 두 팀의 상대 전적은 20승 4무 7패로 맨시티의 절대적인 우세였다.

맨유만 만나면 미쳐버리는 성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고, 덕분에 맨유 선수단과 팬들은 성배라면 이를 갈았다.

그만큼 성배를 누구보다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것 역시 그들이었다.

“주. 아까 언뜻 들으니까 우리 친구들이랑 뱅상이랑 해서 따라 본다면서요? 그때 나도 좀 불러줘요.”

“얼마든지 오라니까. 그냥 너희가 애들 모아서 연락해라. 귀찮으니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윙어로 활약 중인 아드낭 야누자이 역시 벨기에의 선수였다.

아자르, 데 브라위너, 메르텐스 등에게 막혀 A매치 출전 기회를 많이 잡진 못했지만, 아직 26세의 젊은 선수였고, 슬슬 기존의 선수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기회를 잡아가고 있었다.

당연히 성배의 추종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맨체스터 시티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마저 주를 향해 존경의 의사를 아낌없이 표현합니다. 확실히 주 정도 되는 선수라면 아무리 라이벌 팀의 선수라고 해도 존중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미 앉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요. 맨체스터 시티 선수단과 서포터는 물론이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단과 서포터에 심판들, FA에서 파견된 직원들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그라운드를 떠나는 주에게 기립박수를 보내주고 있어요.”

몇 년 전 증축되어 무려 7만 석의 관중석을 자랑하는 에티하드 스타디움은 성배의 마지막 경기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배를 향해 기립박수를 보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요? 하하.”

“글쎄요. 어쨌든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수고는 제임스가 많이 했죠. 저 때문에 고생 많았어요, 하하.”

성배는 주심과도 악수를 나누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프리미어리그의 심판들은 성배를 좋아하면서도 싫어했다.

항상 정중하고 젠틀하면서 항의를 자주 하기는 해도 선을 넘지 않아서 좋아했지만, 워낙 교묘한 수비를 펼치고 심판의 눈을 속이는 경우가 많아 싫어했다.

그래도 세계 축구계에 전설로 남을 한 선수가 주류 무대에서 사라지는 지금 이 순간, 그들 역시 묘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THE Prophet]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봐.]

[분명 그가 말한 모든 것이 이루어질 테니까.]

[하늘색 하늘 아래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그는 특별해.]

[목표한 모든 걸 이뤄내는 힘을 가지고 있지.]

[그와 함께라면 우린 크나큰 성공을 이루게 되겠지.]

[부러워도 어쩔 수 없어. 그는 우리의 캡틴이니까.]

에티하드 스타디움에 성배의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맨체스터 시티의 서포터인 ‘The Citizen’만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서포터, 'The Red Devils' 역시 성배의 응원가를 함께 따라 불러주었다.

“주, 기립박수와 함께 응원가를 목청껏 불러주는 모든 팬들을 향해 감사 인사를 표하며 그라운드를 떠납니다.”

성배는 몸을 돌려가며 모든 관중들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머리 위로 손뼉을 치면서 그들을 향해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사이드라인이 바로 앞에 있었다.

“정말 고생했어요.”

교체 투입을 위해 무려 10분 가까이 기다려야 했던 아쉬 키그부였다.

이제 겨우 22세로 1999년생의 어린 선수인 키그부는 만수르가 클럽을 인수해 유스 시스템을 개혁한 뒤 영입된 선수였다.

가나 이민자 집안 출신이지만, 잉글랜드 최고의 유망주로 꼽히는 선수이기도 했다.

성배에게 여러 가지를 배워 성장했고, 두 시즌 전부터 백업으로 경험을 쌓아가며 성배의 대체자로 충실히 키워진 선수였다.

“이제는 네 자리야. 이제 나는 간다. 맡겨도 되겠지?”

“맡겨만 주세요. 주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 테니까.”

세계 축구 역사를 통틀어도 성배는 파올로 말디니, 지아신토 파케티, 니우통 산투스, 호베르투 카를로스, 루드 크롤 등 역사적인 선수들과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레프트백이었다.

게다가 맨체스터 시티에서 성배의 위상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그런 성배를 대체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쉬가 알아서 할 일이지.’

하지만 그건 성배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키그부가 성배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대체해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맨시티는 충분히 대체자를 구할 수 있는 클럽이었다.

뒷일은 남아있는 자들이 알아서 할 것이었다.

이것이 완전한 끝은 아니겠지만, 성배와 맨체스터 시티의 인연은 잠정적인 휴식을 고했다.

“수고했어, 그동안. 이제 한동안은 좀 편히 쉬라고. 그동안 너무 고생했으니까.”

“고마워요, 파트리크.”

비에이라 감독이 가장 먼저 성배에게 다가와 포옹해주어며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해주었다.

성배의 프리미어리그 경력은 이렇게 끝났다.

< 낭만필드 - 354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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